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바를통한자성
요 18; 39;40
공주병이 심한 엄마가 음식을 해놓고 아들과 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엄마 왈 “아들아, 엄마는 얼굴도 예쁜데 요리도 잘해 그치?
그런 걸 사자성어로 하면 뭐지?”
엄마가 기대한 대답은 물론 “금상첨화”입니다.
하지만 아들의 답은 “자화자찬” 엄마 왈, “
아니 그거 말고 다른거” 아들의 다른 답 “그럼 과대망상요?”
엄마 거의 화가 날 지경 “아니 그거 말고 ‘금’자로 시작하는 건데”
그래서 아들은 고민하고 생각하다가 답하길 “금시초문?”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정죄하고 비판하고 판단을 쉽게 합니다.
칭찬에 인색하고 냉철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후하게 점수를 줍니다.
우쭐하고 교만한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죄인이고 ‘나만 의인이다’라는 착각도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의로우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
내가 죄인’ 이라고 고백하고 ‘내가 바라바’ 라고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의롭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 드립니다.
첫째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해야 합니다
본문 39절 “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당시에 가장 크고 유명한 죄인은 바라바였습니다.
빌라도는 유월절이면 죄인 하나를 석방시켜주는 전례를 따라
죄 없이 고난당하는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의로우신 예수님 대신에 죄인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원성을 높였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이고 민심이었습니다.
빌라도의 의도와 생각은 빗나가게 되었습니다.
백인들이 아프리카에 코카콜라를 파는데 처음에는 코카콜라를 사지 않았습니다.
흑인들이 마셔보니까 그들의 입맛에 맞지 않아서 처음에는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백인들이 2년 정도를 거저 주었습니다.
그것도 더운 지역이니까 시원하게 해서 주었습니다.
그래서 흑인들은 코카콜라에 차차 습관이 들어서 그걸 안 먹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코카콜라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습관은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흑인들이 처음 코카콜라를 먹지 않았지만 그들이 코라 먹는 습관이 들었을 때는
처음엔 안 먹으면 되었지만 나중에는 돈을 주고 사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습관을 익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습관은 제 2의 천성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생각, 말, 행위 등에 무엇이든지 습관이 되면
그것은 곧 그의 인격이 되며 그의 행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각, 말, 행위를 보다 좋은 덕의 습관으로 양성하면
우리의 인격은 부지중 훌륭한 인격을 갖출 수가 있으며
만일 모든 생각, 말, 행위에 좋지 못한 습관이 된다하면
우리의 인격은 부지중 비참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
죄를 버리고 잘못된 습관에서 떠나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고 큰 죄인이고 죄인 중에 괴수일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은 의로우시지만 나는 부끄러운 죄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바나바 같은 죄인임을 고백하고 용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둘째로; 내가 강도같았다는 살을 고백 해야 합니다
본문 40절 “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나바라 하니 바나바는 강도였더라"
강도’의 헬라어 ‘레스테스’는 게릴라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바라바는 반로마적 혁명 운동을 주도했던 정치범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가당착적인 행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고소한 반면 진짜 정치범은 놓아달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전혀 일관성도 없이 다만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과 열등감과 상실감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메시야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강도는 남을 위협하고 때리고 상처를 주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법적으로는 강도는 아닙니다.
누가 강도라고 생각하거나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양심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우리 자신을 점검할 때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상처 받은 것은 생각하고 기억하지만 상처와 아픔을 준 것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칼만 안 들었지 우리는 강도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닌 계속적으로 그리고 평생 강도처럼 살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사랑과 용서와 긍휼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
내가 강도였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용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셋째로;나는 예수님 때문에 살았다고 고백 해야 합니다
본문 40절 “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바라바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바라바는 의로우신 예수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없었거나 아니었다면 바라바는 반드시 죽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산 것은 전적인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바라바 같은 내가 죄로 인해서 죽고 지옥에 가야 하는데
예수님 때문에 용서 받은 의인이 되었고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내 공로는 1%도 없고 100% 다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서울의 변두리 허름한 지하에 교회를 개척한 전도사님은 50대 늦깎이 신학생입니다.
늦게 시작한 만큼 정말 열심히 전도지를 들고 집집마다 골목마다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대문은 꽁꽁 잠겨 있었고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한 명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전도사님은 교회를 개방하고 청소년, 어린이 전도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금세 교회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새벽기도 중에 경찰이 들이닥쳤습니다.
아무도 없는 교회에서 초등학교 3학년 아이를 성추행 했다는 신고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황당한 일이었으나 어쨌거나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지 못하고 부족한 자신을 탓하며 “
그저 모든 게 저의 잘못입니다.”
하고 ‘내 탓이오’ 했던 한 마디가 범죄를 시인한 것으로 오인되어 그는 구속 수감 되었습니다. “
하나님, 이제 저의 목회는 끝났습니다.
성추행범이 무슨 낯으로 목회를 합니까,
너무 억울합니다.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왜 저를 이렇게 처절하게 철저하게 파멸시키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옥의 ‘강도방’에 수감된 그는
갑작스럽게 닥친 이 어이없고 기가 막힌 현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문득 며칠 전에 하나님 앞에서 부지중에 불평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전도지를 들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다가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없자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차라리 감옥에 가서 전도하는 게 낫겠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 비싼 전도지 만들어 들고 다니며 열리지도 않는 부잣집 문을 두드리기보다
저 소외되고 가난한 죄인들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하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습니다.
그 후에 전도사님은 누명이 벗겨져 감옥에서 나왔지만 다시 감옥으로 갔습니다.
진짜 전도지를 들고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엄상익 변호사가 쓴 책을 읽다가 발견하고 짤막하게 요약했습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았다는 은혜를 깨달은 자는 삶의 자리에서 사나 죽으나
그리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삽니다.
그것이 대속 받은 자의 삶이고 가장 가치 있고 보람 있게 사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내가 죄인이고 강도이고 예수님 때문에 살았기에
이제 남은 인생 예수님 위해 살겠다고 고백하는 삶이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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