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상식 이야기!!

천주교의 성경관: 성경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아들 2020. 6. 9. 15:51

천주교의 성경관: 성경이란 무엇인가?

 

천주교는 ‘성서’(聖書), 또는 ‘성경’(聖經)이라고 하는 경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인간은 어디에서 참된 행복을 찾아야 하는가?” 등 인간이 제기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의미심장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들려줍니다. 우리는 천주교 신앙을 갖기 전부터 문학 작품이나 영화 등을 통하여 창조 이야기나 모세 이야기,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에 관한 이야기 등 ‘성경’(聖經)의 일부 내용과 이미 친숙해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 이 책으로 하느님의 일꾼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2디모 3,15-17).

 

계시의 두 원천

천주교는 ‘성경’(聖經)과 성전(聖傳)을 똑같이 하느님 계시의 원천으로 삼고 있습니다. ‘성경’(聖經)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며, 성전은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위탁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경’(聖經)과 성전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고 공통되는 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하느님의 똑같은 샘에서 흘러나와 하나를 이루며,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만으로는 교회가 모든 계시에 대한 확실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똑같은 열성과 경외심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합니다.

 

성 경

‘성경’(聖經)은 문자 그대로 ‘거룩한 책’, 곧 ‘하느님께서 당신을 인간에게 드러내시는 책’(계시의 책)으로서 ‘인간에 대한 구원과 사랑의 약속을 담은 책’입니다. 성경이 쓰여 진 목적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20,31)입니다. 그러므로 ‘성경’(聖經)의 내용은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인간의 상호 관계,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와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한 가르침 등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聖經)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한데 모아 놓은 ‘전집’(全集)이라고 할 수 있으며 크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나뉩니다. ‘성경’(聖經)은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 후 1세기까지 천 년 이상에 걸쳐 쓰여 졌습니다.

 

‘성경’(聖經)은 비록 인간의 손으로 쓰여 진 책이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움직이시어 당신께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쓰게 하신 거룩한 책입니다. ‘성경’(聖經)의 저자들이 썼다 할지라도 성경의 원저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성경’(聖經) 저자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여러 가지 문학적 형식을 이용하여 인간 구원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구약성경

구약성경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이루셨던 인간 구원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먼저 한 민족을 선택하셨는데, 바로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이집트 탈출, 곧 민족 해방을 하느님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셨는데, 그것은 “나는 너희 가운데 살며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레위 26,12)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만을 믿고 따라야 할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계약을 옛 계약, 곧 구약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의 내용

구약성경에는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법률, 종교, 관습, 문화 등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인류 가운데에서 실현하시려는 계획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먼저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은 그들과 함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면서 장차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궁극적인 인간 사랑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모두 46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용에 따라서 모세 오경, 역사서, 지혜 문학서, 예언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계시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과 맺으신 계약을 확대하여 모든 민족을 상대로 ‘새 계약’을 맺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자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드님을 통하여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한 ‘새로운 계약’(신약)을 맺으셨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그분께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의 구세주시라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된 제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었던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입에서 입으로 생생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격 증인들이 사라져 가고, 또한 그리스도교 신앙이 팔레스티나 땅을 벗어나 세계 각지로 퍼지게 되자 그분께 대한 신앙을 일으키고 전파하기 위하여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기록하여야 했습니다. 신약성경은 이렇게 해서 쓰이게 된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내용

마태오 복음, 마르코 복음, 루가 복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말씀과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네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곧 구세주로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분께서 곧 하느님이시다.” 하는 신앙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모두 27권으로 이루어졌는데, 네 복음서 외에도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적 삶과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 사도들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에게 보낸 신앙에 관한 편지들, 그리고 묵시록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전승[聖傳]

‘성경’(聖經)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요한 21,25)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기록된 것 외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의 공동체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위탁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이것을 ‘거룩한 전승’[聖傳]이라고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성전과 성경을 하느님 말씀의 단일한 위탁물로 보고 똑같이 소중하게 여깁니다.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성경)이나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성전)에 대한 유권 해석은 교회의 공식적인 권위(교도권)에만 맡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도권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높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과 성경과 교회의 교도권은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이 성립될 수 없고, 각각 고유한 방법으로 한 성령의 작용 아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약속에 대해서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자로 기록된 성경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말해 줍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신비스러운 뜻과 인생의 의미, 우리 삶의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보다 더 소중하고 빛나는 교리서는 없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으며, 신앙생활에서 얻어지는 참되고 충만한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성경을 가까이 두고 자주 읽으면서 삶의 지표로 삼도록 합시다.

 

성경이란 이름은?

‘성경’(聖經)은 거룩한 책입니다. 책은 책이되 그 앞에 ‘거룩한(聖)’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책입니다. 왜 거룩할까요? 그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비단 책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관련된 모든 것에는 거룩함을 나타내는 ‘성(聖)’이 앞에 붙어 다닙니다. 성전(聖殿), 성상(聖像), 성인(聖人)성모(聖母), 성수(聖水) 등.

 

그러나 처음서부터 성서가 ‘거룩한 책’이라 불리운 것은 아닙니다. 예전에는 단지 ‘책’이라고 불리웠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성서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BIBLE’입니다. ‘BIBLE’은 성서이기에 앞서 책을 뜻합니다. 책을 나타내는 보통명사에 불과한 ‘BIBLE’이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거룩한 책을 가리키게 되었을까요? 이를 알려면 성경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성경은 원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들 언어로 성경을 기록한 이들은 주로 지중해 동쪽 연안에 자리 잡은 팔레스티나의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민족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와 역사 안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며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기록이 모아져서 바로 성경이 된 것이지요.

 

성경을 기록하려면 필기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이야 연필과 종이가 흔하지만,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쯤인 기원전 1000년경에는 그런 것이 전혀 개발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종이는 기원후 105년에 가서야 중국의 채윤에 의해서 처음으로 만들어졌거든요.

 

그럼 이때는 무엇을 썼을까요? 동물가죽이나 파피루스를 주로 사용했어요. 동물가죽이야 어디서든지 가축을 사육하는 곳이라면 쉽게 구할 수 있겠지만, 가격이 비쌌습니다. 파피루스는 그에 비해 싼 값에 구할 수 있었기에 널리 애용되었어요. 파피루스는 갈대의 일종인 ‘파피루스’의 껍질을 가늘게 벗겨내 서로 엇갈려 겹쳐 놓은 뒤 그늘진 곳에서 말린 일종의 ‘거친 종이’였거든요. 종이라는 영어 단어(paper)는 이 파피루스(papyrus)에서 나왔답니다.

 

파피루스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얕은 개울에서 주로 자라났습니다. 그 전에 기록을 남기는데 쓰였던 점토판과 조개껍질보다는 아주 편리했기에 여러 나라에서 파피루스를 많이 수입해 갔습니다. 그 때 파피루스를 여러 나라로 수출하던 항구도시가 바로 페니키아(현재 레바논)의 비블로스(biblos)였습니다. 이 항구도시의 이름이 워낙 유명했기에 여기서 수입해 온 파피루스로 만든 책도 ‘비블로스’란 이름으로 점차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팔레스티나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파피루스로 만든 대표적인 책은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가리켜 비블로스(biblos)라 했던 것이 오늘날에 ‘BIBLE’이란 이름으로 성경을 나타내게 된 것이랍니다.

 

성경의 원 명칭

성경은 책 중의 책이다. 책이기 때문에 저자, 언어, 출판연대 등 책이 가지는 특징을 가진다. 또한 성경은 이집트나 팔레스티나에서 자라난 갈대의 일종인 파피루스로 만든 종이에 기록되었다. (종이의 크기는 길이가 23-28cm 정도이고 나비는 13-15cm 정도이다).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3세기경에 이미 파피루스 두루마리까지 사용했었다.

 

성경의 명칭은 여러 가지가 있다.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 비블로스는 파피루스의 수출로 유명하였다. 그런데 파피루스에 성서가 기록되었기 때문에 희랍계 유다인들은 그 항구의 이름을 따서 구약성서를 '비블로스' 또는 '비블리아'라고 불렀다. 5세기 이후에는 희랍교회가 성경을 '타비블리아'라고 불렀고 9세기에는 서방 신학자들도 '비블리아'라고 불렀다. 12세기에는 '비블리아'가 성경의 고유 명칭이 되었다

 

초대교회 때는 구약 성경을 인용할 때 성경을 '사끄라 스끄립따(Sacra Scripta)'라고 했다. 그 뜻은 씌어 진 거룩한 책이라는 뜻이다. 즉 글로 씌어 진 하느님의 말씀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글로 쓰여 지고 책으로 엮어진 것이다.

 

성경을 '떼스따멘뜸(Testamentum'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히브리어의 계약이라는 말인 '버리트(berit)의 번역이다. 이 명칭에 따르면 성경이란 계약의 말씀으로서 모세의 중개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계약에 대하여 말하는 책(구약)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성된 새로운 계약에 대하여 말하는 책(신약)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구원의 계약을 '버리트'라 한다.

 

사도 바오로는 계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구약을 옛 계약이라고 했고(Ⅱ고린 3,14), 신약을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계약인 새 계약(Ⅰ고린 11,25)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신약과 구약을 나누는 근거는 예레미아 31장 31절(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에 있다. 이 예언의 실현은 마태 26,28(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의 성체성사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도 이 명칭이 사용되었다.(마태 26, 2 8; 루가 22,20)

 

2세기 중엽에 와서는 신약과 구약이라는 말을 일반화시켜 사용하였다.

구약은 기원전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 사상을 중심으로 엮어진 구원 계약의 책이고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구약을 새롭게 완성하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전 인류와 맺으신 새로운 계약의 책이다

 

이상에서 성경 명칭을 요약하면 성경이란 글로 씌어 진 하느님의 말씀이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구원 계약의 책을 말한다.

성경의 언어

구약성경의 대부분은 히브리어로 쓰여 졌지만 일부분은 아라메아어로 쓰여 졌다.자음 22자로 된 히브리어는 기원전 18세기 셈족이 발명한 언어로서 페니키아인들을 통해 기원전 10세기 희랍인들에게 전해졌다가 로마인을 거쳐 유럽의 알파벳의 기초가 되었다. 히브리어의 방언인 아라메아어는 셈족 언어에 속한 것으로 시리아 유목민들의 언어였다. 히브리어는 원래 아라메아어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아라메아어와 유사하다. 아라메아어에는 동방 아라메아어와 서방 아라메아어가 있는데 예수님 시대에 쓰인 언어는 서방 아라메아어에 속한다.(예 : 마르 5,41 '탈리다쿰' 마르 7,34 '에파타')

 

기원전 3세기경(희랍시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이 희랍어(코이네-속화된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이것을 70인역(셉뚜아진따)이라고 한다. 구약성경의 제2경전과 신약성경은 코이네 희랍어로 쓰여 졌다.

 

기원후 2세기 말경(로마시대)

희랍어로 된 구약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고대 라틴어 번역 중 가장 유명한 것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까지에 걸쳐 성 예로니모(348-420)에 의해 번역된 불가타 성경이다. 이 불가타 역본은 히브리어 원문과 70인 역본은 모두 대본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고도의 신뢰를 받게 되었다. 7~8세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교회가 불가타 역본(통용본)을 사용하게 되었다.

 

신약성경의 언어

신약성경27권을 기록한 언어는 '코이네 희랍어'이다. 이 코이네 희랍어는 기원전 330년경부터 이른바 헬레니즘 문화가 전파된 그리스, 알렉산드리아, 로마제국 안에서 쓰이던 일상용어였다. 이 코이네 희랍어는 신약성서 외에도,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할 때도 사용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고전 희랍어와 구별하여 성경 희랍어라고도 합니다. 이 성서 희랍어는 히브리어, 아라메아어 및 구약성서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상용어이기도 하여 독창적인 의미와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신약성경 27권은 모두 이 코이네 희랍어로 씌어졌는데 저자 친히 썼거나 혹은 구술하여 쓰게 한 그 원본은 분실되고 수사본들만이 전해지고 있다. 원문에서 베껴 쓴 수사본들은 베낀 것을 몇 번이고 다시 베껴 쓴 것들과 희랍어로 된 것만으로도 5,000여종이 있다.

 

성경의 장ㆍ절

오늘날 우리가 성에경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장절의 표시는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었다. 구약시대에는 회당에서 낭독하기 편리할 정도의 절 구분이 있었을 뿐이었다.

 

성경의 장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 후 226년 파리 대학의 학장 '랑똥'에 의해서였고, 절 구분은 랑똥과 동시대 사람인 도미니꼬회 신부 후고(+1263/4)에 의해 시도되었으며 그 후 1551년 파리의 인쇄업자 '엔띠엔느'가 리옹과 파리를 왕래하는 여행 중에 연구한 바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성경의 장 절 표시는 1555년경 프랑스왕국의 인쇄담당자였던 '로베르트 스테파누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인쇄 담당자였으므로 성경을 편집하고 인쇄할 때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도 사용하게 되었다. 장, 절의 표시는 문맥이 끊어지는 점이 있어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차차 수정되면서 오늘날에는 통일된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지기까지 :

구약성경에 관하여

유다인의 경전

하느님의 아브라함, 모세와 맺으신 계약 이야기, 그리고 아브라함 후손이 신앙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겪은 그들의 역사가 실려 있다. 유다인의 경전은 100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쓰여 지고 모아졌다.

 

기원전 10세기경

수세기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 온 이스라엘의 부족전승들이 처음 글로 기록되었다. 이렇게 기록된 낱권들 가운데 몇 몇은 거룩한 문서로 받아 들여졌다. 특정한 사람들의 말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었다.

 

기원전 5-4세기경

율법서(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이끌어 주는 규범들), 예언서(이스라엘이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촉구하는 글들), 그리고 성문서의 대부분(시, 격언, 역사 등)이 경전화 되었다. 논란이 된 책도 몇 권 있었다.성경으로서의 권위가 의문시된 책은 전도서, 에스델서, 아가서 등이다.

 

기원전 3-1세기경

해외거주 유다인들을 위해 구약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70인역이라 불 리는 번역본에는 팔레스티나와 해외거주 유다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구약성서 낱권들이 모아져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는 바로 이 성경에서 틀이 잡혔다. 예수님께서 즐겨 사용하시고 신약성경에서 인용한 구약성경은 대부분 70인 역이다.

 

기원후 90-100년경

유다의 얌니아에서 일단의 유다 랍비(바리사이파)들이 모여 정경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 기원전 400년 이전에 쓰여 진 것

- 히브리어로 쓰여 진 것

- 내용이 윤리적으로 타당한 것

하지만 그에 대한 논쟁은 유다인들 사이에서 계속되다가 기원 후 2세기 이후에야 39권으로 정경이 확정되었다. 70인 역 성경에는 39권 이외에도 여러 권이 더 실려 있었는데,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에서는 그 중 7권을 제 2경전이라 하여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다.

 

신약성경에 관하여

그리스도인의 성경

그리스도교 신앙의 바탕이 되는 내용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 인류에게 주신 그분의 말씀, 사도들의 전교활동, 그리스도교 개종자들을 격려하는 사도들의 편지들이 모아져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성경(그리스도의 성경)을 그들의 성경으로 사용했다. 얼마 후에 가서야 그들 자신의 성경을 집필해 사용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을 완성한다. 교회 조직에 관한 지침과 윤리적인 가르침, 그리고 신앙을 명확하게 하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신약성경은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쓰여 졌다. 그리스도와 구분의 가르침에 대해 묻는 그리스도교 개종자들에게 답변하기 위해서 또 이단(거짓 가르침)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이다.

 

50년대부터 바오로 사도의 편지는 공공 예배 시 회중 앞에서 강론으로 읽혀지곤 했다. 95년경 그의 편지들이 수집되어 사도행전과 함께 공공예배에서 정규적으로 읽혀졌다. 다른 사도들(야고보, 베드로, 요한, 유다 등)에 의해 쓰여 진 편지들 역시 공공예배 때 읽혀졌다.

 

100-105년경 이 편지들은 바오로의 편지들과 함께 묶여졌다.

70-100년경 그리스도에 관해 입으로 전해지던 전승들이 복음서로 기록되었다. 이 시기에 근본적으로 똑 같은 사건들이 네 사람에 의해 정리된 것이다. 이 복음서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널리 이용되었다.

 

150년경 복음서들이 한데 모아지고 정경이 되었다.

180년경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표현하는 글로서, 또 신앙의 근거로서 복음서와 서간들이 한데 묶여졌다.

 

그리스도교의 성경은 어떻게 지금과 같은 정경이 되었을까?

 

구약성경 :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 역 구약성경을 사용했다.

 

ㆍ2세기경 : 사도 시대를 거치면서 초대교회는 구약성서도 영감을 받아 쓰여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래서 교회의 공식전례 때에도 계속 사용했다. 구약성서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명과 관련되어 중요하게 여겨졌을 뿐 아니라 기도생활을 도와주고 삶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

 

ㆍ3세기경 : 교부들은 구약성경에서 정경과 그 외의 책을 구분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둘 다 계속 사용했다.

 

ㆍ4세기경 : 지역 공의회(393년 히포 공의회 등)에서는 나름대로 구약 정경의 목록을 46권으로 결정하기도 했다.

 

* 로마 가톨릭

피렌체공의회(1438-1445)에서 성경 73권(구약46, 신약27)이 정경으로 확정되었다. 그 뒤 트리엔트 공의회(1546)에서 불가타역 성경의 권위를 확인하면서 피렌체공의회의 정경목록을 다시 확인하였다.

 

* 프로테스탄트

웨스터민스터 회의(1643)에서 구약성경 중 7권을 제외시켜 '외경'으로 구분했다.

 

* 동방교회

예루살렘 회의(1672)에서 제2경전 중 토비트서, 유딧서, 지혜서, 집회서 만을 정경에 포함 시켰다. 정경은 하느님으로부터 참된 영감을 받아 쓰여 져서 교회로부터 거룩하다고 인정된 책들을 가리킨다.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이 곧 정경이지만,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신약성경 : 교회는 이단(거짓 가르침)에 대항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성서의 목록을 만들었다.

 

ㆍ100년경 : 사도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갖가지 복음서를 써서 널리 보급했다.

 

ㆍ140년경 : 유력한 그리스도교 지도자였으나 이단 사상을 지님 마르치온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무관하다고 하여 구약성서를 제외시킨 채 마음대로 신약정경의 목록을 만들어 출판했다. 이로 인해 교회에서는 모두가 공인할 수 있는 정경 목록이 필요하게 되었다.

 

ㆍ180년경 : 복음서, 바오로 서간, 사도행전, 유다서, 묵시록 등을 정경으로 인정한 목록이 나왔다. 이 목록을 18세기에 무라토리라는 사람이 발견하였다고 하여 '무라토리 정경목록' 이라고 부르고 있다.

 

ㆍ200년경 : 마리아의 복음, 요한의 비밀서 등 이단 교리인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책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이에 대응하여 다음과 같은 책들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 사도들이나 그와 동등한 권위가 있는 이들에 의해 쓰여 진 것

- 공동체의 공식 예배에서 사용되는 것

 

ㆍ4세기경 : 217년경 이집트 교회에서는 신약정경을 27권으로 결정하였고, 4세기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아나타시오'가 이를 확정 시켜 모든 논쟁을 종식시켰다. 라틴교회와 동방교회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정경의 목록을 확정 지었다.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책들

바룩서, 토비트서, 유딧서, 집회서, 마카베오서 상ㆍ하, 지혜서,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 후서,요한 ⅡㆍⅢ서, 요한 묵시록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한 성경은 그리스어로 쓰여 졌기 때문에 그리스어를 쓰는 곳에서만 사용되었다. 그 후 그리스도교가 여러 나라로 전파되면서 '성경의 번역'이 필요하게 되었다.

 

라틴의 불가타역(최초의 공식 번역 성경) : 382-418년경 교부학자인 예로니모는 교황 다마소 1세의 부탁을 받아 성경을 라틴어로 옮겼다. 그는 시편을 제외한 구약성경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제2경전은 고대 라틴어 역에서, 신약성경은 이미 번역되어있던 고대 라틴어 역본과 그리스어 사본에서 옮겼다. 이 성경은 1000년이 넘게 성경번역의 기준이 되어왔다.(불가타란 말은 ‘널리 알리다’, ‘퍼뜨리다.’ 라는 뜻이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우리말 성경과 세계 각국어로 쓰여 진 성경들 가운데서 자신에게 맞는 성경을 고를 수 있게 되었다. 해마다 새롭게 출판하는 성경들은 보다 쉽게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새롭게 번역된 성경들

가톨릭

200주년 신약성경ㆍ구약성경 원문에 충실한 번역과 해설을 덧붙인 성경으로써 신약성경은 1974년부터 계속 낱권으로 출판되고 있고, 구약성경은 1977년에 11권이 나온 후 중단되었다. 가톨릭 구약성경(가칭)-히브리어 원문에 충실한 번역 성경이 1989년부터 시작되었다.

 

개신교

새 번역 신약성경이 1967년에 출판되었다.

 

공동 번역성서

1977년 가톨릭(선종완 신부님)과 개신교(문익환 목사님)가 함께 번역하여 출판한 성경. 이렇게 성경은 아주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한데 모아지고 묶여졌다. 많은 어려움과 심사숙고 끝에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삶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고, 보다 나은 삶을 배우게 되며 성경의 노래, 시, 역사, 이야기들을 나누며 풍요롭게 된다.

 

성경이 어떻게 하느님 말씀일까요? (성경 입문1)

이번에는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하는 지에 대해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성경을 하느님 말씀으로 보고 있지요. 참으로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편지이지요.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하나의 징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제 여동생이랑 여자 친구에게서 편지가 오곤 했는데요, 그 편지를 마르고 닳도록 읽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제가 좋아하는 이에게서 온 편지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그의 마음을 읽고 싶어 하는 모습이 있지요. 이런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리라 봅니다. 상대에 대한 사랑이 그렇게 표현되는 거라고 봅니다. 하느님 말씀도 똑같다고 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데 만일 우리가 그분을 많이 사랑한다면 그분 말씀 역시 많이 가까이 하리라 봅니다. 그리고 그분 말씀을 가까이 하다보면 그분을 더욱더 사랑하게 되지요. 만일 누군가를 매일 만나서 얘기하다보면 우린 금방 그와 친근해진다는 걸 알지요. 그와 같은 이치입니다. 성경이야말로 그분을 알고 사랑하는 지름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인지에 대해서는 좀 숙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이 진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이 사실이어서 역사적으로 모두가 맞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같은 성경 안에서도 다른 내용이 나올 때는 설명하기가 어렵고 또 성경에서만 유일하다고 믿었던 것이 다른 지역의 문화권 안에서도 발견되고 성경이 그것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당혹감에 빠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성경의 많은 기록이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고 저자의 과장과 상상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혼란과 거부감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요?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성경은 성경 저자를 통해 씌어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성경 저자를 통해 곧 그에게 성령의 영감이 주어져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좀 쉽게 풀어 말씀드리자면 하느님께서는 성령의 영감을 통해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씀을 받아쓰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초등학교 때 받아쓰기 시험을 치듯이 그냥 부르는 대로 받아쓰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쓰는 사람이 살던 시대상황이나 그의 성격, 관심사, 글 쓰는 방식 등등을 무시하지 않고 그것을 통해 당신 뜻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말씀 그대로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거기에는 성경 저자라는 사람이 가지는 구체적 변수가 같이 묻어있는 셈이죠. 그리고 쉽게 풀어 말씀드리다보니 이렇게 말씀드렸지만 성경은 성경 저자 개인의 것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하여 온 조상들의 살아있는 믿음이 녹아있는 전승들을 정리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성경을 편집하는 성경 저자들은 하느님의 이끄심과 영감을 받습니다. 사실 성경이 저자의 상상이나 과장에 의해 쓰여 진 것이 있다하지만 완전히 역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바탕으로 기록되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역사관처럼 역사적 사실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사건에 담긴 교훈을 더 중요시하는 옛사람들의 역사관에 따라 쓰여 졌기 때문에 성경을 볼 때는 모든 기록을 절대적 사실로 보기보다 그 속에 담긴 의미, 성경 저자들이 전하고자 했던 신앙의 진실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 저자들은 성령의 도움에 힘입어 자신들의 깊은 믿음의 삶과 신학적 반성을 바탕으로 얻게 된 진실과 진리를 다양한 문학양식을 빌려 우리에게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일컬어 '저자'라는 표현을 쓸 수 있으면서도 무엇보다도 성령의 영감에 의해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참으로 성경의 저자는 하느님이시며 그런 뜻에서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성경 저자를 통해 그리고 믿는 이들의 공동체의 신앙 전승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경을 교회의 해석 안에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성령의 도우심으로 개인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것이 교회의 입장과 반대되어서는 안 되겠죠. 그리고 비록 성경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라는 좋은 출발점에서 시작했지만 성경 해석 방법에서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려한다면 성경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결국 성경 안에서 모순을 발견하게 되어 성경을 더 경시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또 글자 그대로 해석하려는 태도는 교회의 전승 안에서 성경이 이루어졌음을 무시하는 점에서 교회에 대해 반대하는 태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부족하지만 성경이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이고 어떻게 봐야 하는 지를 살펴보았는데요,

저는 이런 사실에서 하느님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직접 행하시지 않고 성경 저자를 통해 당신 뜻을 계시하시되 그 성경 저자를 존중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우리 일상생활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피조물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형제, 자매 안에서 그리고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사건이나 사람 자체를 하느님으로 보지 않고 본질적인 부분인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봅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그 사건, 사람들을 경시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사용하신 하느님 때문에 그들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방법은 오묘합니다. 당신이 우리 모두를 매우 존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면서도, 당신의 그러한 방법 때문에 우리 역시 당신뿐만 아니라 피조물까지 존중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느님의 방법은 모두가 존중받는, 그러한 것입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위대한 계명인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이 결코 구분되어 있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방법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지혜는 우리를 뛰어넘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무척이나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당신만 존중받고 영예를 얻기 원하시지 않고 모두가 존중되고 귀하게 여겨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바오로 수도회에서 옮긴 글 입니다.

1. 성경을 생명의 책이라고 하는 이유는?

생명이란 살아가는데 필요한 힘과 에너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독자에게 살아가는 힘과 에너지를 주는 책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2. 성경은 하늘과 땅에 대한 정보를 준다.

성경을 모르면서 신앙생활하면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정보 없이 사는 사람이 되어 무식한 사람의 (무식이 용감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어리석음 안에 있게 된다.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느님과는 상관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3. 성경이 씌여 진 과정은 어떠했는가?

모세오경을 모세가 썼다고 여기거나 모두가 하느님 말씀이라고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구약 성경의 핵심인 모세오경이 문서화되기 이전인 구전 전승까지 따진다면 그 역사는 450년에서 500년이라는 그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이 있었다(출애굽).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가나안).2) 출애굽이후 가나안에서 판관시대를 지낼 때 신앙공동체의 질서가 필요했다. 이것은 모든 이의 하느님에 대한 첫 번째 정의가 질서를 바로잡는 일이었다.3) 왕정 시대에 접어들자 다윗 왕 때부터 이 정리를 위한 작업을 문자화하기 시작했다. 이때 하느님을 (야훼)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 정리에 가담한 사람들을 우리는 야휘스트 즉 약자로(J)라고 부른다. 4) 남북이 갈라지면서 북쪽 이스라엘은 새로운 질서가 요청되었다. 이때 하느님을 (엘로힘)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이 작업에 참여한 성서 저자들을 엘로히스트, 즉 약자로(E)라고 부른다. <위기로부터의 탈출 - 마지막 대안은 메시아이다.>

 

★ 위기로부터의 탈출 -

과거 사건을 비추어서 과거를 반성하고 구체적인 미래를 찾아내는 것이다 종말론적인 사건이라고 말하면서 현실적 종말론이라고 하는 것은, 종말(에카텔로지)이란 하느님께서 마지막 날에 온 세상을 지배하신다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사는 그 모습으로 이어져서 내가 구체적인 희망을 미래를 사는 것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신 분이 하느님이시기에 태초의 시간과 종말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같은 시간선상에 있음을 알게 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은 실천하는 모습으로 살면 하느님의 시간 선상에 서게 된다. 종말은 하느님이 지배하시는 시간이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카이로스를 살면 현재화된 종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이 2000년 전의 사건 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 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 된다. 하느님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 구분 없는 일직선상의 시간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 안에 현존하신다. 우리의 마지막이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기에 순간에서 영원으로... 모세오경을 이해하면 구약성경을 거의 다 이해한 것이 된다. 모세오경은 역사와 법으로 이루어져있다. 법은 말씀이며 참 진리이며 역사는 역동적인 구체적인 인간의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성경 속의 인물들은(아브라함을 비롯한 모세. 예언자 신약의 모든 인물들...)

역사적인 인간이 아니라 그들의 시간 속에 살다간 역사적인 사건이 아닌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모든 모습을 그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기에 인간이 하느님을 떠난 선택은 늘 인간을 생명답게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하느님의 개입으로 인한 자비와 사랑으로 새로운 길이 열리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인 구원 가능하게 된다. 이를 망각한 인간은 새로운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기에(죽음이라는 모든 총체적인 고통들) 이스라엘이 죽음에서 이끌어내신 하느님에 대한 원체험을 바탕으로 주어진 온갖 위기로부터 반성(회개)을 통한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성경 속의 인물들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세를 통해서... 그들만의 역사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를 반성할 수 있는 모두를 위한 원형이 된다. 우리와는 상관없는 성경속의 인물로 역사적인 인물로 보면서 제 삼자처럼 얘기해서는, 성경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가 된다. 어떤 모습이든(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관없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모든 모습을 담고 있기에 그들의 벌거벗은 사실 그대로를 통하여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나의 삶의 위치에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 뜻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있도록 비추어 보아야 하는 원형인 것이다.

 

(원형 원체험 원역사 같은 이해이다.)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하여 인간의 힘만으로는 구원이 힘들다는 것을 깨달아가면서 성경은 그 뿌리부터 전체 안에서 인간을 구원해 줄 희망인 메시아에 대한 정점으로 향해가고 있음을 알게 한다.

 

오경 입문

 

1. 오경의 통일성과 다양성

 

그리스계에 이어서 라틴계 그리스도교에서는 구약성서의 첫 다섯 권을 전통적으로

'오경(五經 Pentateuch)'이라 부른다.

여기에서 '경'에 해당하는 서양말(teuch)은 그리스말(teuchos)에서 나온 것인데,

이는 본디 책이나 두루마리를 담는 '상자'를 뜻한다.

그래서 오경의 원뜻은 '다섯 상자'가 된다.

흔히 '율법'으로 번역되는 히브리말 '토라'가 바로 이 다섯 권의 책을 가리키는데,

이 용어는 다섯 권의 책 각각이 아니라 전체를 가리키며,

법적인 의미에 한정되지 않고, 설화 부분들과 함께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과 구원의 역사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또한 오경을 '모세의 다섯 책'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모세를 입법자,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중개해 준 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모세의 토라는 각각 고유한 문학적, 역사적, 사회적 구조를 지닌 여러 법전들,

그리고 이 법전들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이루기 위하여 하신 일들을

하나로 이어 전하는 큰 설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오경의 각 권에 붙여진 제목들 역시 그리스말에서 나왔는데,

이것들은 각 책의 내용에 대한 대략의 개념을 제공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세상의 기원에 대한 책이라는 의미에서 '창세기',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야기를 전한다는 의미에서 '출애굽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레위기'라는 제목은 제의법(祭儀法)에서 레위의 자손들이 수행하게 되는 일에

상응하는 것이고, '민수기(民數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인구 조사에서 유래한다.

끝으로 '신명기(申命記)'는(이에 해당하는 그리스말은 '두 번째 입법'이라는 뜻을 지닌다)

'율법의 되풀이'라는 의미에서 이 제목을 달게 되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자기들의 전통에 따라 각 권을 시작하는

히브리어 첫 문장의 하나 또는 두 낱말을 제목으로 한다.

이렇게 다섯으로 나누는 것이 토라 전체의 통일성을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이 통일성은 한 책에서 다음 책으로 이어지는 연속성에 의해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출애굽기는 창세 46장에 전개된 야곱 가문의 족보를 요약하고,

요셉의 죽음을 알리는 창세기 마지막 절(50,26)의 내용을 되풀이하며 시작한다(출애 1,6).

출애굽기 다음에 나오는 레위기에서는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의 계시가

계속되는데, 이 계시는 출애 20장에서 시작하여 민수 10장에 가서야 끝을 맺는다.

그리고 신명기는 전체적으로 탈출 20장에서 23장에 이르는 법전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모세의 열정적인 담론으로서, 이는 선택된 민족이 약속의 땅에 정착하면서

곧바로 하느님의 뜻을 잊어버리는 위험에 부딪히게 될 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것처럼 성서의 책들이 장으로 나누어진 것은

중세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진 것으로서, 이는 성서를 읽고 연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책 전체에 대략적으로나마 규칙적인 구분을 지으려는 노력이었다.

반면에 유다교 전례 봉독 때 이루어지는 단락 구분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성서 본문의 자연스런 구분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본문을 자연스럽게 나눌 경우 그 단락들의 길이는 매우 다양한 것으로 드러난다.

예컨대 요셉 이야기는 현재 여러 장에 걸쳐 전개되는 반면(창세 37과 390-50),

천사들과 사람들의 딸들 사이에 맺어진 혼인에 관한 일화는 단 몇 절일 뿐이다(창세 6,1-4).

어쨌든 오경에서 현대적인 법전이나 신학 논술에서처럼 엄격한 구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아울러 오경에서 어떤 일정한 연대의 순서를 따라갈 수 있다 하더라도,

오경이 일차적으로 역사 안내서가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 율법과 역사

 

오경의 많은 설화들은 율법을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금송아지의 일화는(탈출 32-34) 약속의 땅을 향해서 시나이산을 떠나라는 명령,

그리고 "너희는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말아라."는 계명과(탈출 34,17) 함께 이루어지는

계약의 표명으로 끝을 맺는다.

다른 이야기들은 제도의 설정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예컨대 코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은(민수 16─17) 사제직 수행을 위해

아론 가문이 선택되는 것을 설명한다.

창세기는 무엇보다도 설화체로, 그리고 레위기는 특히 법률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창세기에는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할례에 대한 율법이 나오고(창세 17,9-14),

레위기에는 아론이 사제로 임명되는 이야기가 나온다(레위 8과 9).

유다교 전통은 토라의 법률적인 면에 먼저 주의를 기울인다.

반면에 그리스도교 전통은 설화적인 면에 더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결국 오경 안에서 하느님에 의한 인류 구원의 역사를 보게 된다.

오경에 대한 문학적인 분석은 그 문학적인 유형들을 어느 정도 구분 지을 수 있게 도와주고,

고대 근동의 문헌들에 대한 지식은 그 유형들을 특징지을 수 있게 해준다.

(형법, 혼인법, 족보 등).

그러나 본문의 분석 작업은 그 자체만으로는 전체의 전망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매우 다양한 유형들은 일정한 의도와 의미와 함께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율법 따로, 설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동시에 역사이다.

역사와 율법은 선택된 민족의 것이고, 이 민족의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신 것들이다.

 

3. 오경의 여러 저작 단계

 

주의 깊은 독자는 오경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문학적인 면들을 보고, 비록 오경 전체에 대한 통일적인 안목을

잃지는 않더라도,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오경의 문체와 서술 방식이 다양하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독자에게는

이 다섯 권의 책이 일종의 전서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오경은 이스라엘의 여러 신앙 고백들이 수세기를 거치면서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정착된 전서인 것이다.

 

이 때문에 어떤 법조문들은 서로 다른 문맥 안에서 되풀이되기도 한다.

예컨대 십계명은 두 번(탈출 20; 신명 5),

축제 절기는 네 번 나온다(탈출 23; 34; 레위 23; 신명 16).

설화 역시 마찬가지여서, 예컨대 창조(창세 1,1─2,4ㄱ 2,4ㄴ-25),

하갈의 소박(창세 16과 21),

그리고 모세의 소명(탈출 3 - 4와 6,2 이하) 이야기 등은 각각 이중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은 아니다. 각각의 병행 본문들이 독창적인 표지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안식일 준수 계명은 어떤 때는 창조에 대한 회상에(탈출 20,9-11),

또 어떤 때는 이집트 탈출에 대한 회상에 그 바탕을 둔다(신명 5,12-15).

같은 한 계명에 대한 이 두 가지 동기는 각각 자기의 고유한 권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의도에서 권위를 부여받은 것으로서,

서로 다른 이 의도들을 알아내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러한 예는 다른 나라 임금 앞에서 자기 부인을 누이로 내세우는

선조들의 이야기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이야기는 세 번 나오는데, 창세 12장과 20장에서는 아브라함과 사래,

창세 26장에서는 이사악과 리브가가 주인공이 된다.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설화 형식으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두 개의 전승이 뒤섞여 한 설화의 형태로 제시될 수도 있는데,

노아 홍수의 이야기가 그런 경우이다(창세 6,5 - 9,17).

이 본문이 지니는 혼합의 성격은, 문체가 서로 뚜렷이 다르기 때문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는 숫자를 각각 달리 열거하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창세 6,19에는 노아가 온갖 동물들을 그 종류에 따라 두 마리씩

방주에 데리고 들어가게 되어있지만,

7,2에는 정결한 짐승은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한 쌍씩으로 되어있다.

그리고7,17에는 홍수 기간이 40일로 되어있지만, 7,24에는 150일로 되어있다.

 

문학적인 다양성은 문체와 특수 용어의 사용에서도 드러난다.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상이성은, 병행 이야기에서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하느님의서로 다른 이름들이 쓰여진 것이다.

예컨대 하갈의 소박에 대한 두 이야기 가운데 한 곳에서는 '주님'을(히브리말로는 야훼

창세 16,3-14), 다른 곳에서는 통상 '하느님'을(히브리말로는 엘로힘 창세 21,9-19) 쓴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전승들의 서로 다른 기원을 밝혀내기 위한

문학적 분석에서 결정적 구실을 수행한 바 있다.

 

이 첫 기준에 다른 상이성들도 더해지는데, 예컨대 계시가 내려진 산이

어떤 때는 시나이로(출애 19,1; 민수 10,12), 어떤 때는 호렙으로 불린다.

(신명기에서는 계속 이 이름으로만 불리지만, 출애 3,1에 이미 이 이름이 나온다).

또 이스라엘 땅의 원주민들은 때로는 가나안 사람들로(창세 12,6),

때로는 아모리 사람들로 불린다(신명 1,19).

이 밖에 다른 것들도 있지만, 특히 지금까지 말한 상이성들이 서로 조합될 때,

성서의 전승들을 이어받은 여러 종교 집단들의 고유한 언어 습관들이

더욱 명백히 드러나게 된다.

 

신명기 훈계의 열정적인 문체는 레위 1-7장에 나오는 제의(祭儀)를 규정하는 기술적인 성격,

그리고 하느님께서 몸소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당신 백성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레위 19장에 나오는

계명들의 간결하면서도 장중한 형식과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문체의 특수성들은 거기서 말하는 내용이 달라서만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생활화하는 방식에서도

서로 다르다는 사실로써 설명되는 것이다.

 

끝으로, 더욱 예술적인 면에서, 절제되고 간결하게 표현된

아브라함의 소명과 같은 이야기를(창세 12,1-4),

소설과도 같은 이사악과 리브가의 혼인 이야기나(창세 24)

요셉의 모험 이야기와(창세 37과 39 - 50) 비교할 수도 있겠다.

이 모든 문학적인 현상들에서 오경이 최종적으로 정착될 때까지의

기나긴 저작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처음에는 성소들 곧 순례지들을 중심으로,

지파들 또는 이들이 모여 이룬 집단들의 구두 전승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 역사의 큰 사건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성소로 모여들었다.

예컨대 파스카 축제 때는 이집트 탈출을 회상하고,

초막절에는 광야에서의 생활을 기념하였다.

시나이 계약법의 수호자이며 해석자, 그리고 모세 전통의 상속자인 사제들은

이 특수한 전통들의 보존과 전승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 전승들은 점점 하나로 이어지는 설화들 또는 더욱 큰 문학적 집합체로 뭉쳐지고,

이를 통해서 지파들 사이의 유대를 더욱 견고히 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통일성이 견고해짐에 따라

하느님을 섬기도록 운명 지어진 이 민족 전체의 역사를 회상하는

더욱 광범위한 종합이 필요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종교적인 전통들과 문학적인 전통들이 결합하여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경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옛 전통들의 흔적이 계속 남아있고,

그 덕분에 이 오경 저작 역사의 여러 단계들에 대하여 구상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흔적들은 오경의 최종 편집자들이

예로부터 중시되어 온 전통들에 얼마나 충실했었는지를 증언해 준다.

 

최종 편집 과정을 거친 오경은 거대한 강에 의해서 형성된 충적지(沖積地)에 비유할 수 있다.

연이어 쌓인 지층들은 각기 자기의 특수한 기원에 대한 자취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적 지층들을 구분하고,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그것들이 탄생하게 된 기원 환경,

또 문학적으로 정착된 주변 상황들에 대한 가설을 세우는 것이 문학적인 분석 작업에 속한다.

계약의 역사와 그 제도들에 대하여 각기 고유한 전망을 지닌 네 가지 주된 흐름이

오경 전체를 이루는 데 이바지하였다는 주장에는 오늘날에도 일반적으로 의견을 같이한다.

 

(1) 후대(後代)의 전승

 

가. 사제계 전승

 

가장 쉽게 밝혀낼 수 있는 문학적 지층은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현재 오경의 기본적인 구조를 이루는 전승이다.

이 전승은 칠일간의 세상 창조로 시작해서(창세 1,1─2,4ㄱ)

모세의 죽음에까지 이르며(신명 34,7-9),

하나로 이어지는 족보를 중심으로 역사를 이룬다(창세 5,1과 각주 참조).

그리고 이 전승은 노아의 홍수와 계약에 이어(창세 9) 아브라함의 계약을 전하고(창세 17),

또한 선조들의 이야기와 모세에게 내린 하느님 이름의 계시 외에(출애 6),

이집트 탈출을 이야기하며, 그 뒤에는 시나이산에서 모세의 중개로 이루어진

율법과 제의적 제도의 계시로 폭넓게 전개된다(탈출 25에서 민수 10까지).

이 전승이 지니는 문체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반복, 일정한 경직성, 숫자의 정확성,

족보와 명부, 그리고 제의와 전례를 돋보이게 하는 모든 것을 선호한다는 점 들이다.

성소와(출애 25─31과 35 - 40) 제사(레위 1 - 7),

그리고 아론과 그 자손들로 구성되는 성직자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레위 8 - 10)

사제 집단에 고유한 증언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이유로 이 전승에 사제계 전승(또는 문헌)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이다.

(서양말에서는 독일어Priesterschrift의 첫 글자인 P로 표기한다).

이 문학적 지층은 오랫동안 오경 전체의 전통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여졌는데

(특히 오경 전체를 연결하는 기본 골격이 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이 전승이 일부 옛 자료들을 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가장 후대에 정착된 것으로 드러난다.

 

사실 이 전승이 여러 제의적 제도에 주는 이미지와 유배 이후 공동체의 조직은 서로 부합된다.

그리고 유배라는 커다란 단절을 겪은 뒤에 유다인들의 공동체가 다시 만들어진 것은

바로 이 전승 체계에 따른 것이고, 에즈라 개혁의 기초가 된 문헌은

글로 쓰여진 이 사제계 전승의 본문이었으리라 여겨진다.

(느헤 8; 느헤 8,18과 레위 23,36 비교).

이 사제계 전승은 오랜 구두 전승을 바탕으로, 바빌론 유배 기간 중에

예루살렘의 사제들이 다시 세운 성전에서 제의를 복구하려는 의도에서

문서로 정착되었을 것이다.

 

이 전승은 하느님께서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모든 인간은 하느님을 섬기고 찬미하기 위해서

그분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다고 증언한다.

하느님께서는 노아를 통해서 온 인류와 계약을 맺으시고,

그 뒤에는 뭇 나라의 선조로 삼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계약을 맺으신다.

그분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 가운데서 레위인들을,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특히

아론과 그 자손들을 선별하시어 백성 전체의 이름으로 제의를 거행하도록 하신다.

그리고 모세와 대사제 아론의 중개로써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에 구원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 위에 하느님의 영광이 자리 잡고 있는 제단에서이다.

이렇게 동일한 핵심을 지닌 계약들은, 완성된 오경이

장엄하면서 질서 정연하게 정돈된 모습을 갖추게 해준다.

그러나 이것은 깊이 구상된 시각이며 본래의 사건들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후대의 시각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종의 기획 문헌이 오경 전통에서 가장 오래된 자료들을 배치하고 재구성하면서

오경 전체의 최종 편집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나. 신명기계 전승

 

두 번째 문학적 지층도 매우 쉽게 밝혀낼 수 있다.

이 지층이 다른 것들과 덜 혼합되었으며 매우 특이한 문체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이다.

신명기에 모아들여진 것이 바로 이 전승이다

(서양말에서는 라틴어의 Deuteronomium의 첫 글자인 D로 표시한다).

율법의 가르침에 집중된 이 전승은 세상의 기원에 대한 역사를 구상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쓰이는 문학 유형은 순종에 대한 호소, 경고,

그리고 위협과 약속을 내포하는 설교이다.

 

율법의 다양한 규정들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핵심적인 계명에(신명 6,5) 연결되어 있다.

또한 율법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은 지속적으로,

'오늘'을 위한 현실성이 강조되는(신명 1,10) 역사적 사건들과 관련된다.

이집트 탈출(신명 16,3), 선조들에게 주어진 좋은 땅에 대한 약속(신명 4,31),

그리고 세상의 창조(신명 4,32) 등이 그것이다.

아울러서 이 가르침은 금송아지 사건을 비롯해서 백성이 광야에서 보인

불충함까지 상기시킴으로써(신명 9,7 이하), 이스라엘에게 삶과 죽음 가운데 하나를

신중히 고르게 한다(신명 30,15 이하).

 

이 전승은 이스라엘의 성소가 하나뿐이어야 함을 강조하는데(신명 12),

이러한 사실은 이 문학 작품이 요시야 임금이 기원전 622년에 수행한

전례 개혁과 관련이 있음을 드러낸다(2열왕 22-23).

물론 이 개혁의 바탕이 된 '율법서'는 현재의 신명기가 아니라,

신명기의 모태가 된 짧고 초보적인 문헌에 불과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전승이 레위인들(신명 18,1-8), 특히 율법의 보유자이며(신명 17,18; 33,8-11)

모세와 같이 설교자인(신명 27,9) 그들이 수행하는 일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는 사실은,

이 전승이 지방에 있었던 옛 성소들에서 봉직하면서 모세가 내린 가르침의 대변자였던

레위인들의 집단 안에서 전승된 것임을 드러낸다.

 

이 전승은 북부 왕국의 멸망(기원전 722년) 직후 유다 땅으로 도망한

북부 레위인들 사이에서, 또는 다른 학설에 따르면, 예루살렘 궁정과 가깝게 지내던

현인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문서화하였을 것이다.

그 뒤 유배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신명기계 문헌은 수차례에 걸쳐 발전되고 확장된다

(신명 4,25 이하).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된 이 신명기계 편집 작업은

신명기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다.

 

이 작업으로, 그 문체나 용어에서 알아볼 수 있듯이, 출애굽기(예컨대 출애 12-13; 32-33)

그리고 심지어 창세기에까지(창세 18,17-19) 오래된 여러 단락들이 첨가된다.

또한 이 신명기계 작업은 여호수아서, 판관기, 사무엘서와 열왕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집트 탈출 이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것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유다 왕국이 멸망하는 시점에까지 이르는 역사를 종합해 낸다.

이러한 대 종합의 서론이 신명기의 처음 세 장에 들어있다.

이렇게 하여 유일하신 하느님, 약속에 대한 그분의 성실성, 손수 땅과 그 제도들을 주신

민족에 대한 무상적 선택, 그리고 실천하는 이들에게는 생명과 기쁨의 원천이 되는 율법을

강조하는 성서 전통에 대한 신명기적인 모습은 구약성서 전체의 증언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2) 전대(前代)의 전승

 

사제계 전승과 신명기계 전승보다 더 오래된 부분들을 고찰할 때,

비록 그 범위가 넓지는 않지만 그것들이 또 다른 기원에서 유래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문학적인 지층들을 가려내기가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것은 최종 편집 과정에서 이 지층들을 권위를 지닌 부분들로서

전체 속으로 통합시키기 위하여 분산 배치시켰기 때문이다.

이들의 문학적 특징들에서 오경 전승의 첫 두 가지 형식을 알아볼 수 있다.

이들 가운데 하나는 상대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지만,

다른 하나는 단편적인 상태로밖에 남아있지 않다.

 

가. 야훼계 전승

 

그 첫 문학적 지층은 하느님을 태초부터(창세 4,26)

그분의 고유한 이름으로 부르는 전승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전승을 야훼계라 한다

(서양말에서는 독일어식 표기인 JHWH 또는 Jahweh의 첫 글자인 J로 표기한다).

이 전승 역시 사제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문학적인 지층처럼, 인간의 창조로 시작되는

태초부터(창세 2,4ㄴ-25) 모세의 죽음에까지 이르는 역사를 이야기한다(신명 34,5-6).

이 전승의 첫 부분은 삶을 누리도록 창조되었지만(창세 2)

하느님께 대한 순종의 거부와(창세 3) 폭행으로(창세 4) 낙인찍힌 인류라는 틀 속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다.

 

하느님께서 인내심을 가지시고 죄인인 인간들을 받아들이신다는 것이

노아와 그 자손들에게 보장되는데(창세 6─8), 이는 장차 그분께서

모든 민족들을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내리실 복을 지향하는 것이다(창세 12,1-4ㄱ).

아브라함과 야곱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하신 약속을 믿는 이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준다.

불타는 떨기 곁에서 이루어진 모세의 파견 장면을 시작으로(출애 3)

이 야훼계 전승은 하느님과 파라오 사이의 긴 대결,

그것에 이어지는 이집트에서의 탈출과 바다 횡단(탈출 14),

그리고 시나이까지 이르는 광야의 여정 중에 일어난 몇몇 사건들을 나름대로 전하고 있다.

이 시나이에서 모세와 원로들은 하느님과 함께 계약을 맺는 잔치를 베풀고,

그분에게서 (아마도 출애 34,14-26 속에 축약된 형식으로 내포된) 율법을 받는다.

이 전승은 또한 시나이에서 약속의 땅까지 이어지는 광야 여정의 마지막 이야기

(민수 11과 그 이하), 그리고 발람 이야기에서도 발견 된다

(발람의 네 번째 신탁: 민수 24,15-29).

야훼계 전승의 서술에는 일정한 성소들,

그리고 씨족의 민속 설화와 관련된 구두 전승의 생생함과 다양성이 보존되어 있다.

 

이 전승은 구체적이고 화려하며, 다채롭고도 순진하기까지 한 문체로 특징지어진다.

이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문체로서(창세 9,18-27에 나오는 노아의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 창세 11,1-9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 참조),

그 저자는 인간에 대해서 말하듯 하느님께 대해서도

표현력이 풍부한 용어들을 망설이지 않고 쓴다.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창세 3,8);

"주님께서 노아 뒤로 문을 닫아주셨다"(창세 7,16);

"그(= 아브라함)가 눈을 들어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있었다"(창세 18,2).

이러한 야훼계 전승의 독창성은 이 다양한 이야기들을 약속에서 그 성취로 향하는

하나의 역사로 구성하는 데에 있다.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도,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단죄도 감추지 않고,

이 전승은 당신의 강복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과 관련지으심으로써

그 복이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미치도록 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행적을 증언한다.

이 전승의 기원과 문서화한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어쨌든 편집은 여러 단계를 거쳤을 수 있다.

자기 형제들을 다스리리라는 영원한 약속이 유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은(창세 49,10;

그리고 37,26 참조) 이 전승의 기원을 유다에서,

특히 다윗 왕조와 가까운 집단에서 찾아야 함을 가리키는 지표일 수 있다.

야훼계 전승은 다윗 왕국에게, 수많은 민족들을 다스리는 나라가 된 것은

하느님의 약속 덕분이며, 이제는 스스로 세상의 다른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복을 전달하는 존재가 되어야 함을 상기시키려는 의도를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나. 엘로힘계 전승

 

가끔 야훼계 문학적 지층과 결합된 여러 설화 단편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 때,

'야훼'라는 이름의 계시가 내려질 때까지,

그분의 일반적인 명칭인 '엘로힘'을 사용함으로써 구분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문학 지층에 엘로힘계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서양말에서는 Elohim의 첫 글자인 E로 표기한다).

이 전승은 또 다른 문학적인 특징들을 지니고 있어서, 몇 개의 중요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아비멜렉 지방에 체류한 아브라함(창세 20), 아브라함의 제사(창세 22),

아마도 요셉 이야기의 많은 부분(창세 50,20 참조), 그리고 모세의 유년기(탈출 2),

하느님 이름의 계시와(출애 3,14), 모세의 장인 이드로와 관련된 이야기(탈출 18) 들이다.

'계약의 법전'이라(출애 20,22─23,33) 불리는, 오경에서 가장 오래된 율법집이

바로 이 엘로힘계 문학 지층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후에 계속되는 엘로힘계 전승을 구분해 내는 일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이 전승을 야훼계 전승에서 나누어내는 것을 포기해야 할 정도이다.

어쨌든 이 몇몇 이야기들은 특수한 전망을 드러낸다.

이것들은 먼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거리가 있음을 드러내고,

인간적인 활동에 하느님 자신을 끌어넣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천사, 그리고 심지어는 인간을 그분 대신에 개입하도록 하며(창세 22,11-18; 32,23-33),

때로는 하느님께 무서운 면이 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전승은 이러한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올바른 자세를, 흔히 밀접한 관계와

동시에 순종을 뜻하는 '경외심'이라는 용어로 상기시킨다(창세 20,11; 22,12).

그런데 이 용어는 엘리야 및 엘리사 예언자와 가까운 집단의 신심을 특징짓는 것이다

(1열왕 18,3; 2열왕 4,1).

예언자의 모습은 모세의 구실(민수 11,25) 또는 아브라함의 구실까지도(창세 20,7)

서술하기 위한 본보기로 쓰인다.

 

그리고 이 전승의 흐름은 흔히 북부 이스라엘 왕국에서 유래한다고 말해진다.

그래서 엘로힘계 전승은 기원전 722년에 일어난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직후

유다에 받아들여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야훼계 설화의 마지막 편집자가 이 엘로힘계 자료들을 자기의 편집에 포함시켰으리라 여겨진다

(그래서 서양말에서는 이 편집자가 때로 JE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 자료들이 본디 서로 독립된 단락들이었는지, 아니면 원래 일관성 있는 작품으로서

그 가운데 많은 부분들이 이 편집 과정에서 희생되었는지 알 길은 없다.

 

(3) 오경의 최종 저작 과정

 

하느님 자신의 유일성에 기초를 둔 하느님 백성의 통일성은

결국 오경 전통의 이 다양한 자료들이 필연적으로 점진적인 결합을 이루도록 만들었다.

이 결합은 여러 세대의 편집자들이 작업한 결과이다.

이들은 전체를 다시 짓고 고쳤지만, 선조들의 유산을 하나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옛 증언들의 특수성을 가능한 대로 존중하도록 그들을 이끌었다.

오경의 저작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가설들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어떤 신앙인들은 모세가 오경 전체를 작성하였다는 옛 의견을 따르는 반면,

어떤 학자들은 여러 율법집의 복합성을 무엇보다도 먼저 본디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부분들의 배합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이러한 주장을 '단편 가설'이라 부른다).

 

또 다른 이들에 따르면 완성된 전체의 일관성은 무엇보다도

어떤 기초적인 문헌의 존재를 전제한다.

이 저술은 이후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보충 가설'이라 부른다).

이러한 전망들 가운데서 그 어떤 것도 논의에서 제외될 수는 없지만,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연속적인 문학적 지층들을 관통하는 편집이

오늘날 오경의 통일성과 동시에 다양성을 설명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가설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 가설은 이 방대한 작품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줄뿐더러, 이 작품의

메시지를 동일한 신비에 대해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여 알아듣게 해준다.

곧 어떤 것은 더욱 심리적인 것으로(야훼계 전승),

어떤 것은 하느님의 초월성을 돋보이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엘로힘계 전승),

또 다른 것은 법적 그리고 제의적인 현실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사제계 전승),

그리고 마지막 것은 하느님의 선택과 사랑을 보여주는 것으로(신명기계 전승)

드러내 주는 것이다.

 

4. 오경의 의의

 

(1) 역사의 종교적 의미

 

오경은 역사와 동시에 율법으로 제시된다.

이 말은 오경이 교의신학적인 논술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시편의 기도들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분의 도움을 간청하고,

지혜문학서들은 개인의 도덕적, 종교적 교육을 목표로 삼는다.

또한 예언서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힘차게 선포하고

이스라엘과 세상의 죄악을 강력히 고발한다.

이에 반해 오경은 우리에게 어떤 한 민족을 드러내 보여주면서,

하느님께서 이 민족을 어떻게 세우고 보호하셨으며

또 어떻게 기적적인 운명을 향해서 이끄셨는지 말해 준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 민족,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온 인류와 맺고 유지하신 관계 속에서

이 책의 의미가 발견되는 것이다.

 

오경의 백성은 거룩한 민족, 곧 전적으로 하느님께 봉헌된 백성이다.

이 백성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 달려있다.

고대 근동의 종교생활에서 아무리 중요한 일을 수행한 제도라 할지라도,

예컨대 왕권조차도 이스라엘에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극히 높은 권위는 하느님의 말씀, 곧 모세가 그 중개자였고 사제들이 전승하였으며,

예언자들이 선포하였고 끝으로 율법서에 보존된 말씀만이 지니고 있다.

이 율법은 단순히 법적인 계율들이나 종교 의식, 또는 규정들로 귀착시킬 수 없다.

그것은 이 율법이 하나의 역사에서 탄생하였고, 또한 계속해서 그 역사 속으로

다시 끼어들기 때문이다. 율법은 한 민족을 택하시어 당신 모습에 따라 만드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레위 11,45) 하느님의 교육이며,

결국은 이 백성의 종교적인 사고의 표현이기도 하다.

 

(2) 오경의 그리스도교적 이해

 

이스라엘 백성이 온 세상에 흩어짐과 더불어 율법서는 이 민족을 하나로 묶는

통일성의 기초가 되고, 이스라엘을 한 민족으로 존립시키는 요소로 대두된다.

그리하여 오경의 법률적인 면들이 강조된다.

토라, 곧 온 세상에 퍼져있는 유다인들의 일상생활을 주재하면서

이들이 한 민족이 되도록 해주는 율법에 대한 성실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랍비들의 이러한 해석이 보편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 보편주의는 유다 민족을 그 중심점으로 하면서 율법에 대한 성실성을 전제할 뿐이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율법의 현실성이 돋보이게 된다.

 

유다교가 지니는 이러한 항구한 가치 외에, 이제 그리스도교 해석에 따라서

또 다른 형태의 보편주의가 시작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구약성서의 약속들이 이미 지켜졌다.

곧 이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고,

새로운 계약이 옛 계약을 마무리 지은 것이다.

첫 번째 계약의 율법은 이제 역사의 한때에 속한 것이었음이 드러나는 한편,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개방됨과 더불어,

하느님의 말씀은 이 역사의 전체적인 지속성으로 세상에 내려진다는 생각이 강조된다.

이는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이 과정은 멈추지 않고, 완성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은혜는 영원하다. 그래서 유다 백성은 그분께 받은 것을 잘 보존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그들만이 토라를 통해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마태 5,17) 예수님을 통해서

육화한 하느님 말씀을 알아듣는다.

이들은 율법 안에서 자기들의 역사를 발견한다.

이들 역시, 파스카 날에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된 구원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고대하며 살아가는 여정에서 공동체를 이룬다.

이들 역시 자기들의 생명이 계약으로써,

곧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위해서 맺으신 계약으로써 결정되었음을 안다.

이들 또한 하느님의 말씀, 그리고 그분의 자비와 성실의 징표에서 양식을 얻는다.

 

오경이 증언하는 사건들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 안에 이루실 업적을 미리 알리고 보인다.

그리고 옛 계약의 제도들 역시 새 계약의 제도들을 준비하고 그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드러낸다.

성전과 전례에 대해서 말해진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몸,

곧 하느님의 영광이 그 위에서 빛을 내는 새로운 성소에 적용된다(요한 2,21).

그리하여 오경은 계속해서 오늘의 인간들에게도, 아브라함의 신앙을 함께 나누고,

온 인류를 위해서 이 선조에게 내려진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도 생명의 원천이 된다.

 

구약성서의 새 번역 사업에 부쳐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가 1991년 3월부터 분도출판사에서 나와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에 큰 기여를 하고 있음은 대단히 다행한 일입니다. 이제 주교회의가 성서위원회를 통해서 성서의 새로운 번역을 결의하여 구약성서의 새 번역이 단행본으로 나오게 된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충분한 수의 전담자가 확보되지 못한 채 추진하는 이 일이 여러 가지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 번역 사업이 금세기 안으로 매듭지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제3천년기가 시작되는 2000년에는 한국 가톨릭교회가 좀더 원문에 충실하고 성서의 본뜻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새 번역 성서를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번역에 참가하시는 모든 분들의 정성과 불타는 사명감으로 실현되어 가고 있는 이 일에 교형 자매 여러분의 관심과 협조를 바랍니다. 아울러, "교회에 대해서는 지탱과 힘이 되고, 교회의 자녀들에게는 신앙의 힘, 마음의 양식, 영신 생활의 깨끗하고 마르지 않는 샘이 되는 힘과 능력을 간직하고 있는"(계시헌장, 21항) 하느님의 말씀이 이 모든 분들의 노력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스며들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1992년 5월 1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이병호 주교

 

일러두기

1. 구약성서 「새 번역」은 두 가지 목표를 지닌다.

첫째는 가능한 한 '본문'에 충실한 번역이다.

둘째는 교회 공용으로 쓸 수 있는 번역본이다.

 

2. 번역 작업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각 위원은 자기가 맡은 부분을 개별적으로 번역한다.

이 번역은 일차로 번역위원들의 독회, 이차로 우리말위원들의 독회를 거친다.

우리말 독회에는 번역자와 성서위원회의 전임들도 참여한다.

성서의 책 하나하나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번역되는 대로 단행본으로 출판한다.

이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번역을 그때그때 선보임과 동시에

번역에 대한 비판과 비평을 수렴하여 추후의 완본에 반영하기 위한 것이다.

 

3. 고유명사는 우선 「공동번역 성서」에 따른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는

성서에 나오는 고유명사의 정확한 표기를 위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작업이 성서위원회 번역 담당 총무의 주관과 번역위원들의 동의 아래 이루어지는 대로

새로운 표기법을 「새 번역」에 적용한다. 이는 음역에도 해당한다.

우선 「공동번역 성서」에 따르고, 이 번역에 음역이 되어있지 않은 것은

위의 작업이 이루어질 때까지 잠정적으로 음역하여 쓴다.

 

4. 완본이 나올 때까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단행본 발행 때에 입문을 붙인다.

그러나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본문의 완역본을 내어놓아야 하기 때문에

우선은 프랑스에서 출판된 「공동번역 성서」(Traduction Oecum?nique de la Bible = TOB,

Les °ditions du Cerf, 1991)의 입문을 번역위원 각자가

우리 독자들의 형편을 참작하면서 자유로이 번역한다.

 

5. 번역에 간단한 각주를 단다. 성서의 원문은 소실되고 없다.

원문에 가까운 본문이 있을 따름이다. 이는 성서 본문에 해석상,

그리고 번역상 수많은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가능한 한 성서의 본문에 충실한 우리말 번역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각주에는 일차적으로 번역상의 문제들을 수록한다. 이 과정에서 본문비평에 필요한 여러 전문 용어 및 특수 명칭들이 사용된다.

히브리말 본문 = 마소라 본문이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마소렛이라는 명칭을 지닌

유다인 성서 본문 비평가들의 작업과 전승에 의해서 내려온 본문으로서,

현재로서는 일반적으로 11세기 초에 제작되어 구 레닌그라드 공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본을 표준 본문으로 여긴다.

히브리말 수사본 = 위의 레닌그라드 사본 이외의 수사본들.

BHS = 히브리말 본문을 출판하면서 판면 하단에 본문비평의 각주를 첨가한 책으로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의 준말.

커팁 = 자음으로만 기록된 원래의 히브리말 본문.

커레 = 유다인 성서 본문 비평가들이 히브리말 본문을 전승하면서

자기들의 의견을 난외에 기록한 것.

사마리아 오경 = 사마리아인들에 의해서 전승된 모세 오경.

쿰란 수사본 = 쿰란 유적지에서 발견된 히브리말 성서 수사본.

게니자 히브리말 수사본 단편 = 카이로에 있던 유다교 회당의 게니자,

곧 전례에서 사용하던 사본들을 어떤 이유로 해서 폐기하기 전에

임시로 보관하던 창고에서 발견된 히브리말 성서의 단편들.

타르굼 = 구약성서를 아람말로 번역, 설명한 것.

이 밖에도 칠십인역, 아퀼라, 심마쿠스, 테오도시온과 같은 그리스말 번역본들,

그리고 시리아말역과 고대 라틴말역 및 불가타

또는 예로니모 등과 같은 고대 번역본들이 언급된다.

 

이런 종류의 각주는 일반 독자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겠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더욱 가깝게 하고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일조가 되리라 생각한다.

이차적으로는 일반 독자들에게 생소한 역사·지리·문화적인 사항들에 대한 설명을 한다.

각주에는 성서의 본문을 설명하는 본격적 의미의 주석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각주를 다는 데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위의 프랑스 「공동번역 성서」의 도움을 받는다.

 

6. 성서 구절은 줄여서 표기한다.

예컨대 '창세 5'는 창세기5장을, '창세 3,15'는 창세기 3장 15절을 가리킨다.

한 절이 다시 세분될 경우에는 ㄱ, ㄴ 등으로 표기한다.

'시편 3,5ㄱ'은 시편 3의 5절 전반부(운문에서는 첫째 줄)를 뜻한다.

창세기 3장 5절부터 10절까지와 같이 절이 이어질 때는 붙임표를 써서 3,5-10으로 표기하고,

이사야서 4장부터 6장까지와 같이 장이 이어질 때는 줄표를 써서 이사 4 - 6으로 표기한다.

둘 이상의 구절이 나올 때에는 쌍반점(;)으로 연결한다.

예를 들어 '이사 10,24; 시편 3,6'은 이사야 예언서 10장 24절과 시편 3의 6절이라는 말이다.

해당 본문의 구절은 책이름을 별도로 기재하지 않고 숫자로만 표기한다.

예컨대 시편의 번역본에 '13,5; 45,3; 욥 10,3'으로 되어있으면,

시편 13의 5절과 시편 45의 3절과 욥기 10장 3절을 말한다.

한 책의 여러 구절들이 계속 나열될 경우 책이름은 앞에 한 번만 기록하며(예: 욥 14,18; 18,4),

같은 책의 같은 장에서 두 구절 이상이 나올 때에는 절을 연이어 온점(.)으로 연결한다

(예: 시편 22,3.15.24).

또한 성서의 여러 책들이 연달아 나올 때에는, 해당 본문의 책을 맨 앞에 넣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위의「성서 각 책의 명칭과 약어」에 나열한 순서에 따라 배열한다.

각주와 난외의 구절이 중복될 때는 각주에만 기재한다.

 

7. 난외 참고 구절은 상기 프랑스의 「공동번역 성서」와

La Bible de J?rusalem, Les °ditions du Cerf, 1981(제2판)을 참조한다.

「새 번역」 번역위원회

 

번역위원

김건태:수원 가톨릭대학 / 김민수:광주 가톨릭대학 / 박광호:대구대교구 남산동본당 /

심용섭:서울대교구 아현동본당 / 이기락:가톨릭대학교 성신 교정 / 임승필:성서위원회 /

정영한:부산 가톨릭대학 / 정태현:성서위원회 / 정학근:대구 가톨릭 신학원

 

(제 2 경전)

민병섭:대전 가톨릭대학 / 범선배:광주 가톨릭대학 / 안병철:가톨릭대학교 성신 교정 /

이영헌:광주 가톨릭대학 / 이창욱:성 바오로 수도회

 

우리말위원

강대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 민병숙:외화 번역가 / 배봉한: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

이승화:한글학회 회원 / 이우식:성서와 함께 / 이해인: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

정양완:한국정신문화연구원 / 신애경:성서위원회

성서 각 책의 명칭과 약어 성서 각 책의 명칭과 목차는 추후에 확정되기까지 현재 사용 중인 「공동번역 성서」를 따른다.

약어는 앞의 두 자(룻기와 욥기만은 한 자)로 쓰며, 책 하나가 여러 권으로 나뉘었을 경우에는 책 이름 앞에 1, 2 등으로 표기한다.

 

구약성서

오경

창세기 <창세> 민수기 <민수> 출애굽기 <출애> 신명기 <신명> 레위기 <레위>

 

역사서

여호수아 <여호> 역대기 하 <2역대> 판관기 <판관> 에즈라 <에즈> 룻기 <룻> 느헤미야 <느헤>사무엘 상 <1사무> 토비트 <토비> 사무엘 하 <2사무> 유딧 <유딧> 열왕기 상 <1열왕> 에스델 <에스>열왕기 하 <2열왕> 마카베오 상 <1마카> 역대기 상 <1역대> 마카베오 하 <2마카>

 

시서와 지혜서

욥기 <욥> 아가 <아가> 시편 <시편> 지혜서 <지혜> 잠언 <잠언> 집회서 <집회> 전도서 <전도>

예언서 이사야 <이사> 다니엘 <다니> 예레미야 <예레> 호세아 <호세> 애가 <애가> 요엘 <요엘>바룩 <바룩> 아모스 <아모> 에제키엘 <에제> 오바디야 <오바> 요나 <요나> 스바니야 <스바>미가 <미가> 하깨 <하깨> 나훔 <나훔> 즈가리야 <즈가> 하바꾹 <하바> 말라기 <말라>

 

신약성서

마태오의 복음서 <마태> 마르코의 복음서 <마르> 루가의 복음서 <루가> 요한의 복음서 <요한> 사도행전 <사도>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로마>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고린>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2고린>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갈라>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에페>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필립>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골로>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데살>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2데살>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디모>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2디모> 디도에게 보낸 편지 <디도>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 <필레>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히브> 야고보의 편지 <야고> 베드로의 첫째 편지 <1베드> 베드로의 둘째 편지 <2베드> 요한의 첫째 편지 <1요한> 요한의 둘째 편지 <2요한> 요한의 셋째 편지 <3요한> 유다의 편지 <유다> 요한의 묵시록 <묵시>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란 그리스도의 선교와 그의 생애를 통하여 비롯된 종교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점으로 출발하여, 그의 인격과 교훈을 근본 규범으로 하는 여러 가지 즉 그의 가르침, 윤리, 믿음, 전례, 행위 등 신앙형태의 총체를 말하는데, 그리스도교 자체를 구약성서의 계시와 그 계약과의 완성이면서 또한 폐기로 이해하고 있는 점에서, 그리스도교 정신의 원류를 구약성서에 두고 있다. 구약성서는 그리스도교의 신관 형성에 있어서의 공헌이 지대하다. 또한 유대교의 여러 가지 사상 가운데서, 종말론을 비롯하여 메시아 대망 사상은 그리스도교 역사관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유대교에서 비롯된 유일신 하느님을 믿고, 그 독생자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으며, 그리스도의 속죄와 신앙과 사랑의 모범에 추종하여 영혼의 구원을 얻고자 이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티나에서 일어나 이교와의 싸움 또는 박해를 겪으면서,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 사상. 풍습 등을 섭취하여 성장을 거듭, 4세기 초에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교는 페르시아, 인도, 중국 등지에도 전파되었고, 8세기에 동방 정교회 즉 ‘그리스 정교회’와 서방 ‘로마 가톨릭 교회’로 갈렸다.

 

그리스도교가 세계 사상에 있어서 큰 힘이 된 것은 가톨릭교회라는 형식을 취한 데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즉 가톨릭은 그리스도교를 거창한 제도 조직으로 만들어 보편적 학문과 보편적 법률에 의 하여 세계사를 지배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로마 제국과 결탁하여 통일성 있는 세계 질서와 세계관을 수립하였다.

 

그리스도인

 

세례를 받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신앙고백 하는 모든 그리스도 교회의 신자들을 총칭하는 말. 여기에는 가톨릭교회의 신자, 개신교의 각 교회의 신자, 동방교회의 신자 들이 모두 포함한다.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교리 사도신경을 믿고 따른다. 가톨릭에 소속된 그리스도교인은 이 외에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인정하고 교회의 미사에 참여하고 성사를 받으며 가톨릭의 성직제도에 따르고 있다.

 

그리스도는 만민의 구세주요, 하느님을 계시하고 하느님께로 만민을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다.

 

구원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에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에게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구원의 은총은 그의 희생 제사의 결과이고,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이 은총은 각자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로운 협력으로 구원에 도달하게 한다. 교회에 속하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도 성령께서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 파스카의 신비에 동참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온전한 구원은 성령을 통하여 예수 안에 자신을 나타내시고 자신을 주신 아버지와 그의 사랑의 신비를 믿고 받아들이는 데 구원이 있다.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는 성립된다.

 

구약에서 준비된 그 나라는 그리스도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고, 이 나라의 완성을 위하고 행동하고 기도하는 교회에 의하여 선포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시작한 나라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예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하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친밀하게 부른다. 특히 비유들에서 계시된 하느님은(루가 15,3-32; 마태 20,1-16)사람들의 필요와 고통에 민감하시고,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아버지이시며, 용서하시고 요청된 은총을 거저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는 말씀과 행적과 자신의 인격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고유한 특성과 요구를 점진적으로 계시하였다. 하느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소명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통하여 이룩된 해방과 구원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포함한 인격에 관한 것이다. 예수의 사명은 치유와 용서라는 두 가지 측면을 특징으로 한다.(기쁜 소식이다)

 

초대 교회의 설교의 중점은 하느님의 나라와 동일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며 인간이 행복해 질 수 있는 길로서 하느님 나라를 제시하신다. 예수는 자신에 대한 모든 증거, 즉 말씀과 업적, 징표와 기적, 특히 죽음과 부활, 그리고 진리의 성령을 파견함으로써 자신의 계시를 완성하고, 보완과 확증을 하였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 구원

 

“도와 건져 준다”로 풀이되는 구원이란 말은 누가 남을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아울러 먼저 상태로 회복시키거나 보다 나은 상태에 놓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 ‘구원’이란 단어는 위험을 제거하는 것과 마음의 위안을 제공하는 양면이 있는 동시에, 건져 주는 이와 건져진 이가 서로 불가결한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구원행위를 표현하는 말은 다양하나 그 중에서도 일반적으로 흔히 쓰이는 ‘살린다’라는 동사가 상황의 긴박함을 잘 말해 주는 바와 같이, 구원은 인생의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문제와 관련된다.

인간은 살다보면 누구나 인생에 대하여 불안감이나 부족함을 느끼면서 행복을 갈망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에 우리가 살아야 할 인생을 통해서 영원히 행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이색적인 주장은 성서의 가르침의 주축이요 교회 가르침의 기초이다. 인간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현세를 낙관적으로 볼 때, 자기가 사는 세계에서 소외된 인간을, 바로 이 세계에서 출발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는 비결은 하느님의 개입에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현 세상에 개입하시어 모든 인간을 위하여 당신과 일치하는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는 사실은 ‘속량’이란 개념뿐 아니라 구원이란 단어로도 표현된다.

 

1. 인간을 위하여 개입하시는 하느님 : 구원이란 우선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을 뜻한다.

2. 역사 속의 모든 사람을 위하여 :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느님의 결의 및 심판과 역사 안에 머무르는 인간의 몫을 구별해야 한다.

 

구원 경륜

 

천지 창조 이전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의 의지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구원 계획. 이는 하느님이 세우신 계획으로서(이사 41,4) 인간의 저항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실현시킬 것이며(시편33,9) 인간 역사 속에서 이미 정해진 목적대로 실현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창세 12,1-3). 마침내 강생하신 말씀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계획은 실현되었다. 이 말씀은 조의 희생물로서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며(로마 8,3) 고통 받으시고 죽어서 인간을 위해 보편적인 구원을 성취하신 몸으로 영광을 받으시고 성부께 돌아가신 분이시다. 구원경륜은 구원 실현의 신비로 드러내기도 한다.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 행위에 피조물을 참가시켰는데, 이들을 통하여 구속의 결실을 두루 전파시켰다. 이들을 통하여 구속의 결실을 두루 전파시켰다. 이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제직인 권능을 행사하여 행동함으로써, 특히 구원의 은총을 만민에게 전하도록 위임받은 성사적 표징으로서 구원행위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확장되는 것이다. 특히 구원경륜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신비전체를 의미한다(에페 1,10). 이 신비로 인하여 자연과 은총 양자의 세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삼을 지향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다.

 

예수라는 이름이 야훼 하느님은 구원이시다.(여호수아)

그리스도는 기름붓다의 의미이며 왕이 된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에서의 왕은 인간 통치자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인간은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역할이 주어진다.

 

그리스도교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 종교이다.

 

하느님의 은총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총이 성령을 통하여 전달되어지고

부활 은총을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구원의 은총은 교회를 통해 비가시적인 은총의 가시적인 표징인 성사로서 전달된다.

우리들이 이 세상 살다가 최종적으로 가는 곳이 어디인지...

죽음이라는 것이 신앙이 있건 없건 간에 인간에게 최대한 극복되어져야 하는 가장 큰 어두움이며 두려움,

절망이라면 그 고통의 끝이 희망으로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 구원이 될 것인데,

영원한 생명에로의 초대이며 우리를 창조하신 그 근원에로의 돌아감이 하느님을 만나는 것으로 여기면서 이 세상 삶의 목적으로 본다.

 

향주삼덕 - 신망애(믿음 희망 사랑)

하느님을 향하게 하는 덕이다.

주님께서 부여해 주시는 덕이며 이 덕을 키워 가는 과정이 신앙이다.

우리들 은총을 구하는 것은 은총이 이 덕의 성장을 위한 것이다.

견진 때 성령 칠은을 구하는 것은 세 가지 덕을 키우는데 도움 주는 것이다.

신앙의 성숙된 단계 여부는 이 삼덕을 말한다. 삼덕이 자라면 하느님과 가까워진다.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고 내가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믿음이 희망을 희망이 사랑을 키운다. 자신의 한계를 넓혀가는 것이다.

믿음과 희망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 사랑이다.

인간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한계가 하느님과의 대면이다.

 

죽음은 내가 살아온 시간이 끝나는 순간이며 하느님과의 완전한 관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아무도 나를 도와 줄 수 없는 상황이다.

자신의 생명의 근원이 하느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어떤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구원의 은총 안에 초대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신자인 것만이 아닌 어떻게 사는가가 과제로 주어진다.

구원의 은총 안에 들어온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입문 성사(세례. 성체. 견진)일뿐 구원의 보증수표는 아니다.

우리들의 삶 안에서 올바른 관이 필요하다. 사건을 통한 하느님의 섭리를 읽어내고 인생에서 만나는 사건들을

누구의 시각으로 보는지, 교회 내에서의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신앙이라는 것이 위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성서공부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아가야할 바를 제시해 주는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성서를 두 가지로 방법으로 활용해야한다

1. 성서를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삼는다.

2. 성서를 세상을 비추는 창으로 보아야 한다.

 

마르코 입문:

우리의 삶 안에서 마르코 공동체를 통해 주신 말씀을 되새겨 보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우리들이 성서를 낯설게 느껴는 이유는 성서가 복합적인 문화의 토양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대하기 때문이다.

예: 창세기의 우주관과 우리들의 우주관은 다르다.

그 시대 그 지역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그것을 이해하고

우리들에게 알맞 은 메시지를 알아듣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성서 공부이다.

 

성서 공부를 왜 해야만 하는가?

 

성서의 내용은 시공을 뛰어넘어 인류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던지며 인간성을 변화시키는 역동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성서는 하느님관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오류 없는 진리이다.

(저자는 인간. 원저자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2000년 전에 남의 나라에서 쓰여 진 작품이기에 시간적인 차이가 있고, 생활환경이 되는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인 배경이 함께 담겨져 있어서 오늘날 우리들이 관점에서는 도저히 해석이 불가능하다. 그런 차이를 뛰어 넘어서서 성서의 말씀을 우리들의 삶 안에서 올바르게 알아듣기 위해 성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성서 그 자체가 신앙인의 삶을 이끌어 가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이 담긴 교과서이기에, 본문에 충실하면 그 자체로도 충분한 부분도 있지만, 본문을 구성하고 있는 배경인 숨어있는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차이를 좁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살아있는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기 위한 시도라고 보면 된다.

 

성서 공부를 하는 목적은

 

성서 본문의 뜻과 메시지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 가르침을 개인이나 공동체의 삶에 연결시켜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이 목적을 이루려면 먼저 본문을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 성서 본문을 실제의 글자나 어구가 뜻하는 그대로 알아들어야 한다.

이는 성사 저자가 본문을 기록할 때 거기에 담고자 했던 의미를 깨우치려는 노력이다.

 

◎ 성서 메시지의 실체는, 본문 안에서 세 가지 기본 요소를 끌어안는다.

 

1. 초대교회의 옛 신앙인들이 정치. 문화. 경제. 사회의 맥락 안에서 엮어낸 삶

2. 주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

3. 그들을 찾아 온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 세 요소, 즉 삶과 믿음과 말씀은 언제나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이 세 요소와 그들 상호간의 관계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거기에서 얻은 메시지를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는 일이 성서 공부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성서는 이스라엘의 역사(구약 성서 - 옛 계약)와 예수님의 이야기(신약성서- 새 계약)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 권의 책이 아닌 한 권의 책이다.

 

성서의 두 가지 핵심 주제

 

하느님의 소개와 인간의 소개이다. 성서의 모든 기록에서 성서 저자들은 하느님은 어떤 분이시고 인간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밝힌다. 이스라엘이라는 온 인류를 위한 하나의 표본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얼마나 성실하시고 고통 받는 인류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지를 뚜렷이 보여주시는 동시에, 그분의 초대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민족에게 생명과 죽음의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다.

 

성서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비리와 타락과 죄악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동시에,(누드박타 정신- 벌거벗은 사실 그대로를) 온갖 회유와 유혹에 굴하지 않고, 성실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 굳은 믿음을 고백한 인물들의 활약상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생명과 죽음의 길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를 가르쳐 준다. 성서에 나타난 인물들은 한 마디로 나와 내가 몸담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전형으로 이 순간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부리심이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담겨 있기 때문에 거룩한 책이다. 영적인 존재인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감각으로만은 알아듣기 힘들다. 성서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자세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한다면, 우리들이 육적인 인간인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기에 온전히 이해하기는 불가하더라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각자의 준비된 마음 상태에 따라 알아들을 수 있으며 우리들이 온전히 알아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씀 그 자체가 지닌 생명력으로 인하여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이 되어 우리들을 재창조해 가실 것이다.

 

?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인가? 인간의 작품인가?

 

- 저자가 있음은 사람의 말이지만, 성서의 원 저자는 하느님이시다. 창세기 처음부터 묵시록 끝장까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쓰여 졌으며, 수많은 사람이 믿음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랜 세월을 두고 성서를 만들어냈고 우리들이 직접 듣지 못하고 있기에 전하는 그 사람의 말을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담겨있으나 저자가 있음은 사람의 말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성서는 수많은 세월과 사람들의 손길이 담겨 있다. 인간에 의해 변화되고 수정되어 진 부분도 있다. 성서의 거의 대부분은 한 민족의 역사서와 비슷하다. 일부는 거의 역사책 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역사에 대한 것이 아닌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대해 그분께 신앙을 고백해 가는 의미의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 왜 거룩한 책이라고 하는가? 한 민족의 일이 신적인 존재를 만나고 알아차리는 방법이 우리들이 하느님의 메시지를 알아듣기에 너무나도 좋은 모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방법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성서는 구약에 있어서 역사적인 사건을 통한 그들의 자아 성찰이 계속 이어오는 과정을 통해서 그분의 은총의 손길이 그들의 삶 안에 있었음을 반복해서 고백하고 있다.

 

성서 73- 4627. (성서 안에 신약 성서가 있고 그 안에 마르코 복음)

성서는 73권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전체가 한권이다. 각 한 권은 각자의 고유한 특성을 갖고 있지만 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분의 이름을 야훼하느님으로 계시 하시고, 그들 선조들의 삶에 개입하시어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인간 구원을 위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인간적인 문화와 역사에 대한 성찰에 기준을 두는 것이 아니라 반성을 통한 그분을 찾아낸다. 자신의 모든 말. 행동. 정치적인 상황들을 통해서 그들의 모든 것은 한 민족이 아닌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의식이 생기게 된다.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들의 미래를 위한 시각을 만들어 간다. 그 안에 생기게 된 그들의 선택된 민족으로서 자의식이 과거. 현재. 미래까지 꿰뚫어 다른 이들이 깨닫지 못한 야훼 하느님을 찾아내고 있다.

 

? 성서-

 

계시를 담은 책으로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내시는 계시를 담고

인간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만들고 구성하는 하느님의 개입들을 담고 있다.

성경 (두루마리의 의미) 성서(책의 의미)

정의 : 하느님과 인간의 역사(히스토리)- 하느님이 인간 구원을 위한 사랑의 역사이다.

계시 : 보이도록 드러내는 것

가려져 있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알게 하는 것이다.

언어적으로는 지적인 면만 충족시켜주는 것에 국한되지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것에 인간의 온전한 대답을 드리는 것이 신앙이다.

 

1) 창조적인 계시(자연적 계시)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단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세상 만물은 양원 속에서 존재한 에 아니라

어느 순간 창조하신 것이다 (이것을 만드신 하느님의 손길을 확인할 수 있다.)

 

2) 초자연적 계시 - 역사 개입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마주 오신다. 인간 역사(삶_안에 개입하기 시작하셨다. 하느님 자신이 보여주시기로 작정하시고

하느님과 인간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를 원하셨기에 무한한 사랑의 초대(부르심)를 하신다. : 인간과의 일치(구원- 지복직관)

구체적인 역사적사건을 통해 드러내신다.(초자연적 사건. 사랑의 사건)

하느님은 시공간에 묶여 계시지 않고 인간을 만나기 위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신다.

계시를 지적으로 생각하면 오류에 빠진다. 신앙심의 깊고 얕음은 비교할 수 없다. 사라의 만남 속에서 지적인 앎이 깊어진다.

이는 더 깊은 통교를 위해서이다.

계시는 깊은 사랑을, 통교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초대이다.(구원의 신비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계시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되었다.

하느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두 가지 방법은 전승과 성경을 통해서이다.

전승의 내용-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의 모든 것

성경- 사도들은 통해서 기록이 있기 전에 말과 행동과 삶으로 살아있는 방법으로 전해지다가 어느 시기에 와서 기록하게 된다.

성경을 자주 읽고 묵상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다.

 

: 하느님의 말씀

공동체의 증언

체험

전승문학(사람들의 고백들이 문학 형식 빌어 그 시대에 따른 여러 장르를 통해 표 현 되어 왔고

그것이 집약되어 하느님의 말씀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체험과 증언들이 성서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찾아가면서

성서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체험한 하느님에 대한 증언이기에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1) 계시- 하느님은 초월적인 존재이시기에 인간의 감각만으로는 파악이 안 되는 분이시다.

하느님이 알려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알려주신 것이다.

2)영감 - 성령의 감도로 쓰여 진 책이다. 인간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때달음을 주신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신 것이기에 이해하는 것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3) 오류 없는 진리- 확실한 진리를 담고 있다.

 

책의 제목: 우리말로 성서 또는 성경이라고 하는데 새 번역은 성경으로 부르기로 했다.

 

1. 비블리아 - 고대 페니키아 항구 도시 ‘비블로스’(biblos)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 도시가 파피루스 수출로 유명해졌기에 당시의 두루마리, 즉 책하면 비블로스 시를 연상할 정도였다.

그래서 비블로스라는 말이 성서의 고유 명사가 되었다. (12세기경부터)

 

2.스크립뚬(scriptum)

후기 유대이즘 내지는 초대 교회에는 성서를 인용할 때(scriptum est: “기록되기를”)를 표시하기도 했다.

요한10,35 (스크립뚬), 마태21,42; 루가24,45(스크립따), 로마1,2(사크라 스크립따)라는 명칭도 성서를 뜻하게 되었는데 씌어진 것.

거룩한 책이라는 뜻이다.

이 명칭들은 성서를 나타내는 용어들이지만, 그 안에 내포된 의미 또한 중요하다.

이 명칭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뜻한다. 따라서 글로 쓰여 지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도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 명칭들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는 글로 씌어진 것임을 말하며,

사건이나 또는 책으로 편집되기 전에 선포된 말은 제외한다. 즉 성서란 글로 씌어지고 책으로 엮은 것을 말한다.

 

3. 구약(Vetus Testamentum: VT) 및 신약(Novum Tesamentum: NT) 성서

라틴어 ‘테스타멘툼’에서 나온 말인데 히브리어의 계약이란 말인 ‘버리트’(berit)를 번역한 것이다. 이 명칭에 의하면 성서란 한편으로는 하느님이 모세의 중개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에 대해 말하는 책(구약)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성된 새로운 계약에 대하여 말하는 책(신약) 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하느님과의 맺은 구원의 계약을 ‘버리트’라 불렀다. 그런데 이 말은 희랍어 번역의 성서(LXX)에서는 ‘디아테게’(diatheke)로 번역했는데, 원래 이 희랍어는 죽어가는 사람이 재산 처분을 위해 내리는 유언을 일컬었고(히브 9,16-17) 증거. 계약. 언약의 뜻도 있었다.

 

사도 바울로는 이 말을 사용하면서 이스라엘의 계약을 ‘옛 계약’이라고 불렀고(2고린3,14),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계약을 ‘새 계약’(2고린11,25)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복음에서 이 명칭이 사용되게 되었고, 그 후 2세기 중엽부터 초대 교회교부들이 이 명칭을 신약, 구약 성서 자체를 일컫는 말로서도 사용도기 시작했다. 결국, 구약은 기원전 하느님과 이스라엘과의 맺어진 구원의 계약의 책이고, 신약은 하느님과 그리스도가 세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와의 맺어진 계약의 책이다. 이렇게 볼 때 성서는 책 중의 책이며, 그로 씌어진 하느님의 말씀이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구원 계약의 책이라 하겠다.

 

성서는 크게 구약과 신약으로 나뉜다.

 

구약은 유대교와 개신교 및 가톨릭 간에 그 범위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다. 유대교와 개신교에서는 오직 히브리어로 쓰인 성서 39권만을 인정하는데 비해, 가툴릭에서는 희랍어로 쓰인 7권을 합해 46권으로 인정한다. 이 희랍어 성서 7권을 가톨릭에서는 ‘제 2경전’이라 하여 경전 서열상이나 신앙의 규범상 두 번째 서열에 놓는다. 그렇다고 성서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은 아니며 개신교에서는 이를 ‘외경’이라 한다. 구약성서의 분류 역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간에 차이가 있다.

 

신약은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 똑같이 27권이다.

 

1. 유대교의 구약 분류법

 

(1) 모세오경(율법서, 토라): 5권(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2) 예언서 - 전기 예언서: 4권(여호수아, 판관기, 1.2 사무엘, 열왕기)

- 후기 예언서: 4권(여호수아, 판관기, 12 소 예언서)

(3) 성문서: 11권( 시편, 잠언, 욥기, 전도서, 아가, 룻기, 아가, 에즈라,

느헤미야, 1.2 역대기, 다니엘, 에스텔)

 

2. 그리스도교의 구약 분류

 

(1) 모세오경:5권

(2) 역사서: 12권(여호수아, 판관기, 룻기, 1.2사무엘, 1.2 열왕기,1.2역대기, 에즈라, 느헤미 야, 에스텔)

(3) 시서:5권(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4) 예언서: 17권(이사야, 예레미야, 아가, 에제키엘, 다니엘, 12 소 예언서)

(5 제 2경전):7권(토비트, 유딧, 지혜서, 집회서, 바룩, 1·.2 마카베오)

그 외에 에스텔 부록과 다니엘 일부는 제 2경전에 속한다.

이 제 2경전은 가톨릭에서는 다시 역사서, 시서, 지혜서,지헤서, 예언서로 분류하여 중간 중간 삽입한다.

유다교에서는 모세오경을 ‘토라(Torah), 예언서를 ’너비임(Nrbim), 성문서를 ‘커투빔’(Krtubim)이라 부르고,

각 호칭의 첫 글자를 따서 성서를 ‘타나크’(Tanak)라 칭하기도 한다.

3. 신약 분류: 가톨릭, 개신교가 똑같다.

 

씌어진 언어:

 

1. 구약 성서는 대부분 히브리어로 씌어졌으며 극히 일부분만 아람어로 되어 있다.

히브리어는 자음 22자로만 되어 있는데 기원전 팔레스티나와 그 인근에서 기원전 1800년경 셈족이 발명한 것 같다.

이것이 페니키아를 거쳐 희랍인들에게 전해지고 거기서 로마인을 거쳐 현대 구라파의 알파벳의 기초가 되었다.

히브리어는 자음으로만 되었기 때문에 그 뜻에 따라 모음을 붙여서 읽는다.

그래서 때로는 한 단어를 다른 뜻으로 알아듣기도 하고 또 달리 발음할 경우도 있어 불편하다.

그래서 기원 후 7세기 경 유대 학자들은 이러한 혼란을 없애게 위해 성서 본문의 뜻을 고정시키고

모음 기호를 발명하여 자음 아래 위 또는 안에 붙였다. 이 학자들을 ‘마소라 학자’들이라 불렀고

그들이 확정한 성서 본문을 미소라 본문이라 한다.

 

2.아람어는 셈족 언어에 속하는 것으로 원래 시리아 유목민들의 언어이다.

이것이 나중에 동방 아람어와 서방 아람어로 분리되는데 성서 아람어는 서방 아람어에 속한다.

아람어는 자음 모음 및 그 외의 독서 부호가 같다. 예수님 시대에 쓰인 언어는 서방 아람어의 일부였다.

 

3. 히브리어 구약 성서는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희랍어로 번역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72인의 율법학자들이 가가 따로 번역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번역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을 바탕으로 이 희랍어 번역을 하느님의 감도로 이루어졌다고 간주하며

이것을 셉뚜아진따(Septuaginta) 즉 70인역(LKK)이라 한다.

이 외에도 ‘아퀼라’(Aguila)역, ‘심마쿠스’(Symmacus)역, ‘테오도시우스’(Tedtius))역 등이 있다.

 

4. 아시아 중서부에서 서방으로 이주한 아리안 족에 의해 생긴 희랍어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한다.

(1) 고전 희랍어: 호머(Homer, BC 800년경))로부터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때 까지(BC 330년경)때 까지 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대부분 고대 희랍문헌은 이 고전 희랍어로 씌어져 있다.

(2) 코이네(Koine) 희랍어: 기원전 330년경부터 기원 후 330년까지 이른바 희랍 문화가 전파된 희랍.

알렉산드리아. 로마 대제국 지역에 쓰인 언어이다. 이 시기에 희랍어는 사실상 세계의 언어였다.

신약성서는 전부 코이네 희랍어로 씌어졌으며 그 외에 구약의 제 2경전도 마찬가지이다.

(3) 비잔틴 시대 희랍어(330-1453년)와 현대 희랍어가 있지만 성서 희랍어와는 별 관계가 없다.

 

5. 신약성서는 70인역 구약성서에 사용된 코이네이면서 다소 독특한 면이 있어 우리는 이를 성서 희랍어라고도 한다.

즉 성서 희랍어는 히브리어, 아람어, 구약성서 및 70인역 성서의 영향을 받았으며 독창적인 의미와 사상을 지니고 있다.

이 희랍어의 신약은 다시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시리아어, 꼽트어, 라틴어 번역 등이 그것이다

고대 라틴어 번역 중 가장 유명한 4세기말에서 5세기 초까지 예로니모가 번역한 불가타(Vulgata)성서이다.

 

성서의 장과 절:

 

1226년 파리 대학의 학장 랑똥이 성서를 장으로 구분했으며 성서의 절 구분에 관한 시도도 했다.

같은 시대의 도미니코회 후고도 절 구분을 했으나 완전한 것은 되지 못했다.

그 후 파리의 인쇄업자 에띠엔느가 리용과 파리를 왕래하는 중에 이를 연구하여 1551년에 발표했는데

이 구분은 매우 실용적이어서 대부분은 성서가 이 구분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들이 만든 장 절 구분은 항상 본문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 장 절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때의 측정:

 

고대 히브리인들은 한 가지 달ㄹ겨 체계로 날짜를 계산하지 않고 주변 근동 인들의 달력 체계에 영향을 받아

다양한 날짜 계산을 해왔으므로 시대별로 그 계산법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생겨난다.

 

(1) 일. 월력

 

일. 월력은 고대 근동의 거의 모든 민족, 곧 수메르,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히브리, 아랍, 그리스인들 사이에 널리 사용되었다.

예외가 있다면 한 달은 30일로, 일 년을 365일로 고정시키고 마지막 달에 5일을 추가시켰던 이집트인들 정도이다.

일 년은 태양의 주기를 말한다. 곧 태양이 같은 계절에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이다.

한해의 시작은 춘분으로 추분으로 보는 다양한 관습이 있었고,

히브리인들의 경우는 성조 시대에는 춘분을 한해의 시작으로 보는 관습을 따랐던 것 같지만,

왕정시대에 와서는 가나안 문화의 영향을 받아 추분을 새해로 받아들였다.

가나안 인들과 북서 셈족은 농경문화와 직결되는 추분 새해를 지켰다.

가나안 농경민들은 가을에 씨를 뿌리고 겨울에 키워서 초여름에 추수한다.

그러나 추분을 새해 관습이 도입된 다음에도 춘분 새해를 지키는 관습이 특정 지역에서는 계속되었는데,

바빌로니아 유배에서 돌아 온 이후, 바빌로니아 달력의 영향으로 다시 춘분 새해 관습으로 바뀌었다.

이 때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의 달 이름을 까지 채택하게 되었다.

출애 12,2-18에 보면 과월절이 들어 있는 달(아빕-니산)이 한 해의 시작으로 성대하게 선포되는데

많은 학자들이 이 대목을 유배 이후에 편집된 것으로 본다.

 

(2) 달

 

달 이름을 두고 유대인들은 세 가지 체계를 따랐다.

1) 바빌로니아 유배 전에 이스라엘인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하던 대로 계절에 따라 달에 이름을 붙였다.

구약성서는 이 중에 네 가지 이름만을 소개한다. 아빕은 언제나 과월절과 연결되어 나오고

다른 세 이름인 시브와 에다님과 불은 솔로몬 성전의 봉헌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이 네 가지 가나안 식의 달 이름의 뜻은 모두 농사 절기의 자연 현상과 관계가 있다.

봄의 첫 번째 달인 ‘아빕’은 ‘푸른 밀 이삭’이라는 뜻이고,

봄의 두 번째 달 ‘에다님’은 흐르는 개울, 가을의 두 번째 달인 ‘불’은 소출 가축을 의미한다.

 

2) 가나안 식 달 이름은 이스라엘 초기 왕정 시대부터 사용하지 않게 되고,

상업과 수공업이 점점 중요하게 부각되면서 히브리인들은 달 이름에 숫자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 체계는 가을보다는 봄, 더 정확하게는 춘분을 기점으로 달의 이름을 정한다.

3) 마지막으로 바빌로니아식 체계로서 유대인들은 유배 이후에야 비로소 이 체계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랍비 시대에 와서는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이름들의 어원학적 기원은 정확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수메르 신화와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3) 하루

이스라엘을 비롯해 아테네인들과 게르만 족, 그리고 일반적 유목민들은 하루를 해질 때부터 다음날 해질 때까지로 계산했다.

그들에게 하루의 시작은 밤, 그늘이 내리는 때였다. 이런 관습은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 사이에서 지켜지고 있는데,

그들은 예를 들어 안식일과 해방절을 비롯한 여러 축제들을 해가 지면서부터 거행하기 시작한다.

로마인들은 하루의 시작을 자정으로 보았다.

 

(4) 시간

구약성서는 ‘시간’이라는 말이 나오는 대목은 다니 3,6; 5,5 두 곳 뿐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낮이나 밤의 서로 다른 시간대를 지칭하기 위해 아침, 한낮, 한밤중과 같은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하루 시간의 정확한 구분은 이스라엘인들이 바빌로니아인들에게 배워 유배에서 돌아온 뒤에야 비로소 도입하기 시작했다.

 

(5) 서력과 예수 탄생

예수께서 사시던 시대에는 ‘율리우스력’이라는 연호를 썼는데 이는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 기원전 46년에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스도 사상이 서구 세계에 널리 퍼지면서 기원을 구세주 강생으로 헤아리게 되었다.(AD :Anno Domini)

이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정통한 난쟁이 디오니수스라는 한 수사가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구세주 탄생과 관련한 동방 가톨릭과 서방 가톨릭의 서로 다른 전통을 일치시키기 위해

구세주 강생 기원 원년을 서기 1년 3월 25일부터 헤아리기 시작했고 양력 설날은 1월1일로 정했다.

그가 서기의 3월 25일로 잡은 것은 당시에 이미 고정된 예수 탄생일 12월25일로부터

태아의 잉태 기간인 아홉 달을 거슬러 계산한 결과이다.

성탄을 12월 25일로 정한 것은 디오니수스보다 훨씬 이전으로 올라간다.

일년 중의 밤이 가장 긴 동지는 태양이 남쪽 하늘 끝에 가 있다가 북쪽 하늘로 돌아오기 시작하는 날이다.

율리우스력에 따르면 동지는 12월 25일이었다.

페르시아의 빛과 진리의 신인 미트라 신을 숭배하던 고대 로마인들은 이날을 ‘무적의 태양 탄일’로 경축하였다.

274년 12월25일, 로마 황제 아우렐레우스는 태양신을 로마 제국의 주요 수호신으로 선포하고

‘마르시우스 뜰’에 태양신의 신전을 지어 봉헌하면서 이 날이 제국의 큰 축제일로 자리 잡혔다.

이런 로마의 이교도 풍습에 맞서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3세기 초에 벌써 그리스도의 탄생과 동지를 대비시키고

‘정의의 태양’이라는 호칭을 부여하였다.

정확하게 언제 어떻게 태양신의 축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일로 바뀌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미 4세기말에는 12월 25일이 예수 성탄으로 자리 잡혀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달력은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제정한 그레고리력이다.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예수 성탄 이외에도 부활과 성령강림 대축일 등 이동대축일 산정 문제로

오랫동안 동. 서방 교회 간에 일어난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1582년 연력 개편을 실시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나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 사건에서 언제나 자신들과 인류 모두의 삶에 깊은 영향을 주는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서구에 정착된 서기력과 성탄 축일의 산출 근거를 정확하게 따지는데 몰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신앙 공동체와 인류가 그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실현시키려 노력하는 것이다.

 

축제:

 

이스라엘 종교 축제는 역사적 사건들과 일상생활을 반영한다. 율법의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축제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오래된 관습과 역사에 기원을 두고 율법 또는 모세오경에서 정한 공식 축제이고,

다른 하나는 비교적 후대의 역사적 사건에 바탕을 둔 비공식 축제이다.

공식 축제에는 3대 순례 축제와 ‘정한 때’라고도 부르는 안식일과 연관된 축제들이 있다. 비공식 축제에는 부림절과 봉헌 축제, 니가노르 패배일 등이 잇는데 모두 유배 이후에 생겨났다. 그 밖에 축제와는 별도로 이스라엘에는 여러 종류의 금식일이 있으며 여기에도 공식 금식일과 후대의 역사적 사건에 바탕을 둔 비공식 금식일이 있다.

 

(1) 삼대 순례 축제

 

1) 해방절

 

이스라엘의 가장 큰 축제요 그들의 경사 종교적인 토대라 할 수 있는 해방절은 유목민 축제인 과월절(passover)과

농경민 축제인 무교절(누룩 없는 빵의 축제)에서 유래한다.

? 과월절 ? 무교절 ? 과월절과 무교절

 

과월절과 무교절:

 

과중절과 무교절은 이집트 탈출을 기면하기 위한 것으로 ‘기면’이란 과거의 체험을 현재로 끌어들여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을 말한다.

나중에 나라를 빼앗기고 팔레스티나에서 멀리 떠나 살게 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라는 말로 과월절 예식을 끝맺는다.

 

2) 오순절

 

이스라엘의 3대 축제 가운데 두 번째인 오순절은 첫 보릿단을 수확할 때 지냈던 가나안 농경민들의 맥추절에서 비롯했다.

히브리인들은 과월절 첫날에서 일곱 주간이 지난 시반달 6일에 이 축제를 지냈다(신명 16,9-13).

여기서 일곱 주간은 50일을 뜻하기 때문에 그리스어 ‘펜테코스테’. 곧 오순절이라는 이름이 이 축제에 붙여지게 되었다.

사오행전 2장을 보면 베드로가 열두 사도를 대표하여 오순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순례 온 이방인 지역의 유대인들에게

설교를 하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과월절 시작과 맞아떨어지고,

성령 강림 대축일은 과월절의 50일 뒤에 지내던 오순절과 일치한다.

이로써 과월절과 오순절은 그리스도교의 전례력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히브리인들은 이 축제를 가나안 사람들에게 받아들여 보리수확 시작에서 밀 수확 끝으로 날짜를 바꾸고,

보리 대신 새 밀로 밀가루를 반죽하여 만든 빵 두 개를 봉헌했다(레위 23,15-21).

맥추절의 본디 의미인 맏물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을 그대로 지킨 것이다. 곡식의 첫 열매는 뒤에 거둘 수확 전체를 대표한다.

순수한 농업 축제였다 오순절은 신구약 중간 시대에 이르러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과 연결된다.

유대 묵시문학의 하나인 희년서 6,17은 이 축제의 목적을 하느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계약을 해마다 새롭게 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한다.

이렇듯 오순절에 처음에 가나안 농경민의 축제였던 맥추절이 후기 유대교 사상 안에서 노아와의 계약과 시나이 산의 계약,

곧 이스라엘이 하느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사실과 연결되면서 종교적인 축제로 바뀐다.

 

3)초막절

 

곡식이나 열매의 첫 소출을 바치는 시기는 오순절로 시작하여 초막절로 끝난다.

이스라엘의 3대 축제 순례 가운데 본디 초막절만이 본격적인 순례 축일이었다.

이 축제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수콧’인데 ‘나뭇가지로 만든 안식처’라는 뜻이다

수확을 끝낸 농부들은 이 안식처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였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추수절로 통하는 이 축제 역시 농경문화에 그 뿌리를 두는데

그들은 마지막 수확물인 포도와 근본 목적을 인간의 힘으로 여러 신을 움직여 자연의 혜택을 받으려는 데에 두었던 반면,

히브리인들은 하느님을 자연을 통제하는 데에 인5간의 간섭이나 영향을 받지 않는 초월자로 인식했고,

전례를 통하여 하느님께 마땅한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렸다.

그러나 가나안 농경문화의 영향권에 살던 히브리인들도 가나안 주민들처럼 신을 움직여 자연을 통제하려는 유혹에 곧잘 떨어 졌다.

후대에 오면서 이 축제는 시나이 광야에서의 방랑과 천막생활을 되새기며 이스라엘과 야훼와의 신혼 시절을 떠올리는 축제로 바뀐다.

이 축제가 열리는 기간은 티쉬리달(음력 9월경) 15일부터 22일 까지 8일 동안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제물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순례행진을 하며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로 초막을 짓고

주님 앞에서 피리 소리에 맞추어 노래와 춤으로 축제의 분위기를 흥겹게 돋우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 모습에서 초막절의 종말론적인 성격이 드러나는데

이는 신약성서에서도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다볼산에 올라가신 후 있었던 베드로의 제안에서도

초막절이 담고 있는 종말론적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주요 축제는 이민족들의 풍습에서 유래하지만 결국 종교적인 사건들과 깊이 연관된다.

특히 본디 가나안 농경문화와 옛 유목문화의 민속제였다. 3대 순례 축제들은 이집트 탈출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의

핵심적 종교사건을 거치면서 그 사건의 중요한 순간들 곧 탈출, 시나이 산에서의 계약, 광야생활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로 바뀌었다.

 

사고방식과 사상

 

성서 저자들의 사고방식과 사상은 고대 근동과 그리스 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야훼 신앙 때문에 뚜렷이 드러난다.

 

(1) 인간관

 

창세기의 저자는 천지 창조 이야기에서 인간을 창조의 중심에 놓는다.

다른 피조물과 더불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땅을 차지하고 다른 동물을 지배한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그분께 메인 존재이면서도 자유를 누리고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에서는 그들을 지배하고 다스린다.

인간은 하느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여 자연에서 혜택을 받게 하셨다.

그러나 이 혜택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을 요구한다. 그의 모든 노력은 자연의 법칙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 자신도 다른 피조물처럼 자연의 법칙에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2) 수 개념

 

성서에 등장하는 7, 4, 10, 12는 완전한 숫자로 다음의 뜻을 가진다.

 

▶ 7: 음력 한 달의 4분의 1이다.

 

▶ 4: 원래는 바람의 네 방향 동서남북으로 사방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숫자였다.

4는 온 세상을 뜻하는 숫자로 통한다.

 

▶ 10: 역사의 한 주기를 말한다. 아담부터 노아까지가 10대, 셈부터 아브라함까지가 10대 였다.

 

▶ 12: 원래 이스라엘의 열 두 부족을 가리키는 이 숫자는 족보에서 후손들의 수를 계산할 때 사용했다.

 

▶ 40: 이스라엘은 보통 40년을 한 세대로 계산했다. 노아의 홍수 40일, 광야에서의 40일 여정,

엘리야의 호렙 산까지의 40주야 여정, 예수님의40일 단식기도.

▶ 70: 7에 10을 곱한 숫자로 이집트로 들어갈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70명이었고. 예레미아에 의하면 바빌로니아 유배기간도 70년이었다.

또한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때 원로 70의 도움을 받았는데 실제 숫자는 72명이었다.

이 72는 예수님의 선교 파견의 목적으로 파견하신 72명의 제자 숫자와 같다.

 

이밖에 성서에 자주 나오는 3은 완전한 솟자는 아니지만 교부 시대에 삼위일체를 가리키는 숫자로 통하였다.

이스라엘의 역사:(역사 정리 참조하기)

1800년(아브라함의 부르심 → 1250~1230년(이집트 탈출) → 1230~1220년(가나안 정착기)

→ 1200년(판관기: 삼손~ 사무엘)) → 1000년(왕정기: 사울→ 다윗 → 솔로몬 )

 

남(유다)597.987.978년 바빌론 유배

 

북(이스라엘) 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

 

이스라엘에 있어서 가장 종교적인 근거가 되는 것을 이집트 탈출이다.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양성되고 정화되는 시기였다.

그들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는 원체험을 통해서 하느님 백성이 된다.

그러나 그들의 삶 안에서 그들은 하느님을 자주 잊어버리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 있지 못함으로써

바빌론 유배라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성찰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완전히 허물어뜨리는 계기가 된 바빌론 유배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 순종치 못했던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새로운 반성과 함께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 간다.

하느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진지한 고백을 담은 성서 기록을 확정한다.

유배와 귀환의 과정 중에 반성을 통해 갈등과 함께 자신들의 신원을 찾아 간다.

성서는 반성의 역사 의미의 역사로 볼 수 있다.

구약 46권 중에 5권의 모세오경이 핵심이며 41권은 모세오경에 대한 해석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중요한 출애굽 사건에 비추어서 유배에서의 고통을 재해석 해 낸다.

336년 알렉산더 대왕에게 페르시아가 망함 →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왕조가 넷으로 갈라짐

→ 167년 마카베오 항쟁 → 142년 자주권을 가지게 됨(다윗 왕조를 잇는다.)

→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세력을 확장 → 324년 종교 자유

 

유대이즘:

 

유대이즘은 ‘유대인들의 종교’ 유대인들의 믿음과 실천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대이즘을 보통 유대교라 한다. 이 유대교는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에서 시대에 따라 여러 특징을 보인다.

성조 시대, 시나이 계약과 모세 율법 시대, 유배 이후 시대, 랍비 시대들은 그 나름대로 고유한 유대교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러나 보통 학계에서는 우대이즘을 제2성전 유대이즘과 랍비 유대이즘 둘로 나뉜다.

 

1) 제 2성전 유대이즘

 

기원전 587년에 있었던 남왕국 유대의 멸망과 바빌로니아 유배는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선민의식, 하느님과의 계약, 율법의 선물, 예루살렘 성전의 안전, 약속된 땅의 소유 등

유대이즘의 바탕이 뿌리째 뽑혀 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비탄에 잠겼다. 그들은 이 비극이 왜 자신들에게 닥쳤는지 그 이유를 따져 물었다.

결국 그들은 주님께서 내려 주신 율법을 어기고 그분이 제시한 길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하여 유배 이후의 유대교는 새로운 열정으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데 전념하게 된다. 유배 이후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재건에 나섰다.

사제이면서 율법학자였던 에즈라와 총독 느헤미아 주도로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지고, 율법의 말씀을 새롭게 읽으며 연구하게 되었다.

선민의식, 계약, 성전, 땅, 등 유대교의 근본 요소들은 율법의 철저한 준수와 직결되면서 새로운 의미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기원전 167년 바빌로니아 유배 못지않게 유대인들에게 충격을 준 사건이 발생하였다.

시리아 임금 안티오쿠스 4세가 유대인들을 헬라(그리스)화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에 제우스 상을 세워

성전을 모독하고 유대교의 관습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 유대교 말살 정책은 마카베오 항쟁을 불러 일으켰고,

유대인들의 마음과 정신에 율법 준수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유배 이후, 유대이즘에는 묵시사상이 등장하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 하느님을 변호하는 구실을 한다.

하느님의 계획과 목적은 세속의 일반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단절을 거쳐 이루어진다.

미래는 분명 하느님의 손안에 놓여 있고, 약속의 실현은 하느님의 근본적인 개입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다.

 

2) 랍비 유대이즘

 

랍비 유대이즘은 후기 유대이즘으로 불리는데 제 1.2차 유대 항쟁이 중요한 계기가 된다.

제 1차 유대 항쟁의 결과는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였고, 이 파괴와 더불어 유대교의 사제직과 종교. 정치 제도도 끝장났다.

제 2차 유대 항쟁(132-135년 하드리아누스 치세 때에 시몬 바르-코시바는 폭도의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근처 북쪽 )의 결과는

우대국의 종말이었고, 이제 유대인들은 팔레스티나를 떠나 이방인들의 땅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후기 유대이즘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사두가이파의 몰락과 바리사이파의 득세이다.

대 사제와 사제들을 중심으로 위세를 떨치던 사두가이파는 제 2차 유대 항쟁으로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자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고,

대신 율법의 연구와 실천을 언제나 강조해 온 바리사이인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제 후기 유대교는 성전의 제사 대신

토라 중심의 믿음과 회당에서 거행되는 예배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바리사이파의 진정한 후예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 규정과 지침을 제시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중의 믿음과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3) 랍비 문학

 

70년 이후에 유대 랍비들이 남긴 문헌들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법적 문헌, 설교적 문헌, 묵시 문헌이 그것이다.

? 로마가 이룬 평화는 강력한 군사력에 바탕을 둔다. 로마의 황제와 식민지의 총독들은 제국의 정책과 안정에 협조하는

민족과 시민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었으나, 협조하지 않거나 항거하는 무리를 보면 군대를 풀어 무자비하게 응징했다.

로마의 행정관들은 유대 백성의 경제 사정이나 종교 관습에 둔감했다. 그들은 재임 중에 식민지 주민들에게서

되도록 많은 세금을 가두어 로마에 바치는 일과 반란과 소요를 미리 막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로마식 삶의 양식과 기준을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무리하게 정욕시키려 했고 기회 있을 때마다 적대감을 부채질했다.

로마에 대한 반감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토지세와 물품세와 인두세를 좀더 정확하게 부과하기 위해

식민지 전체에 인구 조사령을 내렸을 때 더욱 높아져 반란으로 이어졌다.

인구조사에 관한 언급은 루가 복음에 나오는데 루가의 기록은 역사적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출생을 다윗 임금의 불생과 연결하려는 신학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호구 조사령’이라는 루가의 표현부터 잘못이다. 이미 헤로데 대왕 때에 호구 조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구조사는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하느님 백성의 수를 헤아리는 것은 그 백성의 주인이요 임금이신

하느님에게만 유보된 권한이다. 사무엘 하권 저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다가 하느님의 진노를 산 이아기를 전한다(2사무24장).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에 대한 복종은 십계명에서 가장 중요한 제 1계명을 어기는 행위라고 믿었다.

 

1) 제 1차 유대 항쟁: 기원후 66-70년. 로마의 행정관 플로루스의 부패와 불의, 잔인함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은

시리아에 주재하는 체스티우스 갈루스 총독이 66년 과월절 동안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때 집단 항의로 표출되었다.

유대임 순례자 무리는 플로루스를 대동하고 나타난 체스티우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였으나,

그가 시리아로 돌아간 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자 유대는 점점 항쟁의 상황으로 빠져 들어간다.

먼저 가이사리아에서 유대인들과 헬라계 이방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치지 않는 플루스의 부패와 계속되는 유대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계속 그를 권좌에서 내쫓지 않자

유대인들이 일어나 예루살렘 시가지 전체는 폭동의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열혈당원을 중심으로 한 유대 반군은 우대 지방의 요새 성읍들을 장악하면서 점점 세력이 커졌다.

유대 반군이 제일 먼저 점령한 요새는 헤로데 대왕이 세운 철옹성 마싸다이다.

그곳에 무기 창고가 있었기에 마싸다 점령은 반군에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70년 티투스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 시내의 모든 건물은 깡그리 무너졌고 예루살렘에서 빠져나간 반군 패잔병들은

사해 동쪽 성읍 마케루스로 도망가서 싸우다 72년 여름에 그곳이 무너지자 다시 사해 남서쪽의 철옹성 마싸다로 몰려가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로마 군대는 마싸다 요새의 방벽보다 6미터 더 높이 공격용 탑을 설치하고

‘양 머리 철퇴’로 73년 요새의 방벽을 뚫었다. 로마인들은 승리를 날이 밝기를 기다렸는데

다음날 요새 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린이를 포함하여 남자와 여자 960명의 주검만이 그들을 기다릴 뿐이었다.

마싸다 요새 안에서 저항하던 최후의 반군은 밤사이에 모두 자결했던 것이다.

우물에 숨어있던 어린이 다섯과 여자 둘만이 살아남았다고 요세푸스는 전하나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실제로는 포위된 반군들이 굶어 죽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외진 동굴에서 발견된 해골들이 이를 입증한다.

 

2) 제1차 유대 항쟁 이후의 변화

 

제 1차 유대 항쟁이 끝나자 곧 바로 로마는 항쟁의 원인이 된 이전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팔레스티나에 두 가지 행정 조치를 취하였다. 먼저 팔레스티나 전체를 하나의 독립된 속주로 만들어 시리아에서 독립시켰다.

그리고 그곳을 통치는 기사 출신의 행정관이 아닌 귀족 출신의 총독에게 맡겼다.

그 다음은 이 지역의 로마 군단을 강화해 팔레스티나에 주둔하는 로마 군대는 더 이상 그 지방 출신의 장정들로 충당하지 못하게 했다.

항재의 결과는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성전의 파괴로 예루살렘에서 동물의 희생제사가 끊기고

성전의 사제 조직을 관장하던 사두가이파가 몰락했다. 제사 중심의 예배를 회당에서의 기도와 성서 공부로 대체하고,

제사의 의미를 일사의 삶 안에서 찾으려고 했다. 집안의 식탁이 제단으로 재해석되었으며,

사제들 대신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들이 종교적인 권위를 갖고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3) 제 2차 유대 항쟁(132-135)

 

트리야누스 시절의 반란에 이어 또 다른 유대 항쟁이 하드리아누스 치세 때에

시몬 바르-코시바라는 폭도의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근처 북쪽 지역에서 일어났다.

132-135년에 일어난 이 항쟁을 보통 제 2차 유대 항쟁이라 한다. 이 2차 유대 항쟁의 주요 원인은 두 가지로 본다.

첫 번째 원인은 하드리아누스가 예루살렘 폐허 자리에 앨리아 카피톨리나라고 이름 붙인 새 도시를 세우고

성전 자리에 주피터의 신전을 지으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항쟁의 또 다른 원인은 로마 황제들의 전기를 다룬 4세기의 문헌 ‘황제 실록’이 제시한다.

이 문헌에 따르면 유대 항쟁의 원인은 로마인들이 할례 의식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히드리아누스는 거세를 금지하는 로마법을 강화했는데 이 법에 유대인들의 할례가 저촉되었다.

거세는 로마제국의 시민 수를 늘리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통치 때부터 금지되었는데

유대인들의 할례가 로마인들에게 거세와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후에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 안토니우스 피우스는 유다인들에게만 예외적으로 할례를 허용하지만,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게 되면 거세한 것으로 간주하여 사형으로 다스렸다.

 

이외에 경제적인 원인으로 제 1차 항쟁에 가담했던 많은 유대인들은 토지를 몰수당하고 소작인으로 전락했던 것을 들 수 있겠다.

이는 유대 농민들의 빈곤화를 더욱 부채질하였는데, 제 2차 항쟁에 지방의 농민들이 대거 참여한 동기가 되기도 했다.

로마인들과의 전쟁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자주 독립을 쟁취하고 유대국을 건설하기 위한 민족 해방 전쟁이었다.

항쟁 동안 만들어진 동전과 문헌에는 ‘자유’와 ‘예루살렘의 해방’ 또는 ‘이스라엘의 속량’같은 문구가 새겨졌다.

우대는 제 1차 항쟁 때의 실패를 교훈삼아 예루살렘이나 몇몇 쿤 성음에서 투쟁하지 않고 산악지대에 진연을 차리고 게릴라전을 폈다.

로마인들은 반란 초기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50여 개의 요새와 950여 개의 마을을 빼앗기고 나서야

정예군단과 많은 지원부대를 투입해 소탕 작전에 나섰다.

 

시몬이 이끄는 군대가 마지막까지 버틴 장소는 예루살렘에서남서쪽으로 11킬로미터쯤 떨어진 베타르 산악 요새였다.

베타르 요새의 함락으로 제 2차 항쟁은 끝이 나고, 전쟁이 끝나자 하드리아누스는 계획대로 예루살렘 폐허 위에

앨리아 카피톨리나를 건설하고 무너진 성전 자리에 주피터 신과 로마 황제를 위한 이교도 신전을 세웠다.

황제는 칙령은 내려 유대인들이 이 도시는 물론 그 주변에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방인들이 새 도시 앨리아 카피톨리나에 정착했고 유대 족주는 시리아 속주에 편입되어 시리아- 팔페스티나 속주에 속한 땅이 되었다.

이제 로마 제국의 지도에서 유대아 혹은 유대라는 말은 완전히 사라지고

유대인들은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땅을 이방인들에게 빼앗긴 채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다.

 

새 이스라엘인 그리스도교

 

1. 그리스도교의 성장

 

예수님의 공생활을 예수 사건이라고 부르고 이 사건을 바탕으로 생겨난 공동체의 움직임을 예수 운동이라 한다.

루가가 예수 사건의 시작으로 밝힌 연대, 로마 황제 테베리우스 치세(기원전 14-기원 후 37년) 15년 기원후 29년이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짓는 사십 육년이나 걸렸다는 요한 2,20의 증언과 일치한다.

헤로데 대왕이 성전을 짓기 시작한 때는 기원 전 19년 이었으나. 사십 육년 되는 해는 기원 후 27년경이다.

이렇게 루가의 기록을 바탕으로 우리는 예수 사건의 연대를 27-32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예수 사건은 그분의 지상 생애를 마감하는 십자가 처형과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며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로, 온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참 메시아로 고백했다.

로마인들의 관심과 주의를 끌지는 못했고 로마제국의 관리들은 예수 운동과 유대교를 구별할 능력도 없었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23장부터 26장까지 바울로를 심문한 총독을 비롯한 사람들이 바울로의 주장과

유대교인의 주장을 제대로 구별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이 사실을 증언하다.

 

2. 박해와 성장

 

예수 운동은 유대교에서 고유한 신앙 공동체의 성격을 띠면서 그리스도교로 발전했다.

예수 운동은 예루살렘에서 열 두 제자를 비롯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출발했으나 바울로 사도와 같은 선교사들의 활약에 힘입어

초세기 말엽에는 지중해 해안의 도시들과 멀리 로마에까지 퍼져나갔다.

2세기 중엽 예수 운동에 가담한 이들의 대다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비 유대계 헬라인들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나자렛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그리스도는 이제 그분에게 붙여진 칭호가 아니라

그분의 고유한 이름(예수 그리스도)이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율법과 할례를 중시하던 유대교의 틀 안에 있을 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전례에

다 같이 참여하고 있을 때에는 그다지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제 1차 유대 항쟁의 결과로 둘의 공통 기반인 성전과 그곳의 전례가 사라지고 그리스도교에 율법과 할례에 무지하거나

별 관심이 없는 이방인들이 대거 영입되어 오면서 그리스도교는 전통 유대교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특히 70년 이후 정치. 종교적 제도에 집착하던 유대교의 다른 파당들이 몰락한 뒤에도 살아남은 바리사이파의 대립이 두드려졌다.

복음서에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의 갈등은 그분 공생활 시절의 상황이라기보다 복음서 저자들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바리사이파는 성서와 구전 율법에 정통한 랍비들의 가르침에 철저히 의존했다.

 

제 1차 유대 항쟁을 거치면서도 바리사이파 또는 랍비 유대이즘과 그리스도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공통 요인들이 있다.

 

▶ 첫째, 이들은 조직을 갖추어 로마인들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 둘째, 70년에 로마인들이 파괴한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에 참여하면서도 사두가이파처럼 성전 자체를 기반으로 삼지 않았다.

 

▶ 셋째, 둘 다 일정한 장소에 뿌리를 둔 체제가 아니라 자유롭게 옮겨 다닐 수 있었던 하나의 운동이었다.

 

▶ 넷째, 신도들에게 참 이스라엘임을 강조하면서도 율법 또는 구약의 가르침을 세상의 변화에 적절하게 적용하는 융통성을 보였다.

 

▶ 다섯째, 둘 다 다음 세상에서의 응보 사상과 영원한 구원, 자선과 애덕의 실천을 강조했다.

 

이런 요소들 덕에 로마 제국의 관리들은,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쳐 두면 랍비 유대이즘과 그리스도교를

체제에 도전하고 제국의 안보와 질서를 헤치는 위험한 세력으로 여기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젤롯파의 줄기찬 반란과 항쟁에도 유대교 자체를 금지하거나 박해하지는 않았다.

제국 안에서 유대교는 언제나 ‘합법적인 종교’로 남아 있었다. 제1차 유대항쟁이 끝났을 때

유대교는 랍비 유대이즘을 통해 명맥을 이어 갔는데 로마의 황제나 관리들은 이를 금지하거나 박해하지 않았다.

제 2차 유대 항쟁이 끝난 뒤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금지시켰으나 그의 후임자 안토니우스 황제는 이를 철회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완전히 갈라져 나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한 파당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합법적인 종교인 유대교의 그늘에서 자신들의 믿음을

더 이상 안전하게 지켜 나갈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네로 황제 때부터 로마인들은 자주 제국에 닥친 악과 불행의 탓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렸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함으로써 신들의 노여움을 풀어 드리고 제국에 다시 번영을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황제 숭배는 자신을 ‘주님이요 신으로 떠받들게 한 도미티아누스 시절에 극에 달했고,

그것이 아무리 정치적인 이유에서 강요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최후의 박해면서 가장 큰 박해는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283-305) 치세 때 시작되어

그 여과는 그리스도교의 요람인 팔레스티나에까지 뻗쳤다.

305년 디오클레아시누스가 황제직을 포기하고 사두 통치 체제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안정된 후계자를 얻기는커녕

제국을 엄청난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경쟁자들 사이에서 20년 가까이 황제직을 얻기 위한 내전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아 다리 근처에서 숫 적으로 우세한 정적 막센티우스의 군대를 물리치고 로마에 입성하여

모든 이가 신앙의 자유를 얻게 했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수집했다.

이로서 324년 동서 로마 전체의 호아제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337년 서거하기까지 그리스도교의 강력한 후원자가 된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받는 처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바뀌었고,

로마는 그리스도교의 박해자가 아니라 선포자가 되었다.

 

★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암울한 역사 안에서 탄생하셨다. BC 6~4년 헤로데 대왕 때.

바오로는 AD5~10년에 다루소에서 태어남.

이스라엘은 로마의 총독(빌라도) 지배하에 있었다.

AD 30년 4월7일 금요일 오후에 예수님 돌아가심으로 학자들의 연구 결과...

30년 5월 - 성령강림으로 교회의 탄생

36~37년 - 스테파노의 순교

교회 역사에서 큰 역할을 하는 바오로의 회심(근본주의자들이 좋아함)

40년 - 전교여행

50~54년 - 전교 때 쓰여 진 신약 성서가 데살로니카 전서이다

 

◎ 신약 성서는 예수에 관한 공동체의 체험과 증언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였으며,

그의 말씀이 하느님의 말씀이었음을 고백되어지면서 전해오고 있다.

예수로 인한 공동체가 그리스도교 교회이다. 그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예수의 길을 따라 걷는 이는 누구인가의 논란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의 참 의미와 어떻게 해야 그 길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지 알게 하고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가고 그 사랑 안에서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를 이끌어 줄 것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누가 그리스도인이며, 어느 공동체가 참다운 그리스도 공동체인가를 가리기 위해 노력했다.

 

? 그 판단의 근거는 예수님이셨기에 - 그분이 어떻게 사셨으며,

그분의 말씀과 행적이 무엇인가

그분이 전하려고 하신 것이 무엇인가

를 우리에게 전해주려고 하는 것이 신약성서의 출범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유일한 성서인 구약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스라엘을 통해 실현되어오던

하느님 구원 약속의 완성과 성취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어떻게 실현되어 가는지 발견하게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이 백성을 영적으로 교육시킨 역사였으므로, 이스라엘 역사의 이 결정적인 의미가

예수의 십자가 부활로 이룩된 저 구원의 십자가와 필연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고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을 의미함을 알게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약 성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전해지는 복음의 의미를 해독하는 열쇠로서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 예수에 대한 증언이 신약성서이지만, 각자의 다른 입장이 나타나는 의미는

초대교회의 예수님에 대한 체험이 각자 달랐다는 것과

또 다른 의미는 예수님은 놀라운 분이셨기에 증언하고 고백한 한 측면이 공동체마다 다르게 형성되어져서 복음서를 형성하고 있다.

예수님의 생애 동안 그들이 함께 하면서도 올바르게 알아보지 못했던 몰이해에서 부활을 체험한 후에

새롭게 그분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하고 그들의 삶을 통해서 증언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자리하고 있던 것에서 새롭게 예수로 인한 과도기를 거친다.

 

구약 - 아브라함의 부르심으로 시작된 구원의 역사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원체험

(뿌리 체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된 근원적인 깊은 만남)으로 인하여 형성되어진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각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서 새롭게 재정비 해 나가면서 새로운 유다교가 시작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에집트 탈출 사건(출애굽)보다 더 큰 역사가 없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보다 큰 사건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신약성서의 탄생과 교회를 만들었다면

출애굽 사건은 구역 성서의 형성을 가져 온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천page에 이르는 구약성서 전체는 출애굽 사건을 해석, 설명, 성찰하면서 쓰여 진 책이고,

신약성서는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 대한 설명이고 묵상이며 해설인 것이다.

 

신약의 중심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 승천이라면

구약의 중심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야훼 하느님에 의한 탈출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로 구원되었듯이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구원과 해방의 사건이다.

또한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이 된 사건역시 탈출의 해방 사건이다.

탈출은 이스라엘 백성이 민족으로써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자기네들의 하느님이 누구이며 그분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창조주로 인식하기 이전에 해방자요, 구원자로써 생각하게 되었다.

“하느님 그분은 우리를 노예 상태에서 이끌어 주신 분이시다.” 하는 이 말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묻히셨다.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우리의 구세주이시다“하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느님을 체험했고 하느님과의 계약을 통해 혈연적으로 맺어졌다.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고 불안해질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기억하고 묵상하고,

미래를 설계하듯이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인들과 우리의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척도였다.

이스라엘인들은 출애굽을 근본으로 하여 BC 1000-2000년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을 해방시켜 주었듯이

어느 시대건 위기로부터 해방시키는 분으로써 희망적인 신학을 전개하였다.

모든 것의

근본은 출애굽사건(하느님 체험)이다. 현재의 생활을 전에 체험했던 출애굽 사건에 대비해서 우선 하느님의 뜻을 살피고,

그대로 살도록 하고 왕, 신하, 백성의 자세를 바로 잡아가며 미래는 우리가 그대로 살기만 하면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고 희망찬 미래를 살 수 잇을 것이라 여기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이 과거이고 현재이며 미래이듯이

출애굽사건은 그들에게 있어서 과거이고 현재이며 미래인 것이다.

출애굽 사건은 잊혀진 과거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성을 지닌 사건으로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인들은 신앙의 위기, 역사의 위기 때마다 출애굽을 상기시키고 그 사건을 척도로 해서 자기들의 역사를 써나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출애굽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서 출애굽 이전의 사건까지 신학화 하게 된다.

성조 시대와 창조까지 출애굽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구약 성서에서 제일 먼저 쓰여 진 것이 출애굽이다.

출애굽 사건 이후에 후대와 와서 바빌론 유배를 겪으면서 그들 한 민족을 이끌어 오신 하느님께서

온 세상의 하느님이시라는 인식과 함께 창조 이야기를 기술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하느님을 해방자 하느님으로 인식하고 섬겨왔는데,

하느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해방자 하느님이 바로 창조주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된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하면서 가나안 최고신 엘 신이 토착민에 의해 창조주 하느님으로 고백됨은 알게 되면서

해방자 하느님에 창조주 하느님을 받아들여 토착화시킨다.

즉, 야훼 하느님을 해방자 하느님, 함께 하시는 하느님만의 개념에서 창조주 하느님으로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데,

바로 야훼하느님이 인간과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는 내용이 창세기의 내용이다.

 

창세기가 쓰여 진 배경에는 이집트 탈출이라는 대사건이 숨어 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다.

창세기는 이러한 체험이 어떻게 준비되어 왔는가를 밝히기 위해 쓰여 진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는 우주 창조부터 모든 역사가 시작되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출애굽의 체험으로 시작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이집트에 살게 되었으며(요셉 이야기: 창세 37~50장),

하느님은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는가 (아브라함 이야기 :창세 12장이하),

더 나아가 세상과 인간의 창조라는 인류의 이스라엘의 역사와 연결시켜 인류의 보편역사를 만들었다.

 

창세 1~11장은 철저한 야훼신앙을 기반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의 해방하시는 하느님과

그분과의 계약 및 성조들의 역사와 연결되어 쓰여 졌고, 출애굽의 하느님이 바로 창조주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한 하느님이 바로 온 인류의 창조주이시며 인류의 역사에도 관여하시는 분임을 보여준다.

 

제 2의 성전 시대를 거치면서 하느님 백성 공동체로서 삶의 틀이 정리되고 안정되어간다.

그들의 역사는 늘 험난하고 어려운 식민지 생활이었다.

이사야에서는 새로운 빛이 많이 강조되어 있지만, 계속 어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고통에 따른 체념과 함께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생겨난 것이 묵시사상이다.

 

- 유다교 정신 운동(갱신)

하느님께서 고통 중에 왜 우리를 버려두시는가에 대한 그들의 성찰은 더 잘 살아야 한다는 각성으로 이어진다.

사두가이 - 전례생활을 강조하고 충실하며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함

바리사이 - 마카베오 시대에 생김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어려움이 우리들의 삶 안에서 부정에 있었다고 깨달음)

부정. 불의 . 부정결( 참으로 열심히 상은 사람들이다.)

에쎄네 -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세상을 떠나 정결케 살기 위해 공동체를 형성

열형당 - 지배하는 억압자들에게 대한하며 신앙으로 어떠한 우상과의 타협을 불사하는

AD 70년 : 징벌 정책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성전의 돌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는 예수 님의 예언이 이루어짐

그때 무력으로 맞섰던 사람들이 열혈 당원이다. 그들은 마사다(헤로데 대왕의 여름별장)에 서 대치함

- 로마 병사들은 똑같은 높이의 산을 세워 공격해옴.

정복당하기 전날 밤 모두 자살했다.

이 공동체들의 공통점은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러나 각자 구약의 이해가 달랐다. 사두가이(구약) 바리사이 (일상) 에쎄네(사회에 사는 것 자체가 부정하다고 여김)

: 우리 안에도 각자 하느님관이 다를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올바르게 걸러져야 되고 분별되어야 하고 일치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기존 파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하느님에 대한 것을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분이시다.

유대사회 안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유대인을 넘어서서 이방인들도 포함하는 그리고 점차 확산되어 나가게 한다.

*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메시아이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선포하면서

그 분에 준해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실례가 들어 있는 것이 마르코 복음서이다.

 

* 정통 가운데에서도 진짜와 가짜를 분별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예수의 말씀인가? → 사도들 → 그 이후

말씀 → 구전 → 문서화

초대 교회 때에는 초기에 매주 1번씩 모여 토막 말씀들(어록)로 전해지다가

(안식일과 주일을 함께 지킴) 교회의 해석이 이루어짐

성서에는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소수이다. 연구로 분석하기도 한다.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닌 것은 가짜인가?

새로운 해석이 덧붙여지고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공동체가 인정한 것이다.

저자들에게 성령의 감도로 불어넣어주심으로 인하여 묶여진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작업을 함께 한 사람들은 사실은 저자이다. 성서 저자는 하느님. 성령. 마르코라고 볼 수 있다.

신약시대에 글을 아는 사람들은 5~6% 정도로 소수였다.

그들 가운데 글을 아는 사람들의 역할이 구전으로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서

구전을 기록하고 수집 편집을 통해 하나의 형식으로 틀을 잡아 정리해 나갔다.

성서는 사실에 대한 기록이 아니고 사실 여부가 아닌 진실, 진리, 사실에 대한 해석이 중요한 것이다. 성서는 의미사라고 볼 수 있다.

사실에 대한 새롭게 깨달아 가는데 각자의 공동체마다 다르게 이루어졌음을 알아들어야 한다.

저자는 단일 인물이 아닌 그가 몸담고 있던 공동체의 대변자로서 인식해야 한다.

 

신약성서 - 예수님과 사도들이 사용한 성서는 구약성서이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구약성서의 모든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고

구약 성서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부활 체험의 빛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며 그들의 신앙을 선포하고 있다.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하여 오던 사도들과 목격자들의 증언이 글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부활 사건 후 20~30년이 지난 이후부터

정전 목록은 정하기 시작한다. 성 아냐타시오가 현재와 같은 성서 27권의 목록을 작성했다.

(성서의 정전으로 확정하게 하는 기준은 영감성과 보편적. 전래성(사도로부터 이어오는)이다)

 

AD 150년경 성전 목록 정리 중에 저자가 거론되기 시작함. 3세기의 말엽에

교회는 이 정전들을 구약 성서와 꼭 같은 정정으로 인정하여 신약성서로 확정한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글을 모르기 때문에 공동체가 한 자리에 모였을 때 계속 읽어주어야 했다.

사람들에게 계속 전해지면서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신약 성서의 원문은 27권 모두 그리스어로 쓰여 짐. 필자 친히 썼거나 혹은 구술하여 쓰게 한 그 원문은 분실되고

수사본들만이 전해지고 있다. 베낀 것을 또 베끼고 하여 그리스어로 된 것만으로도 5000여종이나 된다.

 

신약성서의 분류

1. 서간 성서 (21권)

2. 복음 성서 (4권)

3. 사도행전

4. 묵시록

신약성서 중에 제일 먼저 쓰여 진 것은 50년경, 데살로니카 전서이다.

바울로 서간이 4복음서보다 제일 먼저 쓰여 진다.

 

복음서란 : 기쁜 소식

예수님의 일생을 전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서이다. 4복음서 모두 주제는 같다.

그 중에 공관 복음 마르코 마태오. 루가 복음서는 서로 같거나 유사하다. 말뿐이 아니라 거의 비슷하게 진행되는 부분이 많다.

Q 문헌 - 예수어록( Quell)이라고 하며 원천(샘)을 가리키는 약자이다. 공관복음의 공통된 부분을 담고 있다.

 

마르코 전에 마르코 전서가 있었다고 전하는 자도 있다.

 

S → 마르코(전해오는 구전 전승을 모음) ← Q문헌(예수님의 말씀을 단편으로 모아둔 책)

↓ ↘ ↙ ↓

S → 마태오 ↙ ↘ ↓

↘ 루가 ← S(자기만의 특수 사료)

성서가 글로 쓰여지기 이전에 입으로 이어져온 그 시대 기억력을 통한 전달이 있다.

공통된 전승 자료를 가지고 있었기에 같이 바라보는 시각으로 쓰여 짐.-공관복음

 

복음 신약도 예수님이 돌아기시고 나서 시간적인 차이가 있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체험되어진 신앙고백이 담겨 있기에

자기만의 고유함이 담겨 있기도 하면서도 문장이나 낱말까지도 일치된 부분도 있다.

 

4복음서의 상징은

마르코 - 사자

마태오 - 사람

루가 - 황소

요한 - 독수리

 

종교 개혁 이후 성당과 교회 예배당과의 구분이 없었을 때 (유럽 쪽) 외부에서는 꼭대기에 모형이 있고 없고로 구분했고,

내부에는 감실 불이 있나 없나로 구분했다.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배반했다는 것을 축약해서 상징적인 의미로 쇠로 만들어 붙여놓았다.

새로운 공동체들이 빠진 부분과 자신들의 이해를 곁들여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며 다른 복음서를 기술해 나간다.

→ 마태오(유대인). 루가(이방인) → 요한 (새로운 시각으로)

 

마르코 복음서는 네 복음서들 가운데 제일 먼저 쓰여 진 것이기에 공관 복음서의 모체가 된다.

필자에 대해서는 4복음서 모두 저자 자신이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2세기경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려져 옴. 복음서 저자들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위경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성서의 형태를 확정하고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위경은 정통 성서로 보기 힘들고 성서 문학 형식으로 여흥으로 만든 것이다.

진짜 가짜를 구분하기 위해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정전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마르코는 간결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폭발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강직함을 지니고 있다.

전승과 개념은 변화한다. 그 발전을 통해서 발전해 가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전승과 개념도 시대를 달리하면서 바뀌어 간다.

성서 안에서도 같은 것을 가리키는 호칭도 다른 개념으로 표현하기도 한다.(대표 - 인자)

 

마르코 (우리나라 삼국시대)

마르코 공동체(65-70년) 예수가 돌아가시고 난후 한 세대가 지나감

근래의 설이다. → 항쟁 기간 중에 쓰여 진 것으로 보고 있다.

혼란기 -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전쟁에 바리사이와 열렬당원은 함께 참여하고 사두가이는 관심이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지도자로서는 남게 되는 그룹은 바리사이들이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과 사회의 동조와 박해 속에서

어떻게 대처해나가야 하는가의 어려움 속에서 복음서를 기술하고 있다.

구정으로 전해오던 것에서 글로 쓰여 진다는 것은 변화부동하다. 혼란기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고백하기 위해서 쓰여 졌다.

구전에서 불확실성에서 믿음을 심어주고 지표가 되어주기 위해서이다

 

마르코 공동체가 처해 있던 시대적인 현실과 상황은 혹독했고 급박했다.

마르코 복음서가 전해주는 요점이다.

하느님의 아들 = 예수 =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Arche) - 창세기 요한의 한 처음

근거. 기원. 범례(표준). 창조

이것이 마르코의 시작이며 결론이다. 지금부터 하는 이 이야기는 새로운 시작이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 예수님에 대한 말씀과 가르침이 많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전해 주려고 한다.

 

? 그리스도

보통 명사이다. (메시아- 바리사이들의 관심이었다)

예수시대나 마르코 공동체 안에서도 이 호칭으로 불린 자 많이 있었다.

다른 메시아와 구별되는 메시아 구원자(세상의 것을 바로잡는)로 대우하고 있다.

 

?저자 - 마르코

마르코복음서는 네 복음 서 중에 제일 먼저 쓰여 짐. 공관 복음의 모체임.

초대교회에서는 누가 썼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라는 그 자체가 중요했다. 주님을 몸소 체험한 사람이 아니다.

베드로를 따라다녔고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조리 있게 순서대로가 아닌 기억나는 데로 기록하면서

마르코가 부심했던 것은 빠뜨리지 않고 거짓을 섞지 않으려고 애썼다.

 

빠삐우스 주교(130년)의 기록을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가?

 

(프랑스의 미용의 예로니모 성인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215년)

원로들에게 전해들은 요한 마르코. (누구를 말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 당시 흔한 이름이었기에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베드로의 통역관인 마르코가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억나는 데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기록했다.

마르코의 어머니 마리아는 최후의 만찬 때 골방을 내어드린 사람이다. (부유한 사람- 예루살렘에 집이 2개 있었다.

선술집: 진짜 일가능성 크다) 교회에서 보존하고 있다.

 

바르나바와 마르코 삼촌 조카지간...

바울로와 베드로를 따라다님. - 선생님을 따라다니면서 기록했다면 바울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지만,

(바울로 특유의 신약 사상을 그대로 받아 들였을 것이라고) 바울로의 용어나 신학 반영 거의 없기에

마르코의 작품으로 보기도 어렵다는 것이 학자들의 논란이며 요즈음의 결론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Q 문헌보다 많이 변질되어 있고, 재구성... 마르코 자신의 손질이 더 많기에 베드로가 전한 것과도 다르다.

베드로의 말을 직접 들었다고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말이 Q문학보다 더 예수님의 말씀에 가까워야 한다.

베드로를 수행한 자라면 베드로를 통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마르코는 신약 성서에 10번이나 나오는 요한 마르코이다.

요한- 유대식 이름

마르코 - 로마와 그리스 식 이름

사도 바울로와 첫 번째 선교 여행에서 마르코는 중단하고 돌아왔다.

3차대에는 바르나바는 마르코와 히프로스 15,34-39; 바울로는 실라와 함께 소아시아로...

 

마르코가 바울로의 협력자로서 에페소의 감옥에 있을 때 같이 있었다.

베드로는 전서 5,13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마르코를 자기 아들처럼 여겼다.

그리스와 히브리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기적 이야기 등에서도 그리스의 문학 양식을 많이 따라가고 있기에 베드로의 들은 원전이라기보다는

그리스 문학화 된 것, 바뀐 것으로 오리지날 이야기와 시간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교회 전통상으로는 신약에 나오는 마르코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마르코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그냥 마르코라고 하자. 요사이는 복음서를 제1복음서 2.3.4 복음서로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저자에 대해서 누가 심각하게 따지는가?

학자들이다 복음의 해석상의 문제 때문이다.

예: 예수님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이다

완전 - 손댈 수 있다. 온전 - 손댈 수 없다.

원문은 들다 가능하다. 완전은 우리가 택한 신학적 입장이다.

배경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누가 쓴 것인가 논쟁하는 이유이다.

저자는 정확히 모르지만 사람 됨됨이는 짐작 가능하다 복음서를 통해서이다.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해방주의자.

신약 성서는 구약 성서만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현재까지도...

성서 전체는 그리스어로 쓰여 짐 - 유대인이라는 암시와 독자는 유대인이 아니라는 암시이다.

유대계 그리스도인이며 사도들의 행적을 잘 아는 사람이다.

 

?독자는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복음임을 알 수 있다.

아람어에 해석을 곁들임. 유대인의 풍을 설명해 준다. 자신은 풍에 익숙하지만 독자들을 것이다.

그리스 동전을 로마 동전으로 환산하고 있다.

1250년 에집트 탈출 - 1000년 통일 왕국 - 786년 북 분열 - 북은 아시리아(이라크 티그리스강 유역) 남은 바빌론에 멸망 한다.

예수님 오시기까지 나라 없이 지냄

 

북쪽의 아시라아는 무식한 방법으로 지도자들은 다른 곳으로 유배 보내고 서로 혼혼을 시킴으로서 혼혈.

남쪽에서는 북쪽(사마리아)을 바라볼 때 자신의 민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불신하는 풍토가 이어져 왔다.

시로페니키아 띠로(하혈하는 여인을 치료하는 곳) 지역은 이방인 지역이다.

7,24~30절에서 이방인을 강아지라고 칭하고 있다.

자신을 낮추면서 겸손하게 청하고 있음은 예수에 대해서 올바를 이해를 하고 있다고 보면서

마르코 복음 전체적으로 이방인 신앙을 칭찬하고 있다. 신앙인의 귀감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럼으로써 독자는 이방계임을 알 수 있다.

바르티메오는 멘델 존손처럼 멘델은 아버지 이름에다가 아들은 멘델 존슨이 된다.

마르11,17 마태21,13절에서 “모든 민족을” 이들의 독자를 격려하기 위함이다.

유대인의 선민사상으로 나가면 이방인들은 설 곳이 없다. 하느님의 준비하심은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애기하고 있다.

14,12 무교절 첫날 - 유대인의 풍습 abba - 유대식 표현이다.

유대 풍습과 해외 풍습 모두에 능통하다.

10,12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로마 풍습이다 이것에 대해서도 경계 우대 풍습이었다면 언급할 필요 없다

백부장 - 부하 백 명을 거느린 장교이다. 중대장 정도

로마의 처형 담당(로마의 고유 권한이었다) 장교이다. 수비를 맡은 주둔 장교이다.

15,39은 마르코의 결론이다. 예수에 대해 올바르게 신앙을 고백하는 모델로서 이방인의 귀감으로 내세우고 있다.

유대인, 로마 풍습까지도 잘 알고 있다. 거주지역이 본토가 아님을 알게 한다.

13,35 - 로마 밤을 4등분하는 풍습이 있다. 사경이라는 표현에 로마 시간 구분법을 사용하고 있다.

13,35절이 예수의 가르침으로 보기는 어렵다.

저자는 본토인이며 직접 하셨던 말을 전하면서 개작한 것으로 보면 된다.

해외 문물에도 능통한 자이며 해외 거주자였을 것으로 본다.

로마의 유대인의 비율은 5%를 넘는다.

기원전 6C 나라 잃고 땅은 척박하고, 머리 좋은 유대인들 해외 이주 많았다. 어디든 유대 집단촌 있다.

 

? 연대:

 

베드로와 바울로 죽음 후에 로마에서 저술( 이것도 반대도 지지도 못함)

팔레스티나 밖에서 집필한 것은 사실이다.

60년대 이전에는 저술되지 않았고 성전 파괴 사건을 예언으로 보느냐? 사건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시기가 70~ 50년대에 썼다고 본다. 70년경으로...

예수님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공생활에 대해서만 언급함.

1 세기 신자들은 사생활에 무관심했다.

예수의 죽음. 부활. 재림

예수 그리스도 인자

어제 오늘 내일 - 3차원적 이다.

생애보다는 죽으심으로 부활하신(결과) 새로운 사건에 집착한다.

이것이 잘못되면 인간적인 것은 무시되고 부활만 강조 할 수도 있다. 부활이란 예수님의 삶 속에서 나온다.

그분이 어떻게 사셨는가가 우리에게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 분을 따라 살다보면 부활이 따라오는 것이다.

마리아: 구세주의 모친 (동정이든 아니든 우리 신앙과는 관계가 없다.)

“네” 대답할 때는 그 뒤에 따르는 고통도 감당하시겠다는 각오가 따른다.

받아들였다는 점이 신앙의 모범이다.

마르코의 공덕: 하느님과 인간을 위해 철저하게 사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는 점이다.

마르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고 신앙고백. 세례 받을 때

예수님의 탄생은 루가와 마태오만 나온다.

루가 - 천사들

마태오- 동방박사(전 인류를 대표해서)가 찾아와 절을 할 때 예수님이 구세주임을 밝힌다.

요한- 말씀의 선재 사상. 로고스 = 말씀 = 예수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다

마르코는 부활이전의 복음서이라고 하고 요한은 부활이후의 복음서라고도 한다.

 

? 전체적으로 본 마르코 복음

 

예수의 갈릴래아의 활동에 대한 해석은 늘 1,15절에서 출발해야 한다.

9,50; 10,32; 예루살렘 10,46; 예리고 11장 베다니아- 예루살렘 바로 앞에 있다.

장소는 9장까지는 갈릴래아에서 10장부터는 예루살렘으로 옮겨 가시면서 11장에는 예루살렘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것은 마르코 전체 골격을 잡는데 필요하다.

공관 복음의 도식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활동하시고 죽으심.

루가의 특징은 예루살렘 이동 구간이 상당히 길다. (6개장으로 배정되어 있다. 루가의 편집 행위이다.)

이런 지리적인 이야기는 신학적인 의미일 뿐 실지적인 것은 아니다.

1,16 갈릴래아, 21 가파르나움 회당, 29 시몬과 안드레아 35 이른 새벽. 캄캄할 때

단편적으로 전해온 것을 마르코가 편집하고 있다. 시간적인 흐름으로 모아 하루의 일로 꾸미고,

책이라는 형태로 전하려 하고 있다. 전기라면 오고감에 행동을 펼치면서 많은 분량으로 얘기 할 것이다.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을 대립 구조로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인 인식이 그렇다. 갈릴래아는 열려 있는 곳이며,

예루살렘은 폐쇄된 곳, 고집스러운 소굴이다.

루가에서는 예루살렘이 구원이 오는 곳으로 루가는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를 신중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코는 고집이 가득한 것이 모인 소굴 정도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