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만의 삼위일체론
김 용 문
Ⅰ. 서론
몰트만은 이미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철저히 복음과 기독론에 근거한 삼위일체론을 전개시켰다. 일반적으로 삼위일체론은 현실적으로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현대의 정통주의 신학도 삼위일체론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 실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공동체는 언제나 성부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계몽주의 대표적인 철학자 칸트는 전통주의에서 중심적인 교리인 삼위일체론이 신학이나 신앙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왔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는 우리의 삶에 삼위일체론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는 "直觀의 感情"이기 때문에 자기의식 가운데 경험되지 않는 神에 관한 이론은 불필요하다 하였다. 그는 "종교를 갖는 것은 우주를 직관하는 것을 의미하며, 종교의 가치는 우주를 직관하는 방식에 달려있다."라고 하여 자기 의식이 진술하지 않는 신학적 思辨인 삼위일체론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그는 감정의 초월적 근거로써 하나님은 한 분이며, 기독교를 一神論的 신앙의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회의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은 터툴리안 이후부터 단 하나의 신적 실체 안에 있는 세 인격의 表象이 서구 신학의 주제로 나타난다. 삼위일체론을 정리한 어거스틴은 단 하나의 본질 속에 그 單一性이 있다고 생각하고 단 하나의 하나님으로부터 세 인격의 位格에 도달하였다. 헤겔 이후부터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절대주체라고 하는 보편적 개념으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세 존재 양식의 삼위일체론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절대 주체라고 하는 근대 하나님의 개념을 媒介로 하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그 인격의 개념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몰트만은 비판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오늘날의 삼위일체론의 새로운 연구는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전통에 비판적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방법론으로 전통적인 신학의 옷을 벗기는 것으로 시작한다. 즉 여기에서 핵심은 삼위일체의 본래적인 모습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그것이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그 의미를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는가에 있다.
몰트만의 삼위일체의 출발점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몰트만이 중심점으로 제시하고 있는 기독론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를 중심으로 여러 작품들을 이해하고 기타 주변자료를 참고할 것이다.
Ⅱ. 생애와 신학적 배경
몰트만은 1926년 함부르크에서 출생했다. 그의 생애에 대한 고찰은 전체 그이 신학사상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공군 보조원으로 파견되었다가 영국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 3년 이상 벨기에,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등지의 포로수용소를 전전하다가 본국으로 귀환되었다. 그는 참혹한 포로수용소 생활가운데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이 한계상황은 새로운 것을 수용하게 된 체험적 배경이다. 이 경험은 차츰 하나님 경험으로 변하였고 그 가운데서 고통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
1952년 그는 괴팅겐 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5년 간 목사로 재직했으며, 1967년부터 T bingen대학의 교수로 초청된 후 오늘에 이른다. 몰트만의 신학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은 괴팅겐 대학교 시절의 교수들인 세 사람인 오토베버(Otto Weber, 1902-1966)와 한스 요아킴 이반트(Hans Joachim Iwand, 1909-1960), 에른스트 볼프(Ernst Wolf, 1902-1971)이다.
몰트만은 논문 지도교수인 오토 베버로부터 칼빈주의와 종말론의 영향을 받았다. 바르트 신학의 영향을 받은 오토베버의 종말론의 특징은 초자연적인 것을 떠나 현실적이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시작되었으며,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지금도 실현되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의 학문적 배경을 통하여 몰트만의 종말론은 현실 세계를 바로 교시하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요아킴 이반트로부터 몰트만은 헤겔의 신학적 철학의 영향을 받게된다. 요아킴 이반트는 헤겔이 쓴 "신앙과 지식"에서 '하나님의 죽음'의 개념에서 신학적인 착상을 하게 되었고 이것은 곧 몰트만의 학문적 배경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현대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不在의 문제를 극복함으로써 '하나님의 다스림'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몰트만의 신학적인 배후에는 포로수용소에서 겪은 현실 체험이 밑바탕이 된다. 그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이 이 세계의 主가 될 수 있으며 다스리는 분으로 인식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햐였고 그것이 몰트만 신학의 출발점인 것이다.
헤겔의 삼위일체론에 영향을 받은 몰트만의 신학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그의 삼위일체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적 흐름은 하나님의 존재와 삼위일체성을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바르트의 신학이 그의 지도교수였던 이반트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몰트만으로 이어진 것이다.
에른스트 볼프의 신학은 사회의 구체적인 실현이 하나님의 계명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볼프는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계명이 성취되어야 한다는 실천신학이었다. 볼프의 영향을 받은 몰트만의 신학도 실천신학이나 사회철학과 대화하면서 그의 신학의 한 根幹을 이룬다.
Ⅲ. 삼위일체론의 형성배경과 전통적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
1. 삼위일체론의 형성배경
몰트만은 그가 참혹한 포로생활을 경험하면서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곧 하나님을 체험하는 결과로 이어지며, 고난 가운데 숨어계신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배경과 연관을 이룬다. 그 또한 이러한 삶의 현실체험이 그의 삼위일체론의 배경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삼위일체론은 계몽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콘스탄티노플 제 1차 공의회(381년) 이래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몰트만은 이러한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의 역사적 접근을 통해서 기독교 신학의 배후에 숨어있는 일신론과 군주신론의 異端性을 밝히고자 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의 삼위일체를 통해서 삼위일체론을 전개한다.
초기에는 아리우스주의나 사벨리안주의를 방어하기 위해서 삼위일체의 교리에 철학적 개념들을 도입하였으나, 이에 대한 몰트만의 견해는 아들의 삼위일체적 사건에 대한 신약성서의 증언과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에 있었다. 즉 그는 哲學的 思辨으로 삼위일체론이 설명되는 것을 부정하였다. 초대교회가 기독론적 삼위일체론의 형성배경의 역사적 사실이 있었음에도 당시에 등장한 異端들의 양상은 잘못 이해된 기독론 때문이었다. 유대주의적 神觀의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었다. 이것을 일신론, 군주신론이라 부른다. 2세기 말엽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해서 성부의 우선권을 강조하는 군주신론(monarchianism)이 나타났다. 이들의 주장은 한 하나님에 대한 세 位格을 동일시 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이어서 에비온파와 같이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고 사모사타 바울(Paul of Samosata)이 이론으로 정립한 동적군주론(Dynamic monarchianism)과 이와 유사한 양자설(Adoptionism)이 등장했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이들 이단들을 反駁하기 위해 형성되었다. 그는 일신론과 군주신론이 한 사실의 두 가지 측면에 불과하며, 삼위일체론이 一神論的으로 흐르게 된 이유를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 즉 한 로고스, 한 인류라고 하는 우주적인 단일종교의 기본사상이 되어 하나의 정치적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신론적 기독론은 오늘 날 교회의 가장 강력한 내적 위험요소가 되었다.
2. 전통적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
전통적 삼위일체에 대한 몰트만의 지적은 첫째로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받은 아리우스의 一神論的 神論에 대한 위험성이다. 一神論을 주장하는 아리우스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나님의 유일성과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본질은 절대 초월적이고 절대 불변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관여될 수 없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초월적 하나님이외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필경 창조된 것이며, 이것은 그 사물이 필경 無에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출생했다는 사유방식을 단호히 거부한다. 아리우스는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본질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리우스의 神論은 지극히 위험한 요소가 있다. 그는 성자와 성령을 半神의 개념으로 만들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종속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이러한 아리우스주의를 '일신론적 기독교'라고 말한다. 즉 기독교 신앙은 더 이상 '일신론적'이라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의 모든 주권은 '단일군주체제'로 이해되거나 표현될 수 없다.고 하였다.
둘째로 몰트만은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을 말하고 있는데 그의 양태론은 종속론과 완전히 반대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시벨리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계시와 구원의 역사에서는 세 가지 형태를 취한다. 즉 聖父, 聖子, 聖靈은 한 하나님이 役事하시는 세 가지의 樣態이며, 아들과 영은 단지 한 분이신 하나님의 현현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그의 양태론 또한 삼위일체론을 벗어난 일신론이라고 하였다. 세 位格은 한 분 하나님의 활동 양태로 격하되기 때문이다.
세 째로 몰트만은 터툴리안의 신론에 대해 종속론과 양태론의 문제점을 삼위일체론적으로 해결한 창시자로 보았다. 터툴리안은 "세 位格이 한 실체 속에 살지만, 단지 한 하나님만 존재한다"라고 하여 동일본질론이 이미 그에게 있었으므로 당시의 단일신론 뿐만 아니라 영지주의의 그릇된 가르침까지도 물리쳤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러한 터툴리안의 논증이 삼위일체론의 신학적인 기초를 형성했다고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이론도 일신론적 단일 군주체제가 止揚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아들과 성령이 아버지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에는 단일성의 개념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비판한다.
넷 째로 바르트는 계시의 중심에서 삼위일체를 다룬다. 계시에 있어서 하나님은 직접 인간에게 자신을 밝히신다. 계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자아계시에 있어서 계시자인 동시에 계시 자체이다. 자아를 계시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자신을 分與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그의 삼위일체론을 몰트만은 군주신론이라고 비판한다. 즉 바르트가 말하는 하나님은 세 가지의 양태, 즉 성부, 성자, 성령의 樣式 안에 계시는 한 분이 되는 格이다. 이에 대하여 몰트만은 "삼위일체는 세 독립 된 位가 하나로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존재양태라는 말로는 삼위의 본성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몰트만은 라너 역시 바르트의 존재양태의 개념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한 분의 신적 주체가 실재의 세 가지 樣態 안에 있다"라고 한 것은 바르트의 견해와 같다고 지적한다.
Ⅳ. 기독론적 삼위일체에 대한 몰트만의 이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몰트만에게 있어서 삼위일체의 출발점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삼위일체론을 전개한다. 몰트만은 바르트의 영향을 받았다. 바르트의 기독론은 삼위일체적으로 해석된다. 그는 "계시"를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틸리히는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이 인간의 문제에서 출발하지 않고 바로 삼위일체론으로 전개한 것을 비판한다. 슐라이에르마허의 경우 삼위일체론을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제한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가 신과 하나되는 본질로서 요한복음에 근거하여 '원형의 인간'을 본다. 인류의 원형이 현실화되는 것이 그리스도라 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를 '직관의 감정'으로 이해하여 인간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는다. 틸리히는 방법론에서 슐라이에르마허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는 그리스도론 이전에 존재하는 신의 삼위일체성을 긍정하는 입장에 선다.
몰트만은 바르트나 슐라이에르마허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근거로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전개한다. 즉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중심주의나 역사를 떠난 초월적인 약점들을 십자가 중심의 삼위일체론에서 해명하려고 한다. 판넨베르그는 역사를 신학적 思考의 출발점으로 보았지만, 몰트만은 미래를 향해가는 기독론을 그의 신학의 주제로 삼아 그의 삼위일체론을 전개하고자 한다. 그는 모든 교회가 다른 종교들과 구분되는 것은 '십자가'에 있으며, 기독교를 다른 汎神論과 구분하는 이론적 근거였다. 그가 삼위일체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고대의 삼위일체론은 오늘날 우리에게 신빙성이 없고, 단지 思辨으로 나타날 뿐이며 우리와는 무관하다고 했다.
여기에서는 몰트만의 기독론적 삼위일체의 이해를 위하여, 하나님의 수난을 통한 기독론적 접근과 아들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 성령으로 드러나는 삼위일체의 관계 등을 다루게 될 것이다.
1. 하나님의 수난
몰트만에 의하면 기독교의 신학은 하나님 자신을 그리스도의 수난가운데서 인식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해야한다. 그런데 '성서 안에서는 하나님의 고난에 대하여 철저하게 계시하였음에도 초대교회의 신앙은 왜 무감정 하였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초대교회에 오리게네스 뿐이었다. 오리게네스는 "먼저 그가 고난을 당하셨고 그 다음에 땅에 내려왔으며 눈에 보이게 되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당한 고난은 어떤 고난인가? 그 고난은 사랑이다."라고 하였다. 오리게네스가 이해한 '하나님의 고난'은 자비의 본질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공명(sympsthie)이었다. 사랑의 고난은 외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속에 있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고난에도 해당한다. 경륜적 삼위일체의 고난과 내재적 삼위일체의 고난은 하나님 자신의 아픔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현대신학의 흐름에서 볼 때 삼위일체론이 역사적으로 불필요하게 된 주원인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에 대한 바른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즉 철학적 사유와 영광의 신학이 나타날 때, 삼위일체의 십자가 신학은 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은 하나님의 수난가운데 인식해야하는 몇 가지 명제를 가지고 다루고자 한다.
첫째, Abraham Heschel은 無感情한 하나님의 신학을 거부했다. 하나님의 정열이 자신으로부터 나아가서 자신의 선민에게로 간다는 것이 Heschel 이론이다. 몰트만은 유대인 신학자들의 기본원리였던 '신적 무감정'은 Heschel에 와서야 최초로 거부되었다고 말한다. Heschel은 필로에 대한 비판에서 유대인의 하나님 경험은 하나님의 정열에 대한 경험이라 하였다. 이스라엘의 고난은 이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고난 속에 포괄되며, 이 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은 이스라엘 구원과 연관된다. 이것이 바로 장차 오실 그분의 영광의 선취라는 것이다. 이 이스라엘의 고난은 하나님의 고난 속에 포괄되며 하나님의 영광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결부된다.
둘째, 그리스도의 본질적 전능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발적 고난을 통하여 완전하게 된 사랑이었다. 『고통의 신비』의 저자 Hinton은 요한복음의 기본명제인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다"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를 보여주시고자 한다면 그는 고통과 상실이라고 불리는 것을 스스로 짊어지시는 고난자로서의 자기를 우리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Rolt는 하나님의 영원한 자기 사랑의 삼위일체론을 자기 희생으로 해석함으로써 세계 개방적인 삼위일체론으로 발전을 하였다. 즉 하나님은 자신을 희생시키는 행위 속에 그의 모든 본질이 들어있다. 그는 사랑하는 자요, 사랑 받는 자이며, 사랑이다. 여기에서 몰트만이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문제가 숨겨있다는 것이다.
셋째, 몰트만의 견해는 20세기 스페인의 철학자인 우나무노의 신학사상과 일치한다. 우나무노는 자신의 삶의 위기 속에서 스페인의 수난의 신비를 발견한 학자이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난 당할 수 없는 하나님은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다. 그는 고난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고뇌 속에서 세계의 비밀을 인식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기독론적으로 말해야 할 필요성을 발견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삶의 고난과 고통을 추방해버림으로 인간적인 삶으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고통을 당할수록 더욱 인간이 된다고 말한다. 몰트만은 현실적 차원을 넘어서는 神的인 고뇌 속에서 자신의 고통은 하나의 종말론적 차원을 발견하게 된다고 하였으며,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사람의 고난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다른 사람의 죽음에서 자기의 죽음을 경험한다고 했다. 고난을 경험하면서 사랑은 성장한다.
넷째, 몰트만은 하나님의 수난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를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에서 찾고자 한다. 곧 성부, 성자, 성령의 사귐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으로 계시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명제를 삼위일체적으로 이해한다면 아버지는 아들을 영원히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순종과 헌신을 통하여 영원히 본질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아버지의 사랑에 응한다. "아들은 아버지와 다른 존재이지만 아버지와 다른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내재적 삼위일체 사랑은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같은 것에 대한 사랑이다. 그것은 필연적인 사랑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살펴보면 하나님의 수난의 신학은 고난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에 대한 생각에 이르게 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몰트만은 예수가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였다. 예수가 받은 예언자적 메시아적 영의 은사는 신적 선포가 결합되어있다. 마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려 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란 주로 메시아의 칭호와 신적 근원의 칭호이다. 몰트만은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이 '너는 나의 아들'이라고 덧붙이는 사실에 유의한다. 그것은 기독교 전승의 초기에 아들의 이름은 예수의 수난의 역사와 결합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예수를 통한 아버지의 계시에 관한 공관복음서의 기록에는 분명히 인식할 수 있는 삼위일체의 형태가 나타난다. 예수의 '신학적'인 역사는 아들과 그의 아버지 사이에 일어난 역사이다. 그러므로 아들은 일신론적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예수의 세례와 소명, 선포와 활동은 성령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일어난다.
파송 안에서도 삼위일체는 인식된다. 파송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성령가운데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만큼 넓어진다. 그러므로 아들의 역사에 있어서 삼위일체는 세 가지의 의미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아버지는 성령을 통하여 아들을 파송한다. 둘째, 아들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아버지로부터 온다. 셋째, 성령은 인간을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몰트만은 아들의 희생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예수의 고난의 역사는 그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갈 것을 결심한 순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예수의 수난은 양면성을 가진다. 외적으로는 로마인들에 의하여 질서에 반항하는 선동자로 처형 받은 것이고, 내적으로는 하나님에 의하여 버림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몰트만은 이 고난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의 아버지인 하나님은 예수의 간청을 듣지 않고 거절했다." 그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 관계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하나의 죽음을 경험한다. 이 죽음은 영원한 죽음, 즉 하나님의 죽음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버림받는다" 예수는 하나님 없이 죽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가 된다. 아버지의 내어줌과 아들의 희생은 성령을 통하여 일어난다. 삼위일체적으로 표현한다면 아버지는 성령을 통하여 아들을 자기에게 바치게 한다. 아버지는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이다. 아들은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다. 성령은 패할 수 없는 십자가의 힘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삼위일체의 중심에 선다. 아들의 희생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형태를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아버지는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절대적 죽음에서 내어준다. 둘째, 아들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준다. 셋째, 버림받은 아들을 아버지와 결합시키고 하나가 되게 하는 일은 성령을 통하여 일어난다.
몰트만은 또한 "아들의 高揚"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장차 올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선포에도 삼위일체적인 구조가 숨어있다고 보았다. 역사적으로 예수의 나타나심은 갈릴리에서 일어났는데 갈릴리에서 돌아온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이후 복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선포와 함께 영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경험이 등장하여 신앙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예수의 부활을 종말론적으로만 이해될 수는 없으며, 바로 그 내적인 진행에 있어서 그것은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아버지는 성령을 통하여 아들을 부활시키시며, 아버지는 성령을 통하여 아들을 계시하시고, 아들은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의 주권의 주로 정립된다.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는 장차 올 아버지의 영광으로 부활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있다. 그는 성령의 신적인 구원으로 高揚 된다. 이것은 삼위일체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그를 통하여 나타난다. 여기에서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형태를 기술한다.
첫째, 아버지는 죽은 아들을 살리는 영을 통하여 부활시킨다. 둘째, 아버지는 아들을 그의 나라의 주로 앉힌다. 셋째, 부활한 아들은 하늘과 땅을 새롭게 하는 아버지로부터 창조적인 영을 보낸다.
마지막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역사에 있어서 몰트만은 아들의 미래와 함께 인식되는 종말론적 삼위일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아들의 발 아래에 둔다. 아들은 완성된 나라를 아버지에게 넘겨준다. 아들은 그 자신을 아버지의 발아래 둔다. 여기에서 삼위일체의 통일성에 관한 문제가 언급된다.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통일성이 일원론적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 성령에 있는 것이라 말한다. 그것은 신학적인 개념이면서도 근본적으로 구원론의 개념이기도 하다.
3. 삼위일체의 세계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세계를 통하여 아들의 역사의 우주적인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기독론만이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개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는 창조, 구원, 성화의 삼위일체의 사역의 순서를 따르면서 그 명칭을 '아버지의 창조', '아들의 성육신', '성령의 변용'이란 용어를 써서 글을 전개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은 로고스를 통하여 창조한다. 로고스는 아들의 다른 면이다. 아버지는 성령 가운데 영원한 말씀을 하시며, 그 가운데서 성령을 내쉰다. 아들 즉 로고스를 통하여 세계를 창조할 때, 아들은 창조의 중재자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에 의하면 창조에 있어서 모든 활동은 아버지로부터 온다. 그러나 아들은 로고스로서, 성령은 능력으로 동일하게 참여하고 있으며, 창조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일치에 귀속되어야 한다.
4. 경륜적(경세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터툴리안이 양태론을 거부한 이후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는 구분되었다. 그런데 경륜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구원의 사건에 있어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두 가지의 삼위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를 위한 하나님 과 그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구분하는 것은 사변적인가?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은 바로 그 자신인 사랑을 가지고 세상을 사랑하며, 구원을 베푸는 그의 사랑 없이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표상은 하나님의 개념에 있어서 모순된다." 또한 이 모순은 기독교의 하나님 개념을 폐기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구분은 하나님의 자유와 은혜를 보장한다. 몰트만은 이 두 개념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라고 한다. 두 개념은 하나의 연속성을 형성하며 내적으로 서로 연결된다.
몰트만은 라너의 말과 같이 "경륜적(경세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론이다. 그리고 그 선후를 바꾼 반대표현도 옳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삼위일체가 가지고 있는 내재와 경세의 구분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 안에 있어야 하며, 자신에 의하여 그 구분이 이루어져야한다. 밖에서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몰트만은 역사의 지평을 통하여 제기된 구원경험의 삼위일체의 神認識과 형이상학적 구분을 비판함으로써 역사 안에서 경험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래 뜻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 비판은 일신론적인 하나님의 단일성과, 인간과, 하나님을 사변적으로 구분하는 플라톤 철학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이다.
결론적으로 몰트만은 경륜적 삼위일체론과 내재적 삼위일체론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경룬적 삼위일체론은 구원의 역사와 경험이 완결되고 완성될 때 그 자체가 내재적 삼위일체로 완성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고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될 때, 경륜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 안으로 승화되며 초월적인 것이 된다. 남아 있는 것은 그의 영광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찬양뿐이다." 이와 같이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을 그 자체를 독립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기대와 찬양적 신앙 안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5.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오는가?
381년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의 본문에 삽입되었던 Filioque는 1054년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여, 서방교회는 삼위일체론의 성령론이 발전되기 어려웠다. 몰트만은 Filioque논쟁으로 인하여 동·서방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자 삼위일체론을 집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몰트만은 서방교회에서 Filioque를 취소하고 여기에 대한 공동의 신학적 토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몰트만은 "Filioque가 결코 아버지의 단일 체제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지 '아버지로부터'라는 배타적인 첨가는 성령의 나옴에 대한 신적인 실존에 대해서만 관계하는 것일 뿐, 그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관계 속에 있는 그의 내재적 삼위일체의 형태에 대해서는 관계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제 1 인격인 단일 체제 때문에 Filioque는 거부되었고 오늘날에도 거부되고 있다고 했다.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관계성을 따라서 "아들의 아버지로부터 오며 아들로부터 형태를 받는 성령"에 대한 제안을 한다. 즉 성령이 가진 신적인 실존은 오직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겠지만 그의 형태 내지 얼굴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Ⅴ. 결론
몰트만은 오늘날 신학에서 삼위일체론을 경시하고 그 중요성을 상실한 배경에서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문제의 해결 가능성을 찾고자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신학은 루터의 그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지만 몰트만은 이것을 삼위일체론적으로 발전시킨다.
몰트만은 기독교 초기 역사적 배경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삼위일체 사건에 대한 성서적 증언과 세례를 통하여 單一君主論과 一神論的인 삼위일체론의 非성서적인 사실을 비판한다. 그의 삼위일체론의 초점은 기독론에 있다. 그는 계속해서 삼위일체의 세계의 과제로써 창조론, 기독론, 종말론을 삼위일체론의 지평에서 해석하였다. 전통적으로 제기된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몰트만은 자신이 삼위일체론을 정리해야 하는 이유로 동·서방교회의 일치를 위한 신학적인 작업이라고 말한다.
이상에서 말한 그의 신학은 현대신학에 새로운 신학의 정통성을 회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동안 삼위일체론의 전통이 되어버린 사변적·철학적 神觀과 一神論的이고 敎權的이며, 정치적인 껍질을 벗기고 기독론적 관점을 통해서 삼위일체론을 새롭게 해석한 것은 그의 공헌이라 할 수 있다. 몰트만의 방법론은 하나님에 대한 관점, 곧 철학적 형이상학의 신관과 영광의 신학의 가능성을 비판함으로써 우리들의 삶의 문제를 하나님의 고난의 문제로 부각시켰다. 그리하여 그의 삼위일체론은 사회적이고 실천적인 해석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삼위일체의 신학은 삶과 학문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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