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상식 이야기!!

[스크랩] 하인리히 헤페, 개혁파 정통교의학

하나님아들 2017. 1. 17. 00:13

 

하인리히 헤페, 개혁파 정통교의학| 종교의 이해와 비평
laia2001 | 조회 14 |추천 0 | 2003.03.03. 15:25
 

하인리히 헤페, 개혁파 정통교의학

성경

1. 모든 기독교 지식의 유일한 원천과 규범은 성경, 즉 하나님이 선지자들과 복음서 기자들, 그리고 사도들에 의해 기록하도록 허용하신 모든 책의 내용이다. "성경은 구약에서 모세와 선지자들, 신약에서 복음서 기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성경의 권위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과 신적 사실들에 관하여 교회를 온전하고 평이하게 가르치기 위하여,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삶의 단일한 규범을 부여하기 위하여 정경화되었다."(하이덱거, II.6) 성경에 대한 다른 정의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피터 마터: "(성경은) 성령에 의해 경건한 사람들에게 영감된 신적 지혜의 표현으로, 후에 기록과 문자, 즉 문자적 기록으로 위탁되었다."(29) 벤 아레티우스: "신적 성경은 본래 하나님의 영에 의해 계시되었고 후에 하나님의 주도하에 신자들의 구원을 위해 사람들에게 문자로 위탁된 것으로, 유한한 인류를 향한 신적 의지의 증거이다."(15) 벤델린: "우리가 정경이라고 부르는 성경은 하나님에 의해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에 전달되고 고정된 책들로 형성된 신앙과 도덕의 무오한 규칙이다."(Collatio, 41) 리쎈: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과 자기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들이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하고 행해야 하는 것들에 관하여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책들을 수집한 것이다."(II.1) 마스트리히트: "문자적 기록 literis으로 수용되고 서술된 바에 의하면, 우리는 성경으로 다름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삶의 교리를 이해한다."(I.ii.6) 이 정의를 설명하면서 마스트리히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향한 삶의 방법은 자연적 능력이 아니라 배워야 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규정한 바 올바른 방법을 알려주는 규칙을 필요로 하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과 우리 자신의 양심을 제외하고는 일찍이 '하나님의 말씀' 또는 성경에서 그것을 발견하였다."


2. 그러므로 성경에는 오로지 선지자들과 사도들, 즉 하나님이 계시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하여 자기 성령과 함께 특별한 방식으로 조명한 그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책들만이 속한다. 벤델린에 의하면,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의 교회안에 그 누구도 정경적이며 보증된 권위자가 있을 수 없다."(Collatio, 47)


3. 이 책들이 초기부터 교회의 규범 canon에 의해서 선지자와 사도의 것으로 인정되고 수용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정경적 canonical이라고 불리운다. 코케이우스에 의하면, "교회가 구약과 신약의 고정된 경전, 즉 신적인 책들의 목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목록안에 있다는 의미로 정경적이라 불리웠으며, 다른 책들은 규범밖에 있으므로 비정경적이라 불렀다."(Summa Theol., IV.ii) 소시니안과 재침례파에 반대하여, 구약도 정경적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자면, 리쎈이 이렇게 말한다: "소시니안과 재침례파는 구약 성경에서 정경적 효력을 박탈하고 신약과 구약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다고 전제하며 구약을 신약하위에 둔다. 비록 모세시대에 관한 한 구약이 소원한 것은 부인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이 교리적으로 신약에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한다."(II.x)

다음 책들은 구약과 신약 경전에 포함된다: "모세 오경, 즉 창세기, 출애급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의 책, 사시기와 룻기, 사무엘서 두권, 열왕기 두권, 역대기 혹은 보완서 두권, 에스라 한권. 느헤미야, 에스라, 욥기, 시편, 솔로몬의 잠언, 전도서, 아가서. 이사야, 예레미야와 애가, 에스겔, 다니엘. 소선지서 열두권, 즉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모두 70인경으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서들, 사도들의 행전, 바울의 서신들, 즉 로마서 하나, 고린도서 둘, 갈라디아서 하나, 에베소서 하나, 빌립보서 하나, 골로새서 하나, 데살로니가서 둘, 디모데서 둘, 디도서 하나, 빌레몬서 하나.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신, 야고보의 서신, 베드로의 서신 둘, 요한의 서신 셋, 유다의 서신 하나. 요한의 묵시록."(갈리칸 신앙고백 III)


4. 한편, 그 책들과 함께 보존되고 전수되었지만 선지자나 사도적 기원을 가지고 있지 않은 문헌들은 경외서들이라 불린다. "이 책들은 그 필자가 선지자나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외경이라 불린다."(벤델린, Collatio, 44) 그와 같은 경외서들은 오로지 구약의 부록에서 발견된다. 종교개혁자들과 부분적으로 그 제자들에 의해서 (사도들에게서 유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경적이라고 제외된 신약의 책들 (베드로후서, 요한 2, 3서, 유다서, 히브리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오래전부터 교회에 의해 정경으로 알려졌고 인정되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의 종교개혁적 구별과 초기 개신교의 독특한 성경관은 우선적으로 (독일 개신교회와 심지어 17세기에 이르는 후기 루터란 신학에서 발견되듯이) 교리적이 아니라 역사적이며, 신약에 있어서 유세비우스 경전의 회복을 결과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자면, 머스클러스는 베드로후서, 요한 2, 3서, 유다서, 히브리서와 계시록에 대해 이와 같이 언급한다: "이러한 초기의 판단이 미치는 영향은 내가 다른 성경에 비해 그 책들에 덜 매인다는 것이다."(Loci, 175) 동시대에 휘페리우스는 이미 이런 문헌들이 의심할 여지없이 교리의 석의적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48). 그 때로부터 (잔키우스, 3에서 이미 발견되는대로) 개혁파 교의학에서는 앞에서 인용된 책들이 오래동안 비정경적이라고 잘못 인정되어 왔다는 사실이 확정된 사항 res comperta으로 주장되었으며(헤페, Altprot.Dogm., I, 254 참조),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이 일치된 이후에는, 개혁파 교의학자들이 신약의 정경과 외경의 고대 개신교적 구별을 심지어 마귀의 속임수라고 비난하는 일이 보편화되었다. 코케이우스를 참조하면, "그것들 (신약의 책들) 가운데" "비록 몇 책들 또는 그중 일부에 대하여 비공인화 또는 위조품으로 낙인찍으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보다 더 특기할 사실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열정과 논증으로 그것들의 권위가 빛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나 요한의 두 서신, 또는 베드로후서나 계시록을 외경으로 분류하는 사람은 합리적이 아니다. 그리고 이 책들은 모세 오경과 선지서들, 그리고 복음서들과 일치하는 교리의 경건함과 신성함뿐 아니라 예언의 진실성과 이전의 예언들과의 일관성에 의해서, 그리고 사도들의 저작이라는 증언의 고대성에 의해서 충분히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인정된다."(Summa Theol., IV.36)

구약의 외경에 대하여, 뷰칸은 왜 그것들이 정경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은지 잘 설명해 준다: "(1) 그 책들이 선지자나 사도에 의해 기록되지 않았고, 또한 자증성이 없기 때문에. (2) 그 책들안에 정경적인 책들에 나타나는 힘과 위엄이 발산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3) 그 책들안에 부조화이든지 완전한 허위이든지 정경서들과 다른 것들이 있기 때문에 (토비드 8장과 12장은 하나님의 말씀과 대치되며, 마카비 일서 6장과 2.14, 2.12도 그렇다. 바룩 6장에서 유대인의 포로기간이 70년이 아니라 7세대라고 말하는데, 이는 성경의 관례와 상충한다). (4) 그 책들은 히브리 언어로조차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신탁이 맡겨진) 유대인들에게 전수되지 않았다. 그리고 (5) 교회안에서 그 책들의 신뢰도는 항상 의심스러웠으며 그 필자들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하였다."(IV, 8)


5. 이 신구약의 정경적인 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포하고 있을뿐 아니라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그 자체이다. 초기의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매우 분명하게 구별하였다. 그들은 전자의 개념으로 하나님이 다양한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그리고 후에는 자기 아들을 통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칼빈과 그의 직접적인 후계자들은 (그리고 독일에서는 여전히 휘페리우스에게 의해서) 교회에 대한 가르침에서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다양한 계시나 말들이 처음에는 구전되다가 시간이 지난 후에야 기록되었다고 가르쳤다.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이 개인들에게 말씀하신 말이었다(헤페, Altprot.Dogmatik. I, 251-2). 반대로 그 후의 교의학자들은 영감과 계시의 개념을 분리하여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신의 개인적인 계시행위가 아니라 그것이 기록되는 방식, 즉 영감에 근거한다고 가르쳤다. 이 견해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이며, 따라서 개념상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이 동일시되었다. 이것은 이미 헬베틱 신앙고백 2장에 나타난다: "정경적인 성경이 실제적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볼렙은 이렇게 결론 내렸다: "성경이나 성문서들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질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무가치하다. 마치 학교에서 제일원리를 부인하는 사람과 논쟁하지 않듯이, 마찬가지로 만일 어떤 사람이 기독교의 제일원리를 부인한다면 우리가 그의 말을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야 한다."(3) 물론, 심지어 개혁파 스콜라주의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의 오래 묵은 정의를 계속하는 습관에 빠져 있었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는지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항이 신앙의 조목, 즉 구원을 받기 위해 반드시 믿어야 하는 교리 de fide 또는 필수적 신앙 credendum인지"라는 질문에 주어진 보에티우스의 답변을 보면 분명하다(V.1). 보에티우스는 이렇게 답변한다: "사물 자체 (성경의 내용)와 예를 들자면 그 부분이 어떤 언어와 문구로 쓰여졌는지와 같은 외적 형태 및 언어의 특별한 양식을 구별하라. 또한 집합적으로 취급되는 정경과 그 구성 부분들을 무제한적으로, 그리고 그 동일한 정경을 분배적으로 (또는 명백하고 표상성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도록 크게, 적게, 그리고 가장 적게 그것을 분리할 수 있는 부분들을) 구별하라. 거기에 추가하여, 신앙 (또는 신앙의 원리로부터의 추론)과 신학적 진리들에 대하여 신앙의 원리로부터 내린 결론을 구별하라."

기록되지 않은 말씀 (하나님이 구원을 경륜을 전하는 개인 해석자와 도구들에게 말씀하신 말이나 계시의 말 자체)과 기록된 말씀 (또는 계시된 말의 기록)을 구별하는 방식과 매우 다르게, 내적 말씀 verbum internum과 외적 말씀 verbum externum 사이에 구별이 시도되었다. 전자는 내용을 고려하였고, 후자는 (개념상 계시와 다른) 영감된 표현을 생각하였다. "내적 말씀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받은 개인적 영감을 가리키며, 외적 말씀은 그들의 입으로 그것을 설교하는 것으로 공적 정경을 결과한다."(하이덱거, I) 기록되지 않은 말씀과 기록된 말씀의 구별은 단지 카톨릭의 전통 교리에 반대하여 논의되었다. 예를 들자면, 리쎈이 이렇게 말한다: "말씀을 기록되지 않은 것과 기록된 것으로 구별하는 것은 교황추종자들이 말하는 대로 종과 류의 분리가 아니라 우연의 문제일뿐이다. 동일한 말이 기록되지 않았다가 기록될 수 있기 때문이다."(II.3)


6. 정경적인 책들의 기록은 성령의 특별하고 직접적인 활동에 의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성령은 필자들에게 쓰도록 요구하고, 그들에게 기록할 생각과 말을 주었으며, 기록함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보호하였다. 다른 말로, 정경적인 문헌들은 내용과 형태에 있어서 성령에 의해 그 필자들을 통해 영감되었다.

원형적인 개혁파 영감교리의 근저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 개념 사이의 구별이 있었고, 후기 교회 교리의 근저에는 그 둘의 동일화가 있다. 그와 같이 칼빈에게는 성경의 권위가 순수하게 그것이 하나님의 실제적 계시 행위를 보도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였다. 다른 말로, 그것은 원형적인 계시 문서로서, 나중에야 기록되었고 얼마동안은 구전되었다. 칼빈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아담, 노아, 아브라함 등과 같이 개인들에게 자신을 알렸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그들이 후계자들을 통하여 전수하였는데 ... '결국' 계속적인 진보에 의해 교리의 진실성이 모든 시대에 걸쳐 세상에 존속하도록, 그가 족장들에게 사적으로 준 신탁이 말하자면 공적인 기록으로 위탁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뜻이었다. 율법이 공표되고 거기에 선지자들이 후에 그것을 해석하기 위하여 추가된 것도 이런 견해와 상통한다."(I.vi.1-2) 기록의 독특한 영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성경의 영감은 기록의 형태가 아니라 그 내용, 즉 기록으로 증언되는 계시된 사실들의 실체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경의 "필자"라기 보다 그분 자신이 사람들에게 선포하신 교리의 저자로 선포되며, 단지 그것이 성경기록으로 증언될 뿐이다. "하나님이 그 저자라는 확신을 가지지 전에는 교리에 대한 신앙이 확립될 수 없다는 원칙이 견지되어야 한다."(I.vii.4) 그러므로 성경의 최고 증거는 획일적으로 그것을 말씀하신 하나님의 인격에서 a Dei loquentis persona 발원한다. 휘페리우스의 정확히 유사한 가르침은 헤페의 Altprot.Dogm., I, 251을 보라. 우르신도 전체적으로 아직 기계적 영감이론을 모르고 있다. 그는 말한다: "성경과 다른 책들을 구별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교회안에서 가르치는 정도를 고려해야 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권위는 교회의 다른 성직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하나님은 자기 뜻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하도록 그들을 직접 부르셨으며, 그들에게 기적들과 다른 것들을 증거하도록 준비시켰다. 그들의 증언에 의해서,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성령에 의해 이런 방식으로 조명하고 통제한다는 사실을 증거하는데, 그 결과 그들이 교리의 어떤 부분에서도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예비하였다."(Loci, 446) 따라서 정경적 책들의 신뢰성은 하나님이 그 기록에 작용하는 특별한 방법이나 양식이 아니라 그 필자들이 영원히 즐기는 은혜의 상태, 즉 성령안에 있는 그들의 삶에 근거한다. 그 설화들의 무오성이 보증되는 근거는 정경적인 문헌을 기록하는 시간에 역사하는 성령의 작용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보존하신 성령의 항구적 교제, 즉 성경의 필자들이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보편적으로 향유한 진리의 지식에 있다.

그러나 16세기말에 이미 영감의 개념이 바뀌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계시의 개념으로부터 전적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성경은 순전히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성경의 필자들에게 구술되었기 때문에 영감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비록 그에게서 최소한 초기의 영감관이 미친 소수의 영향이 발견되지만, 이미 코케이우스가 이 새로운 영감 개념을 전적으로 대표한다. 그의 Summa Theol., IV.39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이 책들의 저자와 부여자는 하나님이다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도). 그가 그것들의 기록을 명하였고, 그의 성령으로 자기 종들을 감동하고 요구하고 인도하여 그것들을 기록하게 하였다." 일반적인 표현으로 선지자라 부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조수와 대필자로서, 그들은 말씀하신 그대로, 자기 자신의 의지에 따르지 않고 성령에게 이끌려 기록했다.'(40) 코케이우스는 이 말을 덧붙였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순전한 대필자의 기능에 의해서' 엑스타시 상태에서, 또는 성령이 또한 그들안에 초자연적 빛으로 많은 것을 계시해 주었기 때문에 눈으로나 꿈으로 환영을 보면서 부분적으로 본 것과 하나님에게 들은 것을 서술하였다. 그들이 언급한 다른 것들은 역사적인 이야기와 그들이 "받은 지혜대로"(벧후 3.15) 가르친 것들이다. 어떤 것들은 구술하여 기록하였다. '이 일에서 그들에게 신뢰가 주어진 것은' 성령의 증거가 없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결코 기억력의 결함이나 사고력, 또는 단어를 사용하는 기술이나 주의력의 부족 때문에 기록해야 될 것에서 추호도 이탈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호와 같이 거룩한 문자들로 수용된 모든 말은 '추호의 위험도 없이' 절실한 모든 교육적 필요를 충족하기에 유용하며 가장 지혜롭게 만들어진 성령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주장되어야 한다. 더욱이 이 지혜위에 화술의 감동과 (하나님의 영이 평화의 신으로서 '기꺼이 그의 은사를 베푸실' 때, '통회하는 심령과 특별한 사역의 은총이 흔히 나타난다') 성경 저자에게 어울리는 기질이 나타난다."(41)

그래서 성경은 본질적으로 신적 빛과 지혜의 광선이기 때문에 그 권위 certitudo를 그 자체 안에 지니고 있다. 그리고 성경이 그 자체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그 신뢰성을 다른 외부적 권위에 기초하지도 않으며 그런 기초를 허용할 수도 없다. 성경은 단지 그와 같은 권위의 인정이 순전히 그 영감 때문에 인정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코케이우스는 "성경 자체의 권위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단지 그것이 우리에게 quoad nos 권위를 얻는 방식과 우리가 성경이 신적임에 동의하는 방식을 질문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교황주의자들을 공격한다(III.3). "그들은 성경을 인간적 논의의 수준으로 끌어 내리고, 그럼으로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셨는지를 의심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것은 마치 성경에 신성의 광채가 없는 것처럼 성경을 비하하는 모독의 신호다." 7절의 언급을 보라 (거기서 교회의 권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논박한다. 그러나 우리는 물론 성경이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이 직접 열려지지 않고서는 권위도 정당성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만일 성경이 그들을 위하여 주어졌듯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면, 필자들을 감동한 동일한 성령이 우리를 틀림없이 감동할 것이다).

그 이후로는 성경의 '신성"이 계시의 사실과 하나님의 구원활동에 그 필자들이 참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 기록 방식으로부터 유래한다. 하이덱거는 이렇게 말한다: "기록의 충동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은 선지자나 사도들에게 준 '직접적인 소명'에 의한 것도 아니며 단지 '우연' 때문도 아니고 '인간의 의지'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신의 보편적 사명' (모든 나라를 가르치라는 명령)과 '특수한' 사명, 그리고 영감 혹은 '하나님이 준 내적 사명'에 의한 것이다."(Corp.Theol., II.32) 물론 영감을 준 성령이 필자들의 개성을 소멸시키지 않고 그들을 다양한 형태로 계시된 진리를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했다는 점은 전제된다. 하이덱거에 의하면, "필자의 양식적 다양성이 사물이나 말씀의 신적 영감에 장애가 되지 못한다. 영감에 있어서 평화의 신이신 성령은 비록 다양한 언어로도 동일한 교리를 전달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성화시켰다."(Summa Theol., II.36) 레이든 신학통론은 이렇게 말한다: "필자들은 그들 자신을 항상 순전히 피동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활력적으로, 즉 자신의 기법과 사고력, 대화술과 기억력, 배열과 구성, 그리고 자기의 고유한 문체를 사용한 (따라서 그들 사이에 기술 방식상 차이를 결과한) 사람들로 이해하였다. 아모스 7.14-15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고후 10.10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말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11.6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은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그러나 성령의 주도하에 그들을 지도하고 움직이므로, 그 결과 그들이 모든 면에서 사고와 기억, 언어와 기록의 모든 오류에서 보호된다. 삼하 23.1-2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고전 7.25-6, 40 (...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 그러나 내 뜻에는 ...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III.7)

후에 사우무르 학원의 신학자들은 개혁자들의 성경관을 다시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개혁파 정통주의 전체의 반대에 직면하였는데, 그들은 구약의 히브리어 원문에 대해 헬베틱 일치신조에서 그것이 (점 하나까지, 최소한 점의 효력에 있어서) 모음과 내용뿐 아니라 단어도 영감되었다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사고의 근거에서, 스콜라주의자들은 성경과 그 영감에 관한 논문들을 진행하였다.

"신약의 필자들이 그들이 기록한 것과 다른 언어로 (예, 시리아어) 생각했는지"는 보에티우스에 의해 부인된다: "사전에 올바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구전으로나 기록으로 바르고 합리적인 것을 것을 산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그리스어나 헬라어로 기록했다면, 그들은 역시 그리스 언어로 생각하였고 성령의 영감과 구술에 의존하였다."(I.14)

"성경 저자들, 즉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자신들이 쓴 모든 내용을 이해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보에티우스는 긍정한다(I.45, 47).

"성경 저자들이 원치 않았지만 강제로 쓰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보에티우스는 부정적으로 답변한다(I.46).

"그들이 새롭게 기록할 때에 성령이 전에 배웠거나 계시로 받은 것에 대한 생각이나 기억을 환기시켰는지"에 대한 질문에 보에티우스는 긍정적으로 답변한다: "구별해서 말하자면, 그는 무오성의 은사와 (습관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초자연적 빛의 직접적 영향이 접합되면서 습관적으로 알게된 것뿐 아니라 과정상의 형식적 개념과 실제적 회상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새롭게 알려진 일들도 환기시킨다. 그러나 인식가능한 것의 흔적은 다시 환기시키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한번 자극을 받으면 계속 존속하며, 불꽃과 같이 반짝하다 사라지지 않는다."(I.46)

"오로지 사도들에게만, 그리고 그외에는 누가와 마가만 영감받았다. 한편, 바나바, 디도, 디모데, 실바, 그리고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전도자들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I.46)

그와 유사하게,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대필자들은 성경의 사본을 만드는 필사자와 타자수 librarii et typographi로서 약간 영감받았다.

"성경 책들의 표제가 믿을만한지"에 대한 질문에 보에티우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지금까지 나는 부착된 표제의 정경성이나 영감에 대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지 않는다."(V.2) "실제 성경본문에서 전체의 표제나 필자의 이름이 학구적으로 기입된 곳에서도" 그 진정성이 추정되어서는 안된다. 그 유일한 결론은 그와 같은 경우에 표제가 "간접적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per consequentiam 믿을만하다는 것이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본문의 원래 악센트가 믿을만한지"에 대한 답변에서, 보에티우스는 음악적 악센트와 강세 악센트를 구별한다. "낭독할 때 그에 따라 영창하는 히브리어의 음조상 또는 음악적 악센트에 관해서는, 내가 왜 그것들을 긍정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반면에 강세 악센트에 대해서는 왜 그것들이 거부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어원과 구문의 조화를 만드는 전자가 모음의 점들과 동일한 취급을 받아야 한다고 인정하며, 결코 그 반대입장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약의 그리스어 악센트 문제에 관해서, 나는 그것들이 언어와 자모의 우아함뿐 아니라 그 시대적 통일성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단순한 주장을 선호한다."(V.4)

매우 개인적으로 마스트리히트는 성경 영감의 개념을 신적 정경화의 개념과 성경 책들의 계시를 연결시킴으로서 정의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성경을 만드신 방법은 (a) 부분적으로 계시에 의하여. 계시의 방식은 (1) 십계명에서 분명히 보는대로 기록에 의하여, (2) 그것이 기록되어야 한다는 명령에 의하여. 신 31.19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계 1.19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3) 감동에 의해서.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즉, 기록할 것을 제시하고 무오하게 기록을 지도함으로서, 그 결과 율법이나 행위에 종속되었다 할지라도 모든 것에서 그분이 실제적 내용을 영감할뿐 아니라 단어 하나까지도 구술하였다. (b) 부분적으로 정경화에 의하여. 이러한 감동에 의하여 그 문헌들이 교회에 전수된다. 만일 어떤 책이 하나님의 놀라운 종을 통하여 그리고 확실한 성령의 지도로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신적 권위에 의하여 교회에 주어지고 교회의 거룩한 규범으로 부여할 목적으로 성화되지 않는 한, 성경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I.ii.13)


7. 이 비교할 수 없는 성경 기원의 독특성, 즉 그 신성에 "그것으로 그 신성이 충분히 선포되는" 성경의 독특한 속성이 근거한다(크로시우스, Synt., 117). 이것들은 "권위와 확실성, 충족성과 완전성, 필수성과 명료성이다." "성경이 절대적으로 그리고 자체적으로 믿을만하기 때문에 신적이지만, 상대적으로 그리고 우리에 관한 한 quoad nos 권위는 교회에 의존하며, 따라서 그것이 우리에게 알려지는 유일한 길은 교회의 친절에 의해서이다"라는 17세기 로마 신학의 통상적인 주장이 리쎈에 의해서 유연하게 반박된다: "권위란 관계된 실체의 종류에 속하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믿을 만하지 못하다면 그 자체로도 믿을만하지 못하다. 그 자체로 권위를 얻을 수 있는 증거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동의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 증거는 성령이시다! 그리고 로마 입장의 핵심은 교회가 성령에 의해 지도된다는데 있다.]


8. 성경의 신성이나 영감성은 신자에게 무엇보다도 권위 자체의 속성으로 계시된다. "성경의 권위는 모든 다른 책들 상위에 있는 성경 자체의 위엄과 탁월성에 있으며, 그것 때문에 성경이 '믿을 만하다', 즉 무오하게 '확실하다'고 주장되어야 한다. 따라서 성경은 그 저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모두가 믿고 순종해야 한다."(폴란, i.16) 이러한 효력 때문에, 성경은 모든 신학의 원리이며 기독교 교리의 배타적 규범이고 모든 교리적 분쟁의 무오한 심판자이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단어나 그 확실한 추론이 내포하는 모든 것은 교리가 되고, 그 반대는 오류이며, 심지어 그것이 성경과 배치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영혼의 구원과 무관하다. 레이든 대조문서에 의하면, "이 성경만이 모든 구원의 진리가 추출되는 '원리'와 '실체'이며, 신적인 사실들에 대해 모든 진정한 교리와 그럼으로서 모든 거짓된 교리가 판정되는 '경전'과 '규범'이다. 한마디로, 성경은 자증자와 반박될 수 없는 '증인'이며 심판자, 즉 그 자체적 증거로서, 신적 사실들에 대해 제기되는 모든 논쟁이 그것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판단의 기준과 규범은 다음 원칙을 따라야 한다: (1) 그안에 내포된 것과 명백하게 또는 정당한 추론에 의해 그것과 동의하는 것은 참된 교의이다. (2) 그것과 반대되는 것은 거짓이다. (3) 비록 그것과 직접적으로 배치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안에 있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구원에 필수적인 교의가 아니다."(iii.18-19)


9. 성경의 속성 혹은 성질은 매우 다양하게 열거된다. 크로시우스는 "권위, 완전성, 감정과 해석의 명료성, 효율성"을 언급한다(Synt., 117). 마스트리히트는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I.ii.14-21): "(1) 그 최고의 독자적인 '권위'. 그것 때문에 그 자체나 다른 것에 대하여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근거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이 효력 때문에 성경이 소유하는 것으로는 "(a) 모든 신학적 논쟁의 '결정권', (b) 생활과 도덕의 지도권, (c) 우리 자신의 심판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권위"와 "규범의 권위"는 구별되어야 한다. (2) "진실성과 확실성". (3) 하나님의 단독적인 섭리에 의해 모든 오염으로부터 면제되어 존속하는 '순결성'. (4) '성결성'과 '순수성'. 그 이유는 (a) 주요 원인으로서의 하나님, (b)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대필자, (c) 거룩한 내용, 즉 하나님의 뜻, 그리고 (d) 그 '목적'인 우리의 성화 때문이다. (5) '명료성'. (6)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사는데 부족한 것이 전혀 없는 '완전성'. (7) '필수성'. 실은 절대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뜻이 전제된다. (8) '효율성". 많은 교의학자들은 단지 '권위', '완전성', 그리고 '명료성'만을 주장한다.


10. 성경의 권위, 즉 그 신성과 신빙성은 어떤 방식으로도, 그리고 심지어 우리와의 관계에서도 quoad nos 교회의 인정이 아니라, 단순히 그리고 오로지 성경 그 자체에 근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스스로 증거하며 인간의 평가를 초월한다. 그러므로 절대적 확실성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의 신성과 권위를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성경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증거, 또는 신자들의 양심 속에 하나님이 부여한 증거, 성령의 증거이다. 그를 가득 채우는 구원에의 열망이 성령을 통하여 완전히 만족되고,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하나님의 영이 다시 성경에서 인정되며, 그 자신의 신앙적 삶이 성경에 의해 더욱 더 은총을 받는 모습으로 발전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에게 이것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 결과로 성경의 신성과 권위는 또한 오로지 성령의 증거를 체험한 그리스도인에 의해서만 인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신적 권위를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되는 다른 증거들은 그것들이 외부로부터 성경의 권위를 견지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한에서만 그리스도인에게 가치있을 뿐이다. 이런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는 항구적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면서 그것을 개인 그리스도인에게 전수하는 교회의 증거 (이런 전통은 처음부터 성경이 교회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된 사실을 마찬가지로 확증하는 이단자와 유대인 또는 이방인의 증거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없다), 성경의 성취된 예언들 (특히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 이전 하나님의 이스라엘 민족 인도, 그리고 그 이후의 흩어짐), 그리고 그것이 수행됨으로서 성경의 필자들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 하나님의 사람들로 확인되는 기적들이 있다. 권위에 대한 질문은 그 신성과 영감성을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 동일하다. 이 질문을 답변함에 있어서, 모든 개혁파 교의학자들은 본질상 일치하고 있다. 모두가 진정한 증거로서 성령의 증거 testimonium Spiritus sancti를 제시하면서, 그 외에는 (상호 다양한 차이를 보이면서) 여러 다른 증거들을 부차적인 보조적 증거들로 제시한다.

칼빈은 이렇게 주장한다: 만일 우리에게 성경 내용이 신적인 증거를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성령의 증거는 모든 이유보다 더 탁월하다. 하나님이 홀로 자기 자신의 말씀에 대해 정당하게 증거하시기 때문에, 이 말씀은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 확신되기 전에는 사람의 마음속에 신뢰를 얻지 못할 것이다. 선지자들의 입을 빌어 말씀하신 동일한 성령께서 하나님이 위탁한 말씀을 그들이 신실하게 전달했음을 우리에게 설득하기 위해서 우리 마음을 감동시켜야 한다. 사 59.21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은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I.vii.4) 오로지 이 성령의 증거를 가진 사람에게만, 다른 논증들이 그에게 성경의 신성을 확신시키기 위해 신앙의 변증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1) 성경에서 비추이는 "신적 지혜의 경륜", (2) "지상의 것들과 전혀 다른 성격의 가르침, (3) 모든 부분들의 자연스러운 상호 일치, (4) 하늘 나라의 가장 심오하고 장엄한 신비를 보여주면서도 겸허한 언어들, (5) 새로운 신을 말하지 않고 모든 이스라엘인들에게 잘 알려진 분에 대해 말하는 모세 저작의 고대성, (6) 실로 그들이 선포하던 시대의 상황은 그 정반대였지만 미래 사건이 분명히 나타나기 이전에 외친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다니엘의 예언들," (7) 복음서 기자들과 사도들의 단순성과 장엄성, (8) 교회의 보편적인 "동의", 순교자들의 증거 등 (I.viii). 성경은 자증자이고 그 명성은 순전히 그 자체에 근거하며,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도 교회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 진술을 반대하기 위해 교황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어거스틴의 표현, 즉 "나는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의해 그리로 인도되지 않았더라면 복음을 믿을 수 없었다"는 말이 칼빈에 의해 어거스틴의 상황과 올바로 연결된다: "그는 마니교에 연루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의 견해는 이것을 의미한다: "그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외부자였기 때문에, 그가 교회의 권위에 의해 설복되지 않는 한 다른 방식으로는 복음을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모든 후대의 교의학자들도 이 표현을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하였다. 볼프강 머스큘러스는 여기서 '믿었다 crederem'라는 말이 '믿었었다 credidissem'와 동등하다고 올바로 설명한다(181). "성경의 모든 권위가 교회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이다. 비렐리우스가 말하는대로, "그것은 마치 태양의 빛이 사람의 증언에 의존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비록 모든 사람이 소경이라 할지라도 태양이 비추기를 쉬지 않듯이, 사람이 인정하든 안하든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 피해도 받지 않는다."(Relig.Christ.compend., 3) 우르신도 정확히 동일하게 가르친다(Loci, 436). 가장 본질적인 "성경의 증거와 확실성"은 성령의 증언이다. "이 증거는 독특하여, 오로지 그리스도의 영으로 중생한 사람에게만 합당하고, 단지 그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영혼에 선지자와 사도들이 가르친 진리를 풍성하게 증거하고 확인할 뿐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고 따르도록 우리 마음을 돌이키고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르신은 이와 같이 설명한다: 성경 말씀에 대한 신앙은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우리가 동의하는 확고한 동의와 성경 말씀에 따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개별적으로 인정하고 선포하는 신뢰"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신뢰를 가지면, 하나님 안에 안식하고 그를 부르는 기쁨과 성경이 가르친 대로 우리가 간구한 좋은 것을 받으리라는 확실한 소망을 결과한다. 그러나 마음에 곧바로 확실한 감정을 가지는 성도 개인은 두가지, 즉 교리에 대한 동의나 확신과 거기서 우러 나오는 위안이 어떤 사람이나 피조물의 증거에 의존하지 않고, 신이신 성령 자신의 능력에 의하여 다른 가르침이 아니라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글을 읽고 듣고 생각할 때 촉발되고 확증되는 경험을 가지게 된다." 마음 속에 성령의 증거를 경험한 사람에게만 성경에 있는 정경적인 책들의 영감을 주장하는 다른 논증들 (교리의 고대성, 예언, 기적 등)이 실제적인 힘을 얻는다.

물론 개인에게는 교회의 권위가 성경을 믿는 신앙에 이르는 방도가 될 수 있다. 교회가 그를 격려하고 교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성경의 가치가 교회의 권위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교회나 수가성의 여인이나(요 4.42) 마찬가지다. "사마리아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행한 것을 예수께서 모두 말씀하셨다는 그 여인의 증언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와 이틀동안을 지내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 때문에 믿었다. 그러므로 수가성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으나, 그들이 그리스도 자신을 직접 보고 들은 후에는, 그들이 이제 심지어 그 여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지라도 믿었을 것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와 같이 아직 개종하지 않았거나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시각적으로 보다 인상적인 교회의 증거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으나, 그들이 보다 풍요한 신앙의 빛으로 비추임을 받은 후에는, 비록 모든 천사들과 사람들이 설득하는 방법과 내용이 다르겠지만, 그들은 이제 비교할 수 없이 높고 확실한 증거에 의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경험하게 된다."(우르신?)

이와 같이 성경의 신성에 대해 유일한 실제적 증거는, "하나님 자신이 이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름 아니라 성경이 그 자체에게 주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항상 자증자와 인간의 평가를 초월하는 대상이라고 서술한다. 불링거는 성경의 확실성 certitudo에 대한 개혁교회 개념을 가장 분명하게 서술한 사람이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의심없이 믿어야 한다."(I.2)

이 교리의 개발과정에서 가장 본질적인 진술들을 요약하여, 피스카토르는 성경이 순전히 성령의 증거에 의하여 그 자체의 신적 영감성과 자증성을 입증한다고 가르친다(16). 거기에 추가하여, 그는 "성경에 대한 신앙을 수립하는 증거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1) 그 천상적 장엄성, (2) 모든 부분들의 상호 동의, (3) 그것이 우리에게 유발시키는 경탄, (4) 기적의 수와 위대함, (5) 놀라운 예언의 성취, (6) 교회의 동의, (7) 순교자들의 피."

그후에도 이 성경 개념은 계약신학과 스콜라주의에서 변치 않고 유지되었으며, 성령의 증거에 대하여도 그 본질이 예를 드자면 하이덱거에 의해 매우 조심스럽게 정의되었다: "이 성령의 증거는 오류에 노출될 수 있는 단순한 마음의 설득이나 열광주의자들이 신적이라고 외치는 비합리적인 마음의 움직임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선물함으로서 우리 어두운 마음을 비추는 찬란한 빛과 비추임이다(고후 4.6). 그 결과 자연적인 장애들이 제거되어,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탁월성과 풍요함을 모두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Corp.Theol., II.14) 성경에 대한 교회의 증거와 성령의 증거 사이의 관계를 하이덱거는 이렇게 설명한다: "교회의 증거"는 "진정하거나 근본적이 아니라, 도입적이며 봉사적이다."(Medull.Theol., II.viii) 볼렙도 같은 의미로 말한다: "이 증거에는 두가지, 즉 근본적인 것과 목회적인 것이 있다. 성령의 증거는 근본적 principale인 반면, 교회의 증거는 목회적이다."(3)

보에티우스도 그와 유사하다: "성경의 저자인 하나님에 의해 주입되고 감화되지 않는 한 성경의 권위에 대해 어떤 객관적 확실성도 없듯이, 성령을 통하여 내면적으로 조명하고 확신시키는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성경의 권위에 대해 어떤 주관적인 확실성이나 공식적 개념도 없다. 성경 자체는 마치 (어떤 외부자도 원리나 증거 또는 확신이라는 방편을 통하여 개입할 수 없는) 그 자체의 빛으로 외향적 원리를 비추는 것처럼,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또는 그 자체로 믿을만 한 것이듯이, 성령은 우리 마음의 눈을 실제로 열고 조명하며 성경의 믿을만한 권위를 그것으로부터, 그것과 함께,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확신시키는 내적이고 최상적인 최초의 독립적 원리로서, 그 결과 우리는 이끌려 달리게 되며 수동적으로 확신을 얻고 따르게 된다."(V.14)

알스테드는 이를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였다: "성경의 권위와 확실성은 성령의 증거에 의존하며, 이 증거는 모든 증거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다. 모든 말이나 글의 권위는 그 실제 저자에 의존한다. 많은 것이 이 원칙에 의존하며, 이것이 신학 전체의 기반이다."(31)

[보에티우스가 순간적으로 얼마나 혼돈하였는지를 인식해야 하는데, 그 혼돈은 '축자 영감설" 학파 전체에 대한 것이었다. 성경이 그 자체의 빛으로 비춘다고 말하였다가, 그 다음 순간에는 성령의 개입이 필수적이라고 (올바로) 선언한다. 실로 성령은 성경이 비추는 빛이다. 그런 다음에 비유를 바꾸기 위하여 성령이 생략되는데, 성령은 어떤 인간이나 책이나 다른 피조물의 재량에 맡길 수 없다. 그러나 개혁신학이 그와 같이 성령을 소위 주관적 원리로 강하게 주장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축자영감설이 거의 올바르고 탁월한 실용적 원칙이라는 다른 사실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그것은 하나님이 홀로 자기 성령의 본질적 빛을 통제한다는 사실에 의해 하나의 신학적 교의로서 폐기된다. 하나님이 홀로 계시며 비록 성경을 통한다 할지라도 홀로 하나님에 의해서만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란 너무 난해하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그를 안다면, 그것은 그가 자기의 직접적 개입으로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음 절에서도 어떻게 "성령이라는 주관적 원리"가 성경의 그릇된 자율성을 선호하여 자동적으로 배제되는가를 매우 주의깊게 관찰하라.]


11.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와 일치하기 때문에(!), 그것은 본질상 절대적인 권위이다. 동시에 그 권위의 독특성이 성경의 내용에 근거하고 있다. 성경이 기술하는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한 역사적 진리인 한, 그것은 "역사적 권위와 진정성"을 소유한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과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신적 규범을 보유하는 한, 그것은 "규범적 권위와 진정성"을 소유한다. 이것을 보면, "역사적"인 것이 "규범적" 권위보다 폭넓다는 것은 분명하다. 전자는 성경 내용 전체에 적용되고, 한편 후자는 그 일부에만 적용된다. 왜냐하면 성경이 귀신과 경건한 사람들의 일과 말과 생각에 대해 기술하는 것은 역사적 권위를 가지지만 규범적 권위는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구별을 보에티우스가 가장 타당하게 논의한다(I.30-1): 성경의 권위는 역사적 권위 authentia historica와 규범적 권위 authentia normalis로 구별할 수 있으며, 후자는 실천적 권위 authentia praecepti라고도 불린다. 전자, 즉 역사적 권위는 성경의 한 속성으로서, "성경 안에 포함된 모든 교의와 결정, 그리고 선악을 불문하고 모든 말과 행동을 역사적으로 기술함에 있어서 역사적 필자들이 그것들을 하나님의 입과 계시에 의해 직접 받았으며, 따라서 우리에게 아무 오류도 없이 그것들을 알려준다고 믿게 되는 한,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진리로서 무오한 진실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규범적 권위란 성경의 한 속성으로서, "우리의 지식과 관계없이, 성경에 담겨있는 것들의 실질적인 내용 (예를 들자면, 결정이나 말씀, 또는 실천)이 말하는 것들을 반드시 믿고 지키고 본받아야 하는 것으로 우리 양심에 의무화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보에티우스는 계속한다: "이런 전제에서 우리는 성경 전체가 역사적 진정성을 가지고 있어서 믿을만하다, 즉 무오하고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진리가 모든 부분에 퍼져 있어서, 필자들이 내용이나 문구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사적 충동이나 변덕이 아니라 성령의 구술에 의해 그들의 견해를 모두 기술했다고 말한다." 성경 저술의 문체상 독특성도 성령의 영감을 받았으므로 영감 개념을 반박하는 것으로 제시되어서는 안된다(33). 심지어 구약의 모음 부호 puncta vocalia도 영감받았다(33). 한편, "난외 기록"은 믿을만한 것으로 볼 수 없다.

규범적 또는 실천적 권위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것이 역사적 권위만큼 폭넓게 확실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38f). 그것을 결정함에 있어서, 우리는 과다나 부족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말과 글과 결정과 행위"를 구별하고 "사람들과 사람들"도 구별해야 한다. 우리가 구별해야 될 것은, (1) "그의 말과 행동과 계획이 논란의 여지없이 모든 면에서 믿을만한 존재" (삼위 하나님, 천사들). 그러나 이러한 것에서 아브라함에게 자기 아들을 잡으라고 한 명령과 같이 "하나님의 비상하고 특수한 명령들"은 제외되어야 한다. (2) "그들의 말과 행동과 계획이 전혀 믿을 수 없는 존재" (마귀, 불경한 자). (3) 그들의 말 등이 믿을만한 신자나 경건한 사람들. 이 경우는 "선지자나 사도들의 실재와 방향에 의해" 지지되는 한 믿을만하다. (4) "사적인 행위나 계획이나 경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개인적 언사나 규정들은 교리적 의미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가르침")를 가지지 않는 한 믿을 수 없다. 그 경우에는 물론 신뢰를 받는 위치를 획득한다.

터레틴은 더 간단히 말한다: "역사와 설화의 권위가 하나 있고, 진리와 규범의 또다른 권위가 있다. 전자에 의하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설화는 그 내용이 선하든 악하든,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것이 진술된 대로 모두 사실이다. 그러나 후자는 그 자체가 진실한 것이어서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부과될 수 있는 것만으로 제한된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규범적 권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불경한 사람이나 마귀의 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역사적 권위를 갖는다." 교의학자들이 모두 이 점에 있어서 거의 유사하다.


12. 나아가, 성경의 신성에 그 완전성이 근거한다. "성경의 완전성은 신앙과 윤리의 모든 주제를 포함한다는 구조적인 완전성이며, 등급에 있어서도 모든 계급의 계시를 포함한다는 완전성이다."(부르만, 45) 성경의 목적과 관련하여, 그 완전성은 충족성으로 나타난다: 성경은 죄의식이 깨어나고 그가 요구하는 구원이 그에게 전달되도록, 자연과 하나님의 뜻,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데 필요한 인간의 모든 필요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이 모든 진리를 완벽하게 구체적인 언어로 설명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함축적"이든 "명시적"이든 진리를 완전하게 계시하여 신자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한다. 성경이 영생을 얻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터레틴은 말한다: "이 질문으로 돌아간다. 성경이 절대적 의미에서 모든 것은 아니지만 구원에 필수적인 것을 모두 담고 있는지, 명시적으로나 장황한 말로는 아니지만 그와 동등하게 그리고 정당한 추론에 의해 알 수 있도록 완전히 내포하고 있는지, 그리하여 기록되지 않은 말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는지. 우리는 긍정적으로 완전성을 수용한다."(II.xvi.9) 만일 과학이 온갖 종류의 외부 자료가 성경에 유입되었음을 입증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결코 그 완전성을 거부하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리쎈이 올바로 지적한대로, "이 질문은 근원이 순수하여 많은 사본에 어떤 흠도 침투하지 않았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너무 오염되어 더 이상 논쟁들의 심판자와 규범으로 인정할 수 없느냐 하는 것이다."(II.xvii.3)


13. 우리는 "본질적 완전성"과 "구조적 완전성"으로 구별해야 한다. 전자에 의하면, 성경이 영원한 은혜의 구원을 얻기에 필요한 계시의 진리를 충분히 담고 있다. 한편 후자에 의하면, 거룩한 저작들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파괴와 변질로부터 잘 보존되어 어떤 정경적 책이나 그 본질적 부분도 훼손되지 않았다.

하이덱거는 이렇게 말한다: "신구약 성경은 그 자체의 완전성을 가지고 있다. 비록 방식은 다양하지만 하나님이 계시하신 시대와 분량에 따라 계속적으로 충분히 설명하였으므로 구원을 받기 위해 필수적인 신앙 조목의 본질적 완전성을 의미하기도 하고, 신구약으로 구성된 정경의 전체적 구조에 나타나 있을뿐 아니라 구약이나 신약, 그리고 모든 성경 책의 부분들이든지 정경 전체에 상대적인 의미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구조적 완전성을 가리키기도 한다."(Medull.theol., II.24)

물론 초기에는 개혁교회 안에서 구조적 완전성 perfectio integralis을 (칼빈의 영감관에 따라) 다르게 생각하였다. 예를 들자면, 피터 마터는 본래 정경에 들어있던 일부가 유실되었음을 인정한다: "도중에 사라진 책으로는 에녹서 (창 5.22), 야살의 책 (삼하 1.18), 여호와의 전쟁기 (민 21.14), 다윗, 솔로몬, 여호사밧의 행장, 이스라엘 왕의 년대기 (왕상 11.41)가 있다. 그 외에도,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 (왕상 14.19, 16.27, 22.39)과 선지자 생도의 예언기 (왕하 2.3)가 있다. 간단히, 솔로몬의 잠언 3000과 그의 노래 1005, 그리고 식물론이 있다 (왕상 4.32, 이 구절에서 왜 하나님이 그 많은 수의 책들이 활용되기를 원했는지 설명하고 있다) [!?]. 그뿐 아니라, 많은 유명한 기념물들이 유실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많은 책들이 또한 보존되었는데, 특히 가장 유용하고 사람을 가르치기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들이 남았다. 그토록 많은 위대한 저작들이 유실된 것을 단순한 사고로 보아서는 안된다. 심지어 한 마리의 참새도 우연히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40)

다른 개혁파 교사들도 이러한 견해를 표명하였으며, 후대에도 계속 주장되어 매우 익숙해졌다. 예를 들자면, 리쎈이 "특히 구약의 책들이 소실되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한다: "머스큘러스나 휘테이커같이 우리중 어떤 사람은 크리소스톰을 따라 그러한 주장을 한다."(II.xvi.4) 그러나 이러한 인정이 후에 거부되고, 성경의 기록뿐 아니라 수집도 하나님 자신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작용하였다고 가르치는 현재의 견해가 교리적으로 정당화되었다. [당신은 무엇이든지 주장할 수 있다!!] 레이든 신학통론은 이렇게 가르친다: "성경의 수집과 요약도 실제에 있어서 신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부는 직접, 일부는 간접적으로 수행되었다. 직접적으로, 처음부터 교회 전체를 위해 쓰여진 책들은 신적 필자들에 의해 교회에 위탁되고 권장되었다. 롬 16.26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하신 바). 구약에서 모세의 책들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성막 sacrarium으로 가져다 언약괘 옆에 두었다. 신 31.26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괘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하라). 신약에서는 복음서들이 동일한 주제를 다루지만 누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에 구원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기반이 있다. 간접적으로는, 필자 자신이 본래 특정한 민족이나 교회, 소도시나 대도시의 시민들, 또는 그들의 반대자들에게 쓴 책들이 있는데, 처음에는 그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으나 그들이 무모하게나 우연히가 아니라 (교회가 필요한 것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 그 책들을 보존하다가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 실제적으로 모든 교회가 그것들을 신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그것도 교회의 자유로운 행위가 아니라 필수적인 채택에 의한 것이었다."(III.12-13) 특별히 마르크를 참고하라: "소시니안이나 교황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바와 달리, 어떤 정경적 책들도 완전히 소실되지 않았다. 후자는 실로 성경의 불완전성을 입증하려고 구약만 그런 책이 20권이 넘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측의 유명한 신학자들중에도 그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들은 교황주의자를 올바로 거부한다. 왜냐하면 여러 책들에 함유된 정경적 교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선하심에 의해 오늘날 잔존하는 책들에 매우 확실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논증의 부당성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교황주의자들이나 일부 학자들을 따라 완전히 소실된 책들이 있다는 가정을 인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1) 하나님의 신정상 불변성, (2) 그의 섭리는 구약과 신약에서 사실적으로 입증된다. (3) 반복된 약속들. 마 5.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눅 21.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리고 (4) 기독교와 유대인을 막론하고 후에 교회가 성경책들에 대해 보여준 지나칠 정도의 그리고 거의 미신적인 신중함."(II.16) 알팅은 말한다: "성경은 정경적인 것을 분실하지 않았다. 분실된 것은 정경에 속하는 책들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alias, 하나님이 그것을 보존했을 것이다."(78) 리쎈도 말한다: "정경적인 책이 소실되지 않았다는 보편적 견해를 따르는 것이 더 안전하다." [최소한 당신이 그것을 실감하기까지, 오늘날 우리가 정경을 모두 가지고 있으므로, 당신은 그 교리 체계가 얼마나 완벽한지를 점점 더 느끼게 된다. 구속의 신적 신비를 우리 인간이 확신하는데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


14. 그러므로, 성경의 교리적 내용을 완성할 전통이 필요없다. 전통은 단지 교회의 정치와 권징, 그리고 예배에만 관계할 수 있다. 리쎈은 말한다: "모든 전통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인 그리고 의전적인 전통은 존재한다. 또한 신적 및 사도적 전통, 즉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서 내려오는 전통도 있다. 문제는 교리와 윤리에 관한 전통이다. 그런 것들이 과연 성경 상위에 주어졌는지. 우리는 그것을 부정한다."(II.xi.2) 비텐바흐는 이렇게 말한다: "개신교인이 모든 전통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하라 (예를 들자면, 유명한 코케이우스, Admonit. de princip. fidei, 19). 그들은 확실한 역사적 전통을 수용한다. 이것은 모든 교회가 동의하는 것, 또는 과거에 교회가 무엇을 믿었으며 어떤 책들을 신적으로 받아들였고 성경 구절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등에 대한 증언으로 구성된다. 그들은 정경과 외경에 대한 확정적 전통을 존중한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신앙 credenda과 행위 agenda를 명령하는 교리적 전통은 거부한다."(Tent.theol., I.212-312)


15. '완전성'과 '충족성'의 속성과 마찬가지로 '필수성'의 속성도 성경의 본질에 속한다. 인간 정신의 연약성과 이 세계에 지배적인 오류의 힘을 고려할 때, 성경은 계시된 진리의 순수한 지식이 지상에 유지되는데 필요하다. 성경은 교회의 유익뿐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교회가 절대적으로 확실한 계시 기록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면, 교회 자체를 상실하게 된다. 잠시 고려할 점은 성경의 필요가 절대적이 아니라 가정적 성격의 필요성 necessitas ex hypothesi dispositionis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심지어 성경이라는 매개체가 없이도 자기 진리의 순수한 지식과 증거를 유지할 수 있다. 칼빈은 말한다: "만일 우리가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미끄럽게 하나님에 대한 망각으로 빠져드는지, 온갖 오류로 빠져드는 인간의 성향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동시에 새롭고 허구적인 종교를 만들어내는 열정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고려한다면, 망각의 세계로의 소멸과 인간의 편견에 의한 오류나 오염으로 인한 상실을 예방하기 위해 그와 같은 천상적 교리의 종결이 얼마나 필수적인가를 쉽게 이해할 것이다."(I.vi.3)

머스큘러스는 성경의 필요성을 인간이 진리의 경험과 지식에 이르기 위해 '선천적으로 a priori' 복속해야 하는 권위의 필요로부터 추론하였다: "숙련되지 않은 사람이 접하는 순간 즉각적으로 사물을 이해함으로 설득되어 진리의 본성에 인도되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이 훈련된 지각을 가지고 사물 자체를 이해하기 전에는 그들의 마음과 지성이 결코 그것을 즉시 이해할 수 없으므로, 이제야 훈련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우선 모종의 권위에 의해 교리 doctrina에 복속해야 하는 필요성 그 자체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권위란 사물의 지식을 얻기 위해 모든 제자들이 통과해야 하는 문과 같은 것이다."(176)

터레틴에 의하면, "다음 세가지가 성경의 필요성을 확증한다. (1) 말씀의 보존, (2) 입증, (3) 전파. 기억력의 연약성과 인간의 타락, 그리고 인생의 단명함으로부터 성경이 더 쉬운 방식으로 본래대로 순수하게 보존될 수 있도록, 사탄의 기만과 오염으로부터 더 확실히 방어될 수 있도록, 그리고 부재자뿐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더 편리하게 확산하고 전수할 수 있도록, 기록된 말씀이 교회에 부여되는 것은 필수적이다."(II.ii.6)

코케이우스는 필요성 necessitas을 우리에게 "성경을 유지하며 돌보라고 명령하는" 성경의 속성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다섯가지로 증거한다. 기록된 말씀은 다음 이유로 필요하다: (1) 그것 없이는 신학자가 말해야 할 것, 즉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지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2) 성경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피조물안에서 하나님 자신을 알고 찬양하고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3) 그것 없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4) 그것 없이는 칭의와 그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5) 추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필수적으로 기록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이유는 "(a) 국가들의 망각 때문에, (b) 확인된 우상숭배와 유대인의 불신, 이단과 말세에 나타날 타락 때문에, (c)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그리스도가 예언되고 그로 인해 신뢰되는 한), (d) "복음서와 신약의 명료성 때문에."(Summa Theol., II.1-20)

로마 카톨릭 교리에 반대하여, 폴란은 이렇게 진술을 시작한다: "하나님에 의해 성경이 교회에 주어진 이래로, 성경은 교회의 유익 bene esse뿐 아니라 교회의 존재 esse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I.35) 이와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단지 모세의 책들만 있었을 때에는, 그것들이 교회를 위해 필요했다. 모세 시대에는 신약 성경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존재 esse를 위해 (명령되었으나 절대적이지 않은) 성경이 필요하였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성경을 보존하라고 명령하고 교회에 권하지 않았다면, 진정한 교리가 수많은 이단과 비난속에서 보존되어 오늘에 이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이 필수적이어서 그것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과 정확히 마찬가지로 교회는 성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점은 성경이 절대적이고 단일한 필요로서가 아니라 소위 가정적 성격의 필요성 necessitas ex hypothesi dispositionis에 의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면 심지어 성경 없이도 교회를 가르치고 유지할 수 있다." 하이덱거도 동일한 의미로 말한다: "하나님께서 성경 없이도 교회를 보존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일단 이 은총의 증거를 나타내고 자기 계시의 다른 규범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성경은 교회에 필수적이며 성경 없이는 태양없는 세상보다 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실로 하나님 없이 무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Corp.theol., II.4)


16. 만일 성경이 영생을 얻고 교회를 지상에 보존하는데 필수적이라면, 그 본질적 내용이 또한 매우 명료하여, 비록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신앙의 마음과 구원의 열망을 가지고 성경을 읽을 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명료성의 속성을 가진다. 그것은 "구원을 위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내용이 성경에 매우 평범하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심지어 교육을 받지 못한 신자라도 경건과 관심을 가지고 읽으면 이해할 수 있는 속성이다."(벤델린, Proleg., III) 이것은 모든 단어와 문장이 명백하고 분명하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의 명료성이란 단지 구원의 조건이 되는 기본 교리와만 연결되어야 한다.

구원을 갈구하는 독자가 얼마나 영적인 조명을 받느냐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와 교황주의자 사이의 주된 논점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다른 정도와 다른 목적으로 조명을 받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그들에 반대하여 우리는 어거스틴과 함께, 하나님이 성경의 문체와 구문을 조절하였으며, 신앙과 생활윤리, 그리고 소망과 사랑을 가르치는 것들이 성경에서 숨김 없이 발견되도록 만들어 모두가 소명과 신앙의 정도에 따라 식별하고 자신들의 구원에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레이든 신학통론, V.9)

폴란은 성경이 "본래" 그리고 "그 자체의 본질상" 분명하며, 이 명료성은 "단일 구절"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앙과 예배에 필요한 기독교 교리의 단일 주제"를 언급한다고 올바로 주장한다(I.44).


17. 그러나 성경의 진정한 지식이 오로지 구원을 열망하는 독자에게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경고되어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반면에 개종하지 않은 사람은 최선의 경우에도 단지 신앙의 진리에 대해 이론적이고 순전히 외적인 지식만을 획득할 수 있다. 짐승에게 영혼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몸은 볼 수 있어도 그의 영혼은 인식하지 못하듯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면 성경의 문자는 보고 이해할 수 있으나 그 정신에 이르지는 못한다.

폴란 I.44, 뷰칸 IV.20. 심지어 보에티우스도 "성경에 대한 이해가 미개종자나 미중생자에게도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성화와 구원의 이해"에 관한 한 단호하게 부정한다(V.9). 한편, 보에티우스는 미개종자에게 "복음과 신앙적 교리의 진리"를 이론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성경 지식의 가능성을 허용하며, 그것이 "단지 조명하고 확신시키는 성령의 일반적 도움 혹은 일종의 일반 은총에 의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18. 성경의 명료성은 해석의 필요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성경의 해석은 그 진정한 의미와 용도를 설명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교육을 위해 분명한 말로 풀어주는 설명이다."(폴란 I.45)


18b. 성경의 신성으로부터 다음 원리가 추론된다. 난해한 성구의 해석은 교회의 권위와 같은 다른 심판자가 아니라, 오로지 성경의 단일한 창조자인 하나님의 성령에, 또는 성경 자체에 의존하도록 수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영생을 위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모든 교리는 믿는 마음으로, 즉 신앙과 사랑의 법칙 regula fidei et caritas에 따라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 성경안에서 의심의 여지없는 명백함으로 제시된다. 따라서, 성경의 불분명한 구절은 명백하게 분명한 성구로, 또는 그것에 기초한 신앙의 유비 analogia fidei로 설명되어야 한다.

"교회가 아니라 성경 그 자체 (즉 성령)와 신앙의 유비 analgia fidei가 성경의 모든 구절들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보여준다." 이러한 사고로부터 성경 교리가 모든 교의학자들에 의해 개발된다. 그러므로 신자가 성경을 연구할 때 "신앙과 사랑의 법칙"이 인도하는대로 따르도록 요구된다. 헬베틱 신앙고백에 의하면, "성경의 해석은 성경으로부터만 추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서 성경이 신앙과 사랑의 법칙이 주재 moderante하는 가운데 그 자체의 해석자가 되어야 한다."(I.2) 만일 신자가 성경을 이 영, 즉 성령 안에서 읽는다면, 동일한 성령에 의해 감동된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보장이 주어진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그 자체의 해석자"라는 진술이 확정되었다. 이렇게도 표현된다: "성령은 성경의 유일한 해석자다." 만일 교회가 제3자로 언급된다면, 다음과 같은 피터 마터의 설명과 같이 포함될 수 있다: "나는 항상 우리가 신적 문헌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두가지의 표지가 있다고 평가해 왔다. 나는 성령과 실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성령에 관해서는, 요한복음 8장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려준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42-43)" "성경의 보다 모호한 부분이 보다 분명하게 보이는 제2의 말씀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여기서 말씀 자체가 규범으로 등장한다. 제3의 요소로서, "교회의 계속적 합의와 권위"가 추가될 수 있다. 교회가 신앙과 교리를 통제하는 법적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세가지 직책"을 소유하고 있는 한에서 그러하다: 교회는 (1) "증인으로서 거룩한 책들을 보존한다", (2) "전파자로서 ... 하나님에 의해 자기에게 위탁된 말씀을 출판하고 설교한다", 그리고 (3) "성령에게 감화되어, 순수하고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신적 문헌을 혼잡하고 경외적인 책들로부터 구별한다." 다음 글은 마지막 요점과 상통한다: "왕의 서신이 전달되었을 때, 각 성이나 도의 담당자는 그들에게 왕의 이름으로 주어진 것이 진품인지 위조되었는지 충분히 검토할만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손상되거나 수정되지 않았음을 확인한 후에, 그들 마음대로 그것을 조작하거나 변질시켜서는 안된다. 우리는 동일한 방식으로 교회[와 성경]를 생각해야 한다."

뷰칸은 성경 해석의 교리에 대한 주요 입장을 다음 세가지 명제로 요약한다: (1) "성경의 해석은 성경의 참되고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어 교회의 분명한 용도에 적용하는 작업이다." (2) 성경의 석의는 "한 사람의 개인적 느낌이나 이미 형성된 견해로부터가 아니라, 전후 문맥에 관심을 가지고 성경의 다른 구절들과 비교하여" 얻어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성경의 명백한 구절들에서 밝혀지고 시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등과 일치하는 성경의 항구적이며 불변하는 의미"에는 신앙의 유비 analogia fidei라는 법칙이 주장될 수 있다. (3) "성경의 용도"는 사도에 의해 열거되었다.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누가 성경의 합법적인 해석자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가장 철저한 논의가 레이든 대조문서에 나타난다. 그것은 먼저 이렇게 말한다: "이 문제가 하나님 말씀의 규범에 따라 올바로 설명되기 위하여, 우리는 성경이 그 자체의 해석자, 또는 성경 안에서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보다 더 분명하고 본질적인 구절들에서 그는 자기 뜻을 신자들에게 명백하게 표명한다. 불분명한 구절들에서는, 그가 더 분명한 구절들과의 비교를 통해 그들을 향한 자기의 동일한 뜻을 더욱 더 확증한다."(Disp. V) 하나님이 사람들의 사역을 스스로 이용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 안에 다른 부류의 해석자들, 즉 성경 안에서도 판단의 권세가 부여되었으며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아래 조직된 사역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대하 19.8 (왕이 ... 레위 사람과 제사장과 이스라엘 족장 중에서 사람을 세워 여호와께 속한 일과 ... 모든 송사를 재판하게 하고), 겔 44.24 (송사하는 일을 재판하되 내 규례대로 재판할 것이며, 내 모든 정한 절기에는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킬 것이며), 슥 3.7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고전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0.15 (나는 지혜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는 분변할 것이요) 등."(27) 이 해석권 potestas interpretandi 또는 판단권 iudicandi은 두가지, 즉 공적 해석권 potestas publica과 사적 판단권 potestas privata으로 구별되며, 둘 다 특별한 소명과 능력에 근거한다(28). "구원에 필수적인 사항에 있어서 성경의 참된 의미와 그릇된 의미에 대한 사적 판단권은 사랑의 법과 은사의 정도, 그리고 서로 다른 소명의 성격에 따라 자기 자신의 신앙을 강화하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권면하기 위해 모든 진정한 신자에게 자격이 있다."(29) (이것은 요 10.3-4에서 웅변적으로 인정된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그 외에도, 마 7.15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주의시키며, 바울은 고전 10.15에서 "나는 지혜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고 명한다. 그리고, 요일 4.1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권고한다.) 이 권위 potestas는 고전 2.15의 주제인 분별의 은사에 기초하고 있다(30). 물론 이 은사는 모든 신자들에게 동일한 분량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모든 그리스도의 양과 참된 신자라면 최소한 어느 정도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31).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신앙은 사도가 롬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에서 말하는 것과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순전히 인간의 증언에 의존하는 것이 된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증거하는대로 (요 10장),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공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공적으로 해석을 판단할 수 있는 권위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은사와 소명을 받고 이 목적을 위해 교육을 받은 소수에게만 속한다."(32) 동시에 그와 같은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독립된 영적 은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해석의 은사와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에게 복속한다. 해석과 설교의 공적 은사를 받았다고 존경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판단을 성경으로부터 형성해야 한다."(36)


19. "신앙의 유비는 교회 안에서 가르쳐야 할 만인의 규범을 담고 있는 보편적 교의로부터 나오는 논증이다."(채미어 I.17) 동시에, 우리가 성경에서 문자적으로 평이하게 알 수 있는 것뿐 아니라 그것의 필수적인 결론으로 유추되는 것도 계시의 진리인 성경의 내용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17세기초 이후로, 이 질문이 개혁파 교의학에서 습관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신앙과 윤리의 교리가 단지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입증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성경에서 이끌어낸 추론으로도 합법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가?"(터레틴, I.xii.6) 카톨릭에 반대하여 후자가 옹호된다(보에티우스, I.5-7과 하이덱거 I.40을 참조하라). 이 논의의 의미와 기원에 관한 터레틴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이 질문은 교황주의자 중에서 아귀태와 서큘라티가 제안한 새로운 논의방법에서 유래하였다. [아귀태=서큘라티: 스페인 사람 드 아귀레는 종교재판소의 서기였다] 우리가 성경에서 우리 견해를 반격할 수 없도록 형성하고 그들의 오류를 피할 수 없도록 지적한 우리 논증을 보다 쉽게 제거하기 위하여, 그들은 모든 추론의 사용을 거부한 채 우리 모든 교리가 성경에 문자적으로 있는지 입증하라고 강요하는 방법이 우리에게 빠져 나갈 수 있는 편리한 길을 모두 차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교황주의자 가운데 이 교묘한 술수를 처음 생각해낸 사람은 분명히 영국왕에게 보낸 답신에서 그것을 제시한 페로니우스 카르당이다. 같은 기질을 가진 군터, 코톤, 아놀드 등이 그를 추종하였고, 특히 베로너스는 베로너스방법이라고 불리는 대단한 반론법을 창안하였다. 여기에 독일에서는 발렘부르기안 형제가 합세하였다"(I.xii.1) 그러나 성경은 그 안에 언어를 따라 또는 이해를 따라 표현된 진리들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제일의 방식이 아니라 제이의 방식으로 성경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말한다(I.xii.3). 실로, "성경의 충족성과 완전성은 그 안에 모든 오류와 이단의 이름을 들어 저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모든 긍정적 교리들이 분명히 전달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I.xii.7).


20. 이미 그 개념안에 들어 있지만, 성경 주해는 두가지, 즉 (1)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는 일"과 (2) "그것을 사용 가능하도록 만드는 일"을 포함한다(폴란, I.45). 모든 교의학자들은 원칙상 다의적인 성경 석의를 매우 구체적으로 반대한다. 폴란은 초대교회에 유행하였던 4중 해석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I.45): (1) 그들은 말씀이 직접적으로 증거하는 것을 '문자적 literal' 의미라고 부른다. (2) 그들은 성경 말씀이 문자적 의미 상위에, 특별히 구원과 영생의 신비에서 그리스도나 교회에 연관되는 신약의 무엇을 의미할 때, 그것을 '풍유적 allegorical' 의미라고 칭한다. (3) 그들은 행위나 말이 윤리와 연관된 의미를 언급할 때, 그것을 '비유적 tropological' 의미라고 부른다. (4) 그들은 말이나 사실이 영생과 관련된 것을 의미할 때, 그것을 '신비적 anagogical' 의미라고 부른다." 그가 이어서 말한다: "진실로 성경의 각 구절에는 오로지 하나의 참되고 진정한 의미가 있을 뿐인데, 그것은 문자적 의미이다." 동시에 이 "유일한 문자적 의미"는 "단순"하든지 "복합적"이다. 전자는 또다시 "엄밀한" 문자적 의미와 "비유적인" 문자적 의미로 구별된다. "엄밀한 문자적 의미"는 "그것이 허위가 아닌 한" 보편적으로 성경에서 주장되어야 한다. "복합적 의미는 예표가 기술된 모든 성구에서 보는대로, 부분적으로는 예표에 속하고 부분적으로는 예표의 실체에 속하는 것이다." 터레틴도 이와 유사하다. 그는 모든 성구가 오로지 하나의 의미만을 가질 수 있다는 증거를 다음 사실에서 도출한다: (1) "진리의 통일성. 진리는 하나이며 단일하다. (2) 하나의 사안에 대해서는 하나의 단일한 형식이 주어지는데, 의미는 성경의 형식이다. (3) 성경의 명료성은 여러개의 소원하고 다양한 의미를 인정할 수 없다."(II.xix.2) 문자적 의미 sensus literalis는 그것이 필수적 신앙 조목 fidei articuli과 사랑의 법 praecepta caritatis에 모순되거나 언어가 동일한 혹은 다른 병행구절에서 비유적임이 확연히 나타나는 경우에만 폐기되어야 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성구의 '의미'와 함께 그 '적용'도 인정해야 하는데, 이러한 경우 성경의 풍유적 해석이 정당화됨을 주장해야 한다. 그러므로 터레틴은 이렇게 말한다: "성경의 의미를 적용과 구별하라. 의미는 하나이지만, 적용은 다를 수 있다. 따라서 풍유나 비유나 신비적 해석은 다른 의미가 아니라 하나뿐인 문자적 의미의 적용일 뿐이다."(II.xix.6) 하이덱거도 비슷하게 말한다: "문자적 의미가 신약에서 신앙이나 영적인 것을 서술하는데로 전이될 때, 거기서 적용된 풍유적 의미의 구별이 나타난다."(Corp.theol., II.80-1)

오로지 단네우스만이 어거스틴이 말한 성경의 4중 해석을 제시하지만, 명백히 다른 의미로 언급한다: "모든 성경은 명백하고 평이하든지, 아니면 비유적으로 말한다. 성경이 육감적이고 세상적이며 동물적인 우리에게 은혜로 말씀하는 많은 것들이, 마치 하나님에 대해 코와 눈을 말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 단순한 문자적 의미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면류관이나 정원 또는 지상적 부귀의 비유와 이름으로 영생과 교회의 축복을 제시할 때, 이런 것들은 분명히 은유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말하는 문자적 의미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례가 주제인 모든 방식의 언급에도 동일한 해석법이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례의 경우 언어의 방식이 예표적이고 비유적이며 성례적이기 때문이다."(Isagoge Christ., IV.iii.6)


20b. 따라서, 그 주해가 고정되어야 하는 성경 표현의 참된 의미는 단일하며, 보편적으로 합당하다고 말하는 문자적 의미 sensus literalis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고, 그것은 단순한 문자적 의미 sensus literalis simplex이든지 복합적인 문자적 의미 sensus literalis compositus이다. 원칙적으로 전자를 따라야 한다. 한편 후자는 성경에서 예표로 설명되는 곳에서, 그리고 다만 그 문자적 의미가 "필수적인 신앙 조목"이나 "사랑의 법"과 상이한 경우, 즉 성경 자체가 그 말의 다른 해석을 요구하는 경우에만 그 "비유적 의미"가 제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우 다양한 삶의 환경에 성구를 적용할 때 풍유적 해석이 용도에 알맞는 적응 accomodatio ad usum으로서의 권리를 가질 수 있다.


21. 물론, 성경의 정확한 해석을 위해 다양한 전문지식과 기술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인간적 자격이 일반적인 영적 교육과 언어 및 역사에 대한 지식 등과 함께 바람직한 요건이다. 그러므로 제2 헬베틱 신앙고백은 정확한 성격 석의를 보증하는 표지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우리는 (물론 기록된 언어의 정신에 따라서 상황에 맞는가 판단하고 그것과 유사하거나 상반되는 듯한 여러 분명한 성구들에 비추어 주해함으로서) 성경 자체에서 끌어낸 진정하고 정통적인 해석이 신앙과 사랑의 법칙과 일치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해 탁월하게 작용함을 인정한다."(II.2) 볼렙은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내는 방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빈번한 기도, 언어에 대한 지식, 자료 조사, 주제와 범위의 고려, 단순한 표현과 비유적 표현의 구별, 원인과 환경, 선행하는 것과 결과하는 것의 논리적 분석, 보다 명백한 것과 보다 모호한 것, 유사한 것들 끼리와 다른 것들 끼리의 비교, 그리고 신앙의 유비."(7)


22.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자격요건은 성령과 교제하는 믿음과 삶이다. 성령은 심지어 성경가운데 모순같이 보이는 것에서도 우리에게 성경 내용의 완전한 조화를 깨닫도록 가르친다. 개혁파 교의학자들은 성경에 모순은 없어도 모순같이 보이는 것이 있음을 시인하고, 그런 구절을 하나 하나 해결하는데 힘쓴다. 벤델린을 참조하라: "나는 모순같이 보이는 것이 있음은 시인하지만 모순은 없다고 확신한다. 나는 하나님의 뜻안에 진정한 의미의 모순이 있음을 부인하며, 모순으로 보이는 것은 시인하지만 그런 것들은 오경에서 발견되는 두가지 예에서 보는대로 서로 조화된다. 창 22.2 (이삭을 바치는 결말), 출 9.1-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듣지 아니하셨으니), 10.20-27 참조."(Exercit.theol., 1) 하이덱거는 말한다: "소수의 모순같이 보이는 것이나 풀기 어려운 것은 아무 장애도 되지 못한다. 이것들은 그 기반으로서의 성경과 조화의 도구인 올바른 이성에 의하여 조정될 수 있다."(Modull.theol., II.12)


23. 성령은 믿는 마음으로 오로지 그분에 의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든 사람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신다. 신자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성경의 진정한 이해를 실제로 주시리라는, 그리고 말씀의 진정한 진리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돌보심에 의해 지상에 영원히 유지되리라는 위안을 받는다. 우르신은 말한다: 흔히 발생하는 논란에서, "우리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선포하시는 성령 그분을 판결자로 인정한다."(Loci, 453-4) 교회는 단지 무오한 성령의 판결을 중재하고 선포해야 한다 ("교회는 묻고, 보이고, 알린다"). 물론 신자는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항상 성경의 증언을 교묘히 얼버무리는 궤변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양심을 거슬려 reclamante conscientia!" 행하기 때문에, 만일 그들이 성령의 판결을 따르지 않으면, 다른 판결자를 찾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야 한다. 한편, 신자는 이렇게 위로받아야 한다. 만일 (1) 믿는 마음으로 성경을 추구하고 신앙의 유비 analogia fidei와 문맥을 고려하면, (2) 그뿐 아니라 그가 교부들의 순수한 저작들에 담겨진 세계교회의 합의 consensus ecclesiae catholica와 비교하면, 그리고 (3) 끊임없이 하나님의 조명을 간구하면, 성경의 올바른 이해가 그에게 분명히 주어질 것이다. "신앙에 대한 분쟁에 있어서, 이것은 경건한 개인들의 양심을 강화하는데 충분하다."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시대를 막론하고 올바른 성경 이해에 도달한다는 확실성은 오로지 신앙안에 존재하는 위로이다. 그러므로 레이든 신학통론은 이렇게 선언한다: "결론적으로 여기에서 우리의 유일한 충고는 이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과 말씀으로 그의 진정한 교회에 항상 임재하기 때문에, 교회나 그 활동적인 회원은 최소한 신앙과 윤리에 필수적인 근본 진리들에 있어서 결코 파멸에 이르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 되기를 중단할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약속과 상반된다. 마 16.18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요 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V.39) 코케이우스는 말한다: "성경이 그 자체안에 다른 도구나 도움없이도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명료성을 가지고 있을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은총으로 성경이 올바로 해석되고 진리가 분명히 드러나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마치 우리가 탈무드와 그 해석자들로부터 유대인의 의미를, 코란으로부터 터키인의 의미를, 그리고 고대인의 무덤으로부터 다른 민족들의 완전히 죽은 견해를 찾도록 강요나 받는 것처럼) 더 이상 성경으로부터 이상하고 들어보지도 못한 진리를 발견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선지자들과 그리스도, 그리고 사도들에 의해 형성된 교회를 세상 끝까지 전파함으로서, 그리고 교회가 진리의 입에서 떠나지 않도록 그안에 진리를 보존함으로서 (사 59.21,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복음이 세상 끝날까지 전 세계에 전파되도록, 모든 사람이 거룩한 문헌과 함께 길을 가도록, 그리고 성경이 진리를 배우고 확인하는 지름길이 되도록 만드셨다."(Summa Theol., VI.64-5)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점이 주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이 성령의 도움 없이는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도 없고 거기에 복종할 수도 없음을 가르친다."(리쎈, I.10) 독일 개혁교회 일반 신앙고백도 유사하게 고백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조명해 주지 않는 한,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고 믿는다."(헤페, Bekenntnisschriften, 265 참조)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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