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성령님(3)(성령은 언제 받는가 ?)
성 경 : 갈 5:16-25
성령 충만은 언제 받습니까 ?
1. 말씀을 듣는 중에 받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서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을 듣는자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니”(행10:44)
무척산 기도원에서 성경통독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2, 찬양할 때 성령 충만을 받습니다.
눅 24:52-53
“저희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엡 5:18-19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헬라어를 보면 엡5:18-19은 마침표로 끊어진 문장이 아닙니다.
진행형의 분사로 연결된 문장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 그 결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로도 되지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면서 성령충만함을 받으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예언을 하기 전에 수금치는 자를 불러서 찬양하게 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 봉헌식을 할 때 제사장들이 찬양을 부르자 하나님의 영광의 성령이 어떻게나 강하게 임했던지 모두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왕하 3:15,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자를 불러 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니
대하 5:13-15, “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이처럼 성령 충만과 찬양은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찬양을 부르는 중에 성령 충만을 받기도 하고
성령 충만을 받으면 찬양이 절로 나오기도 합니다.
찬양 중에 성령이 임하여 회개와 기쁨이 터져 나오고 병이 낫고, 성령이 치유되고 귀신이 물러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3, 안수를 통해 받습니다.
행 8: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행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이처럼 성령을 받는 경우는 다양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기도를 통해 받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사모하고 구해야 합니다.
또한 한번 구해서 받지 못한다고 포기하지 말고 강청하는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4. 내가 성령을 받을 ‘깨끗한 그릇’이 되어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자 거룩한 영입니다.
성령의 전이 내가 깨끗한 그릇이 되지 못하면 받기 어렵습니다.
죄를 회개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성령을 받습니다.
행 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5:32,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그렇다면 성령 받은 증거는 무엇입니까
작가 이어령씨의 아들의 <이 산하를>이란 책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시골에 수염을 길게 가꾸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한 분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사는 꼬마 아이 하나가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궁금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할아버지를 만나자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밤에 주무실 때 그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십니까. 아니면 끄집어 내놓고 주무십니까." 할아버지는 이 질문을 받고 "얘야. 미안하다. 나도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니 하룻밤만 자보고 대답을 하마." 그리하여 그 날 밤 수염을 붙들고 씨름을 합니다. 수염을 이불 속에 넣으면 답답하고 끄집어내면 쓸쓸하고. 그리하여 30년 동안 달고 다닌 수염이지만 수염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맙니다.
저자는 이 얘기를 통해 30년 동안 내 몸에 달고 다닌 수염이 이불 속에 있어야 하는 지밖에 있어야 하는지 철야를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듯 내가 지금 예수 안에 있는지 예수 밖에 있는지, 내가 지금 진리 안에 있는지 진리 밖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자세를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유일하고도 완벽한 대답이 성령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 안에 성령을 받는 것은 귀신들린 점쟁이와도 같이 공연한 열정과 열심을 내며 광신적으로 날뛰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한국 교회 한 부분에서는 방언이 성령 받은 유일한 증거인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느 교단에 들어가면. 또 어느 기도원에 들어가면 개도 다 방언을 한다고 가르칩니다. 개는 다 방언을 할지 몰라도 그리스도인이 다 방언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방언은 수많은 성령의 선물 가운데 하나이지 성령 받은 단적인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님에 대한 어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할 때 가장 변역하기 어려운 것이 '보혜사'라는 단어입니다. 희랍어 '파라클레토스'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보혜사(保惠師)인데 이는 그 뜻이 매우 풍부하다입니다. 즉 '안위한다'는 뜻뿐만이 아니라 '훈계한다', '권고한다', '격려한다', '도와 준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뜻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필리핀 남부의 쫄로아노 모로 족은 "계속하여 옆에 서서 같이 가시는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성령이야말로 신자와 항상 같이하시는 동반자이십니다.
중앙 멕시코의 오토미 인디언 그리스도인들은 보혜사를 "우리 영혼에 따스함을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에서 생명의 말씀에서 안위를 찾으며 죄와 세상 염려의 와중에서 허덕이는 영혼과 생명이 살아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따스함을 발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보리코스트에 사는 빠울리 족 그리스도인들은 보혜사를 "생각을 꽉 동여매시는 이"라고 합니다. 근심에 쌓인 마음의 생각은 무감각하고 괴로운 혼란으로 사방에 흐트러집니다. 보혜사께서 이 흐트러진 생각을 꽉 동여매어 자기 통제 밑에 두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의 존재를 부인함으로써 여러 가지 걱정을 피할 수 있거나 혹은 어떤 정신요법적 마술로 우리 생각을 잊어버리라고 함으로써 걱정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생각을 통제하는 것, 즉 "꽉 동여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속에 내리는 화평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믿는 자에게 최고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몇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도 성령충만함을 받은 후에 전도에 온 힘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복종하는 자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정신적 건강을 주십니다. 많은 교육을 받고 부유하게 자란 바울도 성령을 받고 나서 죽을 각오를 하고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 성령을 받으면 육신의 건강도 주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성령은 다음 세 가지를 주십니다. 첫째로 즐거움을 주십니다. 환경에 관계없이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고 어떤 염려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됩니다.
둘째로 열정과 생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환경과 운명을 개척해 나갔던 것입니다. 어떤 성직자가 학창시절에 학비가 모자라 공사장에 가서 벽돌 짐을 지는 노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같이 일하던 젊은이들은 불평을 많이 했으나 그는 불평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보던 젊은이들이 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왜 불평을 안 하는 거요?" "나는 앞으로 세계를 내 두 어깨에 짊어지고 갈 사람이오. 그런데 이까짓 벽돌 짐 정도를 무겁다고 불평하면 어찌 세계를 짊어지고 갈 수 있겠소?" 그의 말을 듣고 난 젊은이들은 감동을 받았고 그 후 다시는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성령의 역사는 사람에게 위대한 권위를 부여합니다. 목동인 다윗을 왕으로 만든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 경 : 갈 5:16-25
성령 충만은 언제 받습니까 ?
1. 말씀을 듣는 중에 받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서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을 듣는자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니”(행10:44)
무척산 기도원에서 성경통독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2, 찬양할 때 성령 충만을 받습니다.
눅 24:52-53
“저희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엡 5:18-19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헬라어를 보면 엡5:18-19은 마침표로 끊어진 문장이 아닙니다.
진행형의 분사로 연결된 문장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 그 결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로도 되지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면서 성령충만함을 받으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예언을 하기 전에 수금치는 자를 불러서 찬양하게 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 봉헌식을 할 때 제사장들이 찬양을 부르자 하나님의 영광의 성령이 어떻게나 강하게 임했던지 모두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왕하 3:15,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자를 불러 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니
대하 5:13-15, “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이처럼 성령 충만과 찬양은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찬양을 부르는 중에 성령 충만을 받기도 하고
성령 충만을 받으면 찬양이 절로 나오기도 합니다.
찬양 중에 성령이 임하여 회개와 기쁨이 터져 나오고 병이 낫고, 성령이 치유되고 귀신이 물러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3, 안수를 통해 받습니다.
행 8: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행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이처럼 성령을 받는 경우는 다양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기도를 통해 받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사모하고 구해야 합니다.
또한 한번 구해서 받지 못한다고 포기하지 말고 강청하는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4. 내가 성령을 받을 ‘깨끗한 그릇’이 되어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자 거룩한 영입니다.
성령의 전이 내가 깨끗한 그릇이 되지 못하면 받기 어렵습니다.
죄를 회개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성령을 받습니다.
행 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5:32,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그렇다면 성령 받은 증거는 무엇입니까
작가 이어령씨의 아들의 <이 산하를>이란 책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시골에 수염을 길게 가꾸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한 분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사는 꼬마 아이 하나가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궁금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할아버지를 만나자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밤에 주무실 때 그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십니까. 아니면 끄집어 내놓고 주무십니까." 할아버지는 이 질문을 받고 "얘야. 미안하다. 나도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니 하룻밤만 자보고 대답을 하마." 그리하여 그 날 밤 수염을 붙들고 씨름을 합니다. 수염을 이불 속에 넣으면 답답하고 끄집어내면 쓸쓸하고. 그리하여 30년 동안 달고 다닌 수염이지만 수염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맙니다.
저자는 이 얘기를 통해 30년 동안 내 몸에 달고 다닌 수염이 이불 속에 있어야 하는 지밖에 있어야 하는지 철야를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듯 내가 지금 예수 안에 있는지 예수 밖에 있는지, 내가 지금 진리 안에 있는지 진리 밖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자세를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유일하고도 완벽한 대답이 성령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 안에 성령을 받는 것은 귀신들린 점쟁이와도 같이 공연한 열정과 열심을 내며 광신적으로 날뛰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한국 교회 한 부분에서는 방언이 성령 받은 유일한 증거인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느 교단에 들어가면. 또 어느 기도원에 들어가면 개도 다 방언을 한다고 가르칩니다. 개는 다 방언을 할지 몰라도 그리스도인이 다 방언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방언은 수많은 성령의 선물 가운데 하나이지 성령 받은 단적인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님에 대한 어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할 때 가장 변역하기 어려운 것이 '보혜사'라는 단어입니다. 희랍어 '파라클레토스'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보혜사(保惠師)인데 이는 그 뜻이 매우 풍부하다입니다. 즉 '안위한다'는 뜻뿐만이 아니라 '훈계한다', '권고한다', '격려한다', '도와 준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뜻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필리핀 남부의 쫄로아노 모로 족은 "계속하여 옆에 서서 같이 가시는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성령이야말로 신자와 항상 같이하시는 동반자이십니다.
중앙 멕시코의 오토미 인디언 그리스도인들은 보혜사를 "우리 영혼에 따스함을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에서 생명의 말씀에서 안위를 찾으며 죄와 세상 염려의 와중에서 허덕이는 영혼과 생명이 살아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따스함을 발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보리코스트에 사는 빠울리 족 그리스도인들은 보혜사를 "생각을 꽉 동여매시는 이"라고 합니다. 근심에 쌓인 마음의 생각은 무감각하고 괴로운 혼란으로 사방에 흐트러집니다. 보혜사께서 이 흐트러진 생각을 꽉 동여매어 자기 통제 밑에 두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의 존재를 부인함으로써 여러 가지 걱정을 피할 수 있거나 혹은 어떤 정신요법적 마술로 우리 생각을 잊어버리라고 함으로써 걱정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생각을 통제하는 것, 즉 "꽉 동여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속에 내리는 화평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믿는 자에게 최고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몇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도 성령충만함을 받은 후에 전도에 온 힘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복종하는 자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정신적 건강을 주십니다. 많은 교육을 받고 부유하게 자란 바울도 성령을 받고 나서 죽을 각오를 하고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 성령을 받으면 육신의 건강도 주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성령은 다음 세 가지를 주십니다. 첫째로 즐거움을 주십니다. 환경에 관계없이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고 어떤 염려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됩니다.
둘째로 열정과 생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환경과 운명을 개척해 나갔던 것입니다. 어떤 성직자가 학창시절에 학비가 모자라 공사장에 가서 벽돌 짐을 지는 노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같이 일하던 젊은이들은 불평을 많이 했으나 그는 불평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보던 젊은이들이 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왜 불평을 안 하는 거요?" "나는 앞으로 세계를 내 두 어깨에 짊어지고 갈 사람이오. 그런데 이까짓 벽돌 짐 정도를 무겁다고 불평하면 어찌 세계를 짊어지고 갈 수 있겠소?" 그의 말을 듣고 난 젊은이들은 감동을 받았고 그 후 다시는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성령의 역사는 사람에게 위대한 권위를 부여합니다. 목동인 다윗을 왕으로 만든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출처 : 무척산 기도원
글쓴이 : 정정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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