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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디게아 교회 (계 3:14-22)

하나님아들 2022. 6. 27. 23:31

라오디게아 교회 (계 3:14-22)

아시아 7 교회 가운데 마지막 교회이니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보다는 사람이 중심이 된 인본주의적인 교회입니다.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을 문밖에 내어 보내고 사람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던 교회입니다.  요즘 열린 예배, 구도자 중심 예배라고 해서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중심이 된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희한한 주장을 하는 교회들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징인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7 교회들 가운데서도 가장 부유한 교회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물질적인 풍요가 오히려 저들을 영적으로 가난하고 눈먼 자가 되게 하였다 하십니다(17절). 오늘은 구체적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하도록 하겠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14)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 동남쪽 약 72km,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약 16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서 라이커스 계곡에 있는 여러 도시들 중 하나입니다. 이곳의 특징은 교통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모직물 공업의 중심지였으며, 또한 활발한 금융 거래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습니다. 이러한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바브라가 설립하였으며(골 4:12,13) 골로새 교회와 함께 바울이 지도하였습니다.

 

본문입니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아멘이시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아멘'은 문자적으로 '아멘인 자'를 의미하며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칭호로 나타납니다(사 65:16). 이는 하나님께서 진리이시며, 신실하심을 시사합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칭호가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실하지 못함에 대한 그리스도의 신실성이 부각되고 있습니다(고후 1:20).

 

한편 '충성되고 참된 증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하나님이 신실하심을 증거 하시기 위해 온전한 순종과 충성으로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셨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1:5,9;2:13).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14)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의 최고의 근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칭호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칭호 즉 '알파와 오메가'에서 '알파'에 해당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피조물 가운데 처음이란 의미가 아니라 창조자이며 창조의 근본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잠 8:22.; 요 1:1-3; 고전 1:30; 골 1:15; 히 1:2,3). 또한 이 칭호는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15)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열심히 없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아무런 영향력이 없음을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차다'는 것은 라오디게아의 물 사정이 좋지 않아 약 16km 떨어진 골로새로부터 냉수를 공급받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으로 그들이 불신의 상태로 세상에 속하였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덥다'는 것은 신앙을 위한 열정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차지도 덥지도' 즉 그리스도를 대적하며 세상과 타협하지도, 혹은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소유하지도 않은 상태로 미지근하였습니다(16절).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만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차든지 덥든지'하라는 요구는 양자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하라는 의미라기보다 '차든지'와 '덥든지'의 중간 상태를 택하는 그들의 '미지근한 상태'에 대한 신랄한 책망인 것입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16)

 

'미지근하여'라는 언급은 '차다', '덥다'는 말과 관련되어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가 무익하고 무력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미지근한 영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거부하고 버리겠다고 책망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17상)

 

'부요하여'는 이제 완전히 부요한 상태에 도달했다는 의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스스로가 부요하여 더 이상 바랄 것이나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실질적으로 그들은 상당히 부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는 매우 빈곤하고 곤고한 상태였던 것이었습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17하)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실상을 묘사한 것으로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입니다.

 

'곤고한 것'은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약탈되거나 파괴당했을 경우를 묘사하는 것으로(시 137:8; 롬 7:24) 그 어떤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영적 상태는 물질적 부와 정반대로 가련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입니다.

 

'가난'은 라오디게아인들이 금융업이 발달할 정도로 물질적인 부를 축척한 것과는 달리 영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섬길 수 없는 상태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며(2:9), '눈먼 것'은 라오디게아에 특수한 안약과 의학교가 있었던 것과는 달리 영적 시각 장애자로 분별력을 잃은 것을 의미하고, '벌거벗은 것'은 라오디게아의 검은색 양모가 유명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이 영적으로 벗은 모습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스스로 부요하다고 착각하여 전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18)

 

본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앞절과 동일한 방법으로 라오디게아에서 유명하고 풍부했던 것을 예로 들어 그들의 영적 무관심에 대해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18상)

 

그리스도께서는 영적으로 가난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불로 연단한 금, 곧 시련을 통한 믿음을 사서 영적으로 부요해지라고 권면하십니다.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8하)

 

라오디게아는 광택 있는 검은 양모 생산지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양모가 아닌 '흰 옷' 곧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의의 옷을 입고 영적으로 수치스럽게 벌거벗은 것을 가리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이 지역의 특산물인 안약을 사서 치유하라고 권면함으로 그들의 영적 시각 장애를 치유하고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라고 권면하십니다(골 1:27; 2:3).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하는 자의 잘못을 방관하지 않으시며 사랑 어린 책망과 징계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열심을 내라'는 현재 명령형이며, '회개하라'는 부정 과거 시상입니다. 이 두 개의 명령문의 시상 변화는 '단번에 결정적으로 회개하고 지속적으로 열심을 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서서'에 해당하는 원어상 의미는 이미 오셔서 준비가 완료된 상태를 의미하며 '두드리노니'의 원어상 의미는 현재 시상으로 지금도 계속해서 두드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인내와 사랑을 알리시는 모습으로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초청과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한편 '문'에 대한 견해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의미한다고 이해합니다. 앞절에서 현재 회개하고 열심을 내라고 권면하였기 때문에 본문의 '문'은 현재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회개 촉구의 권면을 듣고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의 결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경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안에 거하셔서 그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시며 친밀한 관계를 이루십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현재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과 성령을 통해 교제하십니다(요 14:23).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21)

 

본문은 승리자에게 주시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심은 그의 왕적 지위를 시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음으로 왕적인 지위를 누리시는 것처럼 승리자에게도 그와 동일하게 권세를 허락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것에 대한 약속인 것입니다(롬 8:17; 딤후 2:12).

 

한편 '보좌에'는 단순히 보좌에 앉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명예와 권세를 주시며 참여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권면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적인 통치를 공유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16)

 

우리가 이 마지막 때 가져야 할 신앙은 차든지 덥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은 주님이 절대로 우리에게 원하지 않는 모습일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