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분별력 있는 신앙인이 됩시다.

하나님아들 2014. 1. 20. 14:00

분별력 있는 신앙인이 됩시다. 

요한복음 9장1-12절 

 

우리는 오늘 성경 본문에서 선천적인 시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시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으면 그는 그 나이쯤에 이미 자리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방법은 다른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날마다 정해진 자리에 앉아서 자비를 구걸하는 처량한 거지의 신세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앉아 구걸하던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은 누구나가 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거리의 유명인이 아닌 유명인이 되어 있는 처지였습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그 소경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동냥을 주는 것을 자신의 경건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생각하였기에 그들 자신의 경건을 나타내고자 돈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 깊은 곳에는 다른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거지 소경을 보면서, 소경으로 태어난 것과 죄와의 상관관계를 추론하려 하였습니다. 

 

"저가 무슨 죄를 지어서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을까?" 예수님과 제자들은 길을 지나가시다가 그 소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은 일반인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가 소경이 된 원인을 죄로부터 찾으려 합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한 질문입니다. 

 

제자들은 일반 유대인들이 가졌던 궁금증을 똑같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소경이 된 영적인 의미를 생각할 만한 사람들이 아직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남들이 하는 것처럼 일의 원인과 결과를 따지기를 원하였습니다. 무슨 일이든 일에는 항상 원인과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이나 사건의 원인을 추론하고 추측하여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한 추측과 판단이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면 좋을텐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은 작은 일을 과장합니다. 

그리고 있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추측으로 일관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하려 합니다. 그래서 없는 일은 만들어 내고 자기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던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남을 깔아뭉개면 자신이 상대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말이란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에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됩니다. 그래서 오해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남의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말을 중간에서 왜곡되게 전달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이면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자들이 보는 그가 소경이 된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가 소경이 된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뜻을 분별하는 신앙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다는 말은 육체적인 장애의 내용을 말함과 동시에 인간이 영적으로는 나면서부터 소경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이중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대교적인 삶의 방식과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언제나 고통과 죄를 연관시키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죄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선천적인 죄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선천적인 죄라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을 때에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기가 놀며 어머니의 배를 차는 것도 죄이며, 어머니가 혹시 우상 숭배하거나 다른 죄를 짓게 되면 아이도 역시 죄를 짓게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모의 죄가 자녀에게 유전된다고도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에는 영혼의 선재관념이 한몫 했습니다. 제자들도 경건한 유대인들 가운데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품게 되는 같은 궁금증을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라면 그러한 자기들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실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기회는 이때다 싶어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물은 밑바탕에 깔려 있는 몹쓸 생각을 깡그리 짓밟아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혹시 고통을 당한다면 그 누구의 잘못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라고 한탄조로 얘기하는 것은 근본부터 잘못된 말입니다.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셨음이니라(출9:16)" 

하나님의 일은 그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시려고 나타내는 일,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기를 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기를 원하시는 일이 나타나는 곳에는 무엇이 나타납니까? 그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때로 어려움과 슬픔과 고통, 실망, 부족을 경험합니다. 그러할 때에는 혹시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였는가를 생각지 말고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떠한 일을 나타내실까를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타내실 위대한 결과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빛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구원의 사명을 펴는 동안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명과 사역의 한계를 제한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덧입을 수 있는 기회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구세주로서 맞이할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이 열려진 기회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이들에게 열려진 기회를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을 맛볼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빛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을 묘사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고 구원하는 빛입니다. 그 안에 속해 있을 때에라야 영적인 흑암에서 벗어나 낮을 즐길 수 있습니다. 낮이라야만 장애물을 피할 수 있습니다. 낮이라야 안전하게 다닐 수 있습니다. 

 

구원의 빛이신 예수님을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밤이며 어두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빛을 좇아가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은 우리가 빛을 분별하지 못하게 합니다. 한 사나이가 꿀벌치는 집에 들어가 살짝 꿀벌 통을 하나 훔쳐 갔습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주인이 꿀벌집 곁에서 근심을 하며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꿀을 찾아 멀리 날아갔던 벌들이 돌아와 집이 없어진 것을 알고 거기 서있는 주인에게 덤벼들어 공격을 합니다. 

 

그러자 화가 난 주인이 꿀벌들에게 소리치며 말합니다. 

"세상에 집은 훔쳐간 놈은 가만 놔두고 저희들을 위하여 근심하고 있는 주인을 쏘다니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빛 되신 주님을 분별하지 못하고 집 잃은 벌들처럼 주님께 항의하며 달려들진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한 구원자가 되시고 우리들의 삶을 위하여 노심초사하시며 대신 근심하시며 오늘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가운데 오셔서 지금도 우리의 영혼을 환히 밝히시는 빛 되신 주님을 분별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3. 분별력 있는 신앙인은 순종하는 삶을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을 밝힌 후에 땅에 침을 뱉으십니다. 예수님은 눈먼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이 기적의 자리에서 주도권을 잡고 계십니다. 여러분 삶의 주도권을 누가 쥐고 계십니까? 우리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십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입니까? 

 

주님께서 우리들 삶의 주도권을 잡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삶의 주도권을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해 드리고 모든 것을 맡긴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역사 하시는 무대가 될 것입니다. 눈먼 소경의 삶은 하나님과 동떨어진 저주받은 삶이었던 것 같이 보였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였을 때에 그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이요,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계시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의 침은 의학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누구든지 안식일에는 침을 발라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침을 바르는 행위는 치료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7:33에는 예수께서 침을 사용하셔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신 사건이 나타납니다. 당시에는 진흙도 역시 특별한 치유의 성질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널리 사용되던 일반적인 방법을 사용하셔서 치유의 능력을 나타내신 현명한 의사이셨습니다. 

 

진흙에 침을 이겨서 눈에 바르고 난 다음 예수님은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실로암으로 보냈다는 말속에는 예수님 자신이 보냄을 받은 자로서 스스로 생수의 근원이 됨과 마찬가지로 눈먼 자에게 빛을 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소경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이게 무슨 일이요?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앞이 보이지도 않는데, 그 깊은 곳까지 어떻게 가서 씻습니까?"라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가서 씻고'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로암 연못은 티로포에안 계곡 남단 도시의 성곽에 위치하였습니다. 그 연못의 수면에 닿기 위해서는 지하로 아주 깊이 내려가야 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내려가기엔 굉장히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경은 그 험한 길을 내려갔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는 말이 없습니다. 만약 그 소경이 자기가 실로암 연못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고 도움을 요청하였다면 그 소경은 비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소경은 묵묵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가서 실로암 연못에 있는 물로 그 눈에 덮인 침에 갠 진흙을 씻어냈을 때, 소경의 눈이 떠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지금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순종을 원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것은 순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순종할 때에 기적이 있습니다. 순종하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의미를 분별하며 우리들 앞에 놓인 빛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맛보게 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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