예수 나를 위하여(고난주간 첫주간)
종려주일이자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한 주간이 시작됩니다. 이 고난주간에는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채찍의 아픔과 가시 면류관의 고통과 침 뱉음과 옷 벗김의 치욕과 손과 발과 옆구리에 못 박힘과 창 찔림을 당하는 고통을 생각하며 주님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경건하게 생활하는 한 주간입니다. 그래서 찬송가도 고난에 맞추어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를 택하였습니다. 오늘도 찬송가를 통한 하나님의 귀하신 깨달음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이 찬송가를 쓴 작시자 홰니 제인 크로스비(F. J.Crosby,18
20-1915) 여사는 미국 태생의 여성으로서 출생한지 6주만에 의사의 실수로 말미암아 두 눈을 잃어버린 불행한 여자입니다. 그러나 크로스비 여사는 자기의 불행을 비관하지 아니하고 신앙으로 자신의 불행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건강한 눈을 가진 사람이 잘 내다볼 수 없는 깊은 내면의 세계를 신앙의 눈을 가지고 아름답게 바라보며 주옥같은 찬양 시를 8000여편이나 썼습니다. 그녀의 작품 대부분은 이 세상에서 소외당하고 멸시 당하며 고통 당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소망을 주는 내용으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배울 144장의 찬송 역시 이 세상에서 죄 값으로 인하여 영원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또 십자가에 대속물로 돌아가게 하시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피와 같이 붉은 죄라 할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사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구원함을 얻어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찬송 시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찬송은 커다란 기계공장을 운영하며 약2,200편에 달하는 많은 찬송 곡을 만든 윌리엄 하워드 돈(W. H. Doane;1832-1915)박사가 먼저 찬송가 가사를 만들고 크로스비 여사에게 작시를 부탁하여 1868년에 만들어진 찬송가입니다.
1절)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찬송가 1절과 2절 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고통을 감당하신 이유에 대하여 밝히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나와 세상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자기의 형상을 쫓아 선하고 아름답게 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짖게 되었습니다. 이 죄는 사람의 몸에 죽음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죄와 죽음은 지금까지 전가되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원죄입니다.
성경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씀처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의 몸을 입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구원을 줄자도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사도행전 4장 12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죽음과 죄악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쫓아 지음을 받은 인간들이 죄와 죽음에서 멸망치 않고 구원함을 받아 영생(永生)에 이룰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구세주로 보내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빌립보서 2장 6절과 8절에 있는 대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니 하나님과 동등 됨으로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과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종의 형체와 사람의 모양을 가지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서 5장 12절에 있는 것처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름과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 사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초를 기쁨으로 지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로구리양 왕이 풍기 문란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하여 칙령을 내리기를, 누구든지 간음을 한 자는 용서 없이 두 눈을 뽑는다는 것입니다. 이 법령 시행 즉시 왕의 사랑하는 외아들이 이 법령을 범했습니다.
이때 아버지 왕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나라의 법을 지키는 마음으로 아들의 눈 하나를 뽑고 왕인 아버지의 눈을 하나 뽑음으로 백성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지게 함으로 인간의 죄악을 대신하셨고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때로 장미처럼 향기롭고 꿀처럼 달기도 하고 보화처럼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때로는 십자가처럼 괴롭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합니다.
구약의 예언자 호세아는 사랑하는 아내 때문에 창자를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겪은 사람입니다. 부정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아내를 버리지 못하는 사랑으로 그 아내의 몸값을 치르면서 그를 사랑하는 아내로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골짜기가 깊으면 거기에 햇빛이 더 많이 필요하듯이 아내의 부정이라도 용서하고 또 깊이 사랑하게 된 것은 자기의 아내였기 때문입니다(호 2 : 14, 3 : 11)
수치와 창피를 무릅쓰고 스스로 가시밭을 걸으면서 사랑하셨던 주님은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참 사랑이신 것입니다.
아씨시의 성자 프렌치스코는 이 십자가를 깊이 깨달은 뒤에 모든 가산을 다 팔아서 구제사업을 하고 일생을 주님 위해 바친 유명한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기도 드리기를, "주 예수님, 제가 죽기 전에 꼭 두 가지의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저로 하여금 육체와 영혼이 괴로움을 겪어 십자가를 체험하게 하옵시고, 둘째는 주님이 그토록 우리 죄인을 위하여 지불하셨던 그 뜨거운 사랑을 내 마음에 간직할 수 있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절망과 죽음에서 우리의 영혼을 건지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당하셨습니다.
셋째: 「우리를 하나님 안에 거룩케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목적은 우리로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5-16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찌어다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즉 마땅히 자녀들 된 우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한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입니다. (딤후 1:9) 만일 주께서 우리의 행위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고 부르신다면 이 세상에서 구원함의 부름을 받을 자가 몇 사람이나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히브리서 10장 4절부터 14절의 말씀에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5)" 이 뜻을 쫓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재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12-14)"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온전케 되는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골 3:12-14)
2절) 십자가를 지심은 무슨 죄가 있나
저 무지한 사람들 메시야 죽였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마태복음 27장 15∼26절에 보면은 「예수님과 바라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라바는 살인강도죄를 지고 장차 사형되어질 사형수로 옥에 갇혀 있는 자였습니다. 그런 반면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서기관과 장로들, 그리고 그들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에게 끌러서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되었습니다. 빌라도는 당시 로마의 총독으로서 팔레스틴-즉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법에는 일반재판은 유대인들이 자체적으로 할 수 있었으나, 사형선고만은 총독의 권한에 두었기 때문에 총독인 빌라도에게 예수를 끌고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해 보았지만 그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지도자들은 군중들을 충동질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칩니다. 빌라도의 처지가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빌라도의 머리를 스쳐 가는 기막힌 생각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월절에는 총독의 권한으로 사형수 한 사람을 특별 사면할 수가 있었는데 이때에 예수를 놓아주자고 이야기하면 되겠구나! 생각하고 「예수님과 바라바 」를 군중들 앞에 세워 놓고 "여러분! 이 두 사람 중에 누구를 놓아줄까요? '바라바냐? 예수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군중들의 입에서는 무서운 살인 강도범인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시키라는 함성이 쏟아졌습니다. 빌라도는 군중들의 외침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다시 군중들에게 묻습니다. "예수가 죽을 만한 죄가 없는데 왜 그러느냐? 바라바냐 예수냐?" 그러나 군중들은 계속해서 '바라바'라고 외쳤습니다.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바라바냐? 예수냐?" 고 물었지만 역시 동일하게 '바라바' 였습니다. ]
빌라도는 할 수 없이 무고한 예수님을 향해 결국 사형을 선포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은 골고다 십자가에 내어준바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버리고 살인마 바라바를 택한 유대군중들의 불의와 타락과 양심의 썩은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떤 마음을 갖게 됩니까?
진리와 비 진리와의 싸움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비슷한 것 같지만 메시아 관해서는 전혀 다릅니다. 아울러 유대인들은 정치적 메시야를 기달렸지 영적인 메시아를 기달리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자신의 목적과 축복의 수단으로만 받아드리고 그렇지 않으면 배격하는 잘못된 교리와 가치관에 빠져 살았던 것입니다. 아직도 이 땅에 이단들이 득실거리는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제자들중에 한 사람 가롯 유다도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아니하고" 예수를 사회운동가, 자선사업가, 혁명가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를 배반하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꼭 은 30이 욕심이 나서만 아닙니다. 예수를 3년이나 따라다녀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혁명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유다는 실망과 두려움 속에서 예수를 배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를 누구로 보느냐? 예수를 구원자로 보느냐 윤리가로 보느냐? 여기에 따라서 사람이 예수의 주변에 있었지만 예수를 택할 수도 있고 바라바를 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철학이나 윤리를 논한 선생으로 본다면 십자가는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도리어 어리석은 죽음일 뿐인 것입니다. 예수를 스승이나 혁명가로 본다면, 부활도 사실이 아니라, 정신적이요, 상징적인 것일 뿐입니다. 물론 기도와 예배의 대상이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못 알면은 유다와 같이 실망을 느끼고 바라바를 선택한 군중과 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는 베드로의 답변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아주 기뻐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니라. 내가 너의 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5-18) 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는 누구입니까? 그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상함은, 그 하나님의 아들이 찔림은, 그 하나님의 아들이 채찍에 맞음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요, 죄가 있어서가 아니며, 마귀가 이겨서가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 하나님의 아들이 찔렸으며, 죽었으며, 고난을 당해야했습니까?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600년 전에 예언을 했습니다.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예수는, 그리스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믿음으로 교회를 나온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저를 이기지 못합니다. 이 고난주간에 우리는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받아야할 죄의 값을 대신하신 주님, 내가 받아야할 형벌을 대신 받으신 주님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의 인생은 사죄의 감격과 모든 운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3절) 피와 같이 붉은 죄 없는 이가 없네
십자가의 공로로 눈과 같이 되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3절과 4절에서는 죄 사함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십자가의 공로뿐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는 「십자가의 공로」와 4절에서는 「좋은 친구」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죄 사함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오직 십자가의 공로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없이하기 위해 비누로 손을 씻고 목욕탕에서 온몸을 깨끗하게 씻었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놓은 유대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이 억울하게 고소를 당하고 있음을 깨닫고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 놓고 손을 씻으며 말하기를
"내가 이 사람을 너희들에게 넘겨주어 죽게 된다 할지라도 나는 이 사람에 대하여 무죄하다. 이것은 순전히 너희들의 모함이다. 그러니 너희가 당하라."(마27:24) 하며 손을 씻지만 그 죄는 사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피와 같이 붉은 우리의 죄는 죄 없으신 예수님의 보혈의 피 흘림만이 주홍같이 붉은 죄에서 눈과 같이 희어지게 하며 진홍같이 붉은 죄라 할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사1:18)
히브리서 9장 22절에서도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다."고 밝혔듯이 흠 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만이 우리를 피와 같이 붉은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 뿐인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의 몸을 입고 속죄양(요1:9)으로 우리의 친구(요 15:13)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것은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부터 9절에 나오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저주입니까?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죄와 죽음과 멸망과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저와 여러분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보혈의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며 구원의 주님을 소리 높여 늘찬양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들이 다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4절)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예수 공로 아니면 영원 형벌 받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
'죽마고우'(竹馬故友)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대나무로 된 말을 타고 함께 논 동네 친구를 일컫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혹시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중국 제(齊)나라의 관중(管中)과 포숙(鮑叔)사이의 아름다운 우정에서부터 나온 고사성어입니다. 관중과 포숙은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죽마고우였습니다. 두 사람이 절친한 친구였는데 특히 포숙이 관중을 더 깊이 사랑했습니다.
젊었을 때 관중은 포숙과 같이 생선 장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익금을 두 사람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져야 했지만 언제나 관중이 더 많이 집어 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관중을 욕했지만 포숙은 관중을 변호해 주었습니다. "관중이 이익금을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은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나보다 집안이 더 가난하고 딸린 식구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또한 두 사람이 함께 전쟁터에 나갔을 때 포숙은 맨 앞에 서서 열심히 싸웠지만 관중은 언제나 뒷전에서 얼쩡거리다가 싸움이 끝나면 가장 먼저 걸어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관중을 비겁자로 몰아붙일 때에도 포숙이 감싸주었습니다. "관중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그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야. 몸을 아껴 살아남아서 어머니께 길이 효도들 다하려는 효심에서 그랬던 게야."
이렇게 포숙은 관중이 여러 가지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한결같이 우정을 지켜주었습니다. 한번도 배신하지 않고 의리를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관중이 나중에 포로로 잡혀 목숨을 잃게 되었을 때에도 포숙은 그를 구해서 높은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관중보다 낮은 자리에 머무르면서 친구가 잘 되기를 빌었습니다. 결국 관중은 제나라의 유명한 재상이 되어서 나라에 큰 공헌을 할 수 있었습니다.
관중은 나중에 포숙의 눈물겨운 우정에 감동이 되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 준 것은 포숙이었다."(生我者, 父母. 知我者, 鮑叔.) 관중이 큰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포숙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밀어내고 흠집을 내려고 하는 것이 세상 인심인데, 포숙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평생 관중을 믿고 감싸주고 자기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관중과 포숙 사이에서 피어났던 아름다운 우정에서 나온 말이 '관포지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좋은 친구는 때로 부모 형제나 친척들보다 나을 때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정은 피보다 진합니다. 왜냐하면 가족들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말을 친구에게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이 나를 외면하고 버릴 때 오히려 친구는 나를 끝까지 지켜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모든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함께 나눌 좋은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인생의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 한 분을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분은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우리의 허물을 끝없는 사랑으로 덮어주시고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방황할 때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옆에서 지켜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다 외면하고 버려도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대신 못 박혀 죽기까지 영원한 우정과 사랑으로 마지막까지 나를 값없이 사랑해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제 아무리 좋은 친구를 많이 가졌다고 해도 그 친구들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연약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때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섭섭하게 만들고 배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친구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질 바로 그 때에도 여전히 우리를 지탱해주십니다. 우리가 웃을 때 함께 웃어주시고 우리가 울 때 함께 울어주시는 예수님, 이 보다 더 좋은 친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려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우정이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쌍방관계입니다. 좋은 우정은 짝사랑이 아니라 양자간의 사랑입니다. 허물이 많아서 도저히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없는 우리들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친구 삼아 주셨습니다. 만일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전달받고서도 우리 쪽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참된 우정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에 비하면 백만 분의 일, 아니 천만 분의 일도 안되겠지만 예수님의 우정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지만 예수님의 우정에 응답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5장12-14절에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이 주신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친구 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까지도 버리셨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이웃과 형제를 사랑할 때 예수님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믿지 않는 이웃과 형제들을 위하여 죽기까지 헌신하며 봉사할 때 우리는 주님과 영원한 친구가 되어 마지막날 천국보좌 앞에서 정답게 포옹하며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축복과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나타날 수 있도록 오늘도 십자가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과 형제들에게 증거하며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 우리 모두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구원하사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시기 위하여 지신 십자가의 공로와 고통을 생각하며 그 큰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를 예수를 위하여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고 쫓아가는 늘찬양교회 성도 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종려주일이자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한 주간이 시작됩니다. 이 고난주간에는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채찍의 아픔과 가시 면류관의 고통과 침 뱉음과 옷 벗김의 치욕과 손과 발과 옆구리에 못 박힘과 창 찔림을 당하는 고통을 생각하며 주님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경건하게 생활하는 한 주간입니다. 그래서 찬송가도 고난에 맞추어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를 택하였습니다. 오늘도 찬송가를 통한 하나님의 귀하신 깨달음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이 찬송가를 쓴 작시자 홰니 제인 크로스비(F. J.Crosby,18
20-1915) 여사는 미국 태생의 여성으로서 출생한지 6주만에 의사의 실수로 말미암아 두 눈을 잃어버린 불행한 여자입니다. 그러나 크로스비 여사는 자기의 불행을 비관하지 아니하고 신앙으로 자신의 불행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건강한 눈을 가진 사람이 잘 내다볼 수 없는 깊은 내면의 세계를 신앙의 눈을 가지고 아름답게 바라보며 주옥같은 찬양 시를 8000여편이나 썼습니다. 그녀의 작품 대부분은 이 세상에서 소외당하고 멸시 당하며 고통 당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소망을 주는 내용으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배울 144장의 찬송 역시 이 세상에서 죄 값으로 인하여 영원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또 십자가에 대속물로 돌아가게 하시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피와 같이 붉은 죄라 할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사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구원함을 얻어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찬송 시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찬송은 커다란 기계공장을 운영하며 약2,200편에 달하는 많은 찬송 곡을 만든 윌리엄 하워드 돈(W. H. Doane;1832-1915)박사가 먼저 찬송가 가사를 만들고 크로스비 여사에게 작시를 부탁하여 1868년에 만들어진 찬송가입니다.
1절)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찬송가 1절과 2절 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고통을 감당하신 이유에 대하여 밝히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나와 세상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자기의 형상을 쫓아 선하고 아름답게 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짖게 되었습니다. 이 죄는 사람의 몸에 죽음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죄와 죽음은 지금까지 전가되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원죄입니다.
성경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씀처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의 몸을 입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구원을 줄자도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사도행전 4장 12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죽음과 죄악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쫓아 지음을 받은 인간들이 죄와 죽음에서 멸망치 않고 구원함을 받아 영생(永生)에 이룰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구세주로 보내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빌립보서 2장 6절과 8절에 있는 대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니 하나님과 동등 됨으로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과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종의 형체와 사람의 모양을 가지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서 5장 12절에 있는 것처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름과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 사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초를 기쁨으로 지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로구리양 왕이 풍기 문란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하여 칙령을 내리기를, 누구든지 간음을 한 자는 용서 없이 두 눈을 뽑는다는 것입니다. 이 법령 시행 즉시 왕의 사랑하는 외아들이 이 법령을 범했습니다.
이때 아버지 왕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나라의 법을 지키는 마음으로 아들의 눈 하나를 뽑고 왕인 아버지의 눈을 하나 뽑음으로 백성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지게 함으로 인간의 죄악을 대신하셨고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때로 장미처럼 향기롭고 꿀처럼 달기도 하고 보화처럼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때로는 십자가처럼 괴롭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합니다.
구약의 예언자 호세아는 사랑하는 아내 때문에 창자를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겪은 사람입니다. 부정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아내를 버리지 못하는 사랑으로 그 아내의 몸값을 치르면서 그를 사랑하는 아내로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골짜기가 깊으면 거기에 햇빛이 더 많이 필요하듯이 아내의 부정이라도 용서하고 또 깊이 사랑하게 된 것은 자기의 아내였기 때문입니다(호 2 : 14, 3 : 11)
수치와 창피를 무릅쓰고 스스로 가시밭을 걸으면서 사랑하셨던 주님은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참 사랑이신 것입니다.
아씨시의 성자 프렌치스코는 이 십자가를 깊이 깨달은 뒤에 모든 가산을 다 팔아서 구제사업을 하고 일생을 주님 위해 바친 유명한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기도 드리기를, "주 예수님, 제가 죽기 전에 꼭 두 가지의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저로 하여금 육체와 영혼이 괴로움을 겪어 십자가를 체험하게 하옵시고, 둘째는 주님이 그토록 우리 죄인을 위하여 지불하셨던 그 뜨거운 사랑을 내 마음에 간직할 수 있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절망과 죽음에서 우리의 영혼을 건지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당하셨습니다.
셋째: 「우리를 하나님 안에 거룩케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목적은 우리로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5-16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찌어다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즉 마땅히 자녀들 된 우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한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입니다. (딤후 1:9) 만일 주께서 우리의 행위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고 부르신다면 이 세상에서 구원함의 부름을 받을 자가 몇 사람이나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히브리서 10장 4절부터 14절의 말씀에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5)" 이 뜻을 쫓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재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12-14)"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온전케 되는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골 3:12-14)
2절) 십자가를 지심은 무슨 죄가 있나
저 무지한 사람들 메시야 죽였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마태복음 27장 15∼26절에 보면은 「예수님과 바라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라바는 살인강도죄를 지고 장차 사형되어질 사형수로 옥에 갇혀 있는 자였습니다. 그런 반면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서기관과 장로들, 그리고 그들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에게 끌러서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되었습니다. 빌라도는 당시 로마의 총독으로서 팔레스틴-즉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법에는 일반재판은 유대인들이 자체적으로 할 수 있었으나, 사형선고만은 총독의 권한에 두었기 때문에 총독인 빌라도에게 예수를 끌고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해 보았지만 그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지도자들은 군중들을 충동질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칩니다. 빌라도의 처지가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빌라도의 머리를 스쳐 가는 기막힌 생각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월절에는 총독의 권한으로 사형수 한 사람을 특별 사면할 수가 있었는데 이때에 예수를 놓아주자고 이야기하면 되겠구나! 생각하고 「예수님과 바라바 」를 군중들 앞에 세워 놓고 "여러분! 이 두 사람 중에 누구를 놓아줄까요? '바라바냐? 예수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군중들의 입에서는 무서운 살인 강도범인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시키라는 함성이 쏟아졌습니다. 빌라도는 군중들의 외침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다시 군중들에게 묻습니다. "예수가 죽을 만한 죄가 없는데 왜 그러느냐? 바라바냐 예수냐?" 그러나 군중들은 계속해서 '바라바'라고 외쳤습니다.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바라바냐? 예수냐?" 고 물었지만 역시 동일하게 '바라바' 였습니다. ]
빌라도는 할 수 없이 무고한 예수님을 향해 결국 사형을 선포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은 골고다 십자가에 내어준바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버리고 살인마 바라바를 택한 유대군중들의 불의와 타락과 양심의 썩은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떤 마음을 갖게 됩니까?
진리와 비 진리와의 싸움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비슷한 것 같지만 메시아 관해서는 전혀 다릅니다. 아울러 유대인들은 정치적 메시야를 기달렸지 영적인 메시아를 기달리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자신의 목적과 축복의 수단으로만 받아드리고 그렇지 않으면 배격하는 잘못된 교리와 가치관에 빠져 살았던 것입니다. 아직도 이 땅에 이단들이 득실거리는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제자들중에 한 사람 가롯 유다도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아니하고" 예수를 사회운동가, 자선사업가, 혁명가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를 배반하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꼭 은 30이 욕심이 나서만 아닙니다. 예수를 3년이나 따라다녀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혁명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유다는 실망과 두려움 속에서 예수를 배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를 누구로 보느냐? 예수를 구원자로 보느냐 윤리가로 보느냐? 여기에 따라서 사람이 예수의 주변에 있었지만 예수를 택할 수도 있고 바라바를 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철학이나 윤리를 논한 선생으로 본다면 십자가는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도리어 어리석은 죽음일 뿐인 것입니다. 예수를 스승이나 혁명가로 본다면, 부활도 사실이 아니라, 정신적이요, 상징적인 것일 뿐입니다. 물론 기도와 예배의 대상이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못 알면은 유다와 같이 실망을 느끼고 바라바를 선택한 군중과 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는 베드로의 답변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아주 기뻐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니라. 내가 너의 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5-18) 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는 누구입니까? 그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상함은, 그 하나님의 아들이 찔림은, 그 하나님의 아들이 채찍에 맞음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요, 죄가 있어서가 아니며, 마귀가 이겨서가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 하나님의 아들이 찔렸으며, 죽었으며, 고난을 당해야했습니까?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600년 전에 예언을 했습니다.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예수는, 그리스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믿음으로 교회를 나온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저를 이기지 못합니다. 이 고난주간에 우리는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받아야할 죄의 값을 대신하신 주님, 내가 받아야할 형벌을 대신 받으신 주님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의 인생은 사죄의 감격과 모든 운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3절) 피와 같이 붉은 죄 없는 이가 없네
십자가의 공로로 눈과 같이 되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3절과 4절에서는 죄 사함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십자가의 공로뿐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는 「십자가의 공로」와 4절에서는 「좋은 친구」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죄 사함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오직 십자가의 공로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없이하기 위해 비누로 손을 씻고 목욕탕에서 온몸을 깨끗하게 씻었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놓은 유대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이 억울하게 고소를 당하고 있음을 깨닫고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 놓고 손을 씻으며 말하기를
"내가 이 사람을 너희들에게 넘겨주어 죽게 된다 할지라도 나는 이 사람에 대하여 무죄하다. 이것은 순전히 너희들의 모함이다. 그러니 너희가 당하라."(마27:24) 하며 손을 씻지만 그 죄는 사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피와 같이 붉은 우리의 죄는 죄 없으신 예수님의 보혈의 피 흘림만이 주홍같이 붉은 죄에서 눈과 같이 희어지게 하며 진홍같이 붉은 죄라 할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사1:18)
히브리서 9장 22절에서도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다."고 밝혔듯이 흠 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만이 우리를 피와 같이 붉은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 뿐인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의 몸을 입고 속죄양(요1:9)으로 우리의 친구(요 15:13)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것은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부터 9절에 나오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저주입니까?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죄와 죽음과 멸망과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저와 여러분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보혈의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며 구원의 주님을 소리 높여 늘찬양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들이 다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4절)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예수 공로 아니면 영원 형벌 받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
'죽마고우'(竹馬故友)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대나무로 된 말을 타고 함께 논 동네 친구를 일컫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혹시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중국 제(齊)나라의 관중(管中)과 포숙(鮑叔)사이의 아름다운 우정에서부터 나온 고사성어입니다. 관중과 포숙은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죽마고우였습니다. 두 사람이 절친한 친구였는데 특히 포숙이 관중을 더 깊이 사랑했습니다.
젊었을 때 관중은 포숙과 같이 생선 장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익금을 두 사람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져야 했지만 언제나 관중이 더 많이 집어 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관중을 욕했지만 포숙은 관중을 변호해 주었습니다. "관중이 이익금을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은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나보다 집안이 더 가난하고 딸린 식구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또한 두 사람이 함께 전쟁터에 나갔을 때 포숙은 맨 앞에 서서 열심히 싸웠지만 관중은 언제나 뒷전에서 얼쩡거리다가 싸움이 끝나면 가장 먼저 걸어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관중을 비겁자로 몰아붙일 때에도 포숙이 감싸주었습니다. "관중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그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야. 몸을 아껴 살아남아서 어머니께 길이 효도들 다하려는 효심에서 그랬던 게야."
이렇게 포숙은 관중이 여러 가지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한결같이 우정을 지켜주었습니다. 한번도 배신하지 않고 의리를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관중이 나중에 포로로 잡혀 목숨을 잃게 되었을 때에도 포숙은 그를 구해서 높은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관중보다 낮은 자리에 머무르면서 친구가 잘 되기를 빌었습니다. 결국 관중은 제나라의 유명한 재상이 되어서 나라에 큰 공헌을 할 수 있었습니다.
관중은 나중에 포숙의 눈물겨운 우정에 감동이 되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 준 것은 포숙이었다."(生我者, 父母. 知我者, 鮑叔.) 관중이 큰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포숙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밀어내고 흠집을 내려고 하는 것이 세상 인심인데, 포숙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평생 관중을 믿고 감싸주고 자기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관중과 포숙 사이에서 피어났던 아름다운 우정에서 나온 말이 '관포지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좋은 친구는 때로 부모 형제나 친척들보다 나을 때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정은 피보다 진합니다. 왜냐하면 가족들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말을 친구에게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이 나를 외면하고 버릴 때 오히려 친구는 나를 끝까지 지켜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모든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함께 나눌 좋은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인생의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 한 분을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분은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우리의 허물을 끝없는 사랑으로 덮어주시고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방황할 때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옆에서 지켜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다 외면하고 버려도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대신 못 박혀 죽기까지 영원한 우정과 사랑으로 마지막까지 나를 값없이 사랑해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제 아무리 좋은 친구를 많이 가졌다고 해도 그 친구들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연약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때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섭섭하게 만들고 배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친구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질 바로 그 때에도 여전히 우리를 지탱해주십니다. 우리가 웃을 때 함께 웃어주시고 우리가 울 때 함께 울어주시는 예수님, 이 보다 더 좋은 친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려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우정이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쌍방관계입니다. 좋은 우정은 짝사랑이 아니라 양자간의 사랑입니다. 허물이 많아서 도저히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없는 우리들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친구 삼아 주셨습니다. 만일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전달받고서도 우리 쪽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참된 우정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에 비하면 백만 분의 일, 아니 천만 분의 일도 안되겠지만 예수님의 우정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지만 예수님의 우정에 응답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5장12-14절에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이 주신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친구 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까지도 버리셨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이웃과 형제를 사랑할 때 예수님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믿지 않는 이웃과 형제들을 위하여 죽기까지 헌신하며 봉사할 때 우리는 주님과 영원한 친구가 되어 마지막날 천국보좌 앞에서 정답게 포옹하며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축복과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나타날 수 있도록 오늘도 십자가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과 형제들에게 증거하며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 우리 모두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구원하사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시기 위하여 지신 십자가의 공로와 고통을 생각하며 그 큰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를 예수를 위하여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고 쫓아가는 늘찬양교회 성도 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인터넷로고스선교회
글쓴이 : e-nock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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