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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비교종교학 (기독교 국교 불교 천주교 이슬람교)

하나님아들 2018. 7. 24. 23:28

 

 

1. 기독교를 대한민국의 국교로 - 선한 기독교


[불우이웃 돕기의 왕자 기독교]


현재 기독교는 불우이웃돕기의 민간단체 9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빈치코드다 비리다 해서 언론에서 치면 불우이웃 돕기가 확 줄어들지요.
이번에도 장애인이 전화왔어요. 무지 어렵다네요..
그리고 기독교는 헌혈에도 종교부문 1위이고, 장기기증에도 1위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욕을 먹을까요?


[선진국 90%가 기독교 계통 국가]

왜 박정희가 기독교를 장려했을가요?
선진국이 되기 위해 조사해보니 다 기독교계통의 국가라는 겁니다.
왜 중국이 기독교를 뒤로 제일 잘 대접해줄까요?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OECD 가입국에서 한두개 빼고 다 기독교계통 국가입니다.
일본도 기독교국가에 가서 배워온 것이죠.
반면 불교국가는 90%가 다 가난합니다.
이슬람도 90% 가난합니다 잘 찾아보세요. 석유나는데는 몇군데 안되고 다 가난합니다. 브라만들만 잘 처먹고 살지요.
숙명론과 무노동 때문이죠.
그런데 왜 이런 통계가 한국에는 소개되지 않을까요?


[목사가 배부른 돼지라고?]

최근에 왜 목회자 세금납부하라는 말이 쑥 들어갔는지 아십니까?
국세청 발표에 따르면 .. 세금을 받으면 안된답니다.
만일 목사가 세금내면 4대보험이랑 최저생계비 등을 지원해줘야 하는데..
목회자의 90%가 최저생계비가 안되기 때문에 다 지원해 줘야 하고..
그래서 목회자에게 세금을 받으면 안된답니다.
이 뉴스는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목사잘못은 TV다큐멘타리에 스님 잘못은 지방신문 귀퉁이에]

이게 고쳐지지 않는 문제입니다. 이유는?
불교는 언론의 스님잘못 보도를 적극 저지하는 담당자가 있을 정도로 언론 대책이 잘 됩니다. 그래서 스님이 TV에 좀 못한다고 나오면 난리치고 고소합니다.
안티불교 하나 만들어지면 엄청난 고소와 협박을 당하는게 현실이지요.
그러다 보니 목사잘못은 경찰보다 빠르게 취재 들어가 TV에 다큐멘타리로 보도됩니다. 그리고 스님 잘못은 지방신문에 작게 나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기독교 쇠퇴를 목사 잘못이라고 한답니다.

[부자나라 되려면 국가를 바꿔야]

김정일의 지령이 내렸답니다.
"남한의 기독교를 없애라우"
그 후에 진짜로 기독교가 마구 쇠퇴하기 시작했답니다.
선진국들이 다 부자이므로 우리 나라도 이제 국교를 기독교로 바꿔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많아지면.. 어? 많네.. 균형을 맞춰야지.. 그러고 언론을 통해서 두둘겨패고.. 이게 뭡니까?

이제 국교를 기독교로 바꿉시다.
불교는 이미 고려시대에 극심한 타락으로 한계성을 드러내지 않았나요?

기독교를 국교로 !!!!!!!
기독교를 국교로 !!!!!!!
기독교를 국교로 !!!!!!!
기독교를 국교로 !!!!!!!
기독교를 국교로 !!!!!!!
기독교를 국교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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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독교를 국교로 2탄 [고려를 말아먹은 불교]

이 내용은 교과서에 없습니다. 왜냐구요?
교과서는 친불교, 친북, 반기독교 성향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연구해 보삼...



현종때의 불교의 타락

현종은 22년동안 재위한 인물인데 당시의 승려들은 불사를 빙자하여 각종 비리를 저질렀는데18년에는 양주 청윤사의 스님이 쌀 360여 석으로 밀주를 만들다 처벌을 받는가 하면, 처자와 함께 사는 승려들도 많아서 이들을 징발하여 중광사에서 노동을 시키기도 하였다.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종교사상사 1권 불교 도교편, p76

문종때의 불교의 타락

문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흥왕사를 창건하였다. 그러나 동 10년에 내린 교서를 보면 노역을 회피할 목적으로 출가해서 금리사업 및 농축업을 하는 승려들은 모두 환속하고, 사원 내에서는 계행이 청정한 자들만이 안주하도록 칙명을 내렸다. 이것은 이미 당시에 불교계의 곳곳에 타락의 징후가 만연되어 있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왕의 칙명은 다음과 같다.

"지금 노역을 피하는 무리들이 사문이라 칭탁하면서 고리대금을 하거나 논밭을 경작하고 가축을 키워서 생계를 꾸리는 자들이 있노라. 긴 소매는 술먹고 벌거진 얼굴을 가리기에 급급하고, 물건을 사고 파는가 하면, 여염집에 출입하면서 민간인과 싸움을 벌여 피를 흘리게 하는 일도 있도다 . "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종교사상사 1권 불교 도교편, p 78

의종때의 불교의 타락

의종은 기복적 불사를 매우 즐긴 인물이다. 그는 해마다 대규모의 반승법회, 각종 재앙을 물리 치려는 소재도량 등을 개설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위기에 편승하여 거짓 출가하는 이, 또는 불문에 의탁하여 권세와 영화를 누리려는 이들이 많이 생겼다. 각 사찰은 다투어 대형 불사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 폐해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왕은 즉위 5년(1151) 되던 해 가뭄이 심해서 7일 동안 용왕도랑을 지냈고 보제사에서는 오백나한재를 개최하였다 11년 정원에 나라에 근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태사의 진언에 따라 영통 경천 등 다섯 개 절에서 항상 불사를 시행토록 명령하였다. 또 국청사 · 경천사 · 관정사 · 총지사 등에 직접 행차하여 재앙을 소멸하는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왕의 과다한 불사는 결국 재정의 궁핍을 초래 하였고, 불교 의례의 대형화를 만들어 갔다. 그에 관련된 몇 가지 사료를 뽑아 본다.

14년 보현사에 행차하여 스님들에게 골양을 베풀었는데, 그 때 30근의 은병을 만들고, 그 안에 각각 5향과 5약을 담아 절에 헌납하였다. 또 왕은 사찰에서 주연을 베풀기도 하였는데, 어느 때는 만취되어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18년(1174)에는 예종의 궁녀 소생인 왕자 각예의 주연에 참석하였다. 그는 법천사에 주지로 있었던 사람이다. 왕 자신이 이렇게 황읍무도한 불사를 치루었기 때문에 신하들도 또한 그런 일을 본받기도 하였다. 즉 개국초에는 엄격히 규제했던 원당을 갖는 일이 비일비재해지게 되었다. 내시시랑이었던 길돈중 형제가 관란사를 원당으로 삼은 일, 한정이 인제원을 원당으로 삼은 일 등이 그것이다. 그들은 기암· 기화로 절을 장식하는 등 호화형으로 사찰을 꾸미고, 은밀히 자신들의 주연 장소로 삼는 일이 많았다. 따가서 사찰의 사유화 현상이 생겨나게 되는 등 폐해가 극심해가게 된 것이다.

20년(1166) 불탄일에 왕은 연등회를 베풀었다. 밤에는 앞서 말한 각예가 마련한 주연에 참석하였다. 22년 3월에는 서경 관풍전으로 행차하였는데, 하교를 내려 1교6조를 지키도록 하였다.

무신의 난을 가져온 불교의 타락

그것은 숭중불사 · 봉순음양 · 귀경사문 · 보호삼보 · 준상선풍 · 구휼민물의 6조이다. 즉 불사를 존숭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일종의 불교 장려 정책 이었다고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만년에 이르러 더욱 심해지는 경향을 띄운다. 24년에는 영통사에 행차하여 화엄회를 개설했을 뿐 아니라, 친히 소를 지어 문신들에게 보였으며, 백관은 이를 칭송하였다. 그의 행각은 많은 백성들의 외면을 당하게 되고, 끝내 무신에 의한 정변으로 최후를 맞게 된다.

원래 무신란은 정중부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성품이 원만치 못했기 때문에 이준의 이의방 형제에 의하여 거세된다. 이의방 형제는 어린 명종을 옹립하고 권력을 장악하였 지만, 또 곧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이후 최충헌이 등장하면서 드디어 고려 정부는 무신에 의하여 운영되기에 이른다. 당시의 국교는 불교였기 때문에 무신정권은 불교게의 협력을 필요로 하였다.


불교계의 싸움에 의해 어지러워진 고려

대체로 선종 계통의 교단은 무신정권과 친화적이었으나 교종의 교단은 크게 반발하였다. 그 때문에 무신정권 수립 이후에 불교계와의 마찰은 끊이지 않았다. 어떤 때는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쌍방이 내전을 방불케 하는 전쟁을 치룬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정세는 몽고의 병란으로 고려 조정이 와해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명종 윈년(1171)에는 덕소를 왕사로 삼았다. 4년 정월 승도틀의 반란이 있자, 귀법사의 승려 백여 명은 성의 북문을 공격하며 당시 무신정권을 옹호하는 입장이던 승록 언선을 죽였다. 이의방이 일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승려들을 학살하였다. 또 중광 · 홍호 · 귀법 · 홍화사 등지의 승려 이천여 명이 동문에 모였을 때, 이의방은 그들과 싸워 벽여 명의 승려를 참살하였다.

그 때 관군도 다수 희생되었으벼, 이의방은 성문을 굳게 닫고 승려들의 출입을 금지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대규모의 집단적인 항명은 무신정권에 대한 불교계의 반발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교종계는 무신정권에 대해 대립된 입장을 갖고 있었다.

5년 4월 칙명으로 사원에서의 주연과 사치를 금하였다. 이 때부터 금과 은 등으로 불상온 조성하는 사치로운 불사는 다소 진정되기 시작한다. 11년에는 사경원이 불탔다. 전왕의 유언에 따라 은자 대 장경을 사경하던 중, 이』재물을 훔치기 위 하여 방화한 자가 생겨났던 것이다.

명종 말기에 이르러 최충헌· 충수의 형제는 무신정권의 대부로 등장히게 된다. 최씨 형제는 집권 초기부터불교에 대한 폐해를 시정하려는 정책을 수립한다. 당시 왕자의 신분으로 승려가 된 이들이 다수 있었는데, 그들이 왕궁에 머물면서 청사에 가담하는 일이 그르다고 하여 모두 본사로 돌려 보낸다. 그 때 강제로 퇴궐을 당한 왕자 승려들은 홍기· 흥추· 흥규 · 홍조· 홍각· 흥태 등 7인이었다 또 왕의 총애를 받던 운미는 강제로 속퇴시켰다. 27년에 최충헌은 흥왕사를 참배하려 했는데, 익명의 투서가 날아들어 요일과 두경승 등이 암살 계획을 꾸민다고 제보하므로 행차를 멈추었다. 그 해에 최충헌은 명종을 폐위시키고 신종을 옹립하였다. 이와같이 권좌가 피로 얼룩지고 끝없는 알력이 되풀이 되는 동안에토 불교계에는 별다른 변혁이 없었다. 임금들은 반승만을 되풀이할 뿐이었고, 불사의 대형화 · 사치화 경향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와 같은 것들이 원인이 되어서 고려의 중기 이후에는 서서히 배불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물론 국교로서의 튼튼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본격적인 움직임은 표면에 들어나지 않는다. 다만 승려들의 타락 · 불교 의례의 폐해 등에 관해서 조심스럽게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또 신종 이후에는 북방으로 몽고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사회 분위기는 피해의식과 혼란의식이 가중되어 더욱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종교사상사 1권 불교 도교편, p 84-87

결국 이와 같은 불교의 폐단이 겹쳐서 고려는 고종 이후부터 몽고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종교사상사 1권 불교 도교편 인용


국가 재정의 손실을 가져온 불사

충선왕은 불심이 남달랐던 군왕이었는데 그는 상왕이 된 후
연경궁에서 이천 명의 스님들에게 반승을 베풀고 연등
이천개에 불을 밝혀 닷새 동안 연등제를 베풀었다.

그 때 불전에 은병 1백개를 시주하고 선종의 충탄 교종의
효정을 모셔서 설법을 들었다. 왕은 두 스님에게 백금
한 근씩을 각각 하사하고 그 법회에 동참한 이천여 명의
스님들에게 백금 20근을 분배해 주었다. 왕은 또 108만의
연등에 점화하리라는 발원을 하였다. 그래서 하루 이천 명의
중들에게 닷새동안 공양재를 베풀어 1만의 중들을 채우고
또 1만 등을 점화하였다. 이것을 만승회라고 불렀는데 매달 그 만승회를 반복 시행하였다.

그 재정의 손실은 막대한 것이었으며 그에 따른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충선왕은 의종 이래 기복적 불사를 다시 일으킨 대표적 임금이라 할 수 있다.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종교사상사 1권 불교 도교편, pp 102

배불론의 발전 과정

고려 후기의 배불론은 일정한 단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즉, 고려 초기에는 불교 행사의 과도한 내용을 비판하는 면이 두드러지고 중기에 이르면 불교와 유교의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의 세속의 도로는 불교가 적합치 않다는 면 등이 강조된다. 그러다가 후기에 이르면 불교의 교리 자체가 허무적멸이라는 교리 비판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배불론의 배경에는 과다한 불사가 주인으로 꼽히겠지만 승려들의 타락 등 현실사도 무시 못할 배불의 명분이 된다.

선근 스님의 간통 사건

공민왕 4년에는 선근이라는 스님이 왕의 총애만을 믿고 매력적인 선비의 처와 간통한 사건이 있었다. 이 때 사헌부에서 그의 죄를 논증하자 방자하게 군 기록이 고려사(공민왕조)에 나온다.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종교사상사 1권 불교 도교편, p105

신돈 승려의 나라 말아먹기

14년 노국 공주가 죽자 공민완은 비탄에 잠겨 정사를 신돈이라는 노비출신의 파계승에게 맡겼다.
이 때부터 고려의 국정은 겉잡을 수 없이 피폐에 빠지게 되었으며 불교 또한 사양의 길을 면치 못하였다.

당시 불교를 비판하는 정몽주의 상소문

"유교의 가르침은 모두 하루하루의 평상 일을 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모든 일과 남녀의 구분이 없이 일상사가 바르게 되어야 함을 역설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홀로 암혈에 앉아 초식으로 연명하며 공적의 이치를 깨달을 것을 강조하니 어찌 평상의 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고려사)

백해 무익한 불교와 고려의 멸망

고려 최후의 왕 공양왕의 때에 성균관의 유학자들은 격렬한 배불의 상소문을 올렸다.
성균관 대사성 김자수, 정당문학 정도전, 이조판서 정총 등은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주로 당나라 한유의 배불론을 인용한 것으로서, 불교가 인륜을 망각한 無父無君의 교라는 것이다.
출가를 하면 부모를 여의어야 하고, 국가에 충성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인륜의 도를 어기고 무위적멸을 일삼는 불교는 백해 무익이라는 주장이다.

덧붙여서 사탑의 건립은 재정의 궁핍을 초래하게 되며 그 폐해가 막심하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4년에는 일본 조정이 대장경을 헌납하도로고 요청하였다. 그해 7월 드디어 공양왕은 이성계에게 왕위를 선양하였다. 이로서 고려 5백년은 막을 내리고 조선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조선은 국시로 억불숭유를 내세움으로써(교과서에는 그 이유가 빠져있음) 전대미문의 불교 탄압이 시작되는 것이다.

위 내용은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종교사상사 1권 불교 도교편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 제외




불교가 국교가 될 수 없는 중요한 이유는 부처님의 뜻이 아닙니다.
현재의 불교는 석가모니의 의도를 벗어나서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협잡물들이 불경에 너무 많이 들어가서 지금의 불교는 석가모니가 창시한 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불경끼리 내용이 충돌하고 국가를 가난하게 만들고 빈약하게 만드는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불경에 들어간 엉뚱한 사상들입니다.
석가모니가 말한 거 외에는 다 빼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불교는 불교가 아니고 소설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소설이 국교가 됩니까?
용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이 믿어집니까?
석가모니가 태어나자 마자 걸었다는 것이 믿어집니까?

저는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게 아니고, 이 나라를 잘 살게 하기 위해
연구하다 보니 이지경이 되었습니다.

자.. 읽어보시고 위의 추천을 꾸욱 눌러주세요.




3. 1. 기독교를 대한민국의 국교로 - 소설속의 불교편




불자들이여 환상에서 깨어나라.. !!!!!!!!


불경은 모두 조작되었다.

불교의 교리는 항상 대중들의 요구에 따라 변화를 거듭합니다.
교리뿐 아니라 의식도 첨가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모종교에서 여름 불교학교를 본따고 아기부처를 본땄으며
급기야는 종말론까지 본따 말법시대라는 단어도 생겨났습니다.
부처님 나라도 역시 천국이란 단어에서 본딴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원래 대중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변신(조작)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진리는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합니다.
현재도 불교에서는 찬불가, 하기학교, 수요법회, 금요 철야법회,
조찬기도회 등으로 타 종교 의식을 모방하면서 또 불교를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다음 책에서 한글자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의심나면 책을 찾아 보시면 됩니다. 저자는 소련의 민족 지학자, 고고학자, 지질학자 입니다.
(인용 : 세계의 종교, 세르게이 토카레프 지음, 사상자, 325-326페이지)

[극락은 본래 없던 것]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양보는 불충분한 것이었다. 이 열반이라는 실제적 이상상은 현학적 철학자들과 명철한 지성인들에게는 매력적이었지만, 대중들에게는 그다지 분명한 것이 되지 못했다. 대중들은 보다 심정에 직접 와닿는 무엇인가를 원했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본래 불교에는 전혀 없던 극락이라는 곳에 대한 교설을 전개시켰다.
불교도들은 극락이라는 것에 덧붙여 지옥이라는 관념도 고안해 냈다. 신자들은 불법을 어김으로써 지옥에 떨어진 죄인들이 겪는 무시무시하고 현학적인 고통의 이야기에 완저히 겁에 질려버렸다.
대승불교가 여러 나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것은 이러한 불교의 유연한 형태를 통해서였다.

[인간부처가 신으로 대접받게 된 배경은 대중의 요구]

즉 대중들은 보다 쉽고 넓은 길을 필요로 했다. 신 또는 신들이 없는 종교는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즉 신자들은 신이나 신들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를 지혜의 스승이던 위치에서 하나의 신으로 격상시켰다. 따라서 점차 불타에 대한 숭배가 발전되어갔다.

[점점 많아지는 불타들]

대승불교도들은 고타마 불타가 많은 불타들 중의 하나라고 믿었다. 이들 불타 가운데에는 또한 브라만교의 신들만이 아니라 불교가 수용된 여러 나라들의 신들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교의 만신전 역시 이 종교 안으로 새로운 아라한들이 도입됨에 따라 증가하였다. 점점 불타의 수는 어마어마하게 커져갔다. 그래서 우주의 스승인 995명의 불타와 인근을 그 죄로부터 정화시켜주는 35명의 불타가 존재한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참고 문헌 : 인도불교의 역사, 상, 17-18페이지]

대승불교에는 원시불교에서 볼 수 없었던 협잡물이 포함되어 있다. (17페이지)
불교는 힌두교화가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18페이지)

힌두교도 죽어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육체로 태어난다는 믿음을 가졌다.
힌두교도 전생의 생활이 현재의 신분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결국 불교는 소를 숭상하는 힌두교를 벗어나지 못함이 입증되었다. 불경은 이미 붓다의 사후 200년 후에 구전된 자료를 모여서 조작했다.

[열반의 커트라인을 대중들의 요구에 맞추는 불교]

대승불교도들은, 모든 각 개인은 오직 그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서만이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불교의 근본사상이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과도한 부담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 좁은 길은 아주 소수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승불교도들이 불교 교리 안에 도입한 또 하나의 중요한 혁신은 승려가 아닌 사람도 열반에 들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열반이 오직 승려들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으로 가르친 사람이 바로 나가르쥬나였다.

불교의 뿌리 힌두교는 토속종교의 집합체에 불과

불교는 힌두교로부터 많은 사상을 본따서 사실은 힌두교로부터 나온 종교라고 볼 수 있다.
이 힌두교는 카스트제도와 같은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종교일 뿐 아니라

기원도 불분명해서 특별한 창시자도 없고 떠도는 모든 토속 종교를 합쳐놓은 것에 불과하다.
불교는 이 힌두교와 경쟁을 했으나 교리가 모방에 그치자 인도 전체가 힌두교로 넘어갔다.
그 와중에 불교는 힌두교와 대항하기 위해 불경을 각색하고 기적을 만들어 내고 형이상학적인 철학을 발전시켰으나 역부족이었다. (석가의 사망 200년 이후에 경전 작성)
[참고 : 인도불교의 역사 상, 민족사, P59]
[참고 : 인도불교의 역사, 민족사, 17페이지]
['불교의 공과', 하나님 한스 발덴펠스, 서울:대원정사, 1993.]

힌두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표 사상을 가져와서 편집했다.
(힌두교도 죽어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육체로 태어난다는 믿음을 가졌다. 힌두교도 전생의 생활이 현재의 신분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불교 역시 경전이 너무 많아서 선택해 쓰는 상황이었으므로 본래의 교리는 사라지고 짜집기 형식으로 변해가다가 진실을 아는 인도에서는 소멸해 버렸으나
[참고 문헌 : 인도불교의 역사, 상, 17-18페이지]

각색되고 과장된 경전경전이라는 사실을 다른 나라에서는 잘 모르므로 인도 외의 아시아에 급속도로 퍼지게 되었다. 중국에서 또 한차례 각색을 거친 불경은 한국으로 넘어온다. 이 때쯤에는 매우 훌륭한 경전으로 각색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그럴듯해 보인다.

힌두교에서는 소를 또한 숭상한다. 힌두교는 대부분의 자연만물을 신으로 숭상한다.
원시 종교에 철학 사상을 가미한 것이라 보면 된다.
기원도 불분명한 힌두교와 대부분의 사상을 그 바탕에서 가져온 불교는 뿌리없는 종교에 불과하다.
[참고 : 세계의 종교들, 노만 엔더슨 지음, 200페이지 부터]

힌두교의 기원은 무엇인가? 기원이 없으므로 추측하건대
일본 종교학자의 말을 빌리면 사람이 한계상황에 닥쳤을 때 자연적으로 신을 찾게 된다고 한다. 신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찾게 되는 것이 바로 종교가 생겨나는 원리이다.
[책 제목이 생각 안남, 일본인 지음]

사람이 만든 종교와 신이 만든 종교는 다르다.
힌두교는 사람이 만든 종교에 불과하다.
힌두교 스스로도 시대에 따라 법을 바꾸는 것을 인정한다.
[참고 : 세계의 종교들, 노만 엔더슨 지음, 200페이지 부터]

불경의 기적 또한 조작되었다.

대승불교 속에는 처음부터 주술적인 요소가 많았는데 이것은 민중의 종교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것이었다.

여기서는 이미 '반야경을 수지함으로써 위난을 면할 수 있다.' 고 강조되고 있으며 관음보살을 신앙함으로써 모든 재해를 면할 수 있다. 고 설해지고 있다.

이러한 주술적인 요소가 우세해서 밀교(주술적인 불교의 일종으로 한국에 뿌리내렸음)가 왕성해 졌다. 한국 불교에서 밀교를 빼놓고는 불교를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곳곳에 뿌리내린 것 또한 사실이다

[인용: '인도불교의 역사' 히라가와 아끼라 지음, 민족사, 17페이지 내용]


불경은 중국에서 또 한번 조작 되었다.

부처의 사망이후 제자들은 힌두교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하여 여러가지 기적을 삽입하였고, 중국을 거치면서 상당히 빛깔좋은 색채를 띠도록 포장되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불교는 근본 가르침의 정신으로부터 점차 이탈되어져 가는 경향이 강했다. 철저한 대중성을 잃고 논리적 사변으로 빠져들어가 관념적 지배이데올로기로 전락하기도 한다. 특히 불교가 중국을 거치면서부터는 부처님의 근본 사상은 급격하게 그 성격을 전환시키게 된다.

불교 유입 당시의 중국은 고대국가가 통합되던 시기였으므로 지배자들에 의한 지배이데올로기의 요구와 기층민중들에 의한 요구의 결과로 보다 체계적이고 고차원적인 사상체계를 요구하게 된다.이것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유입된 요인이 된다.

중국은 한반도에 불교를 전파하는 데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치.문화면에 미친 불교의 영향도 컸지만 불교 또한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인도에서의 이슬람 군대의 침입으로 산스크리트어로 씌여진 소중한 대승경전이 소실된 지금, 그나마 한문으로 번역된 중국경전이 있었기에 불타의 가르침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중국의 전래사상과 불교가 융합하면서 새로 일어난 종파불교와 선불교의 양대세력이 우리나라 불교의 흐름을 전반적으로 지배하여 왔음을 볼 때도 중국불교가 불교사 전체 흐름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큼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불교와 함께 중구의 불교, 즉 중국화되고 한문화된 불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불경에 기적을 넣기 시작한 배경과 이유는 바라문교와의 경쟁 때문

인도에서 불교가 전성기를 맞 이하자 상대적으로 바라문교는 한때 침체기를 겪으면서 새롭게 민간신앙을 포섭하였는데, 그 교세는 민중들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이 여파로 불교 교단은 점차 위축하게 되었고 이 때 밀교는 바라문교 사상과 민간 신앙을 동시에 수용하여 불교적인 재정립을 시도하였다.

이전의 바라문교가 민중의 일상 의례를 내포한 힌두교로 재편성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불교도 현실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 힌두교와 중복되는 다양한 민중 불교의 요소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불경은 부처의 가르침이 될 수 없다.

불타가 입멸한 후 가르침이 수집되었다.
이것들은 기억에 의해 전래되었기 때문에, 전승되는 동안에 제자들의 이해나 해석이 부가되고 증보되어 불가피하게 옛 가르침이 변화하게 되었다.
.. 가장 변형되지 않은 아함경 조차도 불타의 가르침 그대로가 아니다.

인용 : 인도불교의 역사 상, 민족사, P59

불경의 또 다른 과장(조작)이유는 민중의 요구

대승불교 속에는 처음부터 주술적인 요소가 많았는데 이것은 민중의 종교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것이었다. 이러한 주술적인 요소가 대승불교속에서 점차 우세해져AD6세기경부터 차츰 밀교가 왕성해 지는 것이다.

참고서적 : 인도불교의 역사, 민족사, 17페이지

불타의 의도를 벗어나 불경이 조작된 이유

불타가 살았던 시대와 용수의 시대 사이에는 많은 교리들이 가지를 치면서 발전하였다.
교리들의 일부는 불타의 최초의 설법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에서부터 나타난 것이며(주관적인 1차 변형), 또 그 중 일부는 불타가 걸었던 도정을 힌두교의 여러 형이상학적 교설과 대비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나름대로의 발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 주의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전개는 불타가 본래 의도했던 바를 위기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불교의 공과', 하나님 한스 발덴펠스, 서울:대원정사, 1993.

불경이 조작되게 된 배경

붓다가 무덤속으로 들어간 후 제자 500명이 모여서 책을 생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200년이 흐른 뒤이므로 그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죽고 난 이후였습니다.
3명만 전달되어도 이야기가 변형되는데 무려 200년간 수 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구전되었으니
얼마나 과장이 심했겠습니까? (감기 걸렸대 -> 병 났대 -> 죽었대)

200년 이후의 불교 신자들의 이탈을 막고 제자들의 생계를 위해서
부풀리기는 정말로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각색에 각색을 더하게 된 것입니다.

붓다의 생애가 과장되었다는 것은 제 말이 아니라 불교 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서로 가르침에 모순이 된다고 까지 했습니다.
(참고 : 한글 세대를 위한 불교)

[아래는 책의 내용을 편집없이 실은 것이며 나의 글은 모두 ()안에 넣었습니다. ]

(p312)
불교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가장 오래된 불교의 전설(과장되기 전)들은 이 종교의 교조인 불타가 자신의 교리를 가르쳤던 역사적 인물이라고 한다. 후에 순수하게 가공된 전설은 불타를 위대한 신으로 묘사했으며, 그의 탄생과 삶에 관련된 기적들과 그의 전생들에 대해 얘기한다.

(p315)
세계 최초의 불교서적 '삼장'에 따르면 후대의 전설적인 문학과 같이 초자연적인 내용들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 (부처의 생애만 있음)
후대에 문학적인 수식이 첨가되었으므로 모든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류가 될 것이다.
가장 올바르게 이해하는 방식은 불교의 창시자를 역사적 인물로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다음의 사실을 받아들이는 학자들의 태도일 것이다.
즉 그의 삶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고, 그에 관한 수많은 전설도 믿을 만한 것이 못되며, 오히려 그 전설들은 부분적으로 어떤 일정한 모양에 맞추어 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세계의 종교, 세르게이 토카레프 지음, 한국 종교연구회 옮김, 사상사, 1991]

고승들이 조작에 관해 실토한 내용

김모씨의 고승과의 대화에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타 종교의식을 모방하면서 왜 불교를 옛날처럼 변질시키고 있습니까? 고승의 대답을 들어 봅니다.

1. 불교와 타 종교와 핵심사상(무신론사상, 유일신사앙)이 완전히 다른 종교이지만 급성장하고 있는 타 종교를 견제하기 위해서 종교는 어느 종교든지 다 똑 같다라는 의식을 국민들에게 시어주기 위한 방편으로 기독교 의식을 모방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승들이 실토했습니다.

2. 미신불교 이대로 이끌어 가게 되면 30~40년안에 불자들이 타 종교로 개종되어 70%의 많은 불자들을 잃을 수밖에 없는 큰 위기를 맞게 될 불교가 크게 염려되어 또 다시 불교를 변질시키는 한이 있어도 타종교 의식을 모방할 수 밖에 없었다고 고승들이 실토했습니다.

이와같이 지금도 불교는 예전과 같이 계속해서 거짓된 진화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거 올리면 꼭 교회 욕하는데 그건 나랑 상관없음.. 무교니까.. ㅋㅋ

출처 : 굿뉴스강남
글쓴이 : 이희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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