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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목회현장의 문제점

하나님아들 2015. 5. 11. 23:56

한국목회현장의 문제점

 

 

 

 

 

 

Ⅰ. 서론

목회현장의 문제점은 단순히 목회자가 목회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라기보다는 보다 더 난해한 문제이다. 목회현장은 실제적인 개념이기보다는 가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이다. 왜냐하면 목회현장이 반드시 교회활동이나 지역활동이라고 규정되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목회현장이란 "목회자가 목회를 하는 "장이라는 시각은 매우 협소한 개념이며 차라리 세 가지의 요소, 곧 목회자, 사회, 그리고 그들이 만나는 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목회현장에서 많은 문제점과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이러한 일면에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어떤 목회자를 사회가 그리고 그 장이 맞이하게 되느냐에 따라서 그 반응이 다르며 또 목회자가 어떤 사회-사회계층, 사회구조 등-를 만나게 되느냐에 따라서 그 방향성과 반응도 달리 나타나고 또 그래야 한다.
목회자, 사회, 장(그 만남의 장-장소적 의미, 지역적 의미, 혹은 단체적 의미 등)의 이 세 가지의 개념은 모두 절대적인 개념이기보다는 상대적이고 그 자체로 일반성보다는 특수성과 그 다양성이라는 부분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는 개념들이다. 어떤 면에서 목회현장의 문제점은 우리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문제점이라는 개념을 상정한다는 전제는 각기의 세 가지들의 부조화와 그에 연결된 각 부분들의 충돌을 감지하고자 하고 동시에 또 감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러한 문제점들을 놓고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각개의 문제점들을 극복하고자 하고 더 나아가 그 세 가지 요소 모두가 추구해야 할 본래적 의, 곧 "예수"를 향하여 가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애꿎은 교리 다툼이나 이권 싸움, 혹은 비판을 즐기는 사람들의 풍조로 굳어져 있다면 차라리 그 문제점들은 그냥 놓아두고 혹자의 말처럼 기도만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물론 기도를 문제해결의 차선으로 생각해서도 안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현장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주로 목회자적 입장에서 고찰하려 하며 또 목회자 교육에 관해서도 간략히 집고 넘어가고자 한다.

Ⅱ.본론

1.현장과 신학 교육.

목회자의 성향을 일반적으로 규정하는 여러 요인들 중에 몇 가지는 그의 생애(주로 어린 시절의 성격 형성)와 그가 받은 신학교육, 개인적 신앙체험, 그의 시대의 시대적 경향, 개인의 독특한 세계관 등이라 할 수 있다. 목회현장에서 목회자가 반드시 주체적 입장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주도적 입장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장에서 누구나 첫 목회를 나가면 신학교의 신학 교육은 별 도움이 안되더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으며 사회와 부딪히면서 본래적인 신앙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도움이 안되는 조직신학은 물론 교인을 늘린다거나 교회를 증축한다거나 설교를 하는데는 별 도움이 안되는 것은 사실이다. 만약에 이러한 자세로 교회증축을 위해서 조직신학을 배운다면 그것은 정말 헛일이다. 차라리 건축학을 배우는 것이 도움이 더 될 것이다. 신학교육의 문제점은 학생에게도 교육자에게도 동시에 있다.
학생들이 신학 교육은 정직한 자신의 신학형성이 아니라 마치 밥을 하루에 열 공기씩 먹고 살이 안찔 수 있는 비법 같은 것을 바라는 것 같아 보인다. 학생들은 곧잘 교수들이나 선배들에게 "목회현장의 대안은 무엇입니까?"라고 즐겨 말하곤 한다. 그것은 마치 청동기 시대에 권총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회와 그 장은 다양하고 각기의 목회자에 따라서도 다르다. 그러므로 "대안은 없다!" 대안은 곧 그들 자신이며 그들이 사회와 만나서 그 장을 이룸으로서 그 목회현장 속에서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상황들을 위해 사회라는 개념을 위해서는 사회학, 심리학, 경제학 같은 것들을 배우고, 그 장이라는 개념을 위해 목회학, 행정학과 같은 것들을, 목회자 자신의 지식과 신앙과 신념(철학, 세계관, 신학)을 위해 조직신학, 성서학, 기타 종교학과 같은 것들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어느 곳에도 그들이 원하는 비법은 없다. 정말 완벽한 비법을 얻으려면 그들은 목회현장에 나가서 찾아야 한다. 동시에 정직한 자신의 성실한 신학 없이 목회현장에 나가는 것은 마치 칼도 없이 전쟁에 나가는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런 이들은 전쟁에 나가서 적을 무찌르기는커녕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죽은 듯이 누워 있거나 항복을 해서라도 목숨만은 건지려 할 것이다.
신학교육의 문제점은 비단 학생의 문제점만은 아니다. 물론 신학이라는 학문을 가르치는 것에 4년이라는 시간이 짧다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 그래서 대학원 필수 진학을 제도적으로 만들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일반적인 신학 교육은 일반대학교의 수준을 따라잡기도 허덕거리는 형편이다. 가장 문제점으로 부각되는 것은 신학교육 자체에 대한 정확한 노선이나 정체성이 없다는 것이다. "어떠 어떠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어떠어떠한 신학인 혹은 목회자를 양성하겠다"는 것은 없고 "신학에는 다양한 시각이 있으니 본 교수가 하는 말은 다양성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라는 것은 수없이 다양한 시각과 세계관을 가진 성서를 인용하면서 "성서적 시각"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신학의 다양성은 신학을 정직하게 알고자하는 이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 다양성을 획일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다양성에 접근한 수 있는 방향성 있는 정확한 노선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학 교육은 계속해서 교회성장에 도움이 안되는 신학교육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신학교육에 있어서 정체성의 문제는 어쩌면 생소한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신학교육이 그 정체성에 있어서 교회현장 또는 목회현장과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조직신학이나 교회사는 왜 교회현장, 교회부흥, 목회현장에 도움을 못 주는가?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것은 이미 위에서 학생들의 입장도 지적을 했지만 신학교육자의 입장도 동시에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은 그 근본적인 의미에서 타학문과는 달리 신념에 관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고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이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이제 어떻게, 그리고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라는 의미로 자연스럽게 형상화되어져야 하고 이것을 표피화, 지표화 시킨 것들을 우리는 교리라고 하고 이런 것들을 개념화, 학문화한 것을 조직신학과 같은 것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은 결코 현장과 떨어져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삶과 유린 된, 현실과 유린 된 신학은 신학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2. 실제적인 문제점들

이 글은 대부분의 문제점들을 구체화하여 다루기보다는 상식적인 시각들에 관한 문제점들에 관해 논하고 있음으로 그리 많은 것들을 열거하려 하지는 않는다. 다만 목회현장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 요소, "목회자, 사회, 장"이라는 관계 속에서 다양한 현상 중 몇 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본 필자는 "사회"를 목회자의 상대적 개념으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서 위의 "목회자"는 "목회현장에 있는 목회자"로 생각하며 "목회자"를 개인적인 단위로 생각하기 때문에 교단 혹은 목회자 그룹, 단체, 일반단체, 국가 이외의 모든 목회자 이외의 대상을 사회로 규정하고자 하며 그 둘이 만나지는 장은 지역, 장소, 그룹의 형태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규정한다.)
첫째로 한국목회현장의 문제점은 기독교 신앙과 기복신앙의 그 충돌과 융화이다. 일본의 신학자, 사회학자인 엔도슈 샤쿠는 자신의 소설에서 카톨릭과 일본의 토속신앙이 결합하여 카톨릭을 회개한 형태로 변질시켰다고 말하면서 가톨릭 신부의 파계를 유도해 내려 한다. 실제로 이것은 극심한 고문보다도 더 그에게는 아주 강력한 일이었다. 기존의 기독교적인 시각들은 기복신앙을 아주 미개하고 비합리적이며 미신적인 것으로 심하게는 우상 숭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신약시대에 예수가 폐하도록 한 유대교의 번잡스러운 관습들과 관행(율법)들을 지금에 와서도 개교회의 엄청난 돈을 들여가면서 재현하고 있는 모습들은 미신적인 라는 것을 넘어서서 유대교적이라고 해도 과언을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형상논쟁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믿음의 대상을 형상화하고 구체화 내지는 물질화 하기 좋아하는 버릇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인 것같다. 어쩌면 지나친 형상화는 자신의 형상화를 거부를 명확하게 선언한 구약의 하나님의 뜻에도 어긋나며 성전을 건축했던 솔로몬의 고백과 상반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복신앙은 이제 기독교적 시각에 있어서 단순한 미신으로만 생각되어져서는 안될 것이며 또한 긍정적으로 생각되어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다분히 토템미즘적이거나 미신적이라고 해서 우리의 조상이 살아온 기복신앙을 무시하고 토착화나 한국적 기독교를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바탕적인 요인들을 무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문제점은 기복신앙적인 신앙관이다.
마치 산골짜기에 있는 신통한 바위에 가서 정한수를 떠놓고 복을 빌면 복을 받을 수 있는 듯한 인상의 형태들을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 이러한 형태는 근본적으로 기독교에 배타적인 요소들임에도 불구하고 암암리에 서로 서로가 인정하는 요소들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만약 기독교라는 것이 좋은 것, 다시 말해서 "복이나 종교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주지 못한다면 누가 기독교를 선택하겠는가? 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이거나 본래적 의미의 목표점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말로 바위에 가서 복을 비는 것이 더 나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독교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들의 무리임으로 규정될 때 이러한 시각들을 당연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믿은 기독교나 카톨릭이 나의 것들은 그들의 종교 자체가 인간만을 위한 것이나 인간이 어떤 것이든지 해석하고 나누고 쪼갤 수 있는 합리주의를 반대하여 왔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과 하나님의 관계를 중시하지만 감리교 선언에도 나와 있듯이 "이 땅위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는 적어도 교회에서 줄줄이 서서 사람들이 복을 타 가는 세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주기도문에서는 "땅에서 메이면 하늘에서도 메임"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평화는 하늘과 땅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하고 있다. 개인의 지복에 관한 과도한 집착과 그에 따른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배타성은 목회현장 속에 있는 교회의 본래적 정체성에 위배되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점은 위의 기복신앙적 문제점이 시대를 거듭해 오면서 문명의 이기인 기계가 그 위치를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200원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그에 상응하는 물건이 자판기에서 나오듯 행위보상적 신앙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경제체계와 과학문명이 기독교 신앙에 끼여든 형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한국 사회의 기독교인들은 자본주의 경제사회의 일원이며 과학문명의 이기를 누구나 누리고 있고 또 동시에 기독교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위의 두 문제는 기독교가 그 본래적 의미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로 극복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기독교인은 한 사회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독교적 세계관과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위치를 잘 조화시킬 수 있도록 목회자가 이끌어 줄 때 그 목회는 바로 그 사회와 하나가 되며 또 동시에 그 사회를 이끌 수 있는 목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Ⅲ. 결론

목회현장에 대한 혁신과 그 방향성

현실 목회에서부터 오는 목회자들의 무력감은 가변적인 목회현장에 맞도록 자신의 방향성을 잡고 또 자신을 혁신하는 과정의 실패로부터 온다고 학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현실과 이론의 차이점이라고 말하곤 하며 이런 것들은 달리기 위한 많은 책들이 서점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현실과 완전히 부합 할 수 있는 이론도 없으며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이론도 존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목화자에게 있어서 이론은 곧 실제이며 삶이며 신념이어야 한다. 목회현장에 대한 혁신과 그 방향성은 바로 이것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첫째로 목회자의 입장은 지도자의 입장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와 교회관습의 정통성은 교리에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으며 목회자는 그 정통성의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이라는 적대 비판심에 근거하여 그에 상반되는 현상에 단호히 대처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목회자는 섬기며 봉사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가수나 대중을 두려워하여서 자신의 기본적 입장을 저버리게 된다면 그는 결코 신념의 목회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목회현장이 지역적 폐쇄주의로 가는 것은 막아야 할 것이다. 도시 내에서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는 교주문제는 반경 몇 ㎞이내에 같은 교파의 교회를 설립할 수 없다는 규정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감리교는 갈 지역은 교구로 나누는 제도에도 익숙지 못할뿐더러 그 제도도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목회현장은 그 교회 혹은 교회단체라는 의미에서 결코 이익단체로 성장해서는 안되며 단순한 친목단체로 굳어져서도 안될 것이다. 교회는 비슷한 사고나 생활방식이나 교리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이전에 비슷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갖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이전에 비슷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기존 교회의 문제는 그 근본적인 그리고 다양한 교회의 역할을 일부분의 것으로 축소화함으로서 그 기형적 형태로 자기장애요소를 만들어 내게 된다.
셋째로 목회현장은 능동적 현장이지 수동적 현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회현장이 사회의 욕구를 수용하는데 있어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올바른 욕구충족 방안을 제시하고 올바르지 못한 욕구들을 계도하는 방향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교회의 구성인자들이 이미 성호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성화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임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의 암적 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의 암적 존재는 사회의 암적 존재라고 보이지 그리 틀리지는 않은 것이며 이러한 사람들은 치료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역할 중에 하나인 것이다. 위와 같은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필자는 다음과 같은 부분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목회현장은 각기 다양한 사회적 현상들을 기독교 신앙을 통해 여과하는 능동적 태도로 바뀌어야 한다. 둘째 목회의 방향성은 목회자 개인 신념의 만족으로부터 완성되어지고 규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라는 대상과의 만남. 그리고 그 속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규정되어져야 한다. 셋째 교회의 수용자세는 기독교 신앙을 준거점으로 설정 되어야한다. 위와 같은 부분들은 그 내용을 한마디로 함축하여 "목회자, 사회, 장, 이 세 가지의 요소가 만나지는 목회현장이 그 각개의 다양한, 혹은 상대적 현상들에 대하여 그 근본적인 준거점을 잃지 않으면서 각개의 현상들에 능동적으로 수용, 여과, 계도함으로써 "목회현장"의 다양한 역할들을 조화롭게 그리고 능동적으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도서
1. 김득중, [복음의 신학] 서울 ; 컨콜디아사 1986.
2. 거슬리. D.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사역], 이중수 역. 서울 ; 한국 성서유니온.
3. ADAMS, J. E. [A THEOLOGY OF CHRISTIAN COUNSELING]. 전동식 역 [상담 신학]
4. HOEKERNA, ANTHONY A. [CREATED IN GOD"S IRNAGY], 류호준 역, [개혁주의 구원론]
5. 전광식.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 1.], 기독교사상연구. 창간호.
6. MILAD. SALL. FAITH. [PSYCHOLOGY AND CHRISTIAN MOTURITY].
김양순 역, [성경과 심리학의 조화] 서울 : 생명의 말씀사. 1991.
7. 아놀드 요한 토인비. [세계 종교 속의 기독교]. 기독서회, 1982.
8. 이장식, [기독교 사상사 제1편], 대한기독교서회,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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