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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가?

하나님아들 2017. 12. 6. 23:35

예수가좋다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가?

요한복음 5장 19-31절/최태선 목사


“19.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느니라. 그분께서 무슨 일들을 하시든지 이것들을 [아들]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을 그에게 보이시고 또 이것들보다 더 큰일들을 그에게 보이사 너희를 놀라게 하시리니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사 그들을 살리시는 것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것은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있는데 곧 지금이라. 듣는 자들은 살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는 것 같이 [아들]에게도 주사 그 속에 생명이 있게 하셨고 27.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그에게 또한 심판을 집행할 권위를 주셨느니라. 28. 이 말에 놀라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나올 때가 오고 있나니 29. 선을 행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들은 정죄의 부활로 나오리라.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내가 내 뜻을 구하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구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31. 내가 만일 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니라.”(요한복음 5:19-31 킹제임스흠정역).


1. 처음의 자리로


 토마스 머튼의 말입니다. ‘현대세계에서 그리스도적 이상과 태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교적 외양은 거의 속빈 강정과 같은 것이며, 과거에 '그리스도교 사회'라고 불리던 사회조차 오늘날에는 무늬만 그리스도교이고 사실은 완전히 유물론적인 이교도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 이교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까지 비폭력과 사랑에 관한 복음의 윤리를 '감상적'이라고 비하하곤 한다.’


 오래 전에 한 말이지만 오늘의 교회를 향한 선지자적 안목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 티브이에 나오는 설교를 듣지 않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말씀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 혹은 아전인수 격으로 성경 말씀을 짜깁기하거나 요리하여 인간의 이기심을 자극하거나 복음의 변죽만 울리는 속빈 강정과 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듣는 이의 심령을 쪼개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의 귀를 간질이고, 듣는 이로 하여금 모험에 뛰어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돈만 내고 구경이나 하라는 식의 이야기들이 설교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선포되고 있습니다.


토마스 머튼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무늬만 남은 기독교, 무늬만 남은 교회, 무늬만 남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되니 아무도 책잡는 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적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믿는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져야 합니다. 세상의 법과 하나님 나라의 법의 차이 사이에서 날마다 고민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을 따라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 체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던 말씀의 의미를 날마다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언제나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 관리를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이 정말 기쁜 소식임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이런 말이 저의 상투어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이야기에 신물이 날 것이지만 이런 말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잘못된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첫 번째 조치는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셨습니다. 그곳에서 도망치고 부서진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그들을 만난 장소였습니다. 그 첫 번째 장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도 첫 번째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자리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2. 하나님의 아들


요한복음 5장19-47절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로 주장했기 때문에 신성모독이라고 유대인들이 고발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변호 입니다. 이 변호는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예수님의 모든 행동과 주장들이 하나님 아버지와의 특별한 관계에서 나왔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 말씀은 주님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증인들 곧 하나님. 세례 요한, 예수님이 하신 일들, 그리고 성경의 기록을 통한 변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초기 교회 신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같은 분이신가라는 의문 제기는 초기교회에서 계속 있었던 일입니다. 숱한 이단 논쟁과 신학적 고민을 거듭하면서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기독교 정통 교리로 자리매김할 때까지 논쟁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논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막연하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것이다.' 아니면 '그런가 보다'라는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모험의 삶으로 뛰어들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신가에 대한 고찰과 함께 과연 내가 그것을 믿고 있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믿음은 입술의 고백에 지나지 않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믿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3. 아버지와의 특별한 관계


예수님은 심문하는 유대인들에게 주님의 행동과 주장이 모두 하나님 아버지와 일치된 관계에서 나온 것임을 여러 번에 걸쳐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말로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반복해서 하시는 이유는 아버지와 주님과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체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육체의 모습이나 유전자로 관계를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관계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관계를 사람들에게 보임으로써 주님이 그분의 아들임을 입증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이 고발한 것처럼 자신을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로 주장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아버지께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19.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느니라. 그분께서 무슨 일들을 하시든지 이것들을 [아들]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을 그에게 보이시고 또 이것들보다 더 큰일들을 그에게 보이사 너희를 놀라게 하시리니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사 그들을 살리시는 것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19-21)


 여기서 사랑의 속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다른 말로 고발하는 자입니다. 고발을 통해 사람들을 이간질하여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단의 역사는 분열로 나타나고 성령의 역사는 하나 됨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 하찮게 여깁니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을 차별하고 분리합니다. 사단의 영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에 이끌리는 사람이라면 분리해야 할 이유가 있어도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여 사랑에 감염시킵니다.


“믿은 자들의 무리가 한 마음 한 혼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그들 중에 아무도 자기가 소유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더라.”(행 4:32).


누가가 묘사한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는 말씀에 놀라, 그 앞의 믿는 무리가 모였는데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내용을 지나칩니다. 그러나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내용이야말로 사랑의 영 안에서 일치된 모습을 보여 주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위대한 모습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의 영으로 하나가 되면 소유에 대한 변화는 자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공동의 소유도 소유의 포기도 한 마음과 한 뜻이 된 성령 공동체 안에서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모습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성령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는 무리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저의 목표는 늘 여기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고 해서 사람들 간의 문제와 갈등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주 만나면 만날수록 갈등과 문제는 더 많아집니다. 하지만 갈등과 문제가 사람들을 갈라놓지 못합니다. 예수님 사랑의 영인 성령이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는 길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치는 따라서 종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로서 아버지와 누리는 사랑의 관계, 곧 일치와 교제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의 관계가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 간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을 그에게 보이시고 또 이것들보다 더 큰일들을 그에게 보이사 너희를 놀라게 하시리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사 그들을 살리시는 것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는 말씀으로 분명하게 표현하셨습니다.


4. 신적 권한


예수님은 그래서 아버지를 따라 안식일에도 일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다른 일들도 그대로 따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따라서 하시는 일들은 곧 신적인 권한을 가리키며, 죽은 자들을 살리는 권한, 생명을 주시는 권한, 심판하시는 권한 등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사 그들을 살리시는 것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것은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1-23).


 신명기 32장 39절에서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을 알라. 나와 견줄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고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져 낼 자가 없도다.” 보듯이 구약성경은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임을 선포합니다. 심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만이 인간을 심판하는 분이심을 선포합니다.


“{창조주}와 같이 거룩한 분이 없으니 주 외에는 다른 분이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나이다.”(삼상 2:10)
“오!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을 심판하지 아니 하시려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대적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고 우리가 어떻게 할 줄도 모르며 우리 눈이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대하 20:12)
“오! {창조주}여, 내 원수들의 격노로 인하여 친히 분노 중에 일어나시며 몸을 드시옵소서. 나를 위하여 깨시고 주께서 명령하신 심판으로 나아가소서. 그리하시면 백성의 회중이 주를 에워싸리니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높은 곳으로 돌아오소서.”(시 7:6-7)
“그러나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계시리니 그분께서 심판을 위하여 자신의 왕좌를 예비하셨도다.”(시 9:7)
“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오!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향하여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시 50:7)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심판하는 권한을 맡기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을 믿기에 "저리로써(하늘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신앙의 고백을 날마다 드리는 것입니다. 공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만이 인간으로부터 공경을 받으실 분임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처럼 공경을 받아 마땅한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생명을 주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는 권한과 심판하는 권한을 위임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기 위해서입니다.


“6 너희 모든 거처에서 도시들이 피폐하게 되고 산당들이 황폐하게 되리니 이것은 내가 너희 제단들을 피폐하게 하고 황폐하게 하며 너희 우상들을 깨뜨려 없어지게 하고 너희 형상들을 베어 쓰러지게 하며 너희가 만든 것들을 폐하려 함이라. 또 죽임 당한 자들이 너희 한가운데서 쓰러지리니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겔 6:6-7)
“감사를 [하나님]에게 드리고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고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4-15)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만드신 분을 모욕하되 그분을 공경하는 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잠 14:31)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그것이 솟아오르리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심지어 내가 광야에 길을 내며 사막에 강들을 내리니 들의 짐승 곧 용들과 올빼미들도 나를 존경하리라. 이는 내가 광야에 물들을 내고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들에게 마시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사 43:19-20)
“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만군의 {창조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자기 주인을 공경하나니 그런즉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거니와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떤 점에서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도다.”(말 1:6)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있는데 곧 지금이라. 듣는 자들은 살리라.”(24-25).


주님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보내신 이를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또 그런 사람들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부활이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미 이루어졌음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그 영생의 삶을 누리고 있을까요? 산상수훈을 비롯한 예수님의 말씀들은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말씀들은 천국에 가서나 이루어질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영원한 생명이 부어졌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음을 믿는 사람들은 지금 이곳에서 예수님의 말씀들을 실천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5.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가?


이런 주장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분노하여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으로 예수님은 귀신이 들렸거나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마태복음 16장 15-18절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것을 네게 계시한 이는 살과 피가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상,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칼 바르트가 말하는 만물의 척도로서의 삶을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요? 성령에 이끌려 하나 됨의 역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가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 있을까요? 각박해져 가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한복판에서 사랑의 삶이라는 연약하고 어리석은 삶, 부활의 삶을 살고 있을까요?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입술만의 고백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단순한 한 마디 말에 담겨 있는 엄청난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칼 바르트가 말하는 만물의 척도로서 온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이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새로운 창조물이 된 성도는 세상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가좋다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一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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