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해 볼 이야기
¶ 저는 삼남매의 장남으로 자랐습니다. 그런 제가 어렸을 적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는 “사내는 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는 사람은 남자다운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울지 않아야 한다고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지금도 어린 사내아이들이 울면 그게 그렇게 좋아보이지가 않습니다. 이내 사내답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 하지만 미국의 유명한 미술치료사이자 화가인 루시아 카파치오네는 그의 책 “감정치유”에서 “일반적으로 화, 슬픔, 우울, 두려움 등의 감정을 부정적으로 보고 행복한 얼굴로 덧씌우려는 경향이 있으나, 이 감정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아파해야만 진정으로 행복과 사랑, 기쁨, 그리고 평화와 같은 더 긍정적인 감정을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눈물이나 슬픔이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는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 성경 속의 진리 찾기
■ 오늘 예수님께서 비슷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본문 4절 보세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누가 복이 있다고요? 애통하는 사람, 웃는 사람이 아니라 애통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참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지만 성경에는 깊은 슬픔으로 인해 애통하는 사람에 대한 축복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전도서 7장 3절 보세요.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 또한 성경은 우는 자가 복이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웃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6장 25절 보세요.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 무슨 말이에요? 웃으면 화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까? 아니요 이것은 죄로 인해 자신의 영혼이 망하는지도 모른 채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을 즐기는 사람들이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자신이 죽을병에 걸려 죽어가는 지 알지 못한 채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고 자신이 승진했다고 해서 기뻐하는 사람들의 웃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안타깝지 않으세요.
- 그런데 그거 아세요? 우리 영혼이 이미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망가졌어요. 성경은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자, 즉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로 인해 완전히 망가진 영혼이에요. 그러기에 그것을 깨달았다면 우는 자가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거든요.
-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애통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리스도인이란 일컫는 사람들에게도 애통함이 없습니다. 왜요? 아니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자신의 상태를 잊고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형식적 그리스도인”, “선데이 크리스챤”이라고 부릅니다. 모양만 그리스도인이지 마음이 변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애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Ⅰ.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애통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 진리 찾기 Ⅰ
■ 자신의 죄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다 애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애통은 단순한 눈물이 아닙니다. 본문 4절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이 구절을 솔트레이크 신학교 총장으로 있는 도널드 맥컬로우는 “세상과 다른 마음”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해석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슬픔은 내가 응원하는 야구팀이 3연패를 했거나, 속도위반으로 교통경찰에게 붙잡혔는데 유창한 언변으로도 그를 설득할 수 없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여기에 쓰인 단어는 헬라어로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죽은 자를 애도하는 마음, 상한 마음에서 나오는 격렬한 비탄을 나타내는 단어다. 그러니까 아주 강렬한 슬픔을 뜻한다.”
- 이어서 맥컬로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한탄하는 자가 아나라,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어떤 사람은 한탄을 통해서 쾌감을 얻는다. ‘내가 당한 고통은 아무도 모른다.’고 노래하면서.… 그러나 그들은 축하받기보다는 동정 받아야 마땅한 사기꾼들에 불과하다. 한탄하는 자들은 또한 피상적인 즐거움에 만족하기 때문에 깊은 행복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 무슨 말이에요? 거짓된 눈물, 자신의 망가진 모습, 자신의 죄와 허물로 인해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얻고자하는 것,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애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참된 행복,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서만이 주실 수 있는 하늘의 위로를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라기 2장 13절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 애통은 탄식이 아닙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한탄도 아닙니다. 애통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고 느끼는 격한 슬픔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통해 느끼는 말할 수 없는 슬픔입니다. 성경은 이 슬픔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 보세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일까요? 지난 1년 동안 우리가 흘렸던 눈물은 어떤 눈물일까요? 그 눈물이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에서 오는 눈물이어야만, 하나님의 뜻대로 흘리는 눈물이어야만 우리는 참된 행복을 누리는 참된 그리스도인 될 수 있을 것입니다.
Ⅱ. 한발 더 우리가 어떻게 애통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 진리 찾기 Ⅰ
■ 자신의 죄로부터 확실히 돌이켜야 합니다.
- 자신의 죄를 분명히 보았다고 해서 모두가 성경이 말하는 애통을 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를 깨닫고도 얼마든지 돌이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2장 3-5절 보시요.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자, 여호와의 사자가 그들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백성이 소리 높여 울었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그곳을 ‘보김’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보김’이란 ‘통곡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통곡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그렇게 통곡하고도 죄의 길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사기 2장 11절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 이스라엘 자손이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가나안 땅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고 우상의 단을 헐라고 하셨는데 여전히 우상을 섬기고 가나안 땅 사람들과 언약을 세웠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통곡하고도 돌이키지 않은 사람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컫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였습니다.
- 그렇습니다. 운다고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운다고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뉘우치기만 하는 것은 후회이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뉘우치고 고친다는 것입니다.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세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누가 위로를 받는다고요? 애통하는 자, 여기서 위로는 하나님이 단순히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지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위로는 근본적인 회복, 다시 말해서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 보세요.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이스라엘의 무엇을 기다린다고요? 그렇습니다. 위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위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임하심입니다. 누가복음 2장 26-27절 보세요.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위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회개하십시오. 아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구원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사십시오. 그렇게 사는 사람, 죄에서 돌이켜 이전과는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 성경은 그 사람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Ⅲ.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떻게 애통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 진리 찾기 Ⅰ
■ 자신의 죄를 날마다 자백해야 합니다.
-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돌이킨 사람을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한 번 그리스도인 되고 나면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애통할 필요가 없이 기쁜 노래만 부르며 살게 되는 것일까요?
요한일서 1장 9절 보세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그렇습니다. 구원받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애통이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애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그 성당 앞에 붙인 95개조의 항의문 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앙인의 삶이란 끊임없는 회개와 참회를 하는 것이다.”
- 끊임없는 회개와 참회, 즉 죄에서 돌이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해도 자꾸 범죄하기 때문에 날마다 자백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옥한흠 목사님은 “빈마음 가득한 행복”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몰라서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가까이서 느끼기 때문에 애통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영광의 빛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노출되는 자신을 볼 때마다 드러나는 그 악함 때문에 탄식하는 것입니다.”
-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갈수록 우리가 느끼는 게 무엇입니까? 우리가 완전히 벌거벗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얼마나 무감각해져 있으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 자백하려고 기도해도 형식적인 기도만 드릴 뿐 참된 애통이 나오지 않는 거에요.
-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목사가, 매일 말씀을 보는 목사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해 애통함이 없이 무감각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범죄 하는 자신의 모습이 이젠 아무렇지도 않은 거에요.
- 사랑하는 여러분, 이게 저만의 문제입니까? 한국의 목사님들에게 애통함이 없어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애통함이 없어요.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수 없이 죄를 저지르면서도 ‘구원받았으니 괜찮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짓된 확신을 붙들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애통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애통할 줄 모르는 우리가 어떻게 이웃들의 고통에 대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 이 나라와 민족의 아픔에 대해서 애통할 수 있겠습니까?
- 기억해야 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기억해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 말씀따라 생활속으로
■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책 “행복”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산통이 있어야 출산이 있듯이 죄에 대한 애통이 있어야 영적 거듭남이 있다.”
- 그러나 이어서 더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통은 모두가 각자의 삶에서 발견하는 죄 때문에 울게 되리라는 뜻이 아니다. 죄에 대한 슬픔은 조용하게, 거의 또는 아무 느낌 없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서 발견하는 악에 대한 진지한 슬픔, 도움과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로 향하려는 결단은 있을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죄로부터 돌이키는 결단, 즉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돌이키셨습니까? 자신의 죄를 보고 통곡하는 그 자리에서 이제 돌이켜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걷고 계십니까? 매일 매일 주께 더 가까이 갈수록 보여 지는 모습, 날마다 범죄 하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애통하고 계십니까? 그 애통함이 있어야 사람들이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