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김병삼 목사의 ‘우리가 꿈꾸는 예배 공동체’

하나님아들 2025. 7. 26. 22:35
김병삼 목사의 ‘우리가 꿈꾸는 예배 공동체’ (中)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이제 형식적인 면에서 예배를 정의해 보자. “어떤 예배도 성경적인 예배란 없습니다.” 모든 예배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며 이 모든 표현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단지 중요한 전제가 있다면 요한복음 4장 23-24절의 말씀이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가끔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분이 혼란스러워서 질문할 때가 있다.

 

 

“왜 만나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나요?”
“왜 만나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가운을 입지 않으며, 강대상이 없나요?”
“왜 만나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전자 음악을 사용하나요?”
“왜 만나교회는 광고를 설교시간 전에 하나요?”
“왜 만나교회는 헌금 바구니를 돌리나요?” 등등.

우리는 수없이 많은 질문을 갖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이런 질문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러한 의구심이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지금까지 드려왔던 예배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가?

예배의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다. “예배 가운데 음악적 논쟁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예배에 관한 논쟁은 음악에 관계된 부분이 많다. 예배는 음악보다 훨씬 본질적인 것이며 먼저 생긴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예배는 가인과 아벨이 드린 것이요, 한참 후손인 유발에게서 음악이 시작되었다.

 

창세기 4장 21절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음악이 예배에서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중요한 수단이지만, 음악이 예배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 스타일을 하나님께서도 좋아하시리라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예배할 때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그것만을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예배는 스타일, 음량 혹은 곡의 속도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하나님은 노래가 빠르든 느리든 시끄럽든 조용하든, 오래된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에 모든 종류의 음악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 모두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 모두를 좋아하십니다. 만약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진다면 그것이 예배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음악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배경과 인격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다양성을 받으시는 분이다. 우리는 예배에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야”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싫어하셔, 혹은 이것은 예배 음악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음악과 찬양을 성스럽게 만드는 것은 음이나 박자 리듬이 아니라 ‘가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영적인 음악’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음악에 ‘영적인 가사’가 붙여지느냐가 문제다. 가사 없이 아무리 연주를 해도 그것이 크리스천 음악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는 없다. 이러한 이유로 만나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음악을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만나교회에서 음악의 기준은 지금 이 음악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일 뿐이다. 예배는 산제사다! 예배는 형식 이상의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는 무엇일까? 그 내용을 정확하게 살펴보자.

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라면 누가 만족해야 할까? 우리가 자꾸 이 내용적인 면에서 잘못되는 것은 예배시간을 통해 자꾸 우리의 만족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오늘 예배는 별로야!” “오늘 예배는 참 좋았어!” “오늘 예배는 은혜로웠어!” 이와 같은 말이 과연 자신의 만족과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께 드림의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냐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예배에서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예배를 통해 깊은 은혜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시고 교제하신다. 우리와 인격적인 교제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의미에서 ‘은혜’를 이야기했다면 맞다. 그러나 나에게 좋았다는 감정으로 말미암아 “은혜 받았어!”라고 말한다면 잘못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가 ‘제사’라는 말에 다시 한 번 주목해 보자. 하나님은 메마른 기도, 형식적인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예배는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하여, 나의 편리한 방식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위해 내가 죽는 것이다. ‘제사’는 동물을 죽이므로, 나의 죽음을 대신하는 의식이다. 이것은 단순한 죄의 사함뿐만 아니라 나의 인격과 생각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지는 것이다. 목회자의 할 일은 이 예배 가운데 회중이 들어오도록 준비하며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예배를 예배되게 하는 것은 오늘 예배에 참여한 회중이다. 어려운 일일지 모르지만, 예배의 형식과 예배의 요소 가운데 우리의 생각을 꺾어야 하는 상황, 우리의 유익을 접어야 하는 순간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로 나아가는 길이다.

 

구약 시대의 예배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제사였다. 제사는 죽여서 피를 드리는 죄 사함의 의식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예배는 ‘산 제물’다. ‘산 제물’라는 말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 이 말의 의미는 “실제적”이다. “삶에서 드려지는 것이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구약의 예배가 특정한 날, 특정한 장소에서 드려지는 것이었다면 오늘 우리가 드리는 산제사는 매 순간마다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믿음의 사람 다윗이 이 부분에서 아주 민감한 의식을 가졌던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그의 시편을 통해 “해 뜨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시 113:3)라고 도전한다. <계속>

 

시편 34편 1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