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예배 기타!!!

[스크랩] 한국교회의 예배역사

하나님아들 2014. 2. 17. 23:23

 

한국교회의 예배역사

 

 

 

 

 

1)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

 

예배 형성기(1870-1900)는 만주,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에 의해 미국 교단의 배경을 가진 예배 형식이 소개됨으로 예배가 형성되기 시작하던 시기로 이 때 한국 개신교는 자체에 의한 예식서 없이 선교사들이 소개한 외국의 예배 형식을 따라 주일예배를 드렸다. 이 기간에 선교사들에 의해 유교, 불교, 그리고 무교의 전통종교와 문화 속에 소개된 예배는 주로 회심자들을 얻기 위해 19세기 부흥회 형식의 선교지향적이며 비예전적인 예배로 한국 교회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한국이 개신교의 복음을 수용한 것은 외국인 선교사가 한국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이미 한국인들에 의하여 주체적으로 이루어졌다.

한국이 기독교의 복음을 접한 것은 크게 두 가지 경로를 통해서이다. 이 두 가지 경로는 시기적으로 10년 전과 후, 지리적으로 북방과 남방으로부터의 전래, 그리고 동시에 주체적 인물들로는 한국인들과 미국선교사들로 구분된다.

하나는 1870년대 말부터 미국, 호주, 캐나다 등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정식으로 입국하기 전까지 주로 중국의 만주 지방을 거쳐 의주와 평양 등 서북지방의 진취적인 청년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다른 하나는 1880년대 말 일본에서 기독교를 접한 개화파 지식인들에 의하여 연결되었다. 이런 이유로 한국교회의 예배는 한국보다 먼저 선교를 받은 중국과 일본에서 시작된 한국인들의 예배와 무관하지 않다.

중국과 일본에서 복음을 접한 한국인들은 한국에 선교가 시작되기 이전에 기독교의 예배를 경험하였다.

 

 

 

0. 만주의 예배공동체

최초의 한국인 예배공동체는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인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와 존로스(John Ross)에 의해 만주에서 형성되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의 연합장로교회에 의해 중국 선교사로 각각 1872년 1월과 8월에 파송되었다.

이들은 만주의 개항장 영구(營口)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특별히 로스는 1874년 10월에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려고 그리고 1876년 4월에는 어학교사를 얻으려고 조선과 만주 사이의 위치한 조선인들의 마을, 통화현(通化縣) 고려문(高麗門, Korean Gate)을 두 번 방문하였다. 이 마을은 작았으나 한국과의 국경 지역(평안북도 의주 건너편)에 위치하여 교역의 관문이었기에 약 3천명의 한국인들이 살았다.

당시 의주에는 청과의 교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대개 중국어와 만주어에 능한 독서층이었고 또한 개방적이며 독립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새로운 문화와 질서에 대한 욕구가 강한 자들이었다. 이와 같은 특징들은 그들이 새로운 종교에 대하여도 남다른 관심을 보이게 하였다. 이들을 방문하여 로스는 의주 상인 이응찬(李應贊)을 비롯하여 조선 젊은이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최초의 한국 개신교 신자들은 1879년에 맥킨타이어가 의주로부터 영구로 와서 선교사들의 사역을 돕던 4명의 한국인 청년들, 이응찬, 백홍준(白鴻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에게 세례를 줌으로 탄생하였다.

이어 존 로스가 1879년에 2명의 의주 청년들, 서상륜(徐相崙)과 김청송(金靑松)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청년들은 처음에 국경을 넘나들며 문물교류를 수행하던 자들이었으나 선교사들을 만난 후에는 그들의 사역을 돕는 권서인(勸書人; Colporteur) 또는 매서인(賣書人)이 되었다.

이들은 선교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그들을 도와 1878년에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번역된 성경책자를 판매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이 권서인들이 바로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먼저 만주의 한인촌과 한국의 북부 지방에 반포하면서 처음으로 한국인 예배공동체를 형성한 주인공들이 되었다.성경반포사업을 위해 선교사들에 의해 만주와 한국의 국경 지역에 파견된 권서인들은 자신들의 복음전도로 형성된 예배공동체에서 한국인을 위한 정기적인 예배를 인도하였다. 비록 조선에서는 아니지만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조선인 복음전도자들이 1879년 10월에 한국어로 예배를 시작한 것이 최초 한국인들의 공식 예배가 되었다.

맥킨타이어는 1880년 이전에 만주에서 30여명의 한국인들이 저녁 예배에 참석하였다고 보고하였다. 1884년 존 로스는 동료선교사 웹스터(J. Webster)와 함께 묘이산(猫耳山)에 위치한 4개의 한인촌에서 75명의 남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존 로스는 다음 해 여름에 같은 한인촌을 방문하여 25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권서인들의 복음전도로 1884년 말 만주의 즙안현 이양자(裡楊子; 1898년 만주에 설립된 최초의 한국인 교회)를 비롯하여 만주의 압록강 연안에 있던 28개의 한인촌에는 세례교인인 100명, 세례 받기를 희망하는 남자가 600명 등 수 천명의 신자들이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다.

 

0. 북부지방의 자생교회

1880년대에 들어오면서 만주에서 번역되고 간행된 성서를 한국에 들여와 보급한 한국인 개종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북한지역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만주에서 세례를 받고 예배를 드린 자들이 한국과 국경을 이루는 지역이나 의주, 평양, 소래, 그리고 서울과 같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와 번역된 성경 책자를 전하면서 복음전도사역에 종사함으로 후에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사역을 위한 터전을 마련하였다.

1885년 중국인들로부터 핍박을 받던 한국인 개종자들이 만주의 한인촌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들이 압록강 거주지역에서 전한 복음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이 사실은 훗날 미국 선교사들이 북부지방을 방문했을 때 확인되었다. 1879년에 서상륜을 첫 개종자로 얻은 백홍준은 의주에서 전도인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사돈이 되는 김이련(金利鍊)과 사위 김관근(金灌根)을 개종시켜 한국 최초의 자생교회인 의주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백홍준은 가족들과 함께 중국의 선교사들에게 배운 전도 활동의 하나로 간단하게 신앙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요리문답반을 운영하여 1885년에 18명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예배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의주교회의 주역이 되어 1889년 4월 27일 압록강에서 언더우드에 의해 세례를 받은 33명 가운데 포함되었다. 서상륜1885년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 장연의 소래에서 동생 서경조와 함께 열심히 전도하여 얻은 20여명의 구도자들을 지도하며 성경과 교리를 가르치면서 개인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늦어도 1886년에는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매 주일 정기예배를 드림으로 소래의 예배공동체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구도자 중 3명은 서상륜의 인도로 언더우드로부터 서울에서 세례문답을 거친 후 1887년 1월 23일에, 그리고 나머지는 소래에서 세례를 받았다. 또한 서울에서 1887년 9월 최초로 한국인 교회(새문안장로교회)가 세워졌을 때 총 교인수 14명 가운데 13명이 이미 서상륜을 통해 신도가 되었던 사람들이었다.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기 이전에 만주의 권서전도인들에 의해 한국인 예배공동체를 형성한 자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선교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1887년 11월 한국에 온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평북 의주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주변 마을과 군(郡)들로부터 세례를 받고 입교하기를 원하는 남자들이 100명이 넘게 모여든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중국으로부터 한국의 북부 지방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복음의 씨가 뿌려지고 복음에 관한 책자들이 전달된 것은 선교사들에게 효과적인 사역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또한 베어드(Richard H. Baird)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황해도와 평안남북도에서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 한 예로, 1901년 평양 지역의 선교보고는 선교사들이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던 곳에 정기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리던 그룹들이 여럿 있었다고 전한다. 이와 같이 자생적으로 신앙 및 예배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한국 선교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0. 일본의 한국인 예배공동체

만주에서 한국선교가 시도되고 있을 무렵, 일본에서는 이수정(李樹庭)이 한국선교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다. 처음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중국이 아니면 일본을 거쳐 한국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한국인 예배공동체는 만주에서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형성되었다.

알렌, 언더우드, 그리고 아펜젤러가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한 1885년 전에 일본에서는 이미 다른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접한 개화파 지식인들 중 이수정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882년 9월에 임오군란(壬午軍亂)의 뒤처리를 위해 박영효(朴泳孝)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으로 간 이수정은 일본의 농학자 쓰다센(津田仙)에게 체계적으로 성경공부를 배운 후, 1883년 4월 동경의 쓰유게쓰초(露月町)교회에서 미국인 선교사 녹스(G. W. Knox)의해 세례를 받았다. 이로서 이수정은 일본에 간지 7개월만에 일본에서 세례를 받은 첫 한국인이 되었다. 또한 그는 1884년에 재일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Henry Loomis)의 요청으로 일본어 성경(마가복음)한국어로 번역하였다.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상륙할 때 들고 온 복음서가 바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이었다. 이수정은 1883년 6월 24일에 자신의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은 한인 유학생들을 모아 한문 요리문답서를 교재로 하는 주일학교를 열었다. 이런 노력으로 요리문답반 주일학교가 점차 발전하여 1883년 말에는 이미 7, 8명의 한국인 수세자들이 모여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성경연구반으로 확대되었다.

주일마다 설교자를 초청하여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던 이 신앙공동체는 1883년 말 동경에 세워진 최초의 한인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인 관계 때문에 이수정에 의해 일본에서 형성된 유학생 예배공동체는 더 이상 발전되지 못하였다.

일본에서 형성된 한국인 예배공동체의 활동이 어떻게 한국교회의 예배에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수정은 한국에 선교할 선교사는 미국에서 직접 파송되어야 함을 주장하여 1883년 12월 미국교회에 진정서를 보냄으로 기독교가 한국에 수용되는데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의 선교사 요청은 1884년에도 계속되었으며 마침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오게 됨으로써 결실을 맺게 되었다.

 

 

2) 한국인 예배공동체의 예배

 

만주의 한국인 예배 형태네비어스(John L. Nevius)와 존 로스(John Ross)가 19세기 중반에 해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논의되던 삼자이론(three-self theory)을 중국의 선교현장에서 방법론으로 발전시킨 토착교회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네비어스와 로스는 각각 산동과 만주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면서 19세기말에 영국 교회선교회의 총무 벤(Henry Venn)과 미국공리회 해외선교부 총무 앤더슨(Rufus Anderson)의 삼자이론을 중국 실정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실천하였다.

그들은 선교지의 신생교회들이 해외 선교부로부터 독립하여 자립(自立self-supporting), 자치(自治self-governing), 자전(自傳self- propagating) 하는 토착교회로 성장하는 것을 최종단계로 설정하고 토착인 목회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존 로스네비어스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그로부터 선교방법을 배우고 보완하여 만주 지역의 선교현장에서 토착교회론을 실천하였다.

토착교회론을 옹호한 존 로스는 일차적인 복음화는 다양한 외국 기관이 맡고, 교회의 일은 토착인들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복음주의자로 사회의 관습을 개혁하는 것보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선교사의 유일한 의무이기 때문에 복음을 듣는 자들의 개종과 중생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렇게 회심을 강조하는 존 로스의 선교방법은 만주의 한국인 예배공동체의 중심이었던 권서전도인들을 통하여 한국인 예배의 형태를 형성하였다.

만주에서 형성된 한국인들의 예배는 평일 오후에는 전도설교, 저녁에는 성경교육, 그리고 주일에는 찬송과 기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3가지 특징으로 구분되는 예배들은 연결성을 지니면서 서로 필요에 따라 보완되고 확대되었다.

먼저 복음전도로 회심자들을 얻어, 그 다음에는 사경회 형식의 저녁예배를 통하여 회심자들을 교회의 구성원으로 만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흥회 형식의 주일예배를 통하여 확실한 영적 구원을 체험하게 하였다. 이렇게 연결된 각 집회는 성격에 따라 전도설교, 성경공부, 기도와 찬송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3) 선교와 예배의 연결

 

미국 개신교의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예배 내용, 구조, 그리고 형식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들의 영향력은 이미 선교현장에서 한국인들에 의해 형성된 예배공동체를 제도적인 교회의 예배와 연결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한국교회 설립의 기반이 되는 예배공동체는 만주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서북지방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들의 전도활동으로 상당수의 세례 지원자들이 선교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은 선교사들의 복음전도로 시작되기 보다 이미 결심한 구도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언더우드가 고백한 것처럼,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은 이미 복음의 씨가 뿌려진 곳들을 찾아다니며 열매를 거두는 것과 같았다.만주에서 형성된 한국인 예배공동체를 통하여 형성된 전도, 교육, 그리고 신앙부흥 중심의 예배 형식은 1884년 이후 한국에서 예배의 내용, 구조, 그리고 형식을 형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미국 선교사들의 예배 경험과 상이하지 않았다.

선교사들의 예배 경험은 19세기에 미국에서 독특하게 발생한 프론티어(Frontier; 변경[邊境]) 예배를 그 배경으로 한다. 프론티어 예배개신교 예배가 미국화된 것으로 약 1800년부터 미국의 변경에서 주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자들을 대상으로 몇 일 동안 열린 야영집회(Camp Meeting)를 통해 형성되었다. 프론티어 예배의 특징은 선교와 예배를 통합한 것으로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한 응답으로 "교회 밖"에서 시작된 복음전도를 "교회 안"의 세례예식과 연결시킨 것이다.프론티어 예배에 의해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은 선교의 자유가 없던 한국의 선교현장에서 비공식적으로 선교와 예배를 연결하였다.

선교 초기에는 한국인의 서양에 대한 편견과 타종교에 대한 배척정신 때문에 한국에서 직접적인 선교활동을 통하여 예배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어려웠다. 그러나 처음부터 선교현장과 예배가 용이하게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들을 도와 복음을 전하던 권서인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만주나 한국의 북부지역에서 복음을 접한 후 자신들의 고향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예배공동체의 기초를 만들었다. 한국에서 선교와 예배의 연결은 사랑방에서 시작된 성경연구반과 세례식을 통하여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만주에서 형성된 자생적 예배공동체가 먼저, 번역 간행된 복음서를 반포하며 전도함으로써 신앙공동체의 발판을 마련하고 그 다음,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줌으로 예배공동체를 마련한 단계와 동일하다.

 

(1904년 기독교안내서 존로스목사 저)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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