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상식 이야기!!

십일조 찬반의 여러 글 모음

하나님아들 2025. 6. 28. 23:21

십일조 찬반의 여러 글 모음

 


나두산 목사

 

Subject 십일조의 의미?

 

십일조의 의미?
 "십일조는 선악과나무다"라는 인식이 한국 교회안에는 보편화되어 있다. 십일조를 내면 복을 받고 안내면 저주를 받는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봉급을 받으면 전자 계산기를 갖다 놓고 십일조를 정확하게 계산하여 낸다고 한다. 이렇게하고는 온전한 십일조를 냈다 하여 심리적 안정감을 갖으며 축복에 대한 기대감을 갖는다고 한다.
교회가 십일조라는 본질적 의미보다는 방법론만 가르치므로서 주님께 물질을 드리는 기쁨을 감소 시켰고 신앙의 성숙을 막았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의 의미를 정리 해 봄으로서 하나님은 십일조를 통하여 무엇을 가르치시려 했는지를 안다면 한층 성숙된 신앙 생활을 할 것이다.

 

1. 구약에서 십일조의 시작 


 십일조가 시작된 것은 구약의 율법이 성문화되기 이전에 이미 아브라함 시대에도 있었다.


창세기 14:18-20절에 십일조에 대하여 처음 기록되었는데 이곳에 나타난 십일조 원리가 모태가 되어서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십일조 원리가 정립된다.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얻은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14:18-20절)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 가나안 땅에 있던 소국들이 국가간에 연합하여 전쟁하는 장면을 으로서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4개국(시날, 엘라살, 엘람, 고임)과 가나안 남부 사해지역의 5개국(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의 전쟁 기록이다.


전쟁 이유는 남부5개국이 12년동안 조공을 바치며 섬겨 오던 엘람의 맹주 그돌라오멜을 반역하여 일어났다.
전쟁 결과는 납부 5개국이 비참하게 패배하여 소돔에 살던 아브람의 조카 롯이 포로로 끌려 갔다.


그리하여 아브람은 휘하 식솔 318명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기습하여 5개국의 포로들과 롯을 구하고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올 때 살렘왕 멜기세덱이 식사 대접하며 영접하며 축복하고 아브람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준 이야기다.

 

여기서 멜기세덱은 강국이었던 북부 4개국의 군대를 훈련되지 않은 식솔318명으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람을 축복하고는 이 전쟁에서 승리 할 수 있도록 해주신 천재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고 한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거룩한 신성을 인정하며 축복을 해준 멜기세덱에게 감사의 표시와 함께 멜기세덱의 거룩한 제사장직에 순종한다는 의미를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떼어 줌으로서 마음의 표시를 한 것이다라고 메트헨리(Matthew Henry)는 말하였다.

 

아브람의 십일조를 드림에는 세 가지 원리가 들어 있다.


첫째는 자원하여 드리는 마음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의 표시이다.
셋째는 모든 물질은 하나님 것임(God s ownership)을 인정하는 표시이다.


이 세 가지 원리는 아브람의 손자 야곱이 하나님께 십일조 약속(창28:22)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나 있다.
장자의 축복권 문제로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하여 외가(外家)가 있는 밧단 아람으로 무작정 도피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찾아 오셨다.
800㎞나 되는 머나먼 도피행은 고달프고 외로운 고행 길이었다.


지치고 외로운 몸으로 벧엘 벌판에 누워서 밤하늘의 별들을 친구 삼아 잠이 들었을 때(11절) 찾아오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언약의 상속자임을 인정하시고 언약을 갱신 시켜 주시며 놀라운 비젼을 주신다.(6-15절)


이 사건을 일명 사닥다리 언약 또는 벧엘 언약이라 한다.
이에 반응으로 야곱은 깨어서 확신과 믿음에 찬 반응으로 뜨거운 감사의 서원을하며 철저한 헌신의 표시로 하나님의 전을 세우고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한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듯이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이란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제게 주실 모든 것]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므로 자기에게 어떤 것이라도 주실 수 있다는 야곱의 분명한 믿음이 들어 있고 또한 구원자이신 하니님께 자원하여 약속을 한다.

이 원리가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모세 언약의 율법에 의하여 성문화된다.

 

첫 번째 기록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레위기27:30-34절이다.
 "땅의 십분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贖)하려면 그것에 오분일을 더할 것이요,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그 우열(優劣)을 교계 하거나 바꾸지 말라 바꾸면 둘다 거룩하리니 속하지 못하리라, 이상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誡命)이니라"


이 부분은 십분 일이라는 것은 모든 만물의 대표적 의미를 말하며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그 사실을 인정하는 의미로서 십분 일은 하나님의 몫이라고 정하였다.
그러나 형편상 소산물 대신 돈으로 무를 수는 있었다.


이 경우에는 소산물의 산정 가격에다가 오분일을 덧 붙여서 내라는 것이다 이유는 하나님께 받쳐지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그것을 자신의 형편에 의하여 우지 좌지 되는 것은 남의 물건을 마음대로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인 것이다.(레6:5-6절)


소나 양을 드리는 방법은 짐승을 우리에 가두어 놓고 무작위로 한 마리씩 밖으로 내어 보내면서 막대기를 통과 할 때마다 숫자를 세었는데 열 번째마다 하나님의 것으로 분류하였다.


여기서 인위적으로 우열을 가려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금하였다.
여기서 말하려는 의도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철저한 신앙적 표시로 십분 일을 받치라고 말하고 있고 받칠 때에는 양심의 거리낌이 없는 정결한 신앙적 양심을 원하고 있다.

 

두 번째 기록은 하나님께서 십일조 규레에 대하여 민수기18:21-32절에서 좀더 자세하게 구체적 십일조의 활용에 대하여 아론과 모세에게 설명하셨다.
십일조는 레위인의 몫이다.(21-24절) 그리고 레위인이 드리는 십일조는 제사장의 몫이라고 규정하고 있다.(25-32절)

.
레위인은 야곱과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레위의 후손들로서 처음에는 제사장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후에 제사직이 아론의 후손에게만 국한 되었으므로(출28:1 ; 민18:1-7절) 제사직 다음가는 중요한 종교의식의 보좌 일을 맡는 계급이 되었다.


민3:11-13 ; 8:14:19절에서는 레위인들을 자신의 것으로 요구 하시는 장자들을 대신 하였다.
레위인들에 대하여는 다윗시대에 와서 네 계급으로 구분 되었고 또 각계급은 다시 24반으로 나누었다.


제1계급은 직접 성소에서 제사장들을 도왔고 제2계급은 재판이나 행정을 맡았고 제3계급은 성전을 지키었으며 제4계급은 성전에서 음악인과 합창대로 봉사 하였다.
그리고 성전에서 일하는 시간외에도 백성들에게 율법을 교육하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회의 대표적인 지식 계급이었다.


이들의 수는 22000명(민3:39)이었으며 이들을 위하여 종은 마을 48개를 주었다.(수21:1-8절)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이들을 특별히 취급 하신 이유는 출32:26-29에 보면 힘들고 고단한 광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밑에서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어 놓고 흥겹게 놀며 금송아지를 섬길 때 레위 사람만이 모세에게 충성 했기 때문이다.

 

십일조를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위한 분깃으로 삼는데 사용 되었지만 여기에는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은혜에 감사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도록 하기 위함이다.

 

세 번째 기록은 신14:22-29절, 26:12-15절에 보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새땅에 들어가는 새로운 세대들을 위하여 설명하고 있다.
신14:1-21절까지에서 새땅에서 살아야 할 거룩한 백성들의 구별된 삶을 요구하는 정결 규레에 대하여 말씀 하신 후에 22-29절까지는 이 백성들이 종교적 의무에 해당하는 십일조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십일조는 천지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려 레위인을 봉양하고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를 가지고 생계 보장외에도 성전 기물 보수와(신12:6) 같은 일에 사용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22-27절까지는 보통때의 십일조에 관한 내용이고 28,29절은 안식년을 기준으로 제3년과 6년 째의 십일조에 관한 규레로 일명 제2의 십일조라 부른다.
즉 제2의 십일조란? 제1십일조을 받친 나머지 소득에서 다시 십일조을 떼어 감사와 축제일에 사용하기 위한 십일조를 말하며 또한 제2 십일조는 안식년을 기준으로 매3년과 6년째에는 감사 축제에 사용하지 않고 구제 사업에 사용 하였다.


십일조를 하나님께 받치는 것은 자신의 전존재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동시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드림으로서 자원하여 실천으로 그 사실을 인정 하는 것이다.(신26:12-15절)


이것이 십일조 속에 들어 있는 근본적인 정신이다.

십일조에 대한 용도를 간추려 보면 세가지가 있음을 알수 있다.


첫째로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민18:21-32)
둘째로 하나님 앞에서의 축제를 위한 십일조(신14:22-26절)
셋째로 가난한자들을 위한 십일조(신14:28-29, 26:12-13절)가 있다.


그러나 용도에 대한 목적은 두 번째는 하나님을 위한 십일조 요, 첫 번째와 세 번째는 사람을 위한 십일조로 나눌 수가 있다.
이렇게 사용 되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 한다는 즐거움을 외적으로 표현 하는 행위이며 언약의 공동체를 사랑 한다는 사랑의 행위가 동반 됨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레위인들에게 사용 해야 하는 이유는 상업적인 활동이 아니고 백성들을 위하여교육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므로 백성들과 레위인은 서로서로 필요한 상호 협조적인 관계이며 하나님이 세우신 규레에 의하여 주어진 직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난한자들(과부, 고아)을 위하여 사용 해야하는 이유는 비록 무력한 자들이나 공동체의 지체이기 때문에 십일조는 그들의 안녕을 보장하기 위해서이다.
이과정을 통하여 십일조 할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용도에서는 '하나님을 경외 하기를 배워야하며' 사람에 대한 용도에서 보면 '자신들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서 복을 받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이 두가지는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이다.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불순종과 죄악으로 물들어저 감에 따라 자연히 십일조의 생활이 소홀 해져 갔다.


그결과 사사시대에는 레위인들이 종종 십일조를 받지 못해서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든 일이 발생 되었고 어떤 레위인들은 다른 생계 수단을 찾으려고 배회 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우상에 연루 된일에 종사 하기도 하였다.(삿17:7-10 ; 18:18-20)


사사시대가 이렇게 영적으로 어두워져 갔고 고난이 오자 백성들은 그 이유에 대하여 자신들의 죄악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이방국과 다르게 체제의 비효율성 때문이라고 돌려 버린다.


즉 이방인들은 왕정(王政) 체제인데 자신들은 신정(神政) 체제이기 빼문이라며 사무엘에게 왕정을 요구 한다.
인본주의적이고 불신앙적인 그릇된 동기에 의한 요구에 대하여 사무엘은 '십분의일이 세금으로 왕에게 바쳐야하고 강제 노역이 부과 되며 왕의 노예가 된다'.며 경고 한다.


그들은 얼마후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왕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다가 왕정의 타락으로 왕국이 분열되고 몰락의 길로 접어 든다.
그러다가 히스기야왕때(대하31장)에 이르러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우상타파(1절)와 제사장과 레위인 반열의 정비(2-3절), 백성들에게 십일조 헌납하게 하고 공정하게 분배하였다.(4-21절)


그러나 14대왕 므낫세(대하33장)에 이르러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고 악행을 하며 오히려 이방인들 보다 죄를 더 짓게 된다.
이와 같은 배교시대에 와서는 십일조가 거의 드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선지자 말라기는 십일조 헌물을 바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한다고 질책 한다.
말라기 선지자의 질책의 의미가 십일조를 내었느냐 안 내었는냐가 축복과 저주의 관계처럼 이어지는 것 같으나 말라기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깨트려 버림으로서 화를 불러 일켰음을 상기 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소멸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함 때문이라고 역설 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자신들이 언약 관계를 깨트리지 않았다고 부인 한다.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은 부인하지 못하도록 증거를 제시하시는데 그것이 곧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 한 것이라고 말하며 너희들이 모두 저주 아래 놓여 있다.(말3:9절)라고 한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자신의 백성들에게 촉구 하기를(10절) 전적 헌신의 표시로 온전한 십일조를 가져오고 회개를 한다면 풍성한 언약의 축복을 쏟아 부어주고 언약 간계를 회복하여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말라기 3장이 주는 의미는 십일조는 축복과 저주의 개념이 아니라 회개와 전적으로 헌신하겠다는 표시인 것이다. 언약의 회복했다는 표시로 차고 넘치는 언약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조건을 말씀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구약시대의 십일조는 아브라함의 십일조에 계시 되고 모세 율법안에서 확인 된 것 처럼 자원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며 모든 물질은 하나님 것임(God s ownership)을 인정하는 표시로서 축복을 받기 위한 동기로서가 아니라 전적인 헌신의 마음으로 드려져야 한다. 그러면 언약 백성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2, 신약에서의 십일조 


 예수님은 십일조를 가르치기 위하여 말씀하신적은 없으나 복음서에는 세 번 기록 되어 있다. 눅11:42, 눅18:12절)
그러나 한결같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정죄하는 내용이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화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고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눅11:4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 기도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2절)라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교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간단한 언급은 율법에서 말하는 십일조 속에 표현 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율법에서 말하는 십일조의 참 요구를 똑바로 알지 못하고 축복을 위하여 십일조 한다든지 기계적으로 한다면 바리새인들에게 말씀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라는 말씀은 율법의 규정에 대한 시간적 제한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 시키러 오신 메시야이심을 모르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 하심으로서 새로운 언약 시대가 도래 하였고 아울러 규정된 의식적 율법이 폐기 될 것을 말씀 하신다.


그러나 마23:23절에서 말씀하신 의도는 십일조의 규정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 반영 되어져서 전적 헌신함으로 드려져야 되는데 이스라엘은 인간편에 부여된 세가지의 언약의무(covenantal responsibility)를 지키는데 실패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새언약 시대가 예수님에 의하여 도래됨에 따라 십일조 율법제도는 새로운 면모를 가지게 되었는으며 즉 십일조에 대한 율법에 표현된 본래의 의도는 유효하게 계속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제도가 예수님에 의하여 풍부하게 성취 되었으므로 신약 교회의 성도에게는 더풍성한 헌신을 요구 하신 것이다.
다시말하면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심과 부활을 맛본 신약 교회 신자들은 물질 뿐만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주님의 소유라는 확신을 가지고 무엇이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쁘게 드려야 한다.(롬14:8절)

 

구약에 대하여 풍부한 지식과 강한 유대적 배경에서 배우고 자란 바울 사도가 구약의 율법적인 십일조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이는 새언약하에서는 십일조율법의 시행적 성격이 구약과는 전혀 다름을 알수 있다.

 

 "나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백성이 될것이라"(렘31:33절)라고 말씀 하셨다. 


 "그날 후에"는 신약 시대를 예언한 말로서 그동안 아브라함(창17:7-8절)과 모세(출6:7절)에게 주신 동일한 "언약" 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피의 "언약"을 받은 모든 택한 백성들에게 예언한 말씀이다.


즉 구약에서는 율법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시여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외적으로 드러 냈으나 새로운 언약 시대인 신약 시대에는 그 율법을 직접 인간의 마음속에 나타내심으로서 율법은 삶의 내적 원리가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변화는 율법의 본질적 변화가 아니라 옛언약 시대에서 새언약 시대로 바뀜에 따라 시행적 변화로서 율법에 표현 되어 있는 대로 의식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거듭난 성도의 마음으로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 제도 역시 구약적으로 십분의 일이라는 계산 되어진 방법 대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헌신의 마음이 포함되어 있는 풍성한 십일조 정신으로 해야 한다.
이러한 신약시대의 십일조 정신으로 헌금한 내용을 서신서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전 9:13-14절에 보면 "성전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같이 주께서도 복음을 전하는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하였다.


바울은 신자들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교역자들의 생활비를 도와야 한다는 일반적인 원칙을 말하고 있다. 


 "성도들을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 고린도 교회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자기의 수입대로 얼마씩 저축하여 두었다가 주일날 교회에 가져와서 연보를 하였다.

 

로마서15:26절에서도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중 가난한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 하였음이라"하였다.
이러한 연보에 대하여 "저희가 기뻐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빗진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누어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였다.

 

고후8:1-9절에서도 마게도냐 교회를 소개하고 있는데 "환란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중지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이 지나도록 자원하여(2-3절)"라고 하였다.


극심한 어려움중에서도 자원하여 구제활동을 할수 있었던 것은 풍성한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새언약 시대에 사는 성도는 이와같이 구속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표준이 되어 연보 해야 한다. 이것이 신약시대의 십일조 정신이다.
그러므로 십분의 일이라는 숫자적 제한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은혜에 감사하며 전적으로 헌신하는 표시로 자신의 능력에 지나치도록 헌금 하였다.
이사실을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소개하며 주님께서 주신 풍성한 축복을 상기 시키며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 사랑의 신실성을 보이라고 촉구 한다.(고후8:7-9절)


왜냐하면 예수님은 새언약의 참여자에게 새언약의 모든 축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일조의 본질은 '연보' 속에 담겨 있으며 주안에서 구속의 은혜를 맛본 기독교인은 전적으로 "나누어 주는 철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모든 교회가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바울사도는 이와같은 헌신과 봉사를 '새언약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체계적이고 균형있게 해야한다'(고전6:2절)와 동시에 '자원함과 즐거운 마음으로'(고후9:7절)햐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맨소래담 이라는 약을 발명한 하이드는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는 성도 였다.
그는 처음 그약을 팔기 시작 할 때는 이익중에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쳤다.


그후 사업이 잘되어 번창하자 그다음은 10분의 3을 드리는등 계속하여 액수를 늘려 가다가 나중에는 10분의9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는10분의1도 생활에 필요한 돈외에는 공장에서 일하는 직어원들의 후생 복지를 위하여 썼다.


그의 마음과 삶은 참으로 하나님께 복받은 사람이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를 잘아는 참 신자 이다.
물질의 주인이 누구이며 삶의 주관자가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은 매우 복있는 인생이다 


 신약시대에 사는 성도의 십일조 정신은 전적으로 헌신과 은혜에 감사의 표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대로 "각각 그마음에 정한대로 할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라는 말씀대로

실행해야 할 것이다

 

 

Name 김인찬

 

Subject 십일조에 대한 것(짧은 글 추가)


예수께서 가르친 내용에서 십일조가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가 죽기 전에는 십일조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절기나 기타의 것들이 그대로 서 있었던 상태였다.
이러한 질서를 예수 자신이 죽기 전에 전면 거부한 것은 아니다.

십일조를 예수께서 거론하였다고 시행한다면 당시의 유대인들의 모든 것들을 지켜야 되는 것이 오류가 발생한다.

 

오히려 신약시대의 교회와 그 이전으로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안식일에 대한 본질적인 논쟁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나타난 것임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율법이 있기 전에 십일조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이다.

율법이 있기 전에 십일조가 있었다는 것으로 십일조를 합리화 시키려 한다면 신약시대에도 율법이 없어진 것이 아닌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신약시대인 지금도 율법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이다.

즉 신약시대에는 율법과 은혜가 공존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 안에 있지 않고 은혜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일조가 율법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율법밖에 있는 새로운 은혜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이며 이들은 율법의 제도에 의해서 사는 자가 결코 될 수 없다.

 


Name 이석봉

 

Subject 십일조는 신앙고백적인 문제

 십일조를 반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반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구 신앙의 영향을 받았거나 서구 교회를 예로 들고 율법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율법적인 차원에서 풀 것이 아니요 서구 교회의 해석이나 상황을 따를 일도 아닙니다. 십일조란 본래적 의미가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신앙 고백적인 의미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신앙고백입니다.

 


죄에서 구원받도록 독생 성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 모든 만물을 다스리도록 만물의 영장의 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를 따라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모든 은혜를 감사하면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했던 구약 성도들의 모본을 받들어 실천하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호주 멜버른(Melbourne) 근처 워락나빌(Warracnabeal)에서 호주인을 상대로 목회를 하는 조카 목사가 휴가차 와서 우리 집에 들렸습니다. 조카는 호주 외국인 교회에서의 목회담을 들려주었습니다.

 

첫째는 언어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카 목사는 케임브리지 영어를 공부하고 호주에 갔기에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는데 미국식 영어를 선호하는 호주인들에게 인기라고 합니다.

그것은 호주인들이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지성적이고 품위 있게 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십일조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카 목사가 목회 하는 교인은 200명인데 대부분이 거대한 농장을 경영하는 부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카 목사는 한국에서 하던 신앙대로 십일조를 하며 순수한 한국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서구 목회에 동화되지 않고 한국 목회자의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설교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어식 설교는 예화가 주를 이루지만 조카 목사는 오직 성경 본문을 가지고 본문 설교에 주력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인이 영어로 설교하는 것이 쉽지는 않아서 한국식 영어를 구사하게 되는데도 오히려 매력이 되고 은혜를 받는 것을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넷째는 눈물의 목회라고 하였습니다.
40대 젊은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도 울고 찬송을 부르면서도 울고 기도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우는 모습을 호주 교인들이 보면서 진정한 목회자임을 인정하고 따르며 협조한다고 하였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있고 성령님의 감화 감동을 사모하는 자세로 할 때 동양인 목사를 서양인 목사보다 더 좋아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님의 성경 해석은 구원의 감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정, 선택, 중생, 구원, 성화가 그것이요 마음의 할례, 세례가 그것이며 헌금과 주일 예배가 그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십일조가 문제가 아닙니다. 미국의 라크펠러(John D. Rockefeller)는 십의 7.8조는 물론 십의 9조까지도 드렸다고 합니다. 율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신앙 고백으로 드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위기 중의 하나는 선진들이 본으로 보여주었던 경건한 신앙을 인본주의적인 해석을 동원하여 파괴하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무슨 신학을 논하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격으로 신앙생활을 하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감격하는 성도라면 어떻게 더 드리며 섬길까에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그 드림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논할 때 무엇을 가지고 논하든지 그 목적이 신앙 고백에서 나온 것이냐 아니면 신학적인 이론에서 나온 것이냐 그것도 아니면 어떤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냐를 생각하고 전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앙고백, 그것은 이론과 형식을 초월하는 감격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호주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십일조를 드리며 목회하는 조카 목사님의 신앙은 모범된 신앙이며 가장 아름다운 감격의 신앙입니다.

 


Name 김형희

 

Subject 십일조는일점일획 폐지되지않습니다..

 

님의 글에 문제가 너무도 많아 그중에 하나를 지적한 것입니다.

만약에 님이 십일조를 하지 않는 기독교 국가에 태어 났다면 님은 십일조에 대한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만약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십일조를 문자 그 자체가 아닌 영적인 뜻으로 이해하는 날이 온다면 그리하여 모든 나라 사람들이 십일조를 의무규정에서 없앤다면 님은 그래도 끝까지 님의 주장을 고수하시렵니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십일조는 폐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 쓰인 십일조라는 것은 폐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명령하신 의와 인과 신이 함께 하는 완전한 십일조를 지키라는 말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베리타스님이 진정 의와 인과 신이 함께한 십일조를 할 수있거든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십일조가 될것입니다. 허나 이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바로 주님만이 하실 수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의와인과 신이 함께한 십일조를 하지 않는한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라고 전하십시요.. 허나 님이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서 그말을 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란 자기가 인지하는 사실 외에는 말을 할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간혹가다 자신이 느껴보지도 못하면서 단지 남의 한 이야기가 그럴듯해 보인다는 이유로 동조하며 자신이 깨달은 것처럼 말하는 자가 종종 있기도 합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오직 주예수님밖에 할 수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래는 베리타스님이 예전에 쓴 글입니다.

 

썩고 부패한 것을 고치는 것이 관건이지 십일조를 폐지하는 것이 관건이^아니다.

그것은 감정이 앞선 나머지 영역상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또 한가지, 십일조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12지파, 12사도... 왜 꼭 12명인가?
안식일이 왜 일곱째 날인가? 열흘만에 안식할 수는 없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에 그것이 가장 좋은 줄 알고 그렇게 지키는 것이다.

수입의 십분의 일이 아니라, 칠분의 일 또는 십이분의 일을 드릴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십일조를 명령하셨다.

간혹 십의 십조를 이야기하는데 말장난이다. 십의 십조는 없다. 그것은 인간을 너무 모르고 하는 말이다.

십일조만 잘해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그게 우리 인간의 한계며 우리는 겸손히 그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Name 김형희

 

Subject 십일조의 우상에 사로잡힌 교인들...


목사들은 말라기서를 인용하여 십일조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이런 목사들은 사실 말라기서의 의미나 뜻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다.

말라기서는 성경의 전체에 들어있는 핵심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하는 내용이다.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전에 이르노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즉 예수님이 오셔야만 더러운 십일조의 멍에에서 겨우 벗어날 수잇다는 것을 증거 하는것이다.

김동호 목사님이 예로 들은 " 너희 곧 온나라가 나의것을 도적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3장9절]

 

이말은 곧 모든 인간은 도적이라는 결론을 지적해 주시는 것이다.

곧 주님이 오셔야만 인간이 그 더러운 도덕질을 하고도 저주에서 풀려날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이 임한 자는 천사로 가변될까? 그것은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이다. 육신의 옷을 입고 천사처럼 살 수있는 자는 없다.

천사가 아니라면 도적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 모든 인간은 도적같은 마음으로 일생을 산다.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나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나 하나같이 자기의 영달과 자기의 가족 자기의 안일을 가장 먼저 생각하며 사는 더러운 존재들이다. 말라기서의 온전한 십일조를 할 수있다는 말은 바로 주님의 은혜로 인간들이 숨을 쉴 수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의 피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보여주고 가르치는 복음이건만 그 뜻을 모르고 단순히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아니면 말아야 하는가로 설왕설래 하고 있으니 이들

모두가 문자의 그들에 사로잡혀 사는 자들이 아닐 수 없도다.

 

주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온전한 십일조를 하라고 요구 하신다. 십의 십조를 다 바쳐서 살라고 하신다. 십일조로 만족하려는 자에게 너의 상은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애통해 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받은 은혜는 차고 넘치건만 하루 온종일 나의 육신을 위해 애쓰는 몰골로 살다가 욕심가득한 마음으로 벌은 돈을 하나님께 바쳐놓고 " 나는 십일조를 지키지 않는 자들과는 다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느니 참으로 기독인들의 교만은 하늘을 찌르는 것이다.


하기사 자신의 죄가 진정 느껴진다면 무슨 염치로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말을 할 수잇을까? 여유가 되니 십일조는 할 수있고 십구조는 부담이 되서 못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여유가 없어 십일조를 못하는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


십일조의 의미는 바로 모든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는 결코 의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치료하는 광선이 나와서 더러운 인간을 송아지

같이 뛰게 만들 수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말4장2절]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수있다고 말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설교하는 목사가 있다는 것은 그가 아직도 복음의 뜻을 전혀 깨달아 지지 못한 사울과 같은 자라고 볼 수잇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일조가 교회와 목사의 배만 비대하게 만들뿐 고아와 과부에게는 손톱만큼도 도움이 안되는 우상이라고 말한 것이다. 배가고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지 않고 주일을 지켜라 십일조를 지켜라 하고 설교하는 거짓 제사장과 목사들에게 그 잘못을 깨우치라고 하기 위해 한번 온전한 십일조를 지켜보라고 말씀 하셨건만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이웃은 방관한채 교회당과 목사의 배만 성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나는 십일조를 잘합니다.그러니 축복해 주시옵서서! 라고 자기의 행위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아무 의미도 없이 자발적으로 행하였다면 그는 결코 그의 입에서 십일조를 지켜야 합니다 라고 남에게 주장하지 못한다..

의와 인과 신이 없는 십일조는 마귀의 십일조일 뿐이다.

 


Name 김인찬

 

Subject 십일조 신학 전격 공개

 (율법 안에 있는 십일조와 은혜 안에 있는 헌금)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적인 요소였다. 이를 부정할 수 있는 학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에 근거하여 신약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분명한 성경적 근거를 내 놓고 시행해야한다.
십일조가 헌금이라는 주장은 어떤 변명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약시대에서 영적으로 승화시켜서 십일조를 드린다는 주장을 하려면 구약의 절기도 영적으로 승화시켜서 믿음으로 지키고 헌금을 드려야 된다는 주장을 해야 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구약시대에 짐승으로 제사를 드린 것도 승화시켜서 신약시대에서도 짐승으로 제사 드리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제사 드리면 문제없다는 무지한 주장과 같다.
구약시대에는 십일조가 의무였다. 이것은 율법적 헌금이라는 것이며 신약에서 주장되는 헌금은 의무가 아닌 믿음의 표현이며 자원과 기쁨으로 드리는 원리가 정당하게 주장되고 있다. 성경에 명백히 나타난 증거가 있으며 이는 십일조가 초대교회에서 주장되지 않고 그 어디에도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히브리서에는 구약의 각종 절기와 월삭이나 안식일과 기타의 것 등이 지나간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도가 헌금을 드리는 것은 누구의 강요나 제도가 아닌 감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뿐이다. 의무는 더 이상 헌금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며 누구도 헌금의 액수가 정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십일조는 구약에서 율법적 의식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십일조가 신약의 헌금이 되려면 율법을 지켜야 되는 정당성을 신약의 초대교회와 그 말씀에서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십일조가 드려졌다는 주장을 합리화시키려 한다면 율법이 있기 전에도 제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율법이 있기 전에는 율법과 같은 기능을 양심이 한 시대이다. 양심이 율법과 같은 기능을 한 것이다. 십일조는 더 이상 헌금이 아닌 것이다.

이미 초대교회에도 없었던 십일조가 헌금이 되어지는 것은 한국교회의 율법적인 적용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다.


헌금은 자원해서 드리고 믿음으로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헌금은 자원으로 드리는 것에서 어떤 규제나 그리고 강제성이 없이 드려져야 하나님이 원하는 헌금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헌금을 드리면서 자유롭게 드릴 자유가 있다. 이는 우리의 믿음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누구도 헌금에 대해서 강요할 수 없다. 그가 결정하는 순수한 헌금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헌금의 강조는 개인의 믿음보다도 교회의 목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교회의 건축이나 기타 물건을 사는 것 등이다.

 

이러한 잘못된 헌금관은 한국교회가 부를 축적했으나 참 신앙으로 헌신하는 삶이 사라진 원인이 된 것이다. 헌금의 목적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에 작정을 시키고 걷어내는 일은 안 되는 것이다. 복을 얻기 위한 수단이 십일조가 된 것이며 이러한 일을 평생 해야 된다는 것이다. 평생 작정된 헌금이 십일조라는 것인가?


회비씩으로 내어야 된다는 것은 교인이라면 드려야 된다는 의무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잘 실천해야 된다는 것이 신약의 헌금과 전혀 다른 사상이라는 것이다. 신약의 헌금은 자원해서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며 드릴 때마다 언제든지 마음의 원대로 드려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헌금은 자원해서 드리기에 각자의 헌금이 다르게 나타나게 된 다는 것이다. 믿음이 다르듯이 믿음의 표현도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구약의 십일조의 용도가 신약에서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신약시대 초대교회에서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는 헌금과 구제금과 연보 등이 나오지만 절기나 기타의 구약적인 율법적 제사나 그 방법이 사용되지 않고 있다.

 

십일조가 헌금이라고 주장한다면 헌금은 자원과 기쁨이 전재된다. 그런데 십일조는 자원의 성격에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원은 규범이나 경계가 없는 스스로가 드리는 것이다. 신약의 구원이 각각 다르고 그 믿음도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믿음으로 드리는 헌금이 같을 수 없다. 개인의 수입의 얼마를 정한 자체가 이미 자원에서 규제라는 것이다.


십일조가 헌금이라는 주장이 되려면 오순절 이후 성경에서 분명하게 십일조가 주장되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다행 이도 그런 구절이 없다는 것과 오히려 구약의 것들을 과거의 율법적인 것으로 치부한다는 것은 십일조가 헌금이 될 수 없는 명백한 이유이다.


한국교회의 십일조는 대단히 큰 교회의 제정에 몫을 차지한다. 이러한 이유로 십일조가 부활하게 된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일천 번제나 신약의 절기헌금 등은 바울이 가르친 사상에 의해서 비판을 받을 만한 내용이다. 바울은 절기나 안식일이나 날이나 기타의 것들이 신앙의 규범으로 남지 말아야 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헌금은 자원이 아닌 정해놓은 틀에 의해서 헌금을 드리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받으시기 원하신다. 그러나 원치 않는 헌금은 단 돈 백원도 싫어하신다. 교회에 중직이 되어서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그가 교회에서 직분 자로써 부도덕한 자로 여길 것이다. 이러한 규제가 신앙의 기준으로 여기게 된 것 자체가 문제 된 다는 것이다.

 

십일조가 구약 성경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또 이를 거역하면 도적이 된다면 교회에 나오는 모든 평신도들에게도 강제로 걷어야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신약시대에 불편하다면 이는 없어진 구약의 제도가 분명한 것이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구약의 십일조냐? 신약의 헌금이냐? 우리가 율법에 의해서 신앙이 되지 않는 것은 이미 우리는 율법을 뛰어넘는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은혜가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에게 만약 요구한다면 우리가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을 요구할 것이다.


감사에 규제가 없으며 자원에 경계가 있을 수 없다.

십일조는 드려야 된다는 것이 강조된다. 그러나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이는 반강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헌금이 아까워서 드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를 징계하지 않으신다. 다만 안타까워하실 것이다. 그의 믿음이 이것 밖에 되지 않는 것을 섭섭해 할 것이다.
그러나 원치 않는 규제로 드리는 것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으로 범죄 하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그 죄가 더 크다는 것이다.


이미 만들어 놓은 십일조를 교회의 중직이 감히 피할 수 있을까? 한국교회의 가장 안타까운 것은 내 것을 드린다는 신앙이다.

그것이 각종 규범과 같은 의무적인 십일조 신앙이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었다.

이것이 신약에서 지켜야 된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일조를 드려야 된다면 구약의 제사도 드려야 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의 짐승을 드리면서 그리스도를 생각한다고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십일조 말 자체가 헌금이 아닌 십일조이다. 그리고 헌금은 이미 신약 초대교회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십일조는 헌금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이는 순수한 헌금으로 교회가 운영되고 헌금이 사용되어질 것이다.

운영이 무서워서 바른 길을 피한다면 그 결과는 영적 파탄으로 나타날 것이다. 과거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가톨릭이 세상과 타협하자 오늘날 가장 부패한 교회의 이단이 된 것을 기억해야 된다.
십일조를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개혁에 대한 중대한 문제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평신도들이 걱정할 일이 아니다.

교회의 가르치는 지도자의 개혁에 호소한 것이 사실이다.


헌금이 자원해서 드리는 순수한 헌금이라면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최고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자가 헌금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교회는 믿음과 상관없이 헌금을 걷고 있다.

 

회비씩으로 걷는 헌금이 무슨 교회의 유익이 되겠는가?

실제로 교회의 선교비을 보면 현저히 약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교회는 돈으로 일한 것이 아닌 믿음에 의해서 일한다는 것이다.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헌금을 걷는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중직 자도 교회에서 의무적으로 할 수 있는 헌금이 지금의 십일조와 같은 제도이다.

헌금 그것은 신성한 것이 되는 것이다.


십일조는 그 말 자체가 율법적인 것이다.
십일조에 대한 합리화는 예수가 언급한 것을 가지고 말한다.

그러면 예수가 죽기 전에 있었던 대제사장과 제사 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당시의 구약의 모든 절기가 유효한 것이다.


십일조만이 아닌 구약의 모든 것이 지켜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죽기 전에 예수가 십일조를 언급한 것으로 십일조가 드려지다면 다른 것도 지켜야 된다. 예수도 유대의 절기 등을 인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구분되게 된 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는 유대의 모든 것이 과거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이재 새로운 영적인 질서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유대인이 예수 죽기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나 이재는 영적인 공동체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새 공동체가 과거의 것에서 이미 벗어난 것이라는 것이다. 제사 제사장 그리고 법등이 이제 무효화 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것이 나타나게 된 것이 영적제사 만인 제사장 그리고 영적인 질서라는 사실이다. 이미 백성 자체가 달라졌다는 것은 유대인의 모든 의식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인 예수로 말미암는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것은 역으로 말하면 육적인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과 같은 위치가 된 것이다.

 

그러면 십일조가 육적 이스라엘에서 사용된 것이라면 그 범위가 이스라엘의 범위이며 이스라엘의 십일조라는 것이다. 그들이 드린 십일조를 신약의 새 백성들이 드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공동체는 새 술이며 새로운 나라인 새 부대에 담아져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것에서 자유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즉 예수의 첫 열매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십일조가 어떠한 용도로 사용 되었는가 살펴보면 그것이 이스라엘에 국한 된 것이고 이스라엘의 레위지파와 과부와 그리고 객 등의 용도로 사용되어졌다. 이러한 사용은 사실 이스라엘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십일조의 사용은 신약에서 헌금으로 대체된다.

 

헌금도 영적인 제사에 사용된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구제 등으로 사용하고 교회의 과부들도 십일조가 아닌 헌금으로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약에서는 의무로 된 십일조로 사용되었다면 신약은 자원으로 된 헌금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즉 구약의 십일조가 헌금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이미 초대교회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의 십일조의 용도가 신약에서는 헌금으로 사용되는 것이 나타난 것이다.

 

신약의 공동체가 누구든지 믿음으로 들어오듯이 헌금도 의무가 아닌 누구든지 믿음으로 드리게 된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은 율법과 그리고 의무에 의해서 행해졌다면 신약은 의무대신 믿음의 원리가 적용된다.


사실 구약의 이스라엘 자체가 십일조와 같이 경계가 있었다. 할례 등이다. 경계가 있는 자들에게 경계가 있는 헌금인 십일조가 있었던 것이다.

신약에는 구약의 백성과 같이 경계가 없는(이방과 유대) 백성이 경계가 없는 헌금을 드리게 된 것이다.

구약의 십일조는 이스라엘의 헌금과 같은 것이라면 신약에서의 헌금은 구약의 십일조와 달리 누구나 믿음으로 드리고 또 그 경계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십일조라는 것이 사실상 신약의 헌금에 대한 예표적인 성격이라는 것이다.

영적인 공동체가 이제는 더 이상 구약의 경계와 의무에 있지 않고 자유와 믿음에 의해서 드려지게 된 것이다 


 구약에서 경계가 되는 십일조를 만들어 놓은 것은 그것이 구별된다는 의미이다.

다른 것과 구별된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되고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요구대로 사용되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신약에서도 헌금으로 구별시켜서 하나님의 선한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목적이 잘 드러난다. 그것들을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되게 한 것이다. 구약에서 레위지파가 사용한 것처럼 사도와 감독과 교회에서 일하는 자들로 사용된 것이며 그리고 구약에서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사용되어진 것을 신약의 성도들 중에서 과부와 객과 고아에게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구약의 십일조와 신약의 헌금이 다르지만 서로 깊이 연관되는 부분은 마치 구약의 것이 그림자의 것이라면 신약의 것은 참으로 쓰여 진다는 것이다.


구약의 백성이 그림자적인 백성이라면 신약의 백성은 실체라는 것이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그림자라면 신약의 예수의 대제사장이 실체라는 것이며 구약의 제사장이 신약의 성도가 된 것이다. 구약의 백성이 육적으로 부른 것으로 백성을 삼았다면 신약의 백성은 영적으로 부른 참 백성이라는 것이다.


십일조가 신약의 초대교회에 있어야 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육적인 나라와 대제사장이 이미 지나갔고(이는 이미 끝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새롭게 시작 된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이제는 믿음으로 육적인 나라가 아닌 영적인 나라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새롭게 시작된 나라의 백성이 육적인 이스라엘의 것을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서의 멜기세댁의 십일조가 멜기세댁과 같은 자가 이제는 예수가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신학자들의 해석)


이러한 것은 학자들의 의견대로 분명하게 예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구약의 멜기세댁이 신약과 직접관계 될 수 없다. 과거 이스라엘도 그림자로 지나간 것이 되었는데 만약에 멜기세댁이 신약에 직접연관 된다면 이는 과거 이스라엘이 지금도 직접 연관되어야 된다는 주장과 같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으로 모든 시간적으로 과거가 옛것이 되어버린 것이며 새로운 것이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닌 그리스도와 관계된 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일조를 드리는 한국교회의 신앙이 구약과 신약에서의 관계에 대한 정립이 분명하게 되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관계가 정립된 신학이라면 십일조는 드릴 수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십일조만이 아닌 교회의 헌금이 철저하게 인위적인 것이 된 것이다.

어떻게 헌금을 발표하고 사람들에게 공표하는 것을 좋아하는가? 헌금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고 사람에게 인정된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Name 이석봉

 

Subject 율법과 복음(십일조와 주일성수 이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1. 율법의 기능


1) 심판의 기능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
율법이 죄를 가리고 심판한다.

 

2) 죄를 깨닫는 기능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한다.

 

3) 참 형상 그리스도의 그림자 기능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히 10:1)
율법의 제사를 예수님이 완성하신다.

 

4) 몽학선생의 기능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4)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게 한다.

 

 

2. 율법에 관한 예수님의 해석


1)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 5:17)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의 기능과 몽학선생으로서의 율법의 기능을 예수님을 통하여 다 이루실 것이다.(제사적 측면과 행위적 측면)

 

2) 예수님은 율법의 형식과 내용 강조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을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마 23:23)

율법의 형식과 내용이 모두 중요하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무엇이 필요하신 것이 아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나 물질의 헌물을 통해서 그 정신을 보신다. 그러므로 물질을 드릴 때 정신을 드려야 하고 정신을 드릴 때 물질로 표현해야 한다.

 

 

3. 율법에 관한 바울 사도의 해석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채무 인정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골 2:14-18)

 

이상은 율법의 해석으로 몸인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 외에 다른 것들을 섬겨서는 안된다는 의도요 율법의 실체이신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시다.

 

 * 먹고 마시는 문제(레 11장) -그리스도 안에서 식물은 깨끗하다.
 * 절기 월삭의 문제 - 절기나 월삭은 그리스도의 그림자다.
 * 안식일의 문제 -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다(마 12:8).


안식일은 예수님 중심으로 재해석된다.
 * 천사 숭배 문제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몸이시다.
교회의 몸이신 그리스도만을 섬겨야 한다.

복음의 정신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것이다.

모든 행위는 율법을 위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한 행위는 율법의 완성이 된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산다면 십일조도 드려야 하고 그 이상도 드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산다면 주일도 성수(교회당 안에서의 성수=예배 정신)해야 하고 다른 날(교회당 밖에서의 성수=예배 정신)도 주 안에서 성수해야 한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예수님도 바울도 재해석하였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며, 율법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율법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화되고 완성된다.

 


Name 박광재 ( http://www.holylot.com)

 

 Subject 예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하셨다.


김형희씨는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폐지하신분이라고 제멋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으나 이는 성경을 깊이 보지않은 무지의 소치이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을 가장 혐오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찐저!라고 여섯번이나 (눅11:42,43,44,46,47,52,)혹독하게 책망하시고 저주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손하나 가딱하지 아니하고 남들에게만 시키는 자들이었으며(눅11:46),

그들은 속과 겉이 다른 즉표리가 부동한 외식하는 이중인격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실한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 있을 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9눅11:42)고 말씀하셨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십일조도하고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행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만 십일조하라고 명령하시고 자신은 십일조를 하지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는 외식하신 분이 되시는 것이니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는가 ?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부터 시작하여 이삭과 야곱등의 믿음의 조상들에 의하여 전승되어오다 모세때에 성문화된 십일조를 온전히 이행하신 분이시다.

 

유대인들로서 십일조를 하지않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가 ?

예수님께서는 유다족속의 다윗의 혈통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신앙을 지켜온 요셉의 가문에 태어나셔서 어린시절부터 철저히 율법을 준수하신 분이셨다.

 

출생한지 8일만에 성전에 올라가셔서 할례(눅2:21~39)를 받으신 것을 비롯하셔서 12살 될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율법의 아들로 하나님께 유월절 제사(눅2:40~51)를 드리셨음이 그 분명한 증거이다.

 

이렇듯 철저히 율법을 준수하며 성장하신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하지않았다고 하거나 폐지하셨다고억지해석을 하는 자는 베드로 사도가 지적한바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3:16)에 해당하는 자들이라고 해서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Name 이성권

 

Subject 십일조.... 김 형희님,

십일조

 김 형희님,
주신 글 잘 보았습니다. 뉴조에도 옮겨놓으셨군요.
「너무 피곤하여 생각을 잘 정리 할 수 있을 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할 정도로 무리하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생각을 잘 정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시작해도 한 편의 글을 쓰기란 힘들다고 봅니다.

 

님의 글을 대하며....
조금은 착잡한 마음이 됩니다. 복음, 십자가, 믿음, 죄인, 인간의 무능, 등등....
님은 나름대로의 님의 틀을 가지고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님의 표준을 빗겨나 상대방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의 생각입니다.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어린아이는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신세대 어머니는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구세대 어머님들은 꼭꼭 씹어서 입에 넣어주곤 했습니다. 먹는 자도, 먹지 못하는 자도 상대방을 판단하기에 앞서, 그 상대방을 이해하고 꼭꼭 씹어서 같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봅니다. 이런 사랑이 전제된 글이 되었으면 합니다.


------------------------------
그런데 님의 이글은 문제가 참으로 많은 글입니다. 구원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 십일조라고 하면서 정작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
"정작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
님이 말씀하시는 "문제"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십일조와 구원과는 상관없습니다. 십일조는 구원받은 자의 삶의 문제입니다.
진정 구원의 은총에 감사가 넘쳐나면, 전 재산도 팔아 교회에 내어놓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십일조인지, 감사헌금인지, 구제헌금인지....
그 명목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만, 가진 자가 「재산과 소유를 팔아」 믿음의 형제들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남들의 눈을 의식하여 "자기 믿음의 분량" 이상으로 살려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헌금하고도 징벌을 당하는 모습을 봅니다.

 "정작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십일조 할만한 믿음의 분량"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남의 눈을 의식하여 하는 헌금은 "심고 거두는 법칙"을 좇아 축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설령 사업이 형통한다 할지라도 깨닫지 못하고 진정 감사하는 자원의 예물로 바뀌지 않는다면, 그것이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십일조 할만한 믿음의 분량"....
목회자는 자기 양의 믿음이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십일조 안 해도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잘 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주신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성도로 양육해야 하지요.

"십일조"라는 명목이 싫으면 다른 명목으로든, 아니면 명목 없이, 이름도 없이.... 얼마든지 자유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정신으로 감사하지도 않으면서....
남들이 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재산과 소유를 팔아」 형제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비판을 해도 해야 하는 것이지요. 어떤 형제가 구제에서 빠집니까? 말을 해도 시정이

안 됩니까? 그렇다면 그 형제를 위한 구제헌금이라고 명목을 밝혀 헌금을 하시면 됩니다. 그 헌금이 그 형제에게 전달되지 않는 교회라면 헌금할 필요도, 더 이상 그 교회에 나가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능십일조 안 하는 도둑놈....
아마 이런 소리를 설교를 통해서 들으신다면 님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시리라 여겨집니다.
그렇게 설교하시는 목사님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십일조 해야 구원 얻습니까?"
 "그렇다"고 대답하실 분은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하시는 목사님과는 함께 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빨리 떠나야지요.


------------------------
온갓 더러움과 욕심, 탐심으로 가득한 구역질나는 마음으로 번 돈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 하신다고 착각하고 사는 무지한 사람들 때문에 십일조를 반대 하는 것입니다. 헌금은 마음에서 자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십일조란 말을 꺼내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능욕하며, 장난치는 짓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속에 십일조란 단어는 공존할 수없는 것입니다.
------------------------
십일조와 자원하는 예물....
공존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비성경적이거나 성경을 훼손하는 차원이 아니라고 봅니다. 구원과 상관된다면 그런 차원이 되겠지요. 구약의 십일조도 하지 않는 사람을 처벌하는 규정이 있던가요? 십일조 않는다고 백성 중에서 끊어지기라도 하던가요?


십일조는 자원하는 예물의 한 명목일 뿐입니다.
확대 해석을 않았으면 합니다. 목회자나 성도나 확대 해석하는 데서 문제가 일어납니다.
율법적으로 십일조를 하라는 것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꼭꼭 씹어 일깨워 주어야 할 부분이지요. 비판하고 판단할 부분이 아니라고 봅니다.

 "구역질나는 마음으로 번 돈"....
깨끗하지 못한 돈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습니다.


이런 부분은 목회자들이 좀더 일깨워주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님의 말씀대로 부정한 방법으로 번 돈이라도 헌금 많이 하는 분이 교회 내에서 입지를 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상 교회가 완전할 수는 없겠지요. 교회 안에서 "돈이 최고야!"가 될 수 없습니다.


-------------------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 하시는 것은 십일조가 아니라 나의 모든것을 모든 재산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라고 지금도 끊임없이 요구하고 계신다. 모든 것을 요구하시는데 십일조로 자족하려 하다니 십구조로 자족하려 하다니 참으로 가증스럽고 나약한 믿음을 가진 자가 내가 아닌가? 이러한 내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나는 지옥가야 마땅한 인간이라는 자복을 하게 되는 것이다.
-------------------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따르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알거지가 모인 곳이 주 따르는 길이 아니지요. 그렇다고 "나는 지옥가야 마땅한 인간이다"만을 되풀이하며 따르는 길도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 땅 위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지옥가야 마땅한 인간이다" 그런 나를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다!
이 놀라운 기쁨과 감사로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말로 예수를 증거하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로 사는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사명이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나는 지옥가야 마땅한 인간이다"
이 깨달음이 "예수로 사는 삶"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이 깨달음이 상대방을 비판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참으로 죄송합니다.


님의 글을 대하는 저의 느낌은,
이 깨달음이 "예수로 사는 삶"으로 승화되기보다는 비판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 십자가, 믿음, 죄인, 인간의 무능, 등등.... 」으로 "예수로 사는 삶"의 승화된 모습을 통해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참으로 부족합니다.
 "예수로 사는 삶"의 승화된 모습을 이야기할 처지가 못됩니다.
제 자신을 바라보고, 님을 바라보고....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금도 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있지만,
예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참으로 많은 사랑의 빚으로 살아왔습니다.
그 사랑의 빚을 갚을 길을 달라고 기도하지만, 갚을 길이 없음을 또한 압니다.


그래서, 내가 수고하여 번 「내 몫」에는.... "하나님의 몫"도, 가난한 "이웃의 몫"도 있다고 가르치고 실천하게 합니다.

잘 따라 주는 분들이 있음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진 사랑의 빚을 갚아 가는 길이라 여기지요.

김 형희님,
십일조 문제만 아니라,
님이 여러 방면에서 나름대로 복음을 위해 애쓰시는 모습을 봅니다.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말씀에 깊이 착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부드러운 음식을 먹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 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꼭꼭 씹어서 입안에 넣어줄 수 있는 사랑으로 상대방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샬롬~

Name 이석봉

 

Subject 십일조에 대한 오해를 풀읍시다.

 

십일조를 반대하시는 분의 이유로

첫째, 십일조는 율법이다.
둘째, 온전한 십일조 하는 사람이 없다.
셋째, 십일조를 드려도 복을 받지 못한다.
셋째, 도둑놈의 십일조는 합당한 십일조가 아니다.

 

답을 드립니다.

 

첫째, 십일조는 율법이다는 말에 대하여 십일조는 율법이 아닙니다.
구약에 모세에 의해 율법화 되었지만 신약에서는 감사의 표현으로 복음화 되었습니다.

 

둘째,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없다는 말에 대하여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인색한 사람은 온전한 십일조를 못드리고 감사한 사람은 십일조 이상을 드립니다.

 

셋째, 십일조를 드려도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에 대하여 믿음으로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받습니다.
성경의 원리는 네 믿음대로 되리라 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면 영적인 복을 받든지 물질적인 복을 받든지 합니다.

 

넷째, 도둑놈의 십일조를 받으시는가에 대하여 도둑놈의 십일조도 받으십니다.
도둑놈의 십일조가 합당해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 시대 같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복음 시대에는 용서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받으십니다.

다만 선한 물질을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십일조를 반대하시는 분의 말을 보면 스스로가 율법주의에 빠져 있음을 봅니다.

십일조를 복음적으로 보았다면 복음적으로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십일조로 아옹다옹 마세요.


십일조나 헌금가지고 갑론을박하는 것은 하나님 우롱죄입니다.
하나님이 없으셔서 받으시는 것 아니지요 천하만물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드림이란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입니다 라는 감사의 표현이요 받으심이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라는 주권자의 인정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이면 하나님의 면전에서 치사하게 십일조 가지고, 십의 구조를 드려도 그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하는데, 율법 운운하면서.....

졸장부 신앙 걷어차시기 바랍니다.

 

드리기 싫으면 그만 두시면 됩니다.
선동하는 것은 하나님 불경죄입니다.

지금 반대하시는 언어들은 형제와의 토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따지는 행위입니다.

 

십일조를 율법의 차원에서 논리를 펴지 마시고
은혜의 차원에서 해석하고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Name 천헌옥

 

Subject 십일조는 이렇게 하라

 

 의와 인과 신으로 하라고 주님 말씀 하셨다.
십일조는 의와 인과 신으로 해야 한다.

 

1. 십일조는 義로운 것이어야 한다.
십일조가 의롭게 해 주기 때문이 아니다.
창기의 돈, 사기꾼의 돈, 도적질한 돈의 십일조 같은 것으로 드리지 말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자기 힘으로 정당하게 벌어서 부끄럽지 않는 십일조를 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십일조 하나를 하는데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2. 십일조는 仁으로 드려야 한다.
십일조를 강제적이고 의무적인 것으로 받아 억지로 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이다.
고후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3. 십일조는 信으로 해야 한다.
십일조를 드리므로 그만큼의 손익 계산을 염두에 두는 인생들은 대체로 망설이기 십상이다.
먹고 사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야 한다.
맡기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복 주셔야 살 수 있다는 믿음, 내 소득 전체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믿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채워 주시리라는 믿음, 그 믿음으로 하라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살았고 하나님이 지금까지 살려 주셨다.

 

 

Name 천헌옥

 

Subject 나는 이래서 십일조를 한다

1. 예수께서 십일조를 폐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십일조를 폐한다고 하신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는지 찾아 주시면 나도 십일조 안할 것이다.

 

2.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십일조를 흔히 율법이라고 하면서 율법은 폐하여졌으니 안해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십일조는 자발적 감사의 신앙의 표시이지 강제적 율법이 아니었다.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야곱이 하나님의 명령 이전에 벌써 자발적인 감사의 표시로  십일조를 약속했고 시행했기 때문이다.

율법으로 십일조를 행하는 자는 율법에 매이겠지만 은혜로 십일조를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

 

3. 십일조가 복음 전파를 위해 쓰여지기 때문이다.
구약의 십일조가 성전 유지를 위해 쓰여 졌기에 성전이 폐하여진 지금에는 십일조가 드려져야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는 예수께서 피로 세우신 교회이다.
교회의 목적은 복음전파이다. 복음전파를 위해 모이는 장소, 건물이 필요했고 조직이 필요했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자연스러운  교회 태동의 모습이었다.

이런 교회를 통하여 복음이 지역에 증거되었고 바나바와 바울이 복음전파를 위해 파송을 받았다.
십일조가 목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드려지는 것이기에 나는 기쁘게 십일조를 한다.

 

4. 십일조를 드려서 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십일조를 드려서 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것은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선포한 것의 복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 나는 십일조로 인하여 복을 받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

 

5. 십일조는 아름다운 전통이다.
누가 십일조를 한국적인 현상으로 단정하는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이 십일조를 안했는데 한국 사람이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했다는 말인가? 아니다.
십일조는 사도 이후 계속되었고 후 사도 시대와 초기 교회 시대를 거쳐 종교 개혁 이후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계속 되어 왔다.
그리고 그 십일조를 바탕으로 복음은 증거되었고 주님께서 한번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새삼 이제 와서 부정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Name 사두환

 

Subject 십일조 헌금문제

 

1. 구약시대의 헌금 기준
 십일조 헌납은 구약시대에 신정 국가의 제도화한 것이었으니 법령으로 실시하던 것이었다.

그것을 드리는 자가 기쁜 마음으로 실행해야 향기로운 것이겠지만 아니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십분의 일 이란 수량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바친 것이며(창 14:20),
이스라엘 백성도 레위 족속을 위해 바쳤으니 만큼(민18:21,24; 신 14:28-29, 26:12),

오랫동안 역사적으로 존중시되어 왔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수량(레 27:30; 신 14:22; 말 3:8)인 점에서 중요시된다.

 

2. 신약시대의 헌금
교회의 지도자들이 신자들로 하여금 십일조 헌금(십일조는 최소한의 헌금임)을 장려하면서 그것을 신약시대 성도의 헌금의 표준인 듯이 가르치는 일이 있다면

시정되어야 한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신약 교회는 구약의 신정 국가의 법령으로 다스림을 받는 단체가 아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외부적 의식의 제재에서 초월하게 된 영적 단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십분의 일이란 숫자의 법령적 제재는 받지 않는다.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소득의 십분의 일 이상을 자원하여 하나님께 바칠 만한 영적 은혜를 받았다. 고후 8:1-15 참조.
그러나 이것도 교회가 교인들에게 강요하거나 표준을 세워 지령할 것은 아니다. 헌금하는 자의 자원하는 마음은 그 헌금의 중요한 요소다(고후 8:12, 9:7).


신약시대의 신자가 자기가 드릴 연보의 사용 목적을 자의대로 결정하고 또한 각기 목적에 따라 그 금액을 자유로 할당할 수 있는가?

구약시대에는 예배를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리도록 되어 있었으니 만큼(요 4:19-21), 외부적 제도에 치중하였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헌금에 있어서도 외부적 제재를 받았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개인으로나 단체로나 또는 어디서나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므로(요 4:22-24)

신약 교회는 보다 더 영적인 것만큼 신자의 개인적 자유를 존중시 하며(고후 3:17),


자기 자신도 하나의 성전인 사실을 성경에 의하여 알고 있다(고전 3:16-17, 6:19-20; 롬 12:1-2).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을 섬기는 의미에서 어떤 개인들(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도 일종의 헌금 행위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반드시 교회를 통해서만 실시되는 것이 아니다.
백부장 고넬료가 교회를 통하지 않고 친수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 것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다(행 10:1-4).


잠 19:17에 말하기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하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고 하였다. 잠 17:5 참조.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고 하셨다(마 10:42).


약 1:27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 라고

하였다. 마 25:31-46 참조.

 

그러므로 신자가 물질로써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도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의 의미가 있는 귀한 일이다. 행 11:29-30; 롬 15:26; 고후 9:1-14 참조.
내가 소속된 교회에 과연 어느 정도의 헌금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에 대한 참조 성구이다.

 

 

Name 이석봉

 

Subject 십일조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기본적인 신앙과 신학이 있어야 한다.
필자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깨달은 바를 전하고 싶다.

 

성경 해석의 기본은


1. 언약은 성취로 해석한다.
2. 구약은 신약을 통해 해석한다.
3.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한다.
4. 십자가의 구속사 중심으로 해석한다.
5. 율법의 의식법은 폐지되고 도덕법은 계승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6. 율법은 복음으로 해석한다.
7. 도덕법보다 상위법은 덕과 사랑의 법이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위험한 것은

 

1. 구약 따로 신약 따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레위기 11장의 가증스런 동물이나 고기는 먹지 말아야 된다고 한다.

신약은 하나님이 내신 것은 다 깨끗하다고 하신다.(막 7:19; 딤전 4:3; 참고, 행 10:15)

그러나 덕이 우선이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자 앞에서는 제사 음식을 먹을지 말지를 고려해야 한다.(고전 8:13; 롬 14:17)

또한 토요일 안식일을 고집한다.(참고, 골 2:16)

그러나 신약은 안식일의 주인은 주님이시다고 하신다.(마 12:8)

주님 중심으로 발전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계시록에서 주님의 날이 명문화된 것이다.(계 1:10)

 

 2. 십일조는 의식법이 아니다.
십일조는 도덕법이다.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최소한의 기준이요 신전 예의(하나님 중심 신앙)이다.

물론 복음적인 사람은 십일조 이상을 드리며 복음은 몸 전체를 산 제사로 드리도록 가르친다.

총신대학원 시절에 홍치모 교수님이 십일조에 대해 강의 시간에 언급하신 일이 있다.

율법적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신학생들의 공격이 빗발치자 전체를 드리자는 의미였다고 해명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시다. 무엇이 부족해서 달라 말라 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신앙과 헌신의 표(신전 예의=하나님 중심 신앙)로 십일조를 요구하셨다.

드리고 말고는 자유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순종하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된다.

이는 기복주의를 부추기는 언동이 아니요 영적 범사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감사헌금이 있다.

그러나 감사는 범사에 일반적인 은혜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이요 십일조는 내 육신의 생명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다는 단도직입적인 섬김과 존재의식의 표현이다.

십일조를 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반대하는 자는 안낼 테니까)
단 십일조를 하는 자가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다. 그 십일조가 어떻게 쓰여지느냐는 쓰는 자의 책임이다.

내는 자는 하나님을 향한 경배요 충성심인 것이다.

율법이다 뭐다 하고 선동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것은 각자의 고유한 신앙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십일조를 하고 안하고의 차이는 영혼의 자유와 부자유의 나침반임을 알아야 한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죄이기 때문이다.(롬 14:23)

 

 

 Name 사두환

 

Subject 한국교회 십일조 억지로 내면 저주가 돌아온다

만나의 글
한국교회 십일조 억지로 내면 저주가 돌아온다
십일조 억지로 내면 저주가 돌아온다
믿음을 가진 신약시대는 복음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자원하므로 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만약에 십일조를 드리고 싶으면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야지 의무적으로 또는 강요에 못 이겨 억지로 낸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그 순간부터 자신에게 도리어 저주를 쌓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고후9:5「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 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3억지가 아니니라」


억지 앞에 있는 숫자3은 난 아래 주요표시에 보면 탐심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이 탐심은 우상숭배 이기도 합니다.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억지라는 말의 헬라어로는 플레오넥시아 라고 하는데 그 뜻은 사기, 강탈, 횡령 등에 어원에서 비롯된 말로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탐심이라는 말의 헬라어 역시 플레오넥시아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뭇 성도 가운데는 십일조를 드리고도 도리어 자신에게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쌓고 있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이렇게 지도하는 지도자는 더 말할 나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직접 목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동안 한국교회가 말씀 위에 바로 서지 못하여 성도와 사회로부터 온갖 지탄의 대상이 되어 많은 비난을 받는 원인에 일조를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율법적인

십일조 강제 거출 방법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대형 교단과 맘몬 교회가 된 기성교회들이 교계와 사회로부터 수많은 지탄과 비난에 의한 조롱거리가 된 이러한 수난은 악한 방법으로 신약성도들의 자유로운 신앙양심에 피해를 주면서 까지 율법적인 십일조를 강요한 죄업으로서 한국교회는 이 죄업을 반드시 받을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책임을 물어 보응은 갈수록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자비의 하나님이신 것을 기억하여 이제라도 지도자들이 잘 알지 못해 성도들에게 율법적인 십일조 명목으로 헌금을 강제로 갹출케 한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회개를 한다면 주님은 또 의롭고 미쁘사 이를 사유하시는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해 율법적인 십일조라는 기가 막힌 이 웅덩이 빠져 있었음을 교회의 지도자들은 똑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이러한 주의 말씀의 경고를 피하는 지도자들에게는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대에 세우실 것입니다.

 


안형식목사 [성경에 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의 답변 


목사님의 글) 어떤 성경에 십일조를 억지로 하면 저주가 임한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공개적으로 묻습니다.

답변) 단순히 십일조를 억지로 낸다고 저주가 임하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가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은 하나님 것을 도적질한 것이라는 율법적인 가르침에 의하여 뭇 성도의 입장에서 기쁜 마음과 자원하는 심령도 없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라는 율법적인 가르침에 의하여 두려운 마음에 마지못해 한다면 이는 곧 억지로 드리는 것이 됩니다.

 

목사님의 글) 십일조 절기 감사 등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율법으로 강제되어 있으며 이를 지키지 않는 자는 이스라엘 중에서 끊쳐진다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답변) 신약에서는 적용이 안 되는 말씀이지요!

 

목사님의 글) 신약에서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했고, 감사를 했습니다.(고후 6-8장)
답변) 맞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대로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라고 하여 십일조를 내도록 강요하는 것은 자원하여 드리는 십일조와는 정 반대이지요!

 

목사님의 글) 구약에서는 만나를 내려 주셨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까지 내어 주신바 되었으니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이야말로 몇 푼 돈으로 환산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의 감사와 환희가 있었을 것이며, 자연스럽게 헌금으로 표현되었을 것이라는 정도의 유추는 마땅합니다.
답변) 맞습니다. 그러나 초기 성도들을 비롯하여 오순절 이후 신약교회가 세워진 이후부터의 모든 성경에서는 단 한번도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구약의 율법적인 십일조 의무가 신약성도의 의무로 전환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약의 초기 성도는 십일조든 그 이상이든 모든 것을 자원함과 감사로 하였던 것입니다.

 

목사님의 글) 이런 관점에서보면 현대의 명문화 되어 있는 감사 헌금이나 십일조 등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감사 표현과 비교도 되지 못합니다.
답변) 현대교회에서 십일조를 명문화 한 규례는 이해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율법적인 강제 의무적인 십일조를 강요하고 성경 밖에서 명문화한 규칙으로 합리화시킨다면 결국은 사문화된 부분적인 십일조 율법을 다시 세우는 치명적인 범죄인 것입니다.

 

목사님의 글) 초기 기독교인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교까지 했습니다.
답변) 초기 기독인들의 신앙심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범으로서 오늘의 우리들도 그 뒤를 따라야 합니다.

 

목사님의 글) [아까운 마음이 들면 안하면 될 일이외다. 구갑같은 위인 같으니라구]
답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까워서 드린 글이 아니라 율법적인 십 일조 강요로 신약성도의 자유한 심령에 도적이라는 위압감을 조성하면서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사문화된 구약의 십일조를 인용하여 마음껏 공갈을 치는 목사들을 경고하기 위한 글입니다.

 

다음은 기독신문 게시판에 "한국교회 십일조 억지로 내면 저주가 돌아온다" 는 저의 글에 대한 비평 글 모음을 옮겨왔습니다.

안형식 목사( ) 작성일시 - 2002년 05월 15일 수요일 오전 10시 41분
read:58


 [성경에 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

 


Name 김철중

 

Subject 십일조는 단순한 연보가 아님(경고)

십일조는 단순한 연보나 헌금수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한 유일한 시험이자 능력 그자체임.
십일조를 통해서 교회가 일하고 선교의 기초가 형성이 되었음.
십일조는 부패한 교역자의 소유물이 아니라 진정한 복음사역의 도구임.
십일조를 거부하거나 변질시키는 의도는 책망거리이자 은혜의 감동을 조금도 느껴보지 못한(자신의 모든 수입을 구별하여 기쁨으로 단 한번만이라도 십일조를 정성껏 준비하여 보라. 그 순간부터는 진정한 삶의 기쁨과 감사를 느낄것이다), 입만 가지고 종교놀이를 하는 자들의 궁색한 말꺼리임.

cjkim153

 

 

 Name 조재경

 

Subject ☞ 십일조 잘 내면 복이 옵니다.

님이 주장한 말이야 말로 억지가 아닐까요?
십일조 내면 복이 온다는 말씀은 있어도 저주가 온다는 말씀은 성경에 없습니다

 

[ 고후9:5 에서 말씀하신 "연보"도 교회에 내는 헌금이 아니라,

 " 성도를 위하는 연보"[고전9:1]이니 곧 당시 수재를 만났던 예루살렘 교회[ 롬15:25,26, 고전 16:3 ]에 보내는 수재 의연금입니다.


결코 십일조가 아니지요.

십일조는 현금이 아니니까, 내는 것도 아닙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고로 십일조를 안내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 말4:8-10 참고 ]

그렇다면 십일조를 내는 것 곧 도적질 안하는 것이 오히려 저주라 하심은 하나님 말씀을 거꾸로 생각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십일조만 내고 다른 헌금을 내지 않는다면 헌금은 하나도 내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일금은 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을 도로 돌려드리는 것이니까요.
예수님께서는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십일조를 낼 것에 대하여

 

[마23:23]
 "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

 

이것(십일조)도 행하고, 저것(의, 인, 신)도 버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Name 전활성 ( http://han010.i21c.net)

 

 Subject 교회사랑노우트(8)십일조에 대한 답글

 

 어느 형제에게 드리는 십일조에 대한 답글

 이 글은 아래 글을 쓴 뉴조의 성기문 형제를 위한 글이 아니고 성기문형제의 글을 읽고 혼란을 가져올 성도들을 위하여 쓴 글임을 밝혀 둡니다.

 

아래 뉴조의 성기문 형제는 필자가 뉴조의 창립시절 기자회원으로 잠시 글을 쓰면서 여러가지 문제(십일조와 목사의 직임에 관한...)로

여러차례 작은 충돌이 있었고 뉴조의 색갈이 점점 그 분들의 성향이 되어 간다고 느껴저 뉴조와 결별을 하게 되었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성기문 형제는 뉴조의 온라인 오프라인의 지면에서 십일조에 관한 여러가지 성경적, 지정학적, 역사적 자료들과 함께 글을 쓰고 계셨으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십일조 반대운동을 전개 하셨습니다.

 

그런 성기문 형제와 맞서서 십일조에 관한 논쟁을 벌린다는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십일조라는 교회의 가장 은혜스러운 헌신인 십일조가 한국교회에 더욱 건전하게 정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지혜의 은사를 구하며 이 글을 올립니다.

 

형제님께 드립니다.
형제님께서는 저와 의견이 다름으로 인하여 종종 작은 충돌이 있어서 서로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런일로 제가 뉴조를 떠남으로 인하여 서로 협력하면 교회를 위해 좋은 일이 있었을 수도 있었을 텐대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한국교회의 문제의식에 관하여 본인의 견해와 여러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서 좋은 동역자로 기억 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저는 지금 형제님의 십일조 논리에 관한 박학한 지식에 맞설만한 논리적 준비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의 종류라든지 십일조라는 명칭의 헌금이라든지 하는 많은 종류의 헌신의 방법이 더욱 은혜스러운 한국교회의 전통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십일조 반대론자들이 흔히 구약의 제사 제도와 신약의 예배의 다름을 말하고 있지만 그들이 말하듯 헌금하는 헌신에 구약과 신약의 다름이 어디 있으며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궂이 구분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반대론자들은 목사가 성도들의 십일조를 모두 착복하는 것으로 몰고 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사가 구약의 레위인인이나 제사장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구약의 십일조는 레위인들을 위하여 존제하는 제도였고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없는 지금에는 십일조라는 제도가 당연히 폐지 되어야 한다는것입니다.

십일조는 성경적 근거가 없는 제도이며 십일조로 인하여 성도들이 착취를 당하고 있으며 또 목사가 그 십일조를 착복하므로 교회가 부패해져 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반대론자들은 목회자는 레위인이 아니며 교회는 성전이 아니므로 결국 교회에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이 받으시는것이 아니라는 논리를 펴고 싶어하는것입니다.

형제께서는 십일조를 설교하고 가르치는 교회를 향하여 부정직한 교회라고 신랄하게 비판을 가하셨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십일조를 걷어드리기 위해서 말라기서나 신명기서에 있는 복의 개념을 도입하여 성도들을 현혹시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형제님께서는 십일조에 대한 역사적, 성경적 고증을 들면서 교묘하게 교회의 부정직성을 들어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것은 나는 만일 성경에 "십일조를 해야된다"라는 말이 한마디도 없다고 하더라도 십일조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내 수입중에서 그정도라도 쪼개어 드려서 하나님의 나라를 새우고 싶은 성도의 심정에서 입니다 


 어디 성경에 주일에 두번 예배드리라고 했으며 어디 성경에서 매일 새벽기도회를 해야 한다고 했으며 어디 성경에 수요일에 예배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그것은 그렇게 자주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성도들의 주님을 향한 사랑이 아닙니까?

 

은혜를 체험한 모든 성도들은 주일 예배를 통해서 그리고 새벽 예배를 통해서 수요,금요예배를 통해서 그리고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통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체험합니다.

 

형제님께서 연구한대로 십일조가 성경적이 아니라면 형제님의 신앙에 그렇게 적용하십시요..

그러나....그것이 비성경적이고 그 십일조를 목사들이 수탈하고 착복한다고 외치면서 대부분 깨끗한 목사들을 모함하려 들지 마십시오.

 

대부분의 교회들은 제정위원회가 있고 제정은 평신도들에 의해 운용되어진다는 사실은 모르시지는 않을것입니다.
다만 몇몇교회들의 교회운영상태가 목사중심으로 되어있고 어떤 교회들은 목사가 너무 호사스러운 생활을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아직 대부분의 교회는 아직 힘겹게 목회를 하고 있으며

농촌의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은 그의 최저생계비에도 못미치는 사례비를 받고 그것으로 이웃 섬기는 일에 아낌없이 내어 놓는 목사들도 많다는것입니다.

 

십일조가 복의 근원이라고 가르치는 교회가 부정직하다고 하셨습니까?
나는 십일조를 통하여 복을 받고 있다는 점에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본인을 비롯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일조를 통해 많은 영적인 은혜와 삶의 복을 받고 있으며 그리고 그에 대한 많은분들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란 하나님을 좀 더 잘 섬기기 위한 신자들의 노력과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그 많은 예배와 헌금으로 나타났고 한국교회는 교회사에 찾아볼수 없는 영적인 또는 양적인 복을 받았습니다.

물론 십일조를 비롯해서 한국교회의 많은 헌금이 교회의 물량화를 부추겼다는점을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십일조를 없에야 한다는 것은 이가 혀를 깨물었다고 해서 이를 모두 뽑아버리자는 주장과 같습니다.

한국교회의 질병은 결코 십일조 때문이 아니고 그 십일조를 잘못 운영하는 사람들 때문일것입니다.

 

우리는 좀 더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 더 많은 헌신의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십일조보다 더 좋은 방법은 혹 없을까 하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우리를 노예로 부터 해방 시켜주신 주님께 드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왜 10의 2조는 없는것일까?

왜 일주일에 주일이 하루만 있는것일까? 하며 아쉬어 해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자원적 헌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훗날 하나님앞에 섰을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십분의일만 아니고 생명까지 드리기를 원했다고 진실되게 고백할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활성 목사 올림

 

 

Name 요시아

 

Subject 십일조는 성경적인가?


십일조에 대한 논쟁이 치열한 것은 이것이 성경적인가 하는 것보다는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 돈이 차지하는 위치 때문인 것 같다.

이 시대에게는 돈이 곧 주님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종교적인 모양을 갖추고 성경을 들여 댄다하더라도 돈을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는 돈밖에 보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들의 귀에는 돈 때문에 우는 사람들의 탄식 소리가 들릴 리가 없는 것이다.

 

먼저 십일조 논쟁의 배경을 보면 찬성론자들은 대개가 현실 교회의 교권을 지닌 사람들이다.

모든 사람등 아니나 대부분의 목사는 (자기의)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 물질이 필요하니 헌금을 많이 바치는 사람들을 대개 교회의 장로나 안수 집사로 세우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십일조를 비롯해서 헌금을 많이 내야 복을 받는다고 강조하고, 물질을 (많이) 바치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이 적은 사람들이라고 몰아 세우고,... 그래서 실제로 복음을 전하며 교회에 출석하여서 신앙생활을 할 것을 권면하다 보면, 먹고 살기 바쁜 가난한 많은 사람들이 대답하는 말이 아직은 교회에 다닐 형편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왜 그러냐고 물어 보면 교회에 다니려면 헌금을 해야 하는데 아직은 헌금하며 신앙생활할 만큼 생활이 여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에게 비쳐지는 이 시대의 교회는 부자가 되기 전에는 아직 다닐 만한 곳이 못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우리 주님은 복음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보다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백성들이 사는 스불론 땅과 납달이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길과 이방의 갈릴리로 다니시며 전하셨는데... 도대체 오늘날 교회가 전하는 복음이라는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솔직히 오늘날은 사회에서 출세하고 대접받으며 부한 자가 교회에서도 출세하고 대접받으며 부한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자본주의를 섬기는 교권주의자들은 구약의 십일조를 들여대며 무지한 성도들을 착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므로 이러한 십일조의 폐단을 인식한 몇몇의 사람들는 현교회의 십일조 제도에 비판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것같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이 제기 될 때마다 성경을 모르는 교권주의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살피고 복종하고자 하기 보다는 자기들의 이익이 감소 될까하여 벌 떼같이 달려 들어 이리 쏘고 저리로 쏘아 생매장 하여 버리고자 하는 것 같다.

 

얼마전에 고신 교단에서도 이 일로 말미암아 한 목사님이 제명을 당하시지 않으셨는가? (주님께서 이 목사님께 위로를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러나 성도는 말씀으로 사는 자이다. 여기에 아직 부족하지만 본인이 현재 이해하는 성경적인 입장을 간단히 나누어 보고자 한다.

 

먼저 구약의 십일조 제도에 대해서이다.

구약은 분명히 십일조 제도(신14:22-29)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구약의 십일조는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의 생활을 위한 십일조, 절기 때마다 성전에 바치는 십일조, 그리고 삼년에 한 번 씩 구제를 위해 바치는 십일조가 있었다.

물론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구제의 대상이 되는 가난한 사람들은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의식법으로서의 십일조 제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된 것이 아니라 완성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십일조라는 율법에 매여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나, 구약의 십일조가 가르치는 정신을 이해하고 믿음을 따라 물질 생활을 하며 사는 자들이다.

 

신약은 십일조에 대해 따로 가르치고 있지 않다.

다만 연보에 있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초대 교회는 물질을 자원하여 교회에 바치고 서로 상통하며 부족한 자들을 돕고 섬기는 공동체였다.

먼저, 십일조를 비롯해서 교회에 드려지는 헌금이라는 것은 자원하여 드리는 것이지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율법적으로 강제되어서는 안된다.

 

사실 드려지는 헌금이 남 앞에 자랑하기 위한 수단으로(그래서 교회에 많이 재정적인 기여를 하므로 장로감이 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물질을 사랑가운데 공동체와 나누며 주의 일을 위해 믿음으로 드려진다면, 그것보다 아름다운 험금은 없을 것이다.

 

둘째로 헌금은 교회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구약 시대에 가난한 자들(레위인들도 성전일을 하느라 기업이 없었으므로 가난한 자들이었다)을 위해 사용되었듯이, 목사들 비롯해서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자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며, 동시에 교회 안에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헌금으로 소위 담임 목사라는 사람들의 배를 채우는 일에는 관대하며, 교회의 어렵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물질적인 배려는 너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교회는 가난한 자들이 험금을 내지 못하더라도 마음 놓고 다닐 곳이라는 인식이 들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최대한의 배려를 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구약의 십일조는 성전일을 하기에 일을 하지 못하던 레위인의 생활을 위해, 성전의 일을 위해, 그리고 가난한 과부와 고아들을 위해 드려지던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목적을 위해 각자의 형편과 믿음 안에서 드려지는 것이다.

 

현대 교회의 맹목적인 십일조 강조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물질에 대해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게 하기 보다는 자본주의 정신에 충실한 목사들에 의해 생명이 없는

종교적인 맹신자들을 낳게 되는 한 원인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가 그 만큼 어둡다는 산 증거가 아니겠는가?....

 

 

Name 에녹

 

Subject 신학선진국의 십일조를 보라!

위 글(1327)을 잘 읽었습니다. 사실 모두가 공감 하면서도 쉽게 발언 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한국의 기독교 풍토에는,
십일조 = 축복이라는 성경적 근거없는 공식이 뿌리 박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신앙과 신학의 선진국에서는 이미도 정립된 십일조 문제가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원시적인 현실이 답답합니다.

일전에 화제가 되었던 책을 소개합니다.

 

제목은 "십일조를 넘어서" 베틀 북 조누가 지음
이책은 물론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그러나 진정한 헌금(십일조)의 정신은 율법적인것이 아닌 이웃사랑에 있다는 점은 매우 지당한 말씀이며 또한 성경적이란 생각입니다.
이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이 편견된 시각에서 벗어나 십일조의 근본 정신을 되새겼으면 합니다.
(위 추천하는 책을 꼭 읽고 함께 생각 했으면 합니다^^!)
살롬 감사합니다.

 

 

Name 전활성 ( http://han010.i21c.net)

 

 Subject 어느 십일조 무용론을 주장하는 형제에게...

 

어느 십일조 무용론을 주장하는 형제에게...

십일조에 대한 토론을 하지 말자고 해놓고 이 자리에 다시 나타나 십일조에 대한 글을 쓰게 됨으로

진즉 이곳을 떠났던 님들에게 죄송스럽고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한번쯤은 십일조에 대한 저의 입장정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어지고 또 아직 십일조에 대한 가치가 정립되지 못한 성도들이 이곳에 들어 왔다가

그들이 그간 믿음과 신앙고백으로 드려 왔던 아름다운 헌물이 이렇게 난도질 당하는 것을 보고 시험에 빠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합니다.

 

지금까지의 십일조를 반대하시는 형제들의 말씀을 들어 보면 십일조가 비성경적이고 그 십일조가 한국교회를 타락하게 된 원인이기 때문에 십일조는 마땅히 폐지

되어야한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저는 그분들의 그러한 주장을 전혀 근거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역시 많은 목회자가 물질과 성적인 문제로 인하여 사회적인 지탄을 받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같은 목사의 입장으로 여간 곤혹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어떤 목사는 성도들의 헌금으로 자신의 부동산을 마련했고 어떤 목사는 많은 자금을 동원해서 총회장에 입후보를 하고

어떤 목사는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의 교인을 성폭행 했다는 기사를 봅니다.

 

사실 저는 그러한 소식을 들을때마다 목사로서의 무력감에 빠지거나 내가 목사된것에 대하여 뼈저린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먼저 극히 일부의 문제를 놓고 목사들 모두가 정죄를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않되겠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참으로 열악한 환경속에서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할 생활비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아야 할것입니다.

많은 비판론자들이 말하는것처럼 모든 목사는 마치 직업이 없어 목회를 하는것처럼 매도해서는 않된다는 말입니다.

 

더러 그런사람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은 오늘도 어려움속에서도 묵묵히 복음전도를 위해 힘을 다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헌금시간이 따로 없습니다.
누구던지 헌금하기를 원하는 분은 교회 구석에 놓여 있는 연보함에 넣으면 됩니다.

 

우리교회는 누구도 십일조를 강조하거나 교육하지 않으며 또 어떤 헌금도 강조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십일조와 또 다른 이름의 연보를 드림으로 헌금의 모본을 보일뿐입니다.

 

제가 십일조에 대하여 그것이 성도들에게 유익한 전통임을 늘 주장하는 이유는 십일조가 한국교회에 있어 은혜스러운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그 십일조로 인하여 지금까지 부흥해 왔음을 누구도 부인 할 수 없을것입니다.

 

한국교회 부흥의 가장큰 원동력은 중국의 선교사였던 네비우스선교사가 저술한 저서에 감명을 받은 언더우드 마포삼열등의 선교사들이 네비우스선교정책을 적용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교회는 자기 스스로 제정적인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예배만을 위한 예배당을 건축하고 목회자의 생활비를 줄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가르치는 것 입니다.

 

1890년 네비우스는 한국에 와서 한국에서 선교하고 있는 각국의 선교사들에게 세미나를 통해 중국등 다른나라에서 이 정책을 적용할려고 했지만

이미 먼저 들어간 선교사들의 물량공세에 맛을 들인 원주민의 배타적 습관 때문에 이러한 자신이 노력이 실패했었지만 한국은 소망이 있노라고 했습니다.

 

그 뒤 1893년에 열린 제 1회 한국 선교사 공의회는 이 네비우스 정책을 만장일치로 체택하여 모두의 선교현장에서 적용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네비우스정책의 가장 핵심되는 점을 보면 그리스도인 그룹을 어떻게 운영해나가야 할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교회가 외국에서 보내주는 선교비로 만 운영되어지면 타성이 생기고 그것은 자손까지 버리지 못할 습관이 되어 결국 교회는 약하여 질 수 밖에 없다는것입니다.

그래서 개체교회는 그 지방사람을 목회자로 교육을 시켜 개체교회를 섬기게 하고 개체교회는 스스로 선교비를 부담하며 예배당을 그들의 힘으로 건축하고 사택을 마련하여 목회자(당시에는 목사보다 평신도 사역자가 더 많았음)가 입주케하고 목회자에게 생활비를 지급하여 그가 전도일에 전념케 하자는 것입니다.

 

C.A. Clack 교수는 이 네비우스 정책을 자급, 자족, 자립의 원칙 그리고 성경공부라고 했습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이러한 영성있는 선교사들의 좋은 선교정책으로 인하여 이렇게 부흥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십일조 제도는 21세기의 한국교회가 오늘날 교회가 이처럼 부흥할수 있었던 뒷밭침이 되었고 수많은 선교사를 오지에 파송할수 있는 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십일조가 타락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었고 그 폐해가 심각하다고 할지라도 십일조는 하나님나라를 새우기위하여 아주 은혜로운 헌신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여 성경대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해야 할 구체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 것은 없는것이라 고 혹자는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라면 가고 성경이 서라면 서자고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은혜로운 교통을 나누기 위하여 구체적인 언급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할까요?

성경에 있는것만으로는 하나님과 교통하기에는 우리는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을 좀 더 잘 섬기기위해서 우리의 성도들에게 좀 더 구체적인 인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도하게 만드셨고 기도할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바른길을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명령이 아닌 인간의 자발적인 헌신을 위하여서 그러한 새부적인 사항들을 성도의 기도와 성령의 인도에 맡겨두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십일조는 이러한 자발적인 성도들의 헌신이며 은혜의 방편입니다.

십일조가 성경적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래서 십일조를 폐하여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폐하여야 할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선 교단을 폐하여야 합니다.
성경에 장로교니 감리교니 하는 교단이 있을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권징과 제도를 폐하고 요즘 간간히 볼수 있는 평신도 교회처럼 은혜받았다는분이 일어나 설교를 하는 그런 교회로 만들어야 할것입니다.

교단이 교권주의의 산물이니 교단을 폐하고 모두 평신도교회가 된다면 우리는 독버섯처럼 여기 저기 조직적으로 생겨나는 이단과 적그리스도의 도전을 무엇으로 막을것이며 그들에게 빼았기는 우리의 형제 자매와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보호할수 있겠습니까?

 

한국교회의 개혁은 정말로 시급하게 필요합니다.
목사가 이렇게 타락해선 안됩니다.


그리고 큰교회 유명목사만을 선호해서 근처 작은교회를 두고 멀리 대형교회를 찾는 평신도의 편협함도 이래선 않됩니다.

교회는 제정이 투명해야 하며 한국교회의 성도들의 의식 또한 검소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휘황찬란한 조명과 고급스러운 내장제품으로 장식해야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이제 버려야 합니다.

목사의 생활이 검소해야 함은 물론이지만 성도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목사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것도 보기에 썩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목사의 검소함은 목사 스스로 결단하고 실행하는 모습이 좋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목사의 생활이 신앙의 덕이 되지 못한다면 성도들은 그러한 목사의 지도를 거부하고 다른 훌륭한 목사에게로 떠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는 목사의 자격이 없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목사들 스스로 알게 해야한다는것입니다.
교회의 개혁이란 헌신되어지지 못한 목사가 자신의 사명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물러나는 일일 것입니다.

 

분명히 십일조는 한국교회의 은혜로운 헌신입니다.

이러한 십일조행위가 비성경적이기 때문에 폐지 되어야 된다고 주장한다면

혹시나 자신이 이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있지 않나 심각히 생각해 봐야 할것입니다.

원당에서 전활성 목사 올림

 

 

Name 박노열 ( http://www.minister4u.com)

 

 Subject 십일조에 대하여

File contribute.hwp (36 KB) - Download : 55


십일조 <주제별 성서사전에서>


 십일조
<주제별 성서사전에서>

[1] 일반적 고찰
[2] 십일조의 용도
[3] 십일조와 관련된 사건
[4] 기타

 

[1] 일반적 고찰

 

1. 모세의 율법에 십일조는 여호와의 것임을 규정함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그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속하지 못하리라(레 27:30-33).

 

2. 농사의 소산물과 가축의 소산을 십일조로 드렸음
1) 레 27:30-33 (1을 보라).
2)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신 14:22).
3) 왕의 명령이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처음 것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 유다 여러 성읍에 거한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도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왔고 또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릴 성물의 십일조를 가져왔으며 그것을 쌓아 더미를 이루었는데(대하 31:5,6).

 

3.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서 드림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찌니라... 너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와 네 우양의 처음 낳은 것과 너의 서원을 갚는 예물과 너의 낙헌 예물과 네 손의 거제물은 너의 각 성에서 먹지 말고 ... 너는 삼가서 네 땅에 거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찌니라(신12:6,7,17,19).

 

4. 이스라엘 백성에겐 십일조의 의무가 있음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민18:21)

 

5. 하나님의 전 곳간에 둠
1)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두되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느10:38.39). 
 

2)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울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 함을 인함이라(느12:44). 
 

3)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갖추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기명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느13:5,12). 
 

4) 그 때에 히스기야가 명하여 여호와의 전안에 방을 예비하라 한고로 드디어 예비하고 성심으로그 예물-십일조와 구별한 물건을 갖다두고 레위 사람 고나냐는 그 일을 주관하고 그 아우 시므이는 버금이 되며(대하31:11,12). 
 

5)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2] 십일조의 용도

 

6. 기업이 없이 성소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의 생활비
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민 18:21-24). 

 

2) 신12:5-19. 
 

3) 신14:22-27.
 4)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빔을 받느니라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히7:5-9).

 

7. 레위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제사장에게 바침
1)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민18:26). 

 

2)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두되(느10:38).

 

8. 일년에 삼차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데 쓰이는 경비
1)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위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우양이나 포도주나 독주등 무릇 네 마음에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신 14:23-26). 
 

2)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말고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찌니라(신16:16,17).

 

9. 삼 년에 한번씩 오는 구제년의 구제비 (가난한 자를 위한 십일조)
1)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엔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8,29). 
 

2) 제 삼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 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고하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치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대로 다 행하였사오니 원컨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하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소서 할찌니라(신26:12-15).

 

[3] 십일조와 관련된 사건

 

10.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침
1)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렉에게 주었더라(창 14:18-20). 
 

2)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곧 평강의 왕이요 ...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히 7:1.2,6).

 

11. 야곱이 십일조를 바치기로 약속함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 28:20-22).

 

12. 왕이 농산품의 십일조를 세로 취함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삼상8:15).

 

13.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우상신전에 바치기도 하였음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 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4:4,5).

 

14. 십일조를 바치는 일이 히스기야 통치때 다시 시작됨
 왕의 명령이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처음것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졌왔으며 유다 여러 성읍에 거한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도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왔고 또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릴 성물의 십일조를 가져왔으며 그것을 쌓아 더미를 이루었는데... 그 때에 히스기야가 명하여 여호와의 전안에 방을 예비하라 한고로 드디어 예비하고 성심으로 그 예물과 십일조와 구별한 물건을 갖다두고 레위 사람 고나냐는 그 일을 주관하고 그 아우 시므이는 버금이 되며(대하31:5,6,1112).

 

15.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주지 않아 전리로 도망함
 내가 또 알아 본즉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 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기로(느 13:10).

 

16. 느헤미야 때에 십일조를 바치게 함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 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느 13:12).

 

17. 말라기가 십일조의 의무를 강조함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8-10).

 

18. 십일조만을 집착하고 율법의 보다 큰 부분을 간과하는 것을 예수님이 책망하심
 화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 니라(마23:23).

 

 

[4] 기타

 

19. 누구든지 십일조를 속하려면 그것의 오분 일을 더해야 함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레 27:31).

 

20. 가축의 십일조를 바꾸면 속하지 못함
 그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속하지 못하리라 (레 27:33).

 

21. 유대인들이 십일조를 경시하고 오용함을 비난함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었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3:8).

 

22. 십일조에는 의와 인과 신이 병행되어야 함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마23:23;눅11:42).

 


주제별 성구

 

1. 일반적인 고찰
십분의 일을 하나님게 드림.....................레27:30-31
농사의 소산물과 가축의 소산물을 드림..........신14:22, 레27:30-31,대하31:5-6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 가지고 가서 드림.......신12:6-7,17,19
하나님의 전 곳간에 둠.............느10:38-39,12:44, 느13:5,12,대하31:11-12,말3:10 


2. 십일조의 용도
 성소에서 일하는 레위인의 생활비.............민18:21-24, 신12:5-19,14:22-27,히7:5-9
십일조의 십일조는 제사장의 몫....................민18:26, 느10:38
삼년에 한 번 있는 구제년 때의 구제비.............신14:28,29, 신26:12-15
일년에 삼차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때의 경비.......신14:23-26,16:16-17 


3. 십일조를 낼 때의 자세
 바쳐진 소나 양의 우열의 교계하거나 바꿀 수 없음...........레27:32-33
부정한 몸으로 십일조를 내지 말 것.........................신26:14
형식적으로 드리지 말 것...................................마23:23,눅18:12 
 

4. 관계기사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침......창14:20, 히7:1,2,6
야곱이 십일조를 바치기로 함................창28:22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의 의무..............민18:21
레위인의 십일조는 제사장의 분깃이 됨.......민18:26
왕이 농작물의 십일조를 거둠...............삼상8:15
십일조를 바치는 일이 히스기야 왕 시대 때 다시 시작됨.......대하31:5-6,11-12
포로 귀환 후에 십일조를 드리기로 서약함 ............느10:37-39
아모스가 죄와 함께 십일조를 내는 것을 책망함........암4:4
말라기가 십일조의 의무를 강조함.....................말3:8-10
십일조에만 집착하고 그보다 큰 것을 간과하는 백성을 책망하심......마23:23,눅11:42

 ====================================================================================================
십일조를 출석하는 교회에 하여야만 하는 지에 대해서 상당수 크리스챤들이 궁금증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이 질문에 대해서 의견들이 분분합니다.
이는 성경에 이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이 질문에 대해 갓피플 토론방에 올려진 몇 분의 의견을 갈무리하여 아래에 올립니다.
 =====================================================================================================
 [질문]

교회에선 십일조를 꼭 교회에만 하라고 합니다.
선교단체나 선교사님들에게 십일조의 일부를 하는 것이 성경에서 벗어나는 것인지요?
온전한 십일조에 대한 바른 의견을 구합니다^^

- koohyun -
 -----------------------------------------------------------------------------------------------------
[의견-1]

십일조는 신자가 소득의 10분의 1을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와 선교사 지원 헌금은 별개의 것이지요.
십일조로 선교헌금을 한다는 것은 뭔가 좀 이상한 일입니다.
선교사 지원 헌금은 선교헌금으로 내야 하는 것이지요.
십일조는 꼭 출석하는 교회에서만 하되,부득이한 사정으로 타지에서 예배 드리게 되었을 때는 그곳에서 십일조를 드려도 큰 상관은 없습니다.
예물을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까요

- sirasoni86 -
 ---------------------------------------------------------------------------------------------------
[의견-2]

온전한 십일조...
십일조는 아시다시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교회에 내거나 선교단체 선교사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있는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할 때 온전한 십일조가 이루어집니다.
모든 물질을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하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분의 일만을 받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반드시 교회에 내야한다고 설교했다면 우리가 그 설교를 오해했거나 잘못된 십일조를 가르치는것이 될 것입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이 없는한 모교회에 십일조를 해야 할 이유는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 효율적으로 운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충분한 기도를 통해 자유함으로 십의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길 소망합니다.

- lim96-
 ---------------------------------------------------------------------------------------------------
[의견-3]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드리는 것이고 꼭 해야할 일이지요.
하지만 님께서 질문하신 장소에 대해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출석 교회에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면 선교단체나 다른 곳에 하면 안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본인은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 이기에 어느 교회에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바르게 드리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님의 마음에 출석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 십일조를 드릴때 온전한 마음으로 십일조를 하는 것이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출석교회에 십일조를 드리세요.
그리고 답변중 선교단체나 선교사님에게 보내는 것은 선교비라고 했는데 저도 그것에는 동의합니다.
정 선교를 위해 십일조를 보내고 싶다면 선교헌금을 따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한가지 더 만약 그래도 십일조를 선교에 보내고 싶다면 출석교회 담임목사님과 상의해 보세요.
목사님이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실거예요.
제가 답변을 하고도 정확한 답을 주었는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하세요.
십일조는 사람이나 교회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을...

- kungodpeople -
 -----------------------------------------------------------------------------------------------------
[의견-4]

십일조는 내게 주신 물질 중의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으로 십분의 일을 떼어 하나님께 드리는, 일종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십일조를 어디에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당시에는 모두가 이스라엘 한 공동체였고 다른 교회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신약시대에도 오늘날 처럼 교회가 많은 때가 아니니 자신이 몸담아 출석하는 교회에 당연하게 십일조 헌금을 드렸겠지요.
이사를 가면 그 이사간 곳의 출석하는 교회에 드렸을 것이구요.
그러니 자기 모교회(母敎會)에 내라, 아니면 아무 교회에 내도 된다는 언급이 없을 수 밖에요.

이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 볼 수 있다고 봅니다.

먼저, 왜 십일조를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나 선교단체에 내려고 하는 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선교헌금이나 구제헌금 등의 다른 명목의 헌금을 추가로 더 드릴 마음은 없고, 어차피 십일조는 내야 하는 것(일종의 의무감?) 이니 그 십일조를 내가 의도한 바에 사용되도록 드리겠다는 의미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교회가 정직하고, 바르다는 전제 하에 헌금은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헌금은 드려진 이상 자기의 마음 대로 자기의 의도대로 사용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부터 그런 마음으로 가지고 헌금한다면 그것은 십일조가 아니라 목적헌금이나 지정헌금으로, 그 헌금의 원하는 용도를 명시하여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두번째로는,
자기가 등록하여 출석하는 교회에 헌금을 내야 한다는 것은 성경에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질서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십일조를 자신이 등록하여 다니는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에 드리는 것 자체가 문제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첫번째 답변의 내용과 같은 문제가 없다면 말이지요.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자신이 등록하여 출석하는 교회에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질서를 위해 좋습니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이유로 원하는 교회나 단체에 십일조를 드린다면 교회마다 다른 교회 사람들에게 교회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여 자기 교회로 십일조 해달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러면 안 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십일조 자체를 자기의 의도에 맞게 사용하려고 자신이 원하는 곳에 헌금함으로 인해 결국은 하나님의 것이라며 드린 헌금을 자신이 목적한 바대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 되고 말겠지요.

특별히 십일조 헌금은 자신의 의도 대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결정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에 맞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참조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 peter63 -
 ----------------------------------------------------------------------------------------------------
[의견-5]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그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쓰여져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 사명을 다하고 있지 못합니다.
도시의 교회는 교세확장을 위하여 (성전건축 등) 모든 재정을 거의 다 쏟아붓고 있는 가운데 진정한 선교를 하는 교회가 얼마나 있습니까?
지금 젊은이들은 중학교만 마치면 대부분 도시로 나갑니다.
농어촌교회, 오지 선교지, 등등 정말 어렵고 악전고투하는 주의 종들이 재정적 어려움으로 많은 갈등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본 교회에 십일조를 하고 그 교회를 통해서 선교를 하도록 요청하라고 합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옳은 일을 일부 교회를 제외하고는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예산의 1%이상 선교하는 교회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십일조 하나님께 드리면 됩니다.
성도의 신앙의 양심과 선택은 성도 자신의 권리라 생각됩니다.
본 교회에 하면 복받고 다른 교회에 하면 복 못받는다는 말씀은 아주 옳지 못한 말씀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복받기 위해 드리는 복채가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드리는 의무와 감사의 표현입니다.

- sunbukum -
 ----------------------------------------------------------------------------------------------------
[의견-6]

신약성서에 보면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한 번이라도 나오는지요???
십일조를 처음 드린것부터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나 마음에서 우러나와 십일조를 드린거죠...
그럼 아브라함이 멜기세덱한테 후원 헌금을 한건가요 십일조를 한건가요...???

또 두번째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야곱이 도망가다가 잠을 자면서 사다리를 보게 되었고
 그때 내가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내 재산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했는데요...
그럼 야곱은 십분의 일을 어디에 누구한테 드린건가요???

목사님들이야...
헌금에서 가장 큰 부분을 담당하는 것이 십일조이니까 자꾸 십일조를 자기교회에 내라고 하시겠죠...
축도받는 교회에다 십일조를 내야 한다구요???
목사님들은 자기가 축도를 해주니까 너 왜 축복기도는 나한테 받고 돈은 다른 사람 주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겠죠.

십일조는 정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거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죠.
그럼 십일조를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세요.
내가 우리 교회에 십일조를 드리면 교회에서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한다는 마음이 있으면 자기 교회에 내고
 그게 아니라 이 교회에 내는 것이 마음에 안든다는 생각이 들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여지는 곳에 십일조를 하세요.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내 교회에 내는 것이 가장 좋겠죠.
그런데 보시면 지금 한국교회 중에 내고 싶은 교회가 얼마나 되나요?
다들 자기 주머니 채울 생각만 하면서 뭐 총동원 주일이니, 대 각성 부흥회니, 어쩌느니 저쩌느니 하면서 신도 불려서 돈 많이 벌어서 건축이나 하려고 하고 교회 규모 키워서 노회에서든 총회에서든 세력 키울 생각만 하잖아요.
가난한 사람들이 어렵게 힘들게 100만원 벌어 10만원 헌금한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사업가, 정치인들 같은 쓰레게 같은 x들이 몇백, 몇천만원씩 내는 십일조를 가지고 그들의 사업을 어쩌구 저쩌구, 정치생명을 어쩌구 저쩌구...

진정 예수님께서 바라는 교회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명을 다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죄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을 구제해 주는곳...
또한 예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셨던 세상에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 거지, 어린 아이들, 병든자, 가난한 자, 장애우....
이런 사람들을 위해 진정으로 일하는 교회가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 아닐까요??
이런 일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교회에 십일조를 하세요...
그게 훨씬 값진 것이고, 그게 진정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가 아닐런지요....

- hunwoojung -
 -----------------------------------------------------------------------------------------------------

 

십일조에 관한 자료모음

 

 제1부 십일조의 내력(來歷)

▣ 목차
1. 족장시대
2. 모세의 율법
3. 이스라엘 왕국의 조세
4. 가나안 시대의 십일조
5. 말라기 시대

▣ 본문
 요절 : ①'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it is holy to the Lord.)이라.'
 (레27:30)
 ②'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6:31)

 

 1. 족장 시대

 

(1) 아브람의 전리품

 아브람은 조카 롯과 함께 애굽을 떠나와서 아브람은 산지인 헤브론에 살고 롯은 여호와의 동산같은 풍요로운 소돔에서 살았다. 그때 엘람왕, 고임왕, 시날왕, 엘라살왕(창14:9)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고(B.C.2330년경), 롯도 사로잡아 갔다.(창14:11) 이 소식을 듣고 아브람은 318명의 가신(家臣)을 이끌고 단까지 쫓아가서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때 살렘왕이며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Melchisedec)의 환대와 축복을 감사하여 아브람이 그의 전리품(戰利品)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창14:14-20) 이 기록은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십일조의 본 이였다.

 

 (2) 야곱의 십일조 서원(誓願)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의 상속권을 빼앗은 후환으로, 형(에서)을 피하여 브엘세바(Beersheba)에서 화란의 외삼촌댁으로 피난 가던 중 벧엘(Bethel)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자던 중 꿈에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을 받았다. 아침에 잠을 깬 야곱은 베개하였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 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창28:10-22) 그러므로 야곱의 십일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영원한 선민관계 설정의 언약의 증거이다. 따라서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축복은 사라진다고 생각된다.(참고: 말3:7-12)

 

2. 모세의 율법

 

(1) 광야의 규례(B.C.1445년경,시내산 평지)

여호와께서는,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27:30, 신14:22)하시고, 또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된다.(레27:32)고 하시며, 모세에게 십일조에 관한 규례를 명하셨다. 이 십일조는 원래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레27:30-33) 레위인(민3:4)들은 회막에서 제사직분을 수행하며 이스라엘 중에서 토지의 분깃(기업)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대신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십일조를 다 받았다.(느10:37, 12:44, 민18:26, 히7:5,9, 민18:21,24,26)

 

(2) 가나안의 규례(B.C.1406년, 모압 평지)

모세의 광야생활이 끝나갈 무렵, 가나안에서 지킬 규례를 기록한 모세의 율법은,

첫째, 매년 마땅히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과(신14:22)

둘째,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가나안 정착시대의 성막 또는 성전)이 행로(行路)가 먼 경우에는 성물을 화폐(돈)로 교환하였다가 다시 구매할 수 있게 했으며(이미 그 시대에 화폐와 시장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된다), (신14:24-26)

셋째,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이스라엘 중에서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그들의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8-29)하였다. 이 말씀에서 십일조가 나그네나, 과부나, 고아와 같은 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한 복지기금(현대적 용어)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읽게 된다. 그러므로 십일조헌금은 오늘 날도 사랑의 법으로 마땅히 실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참고: 신26:12-19, 신12:5-19

 

3.이스라엘 왕국의 조세

 

 이스라엘의 사사(士師, 선지직, 제사장직, 왕직을 겸한사람, 민25:5)였던 사무엘(삼7:15)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세우기를 구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왕국을 세우면 왕국의 경비(經費)를 위하여,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와 또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국세로 납부해야 한다고 경고하셨다.(삼상8:1-17) 즉 이스라엘왕국의 국세의 징수율이 소득의 십분의 일이였다.

 

4. 가나안 시대의 십일조

 

 가나안의 남북왕국 시대의 십일조의 규례는, 유다왕 웃시야(B.C.767-739)왕과 이스라엘왕 여로보암2세(B.C.782-753)에 이르러서, 삼 일마다 십일조를 드렸으나(암4:4), 이는 외식적인 율법주의 풍습에 지나지 않았고, 히스기야왕(B.C.715-686)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패로 온전히 지켜지지 않은 것 같다. 히스기야(Hezekiah,B.C.726-697)왕이 우상들을 부수고 십일조의 규례를 바로세워, 백성이 드린 십일조가 더미들(heaps)을 이루었다고 한다.(대하31:5-10) 이 많은 십일조 더미를 관리하기 위하여 고나냐(Conaniah)를 주관자로 세웠다.(대하31:12) 그 후 유대가 망한 후에도 느헤미야(Nehemiah, B.C.445-425)가 바사(Persia)에서 귀환했을 때(2차) 예루살렘의 성전을 버리고 도망간 례위 사람들을 성소로 불러들이고, 백성으로 하여금 십일조를 드리도록 했다.(느13:10-14, 참고절: 느10:37-38, 12:44, 13:5)

 

5. 말라기 시대(B.C.430-397)

 

말라기 선지자 시대(B.C.430년경)에 이를 무렵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십일조의 규례를 지키지 않은 것 같다.(말3:9) 그래서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에 의하여, '너희가 온전한 십일조를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면,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가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축복이 넘치리라. 그리고 너희 땅이 아름다와 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말3:10-12) 그러므로 벧엘에서 야곱(이스라엘)의 서원으로 시작되어 모세의 율법으로 이어온 이스라엘 백성의 십일조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 곧 하나님의 선민(오늘엔 그리스도인 포함)이, 영원히 폐할 수 없는 사랑의 황금율(the Golden Rule)이라고 할 수 있다.(사랑의 황금율, 마7:12, 눅6:31) 즉 사랑의 헌금과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사랑의 축복을 넘치게 주시기 때문이다.

 

- 해설 : 황금율의 남(them, men)

황금율의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의 '남'은 하나님(예수 그리스도)과 사람과 자연을 다 포괄하는 뜻으로 해석한 것임.

 

제2부 십일조, 연보, 구제에 관한 예수님 말씀

 

▣ 목차

1.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2. 근채등의 십일조

3. 한 과부의 두 렙돈

4. 하늘의 보물

 

▣ 본문

 요절 :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막12:17)

 

1.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1) 사건의 개요

 유대인의 지도자들(바리새인 및 헤롯당원)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고 예수께 물었다.

유대인 : '가이사(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합니까? 내지 말아야 합니까?' 이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예수님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2) 이스라엘의 이중 지위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신자들)은 현세국가(우리의 경우,대한민국)의 국민의 법적지위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적시민권자이다.(빌3:20)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현세적으로는 로마제국(황제, 가이사)의 속국민이고 종교적으로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선민)이었다. 예수님을 딜레마(Dilemma)의 논리로 책잡으려던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의 이중적 신분지위를 알리시며, 로마 속국민으로서 유대인들은 로마황제(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하고, 또 하나님의 선민으로서는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셨다.

 

 (3) '하나님이 것'의 뜻

'하나님의 것'이 무엇이냐? 이 대답은 말라기서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길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Tithes and offerings)이라'하셨다.(말3:8) 그러므로 오늘 날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 크리스챤들은 국가엔 납세의무를(롬13:6-7), 교회(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엔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사랑의 의무를 실천해야 한다.

 

- 해설 : 딜레마(Dilemma)논리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고하면, 예수님은 유대인의 배신자가 되어 유대인의 지도자(Teacher)가 될 수 없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하면, 로마황제 가이사의 반역자가 되어 로마의 국사범(國事犯)으로 고발되어 체포될 위험에 빠진다.

 

 

2. 근채의 십일조(마23:23)

 

예수님께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극심한 외식(hypocricy)(마23:23,29, 딤후3:5)을 질책(質責, 꾸짖어 바로잡음)하신 말씀 중에, 근채등의 십일조를 예로 언급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芹菜)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라고. 예수님의 이 말씀(마23:23)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은 소경된 종교지도자들(마23:24)의 외식이 율법에 관한 무지(호3:6)에서 온 것을 깨우치기 위하여, 박하(mint)와 회향(anise)과 근채(cummin)의 십일조를 드리는 일보다 더 중한 율법의 본질인 의(justice)와 인(mercy)과 신(faith)의 진리를 버린 것을 꾸짖으셨다.(참고절: 잠21:3, 삼상15:22, 전5:1) 이와 유사한 예수님의 훈계는,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23:24), 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에서도 발견된다. 요컨대 유대인들의 외식(hypocricy)은 율법에 관한 '온전한 지식'의 결여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본문의 말씀(마23:23)은 곧 사라질 푸성귀들인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영원한 사랑의 가치인 의와 인과 신을, 3대3(수의 조화)의 대칭으로 설명하셨다. 참으로 시적 감동력을 실은 고상한 음악적 표현이시다. 이것은 어둠속의 빛처럼 의와 인과 신의 진리를 더욱 환하게 밝히신 계시이다. 할렐루야!

 

셋째. 예수님께서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하셨다.(마23:23후반부) (These you ought to have done, without leaving the others.) 이 말씀은, 신자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 뿐만 아니라 모든 소득의 십일조도 드려야 하고, 더욱 중한 율법의 본질인 사랑(의와 인과 신)을 절대로 버려서는 안된다는 말씀이시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근채등의 십일조를, 누가복음(눅18:9-14)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속의 율법주의적인 십일조와 동일시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와 헌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 해설

①서양속담(Pay tithe of mint and anise and cummin.)

   큰 일은 버리고 작은 일에 구애하는 것을 말한다.

②마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3. 한 과부의 두 렙돈

 

(1) 현장설명

 예수께서 성전의 연보궤(Box of offering, 요8:20)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lepton)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질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하셨다.(막12:41-44, 눅21:1-4)

 

(2) 온전한 연보, 두 렙돈

(가) 가난한 과부의 믿음

 이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남편도 여의고, 또 가진 돈도 두 렙돈(한 고드란트)밖에 없는 가난한 과부였지만(세상에서는 불상한 사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믿음에 부요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여인 이였다.(약2:5, 마19:23-24)

 

 (나) 예수님을 만난 여인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본문의 가난한 과부는, 30여년전 바누엘의 딸 안나가 출가한 후 일곱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후, 팔십사년 동안,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다가 아기 예수를 만나 뵈었던 장소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께 온 재산 '두 렙돈'을 성전에 드리는 아름다운(거룩한) 장면을 보인 행복한 여자였다.(눅2:36-38, 참고절:눅2:25-35)

 

 (다) 진실한 주님의 자매

 본문의 과부는 구차(苟且, 가난함)한 중에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께 드렸다. 그 과부의 연보는 십일조와 헌물(말3:8)이상이고, 곧 생명이었다. 그때 그 여인은 남편도 소유도 없고 오직 의지하는 하나님밖에 없었다. 이 가난한 과부야 말로, 오직 하나님 외에 집도 굴도 없는(눅9:58, 마8:20), 오직 우리의 믿음의 주(히12:2)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자매였다.(막3:35) 이 귀한 자매를 성전에서 만난 예수님의 기쁨이 또한 컸으리라.(성경의 과부사랑에 대한 말씀: 출22:22, 민30:9, 신10:18, 14:29, 24:17, 시68:5, 146:9, 행6:1, 딤전5:3-16, 약1:27)

 

 (라) 하나님의 영광

 말씀(율법)이 육신이 되신 예수(요1:14, 마1:23)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셨다.(막12:43-44)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마음과 인격의 빛을 볼 수 있다.(요1:4,9, 빌2:5) 예수께서는 가나한 과부의 외모보다 의(義, justice)를 보셨고(약2:1,9, 빌2:9, 또 주님의 긍휼(仁, mercy, 약5:11, 롬9:16)과 믿음(信, faith)의 마음(히12:2, 빌2:5)으로, 그 과부의 하나님에 대한 전심의 사랑과 큰 믿음을, 칭찬(제자들의 교훈)으로 화답하셨다.(참고:마23:23, 시42:7) 그러므로 가난한 그 과부의 정성스러운 두 렙돈[렙돈은 당시 제일적은 단위의 주화(coin)]의 연보는 하나님께 큰 영광의 제물이 되었다.할렐루야!

 

4. 하늘의 보물

 

예수님은 이세상에서 우리들의 소유 즉 재물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를, 다양한 내용으로 가르치셨다.

첫째, 위에서 기술한 대로 십일조와 헌물(연보)을 하나님께 드려야하고,

둘째로 복음을 위하여 집과 전토(재산)를 버리면, 백배의 보상과 영생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막10:29-30, 마19:29)

셋째, 부자 청년에겐 '소유를 팔아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고,(마19:21, 23-26)

넷째,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한 구제를 하는 자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하며 은밀한 구제를 권면하셨다.(마6:1-4)

 

그리고 특별히 당부하시길,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다.(마6:19-21) 그러므로 보물과 마음을 하늘에 두지 않고, 땅에만 마음과 재물을 둔 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시리라.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

 

'성경 상식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와(Haww?h)"를 왜 "이브(Eve)"라고 할까?  (0) 2025.06.24
성경에 대하여  (0) 2025.06.10
성경 역사관  (0) 2025.06.01
반더발 성경연구(1) 성경의 유일성  (0) 2025.05.08
부활 후 40일간의 행적  (0) 2025.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