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라 (시편 62:1-12)|

하나님아들 2014. 1. 13. 22:47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라 

2012.9.16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시62:1)

My seoul finds rest in God;

 

  

    태풍 산바가 남쪽에서 몰려온다는 소식입니다. 매미급의 위력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두 번의 태풍에 상처 입은 농민들의 시름이 더 커질까 걱정입니다. 사실 태풍은 큰 시련이 아닙니다. 이 지구상은 기온 상승, 열대림의 북극 이동, 빙하소멸 등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어떤 풍파와 역경과 고통이 찾아올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변하는 세상을 두려워하며 무엇인가 기댈 것을 찾습니다. 그러나 재연 재앙을 대비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편 저자는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고 합니다. 우리의 믿는바 하나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절망 중에도 참 평안과 쉼을 누릴 수 있고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 저자를 통해서 왜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며 의지해야하는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 되십니다.

 

본문 1절로 시편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무엇이든지 해야지 가만히 있기가 어렵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지금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며 의지한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바람(뚜미야)'이라는 말은 사람이 자기의 소욕이나 또는 스스로 무엇을 하려는 움직임이 없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하는 것을 뜻합니다. 잠잠하라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방법을 쓰지 말고 적극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자기 생각, 자기 방법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만이 구원자가 되시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로 난다는 믿음이 그를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흔들리고 방황하는 이유는 자기 구원이 어디서 오는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보이는 사람들과 물질을 더 의지합니다.

 

   과연 우리는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요? 물질에 내 인생을 맡길 수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의지하고 믿다가 배신당하고 좌절합니까? 또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하다가 도리어 파산을 당합니까?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5절 말씀을 보시시오. 인생을 흔들리는 담과 울타리 같은 존재라 합니다(3). 어려운 일을 만나고 시험이 들면 심하게 흔들리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돈도 마찬가지 입니다. 필요의 대상이지 의존의 대상이 아닙니다. 막상 중병이 들고, 사고를 만나보면 사람도 돈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어젠 정상국 목사님 부친상으로 무안장례식장을 다녀왔습니다. 한 전도사님으로부터 장로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의사라고 합니다. 이런 분이 있으니 교회가 든든하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내면세계를 보니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처지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아내가 의사인 남편이 벌어오는 돈을 얼마나 함부로 써서 10년 동안 의사 봉급이 차압 잡혀 살아가기도 힘들었다고 합니다. 겉으로는 의사 집안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데 속은 갈등과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그 여자 집사님 잘 못을 인정하고 삽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못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도사님은 정말 돈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돈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 중에는 힘들다고 무속인들, 점쟁이들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쉽게 바로 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도움이 됩니까?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삶 자체가 당연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는 4장 13-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3-14). 안개 같은 인생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야겠습니까?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내 가정과 사업과 직장이 잘 되고 축복 받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 한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홍해가 가로막을 때 길을 열어주시고, 광야가 가로막을 때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해 주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내가 목마를 때 날마다 만나와 생수를 공급해 주실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구원이신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며 사는 것이 믿음의 태도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5절로 시편 저자는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시인이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소망의 하나님 때문입니다. 소망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소망이 있는 사람은 일어섭니다. 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으면 젊은 청년이라도 일어설 수 없습니다.

 

   서울에 가면 역전마다 노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의자나 화장실이나 어디든지 누워 잠을 잡니다. 밤에도 낮에도 잡니다. 요령 있는 사람들은 서울역에서 수원이나 인천을 오고가면서 전철 속에서 잠을 잡니다. 점심은 무료배식 처로 가서 해결합니다. 주일에는 용돈 주는 교회로 가서 주일을 보냅니다. 그들이 자는 옆에는 빈 술병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 일하면 되지 않는가 책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은 이들이 일하지 못하는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라고 하빈다. 절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일한다고 해도 일어설 가능성을 보지 않기 때문에 자포자기하는 것입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소망이 있으면 활력이 솟아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제 연구실에는 5년이 넘은 동맥 나무화분이 있습니다. 물을 주고 걸음을 주어도 조금도 자라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더 이상 성장이 제로였습니다. 그런데 올 여름에는 밖에 내놓고 해빛을 받게 했더니 생기기 돌고 쭉 쭉 자라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일어설 수 있습니다.

 

   시편 저자 다윗 역시 힘든 상황에 있었습니다. 주석가들 가운데는 이 시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 부르짖은 기도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 가슴 아픈 절망적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하서 15장에 보면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궁에서 도망쳐 나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향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하여 자기가 왕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압살롬의 칼날을 피하여 도망치지만 자식에게 당한 일이라 어디에 하소연 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합니다. 망한 사울의 집 사람 시므이조차 욕을 합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얼마나 절망적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그런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좉아 나는도다.”(5)

 

  그는 절망적인 현실 상황보다도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나 자식을 보자 상황을 보면 절망적이었지만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조금도 마음이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이렇게 어디에도 하소연 할 수 없는 기가 막힌 상황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움이 많은지 한 세상을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지금 이 지구촌을 보면 거의 날마다 사건과 사고가 터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끊임없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 천재지변으로 홍수, 지진, 해일, 테러로 죽고 부상을 당합니다. 얼마 전 미국은 9.11 희생자 추모식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리비아에서는 미국 대사가 테러를 당해 죽었습니다. 이런 세상을 바라보면 때로 두려움이 앞설 때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낙심하고 주저앉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tv를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이 하나도 없으니 은혜가 안 된다고 눈감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비록 힘든 세상이라도 긍정적으로 담대히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갖고 살면 됩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아멘. 다윗은 대저 나의 소망은 하나님을 좇아 난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는 결코 절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도 우리를 건저내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셨다고 합니다. 욥기서 14:7절은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합니다. 흙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나무는 조금 물기만 있어도 다시 생명이 움튼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어려워도 하늘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죽어도 일어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 자 이십니다. 또한 믿는 모든 자녀들을 위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떤 힘든 상황도 견딜 수 있고 용감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최후는 승리입니다. 아멘.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본문 7절로 시편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의 또 한 가지는 피난처가 하나님께 있다고 합니다. 피난처는 어떠한 원수의 위협도 미치지 못하는 절대적으로 안전한 장소를 가리킵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을 피난처라고 말하는 곳들이 많습니다.

 

'오직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가 되시도다'(시 14:6)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시 91:9)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안전한 것 같지만 안전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인생 바다에 폭풍우와 같은 환난과 곤고함이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피곤하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한 세상을 산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험난한 인생길을 살아가면서 쉴만한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거기서 안위함과 재충전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어려움을 만날 때 술집으로 갑니다. 오락실로 갑니다. 또 나름대로 집을 짓고, 땅을 사고, 별장을 짓고, 건물을 견고하게 쌓아 피난처를 만듭니다. 그러나 마음과 영혼의 곤고함을 어디서 쉴 수 있습니까? 세상은 진정한 피난처가 될 수 없습니다.

 

   시편 저자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피난처 이십니다. 시편 23: 1-4을 보십시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는 저자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피난처이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의 삶의 체험 속에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보니 너무도 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어떤 원수가 쫓아와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시시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앞에서 마음을 토하라고 합니다(8).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다고 합니다. 사람을 피난처로 삼지 말라고 합니다. 또 포학 자를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치심치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다고 합니다(11). 이 하나님만이 우리를 죽음에서조차도 안전하게 보호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사야도 주님이 어려울 때 피난처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충돌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보장이시며 환난당한 빈핍한 자의 보장이시며 폭풍 중에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다'(사 25:4). 예레미야 선지자도 여호와를 재앙의 날에 피난처로 고백했습니다.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렘 17:17). 과거에 선지자들은 이렇게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달려가서 쉼을 누렸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도피성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부지중에 오살(誤殺:신4:42)한 자가 피할 수 있도록 하신 처소입니다. 살인 혐의를 받은 사람이라도 이성에 들어가면 안전하게 피할 수 있었습니다. 피난처가 있으면 위험할 때 피해서 생명을 보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는 거기로 달려가서 쉴 수 있고,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안전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거기에는 평화가 있고, 안식이 있고, 자유가 있고, 승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피난처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봐야 하는가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이시요. 우리의 참 된 소망이시요, 우리의 피난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을 바라보면 한주간도 승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      김해영

출처 :주님이하십니다 ...글..바다해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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