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예화 모음집

하나님아들 2025. 6. 1. 00:43
예화 모음집
 

 




목  차




1. 믿음, 말씀


ꁶ 믿음
♡ 눈동자 ‧‧‧ 25
♥ 절반은 빛, 절반은 어둠 ‧‧‧ 26
♡ 시온(Zion) ‧‧‧ 26
♥ 당연한 말씀 ‧‧‧ 27
♡ 현대 과학으로 증명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 28
♥ 보이지 않는 힘(하나님의 섭리) ‧‧‧ 29
♡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가능한 인간 관계 ‧‧‧ 30
♥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 ‧‧‧ 30
♡ 알렉산더와 예수 ‧‧‧ 31
♥ 예수님의 자리 ‧‧‧ 32
♡ 예수님의 얼굴 ‧‧‧ 33
♥ 원자탄을 막을 수 있는 무기 ‧‧‧ 33
♡ 세 종류의 인간 ‧‧‧ 34
♥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1) ‧‧‧ 34
♡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2) ‧‧‧ 35
♥ 현재의 신앙 ‧‧‧ 36
♡ 독실한 믿음만 있다면 ‧‧‧ 36
♥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 37
♡ 신앙은 모험 ‧‧‧ 38
♥ 고문을 극복한 아들 ‧‧‧ 39
♡ 하나님과의 관계 ‧‧‧ 40
♥ 믿음의 법칙 ‧‧‧ 40
♡ 신앙의 뿌리 ‧‧‧ 42
♥ 도대체 무엇으로... ‧‧‧ 43
♡ 믿음은 구원의 밧줄을 붙잡는 것 ‧‧‧ 43
♥ 믿고 행하라 ‧‧‧ 44
♡ 결단하는 믿음 ‧‧‧ 44
♥ 믿음은 에너지 원천 ‧‧‧ 45
♡ 깨닫는 그 순간 ‧‧‧ 46
♥ 주인을 전도한 머슴의 믿음 ‧‧‧ 47
♡ 믿기만 하면 ‧‧‧ 48
♥ 믿음의 대상은 나 자신 ‧‧‧ 48


ꁶ 말씀
♡ 워너 메이커의 성공담 ‧‧‧ 50
♥ 효과적인 성경 읽기를 위한 방법 ‧‧‧ 51
♡ 뽀나 목사의 시(성경 예찬시) ‧‧‧ 52
♥ 성경을 생활 이념으로 삼는 미국의 대통령들 ‧‧‧ 53
♡ 말씀(생수)의 기갈 ‧‧‧ 54
♥ 영혼의 생수 ‧‧‧ 55
♡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라를 일으키는 길 ‧‧‧ 55
♥ 하나님의 말씀은 공짜로 들을 수 있다 ‧‧‧ 56
♡ 공격당하는 성경 ‧‧‧ 56
♥ 당신에게 성경은? ‧‧‧ 57
♡ 2000년간 베스트 셀러-성경 ‧‧‧ 58
♥ 나를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지 마세요 ‧‧‧ 59
♡ 말씀을 사모하는 자의 행복 ‧‧‧ 60
♥ 세계 공통어 ‧‧‧ 61
♡ 얼굴이 빛나는 이유 ‧‧‧ 62
♥ 나를 붙드신 이 말씀 ‧‧‧ 63
♡ 사형수가 남긴 성경책 ‧‧‧ 65
♥ 신앙적 관점으로 본 미국의 위대성 ‧‧‧ 67
♡ 전도지 같은 돈 ‧‧‧ 67
♥ 전도인의 자녀들 ‧‧‧ 68
♡ 일점 일획이라도 오류가 없는 성경 ‧‧‧ 69
♥ 인간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 ‧‧‧ 70
♡ 복음의 힘 ‧‧‧ 71
♥ 하나님의 말씀이 위대한 희망 ‧‧‧ 72
♡ 똑똑한 나무꾼 ‧‧‧ 73
♥ 하나님께 맡김 ‧‧‧ 73
♡ 카타콤 ‧‧‧ 74
♥ 목사와 노학자 ‧‧‧ 75
♡ 고상한 그리스도인 ‧‧‧ 76




2. 주일(안식), 십일조(헌금)


ꁶ 주일
♡ 주일을 무시한 결과 ‧‧‧ 77
♥ 주일에 취임하기를 거부한 미국의 대통령 ‧‧‧ 78
♡ 주일에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지 않은 선수 ‧‧‧ 79
♥ 안식을 잃어버린 사람 ‧‧‧ 79
♡ 주일 성수는 하늘을 오르는 사닥다리 ‧‧‧ 80
♥ 끝까지 주일을 지킨 학생 ‧‧‧ 80
♡ 항해하는 배 안에서도 주일을 지킨 청교도들 ‧‧‧ 81
♥ 주일은? ‧‧‧ 82


ꁶ 십일조(헌금)
♡ 십일조의 성경적 의미 ‧‧‧ 82
♥ 다시 회복한 십일조 생활 ‧‧‧ 83
♡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라 ‧‧‧ 84
♥ 더 복을 받는 비결 ‧‧‧ 85
♡ 믿음까지 잃는다면 ‧‧‧ 86
♥ 십일조의 결과 ‧‧‧ 86
♡ 낙심하지 말고 드려야 한다 ‧‧‧ 87
♥ 가장 중요한 질문 ‧‧‧ 88
♡ 헌금이란? ‧‧‧ 89
♥ 헌금하는 방법도 가지가지 ‧‧‧ 89




3, 행복, 기쁨, 만족, 감사, 기도


ꁶ 행복(기쁨,만족)
♡ 행복, 만족, 기쁨의 비결 ‧‧‧ 91
♥ 예측 못할 삶 ‧‧‧ 92
♡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 93
♥ 행복의 대가 ‧‧‧ 94
♡ 불행을 통해 얻은 행복 ‧‧‧ 95
♥ 만족이란 주는 데서 온다 ‧‧‧ 97
♡ 행복한 사람이 갖는 공통점 ‧‧‧ 98
♥ 예수님을 제일 처음으로 본다는 기쁨 ‧‧‧ 98
♡ 가진 자(to have)보다 있는 자(to be)로 ‧‧‧ 99
♥ 세상의 즐거움 중 가장 큰 것은 자기를 이기는 것이다 ‧‧‧ 99


ꁶ 감사
♡ 감사로 예물을 삼으라 ‧‧‧ 105
♥ 감사의 나무를 심어라 ‧‧‧ 106
♡ 성숙한 믿음의 감사 ‧‧‧ 107
♥ 감사의 조건은 많다 ‧‧‧ 108
♡ 플라톤의 네 가지 감사 ‧‧‧ 108
♥ 안요한 목사의 감사 ‧‧‧ 109
♡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 ‧‧‧ 109
♥ 벙어리의 기도 ‧‧‧ 110
♡ 전화위복(1) ‧‧‧ 110
♥ 전화위복(2) ‧‧‧ 111
♡ 전화위복(3) ‧‧‧ 112
♥ 감사를 담아오라 ‧‧‧ 112
♡ 진짜 감사는 잊어버리고 ‧‧‧ 113
♥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는 길 ‧‧‧ 113
♡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 114
♥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 114
♡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도 감사 ‧‧‧ 115
♥ 종탑에 새겨진 옥수수 ‧‧‧ 116
♡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이 진정한 감사 ‧‧‧ 117
♥ 역경중에 감사 ‧‧‧ 117
♡ 감사의 삶 ‧‧‧ 118


ꁶ 기도
♡ 미국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도 ‧‧‧ 120
♥ 트루먼 대통령의 기도 요청 ‧‧‧ 120
♡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기도 ‧‧‧ 120
♥ 37세된 새 교우의 기도 ‧‧‧ 121
♡ 기도하는 손 ‧‧‧ 121
♥ 응답받는 기도 ‧‧‧ 122
♡ 6.25때 장마를 멈추게 한 기도 ‧‧‧ 123
♥ 행복한 부부 이야기 ‧‧‧ 124
♡ 평화를 구하는 농부의 기도 ‧‧‧ 124
♥ 응답 안해 주시면 ‧‧‧ 125
♡ 유혹을 이긴 기도 ‧‧‧ 125
♥ 기도는 만능의 열쇠 ‧‧‧ 127
♡ 하늘에까지 연결되는 기도라야 ‧‧‧ 127
♥ 문은 넓게 열려 있다 ‧‧‧ 128
♡ 합심기도 ‧‧‧ 129
♥ 지혜를 구하는 기도 ‧‧‧ 129
♡ 리듬이 있는 기도 ‧‧‧ 130
♥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 130
♡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 131
♥ 다만 제게 일사각오 있을 뿐입니다(순교자 명 설교) ‧‧‧ 133
♡ 믿음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 ‧‧‧ 141
♥ 아빠를 회개시킨 기도 ‧‧‧ 142
♡ 위대한 인물들의 공통점 ‧‧‧ 142
♥ 첫 아침을 주님과 함께 ‧‧‧ 144




4. 부활, 거듭남, 회개


ꁶ 부활
♡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 ‧‧‧ 145
♥ 그리스도가 남기신 것,부활의 믿음 ‧‧‧ 145
♡ 부활 신앙은 힘의 근원 ‧‧‧ 146
♥ 부활은 고난으로부터 ‧‧‧ 146
♡ 부활을 체험하라 ‧‧‧ 147


ꁶ 거듭남
♡ 도스토에프스키의 삶 ‧‧‧ 148
♥ 예수라고 하는 빛을 보고 새 삶을 얻다 ‧‧‧ 149
♡ 거듭난 삶 ‧‧‧ 150
♥ 옛 생활을 버리지 못하는 삶 ‧‧‧ 151
♡ 인생의 소망 ‧‧‧ 152
♥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 ‧‧‧ 153
♡ 존 뉴톤의 거듭남 ‧‧‧ 154


ꁶ 회개
♡ 웨일즈의 부흥은 회개로 시작되다 ‧‧‧ 155
♥ 회개한 도둑 ‧‧‧ 156
♡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한 죄수 ‧‧‧ 157
♥ 개과천선 ‧‧‧ 157
♡ 사랑의 편지에 회개한 지존파 ‧‧‧ 159
♥ 진실이 없는 회개와 진실한 회개 ‧‧‧ 160
♡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 ‧‧‧ 160




5, 인도, 구원, 속죄, 도움


ꁶ 인도
♡ 예수님을 신뢰하고 한걸음 한걸음... ‧‧‧ 163


ꁶ 구원(속죄)
♡ 자신이 구원받는 길 ‧‧‧ 164
♥ 목자를 아는 양떼 ‧‧‧ 164
♡ 나의 야망, 영혼 구원 ‧‧‧ 165
♥ 복음의 씨는 어떻게 자라는가? ‧‧‧ 165
♡ 어린이 전도의 중요성 ‧‧‧ 166
♥ 영원한 반석 예수 ‧‧‧ 167
♡ 십자가 고통의 의미 ‧‧‧ 168
♥ 가장 중요한 과제, 구원 ‧‧‧ 168
♡ 사형받는 것이 더 낫습니다 ‧‧‧ 169
♥ 산 위로 올라가야 길을 찾을 수 있다 ‧‧‧ 169
♡ 구원의 놀라운 결과 ‧‧‧ 169
♥ 믿음의 배 ‧‧‧ 170
♡ 죄수의 석방 ‧‧‧ 171
♥ 하나님의 간섭 ‧‧‧ 172
♡ 하늘나라에서 온 답장 ‧‧‧ 172
♥ 강아지의 구원 요청 ‧‧‧ 173
♡ 역사에 나타난 속죄관 ‧‧‧ 174


ꁶ 도움
♡ 큰 선물 ‧‧‧ 176




6. 성장(성숙), 성공과 실패, 승리, 싸움


ꁶ 성장(성숙)
♡ 세 가지 손(가위, 바위, 보) ‧‧‧ 179
♥ 성숙과 미성숙 ‧‧‧ 180
♡ 성숙한 인격 ‧‧‧ 180
♥ 성공의 비결 ‧‧‧ 181
♡ 최선의 노력 ‧‧‧ 182
♥ 성공을 조심하라 ‧‧‧ 183
♡ 음모와 시련에서도 성공한 미켈란젤로 ‧‧‧ 183
♥ 실명에서도 책을 쓴 사람 ‧‧‧ 184
♡ 시작하는 것과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 ‧‧‧ 184
♥ 열매 맺는 삶 ‧‧‧ 185
♡ 복음의 씨앗 ‧‧‧ 186


ꁶ 성공과 실패
♡ 성공의 지름길 ‧‧‧ 187
♥ 시각 장애의 아픔을 딛고 일어난 피아니스트 ‧‧‧ 187
♡ 적극적 헌신의 승리 ‧‧‧ 190
♥ 일곱 가지 성공 법칙 ‧‧‧ 190
♡ 빌 게이츠 “성공 경영 10계명” ‧‧‧ 191
♥ 콜린 파월의 생활 철학 ‧‧‧ 193
♡ 성공하기 위해 자신을 개선하라 ‧‧‧ 194
♥ 성공의 비결은 열심히 일하는 것 ‧‧‧ 195
♡ 실패와 성공 사이 ‧‧‧ 195
♥ 성공은 속 사람을 깨끗이 할 때 ‧‧‧ 196


ꁶ 승리
♡ 여러 가지 종류의 승리 ‧‧‧ 197
♥ 어둠에서 빛을 찾은 소년 ‧‧‧ 198


ꁶ 싸움
♡ 신사참배 투쟁은 주기철 목사의 ‘삶의 축’ ‧‧‧ 199
♥ 전쟁의 참상 ‧‧‧ 203
♡ 전쟁무기 ‧‧‧ 204
♥ 두 선교사의 분쟁 ‧‧‧ 204




7. 평화, 심은대로, 정직, 성실, 약속


ꁶ 평화
♡ 두려워 말라 ‧‧‧ 207
♥ 죽은 딸의 무덤 앞에서 찾은 행복 ‧‧‧ 208
♡ 천하를 통일할 사람 ‧‧‧ 208
♥ 풍랑 속의 평안 ‧‧‧ 208
♡ 기독교 인구가 늘어간다고 평화가 올까? ‧‧‧ 209
♥ 평화를 방해하는 세력 ‧‧‧ 209


ꁶ 심은대로
♡ 무엇을 심고 싶은가? ‧‧‧ 210
♥ 심은대로 ‧‧‧ 210


ꁶ 정직
♡ 우리 사회의 정직 지수는 얼마? ‧‧‧ 211
♥ 정직은 평생 행복의 비결 ‧‧‧ 212
♡ 거짓을 버려라 ‧‧‧ 213


ꁶ 성실
♡ 끝까지 성실해야 ‧‧‧ 213
♥ 도산 안창호 선생의 성실 ‧‧‧ 214
♡ 무릎을 기운 바지 ‧‧‧ 214


ꁶ 약속
♡ 하나님 감사합니다 ‧‧‧ 215
♥ 절름발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조승 ‧‧‧ 215




8. 절망, 비극, 사망, 무가치


ꁶ 절망
♡ 악마들의 가장 값비싼 무기 ‧‧‧ 217
♥ 절망을 이기는 처방 ‧‧‧ 218
♡ 절망의 세 종류 ‧‧‧ 218


ꁶ 비극
♡ 소망없는 사회의 비극 ‧‧‧ 219
♥ 비극의 원인 ‧‧‧ 219


ꁶ 사망
♡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면 ‧‧‧ 220
♥ 공룡의 소멸 원인 ‧‧‧ 220
♡ 젊은이의 여행담 ‧‧‧ 221
♥ 겨레 일깨운 민족시인 한용운 ‧‧‧ 222
♡ 거듭나기 위한 죽음 ‧‧‧ 222
♥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 ‧‧‧ 224
♡ 비와 죽음 ‧‧‧ 224
♥ 죽음에 대한 문화적 차이 ‧‧‧ 225
♡ 죽은 교회 장례식 ‧‧‧ 226
♥ 오두막 생명 구조소 ‧‧‧ 227


ꁶ 무가치
♡ 타워링 ‧‧‧ 227
♥ 고양이의 이름 ‧‧‧ 228




9. 기회(시간),영원(순간),현재,결단(우유부단)


ꁶ 기회(시간)
♡ 시간이 없어요 ‧‧‧ 231
♥ 가장 소중한 때, 지금 ‧‧‧ 232
♡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때 ‧‧‧ 233
♥ 하나님께 기회를 드린다면 ‧‧‧ 234
♡ 일생 동안 행복한 시간과 하나님을 위한 시간은? ‧‧‧ 234


ꁶ 영원(순간)
♡ 중요한 것은 영원 ‧‧‧ 235
♥ 순간의 중요성 ‧‧‧ 235


ꁶ 현재
♡ 가장 중요한 현재 ‧‧‧ 236
♥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기회 ‧‧‧ 236
♡ 전도의 기회를 잃으면 ‧‧‧ 237
♥ 복음 증거의 시급성 ‧‧‧ 238


ꁶ 결단(우유부단)
♡ 시간과 기회 ‧‧‧ 238
♥ 변장자의 호랑이 사냥 ‧‧‧ 240
♡ 알묘조장 ‧‧‧ 241
♥ 달팽이의 꿈 ‧‧‧ 242




10. 고난, 인내, 시험, 준비


ꁶ 고난
♡ 가시나무새 ‧‧‧ 243
♥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 ‧‧‧ 244
♡ 대속의 고난 ‧‧‧ 245
♥ 강재구 소령 ‧‧‧ 245
♡ 헤레나 ‧‧‧ 246
♥ 고난의 신비 ‧‧‧ 247
♡ 4월의 고난 ‧‧‧ 247
♥ 흙덩이를 뚫고 ‧‧‧ 248
♡ 고난에 관한 금언, 격언, 속담 ‧‧‧ 249
♥ 고통은 수와 같다 ‧‧‧ 250
♡ 역경의 열매 ‧‧‧ 250
♥ 나는 어떤 사람인가? ‧‧‧ 251
♡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 ‧‧‧ 251
♥ 점자를 발명한 윌리암 문 ‧‧‧ 252
♡ 창조적 삶은 고난과 시련도 이긴다 ‧‧‧ 252
♥ 불행을 한 번도 당해 보지 않은 집의 솥을 빌려오라 ‧‧‧ 253
♡ 고난이 없다면 ‧‧‧ 254
♥ 미즈노겐조 이야기 ‧‧‧ 254
♡ 태어나기 위한 몸부림 ‧‧‧ 256
♥ 대속의 보혈 ‧‧‧ 256
♡ 나를 대신하여 마신 십자가의 쓴 잔 ‧‧‧ 257
♥ 십자가의 고통을 체험함 ‧‧‧ 258
♡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 ‧‧‧ 258
♥ 실명도 하나님의 도구 ‧‧‧ 259
♡ 삶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 ‧‧‧ 259
♥ 시련과 고난을 이기는 방법(창조정신) ‧‧‧ 260


ꁶ 인내
♡ 걸음수에 맞는 상급 ‧‧‧ 261
♥ 인내의 비결 ‧‧‧ 261
♡ 끝까지 실천하는 것이 문제이다 ‧‧‧ 262
♥ 줄 하나와 파가니니 ‧‧‧ 262
♡ 처칠의 명 강의 ‧‧‧ 263
♥ 콜룸부스의 용기와 인내 ‧‧‧ 264
♡ 나이팅게일의 선택과 인내 ‧‧‧ 264
♥ 석수장이의 인내 ‧‧‧ 265
♡ 끝까지 신랑을 기다린 처녀 ‧‧‧ 265
♥ 누구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나? ‧‧‧ 266


ꁶ 시험
♡ 집사님이 당한 시험 ‧‧‧ 267
♥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 267


ꁶ 준비(대비)
♡ 지진 대피법 ‧‧‧ 268
♥ 부끄럼 없는 삶을 삽시다 ‧‧‧ 269
♡ 죽음의 준비 ‧‧‧ 269
♥ 깨어있는자가 특채됨 ‧‧‧ 270
♡ 펜실바니아주의 댐 사고 ‧‧‧ 271




11. 죄악, 불신앙, 물질숭배, 사탄, 욕심, 유혹


ꁶ 죄악
♡ 현대인의 정신적 범죄 ‧‧‧ 273
♥ 죄의식의 결핍 ‧‧‧ 273
♡ 악한 흐름 ‧‧‧ 274
♥ 죄의 결과 ‧‧‧ 274
♡ 죄는 불안과 공포를 준다 ‧‧‧ 275


ꁶ 불신앙
♡ 몬로의 고백 ‧‧‧ 275
♥ 그 덮개 속의 가짜 믿음 ‧‧‧ 276
♡ 무신론자의 종말 ‧‧‧ 277
♥ 신앙의 마비 증세 ‧‧‧ 277
♡ 공산주의 이름으로 인류 1억명 죽였다 ‧‧‧ 277
♥ 여성 범죄 증가율 남성의 2배 ‧‧‧ 279
♡ 기독교인의 위기 ‧‧‧ 280
♥ 무신론자 볼테르 ‧‧‧ 280
♡ 이단의 심리적인 교묘한 방법 ‧‧‧ 281
♥ 세상 지식으로 본 성경 ‧‧‧ 283
♡ 의심이 암귀를 낳는다 ‧‧‧ 284


ꁶ 물질 숭배
♡ 모조 하나님으로서의 돈 ‧‧‧ 285
♥ 돈의 허상 ‧‧‧ 287
♡ 덕은 근본, 재물은 말단 ‧‧‧ 288
♥ 재물의 허망함 ‧‧‧ 288
♡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 289
♥ 풍요가 위기일 수도 ‧‧‧ 289


ꁶ 사탄
♡ 귀신들린 것 ‧‧‧ 290
♥ 귀신의 무력함 ‧‧‧ 290
♡ 마귀가 인간을 사로잡는 5단계 ‧‧‧ 291
♥ 내일을 권유하는 마귀 ‧‧‧ 293


ꁶ 욕심
♡ 주인이 된 고슴도치 ‧‧‧ 293
♥ 송도의 외장수 ‧‧‧ 294
♡ 끝없는 탐욕 ‧‧‧ 295
♥ 지옥에서 다시 만난 아버지와 아들 ‧‧‧ 295
♡ 욕심의 결과 ‧‧‧ 296
♥ 준비하지 않는 삶의 비극 ‧‧‧ 297
♡ 황금의 손 ‧‧‧ 297
♥ 욕심 때문에, 무효 ‧‧‧ 298
♡ 욕심의 결과 ‧‧‧ 299
♥ 원숭이 사냥법 ‧‧‧ 300
♡ 듣는 것, 보는 것, 먹는 것의 절제 ‧‧‧ 300
♥ 소유의 포기 ‧‧‧ 301
♡ 자기에게 없는 것만 보고 ‧‧‧ 301


ꁶ 유혹
♡ 세 가지를 경계하라 ‧‧‧ 302
♥ 세 가지 유혹을 거절한 빌리 그래함 목사 ‧‧‧ 302
♡ 경기에서 승리하는 비결 ‧‧‧ 303
♥ 백화점에 없는 것들 ‧‧‧ 304




12. 경노, 효, 선행, 선용, 친절


ꁶ 경노
♡ 노인 십계명(1) ‧‧‧ 305
♥ 노인 십계명(2) ‧‧‧ 306
♡ 이스라엘의 남북 분열은 노년의 지혜를 무시한 결과 ‧‧‧ 307
♥ 노년의 지혜 ‧‧‧ 308


ꁶ 효
♡ 효도를 흉내내는 것은 좋으니라 ‧‧‧ 309
♥ 효자가 효자 아들을 둔다 ‧‧‧ 310
♡ 효자는 하늘이 도와준다 ‧‧‧ 311
♥ 지극한 효성이 ‘도우미 의자’ 탄생 ‧‧‧ 312
♡ 하늘도 감동한 효성 ‧‧‧ 314
♥ 시아버지와 며느리 ‧‧‧ 314
♡ 금화를 거절한 효자 ‧‧‧ 315
♥ 늙은이 살 사람 없소 ‧‧‧ 315
♡ 노인과 청소년 ‧‧‧ 316
♥ 우리 시대의 어버이 상(像) ‧‧‧ 318
♡ 링컨의 아버지 상(像) ‧‧‧ 319
♥ 어머니의 사진 ‧‧‧ 321


ꁶ 선행
♡ 베드로 장로님 ‧‧‧ 321
♥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은의(恩義) ‧‧‧ 322
♡ 선행에는 하늘의 보답이 있다 ‧‧‧ 324
♥ 시체의 저고리에서 나온 금덩이 ‧‧‧ 325
♡ 선행을 베풀라 ‧‧‧ 325
♥ 변장한 왕을 선대한 농부 ‧‧‧ 326
♡ 무덤에까지 동행하는 친구-선행 ‧‧‧ 327


ꁶ 선용
♡ 나의 재산을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 ‧‧‧ 328
♥ 하나님의 사업에 나의 재물을 ‧‧‧ 328


ꁶ 친절
♡ 작은 친절의 결과 ‧‧‧ 329




13. 관심과 무관심, 관점, 편견, 작은 것


ꁶ 관심과 무관심
♡ 나 중심에서 우리로 ‧‧‧ 331
♥ 무관심 (1) ‧‧‧ 332
♡ 무관심 (2) ‧‧‧ 332
♥ 무관심 (3) ‧‧‧ 333


ꁶ 관점
♡ 어떤 생각을 하고 바라보느냐? ‧‧‧ 334
♥ 딸로 보느냐, 며느리로 보느냐 ‧‧‧ 334


ꁶ 편견
♡ 가치가 처녀 ‧‧‧ 335
♥ 이중 잣대 ‧‧‧ 335
♡ 세 나라 사람의 마음 ‧‧‧ 336
♥ 자기 관점 ‧‧‧ 336


ꁶ 작은 것
♡ 작은 것이 위대하다 ‧‧‧ 338
♥ 작은 것이 위력 ‧‧‧ 338
♡ 작은 것도 아끼는 정신이 직장에 특채됨 ‧‧‧ 339
♥ 하나님과 나 ‧‧‧ 339
♡ 작은 실수가 큰 실패가 된다 ‧‧‧ 340
♥ 소수와 약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 ‧‧‧ 340




14. 사랑, 은혜, 용서


ꁶ 사랑
♡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 ‧‧‧ 343
♥ 합력하여 선을 이루다 ‧‧‧ 344
♡ 예수님의 사랑 ‧‧‧ 345
♥ 사랑 ‧‧‧ 347
♡ 가장 소중한 나의 어머니 ‧‧‧ 347
♥ 할머니 집사님의 눈물 ‧‧‧ 347
♡ 장로님의 사랑의 약 ‧‧‧ 348
♥ 사랑의 체온 ‧‧‧ 348
♡ 사랑의 힘 ‧‧‧ 349
♥ 미물을 통해 깨닫고 회복한 부부 사랑 ‧‧‧ 349
♡ 사랑으로 지는 짐 ‧‧‧ 350
♥ 이유 있는 강아지 사랑 ‧‧‧ 350
♡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 352
♥ 사랑의 실천자 ‧‧‧ 352
♡ 소박한 사랑의 실천자 ‧‧‧ 353
♥ 사랑은 최후의 제왕 ‧‧‧ 354
♡ 하나님의 속죄의 은총을 받으면 ‧‧‧ 354
♥ 사랑합시다 ‧‧‧ 355
♡ 어머니의 은혜 ‧‧‧ 355
♥ 엄마, 아빠 둘 다 필요합니다 ‧‧‧ 356
♡ 사랑이 담긴 말 ‧‧‧ 357
♥ 훌륭한 부정 ‧‧‧ 357
♡ 어머니의 손길 ‧‧‧ 358
♥ 어머니의 사랑 (1) ‧‧‧ 359
♡ 어머니의 사랑 (2) ‧‧‧ 360
♥ 어머니의 사랑 (3) ‧‧‧ 361
♡ 고통을 나누는 사랑 ‧‧‧ 362
♥ 진실한 사랑 ‧‧‧ 362
♡ 기다림의 사랑 ‧‧‧ 363
♥ 불량 소년을 세계적인 의사로 성장시킨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 ‧‧‧ 363


ꁶ 은혜
♡ 하나님의 은혜 ‧‧‧ 366
♥ 배은망덕 ‧‧‧ 367
♡ 은혜 이야기 ‧‧‧ 367
♥ 선재적 은혜 ‧‧‧ 368
♡ 값없이 받은 은혜 ‧‧‧ 369
♥ 당신은 이미 은혜 속에 있다 ‧‧‧ 370


ꁶ 용서
♡ 아브라함 링컨의 용서 ‧‧‧ 370
♥ 바다보다 하늘보다 넓은 것,용서 ‧‧‧ 371
♡ 내 아들 죽인 자 아들 삼겠소 ‧‧‧ 372




15. 순종(불순종),교만,겸손,섬김,협력,불화


ꁶ 순종(불순종)
♡ 그리스도의 순종 ‧‧‧ 377
♥ 순종하는 자가 얻은 상금 ‧‧‧ 378
♡ 다만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 378
♥ 나아만의 말씀 순종 ‧‧‧ 379
♡ 베드로의 말씀 순종 ‧‧‧ 379
♥ 처음에 순종했다면... ‧‧‧ 380
♡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 381


ꁶ 교만
♡ 우찌야의 교만 ‧‧‧ 381
♥ 이기적 마음들을 방치한다면... ‧‧‧ 382
♡ 자존심 때문에 파탄된 가정 ‧‧‧ 383


ꁶ 겸손
♡ 겸손하면 ‧‧‧ 384
♥ 대통령의 겸손 ‧‧‧ 384
♡ 고아들을 위한 겸손 ‧‧‧ 384
♥ 겸손 ‧‧‧ 386
♡ 최고의 미덕-겸손 ‧‧‧ 386
♥ 슈바이처의 겸손 ‧‧‧ 387
♡ 미 국무장관의 겸손 ‧‧‧ 387
♥ 조만식 장로의 겸손 ‧‧‧ 388


ꁶ 섬김
♡ 성 프랜시스의 섬김 ‧‧‧ 389
♥ 섬기는 삶을 보여준 슈바이처 ‧‧‧ 389


ꁶ 협력
♡ 협력을 한다는 것 ‧‧‧ 390
♥ 신앙의 협력 ‧‧‧ 391


ꁶ 불화
♡ 싸움의 결과 ‧‧‧ 391
♥ 싸움의 대상을 정확하게 판단하라 ‧‧‧ 393






































































































































눈동자


사람의 눈동자는 엄청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안과 의사들은 우리의 눈동자가 자동으로 조절된다고 말한다.  가령 사람의 눈에 먼지나 모래와 같은 이물질이 들어가려고 하면 어느새 눈꺼풀이 감겨 눈동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런 작용이 가능한 것은 눈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구조 때문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사람의 눈에는 자그만치 30만 개의 회로가 있고 1억만 개의 신경세포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그 무엇이라도 눈에 들어오려고 하면 이것을 눈동자가 감지하고 눈꺼풀에게 지시하여 자동으로 감겨 보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열악한 환경과 위기 가운데서도 눈동자처럼 항상 우리를 지켜 주신다. 하나님의 눈은 앉아서 천리를 본다는 신비의 눈보다도 더 뛰어나다. 이 눈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일들을 보고 계신다. 특별히 사람들의 행동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 깊이 감추어진 동기까지도 다 헤아리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는 이처럼 위안이 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절반은 빛, 절반은 어둠


지구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절반은 항상 어두움 가운데에 있는 반면에 다른 절반은 항상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한쪽에서 잠자리에 들 때, 다른 한쪽에서는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열심히 일하는데, 다른 편에서는 곤히 잠들어 있다. 하나님의 종들이 선교를 위해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다른 이들은 곧 밝아 올 새날을 위해 준비하며 쉬고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메시지는 전달되고 있다.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복음 사역의 태양은 절대로 지지 않는다. 이 얼마나 거대한 비전인가? 어떤 곳에서는 일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 일을 위해 준비하는 작업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항상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이다. 사실 우리는 해가 지구를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지내는 일이 많지는 않다. 그러나 해가 항상 있는 것은 해를 지으신 하나님이 항상 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임을 입증하는 표적이 된다.




시온(Zion)


‘시온’ 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을 부르던 말이다. ‘시온’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사막’ 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그렇게도 사모한 수도 예루살렘에 왜 하필 사막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사막의 노래’ 라고 불리는 이사야 35장 이 해답을 준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인간 구원의 역사를 ‘사막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는 것’으로 노래하고 있다. 환난과 죽음의 사막에 물이 솟아서 생명의 샘이 되듯, 시온성이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는 장소가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사막과 같이 황량한 세상에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을 생명의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로 바꾸는 비결은 무엇인가? 부패하고 어두워지는 사회를 밝게 바꾸는 비결이 누구에게 있는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시온의 백성으로 삼아 주실 때 그들의 삶은 변화될 것이다.




당연한 말씀


고든(C.D. Gordon)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길가에서 과일을 팔고 있는 작은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시간만 있으면 언제나 성경을 읽곤 하였다.
하루는 한 젊은 신사가 과일을 사려고 그녀 앞에 섰지만, 이 소녀는 책에 열중해 있어 손님이 온 것을 알지 못했다.
“얘야, 너는 무얼 그리 열심히 읽고 있니?”
“네, 하나님의 말씀이죠.”
이 젊은 신사는 회의주의자였다. 그는 소녀에게 다시 물었다.
“누가 이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니?”
“하나님께서 제게 그렇게 말씀하신 걸요.”
“뭐, 하나님이 네게 말씀하셨다고? 말도 안돼! 너는 만나 보지도, 함께 이야기하지도 못할텐데!”
소녀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젊은 신사를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누가 아저씨께 하늘에 태양이 있다고 이야기해 주던가요?”
“그건 당연한 말이 아니니? 난 저 햇살이 좋단다.”
“그래요! 아저씨 말씀이 옳아요. 그렇게 아저씨가 태양을 느끼듯 저는 하나님을 느껴요! 제가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께서는 저를 따뜻하게 해준답니다. 제가 이 성경을 읽어서 얻은 저 햇살과 따스한 마음은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제게 줄 분이 없지요!”




현대 과학으로 증명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예수의 부활이 현대 의학으로도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의 발달된 의술은, 얼마든지 인간 복제가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유전자를 냉동실에 보관해 두었다가, 백년 또는 천년 후에 꺼내서 복원하면, 그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가 없겠는가?
이제 우리는, 부활 여부에 대한 의문은 깨끗이 버리고, 부활 이후에 있을, 주의 심판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냥 죽고 마는 것이 아니라, 신 불신(信 不信)간에 모든 사람은 부활하여, 주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 더욱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또한 과학으로 거의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 ‘디지털’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정보 처리 방식을 말하는데, 글과 그림, 또는 소리를 0과 1이라고 하는 숫자로 표현하여 계산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말한다면, 사람의 음성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도, 단지 0과 1이라는 숫자만을 가지고, 표현할 수 있다. 거꾸로, 숫자로 된 사람의 말을,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재현할 수가 있다.
아무튼, 이런 과학적인 이야기는, 더 이상 말 할 필요가 없겠다. 다만, 사람의 음성을 기계가 알아듣고, 그대로 수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자 그림을 그려라!’ 하면, 컴퓨터가 사자 그림을 그린다. 뿐만 아니라, 컴퓨터가 부착된 로봇에게 ‘커피를 끓여라!’ 하면 커피를 끓이고, ‘밥을 하라!’ 하면 밥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꿈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하실 때에, ‘말씀하신 대로 이뤄졌다’고 하는 성경 말씀은 진실이다.
-자료제공 정수환 목사-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The end of self is begining of God)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가 된다“ (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




보이지 않는 힘(하나님의 섭리)


경제학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마틴 후리드만의 「선택의 자유」라는 저서에 보면 이제 앞으로의 새 시대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했다. 이 ‘보이지 않는 힘’이란 바로 새 시대의 가장 큰 힘이고 이 힘을 갖지 못하고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사회는 이 지구상에서 살아 남지 못하고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도대체 이 보이지 않는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영국의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한스 싱거’ 박사는 이 보이지 않는 힘의 정체를 사람들의 마음의 자세로 규명한다. 마음의 자세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생산하고 만드는 사람의 마음속에, 그리고 그것을 파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업을 경영하고 운영하며 관리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얼마만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깊고 따뜻한 마음씨를 쓰고 있느냐가 곧 보이지 않는 힘이 된다는 말이다. 결국 새 시대를 이끌어 갈 ‘보이지 않는 힘’이란 기계 과학 문명이 아니라 그 문명을 이끌어 갈 인간의 마음 자세인 것이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이 ‘보이지 않는 힘’이란 역사를 만들고 이끌어 가는 사람들의 마음의 자세라고 했는데, 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 보이지 않는 힘이란 곧 하나님의 섭리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가능한 인간관계


근세의 유명한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현대인의 만남을 세 가지로 진단했다. 하나는 “그것과 그것”의 만남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마치 물건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차버린다. 남편과 아내의 만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생명이 없는 무인격의 만남으로 전락하고 있다.
또 하나의 만남은 “나와 그것”의 만남이다. 상대방이 나를 물건처럼 이용해도 나는 상대방을 끝까지 인격으로 대할 때 “나와 그것”의 만남이 성립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인간 관계는 “나와 너”의 만남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너를 인격으로 그리고 당신도 나를 인격’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당신을 인격으로 믿어 주고 당신이 나를 인격으로 믿어 주어도 우리들 사이에는 언제나 그 인격적인 만남이 깨질 수 있는 긴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너 사이에는 언제나 인간의 만남을 중매하는 하나의 촉매자가 필요합니다.” 부버는 그 촉매자를 “영원자 너”라고 이야기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원자 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인간 대 인간으로 부딪칠 때 상대방에게서 얼마나 많은 단점을 발견하게 되는가? 그러나 그리스도를 바로 만나고 그리스도를 통해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될 때 바른 인간관계는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


위대한 성가를 많이 작곡했던 조셉 하이든에게 하루는 어떤 사람이 물었다. “당신은 그 놀라운 음악을 작곡하는 영감을 어디서 얻습니까?” 하이든이 대답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주님! 주님이 내 삶의 주인입니다. 주님이 내게 지혜를 주셔서 내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곡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 앞에 드릴 것입니다’라고 기도 드립니다.”
그가 작곡한 곡 가운데 유명한 [천지창조]가 있다. 이 곡이 비엔나에서 공연되던 날이었다. 그때 하이든은 몸이 몹시 아팠었다. 그래서 이 위대한 곡이 공연될 때 그는 환자로서 뒤에 앉아 있게 되었다. 그날 지휘를 하던 지휘자는 정말 놀랍게 이 음악을 하나님 앞에서 지휘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지휘자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때 지휘자는 청중들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뒷좌석 발코니에 앉아 있는 하이든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입니다. 저분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고개를 돌려서 일제히 일어나 하이든을 향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이든이 갑자기 청중들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말했다. “아니오!” 그는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 이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렇다. 그는 평범한 음악가였지만 믿음의 눈을 열어 자기를 찾아 주시고 불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구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작곡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알렉산더와 예수


B. C. 350년경 알렉산더 대왕은 세계를 정복하고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그리스도와 알렉산더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은 젊은 날에 일을 시작하여 33세라는 이른 나이에 생을 끝마쳤다.


알렉산더는 왕국에서 태어났고,
예수는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더는 왕자로 태어났고,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알렉산더는 왕좌에서 고귀한 왕으로 죽었으며,
예수는 십자가에서 조롱받는 왕으로 죽었다.
알렉산더의 일생은 위대한 성공으로 보이고,
예수의 일생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소유를 위해 수십만 명의 피를 흘렸다.
예수는 전 인류를 위해서 자신의 피를 흘렸다.
알렉산더는 영광의 바벨론에서 죽었고,
예수는 수치의 갈보리에서 죽었다.
알렉산더는 모든 왕국을 정복하였고,
예수는 죽음을 정복하였다.
알렉산더는 모든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고,
예수는 모든 인간을 자유롭게 하였다.
알렉산더는 역사를 만들었고,
예수는 역사를 변화시켰다.




예수님의 자리


다음은 어느 목사님의 간증이다. 미국에서 한 가정의 초청을 받아 가서 재미난 일을 목격하였다. 식탁에 의자가 죽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꼭 비워놓았다. 한 번은 내가 그 의자에 앉으려고 하니 그 집 꼬마가 앉으면 안 된다고 깜짝 놀랐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 의자는 예수님의 의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정의 어린이들은 그 의자를 향해 앉아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들의 부모가 그렇게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이 집 어린 형제 둘이서 싸우다가 갑자기 형이 동생을 툭 치면서 “야! 조용히 하자. 예수님이 들으신다.”라고 말한다. 이들의 부모는 그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의 훈련을 잘 시켰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요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요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




예수님의 얼굴


2차대전 말기 눈에 덮힌 중국의 오지를 의심에 잠긴 한 사나이가 말을 타고 가고 있었다.
그는 말 등에 실려, ‘오오 주여, 주의 얼굴을 한 번 보기만 했으면 저는 믿겠습니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때 즉각 그의 마음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사진을 찍어라, 사진을 찍어라.”
그곳은 눈이 녹기 시작하여 이곳 저곳에 검은 땅이 나타나 보기에 흉한 들판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려오는 명령을 따라 그는 말에서 내려 그 장면을 그의 카메라에 담았다.
돌아와 그 필름을 현상하였을 때 거기에는 온유와 사랑이 넘치는 예수님의 얼굴이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진과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다.




원자탄을 막을 수 있는 무기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견한 이후, 그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졌고, 그로 인해 노벨평화상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지상에 평화는 없었다. 1945년에는 뉴멕시코 사막에서 태양의 천 배가되는 섬광을 발하면서 최초의 원자탄이 폭발되었다. 미국의 의회에서 오펜 하이머 박사가 이 무서운 무기에 대해서 설명했을 때 의원들은 그 것을 막는 무기는 없는가 하고 물었다. 그때 박사는 그 무기는 바로 평화라고 대답했다. 역사가 토인비는 문명이 다시 치료되고 구원받을 수 있는 열쇠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화해가 되고 평안이 되고 평화가 된다.




세 종류의 인간


오직 세 종류의 인간이 있을 뿐이다.
신을 이미 발견하고 신에 봉사하고 있는 사람,
아직 신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신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
신을 발견하지도 못했고,
신을 구하려고 하지도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첫 번째 사람들은 도리에 살고 행복하다. 마지막 사람들은 어리석고 불행하다. 그 중간 사람들은 불행하지만 도리에 맞는다.
(파스칼의 팡세에서)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1)


황해도 재령에 정찬욱이라는 장로가 있었다. 자기 집을 지으려고 기도하던 중, 장로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난 후에 내 집을 지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500석을 추수하는 부농이었던 정 장로는 1년 수확 모두를 바쳐서 성전을 지어놓고 자기 집을 지었다. 그는 자기보다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뿐 아니라 자기 교회 목사님의 생활비와 식미와 목화 100근씩 26년간을 드렸다고 한다.
그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생각했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 목사님을 존경하며 뒷바라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 장로는 더욱 풍성한 축복을 받아 큰 부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섬기며 충성하는 이에게 복을 주신다.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2)


소련이 공산주의의 종주국으로서 냉전 시대의 양극화 체제를 형성하며 한창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천년을 넘긴 역사적 전통을 가진 러시아 정교회의 뿌리가 쉽사리 뽑힐 리가 없었으나, 그 냉엄한 철의 장막 아래에서도 신실한 기독교인들의 지하 교회가 살아 있었다.
어느 날 교인들이 은밀하고 깊숙한 창고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창고 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겁에 질린 교인들은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체념과 함께 단단히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열어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련군인 두 명이 기관단총을 들이대고 뛰어들었다.
“꼼짝 말고 손을 들어라! 너희들이 이 곳에서 모인다는 소식을 벌써부터 듣고 있었다. 너희들은 이제 끝장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살기를 원한다면 이 곳을 빠져나가라. 나가는 자는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거부한 줄로 알고 살려 주겠다. 그러나 남은 자들은 다 죽을 각오를 하라. 모두 사살하겠다.”
군인들의 이 서슬 푸른 기세에 더러는 일어서서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하지만 많은 교인들이 요동 없이 담담히 앉아 있었다.
생사의 갈림길에 대한 선택이 끝나고 난 다음, 그 군인들은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 성도들이여! 용서하십시오. 여러분들이야말로 참 기독교인입니다. 우리 또한 기독교인입니다. 같이 예배를 드리려고 찾아왔는데, 행여 이 안에 비 기독교인이나 첩자가 있을지 몰라서 그들을 내보내기 위해 한 짓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가짜들은 다 나갔으니 안심하며 예배를 드리십시다.”
그리고 그들은 낮은 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순교를 각오하고 그 자리에 남았던 참된 신앙의 사람들은, 뜨거운 감사의 기쁨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시험과 환난의 강한 바람 앞에서, 알곡과 쭉정이는 서로 구별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증명한 사건이었다.




현재의 신앙


‘과거에 잘 믿었다’ 는 말이나 ‘미래에 잘 믿을 것’ 이란 말은 모두 가치 없는 말이다. 삼손도 한 때는 하나님의 일을 했고, 사울왕도 한 때는 예언까지 했고, 느부갓네살왕은 간헐적으로 신앙고백도 했고, 가룟 유다는 회계 일을 보면서 전도 사업에 시간과 정력 그리고 관심도 표현했고, 자살한 만한 위신도 알고 철면피를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 유대인의 아들로 신학교 1년 중퇴한 스탈린도 성경은 제법 알았고 논리도 정연했다. 과거와 미래가 없는 사람이 현재를 인정할 수도 없고, 미래를 기대할 인물도 못되나 미래에 자기 신앙을 거는 것처럼 자기기만은 없다. 신앙은 현재의 결단이요, 과거의 후회도 미래의 호언장담도 아니다. 신앙이란 오늘이란 순간에 생명을 걸고 금을 구하는 자가 험한 금광으로 돌입하듯 진주를 위해 해저로 다이빙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커스 연기자가 자기의 던진 그네가 반작용으로 다시 자기에게 돌아올 것을 믿고 공중 수십 피트에서 미리 자기 몸을 던지는 것이다.




독실한 믿음만 있으면


시골 교회에 믿음이 독실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군에서 제대하고 시골에 머무르면서 쇠퇴해 가는 농촌과 시골 교회를 위하여 미력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일거리를 찾던 중 야산을 헐값에 매입하여 그것을 개간하였다. 그곳을 개간하는 데 삽이 다섯 자루나 낡아버렸다. 청년은 그 개간지에 콩과 깨를 심었다. 그해 우로혜택(雨露惠澤)이 좋아 가을에 가서 큰 수확을 거두었다. 결국 그는 큰 밑천을 마련했고 그 개간지에 과수 묘목을 심어 수년 후에 큰 부농이 되었다. 청년은 빈약한 농촌 교회를 위하여 큰 몫을 담당하는 인물이 되었다. 청교도인들의 정신만 있으면 어디서나 또 누구나 다 성공을 할 수 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다음은 어느 목사님의 간증이다. 이분이, 아주 어렵사리 신학을 마치고, 어떤 교회의 전도사로 있을 때였다.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만 갖고서는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따로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신학은 했지만, 사명감이 그리 투철하지 못했었노라고, 그 목사님은 말했다.
어느 날 아침, 세수를 하다가 각혈을 하게 되었다. 병원에 가 보니, 폐병 3기였다. 한쪽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병원에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럴 때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알게 된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이런 경우에는 큰소리 칠 수 없다. 주님 앞에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다. ‘당신 뜻대로 하소서!’하고, 주의 심판만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기에, 사는 것도 주의 뜻이고 죽는 것도 주의 뜻이다.
그러나, 그 전도사님은, 아내와 세 아이를 그대로 두고 죽을 수가 없었다. 당신 한 몸 죽는 것은 괜찮지만, 처자들의 앞날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보기로 했다.
한얼산 기도원에 올라갔다. 1주일 동안, 금식을 하며 열심히 기도했다. 그러나, 아무 응답이 없었다. 마침, 추석을 앞둔 때이고 얘들도 보고 싶어서, 집에 돌아오고 말았다. 하지만, 사모님이 그냥 두지 않았다. 당장 다시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계속하라고 재촉했다.
할 수 없이, 그 다음날, 전도사님은 다시 기도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정말 본격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예, 자리 뜰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기도만 했다. 거의 탈진 상태가 되었을 때, 비몽사몽간에, 커다란 불 방망이가 자신을 향하여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그 불 방망이를 맞고 쓰러져 기절한 채, 꼬박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깨어나는 순간에, 시커먼 그 무엇이 자신에게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즉시로, 전도사님은 하산했다. 병이 나았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찍어 보니, 구멍이 사라지고 없었다. 의사도 깜짝 놀랬다. 그 의사가 바로, 그 전도사에게 사망 선언을 한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는 어떤 걱정이나 염려를 하지 않았다. 주께서 함께 하시면,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한 까닭이다. 그리고, 주의 말씀도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다. 인쇄소도 때려치우고, 목회에만 전념했다. 




신앙은 모험


신앙은 목숨을 건 모험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여러 가지 난관을 만날 때가 있는데 이때는 모험적 신앙이 필요하다. 청교도들은 범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그들은 신대륙 아메리카의 건설자가 되었다.
혈혈단신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건너가 탐험하며 복음을 전파한 리빙스톤은 만난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미개한 대륙에 폈다. 그는 그의 일생을 아프리카 선교에 바쳤다.
중국 내지 선교에 담대히 들어가 선교회를 조직하고 복음을 전파한 허드슨 테일러는 아무 후원자도 없이 오직 하나님만 믿고, 그 믿음으로 중국 내지 선교를 성사시켰다. 이것은 모험적 신앙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홀로 아프리카 정글 속에 들어가 흑인들의 병을 고쳐 주며 봉사하던 알버트 슈바이처는 백인들의 흑인들에게 저지른 죄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선교와 봉사에 생애를 바친 성자이다. 신앙은 이 같은 모험을 감행할 때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생의 험한 길을 무릅쓰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나아가지 않는 신앙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할 수가 없다.




고문을 극복한 아들


루마니아 공산당들이 목사 한 분을 잡아와서 예수를 부인하고 공산당을 지지하라고 심한 고문을 가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극심한 고문을 참으면서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다.
악독해진 공산당들은 그 목사님의 아들인 14살 난 알렉산더라는 아이를 데려왔다. 이 아이를 아버지 앞에 세워 놓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주면서 아버지가 항복할 때까지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아이의 참혹한 광경을 본 목사님은 견딜 수 없어서 “내 아이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 마시오. 내가 항복하겠소.”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은 고개를 쳐들고 사력을 다하며 부르짖기를 “아버지, 아버지가 예수를 부인하여 내가 산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부인한 목사 아들이란 말을 듣기는 싫어요. 아버지, 예수를 부인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했다. 이 부르짖음을 들은 아버지는 아들의 믿음에 용기를 얻어서 다시 공산당을 욕하고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화가 치솟는 공산당들은 어린 알렉산더를 더 심하게 매질하여 숨지게 하고 말았다. 이 귀한 어린 심령의 믿음, 얼마나 장한가?




하나님과의 관계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나 자신의 노력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갖가지 어려운 환경과 여건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힘이 아닌 다른 힘이 필요한 것이다.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 출신으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았으나,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으로 늘 괴로움을 겪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가던 중 한 농부를 만났는데, 그 얼굴에는 유난히도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그 농부에게 가서 평화스런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언제나 내 마음은 기쁠 뿐이다”라고 했다. 그 말은 들은 톨스토이는 그 날부터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 후 그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과거의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다”라고 까지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다.




믿음의 법칙


믿음의 힘은 핵 폭탄과 다를 바가 없다. 성경은 믿음으로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한다. 믿음으로 불치의 병도 치료되었고, 파도치던 바다도 잠잠해졌고, 죽은 자도 다시 살아났다.
다이너마이트를 건설에 사용하면 1년이 걸릴 난공사도 열흘이나 한 달에 해치울 수 있지만 그것을 잘못 다루어 폭발하면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가져오듯이, 믿음의 힘 또한 가공할 만한 파괴력도 엄청난 창조적 능력도 지닐 수 있다. 믿음을 선용하면 개인적으로 엄청난 축복을 누리며, 인류에 기여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다이너마이트를 조심스레 다루어야 하듯이, 믿음의 힘 또한 신중하게 쓰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열매를 거둘 욕심에 너무 서두르지 말라.
훈련병에게는 익숙해질 때까지 실탄을 주지 않는다. 처음에는 빈총만 준다. 괴물처럼 느껴지던 총이 손에 익숙해지고 사용법이 능숙해져야 실탄을 주어 사격 연습을 시킨다. 총과 실탄을 처음부터 동시에 주게 되면 여기저기서 오발 사고가 잇따라 인명 피해가 속출할 것이다.
믿음의 힘을 너무 성급하게 발휘하려 들면 문제가 생긴다. 믿음의 힘 자체는 강하지만, 그 힘을 적용하기까지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힘을 자동차 엔진에 비유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엔진은 동력이다. 힘이 있다. 그러나 엔진만으로는 굴러가지 않는다. 타이어까지 연결되어야 하고, 연료를 넣어야 하고, 누군가가 운전을 해야 한다. 믿음의 힘이 실생활 속에서 금방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엔진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둘째, 이기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기적이라는 것은, 이익을 얻은 당사자와 더불어 불이익을 당하는 편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힘의 사용은 이타적일 때 오히려 유익으로 돌아온다. 하나님께서는 나누는 자, 베푸는 자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신다고 성경은 명시하고 있다. 아무리 아껴도 부족해지고, 충분하게 베풀어도 넉넉해지는 것이 물질 흐름의 원리이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4-25)
궁극적인 목적을 이타적인 데에 두면 믿음의 힘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이기적일 뿐이면 한계에 부디친다. 하나님의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셋째, 믿음의 힘을 가두어 두지 말라.
권투 선수가 매일 일정량의 연습을 하지 않으면 금방 체중이 불어나고 둔해져서 선수로서의 수명이 다하게 된다.
새 집도 사람이 살아야 수명이 길어지고, 비워 두면 빨리 망가진다.
아무리 비싼 기계라도 멈추어 두면 녹슬어 폐물이 된다. 그러나 계속 사용하면 성능이 더욱 좋아진다.
믿음의 힘, 그것은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엄청난 능력이다. 그러나 간직하고만 있으면 그 힘은 점진적으로 위력을 상실한다. 그릇에 담긴 물도 시간이 가면 사라지고 만다.
믿음은 활용하면 활용할수록 그 힘이 증폭되고 극대화된다. 군인의 무장이 강화될수록 적을 이길 승산이 높아지듯이, 극대화된 믿음은 인생을 성공으로 이끈다.
무엇을 원하는가?
그 원하는 대로 된다고 믿는가?
믿는다면 그 믿음대로 행동하라. 행동하고 또 행동하라. 믿음은 자란다. 원하는 바가 2배, 4배, 16배, 32배로 기하급수적 증폭을 하는 것을 당신은 확인하게 될 것이다.




신앙의 뿌리


미국 뉴욕시 교육위원회에서 매우 흥미로운 교육자료 하나를 개발한 적이 있다. 그것은 신앙인과 불신앙인이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가에 대한 통계 수치였다.
위원회는 이 조사를 위해 두 사람의 표본모델을 선정했다. 한 사람은 프린스턴 대학 설립자이자 보수 신학자 에드워즈 요나단 목사였고, 다른 한 사람은 뉴욕에서 살롱 술집을 경영하여 거부가 된 무신론자 마크스 슐츠였다. 위원회에서는 이 두 사람의 후손들을 5대에 이르도록 면밀하게 확인하고, 그 개개의 인적 사항을 컴퓨터에 입력하여 통계를 추출했다.
에드워즈 요나단의 5대에 걸친 후손들은 모두 896명이었다. 그 중 선교사와 목사가 116명, 교사, 교수, 학장, 총장 등 교육자가 86명이었다. 이들 교육자 중에는 총장이 3명, 학장이 66명이나 되었는데, 그 총장 중에는 찬송가 246장 ‘내 주의 나라와’를 쓴, 예일대학의 총장 티모티 드와이트 박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밖에도 부통령이 1명, 상원 의원이 4명, 문학가 및 문필가가 75명, 발명가가 21명, 실업가가 73명 그리고 장로, 집사가 286명이나 되었다.
마크스 슐츠의 5대 후손들은 모두 1,062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평균 교도소 생활 5년 정도 한 사람이 96명, 정신병자 및 알코올 중독자가 58명, 창녀가 6명, 정부 보조 극빈자가 286명, 불학 무식한 자가 406명이나 되었고, 이들이 사고를 쳐서 연방 정부의 예산을 낭비한 금액이 무려 1억 5천 만 불이나 되었다.
이 명약관화한 통계는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 사회, 나라가 자손 대대에 이르도록 복 받는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을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차원에서도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도대체 무엇으로...


학생은 자신의 실수를 지우개로 지웁니다
의사는 봉합하고 붕대를 감아서 감춥니다
건축가는 벽을 쌓고 칠을 해서 가립니다
농부는 가래로 흙 속을 묻어 버립니다
하지만 신앙의 실패는 도대체 무엇으로 덮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구원의 밧줄을 붙잡는 것


전에 나이아가라 폭포 상류에서 배가 한 척 뒤집혔다. 그 배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을 구하려고 강가에서 밧줄을 던졌다. 그랬더니 한 사람은 그것을 붙잡고 살아 나왔는데 다른 한 사람은 밧줄을 붙잡지 않고 때마침 떠내려오던 큰 통나무를 붙잡았다. 그랬더니 그 나무는 사람을 실은 채 폭포로 떨어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그 나무토막은 강가에 있는 사람과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나무가 크기는 했어도, 붙잡기는 좋았어도 구출 받는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와 같이 인간의 공로나, 희생이나, 수양이나, 지식은 다 좋아 보이기는 하나 구원을 받게 하지는 못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의 위대한 손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믿고 행하라


화재의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소년이 불길을 피해 2층 지붕 위로 올라갔다. 밖으로 급히 피신한 아버지는 “얘야, 내려. 아빠가 받을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연기가 위로 치솟았기 때문에 소년은 아버지를 볼 수가 없었다.
“아빠. 보이지가 않아요. 아빠가 보이지 않아요.”
겁을 먹은 소년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년의 아버지는 “얘야, 용기를 내어 뛰어 내리렴. 난 너를 볼 수 있단다. 아빠를 믿으렴”하고 소리쳤다.
결국 소년은 아버지를 믿고 연기 속으로 뛰어 내렸고 살아났다. 믿음은 현실을 보지 않고 전능자에게 의탁하는 것이다.




결단하는 믿음


큰 양조장을 경영하는 분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마음속에 생각하기를 남을 죄짓게 하는 이 사업을 그만둬야겠다 생각하고, 그 수입이 많은 양조장을 그만 두는 것도 보통이 아닌데 그는 은혜 받은 그 길로 집에 돌아와서 도끼로 술이 들어 있는 큰항아리를 다 깨뜨려 버리고 말았다. 그랬더니 그 동네 도랑에 그날은 술이 콸콸 흘러내렸다. 동네 사람들은 아깝다고 했으나 그는 과감히 끊을 것을 끊었던 것이다. 후에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운명하는 날 밤 동네 사람들이 보니까 그 집 지붕에서 불이 활활 타고 있더라는 것이다. 실제로 타지는 않았으나 물통을 들고 뛰어갈 정도로 불타는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그가 열심 있게 신앙생활을 하였던지 성령의 불이 크게 그 집에 임하였던 것이다.




믿음은 에너지 원천


믿음이란 곧 힘이고 에너지이고 능력이다.
내가 잘 아는 분의 아들은, 키가 170센티인 아버지보다 5센티쯤 더 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아들은 그때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165센티였다. 그런데 불과 1년 사이에 아들의 키는 아버지와 같아졌다.
“두고 보셔요. 앞으로 1년 안에 5센티 저 자랄 테니까요.”
아들의 그 확고한 믿음은 그 아버지의 농담을 통해 나에게 전해졌다. 그때 내가 말했다.
“자네 아들의 믿음이 그렇다면 그렇게 될 테니 두고 보게.”
지금 그 아이의 신장은 175센티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우연의 일치일까? 결코 아니다. 믿음대로 된 것이다.
믿음의 적용은 창조적인 것에든 파괴적인 것에든 마찬가지로 유효하다. “나는 하는 일마다 안 돼. 운이 없는가 봐. 이번에도 하나마나 실패할걸.” 이런 사람은 그의 믿음대로 실패의 삶을 산다. 그러나 “난 과거에 실패를 거듭했어.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 그러나 이번만은 꼭 성공할 거야. 성공을 이렇게 확신하고 있는데...” 하는 사람은, 그의 믿음이 감정적인 차원이 아니라면 반드시 적중한다.
직장인이라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무능해서 영원히 말단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늘 그 모양 그 꼴로 지내게 된다. 나는 동료들 중에서 가장 먼저 과장이 된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정말 그렇게 되고야 만다. 왜 그럴까?
믿음이 있으면 그것이 어떠한 믿음이든 언젠가는 행동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무능을 믿으면 진급할 수 없는 행동을 나타내게 되고, 유능을 믿으면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하게 된다.
뾰족한 처방을 하지 않아도 좋을 가벼운 질병의 환자에게 의사는 때로 증류수를 주사하기도 한다고 한다.
“주사를 맞았으니 이젠 아프지 않을 것이오.”
의사의 이 말을 믿는 환자는 신통하게도 배앓이나 두통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 의사 정말 용해.”
그러나 실상은 의사의 처방이 환자를 낫게 한 것이 아니라 환자의 믿음이 환자를 낫게 한 것이다.




깨닫는 그 순간


오랫동안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한 바 있는 허드슨 테일러에게 어느 젊은 중국인 신사가 찾아와서 물었다. “저는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으로서 정식으로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성경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아야 하며, 둘째 신앙의 연조가 몇 년이나 되어야 합니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테일러 목사는 이렇게 반문했다.
“램프의 심지가 얼마 동안 타야 빛을 내지요?”
“그야 물론 심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빛을 내지요.”하고 신사가 대답했다. 그때 테일러 목사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이며, 또 몇 해 동안 교회 생활을 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램프의 심지에 불이 붙는 순간부터 빛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의 연조가 별로 없다고 해도, 그리고 성경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주시고 필요한 인간으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겸손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남녀노소,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벌써 빛이 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벌써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다?” 테일러 목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사는 기쁨이 가득한 채 돌아갔는데 후일 중국의 교회를 위해 크게 공헌하는 인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용납되는데 무슨 조건이 필요할까? 단지 가난한 마음으로 용납해 주심을 감사하며 나아갈 때 주님의 용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인을 전도한 머슴의 믿음


천원군에 살던 머슴 이씨는 가난한 중에도 열심을 다하는 주님의 성도였다. 교회 예배에 열심히 참예하면서 주의 일을 잘 받들었는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게 되면서 원하는 대로 교회 일을 하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기게 되었다. 머슴살이 첫 해 맥추 감사절이 되었는데 교회 예배에도 참예치 못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그 날 밤은 한잠도 못 자고 머슴방에서 울면서 기도하였다. “주여 나로 하여금 주일도, 절기도 제대로 지킬 수 있게 도와주소서.”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주인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다음 해가 되었다. 여름 보리 추수 후에 교회에서 지키는 맥추 감사절에 참예하고 싶다고 주인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거절당했는데 몇 번 부탁한 후에 허락을 받았다. 다음은 예물을 드려야 되겠는데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서 다시 주인에게 말했다. 마침내 보리 한 가마를 주어서 그것을 져다가 예물로 바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주일 그 교회에서는 큰 변화가 있었다. 주인과 머슴이 같이 절기를 지키는 주일이 되었고, 머슴 이씨에게는 적은 것으로 바쳤는데,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 주일이었다. 그 후에 이씨 머슴은 주인집을 다 구원했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해져 교회를 잘 받들었다.




믿기만 하면


어느 전도 집회에서 전도자가 모든 집회를 끝내고 있을 때, 한 젊은이가 급히 달려와서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 내가 구원받으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에 그 전도자는 대답하기를 “젊은 친구, 너무 늦었어. 이미 늦었어, 이미 늦었다니까”라고 했다. 그 젊은이는 또 물었다. “이 전도 집회가 끝난 뒤에 왔기 때문에 늦었다는 말씀인가요?” 그 전도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젊은이, 자네는 구원받고 싶으면 무언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미 수천 년 전에 구원의 역사는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다네. 지금 자네가 구원받기 위해 할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고 다만 무릎 꿇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이미 행하신 일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네.” 그러자 그 젊은이는 무릎 꿇고 기도를 드렸다. 그때 밝은 빛을 보았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




믿음의 대상은 나 자신


갑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하늘의 구름이 돈으로 바뀌어서 내 앞에 떨어졌으면 좋겠다. 만 원짜리로 바뀌면 적어도 1천억 원은 될 거야.”
그 앞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을이 갑의 말을 받았다.
“일 천억? 와! 그걸 다 뭐해? 나에게 반만 주겠니?”
그러자 코웃음치는 갑.
“웃기지 말아. 왜 네게 반을 주니?”
“그럼 10분의 1만 줘.”
“안 돼.”
“야. 그럼 백 분의 1만 주겠니?”
“백 분의 1이라도 10억인데, 10억을 왜 그냥 주니?”
“그래 그럼 1억은 주겠니?”
“야 임마, 1억은커녕 땡전 한푼 못 준다.”
“넌 애가 왜 그리 인색하냐? 1천억이 공짜로 생기는데 1억 원도 못 줘?”
“이 벼엉신아, 너도 저쪽 구름을 차지하면 1천억이 될 수 있는데 왜 내 것만 가지고 그러니?”
우스개 소리 같지만 하나도 우습지 않다. 오히려 바짝 긴장된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갑처럼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을처럼 소극적이고 구걸형인 사람도 있다. 갑은 1천억을 꿈꾸는데 을을 고작 1억 원을 구걸하고 있다.
그들이 바라본 것은 뜬구름에 불과하다. 그러나 같은 뜬구름이라도 두 사람의 입장은 대조적이다.
갑은 구름 속에서 1천억을 잡을 수 있다고 상상할 만큼 꿈이 크다. 그는 구름이 1천억으로 변해서 자기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모습을 바라본다. 상상이 아니라 실감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냥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러니 출생의 순간부터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숨쉬는 일부터 내가 해야 한다. 누가 내 대신 숨쉬지 못하고 먹어 주지 못한다. 살고 싶은 한 내가 숨쉬고, 내가 먹어야 한다. 늘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건강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사람은 자기를 믿어야 한다. 삶의 가치를 믿고, 내 앞에 닥칠 모든 일을 척결해 나 갈 수 있는 나 자신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능력이나 존재 의의에 회의가 생긴다면 행복도 성공도 등을 돌린다.
사람에게 우연히 닥쳐오는 일이 있을까. 당신의 현재 상황은 당신의 지식, 감정, 성격, 믿음, 그리고 당신이 과거에 쌓아온 일들에 대한 총집계일 뿐이다. 또한 과거의 결과인 현재에 대해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
당신 자신에 대한 믿음 여하에 따라 1천억의 인생도, 구걸하는 인생도 될 수 있다. 성취의 인생으로 올라설 수도 있으며,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달콤한 인생이 될 수도 있고, 쓰디쓴 인생이 될 수도 있다. 믿음 여하에 따라 능력있는 사람도 되고 무능한 사람도 되며, 성공인이 되는가 하면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당신의 친구가 1천억을 가졌어도 당신의 것은 아니다. 설령 1천 분의 1을 나눠준다 할지라도 그건 당신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친구의 자선 여하에 따라 당신의 삶의 질이 달라질 수는 없지 않은가?.
믿음의 대상은 당신의 부모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바로 당신 자신이다.














워너 메이커의 성공담


백화점 왕 워너 메이커에게 어느 신문기자가 인터뷰하며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당신으로 하여금 오늘날 성공에 이르게 한 어떤 비결이 있었습니까?”
그때 워너 메이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가 11살 때 시골에서 올라와 작은 주일학교에 나가게 되었다. 그때 주일학교 선생님이 성경을 사라고 해서 2불 75센트를 주고 붉은 가죽으로 장정된 성경을 샀다. 그것이 오늘날 나를 구원에 이르게 했고 오늘의 복을 받도록 했다.”




효과적인 성경 읽기를 위한 방법


① 기도로 시작하라.
성경을 읽을 때 당신의 마음이 열리도록 기도하라.
② 그 날의 잠언을 선택하라.
매달 그 날짜에 해당하는 잠언을 읽어라. 예를 들어 그 달의 첫    날에는 잠언1장을 읽어라.
③ 성경을 읽을 때는 연필을 이용하라.
그 날의 잠언을 읽을 때 당신의 눈에 띠는 구절에 밑줄을 그어    라.
당신에게 와 닿는다고 생각되는 구절에 동그라미를 표시하라.
④ 깊이 있게 읽어라.
당신이 표시한 구절과 관련된 관주를 찾아 읽어라. 주석이나 해    설서 읽기는 자제하라.
이렇게 성경 말씀을 찾으며 읽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말    씀으로 당신에게 이야기하실 것이다.
⑤ 당신이 읽은 구절에 관해 질문을 하고 그 질문을 기도로 하     나님께 아뢰어라.
  ♠ 이 질문이 어떻게 나에게 연관되어 있는가?
  ♠ 하나님께서 내 삶 가운데 바뀌길 원하시는 부분이 있는가?
  ♠ 이 구절에서 내가 무엇을 찾을 수 있는가?
⑥ 성경 말씀 중 한 구절을 암기하라.  
⑦ 당신이 암기한 구절을 놓고 기도하라.
암송한 구절을 가지고 당신과 타인을 위해 기도하라.
⑧ 기록하라.
공책이나 성경에 있는 여백에 당신이 한 기도를 짤막하게 써 넣    어라. 그것 옆에는 날짜를 써라.
나중에 보더라도 당신이 기도한 것이 무엇인지 기억할 수 있도    록 쓰는 것이 좋다.
⑨ 응답을 기록하라.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실 때 당신의 기도 옆에 메모를 하라.
하나님의 응답은 당신이 매일 기도하는 것을 도와 줄 것이다.
잠언을 주제로 기도하는 것을 마친다면 시편이나 서신서를 같은    방법으로 읽도록 하라.




뽀나 목사의 ‘성경 예찬 詩’


내가 피곤할 때 성경이 나의 침대가 되고,
내가 어둠 속에 있을 때에 성경이 나의 빛이 되고,
내가 굶주릴 때에 성경이 나의 떡이 되고,
내가 무서울 때에 성경이 나의 갑옷이요,
내가 병들었을 때에 성경이 나를 고쳐주는 양약이 되며,
적막할 때에 성경에서 내가 많은 친구를 찾는도다.


만일 내가 일하려면 성경의 나의 기구요,
놀 때에는 성경이 나의 즐거운 풍류로다.
만일 내가 무식하면 성경이 나의 학교요,
만일 내가 빠지게 되면 성경이 나의 굳은 땅이로다.
만일 내가 추우면 성경이 나에게 열이 되며,
만일 내가 떠오르면 성경이 나의 날개로다.
성경은 나의 지도자, 의복, 피난처, 꽃동산, 태양, 샘물, 신선한 공기로다.


위대한 책이여!
위대한 책이여!




성경을 생활 이념으로 삼는 미국의 대통령들


미국 사우스다코다주에는 러시모어라는 유명한 산이 있다. 이 산의 정상에 있는 화강암 벽에는 미국 대통령들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했던 네 명의 대통령인 조지 워싱톤, 토마스 제퍼슨, 데오도르 루즈벨트 및 에이브라함 링컨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 조각상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도 더 큰 것으로 워싱톤 대통령의 머리만 해도 건물의 5층 높이인 18미터이며, 그 전체 높이는 42미터나 되는 것이다. 이는 1927년에 시작하여 14년 이상 걸려 조각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조각상 중의 하나이다.
여기에 조각된 인물들의 위대한 점은 하나같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그들의 생활 이념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조지 워싱톤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자리에서 “성경이 아니면 세계를 다스릴 수 없다.”고 하면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였다.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서의 작성자로서 “미합중국은 성경을 반석으로 삼아 서 있다”고 강조하였다. 링컨은 가난하여 제대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나 성경을 그의 곁에 두고 부지런히 읽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힘을 썼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는 집무하는 책상 위에 늘 성경을 두고 읽었으며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말하였다. 루즈벨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부모 밑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미국 대통령 가운데 최 연소자로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는 말하기를 “어떠한 방면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든지를 막론하고 그가 자기의 생을 참되게 살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에게 성경을 연구하라고 권하겠다.”고 했다.




말씀(생수)의 기갈


21세기의 전쟁은 석유도 정치도 아닌 물을 둘러싼 전쟁이 될 것이라고 세계 은행은 벌써부터 으름장이다. 몇몇 통계가 그 심각성을 예고한다. 세계를 통 털어 물의 수요는 21년마다 배로 늘고 있다. 물 부족으로 국민 건강과 경제가 위협받고 있는 나라는 현재 80개국에 이른다. 세계 인구의 40%인 20억 인구가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하고 있다. 중동ㆍ북아프리카ㆍ중국 북부ㆍ인도 남부ㆍ멕시코 등지에서 물 부족이 날로 심각해지고 2025년까지 1인당 공급 가능량은 80%까지 떨어질 전망이다.
식량 생산에 경작지 부족보다 농업용수 부족이 더 큰 위협으로 등장하고 있다. 세계 인구의 40%가 2백 50개 강 유역에 맞대 살고 있다. 흐르는 강물에 국경이 분명치 않고 상류가 하류 지역 국가간에 물을 둘러싼 긴장과 적대감은 갈수록 고조된다. 나일ㆍ니제르ㆍ티그리스ㆍ메콩ㆍ브라마푸트라ㆍ갠지즈ㆍ인더스 강의 유역에 국가들은 서로 많은 물을 끌어쓰기 위해 쟁탈전을 벌인다.
물의 부족 상태는 우리에게 앞으로 많은 어려움을 안겨 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다른 갈함이 있으니 말씀의 부족이다. 성경은 이미 예언하고 있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암 8:11)


영혼의 생수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는 시원한 생수 한잔은 아침 기분을 특히 상쾌하게 해 준다. 아침 약수터에서 갓 받아 온 생수는 먼 수원지로부터 끌어와 수도국에서 처리를 거친 후 수도관을 통해 집까지 오느라고 많은 시간을 소비한 늙은 수돗물에 비해 얼마나 젊고 싱싱한가!
우리는 일생 동안 대략 물을 3만 리터 정도 마신다. 인체에 있는 동맥과 정맥의 총 길이는 10만km나 되며 그 속을 흐르는 피의 대부분(70∼80%)도 물이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몸에 갖고 있는 물의 2%만 잃어도 갈증을 크게 느끼게 되며 갑자기 7%정도를 잃으면 혈액순환이 멎고 죽게 된다.
물이 없으면 동물이나 식물의 그 어느 것이라도 살 수 없다. 물은 모든 호흡 있는 것들의 생명이다. 예수님은 영혼의 생수이시다. 일생 동안 마시고 마셔야 할 생수는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일생 동안 예수라는 생수의 물을 길어야 한다.
목마르고 목마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대인이다. 그들은 과학과 학문과 이성의 노예가 되어 있다. 우리를 진정으로 채울 수 없는 것들에 목을 매고 가르치고 배운 바 대로 예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 만약 이 땅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끝은 공허한 무덤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라를 일으키는 길


“나라는 망하고 민족은 분산되어 가는 이때 누구든지 이제는 방법이 없다. 이제는 왜나라의 정책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고까지 부르짖는 사람이 있게 되고 본즉 모든 점에서 낙망하게 되었다. 선생은 분연히 우리가 낙망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우리는 우선 정신상의 수양을 쌓아야 하고, 그 수양을 쌓으려면 예수교를 믿어야 한다 하여 동네에 예수 교회당을 짓고 목사를 모셔다가 설교를 듣고 교도를 모집한 지 얼마 아니 되어 수백 명의 교도가 모이게 되었다.”
위의 글은 남강 이승훈 선생과 함께 오산에 있으면서 신앙생활을 했던 김도태의 증언이다.       
민족과 인간의 진정한 성숙과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다. 남강 이승훈은 105인 사건으로 다년간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거의 모든 시간을 성경 읽기와 기도 생활로 보내었다. 신약 성경만 일 백 번 이상 읽었다. 남강 이승훈의 민족 역사에의 공헌은 이런 개인적 신앙의 성숙과 무관치 않으며, 이는 역시 말씀으로 변화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짜로 들을 수 있다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가 모처럼 야구 구경을 갔다. 몸에 감기 기운이 있어 잘 아는 의사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오렌지 쥬스를 많이 마시고 집에서 쉬면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소화가 잘 되는 음식으로 식사를 하라”고 일러주었다. 이 사람은 돌아와 그대로 했는데 며칠 후 그 의사에게서 계산서가 날아왔다. 집에서 혼자 조치를 했는데, 계산서를 보낼 수 있느냐 하며 화가 나서 잘 아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했다. 처방은 의사가 했으니 그 값을 지불해야 마땅하다는 말을 듣고 결국 돈을 지불해야 했다.
그런 후 얼마 있다가 또 계산서가 날아왔는데, 그것은 변호사로부터 온 것이었다. 전화로 상담을 했으니 그 값을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모든 문제와 일은 돈으로만 해결되는 시대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새삼스러워진다.




공격당하는 성경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 40:8).
세계 역사에서 성경만큼 많은 사람에게 애독되고 있는 책은 달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만큼 박해를 받아 온 책도 또한 없을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역사와도 관련되어 있다. 성경은 전세계 사람들의 영혼에 활력과 위로를 주어 왔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쓰여진 성경에는 분명히 사람을 돕고 구원할 능력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이 성경을 부정하고, 추방하거나 소각 처분해 왔다. 성경은 아무리 공격을 받아도 없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이나 중국, 북한 그리고 기타 사회주의 제국에서는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성경이 소각되고 공격을 받아 왔다. 그리고 현재도 성경을 인쇄하거나 공개적으로 매매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채우는 것은 사람이 만든 이데올로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자국 내에서 인쇄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서방측으로부터 많은 성경이 반입되어 전달되었다.




당신에게 성경은?


어떤 이는 “성경은 여행자의 지도요 순례자의 지침서이며 비행사의 나침판이요 병사의 칼이며 그리스도인의 헌장”이라고 했다. 조지 뮬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의 활력은 우리의 삶과 생각 속에 말씀이 얼마나 차지하고 있는지와 비율이 꼭 같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할 때 섬기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빈혈증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고 말 것이다. 반면에 말씀을 보는데는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섬기는 삶을 살지 못하면 소화 불량증에 걸리게 된다. 그래서 이 양자 간에는 항상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삶을 평가하는 하나님의 관리 책임서이다. 위로, 힘, 훈계, 교훈의 말이 없는 곳이 없다. 무디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관하여,
“만일 인내가 필요하면 조용히 앉아서 욥기를 상고하라. 강경한 사람이면 모세와 베드로에 대해 읽어라. 무릎을 끓고 기도하지 못하면 엘리야를 보라. 당신의 마음에 찬양이 없으면 다윗에게 귀를 기울이라. 정치가라면 다니엘서를 읽고,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보고, 소망은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하고, 사랑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다. 믿음, 소망, 사랑의 영양분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성경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 5:39)




2000년간 베스트 셀러-성경


인류 역사상 무수한 책들이 쓰여지고 읽혀졌지만, 가장 많이 팔리고, 가장 많이 번역되고, 가장 많이 읽혀지는 것은 역시 성경이다.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번역이 나오고 있고, 많은 경우에는 성경 번역을 위해서 새로운 문자가 만들어지기조차 한다. 많은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성경 배포를 금지했지만 실패했고, 심지어 북한 같은 사회에서도 성경이 새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물론 많이 팔리고 많이 읽힌다 하여 반드시 좋은 책은 아니다. 외설 잡지는 많이 팔리고 많이 읽혀진다. 그리고 오늘날 성경이 계속해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되고 있지만 팔린 만큼 읽혀지는지는 의문이며 읽혀진다고 하여 믿어지고 순종되어지는가는 더 더욱 의심스럽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경이 많이 팔리는 것과 외설 잡지가 많이 팔리는 것은 그 성격이 다르다. 근 20세기를 두고 계속해서 팔리는 외설 책은 없으며, 성경처럼 떳떳하게 팔리고 경건스럽게 읽혀지는 책은 없었다. 많이 팔리고 읽힌다고 하여 반드시 좋은 책은 아니라는 논리는 성경의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성경은 단순히 읽혀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되어지고 명상되어지고 순종되어진다.
성경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땅 위의 어느 다른 책이 성경만큼 많은 사람의 일생을 바꾼 것은 없었고 지금도 없다. 성경은 지금도 계속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새 사람이 되게 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




나를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지 마세요


아프리카 선교사인 로버트 마횃(Robert Moffat)은 이렇게 자신의 경험담을 말했다.
한번은 15마일이나 되는 먼 거리를 걸어서 한 여인이 나를 찾아왔다. 그 여인은 나에게 「신약성경」 한 권을 얻기 위하여 온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부인 죄송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책이 없으니 말입니다.”
“무어라고요! 그럼 나는 빈손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예, 안됐습니다만....”
“오! 저는 며칠 전 친구에게서 한 권의 책을 빌려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와서 다시 가져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나와 내 가족은 슬픔 가운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참다운 삶의 행복을 주는 책이 지금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장이 있는 시골 저편,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곳에 우리 가족만이 살고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삶에 대한 의미를 가르쳐 주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그 책을 읽는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 가서 우리를 위해 제발 책을 가져다 주세요. 분명히 어디엔가 한 권의 책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빈손으로 가게 하지 마세요. 제발 한 번 찾아봐 주세요.”
나는 매우 깊은 감명을 그의 얼굴과 이야기 속에서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잠깐 기다려 주세요. 다시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여기저기를 뒤져 한 권의 책을 찾게 되었고 그것을 그녀에게 가져다 줄 수 있었다. 만일 여러분이 그때 그 여인의 얼굴을 지금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여인의 얼굴은 광채가 번뜩였다. 얼마나 기뻤던지, 그녀는 나의 손을 꽉 잡고 거기에 쉴 사이 없이 입을 맞추고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 여인은 그 한 권의 책 「신약성경」을 가슴에 꼭 안고는 기쁨을 누리며 돌아갔다.




말씀을 사모하는 자의 행복


오래 전 옛날엔 성경을 가진다는 것은 거의 꿈만 같은 일이었다.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았고 종이가 없었던 때라 양피지나 혹은 파피루스에 기록을 했기 때문에 옮겨 적기도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성경이 대중화되고 널리 퍼진 것은 사실 위클리프의 순교자적인 번역을 위한 헌신이 있었기 때문인데 14세기 말에 위클리프가 처음 영역 성경을 펴내었을 때, 그때 역시 아직도 인쇄술이 발명되어 있지 않았었던 시기였다. 1454년경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소개되고 드디어 성경은 대중에게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뒤인 1563년에도 조지 폭스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에 들어 있는 한 편의 글을 사기 위하여 어떤 사람은 5마르크(대체로 지금의 5-6만원)를 지불하였다. 다소의 높낮이는 있었으나 그 당시에는 이 정도가 적당한 값이었다. 영어로 옮긴 야곱의 글이나 바울의 편지 몇 장을 사기 위해 건초를 산더미같이 준비한 사람도 있었다.”
성경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소중히 여겨졌는가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글이다.
1540년에 “그레이트 바이블”이 나왔을 때, “보너”라는 사람은 그 여섯 권의 책을 교회에 두었다. 그런데, 모두가 골똘히 그것을 일거나, 읽어 달라거나 하여 예배도 못 드리고, 군중들이 밀어 닥쳐 교통마저 혼란하게 되었으므로 보너는 무질서한 열광을 멈추지 않으면 성경을 가져가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조지 폭스는 사람들이 위클리프의 성경을 얼마나 열심히 읽었는지, 또한 성경을 손에 넣기 위하여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에 대해 말한 뒤에 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의 노고, 구도에 대한 노력, 타는 듯한 열성, 성경을 읽는 열심, 밤을 새우는 기도, 마음 따뜻한 집회...를 보면,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오늘을 사는 우리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진다.”




세계 공통어


미국 어느 교회의 교인인 훌톤씨가 한국에서 기차 여행을 할 때의 경험담이다.
기차 여행 중 앞자리에 앉아 있던 한국 노인이 훌톤씨에게 뭐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국어를 모르는 훌톤씨는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에 ‘예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훌톤씨도 그 노인에게 ‘예수’라고 하였더니, 그 노인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노인은 주머니에서 성경을 꺼내더니 한 곳을 찾아서 훌톤씨에게 건네주었다. 훌톤씨는 한국어 성경의 목차 순서를 보고, 자신의 성경의 어느 곳인가를 확인하고, 같은 방법으로 장과 절을 조사해 보니, 그 구절은 요한일서 3장 14절이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훌톤씨는 대단히 기뻐하며 자신도 성서의 한 구절을 펴서 그 노인에게 보여 주었다. 노인도 같은 방법으로 성서를 찾았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두 사람은 이렇게 성서를 통해 대화를 나눔으로써 서로 아주 친해졌다.
성경은 나라와 민족을 넘어 형제의 사랑을 교류시키는 사랑의 언어 역할을 한 것이다.




얼굴이 빛나는 이유


얼마 전에 나는 오랜 소원이던 나병 요양원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오게 되었다. 나로서는 위문을 한답시고 간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위문을 받고 온 꼴이 되었다.
그 중에도 A씨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다. 아마 50이 넘은 것 같았다. 두 눈이 안 보이고, 손가락 끝도 마비되어 혀로 점자(點字)를 읽는 것이었다. 그는 일어서는 것도 돌아눕는 것도 혼자서는 할 수가 없는 몸이었다. 물론 식사도 남의 손을 빌려야만 했다.
그 분이 혼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호흡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저 호흡하는 것밖에 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A씨의 얼굴은 빛나고, 기쁨에 넘쳐 있었다.
호흡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이렇게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자기 혼자서는 호흡하는 일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왜 이렇게 빛나고 있을까? 그 비밀의 열쇠는 그의 머리맡에 있는 점자로 된 성경이었다.
(삼포능자)




나를 붙드신 이 말씀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
(요한일서 2:27)


다음은 시인 송명희의 간증이다.
나는 어느 의사의 실수로 소뇌를 손상 당한 채 태어나 뇌성마비로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신앙심 좋으셨던 어머니는 그런 나를 고치시기 위해 기도회란 기도회는 모두 쫓아다니며 안수기도를 받게 하셨다. 온몸이 멍 투성이가 될 때까지 안수 기도를 받고 있노라면 그 고통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했다. 신비주의적인 예언 기도와 아줌마들의 그 극성스런 찬송 소리에 나는 그만 기가 질려 버렸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내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나에게 수모와 아픔을 당하게 만드신 하나님,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아무 것도 해주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급기야는 거부 반응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미칠 것 같았으나 미쳐지지도 않았고, 고통은 커 가기만 했다. 그렇게 힘든 가운데서도 나는 하나님께 한 번 더 의지해 보자는 생각에 교회를 찾았다.
“하나님! 제발 저와 만나 주세요! 제 모든 걸 다 드릴께요!”
이렇게 혼신을 다해 기도를 드렸을 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한 빛이 나타나 두루마리처럼 펼쳐지더니 한글도 영어도 아닌 생전 처음 보는 글이 적혀 있었다.
“하나님을 믿으라! 네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 죽으리라!”
이런 이상한 경험을 하고 난 뒤 나는 이 이상한 경험들이 무엇이었는지 알기 위해 기도를 작정했다. 기도를 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하나님과 가까워졌고 하나님은 나의 교사가 되어 주셨다. 성경을 읽다가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주님에게 물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알려줄 만한 사람도 없었고 물어 본다 해도 너무나 난해한 질문이라 대답해 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진리의 비밀을 풀어 설명해 주셨다. 그렇게 읽기 시작해 성경을 열 번 이상 읽고 나니 성경의 실체를 비로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며, 성경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진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복음의 비밀 이외에도, 주님은 일기장 한 장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문학에 소질이 없었던 나에게 문학을 가르치셨고, 예술성을 불어 넣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시를 불러 주셨고, 그 시를 통해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힘들 때, 의심에 사로잡힐 때, 주님은 언제나 나를 부르시고 주님의 말씀들로 채워 주셨다. 그렇게 해서 불러 주시는 대로 써 모은 것이 이 노트로 몇 권이 되어 갔다. 이 노트에 적힌 시가 우연한 기회에 책으로 나오게 되자 나는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책이 출판되고 시로 만든 찬양이 나오자 방송국과 잡지사 기자들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각종 집회에서 간증을 해 달라는 부탁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유명세를 타게 되자 한 번은 수술로 내 장애를 치료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라 하나님께
“할 말을 인도해 주소서, 주님”이라고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치고 뜻밖에 새어 나온 소리는
“난 이대로가 좋아요,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대로 그냥 살겠어요!”였다.
주님께서는 내 모습 이대로 나를 써 주셨고 많은 집회와 간증을 통해 전도하게 하셨다.
때로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집회와 간증으로 인해 지치기도 했지만 주님께서는
“너는 가라, 너는 가서 그들에게 네 몸만 보여도 된다!”라고 말씀하셨기에 더 이상 핑계를 대거나 투정을 부릴 수가 없었다. 주님께서 내게 그 사랑의 비밀을 알려주셨을 때, 그 비밀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싶어도 전할 사람이 없어서 그 안타까움에 목이 메이도록 울었던 그때......
그때의 소원을 생각하면 모든 피곤이 잊혀진다.
때로는 육체적 장애를 가진 몸으로 많은 인터뷰와 집회를 다니는 것을 보고 세상은 나를 단순히 ‘인간 승리의 표본’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어찌 지금 내 모습이 내 스스로의 의지로 내 삶을 극복한 인간 승리의 표본이겠는가? 나의 모든 생활은 인간 승리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이 늘 나와 동행하시고, 주님께서는 내게 말씀하여 주시고 나는 그분의 모습을 보여서 그분과 함께 기쁘게 살아가는 생활 그 자체인 것이다.




사형수가 남긴 성경책


1994년 9월 21일. 신문 기사를 읽던 ‘으뜸사랑교회’의 김영석 목사(42세)는 심호흡을 했다. 지존파 5명 구속, 농촌 마을 단독 가옥 아지트에 시체 소각장까지 만들어 놓고 1년여 동안 전국을 무대로 납치, 살인극을 벌여 5명을 살해하고 증거 인멸을 위해 암매장하거나 불태운 엽기적 살인 범죄단 6명이 경찰에 검거됐다. 감히 상상도 못할 그들의 엽기적 살인 행각에 경악한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그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들은 김목사가 20년 가깝도록 대해 오던 여느 사형수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대부분 전과가 없었고, 외모나 체격 또한 곱상하고 왜소해 언뜻 보면 도저히 그 범행의 주인공들이란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빨리 죽고 싶어요.” 그들은 푹 숙인 고개를 들려고도 하지 않고 대뜸 그 말부터 내뱉었다. 그 후에도 몇 번 그들을 찾았지만 대답은 매한가지였다. “아무 것도 필요없어요. 그냥 죽여주세요.” 안타까왔다. 가장 빠른 방법은 자신을 먼저 그들에게 열어 보이는 것 뿐이었다.
강문섭. 얼굴이 온통 끔직한 흉터 투성이던 그가 김목사에게 가장 먼저 마음을 열었다.
1995년 11월 2일. 강문섭은 창 밖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날씨가 맑아 보였다. ‘바깥은 참 아름답겠구나.’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강문섭!”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곳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누가 면회 오거나 병에 걸려 치료받으러 나가거나 아니면... 그는 나가는 방향을 보고서야 오늘 무슨 일이 있을 것인지를 확연히 깨달았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김목사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오히려 떨리고 있었다. “왜 떠세요? 하늘나라 가는데.” 강문섭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물었다. 올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시리게 느껴질 정도로 맑고 고요했다. 이윽고 그의 머리에 용수(두건)가 씌워지고 손발은 오랏줄로 묶였다. 집행인들이 스위치가 여럿 달린 곳으로 다가갔다. 그를 죽음으로 인도할 스위치는 그 중 하나만 작동될 것이다. “철컥!” 차가운 소리와 함께 사형대 밑바닥이 열리고, 그의 몸뚱이는 몸무게에 끌려 대롱대롱 매달렸다. 약 3분 후 그의 숨이 끊겼다. 사형이 집행되기 며칠 전, 정기 예배를 위해 구치소에 들른 김목사에게 강문섭이 작은 보따리 하나를 들고 왔다. 풀어보니 돈 72만원과 성경책이 들어 있었다. “목사님, 그 동안 여러분들이 보내주신 돈을 모았어요. 이걸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이건 감옥 안에서 읽던 성경책인데, 제가 죽으면 친 형님께 꼭 좀 전해주세요. 이게 없었다면 전 아무 것도 모르고 죽었을꺼예요. 제 가족들도 이걸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김목사는 그가 죽은 다음, 그가 부탁한 것들을 실행에 옮겼다. 장례비와 화장비로 쓰고 남은 돈 34만원으로 다른 재소자들을 위한 성경책들을 사 나눠줬다. 낡아서 너덜너덜해진 강문섭의 성경책은 가족들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남긴 돈은 이미 다 써 버렸지만, 김 목사는 아직도 성경책 나눠주는 일을 그만두지 않고 있다. ‘지존파 강문섭’은 이미 죽고 없지만 서울구치소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많은 사형수들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받은 성경책, 사형수 강문섭이 남기고 간 그 책들이 다시금 새로운 사랑을 낳을 것임을, 김목사는 굳게 믿고 있다.




신앙적 관점에서 본 미국의 위대성


(1)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취임식을 할 때 성경 위에 손을 올려 놓고 ‘취임 선서’를 한다.
(2) 미국 건국 초에 나라 최고의 법인 헌법을 만들기 위해 필라델피아에서 ‘헌법 기초 위원회’가 열렸을 때 ‘제퍼슨’위원이 일어나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 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 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하는 시 127편을 낭독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우리가 아무리 우리 마음대로 헌법을 만들어도 하나님께서 나라를 세워주시지 아니 하시면 그것은 헛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그 헌법의 근본되는 뜻과 건국의 참 정신을 밝혔다고 한다.
(3) 미국 역사상 국회가 제일 처음으로 개원되어 개회식을 할 때에도 먼저 하나님께 기도로 시작했다.
(4) 미국의 지폐인 달러화에는 1달러에서부터 100달러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글귀가 들어가 있다.




전도지 같은 돈


1851년 11월 미국 매릴랜드주에 사는 한 농부가 미국 재무성에 다음과 같은 청원서를 냈다. 그것은 미국이 만들어 내는 모든 화폐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라는 말을 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3년 후인 1864년 미국 의회에서 정식으로 이를 결정하고 오늘까지 모든 미국 화폐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말을 넣고 있다.
미국 돈은 단순한 미국의 돈만이 아니다. 그것은 전 세계의 돈이다.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미국 돈은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이 미국의 국력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보다 더 깊은 원인을 찾는다면 “In God We Trust"라는 그 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본인들은 알든 모르든, 본인들이 알고 쓰든, 모르고 쓰든 전세계 사람들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전도지를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우연으로 돌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개인과, 가정과, 국가가 번영하고 복 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높이고 경외하면서 기도해야 응답받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전도인의 자녀들


중국의 장개석 총통의 아내인 송미령 여사의 아버지 송전도 선생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고 전도를 많이 했던지 그의 이름은 잘 몰라도 송전도사라고 하면 다 알려진 신앙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신앙이 좋던 그가 딸만 셋을 낳고서 젊은 나이로 죽어 버렸다. 그때에 동리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보고 조소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하나님을 향해 회의를 가졌을는지 모르나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했다. 훗날 그의 세 딸이 자라나서 한 사람은 중국의 재무부장관의 아내가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중국의 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손문 선생의 아내가 되었고 셋 째 딸은 장개석 총통의 아내가 되어 한 때는 그 송전도의 세 딸들이 중국 전토를 뒤흔들었다는 것이다.




일점 일획이라도 오류가 없는 성경


서울 구로제일침례교회 강풍일 목사는 청년 시에 술을 먹고 부흥회를 인도하시는 목사님을 때린 후 정신이상이 되었으나, 그 목사님의 간절한 기도로 치유되어 곧 바로,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다. 그가 전도사 시절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는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땀이 피가 될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해서 이 구절은 잘못 번역된 것이라고 교인들에게 가르쳤다. 그후 사모가 첫 출산을 하게 되었는데, 난산으로 출산이 불가능하여 산모를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산모를 구할 것이냐 아기를 살릴 것이냐  양자택일을 15분 안에 결정하라고 의사가 말했다. 그러나 강전도사는 계속 연장하여 2시간을 지연했다. 결국 아기를 포기했지만, 연장 이유는 산모와 아기, 둘 다 구하기 위함이었다. 의사가 진작 그렇게 결정할 것이지 하고 나무라고, 산모를 살리기 위해 가위와 칼로 아기를 잘라 꺼내려 할 때, 강 전도사가 만류했다. 그것은 아이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니 그냥 자르지 않고 꺼낼 수 없느냐고 부탁하니, 의사가 집게로 머리 부분을 잡고 간신히 꺼내자 2시간 이상 됐음으로 아기는 파랗게 질식해 죽었다. 아기는 딸이었는데 말아서 옆에 두었다. 그때 강전도사가 산모를 보니까 몇 시간을 얼마나 기진맥진했는지 피부는 빨갛게 되었고, 땀구멍마다 땀이 배어 나왔는데, 그때의 땀방울이 핏방울이었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강전도사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흘리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다는 말씀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때 강 전도사는 마루 바닥에서 울부짖으며 회계하고, 自己의 불신앙을 철저하게 자복했다. 그리고 의사에게 아기를 다시 한 번 보여 달라고 부탁하니까, 의사가 죽은 딸아기를 보여주는데, 머리 부분이 길게 늘어나 있었다. 그런데 강 전도사에게 그 아이가 다시 살수 있다는 어떤 확신을 갖게되었다. 그래서 의사에게 사정해서 인공호흡을 한 번 시켜 달라고 사정을 하니까, 의사가 그 전도사를 정신이상자로 생각하고 당신 대학을 나오긴 했느냐고 의심스럽게 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 전도사가 하도 간곡하게 사정을 하니까 마지못해서 인공호흡을 시키고, 거꾸로 들고 엉덩이를 한 번 팍 때리니까, 그때까지 죽었던 아이가 그만 ‘응아!’ 하고 울었다. 이 광경을 본 의사가 그만 부들부들 떨었고, 강전도사는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잠시 후에, 그 의사가 말하기를 이 아이가 살기는 했어도 병신이 되거나 아니면 정신박약아 즉, 저능아가 될 것이니,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이고, 목회에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이니, 지금 차라리 안락사 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으나 적극 反對하여 살렸다. 그후 이 아이가 어떻게 되었을까? 이름은 강 지혜로 잘 자라서 지금 숙대 3학년으로 음악을 전공하여  유학까지 갈 계획이고, 운전 면허까지 취득했으며 어려서부터 교회 반주로 아버지 강풍일 목사의 목회를 돕고 있다.




인간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


10세에는 과자에 움직이고,
20세에는 연인에 움직이고,
30세에는 쾌락에 움직이고,
40세에는 야심에 움직이고,
50세에는 탐욕에 움직인다.
인간은 언제, 오직 예지만을 추구하게 될 것인가?
-루소-


진실을 배우며, 진실을 사랑하며, 진실을 말하며, 진실을 양보하지 않으며, 죽을 때까지 진실을 지키라.
-후스-


세상에는 도를 벗어나면 안 되는 것이 여덟 가지가 있다. 그것은 여행, 여자, 부, 일, 술, 잠, 약, 향료이다.


나는 인간을 칭찬하는 사람들과 인간을 비난하는 사람들과 인생을 향락하려고 하는 사람들까지 옳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옳게 여기는 사람은 끙끙거리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뿐이다.
오늘날 진리는 너무도 모호하고 허위는 너무도 잘 정립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리를 알아보기조차 못할 것이다.
-파스칼의 팡세-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빅톨 프랭클- 




복음의 힘


이동식이라는 청년은 기독교인인 친구를 만나면 언제나 “힘이 없으면 내 힘을 의지하라”고 조롱하면서 어깨를 올려 보이며 힘 자랑을 했다. 그러다가 이 청년도 다른 청년들처럼 군에 입대하여 간단한 훈련을 받은 후 전방 부대에 배속되었다. 가보니 그 부대에는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더군다나 신병을 누가 알아주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내무반 한 구석에서 공포에 질려 고민하고 있는 그에게 “왜 걱정되는 것이 있으시오?”하고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옆에 앉는 사람이 있었다. 놀라서 벌떡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하니 “편히 앉으시오”라고 말하는 그는 바로 그 부대의 군목이었다. 처음 군목을 대하게 되어 어찌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고 있는 그에게 입대하기 전에 교회 생활을 했느냐고 물었다. 전에 친구를 조롱하던 생각이 떠올라 “아뇨”라고 대답을 하면서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는 군목의 친절한 말에 감동되어 전해 주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어 군대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늦게 시작한 신앙생활이었으나 그의 신앙은 열렬하면서도 확실했다. 그래서 군목을 도와 전도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 청년은 집에 계신 부모님께 전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편지에 전도지를 넣어 보내면서 부모님께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시라고 했다. 이 편지를 받은 부모는 집에 있을 때 교인을 조롱하던 아들이 군대에 가더니 정신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하면서 믿겠으면 너나 믿으라는 답장을 보냈다.
부모의 답장을 받은 청년은 “내가 일선에서 얼마나 위험한지 아십니까? 부모님이 교회에 나가지 않으시면 저는 전사할지도 모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다시 보냈다. 부모는 아들의 생명이 걸렸다는 말에 교회에 나가 마침내 착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군목이 청년의 부모를 방문했을 때 주님을 믿게 됨을 감사하면서 아들에게 늘 기도를 드리라고 전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위대한 희망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해롤드 럿셀’이라는 청년이 공수부대 요원으로 참전하였다가 불행하게도 포탄에 맞아 두 팔을 잃은 불구자가 되었다. 그는 이제 ‘나는 쓸모 없는 고기 덩이가 되었구나’하고 절망하던 중에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어느 날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는 설교를 듣고 그의 마음에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그후에 그는 무엇인가를 하여야 하겠다는 계획을 하던 중에 그를 돕고자 하는 의사로부터 쇠붙이로 된 손(의수)을 받게 되었다. 그는 그 손으로 글씨도 쓰고, 나중에는 타자까지 칠 수 있었다. 심지어 ‘우리 생애 최고’라는 영화에 출연하여 영화계 최고상인 ‘아카데미’ 주연 상까지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 쓸모 없는 인생에게 희망을 주어 쓸모 있는 삶을 살게 하셨다.




똑똑한 나무꾼


두 나무꾼 친구가 산에 올라갔다. 경쟁적으로 나무를 찍어 장작을 만들어갔다. 한 사람은 유달리 승부욕이 강했다. 그는 친구에게 지지 않으려고 새벽부터 밤중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나무를 찍었다. 그러나 다른 한 친구는 50분 일하고 10분 쉬는 식으로 숨을 돌려가면서 일했다. 어느덧 산을 내려갈 시간이 되어 두 사람은 결과를 비교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쉬어가면서 일한 친구가 더 많은 장작을 장만했다. 승부욕이 강한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투덜거렸다. “내가 더 열심히 했는데 왜 자네 것이 더 많단 말인가?” 그러자 다른 한 친구가 점잖게 설명했다. “나는 10분씩 쉴 때마다 도끼 날을 갈았다네.”


아무리 바쁘다 해도 자신의 삶의 날을 갈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 사람이 마지막 날에 승리의 개가를 부를 사람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이 묵상하며 그 분의 뜻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바쁘다는 이유로 말씀을 깊이 묵상하지 않아 하나님의 크고 깊은 생각을 접할 수 없을 때 우리의 삶은 보잘것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맡김


어떤 남자와 그의 부인이 오래 전에 약속한 대로 약 4-5마일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상쾌한 어느 날 아침 집을 나섰다. 그 착한 부인은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들고 갔다. 그런데 집을 나선 지 얼마 안되어 그녀는 갑자기 그들이 건너야만 하는 매우 오래 되고 낡은 다리를 생각해 내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그 다리 어떻게 건너지요? 나는 결코 그 다리를 건너지 못할꺼예요. 그렇지만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그 강을 건널 수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부인은 “그보다 당신이 썩은 널 판지를 밟고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고 해봐요. 그러면 나와 애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요?” 하고 또다시 걱정했다. 이에 남편은 “몰라. 우리 중에 누가 어떻게 될지 몰라.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나는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우리는 당연히 굶어 죽게 될꺼야.”라고 말했다.
이처럼 그들은 계속해서 걱정을 하며 애를 태우고 불길한 것을 생각하면서 마침내 다리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들이 지난번에 거기 갔다 온 이후 그 자리엔 훌륭하고 견고한 새 돌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무사히 다리를 건넌 그들은 부질없는 걱정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한 사랑으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신다. 미래에 대하여 막연한 염려나 걱정으로 불안해하지 말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다.




카타콤


지금도 로마의 카타콤에 1,400만 개의 뼈가 있는데 그들은 모두 순교자들이다. 초대 교회 당시 로마에는 두 개의 도시가 있었다. 하나는 땅 위에 화려하지만 도덕적으로 퇴폐한 도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땅 속에 있는 어둡고 처절했지만 신앙과 사랑이 넘치는 도시였다. 현재까지 발견된 카타콤의 길이는 약 560km이상이 된다고 하는데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토굴 속에서 고난당하며 죽었는가를 헤아리게 된다. 그들은 이 세상의 무엇보다 신앙이 더 가치가 있었으므로 햇빛을 보지 못하고 땅 속에 숨어살다 죽어야 하는 카타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인간은 재물이나 부당한 권력에 의해 억압받아서는 안되며 성도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어떤 어려움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목사와 노학자


한 번은 유석홍 목사가 황해도 금촌마을에 가서, 그 마을에서 제일 유세가 센 노학자를 찾았다. 머리를 깎은 자는 당장 쫓겨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려고 그때 유행인 남바위를 얻어 쓰고, 과객으로 가장하고 노학자의 집을 방문하였다. 주인은 유 목사를 방으로 모시고 “방이 더우니 남바위를 벗으라”고 말하였다. 유 목사는 남바위를 벗기가 곤란했다. 만약 깎은 머리가 드러나면, 지금까지 애써 접근한 것이 무효가 되고 만다는 생각이 들어 머뭇거리기만 하고 벗지 않았다. 그러나 주인은 계속해서 벗으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그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 모처럼의 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해 주십사고 간절히 구했다. 막 기도를 마치니 목사 자신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눈물이 옷고름에 떨어지자 놀란 것은 노학자였다. “뉘시기에 그토록 우시면서까지 남바위를 벗기를 두려워하는지요? 나도 별 것 아닌 인간이외다. 자, 염려말고 남바위를 벗으시오.”
“저는 머리를 깎은 사람으로 소문을 듣자 하니, 주인께서는 일절 머리 깎은 사람은 문안에 들이지 말라고 한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주인께서 저의 머리 깎은 것을 보시고 노하실까 두려워서 차마 벗지를 못했소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목사요.” 노학자는 깜짝 놀랐다. 과객이 목사라는 말도 금시초문이지만, 자기를 만나기 위해서 남바위를 쓰고 찾아와 눈물까지 흘린 정경에는, 비록 완고한 그였지만, 자연 감화되고 말았다. 노학자는 유목사에게 모든 것을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그 순간부터 정다운 대화로 밤을 새웠다. 노학자는 언제가 길을 가다가 “구주강생(救主降生)OO년”이란 글이 적힌 쪽지를 주웠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한문에 밝은 노학자는 “도대체 세상에 구세주(救世主)란 것이 있을 수 있는가?”하고 물었다. 유 목사는 즉석에서 한문으로 된 창세기 한 권을 건네주고, “여기에 구세주의 의미가 있으니 읽어 보라”고 하였다. 노학자는 한눈에 읽어 내려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서는 무릎을 탁 쳤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할 때, 사람들이 너무 음란하였다는 대목에서였다. “이제껏 <맹자>, <공자>를 읽어봤지만 무엇이나 잘못된 것은 고치는 것이 보통인데, 성경은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조금도 가식이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천서(天書)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리고 나서 그는, 롯을 구원한 하나님이야말로 구세주라고 하면서 자기도 이제는 예수 믿고 교회에 나가겠다고 하였다. 이후 노학자는 물론, 가족까지도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참을성을 잃지 않습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화가 났을 때라도 건설적인 길을 모색합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행운을 시기하지 않습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좋은 예법의 선지자입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화를 낼 권리가 있다고 느낄 때조차도 쉽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가장 나쁜 점보다는 가장 좋은 점을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그의 마음과 생활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주일을 무시한 결과


거리의 신호등을 보면 파랑 불은 가라는 신호, 빨강 불은 정지하라는 신호이다.
달력을 보면 주일을 표시하는 숫자는 모두가 빨강 색이다. 그것은 하던 일을 멈추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적신호인 것이다. 운전자라면 적신호를 무시하고 주행했을 때 오는 비극이 얼마나 큰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폴레옹이 1813년 10월 17일 영국을 침략했다가 웰링턴 장군에게 망했다. 그 날은 주일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을 침공했다가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고 망했다. 그 날도 주일이었다. 1950년 6월 25일도 주일이었는데, 그 날 김일성이 남침을 했다가 북한은 저 모양 저 꼴이 되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이사야 58:13-14)




주일에 취임하기를 거부한 미국의 대통령


미국 제 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자카리 테일러(Zachary Taylor) 장군이 헌법에 의해 1849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 날이 주일이었다. 신앙이 독실한 테일러 장군은 이 날의 취임을 거부했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적인 행사이므로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설득하고 간청했지만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헌법은 임기가 만료된 제 11대 대통령 제임스 폭스 폴크가 대통령직에 하루 더 머물러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하루 동안 국가 원수의 자리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하는 수없이 테일러가 취임을 거부한 그 주일 12시부터 월요일 12까지 24시간 동안 자리를 메울 임시 대통령을 상원에서 선출해야 했다.
상원은 상원 의장인 애치슨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애치슨은 그로서의 금도를 발휘하여, 어떤 이유로도 깨우지 말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당부해 놓고 토요일 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는 월요일까지 그의 임기 24시간을 모두 잠으로 채워 버렸다.
하나님의 법도가 인위적인 법률보다 위에 있음을 믿고 주일날 취임을 거부한 대통령이나 24시간 국가 원수의 직위를 위임받고도 의도적으로 아무런 권한도 행사하지 아니한 임시 대통령은, 미국 국민들의 신앙과 도의심과 절제력과 준법정신을 극명하게 대변하고 있다. 그러기에 미국은 세계 최강의 나라로 발전했고, 하나님이 돌보시는 역사를 이루었다.
주일에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지 않은 선수


1924년 올림픽 경기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다. 여기에 참가한 선수 중에 스코틀랜드의 육상 스타인 에릭 리델(Eric Liddel)이 있었다. 그는 1백 미터 육상경기의 우승 후보로서 세인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으며, 이 경기를 위해 여러 달 동안 강도 높은 훈련을 쌓아 온 터였다.
그런데 그의 경기 일정이 공교롭게도 주일날 짜여져 있었다. 그는 믿음 좋은 기독교인이었으므로 마음에 심한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나라의 명예를 위해서는 주일을 범하고 경기에 참가해야 옳으나, 그의 신앙 양심은 이를 도저히 허락하지 않았다.
주일에 운동장을 달린다고 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되지 못한다고 믿은 그는 경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팬들은 크게 실망했고 그를 격찬하던 사람들이 모두 바보로 취급했으나 그의 마음을 충일하게 채운 기쁨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주간에 출전하게 되어 있던 스코틀랜드의 4백 미터 경기 선수가 부득이한 일로 뛸 수 없게 되었다. 리델은 자기가 훈련한 종목의 4배나 되는 힘든 경기였지만 그 자리를 메꾸겠노라고 신청했다. 1백 미터 경기 선수인 리델이 4백 미터 경기에서 47.6초의 기록을 세우며 당당히 우승했다.
후에 리델은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되어 평생 주님의 일을 하다가 1945년 중국의 군인 캠프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한 그를 하나님은 끝날까지 사랑해 주셨다.




안식일을 잃어버린 사람


여러 기업체를 갖고 있는 50대 중반의 권사가 있었다. 이 분은 주로 주일 아침 일찍 있는 1부 예배에 참석한다. 왜냐하면 주일에도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담임 목사는 ‘권사님 저녁 예배에도 나오세요’ 그러나 그의 대답은 ‘죄송스럽지만 일이 너무 바빠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담임 목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주일 날 빠질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친구들과 모임에 가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말았다. 상복을 입고 애곡하는 그 부인은 ‘목사님 말씀대로 쉬었어야 했는데...’라고 울부짖었다.




주일 성수는 하늘을 오르는 사닥다리


어떤 할머니가 꿈을 꾸었다. 여러 개의 사닥다리가 각각 자기 앞에 놓여 있었다. 자기 옆에 있는 김집사의 사닥다리는 온전하여 한 발 한 발 잘 올라갔다. 그런데 자기 것은 중간 중간에 다리가 없어 오르기가 힘이 들었다. 천사에게 묻기를 왜 내 사닥다리는 이렇게 생겼느냐고 물으니, 자매가 주일마다 결석한 대로 그 다리가 빠졌노라고 했다. 그런데 중간쯤 오르니 디디고 서야 할 다리가 네 개나 빠져서 도저히 오를 수 없어서 힘쓰다가 떨어져 죽는구나 하고 깨어 보니 꿈이라, 식은땀을 흘리며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께 주일 범한 것을 회개하였다는 것이다. 마침 구역장과 사소한 일로 다툰 것이 시험이 들어 네 주일이나 결석하던 참이라 크게 회개했다는 것이다.




끝까지 주일을 지킨 학생


몇 년 전에 모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다. 가을 운동회 준비를 위해 일요일인 내일도 전교생이 등교하라고 체육 선생이 지시하였다. 월요일이 되었다. 운동회 연습 시간에 체육 선생은 어제 결석한 학생들을 조사하여 기합을 주기 시작했다. 마침 전교 회장도 그 학생들 틈에 끼어 있었다. 그 학생은 모 교회 장로의 아들로 성실하며 주일을 성수하고 교회에서는 고등부 회장을 맡고 있었다. 체육 선생은 전교 회장이 어제 결석한 것에 더욱 화가났다. 전교 회장을 전교생 앞에 불러 세우고 물었다.
“어제 왜 결석했나!”
“교회에 가야 하기 때문에 결석했습니다.”
“학교가 중요한가? 교회가 중요한가?”
“학교는 학교대로 중요하고, 교회는 교회대로 중요합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둘 다 중요합니다.”
체육 선생은 그 학생을 몹시 때렸다. 그 입에서 학교가 더 중요하다는 대답을 듣기 위해서 심하게 때렸다.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
“둘 다 선택하겠습니다.”
“아니,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한다면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
“꼭 하나만을 택하라면 교회를 택하겠습니다.”
체육 선생은 다음 주일(일요일)에 그 학생을 등교시키기 위하여 심한 기합을 주었으나 그 학생은 끝가지 주일 성수를 양보하지 않았다. 전교생들은 숨을 죽여 가면서 체육 선생과 전교 회장의 대립을 지켜보았다. 이 사건은 다음날 큰 문제로 비약되었다. 교회로서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목사는 교장을 찾아 엄중히 항의하고, 교육장에게도 엄중히 항의하여, 체육 선생을 다른 학교로 전출시키고 교장이 전교생 앞에서 잘못된 것을 사과함으로써 사건을 수습시켰다.
오늘 이런 학생이 얼마나 될까? 정말 이런 학생이 부럽다. 진학 공부 때문에 고 3만 되면 교회 출석이 저조하고 학원 공부 때문에 교회 출석이 저조한 현실에서 이런 학생은 우리의 귀감이 된다.




항해하는 배 안에서도 주일을 지킨 청교도인들


영국의 청교도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화란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지 못하자 아메리카 대륙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들이 67일 동안 항해하는 대서양 바다 위에서도 주일을 성수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땅에 입을 맞추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하고 찬양을 드린 일이었다. 이들은 먼저 교회를 세웠고, 그 다음에는 학교를 세웠고, 그 다음에는 공회당을 지었다.
바다 가운데서도 닻을 내리고 주일을 지키는 신앙이 청교도의 신앙이요, 오늘의 미국의 번영을 가져온 것이다.




주일은?


참 안식과 평안을 얻는 날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안식이 필요하다. 정신 건강이나 육신 건강을 위하여 안식은 절대로 필요하다.
피쳐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였다.
“안식일이 없는 세계는 웃음이 없는 세계요, 꽃이 없는 여름이요, 뜰이 없는 주택이다. 안식일은 일주일 중 가장 기쁜 날이다.”
영국의 대 정치가인 클레도스틴은 이런 말을 하였다.
“나의 길고 바쁜 일생에 있어서 나의 생명과 용기를 유지한 것은 오직 안식일을 지킴에 있었다.”














십일조의 성경적 의미
십일조의 관습은 셈족 이외의 다른 종교나 문화 가운데 흔히 나타나는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십일조의 성경적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보다도 성경 본문 그 자체를 숙고해 봄이 중요한 것이다. 성경에는 십일조의 첫 언급은 창세기 14장 19-20절에 나타난다.
성경 계시의 유기적 발전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이 본문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비록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말하지만, 아브라함 시대 이후의 모든 십일조에 대한 기본적 원리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소위 십일조라는 나무의 씨앗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십일조 안에 담긴 기본적 원리들 또는 사상들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1) 바치는 자가 자원해서 드리는 예물이다.
(2) 바치는 자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로 드리는 예물이다.
(3) 바치는 자가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안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God's ownership)임을 인정함의 표시로 드리는 예물이다.




다시 회복한 십일조 생활


미국의 플로리다주에 나울린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교회가 있었다. 그의 교회에 교회 학교 총무 일을 보는 믿음이 훌륭한 청년이 있었다. 이 사람이 사업을 시작했는데 점점 번창하더니 여러 도시에 많은 상점들을 내게 되었고 일주에 일만 불을 십일조로 바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 후 그는 수입이 몇 배로 늘어도 십일조는 매주 일만 불이었다. 그리고 교회 출석도 점점 빠지더니 나중엔 아예 교회를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근심이 되어 그 청년을 찾아가서 “죤, 자네를 걱정하고 있네. 자네는 교회의 예배에 계속 불참하고 있어. 자네는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해져 가고 있어. 십일조도 온전히 못하고 있네” 그랬더니 그 청년 하는 말이 “목사님 사실 일주일에 100불 헌금도 많다고 봅니다. 또 제가 바빠서 교회 갈 시간이 없습니다.”하고 말했다. 목사님이 너무 안타까워서 “죤, 우리 기도 드리십시다”하고는 기도를 하는데 그의 기도가 이런 기도였다.
“사랑하시는 주님, 주님께서는 죤에게 지나친 번영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너무 많은 사업을 주셨습니다. 죤은 지나치게 성공했습니다. 죤은 당신께 너무 많은 십일조를 드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죤을 위하시사 그의 상점 몇 개는 불태워 주옵소서. 상점 몇 개는 실패를 보게 해 주옵소서. 죤으로 하여금 그렇게도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위해 충실하게 일하던 그 옛날의 사람으로 되돌아오도록 그의 사업의 얼마를 빼앗아 주옵소서” 그랬더니 그만 죤은 벌벌 떨면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하고 그후 새 출발을 했다고 한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라


‘노르만 빈센트 피일’(Norman Vincent Peale) 박사에게 경제 문제로 가정이 파탄이 되고 이혼하게 됐다고 그 해결책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편지가 일년에 수백 통씩 온다고 하는데, 그에 청한 해답을 ‘가이드 포스트’지에 “Do you worry about money?" 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여기에서 그는
ꋻ돈을 남용하지 말라
ꋻ기도하는 마음으로 물건을 사라
ꋻ서로 딴 주머니를 차지 말라
등등 10가지를 써 내려가다가 맨 마지막으로 가장 역점을 두어서 대문자로 쓴 것이 말라기 3:10의 말씀이었다.
그러면서 필 박사는 ‘복을 주나 안주나 시험해 보라’고 했는데 당신들은 십일조를 해보았습니까? 라고 말했다.
미국의 위대한 신앙가 이면서 동시에 큰 재산가였던 알렉산더 커르(Alexander Kerr)는 십일조 생활로 축복을 받았는데,
“누구든지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르겠다는 사람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보라 여러분의 가계부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고 간증을 했다.




더 복을 받는 비결


K라고 하는 사장은 모 교회 장로로서 그의 생활 가운데 물질을 쓰는 세 가지 특이한 점을 말했는데, 하나는 모든 수입에서 1/10은 하나님께 바치고, 또 1/10은 하나님 사업과 구제 사업을 위해서 떼어놓고, 또 1/10은 자기 노후 대책으로 저축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외 나머지는 다 주님의 사업을 위해 주님의 뜻대로 쓰고 있다는 간증을 하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산도 자기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불고기 한 번 안 먹어 봤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더 복을 주시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간증을 하는가 하면 또 한 분의 사장이 있는데 이 분은 모 교회 권사의 직분을 가진 분으로 간증하기를 작년에 많은 손해를 봤는데 갑자기 1500만원씩 부도가 나고, 또 무슨 수출 사업을 하면 이상하게 안되어 망했다고 했다. 게다가 애지중지하는 부인까지 죽을 병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 부흥회에 참석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귀신을 내어 쫒아 병이 낫는 것을 보고, 그때 자기도 불을 받아 방언도 하고 은혜도 받았다. 그러면서 그가 망하게 된 이유를 말하는데 자기 부인도 모르는 것까지 이야기를 했다.
자기는 십일조가 너무 많고 계산도 할 수 없고 해서 안 바쳤으며, 또 주일도 안 지켰고 돈을 벌고 사장 노릇하면서 어느 다방을 자주 출입하다가 급기야 탈선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이런 사업도 망하고 저런 사업도 망하고 그리고 부인까지 죽게 되었는데도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했다가 그때 자기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고 기도했다는 것이다.




믿음까지 잃는다면


기독교 방송에 맹인 윤인수 목사의 간증 드라마가 방송된 적이 있다.
중병으로 앓아 누워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어린 소년 윤인수가 길거리에 나가 신문을 팔고 구두닦기를 시작했다. 친구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윤인수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 윤인수는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 기뻐하며 그 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돈을 내놓았다. 돈을 받아 든 어머니는 윤인수의 등을 두들겨 주며 “십일조를 먼저 떼자”고 했다. 윤인수는 버럭 화를 냈다. “십일조는 무슨 놈의 십일조인가, 하나님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나의 눈은 멀게 했고 엄마는 병들게 했고, 공산당에게 쫒겨 피난민 신세가 되게 했고, 재산도 다 빼앗기게 한 그런 하나님께 무슨 놈의 십일조를 내라느냐”며 항변했다. 그러나 그의 병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을 꼬옥 쥔 다음 “인수야 고향 잃어버린 것도 한스럽고, 집 잃어버린 것도 원통하고, 건강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뭐가 남겠니?”라고 말했다.




십일조의 결과


다음은 어느 목사님의 간증이다.
인권사(별명:인색한 권사)가 있었다. 그에게 삼대 독자 아들이 있었는데 믿음이 좋은 장로님 따님을 자부로 맞았다. 그런데 자부가 임신하면 3개월만에 낙태하곤 하였다.
손자를 무척이나 기다리던 인권사는 초조하고 불안하기만 했다. 하루는 나에게 특별 기도를 부탁하였다. 어느 날 새벽에 간절히 기도하는데 이런 응답이 왔다.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라’는 마음의 감동이 있어 집에 돌아와 성구 사전을 찾으니 말라기 3장 11절에 십일조에 관계된 말씀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도록 십일조를 바치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며칠 동안 주저할 때 성령은 나 의 마음을 충동했다.
하루는 인권사와 자부를 불러 조용히 말씀드렸다. 권사님, 아이를 임신하면 기한이 몇 개월이 되어야 아이를 낳습니까? 10개월이지요. 그러면 3개월이 되어 낙태하면 기한 찬 것입니까? 권사님, 말라기 3장 11절을 읽으세요. “십일조 바치십시오.” 언짢은 표정이었으나 자부의 간절한 요청으로 결단을 내렸다. 나는 뜨겁게 축복 기도를 드렸다.
다음 주일 강단에 십일조는 올라왔는데, 큰일 났다. 또 삼 개월이 되어 낙태가 되면 어찌한단 말인가 낙태하는 날 십일조는 이자까지 달라 할 것이요, 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밤마다 성전에 가서 기도를 드렸다. 한 달, 두 달, 석 달 참으로 초조한 날들이 지났다.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석 달이 넘어갔다. 그리고 점점 배는 둥근 달처럼 불러 갔다. 하나님이 도우사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고 열 달이 되어 귀염둥이 손자를 낳았으니 이 기쁘고 감사한 일을 무엇으로 표현하겠는가? 그런 일이 있은 후에는 인권사 가라사대 ‘십일조가 좋긴 좋구나! 진작 바칠 것을 후회스럽다’고 간증을 하였다.




낙심하지 말고 드려야 한다


십일조를 드리면 하늘 문이 열린다고 하기에 열심히 바쳤는데 하늘 문이 열린 것이 아니라, 더 닫힌 것처럼 답답할 때가 있다. 그때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자매가 종로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면서 친구의 인도로 교회에 나왔다. 그리고 주일이면 온종일 문을 닫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십일조를 바치면서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였다. 그런데 단골 손님은 떨어지고 장사는 더욱 안되었다. 예수 믿고 장사가 안되니 낙심이 되었다. 주일 쉬고 또 십일조 바치고 더욱 어렵기만 하였다. 목사님께 말씀드리니, ‘감사하세요!’ 하기에 장사 안 되는 것도 감사합니다. 하면서 믿음으로 지냈다. 그런데 장사는 더욱 안되고 한가히 앉아서 성경이나 읽으니 받는 은혜는 컸으나 호주머니 사정은 답답하기만 했다. 이웃집은 어찌나 사람이 몰리는지 우리집을 향하여 망했다고 비웃기도 하여 창피해서 집을 팔고 동교동으로 이사를 갔다. 그런데 집 팔고 일주일 후에 신문에 발표되기를 종로에 도로 확장으로 집을 철거한다는 것이었다. 그 자매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장사 안되어 이사간 것이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옵니다”라고 간증했다. 선한 일에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질문


죠지 스위팅(George Sweeting)은 이렇게 말했다. “내 생이 끝나는 마지막 날, 내가 얼마나 벌었는가? 이것은 하나도 중요한 질문이 안될 것이다. 그때 중요한 질문이 있다면 나는 얼마나 주었는가? 가치 있는 사역과 놀라운 목적이 있는 그것들을 위해서 얼마나 나는 드릴 수가 있었는가? 하는 물음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12:16-21)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를 통해서 이들이 다같이 부자이면서도 그들의 재물을 의롭게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부의 무익함을 지적하셨다. 즉 예수님의 물질에 대한 관심은 얼마나 많이 벌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선용하였느냐이다.
1977. 6. 2. 세계 46개국에 TV로 생중계되는 등 세기의 ‘인간탄환’ 대결, 우승상금 1백만 달러, 미국과 캐나다의 자존심 싸움으로 숱한 화제를 뿌렸던 마이클 존슨(29. 미국. 200m 세계기록보유자)과 도노반 베일리(29. 캐나다. 100m 세계기록보유자)의 150m 맞대결에서 베일리가 승리했는데, 150m를 달리는데 14.99초라는 짧은 시간이 걸렸다.
여기에서 베일리가 받은 상금이 1백만 달러(우리 돈 약 8억 원). 1초에 무려 5,300만원을 벌은 셈인데, 이것은 아마도 유일무이한 기록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그가 1초에 얼마나 벌었느냐가 아니라, 그가 그 돈을 평생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헌금이란?


헌금이란 ‘돈의 성격’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한다. 돈은 인간이 가장 사모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다. 헌금이란 두 가지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헌금은 신앙고백이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가장 분명하고 구체적인 행동이다.
둘째, 헌금은 감사의 표현이다. 내가 빚진 것, 고마운 일에 대하여 사람은 빚진 마음이 있다. 헌금이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다. 결코 헌금은 잘되기 위한 수단이거나 더 부자 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헌금하는 방법도 가지가지


랍비와 신부, 그리고 목사가 한자리에 모여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대해 토론했다.
“하나님께 얼마만큼 바칠 것인가에 대한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라고 신부가 말했다. “먼저 땅바닥에 선을 긋고 내가 가진 돈 전부를 공중으로 던집니다. 그래서 선의 오른쪽에 떨어진 돈은 하나님께 바치고, 왼쪽에 떨어진 것은 내 주머니에 다시 넣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목사가 말했다. “나는 땅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돈을 공중으로 던집니다. 동그라미 안쪽에 떨어진 돈은 하나님께 바치고, 바깥쪽의 것은 내 주머니에 넣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여러분! 우리가 가진 것을 전부 하나님께 바쳐야만 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냥 공중으로 모든 돈을 던집니다. 하나님이 계신 공중에 머물게 되는 돈은 하나님의 것이고, 땅에 떨어지는 돈은 내 것입니다.”




























































행복, 만족, 기쁨의 비결


(1) 행복한 사람은 희망과 기쁨과 사랑에 산다. 불행한 사람은 분노와 질투와 절망에 산다.


(2) 부자(富者)란 어떤 사람인가? 자기의 운명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유태인의 경전-


(3) 인간이 자기의 일에서 행복하려면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
자기의 일을 좋아해야 한다. 또 자기의 일에 너무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기의 일이 성공하리라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러스킨-


(4) 행복을 얻는 유일한 길은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하지 않고 행복 이외의 딴 목적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밀-


(5)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거든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을 배워라.
-프리올-
                       
(6) 행복은 유능한 사람만이 오래 지닐 수 있는 재산이다.
-몰트케-


(7) 즐거운 생활을 하고 싶거든 지나간 일을 공연히 염려하지 말것, 좀처럼 해서는 성을 내지 말 것, 언제나 현재를 즐길 것, 특히 사람을 미워하지 말 것, 미래를 신에게 맡길 것
-괴테-


(8) 즐거움
군자에게는 세 가지 낙이 있다.
첫째는 부모가 모두 건강하게 살아 있고 형제가 무고한 것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둘째는 우러러 하늘을 보고 굽어 땅을 보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 (仰不愧於天, 府不作於人, 二樂也)
셋째, 천하의 영재를 얻어 이것을 교육하는 것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
-맹자-




예측 못할 삶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이며 철학자였던 솔론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를 만났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왕의 질문에 솔론은 대답했다.
“아테네의 텔로스입니다. 그는 자녀를 잘 길렀고 행복한 가정을 꾸몄으며 나라를 위해 전사했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는 누구인가?”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쓴 사람들입니다.”
“솔론, 왜 자네는 나를 행복한 사람으로 지목하지 않는가?”
“전하, 인생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비석이 서기 전까지 행복한 사람인지 불행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공자가 태산(太山)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노나라의 성이란 마을 어귀에서 영계기(榮啓期)와 마주치게 되었다.
영계기는 사슴의 털가죽을 두르고 노끈으로 띠를 두른 허술한 차림으로 거문고를 타면서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공자가,
“당신은 뭐가 그렇게도 즐겁소?”
하고 묻자, 영계기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게는 즐거운 일이 수없이 많소. 우선 하늘이 만든 만물 가운데서 무엇보다 귀한 것은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나는 그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것이 첫째로 즐거운 일이오. 또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남자가 더 귀하지 않소? 그런데 나는 그 남자로 태어났으니 이것이 둘째로 즐거운 일이오. 또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햇빛도 못 보고 죽기도 하고, 배내옷을 벗기 전에 죽기도 하는데, 나는 벌써 아흔까지 세상을 살았으니 이것이 셋째로 즐거운 일이오. 가난한 것은 선비의 본분이요, 죽음이란 인생의 종착점에 불과한 것, 그 본분을 달게 여기며 종착점까지 걸어가고 있는데 또 무엇이 못 마땅해 마음을 괴롭힌단 말이오.”
공자가 그가 하는 말을 듣고
“대단한 인물이로군, 참으로 마음에 여유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하고 감탄했다.




행복의 댓가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고 사람이라 일컬었다는 것이 창세기 1:27-28의 말씀이다. 이때 창세기 기자는 복이란 말을 ‘바라크’라는 히브리어를 썼다. 바라크는 ‘무릎을 꿇는다’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을 꿇고 복종하며 영광을 돌릴 때 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악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기보다 이익의 향배에 따라 무릎을 꿇는다. 그래서 돈에 무릎꿇고, 우상에 무릎을 꿇으며 권력에 무릎을 꿇는다. 이런 자를 하나님이 행복하게 하실리가 없다. 사람의 행복이란 이익의 향배에 따라 변하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 초나라 때의 자종은 학문도 높았거니와 고상한 성품을 갖춘 당대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성품이 지나치리만큼 깨끗하다보니 가난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초막에서 아내와 함께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오전에는 책을 읽고 오후에는 짚으로 신을 삼아 팔아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종의 인품을 알게된 초나라 왕이 그를 불러 나라의 중책을 맡기려고 신하를 보냈다.
많은 예물과 보석을 실은 꽃마차가 자종의 오두막을 찾아들자 아무리 산골 오두막이라도 화려하기만 했다. 자종의 마음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자종은 아내와 상의를 했다.
“임금님이 국가의 중책을 맡기시려 이렇게 꽃마차까지 보내 오셨구려. 내일부터는 당신도 이 고생 끝났수다. 이제는 맛있는 음식에 비단 옷을 걸칠 수 있고 많은 종들을 부릴 수 있게 되었소이다. 이때껏 당신을 고생만 시켜서 미안했소. 내일 당장 임금 계신 장안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당신의 의향은 어떻소?”
그러나 그의 아내는 조용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저는 보리밥에 나물 반찬을 먹고 신을 삼는 일을 하지만 행복합니다. 비록 맛있는 음식은 못 먹지만, 굶지 않고 또 당신의 사랑을 받으니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분수를 모르고 높은 자리에 올라 잘 먹고 잘 사는 댓가로 초나라의 근심을 떠맡겠습니까?”
자종은 아내의 충고에 뜻한바가 있어 어명을 거역하고 다른 지방으로 옮겨갔다. 비록 그는 고위직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평범한 소시민으로 행복한 일생을 보냈다는 것이 고사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돈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돈에 굴종하는 자는 그 돈이 없어지고 나면 허망해져서 자결한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권력은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꿈꾸는 사람의 꿈속으로나 찾아오는 것이다.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우상이란 실체가 아닌 허상을 이른다. 본래 인간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믿고 그 앞에 경배하고 정열을 바치고 꿈과 소망을 바치다가 허망해지는 것이다.
행복의 파랑새는 죽은 자의 마음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가슴이 뜨겁고 피가 뜨겁고 꿈이 뜨거운 사람의 마음에 찾아온다.
발로도는 말했다. “진짜 행복은 그 값이 아주 싼데도 우리는 행복의 모조품에 많은 댓가를 지불한다.”




불행을 통해 얻은 행복


두 젊은이가 열렬히 사랑하여 결혼에까지 골인되는 행운을 얻었다. 남자는 물려받은 땅과 아주 큼지막한 아파트가 이미 준비되었다고 약혼녀에게 말했다. 약혼녀는 그 크고 멋진 아파트에 채울 혼수품을 고르면서 마냥 행복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업이 하루 아침에 부도가 나서 형편이 어렵게 되고 말았다. 그 충격으로 여자의 아버지는 쓰러져 병원 신세까지 지게 되었다. 결혼을 한 달여 앞둔 날 남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하는 아내가 될 여인의 두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고금씨, 우리가 결혼하여 살기로 했던 아파트는 사실은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앞으로 등기되어 있다고 했던 부동산도 사실은 제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약혼녀도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저는 이제 그 큰 아파트를 채울 살림살이를 하나도 준비할 수 없게 되었는걸요.”
결국 두 사람은 검소하게 결혼식을 치르고 작은 방 한 칸을 얻어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남자는 월급이 적었지만 여자는 마냥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 그 후 1년이 좀 지나자 쓰러졌던 아버지가 회복되고 부도난 사업도 회복되면서 전 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그 때부터 여자는 자신이 불행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많은 혼수 용품을 지금이라도 살 수 있었으나 남편이 가지고 있다고 큰 소리쳤던 큰 아파트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결혼하기 전에 아파트가 있다고 말한 남자에게 속았다는 생각을 하니 억울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남편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친정 어머니에게 하소연했다. 가난한 남자에게 속아서 결혼한 것이 억울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친정 어머니는 딸의 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김 서방이 너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인데 이젠 너에게 털어놓고 말을 할 때가 된 모양이로구나.”
남편이 될 젊은이는 약혼녀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자 혼수품을 해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이 상할까 봐 아파트와 가진 부동산을 처분하여 장인이 될 분의 빛을 갚아 주고, 병원비까지 지불했기 때문에 사업도 일어날 수 있었고 아버지의 건강도 회복될 수 있었다고 말해 주었다.




만족이란 주는데서 온다


만족감은 받는 데서 오지 않고 사실은 주는 데서 온다. 받는 기쁨만을 아는 경우를 속어로 거지 근성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참 기쁨이 없다. 주는 기쁨을 아는 사람은 자기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한다.
뉴욕의 역대 시장 중 명 시장으로 알려진 사람은 라과디아 씨였다. 그가 뉴욕시의 즉결 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 하루는 가게에서 빵을 도둑질하다가 붙잡혀 온 노인이 기소되었다. 노인은 “배가 고파 빵에 손을 댔다”고 고백했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행위는 10불 벌금형에 해당됩니다.”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불을 꺼냈다. “그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고 있었는데 내가 그 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벌금으로 내는 것입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재판부 서기인 베일리프 씨에게 내주며 “이 재판정에 계신 분들도 나처럼 너무 잘 먹은 데 대한 벌금을 내시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노인은 오히려 47불을 손에 들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가게 되었다.
사람이 호흡을 하려면 들여 마시기만 해서는 안된다. 내뿜는 호흡도 있어야 한다. 벌기도 잘 해야겠지만 내주는 일에도 멋진 인간이 되어야 참 기쁨을 발견한다. 우리는 저축에 대하여 신경을 많이 쓰고 각종 투자를 연구한다. 그러나 진정한 저축은 필요한 이웃에게 내어 준 돈과 사랑이다.




행복한 사람이 갖는 공통점


미국 콜롬비아대학의 프린트만 교수가 미국인 10만 명을 대상으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는 조사를 하면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갖는 세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첫째, 낙천적인 인생관을 갖는 사람, 둘째, 사랑을 주고받으며 사는 사람, 셋째, 보람있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서로 사랑하며 보람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언제나 기쁘고 즐겁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제일 처음으로 본다는 기쁨


크로스비(Fany Crosby)라는 여자는 어려서 소경이 되었는데 할머니가 그 아이를 품에 안고 성경 진리를 들려주고 예수님을 믿게 해서 깊은 은혜 가운데 들어가서 찬송가를 8,000개 이상을 썼다. “예수 나를 위하여”(14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204장), “나의 갈길 다 가도록”(434장)등 은혜로운 찬송 가사들이 다 그 여자가 쓴 것이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크로스비양에게 주께서 다른 은혜는 많이 주시면서 왜 시력을 안 주셨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니까 크로스비양이 얼른 대답하기를 “내가 태어날 때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소경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왜요?” 하고 물었더니 “내가 천국으로 들어갈 때 제일 먼저 기쁨으로 바라보는 얼굴이 나의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 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녀는 8세 때에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아! 나는 어찌 그리 행복된 영인지, 비록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결심했다네, 이 세상에서도 만족하기로, 다른 사람들이 받지 못한 축복을 나는 누리는도다. 나는 소경이라고 하여 울지도 않고 한숨 짓지도 않으리라. 그렇다. 나는 그럴 수 없으리라”라고.




가진 자(to have) 보다 있는 자(to be)로


에릭 프롬은 ‘현대인은 존재보다 소유를 우선하기 때문에 물질 지상주의에서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생존이요, 행복에 있다. 소유와 행복은 같은 것이 아니다.
현대인은 가진 자가 되려는 욕망은 하늘에 닿고 있지만 있는 자가 되려는 노력이 없기에 풍부한 것을 가지고도 항상 없는 자로 살아가고 있다.


많이 먹었는데도 배부르지 않다.
큰 집을 가졌는데 평안이 없다.
많은 지식과 학위를 가졌는데 인격이 없다.
좋은 옷을 입었는데 진실이 없다.
많은 것을 가졌으나 행복이 없다.
  


세상의 즐거움 중 가장 큰 것은 자기를 이기는 것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동양 성현의 말씀에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했으니, 위로 하나님을 섬겨 두려워 아니하고, 아래로 사람에게 부끄러움 없음이 첫째 즐거움이요, 부모와 형제가 구비(具備)하여 있음이 다른 하나의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英才)를 많이 교양하는 것이 또 다른 하나의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이와 달리 믿는 자에게는, 믿지 않는 자가 깨닫지 못하는 즐거움, 여덟 가지가 있다.


1. 감응의 낙(感應之樂)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즐거움이다. 어느 나라 백성이든지, 그 백성이 임금에게 상소하여, 그 상소에 응답해 주시면 그 백성의 즐거움은 비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천지의 대주재가 되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사 응답해 주시면, 그 즐거움이야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어떤 임금이 7년 동안 비가 오지 않으므로 자기를 낮추어 하나님께 잘못된 것을 자복하고 구했다. 이에 응답이 있어서 비가 내릴 때, 임금은 비오는 것보다도 자기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것을 얼마나 즐거워했겠는가! 임금으로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을 즐거워했다면, 하물며 우리들의 기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으로 들어주실 때에, 그 즐거움을 다 말할 수 있으랴! 이에서 더 크고, 영광스럽고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실로 이것은 신자의 가장 즐거워할 일이요 권위가 되는 일이다. 성경을 보면 히스기야 왕이 성전에서 밤을 맞도록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결과, 앗수르 대왕의 수모를 면했을 뿐 아니라, 변하여 즐거움이 되었으니 이는 감응의 즐거움이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도 기도하여 하만의 화를 면하고, 슬픔이 도리어 즐거움이 되었으며, 근심이 변하여 즐거움이 되었으니 이것도 감응의 즐거움이다. 우리도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기도함으로써, 어려운 일이 변하여 즐거운 일이 되도록 하자.


2. 도미의 낙(道味之樂)이다


유치한 교인은 성경의 맛을 몰라, 권면에 이기지 못하여 몇 장 보는 것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보지만, 성경의 그 보는 이치를 성령의 감화로 깨달을 때에, 그 말씀은 꿀 송이보다 더 달고 정금보다 더 귀한 것이다(시 19편). 실로 우리에게 영화를 받게 하고, 윤택하게 하여 힘을 주시고, 장성케 하며, 영생케 하는 것이 성경 말씀이다. 하나님의 성경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경륜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이것이 곧 성경이다.
사람은 지혜가 높고 학문이 높은 사람에게서 그 말하는 바를 듣고자 한다. 들을 때에 유쾌함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물며 지혜가 우주에 충만하고, 무소부지 하신 하나님의 교훈이 어찌 인간의 즐거움을 이루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성경에 취미를 붙이지 못하는 이는 맛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예컨대 앓고 있을 때는 단 꿀이 입에 쓴 것과도 같다. 그 꿀이 쓴 것이 아니라 입맛이 없는 연고이다. 이와 같이 성경 말씀 자체가 재미없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믿음이 병들어서 재미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재미가 없다는 사람은 반성하여, 다시 도미(道味)의 맛을 얻기 바란다.


3. 극기의 낙(克己之樂)이다


혹은 풍금을 치며 즐겁다 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즐겁다 하며, 혹은 이기고 즐겁다 하지만, 오직 신자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원수를 이기는 즐거움이 가장 큰 즐거움 인 것이다. 원수가 무엇인가? 곧 교만이다. 이 교만은 자기를 지옥으로 이끌고 뭇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하는 것이다. 교만으로 사람을 업신여기면, 업신여기는 대로 몇 배를 거둘 것은 그것을 심었기 때문이다. 이 교만을 이기고 겸손한 자리에 앉게 되면,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배워 지혜 있는 자가 되고, 나보다 못한 자에게 대하여는 불쌍히 여기며, 위로하고, 도와주게 되니, 하나님 앞에 가도 설만 하며, 뭇 사람에게도 대접을 받을 만한 것을 이루었으므로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또 자기에게 있는 음욕을 이기는 즐거움이 있다. 뭇 사람이 음란한 바다에 빠져서 눈을 여자와 더불어 노는 것으로 범죄하고, 귀는 더러운 소리를 듣는 것으로 영혼을 더럽게 하며, 정신과 마음과 생각과 뜻이 음란한 일에 빠져 쉬지 않고 죄를 짓는 것이 마치 구더기가 더러운 속에서 춤추며 즐거워하는 것과 같이 행동하는 때, 이 일을 분토 같이 여기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비록 땅에서 먹고 입지만, 이는 하나님 나라에 있는 천사와 같이 거룩한 삶이며, 할렐루야 찬송할 즐거움인 것이다.


4. 교인을 양성하는 즐거움이다


신자가 다른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고 가르치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쉽고 아무 재미가 없는 것 같으나, 그 중에는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비유하면, 부인이 아기를 많이 나서 기르는 수고가 많으나, 그 즐거움은 날로 더하여 그 어린이의 자라는 것을 볼 때, 수고를 모두 잊어 버리는 것이다. 남을 인도하는 자도, 그 교인이 어린이의 상태에서 변하여 장성하여 가는 것을 볼 때, 그 재미는 자녀를 키우는 부인의 즐거움과 같은 것이다.
얼마 전에 찬미를 못하던 교인이 찬미를 하게 되는 것을 볼 때, 기도를 못하던 교인이 기도하게 될 때, 성경으로 남을 가르치게 되고 직분이 무엇인지 모르던 교인이 믿어 중한 직분을 받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볼 때,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즐거움은 가히 비할 것 없이 큰 것이다.


5. 환난안위의 낙(患難安慰之樂)이다


신자가 주를 위하여 환난을 받게 될 때에, 사람들은 보고 환난을 받는 줄 아나, 신자는 그 중에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다.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즐거워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다른 죄인들은 죄로 인하여 갇혔지만, 자기는 주의 도리를 위하여 갇혔으므로 그 욕이 도리어 상이 될 것을 즐거워했으며, 그 고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할 것을 즐거워했으며, 그 고난으로 복음이 더욱 증거 됨을 인하여 즐거워했으며, 그 고난으로 인해 남이 고난 당할 때 속히 위로할 만한 자가 될 것이므로 즐거워했던 것이다. 우리도 환난 중에 즐거움이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6. 영생의 낙(永生之樂)이다
 
사람들이 가장 슬퍼하며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다. 이 죽음은, 죽은 후에는 영영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세상을 떠나면 이 세상보다 억만 배나 나은 영생이 있음을 알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영생은 이 몸을 벗은 후에 영혼, 곧 속사람, 다시 말하면 정신과 마음과 뜻과 성품이, 이 몸을 벗어나서 하나님 계신 곳에 가서 괴로움 없이 평안함이요, 슬픔이 없이 즐거워하는 것이며, 욕 없고 영화가 있으며, 병 없고 건강하며, 죽음이 없고 영영 사는 것이다. 또 밤이 없고 낮뿐이며, 원수가 없고 사랑만 있는 곳에서 무궁토록 그 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이 어찌 즐겁다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신자는 죽는 것을 마치 배를 타고 먼 바다를 건너 가, 고향에 내리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7. 주님과 동행하는 낙(與主同行之樂)이다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을 즐겁다 하며, 어진 친구를 만나 같이 있는 것을 즐겁다 한다면, 신자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있게 되는 즐거움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다니엘이 사자 굴에 갇혔을지라도 주께서 사자의 입을 봉하여 해롭게 못할 때 비록 사자 굴에 있었지만 그 즐거움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니엘의 친구 세 사람이 비록 불화로 가운데 던진바 되었을지라도 주님이 같이 하셔서 불이 그들을 해하지 못할 때, 그 즐거움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요한이 밧모섬에 정배갔을지라도 주께서 같이하시고 계시(啓示)를 보여 주시는 때, 그 즐거움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떠한 때를 막론하고 주님께서 같이 하셔서, 혹 암시(暗示)로 성경의 교묘한 이치를 알게도 하시고 말할 수 없는 이치를 보여 주시기도 하시며, 강론할 좋은 제목을 알려 주시기도 하고, 실수할 것을 붙들어 실수 못하게 하시며, 잘못하면 통회하는 마음도 주시고, 우리 소망되는 하늘 나라를 보여 알게도 하시는 때, 그 즐거움이야말로 어떠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주와 같이 동행(同行)하면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신자에게는 이에서 더한 즐거움이 없는 것이다.




8. 만물을 관할하는 낙(萬物管轄之樂)이다


사람이 만물을 볼 때에, 꽃이나 초목이 만발할 때에 그 나타나는 빛을 보고 좋다고 하지만, 그 보다 더 오묘막측한 것은 모든 꽃이 땅에 올라오는 것으로, 각각 이 유를 따라 빛이 다르며, 나무는 각각 유를 따라 별스럽게 된 것과 모든 실과는 그 유를 따라 각각 맛이 다른 것이다. 짐승은 그 유를 따라 모양이 다르며, 바다에서 물을 끌어 올려 구름을 만들고, 비를 주시는데 폭포와 같이 하지 않으시고, 방울방울이 내려 초목에 해(害)를 주는 일이 없이 유익하도록 한 것이며, 추울 때는 얼음장으로 내리지 않고 백화 모양의 눈을 내려 상치 않도록 하심이다. 또 일월성신을 궤도에 따라 운행하시며, 인생에게 가장 특별한 지혜를 주시어 만물의 영장이 되도록 하신 것으로, 이것이 어디서 온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무미하게 보이지만, 오직 신자는 대주재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주장이심을 깨닫는 동시에 모든 물건을 볼 때에 찬송치 아니할 것이 없고, 그 지혜와 공의와 능력과 절제를 배우지 않을 것이 없으며, 감사함이 심중에 솟아나는 즐거움으로 가득한 것이다.


9. 이 즐거움은 수고가 지나간 후에 오는 즐거움이다


기도하는 수고가 없이는 응답의 즐거움이 없을 것이고, 성경을 상고하는 수고 없이는 십자가 도애의 낙이 없을 것이고, 자기를 이기려고 하나님 앞에 직고하는 수고가 없이는 극기의 낙이 없을 것이고, 순복하는 수고가 없이는 동행의 낙이 없을 것이고, 주를 위하여 핍박받는 수고가 없이는 환난안위의 낙이 없을 것이고, 성령의 감동시킴을 따라 수고함이 없이는 영생하는 즐거움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만물을 연구하는 수고 없이는 관할의 낙도 없을 것이다. 이 즐거움을 보고자 할진대, 수고를 아끼지말고 즐거움으로 지내시기를 바란다.
-김익두 목사-














감사로 예물을 삼으라


유럽의 어느 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을 맞아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목사님의 설교가 끝나고 감사 예물을 드리는 시간이 되었다. 헌금 바구니가 도는데 한 소년이 헌금 바구니에 들어갔다. 온 교우들이 소년을 주시했다.
예배 후에 목사님이 소년에게 “왜 헌금 바구니에 들어갔느냐”고 물으니 그 소년의 대답은 “헌금은 없고 몸이라도 드리고 싶어 헌금바구니에 들어갔다”고 했다. 이 소년이 그 유명한 리빙스턴이다. 그는 어린 시절의 헌신 결단에 따라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어 죽음의 사선을 넘는 선교를 하여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가 되었다.


감사의 나무를 심어라


어느 철인은 말했다. “평화와 행복을 원하느냐. 그렇다면 네 마음의 정원에 감사의 나무를 심어라”
감사는 행복의 원천이다. 평화는 감사의 나무에 피는 아름다운 꽃이다.
그런데 오늘 현대인의 마음에서 감사가 사라지고 있다. 있다고 해도 빈약하기 그지없다. 왜 그런가?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영향이다.
감사는 은혜를 아는데서부터 출발한다.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았다. 나 혼자 모든 것을 이룩했다고 느끼는 사람은 감사가 그 마음에서 우러나올 수 없다.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여기까지 보호해 주셨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서 길러주신 부모님의 큰 은혜, 나를 가르치신 스승들의 은혜, 정신적 성장을 도운 양서와 그 저자들. 나에게 좋은 잠자리와 먹거리를 제공해 준 동포들의 노고, 맑은 공기와 햇볕, 사계절의 자연 속에서 건강하게 지켜주는 하나님의 은혜.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다.
그래서 인간을 세상에 대하여 빚진 존재라고 한다. 무슨 빚인가? 은혜를 되돌려 드리지 못한 부채다.
인간다운 참 모습은 감사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감사를 모르는 인간은 저 차원의 인간이다.
그래서 어떤 종교인은 ‘은혜를 아는 자, 이것을 인간이라고 일컫고, 은혜를 모르는 자, 그를 짐승이라고 일컫는다’고 했다.
배은망덕하는 사람이 있다. 정성껏 도와주고 보살펴 주었는데 은혜를 악으로 갚는 사람이 있다. 치욕적 인간이다.
사도 바울도 외쳤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니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사도 바울이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감사를 강조한 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다른 사도들보다 특심했기 때문이다.
루소도 감사를 이렇게 강조했다. “감사는 우리가 당연히 지불해야 할 의무다. 아무도 감사를 남에게 기대할 권리는 없다.”
감사의 고갈은 인간 관계의 가장 큰 불행이다. 감사의 교류 속에 행복의 미소가 오간다. 감사도 훈련에 의해 조절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성숙한 믿음의 감사


공산 치하 때, 어느 목사님을 체포해다가 고문을 하니까 매를 맞으면서도 “예수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하였다. 그래서 내무서원이 “매를 맞으면서 뭐가 감사하냐?” 하니까 그 목사님은 “나는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예수님으로 꽉 차 있기 때문에 건드리기만 하면 예수님밖에 안나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럼, 매를 맞으면서 무엇이 그렇게 감사하느냐?”고 하니까 “내가 예수님을 위해 매를 맞으면 그만큼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감방에 집어넣었더니, 이번에도 기뻐하며 감사를 연발했다. 그래서 무엇이 그렇게 감사하냐고 했더니 “조용한 방에서 마음껏 기도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 놈의 목사, 사형을 시켜 버리겠다.”고 하니까 더 기뻐하면서 감사하다고 했다. “죽인다고 하는데 뭐가 그렇게 감사하냐?”고 하니까 “이 세상에서 순교하면 이 다음 하늘 나라에서 제일 큰 상급을 받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순교할 수 있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하니까 내무서원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심하다가 결국 집으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유치한 아이들은 달콤한 사탕이나 과자를 하나 주면 좋아하지만 그보다 천 배, 만 배 더 귀중한 약을 먹여주면 쓰다고 원망하며 안 먹으려고 든다. 아니, 울면서 부모에게 덤벼들기까지 한다. 이와 같이 유치한 신앙의 사람들은 무슨 달콤한 일이 생길 때만 감사하고, 더 큰 그릇으로 만들고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해 고난과 실패가 올 때에는 원망, 불평을 한다. 그러나 성숙한 신자가 되면 어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믿기 때문에 마음이 평안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감사의 조건은 많다


영국의 유명한 매튜 헨리(Mathew Henry) 목사님이 하루는 어떤 골목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도 돈도 다 빼앗기고 매를 맞고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정신차려 일어나 보니 온 몸이 상처투성이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간신히 일어나 집에 돌아오자 온 식구는 다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재에 들어가서 그 피투성이의 몸을 가지고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는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생명만은 살아 돌아와서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또 내가 만약에 예수를 안 믿었다고 하면 나를 때린 저 강도와 같이 되었을 터인데 예수 믿고 강도가 안되고 목사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또 이 세상의 모든 것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내가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감사의 조건만 찾아서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네 가지 감사


회랍의 철인은 그의 삶 속에서 4가지를 감사하였다.
첫째는 동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했다. 소나 개나 곤충으로 태어나지 않고 만물의 영장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했다.
둘째는 사람으로 태어나되 야만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문명의 도시 아테네에서 문명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했다.
셋째는 사람으로 태어나되 여자로 태어나지 않고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했다.
넷째는 유명한 철인 소크라테스 시대에 태어나서 그의 제자가 된 것을 감사했다.
플라톤이 이와 같은 사실에 감사했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 많은 감사를 해야 할 것이다. 감사의 이유는 율법 시대에 태어나지 않고 복음이 전파된 은혜 시대에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안요한 목사의 감사


영화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주인공 안요한 목사는 안진삼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눈병으로 37세에 맹인이 되었고 절망에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아내도 그를 버리고 집을 나가 버렸다. 그는 삶 전체에 대한 절망으로 죽으려고 하다가 “요한아, 요한아, 내가 너를 떠나지 않으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음성을 듣고 37년 동안 영적으로 감겼던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 뉴욕 헬렌 켈러 재단의 도움으로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맹인 박사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간증했다.
“저는 장님이 되고 수지 맞았지요. 보았던 37년보다 앞못보는 7년이 오히려 행복하고 보람이 있습니다. 온 천하를 가져도 하나님 없는 인생은 만족과 기쁨과 감사가 없기에 행복할 수 없습니다.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


큰 병원의 구급차 운전기사로 일해온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여전히 응급 환자를 병원에 내려놓고 차를 돌리려는데 병원 창문에서 누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부르는 겁니까?”하고 대답하자 병실 창문에 상체를 내어놓은 환자 한 사람이 대답했다. “그렇소, 그런데 내가 한 가지 당신에게 물어보겠소. 당신은 건강한 몸을 가졌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 본 일이 있소?” 이 질문을 통하여 그 운전기사는 10년 동안 병원에서 구급차를 운전하면서 한 번도 건강한 몸에 대하여 감사해 본 일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떤 아기 엄마는 새로 태어난 아기의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세면서 열 손가락을 다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한다. “감사는 축복의 어머니며 교회를 어머니로 섬기지 못하면 사랑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키프리나)




벙어리의 기도


어느 날 벙어리가 열심히 기도를 했다. “내 입을 열어 주시면 내가 죽는 날까지 목청이 터지도록 감사하는 찬송을 부르고 평생을 전도하겠습니다.”
그러나 날이 가고 달이 가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낙망한 나머지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 때 마침 길가에 있는 개천에 어떤 사람이 빠진 것을 발견했다. 얼른 가서 건져주고 보니 그는 장님이었다. 이 벙어리는 그때에야 하나님이 자기를 소경되지 않게 하신 것에 감사했다. 그 후부터는 자신의 처지에 감사하고 힘써 전도하며 더욱 행복할 수 있었다.




전화위복(1)


어떤 분이 배를 타고 가다 배가 파손되는 바람에 바다에서 나무조각을 붙잡고 표류하다가 어떤 무인도에 닿았다. 사람이 없는 곳에 혼자 나뭇가지를 꺾어서 움막처럼 집을 지었다. 그리고 바닷가에 나가 고기를 잡아다가 어떻게 나뭇가지를 비비서 불을 피워 구워 먹고 했다. 하루는 조개를 잡으러 나갔다가 돌아와보니까 자기가 피워 놓은 불이 집에 붙어서 집이 다 타버렸다. 그날 밤은 노천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배 한 척이 그 무인도로 와서 그 사람을 구출해 주었다. 그가 “어떻게 여기 사람이 있는 줄 알고 왔습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어제 배에 짐을 싣고 지나가다 보니까 여기서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짐을 풀어내려 놓고 오는 길에 지금 들른 것이라고 하였다.
애써서 지어놓은 집이 불타서 낙심할뻔 했지만 도리어 그 집이 불탄 것 때문에 그 연기를 보고 자기를 구출해 준 것이다.




전화위복(2)


한 어부가 두 아들을 데리고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파도가 세차게 일어나고, 비가 억수 같이 쏟아져 내렸다. 어느덧 캄캄한 밤이 되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마저 잃어버리고 표류하게 되었다. 어디로 뱃머리를 돌려야 할지 전혀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얼마 동안 있으면 배가 파선되어 삼부자가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들이 이 같은 위태한 지경에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저쪽에서 작은 불빛 하나가 보이더니 점점 커져서 불기둥이 되어서 솟아올랐다. 그들은 그 불기둥을 보고 그 쪽이 육지라고 판단을 하고, 사력을 다해 노를 저어 가까스로 살아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부인이 울먹이며,
“우리 집에 불이 나서 다 타버렸어요”
그 순간 아버지와 두 아들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집에 불이 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육지를 찾지 못해 지금쯤 바다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고난은 이렇게 때때로 우리에게 예상치 못했던 복을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친다.




전화위복(3)


캘리포니아(California)에 큰 홍수가 났을 때 한 사람의 방앗간이 떠내려갔는데 그 방앗간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 이 홍수로 재산이 파산하고 이 사람은 낙심하고 주저앉았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이런 일이 자기에게 왜 닥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재난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고 선을 이룬다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그 홍수로 큰 황금 광맥을 발견하게 되어 큰 부자가 되었다. 결국 그를 가난하게 했던 일이 오히려 큰 부자가 되게끔 하였다.
또 미국 서부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큰 농장에 물을 대 주던 유일한 우물이 무너지고 막혀 버렸다. 그러나 이튿날 그 막혀버린 샘에서 석유가 솟아올랐다. 




감사를 담아 오라


옛날 회랍 신화에 제우스 신이 두 시종을 불러서 각각 바구니 하나씩을 맡겨 주면서 지상에 내려가 인간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한 시종에게는 불평 불만을 찾아 담아오고, 한 시종에게는 반대로 감사만 찾아 바구니에 담아오라 했다. 조금 있으니 한 시종이 올라왔는데 그는 불평 불만을 바구니에 가득 담아 가지고 와서는 말하길 “지상에 내려가니 불평 불만이 너무도 많이 있어 금방 담아 가지고 왔다”고 했다. 그러나 감사만을 찾아 바구니에 담으러 간 시종은 지금까지도 그 바구니에 진정한 감사를 다 채워 담지 못하고 인간 세계를 헤매고 있다는 것이다.




진짜 감사는 잊어버리고


어느 시골 장날에 아버지가 십 오륙 세쯤 되는 소녀 딸하고 장에 갔다. 그 당시에는 돈을 마련하는 방법이란 농사 지은 쌀을 한 자루쯤 가지고 장에가서 팔아 돈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돈으로 이것저것 일용품을 사오곤 했다. 시골 장날이라 버스가 만원이었는데 그만 타고 가던 버스가 전복되었다. 중상자가 속출하고 모든 사람이 아우성이었다. 아버지와 딸은 다행히 무사했다. 마침 아버지는 정신을 차리고 우는 딸을 한참 보다가  중상당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 쌀  포대가 없어졌다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는 길


수년 동안 행복한 생활을 보낸 후 남편을 잃은 부인이 있었다. 자녀도 없이 홀로 남은 그녀는 점점 더 자기 연민과 우울에 빠져들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아무 버스나 타고 정신없이 가다가 종점에서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오르간 소리가 나는 교회 안에 들어갔는데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가 지난 후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녀 곁에는 초라한 옷을 걸친 두 어린아이가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부모님은 어디에 계시니?”라고 물었다. 그 작은아이들은 자신들에게 부모님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과자와 선물을 사 주었고 그들과 말벗이 되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는 동안 놀랍게도 그녀는 자신의 우울증에서 벗어나 자기가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행복하게 지냈던가를 기억하고는 감사하게 되었다.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미시간 호수에서 큰 배가 파선하여 많은 사람이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났을 때 헤엄을 잘 치는 용감한 청년이 무려 17명을 구조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신문이 대서특필하고 설교자들이 영혼 구원의 실화로 자주 인용하곤 했다. 한 번은 어느 설교자가 그 실화를 들어 설교를 하였는데 설교를 마치자 청중 가운데 한 청년이 손을 들면서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하였다. 설교자는 그를 강단으로 초청하고 반가워하면서 교인들과 함께 크게 환영했다. 그리고 나서 그에게 소감을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대가를 바라거나 인사 받기 위해 한 일은 아니지만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때 목숨을 걸고 17명의 생명을 구해 주었으나 그들 가운데 찾아와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더군요”라고 했다. 감사는 당연한 인간의 도리요, 신앙인의 기본 덕이다.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미국 필라델피아 템플 침례교회가 크게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눈물겨운 이야기가 숨어 있다고 한다.
어느 날 해티 매 와이아트(Hatue Mae Wyatt)라는 소녀가 템플교회 주일학교를 찾아갔으나 앉을 자리가 없어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가 무책임하게도 이 아이에게 “애야, 너는 앉을 자리가 없다”라고 했다.
그 아이는 슬픈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고 병을 앓다가 죽었는데, 나중에 침대의 베개 밑에서 낡아빠진 두툼한 지갑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동전 57전과 메모지 한 장이 들어 있었고, 거기에는 ‘템플 주일학교를 좀 더 크게 지어서 많은 어린이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아이는 주일학교 건축을 위하여 근 2년간을 푼푼이 용돈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그 교회의 루셀 콘웰 목사는 이 사실을 성도들에게 전했고, 이로 인해 건축 기금 모금 운동이 벌어져 57전으로 시작된 어린아이의 오병이어가 무려 57만 달러에 이르렀다. 이 기금으로 3천 명이 앉을 수 있는 큰 교회가 건립되었고, 후에 템플 대학과 병원이 이 교회의 재단으로 세워졌다.
한 작은 불꽃이 넓은 벌판을 다 태운 격이 되었거니와, 온전히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된 일은 이렇게 축복받게 마련이다. 




살아 있는 것 자체만도 감사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김준호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무슨 자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훈련 중 전차에서 떨어져서 목을 심하게 다쳤다. 이 때문에 그는 머리와 목만 제하고 전신이 마비가 된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 같은 참담한 처지에서 뜻하지 않게 성경을 읽게 되었다. 손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입에다 젓가락을 물고 성경책을 넘기면서 성경을 읽게 되었다. 날마다 이런 일을 계속 하던 중에 성경에서 놀랍고도 소망에 찬 말씀을 듣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할 만한 삶이 허락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처지에서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감사할 수 있고 소망을 지닐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는 젓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는 이때부터 입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글씨까지 쓰게 되었다. 너무 오랫동안 붓을 입에 물고 애쓴 탓으로 이가 흔들리고 잇몸에서 피가 흘렀다. 그는 입술이 부어 터질 정도로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렸지만 말씀을 깨닫고 보니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으로 동양화 40점, 서예 15점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이미 81년도와 84년도에 전시회를 두 번이나 열었다.
그는 신체적으로 볼 때 무능한 자요, 가난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통하여 삶의 능력과 삶의 지혜를 얻은 사람이었다.   




종 탑에 새겨진 옥수수


독일의 작은 마을에 교회가 하나 있었다. 이 교회 종 탑에는 여섯 개의 옥수수가 그려져 있는 아담한 종이 매달려 있었다. 이 종에는 깊은 사연이 깃들어 있다.
250년 전 예배당의 종소리는 마을의 시계를 대신하여 종소리를 듣고 멀리 있는 사람도 제때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종소리를 듣지 못하는 더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은 시간을 맞추지 못해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일이 자주 생겼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넉넉지 못한 형편이어서 큰 종으로 바꿔 달기는 힘들었다.
목사님은 큰 종을 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은 마당에 한 그루의 옥수수를 기르기로 생각한 것이다. 목사님은 그 한 그루의 옥수수를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면서 정성껏 길렀다. 그 결과 여섯 자루의 옥수수를 딸 수 있었다. 목사님은 그 옥수수 씨를 모든 교인에게 나누어주고 정성껏 길러 수확을 거두게 하였다. 이렇게 8년을 기르니 새 종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이 종에 6개의 옥수수를 그려 넣어 오래 기념하기로 하였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이 진정한 감사


어느 마음 착한 농부가 농사를 짓다가 특출나게 크고 좋은 무가 생산되었기에 그것을 원님에게 보냈다. “모든 것이 원님의 선정 덕분입니다” 하면서 원님에게 바쳤을 때 원님은 너무나 기특한 생각이 들어 무언가 보상을 하고자 했다. 요즘에 들어온 것 가운데 뭐 좋은 것이 없는가 하고 아랫사람들에게 물으니 큰 황소 한 마리가 있다고 했다. 원님은 그것을 끌어다가 농부에게 주라고 했다. 무 하나로 큰 횡재를 얻은 농부의 소식을 들은 심술쟁이 농부가 무 하나에 황소 한 마리면 자기는 황소를 바쳐 땅이라도 몇 마지기 타낼 속셈으로 황소를 몰고 갔다. “원님, 저는 수십 년간 황소를 길러 왔습니다만 이렇게 크고 좋은 황소는 처음 봅니다. 이는 원님의 선정 덕분입니다” 하였다. 원님은 농부에게 고맙다고 한 후 요즘 들어온 물건 중에 좋은 것이 있는가를 물으니 크고 좋은 무가 하나 있다 하기로 그것을 가져다 주었다. 진정한 감사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드리는 것이다.




역경 중에 감사


다음은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철저히 지키는 그리스도인은 전체 중에 몇%나 될까. 역경을 당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반응은 “어찌할꼬” “재수없게 이게 뭐람”이지 “감사합니다”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참 신앙인은 하나님의 섭리를 철저히 믿고 역경 속에서도 감사하는 사람이다. 수 년 전 내게 한 분밖에 없는 외삼촌댁을 방문한 적이 있다. 외삼촌이 나와 이런 저런 말을 나누다가 문득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평생 70여 년을 살아왔지만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감사 헌금을 교회에 바친 녀석은 처음 봤다. 내 막내아들이 바로 그 녀석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했다. 모교회 집사인 내 외삼촌은 좀 믿음이 약한 분이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하다. 내 외사촌 동생되는 그 막내 아들은 다음해에 감신대에 입학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지금은 서울의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감사의 삶


감사에는 망원경보다 현미경이 더욱 필요하다. 망원경으로는 하나님의 신묘한 솜씨를 자세하게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미경으로 세포 하나 하나에 하나님의 사랑과 의미를 찾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감사 결핍증에 걸린 사람들이 많다. 감사는 몇 가지 조건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믿음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이 선행되어야 감사가 가능하다. 둘째, 통찰력이다. 자신의 껍질을 벗고 밖으로 나와서 통찰할 때 감사의 조건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을 자기 객관화라고 부른다. 자신을 제 3자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때 진정한 존재의 감사가 터져 나올 것이다. 셋째, 마음의 기억이다. 감사는 마음의 밭에서 나온 열매이기 때문에 그 마음 밭을 너그럽게, 때로는 가난하게 만들어야 한다.
에머슨은 말하기를 “그대가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 하더라도 그대가 가진 것에 최선을 다하라.”라고 했다. 인간의 소유욕이 생기면 그때부터 감사가 줄어든다. 소유욕은 불안과 좌절을 맛보게 한다. 그러므로 가급적 떨쳐버리는 무소유(無所有)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감사 정신에서 나온다. 일생을 배울 과목이 즐비하게 많으나 그 가운데 마스터할 수 없는 과목이 감사 과목이다.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의 은총, 부모님의 은공, 스승의 교육, 이웃의 도움, 가족의 사랑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늦가을 낙엽의 하찮은 몸부림까지도 감사의 프리즘으로 보면 감사의 원소를 찾을 수 있다. 인생 종말의 값진 진리의 발견이다.
범사(凡事)에 감사하라는 바울의 말은 달관(達觀)의 경지가 된 그의 신앙의 한 표현이었다. 감사는
① because의 감사, 즉 때문에(소유)의 감사가 있고
② in spite of의 감사, 즉 불구하고의 감사로 무소유의 감사라 할 수 있다.
오병이어의 감사 정신을 생각해야 한다. 1회용 식사를 감사할 때 수천 명을 배불리게 할 수 있었다. 쌀(米)은 八十八의 합성어이다. 즉, 쌀 한 알이 밥으로 입에 들어가기까지 농부의 수고를 88번 한 끝에, 식사가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감사는 많을수록 좋다. 감사 결핍증의 한국인들이 좀더 세미한 부분의 감사 조건을 찾을 수 있다면 한국은 더욱 밝을 것이다. 감사는 원어 우칼리스트, 즉 하나님을 향한 상쾌한 감정에서 그 뜻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것이 신앙이요, 상쾌한 감정이 기쁨이다. 즉, 믿음에 기쁨이 있을 때 감사가 나온다. 그것은 신앙의 희열이다. 병상에 누운 뒤에야 감사의 조건을 찾은 환우들을 자주 보게 된다. 기운이 펄펄할 때는 천지를 모르고 우쭐대던 사람들이 병상에서 그토록 변해 있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한계를 접하게 된다.
감사는
①마음으로 해야 한다.
②얼굴에 미소를 짓고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
③손으로 악수하며 감사를 표해야 한다.
④입으로 감사를 연발해야 한다.
미국인은 'Thank You'를 습관화하고 있다. 감사에 결코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미국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도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두 사람이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내용은 ‘워싱턴이 이긴다’, ‘아니다 진다’였다. 워싱턴이 이긴다는 사람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지난 겨울 찬바람이 불던 어느 날 숲 속을 지나는데 숲 속에서 사람 소리가 들려 그 근처로 가보니, 워싱턴 장군이 얼굴을 눈 덮힌 땅에 댄 채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워싱턴이 이긴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의 기도 요청


1945년 4월 12일 목요일에 미국 제 32대 루즈벨트 대통령이 급서하므로 부통령이었던 트루먼이 대통령에 오르게 되었다. 많은 기자들이 찾아가서 취임 소감과 국민들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묻자 그는 단 한 번이라도 기도를 올린 일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지금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세계를 좌우할 수 있는 미국의 대통령이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실로 기도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기도


세계 2차 대전 때, 블란서가 독일 나치스 군대에게 패해 버리고, 영국에서 도와주려고 건너갔던 30만 대군이 자기들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영국으로 다시 건너오려고 했다. 그 때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도망가는 영국 군인들을 아주 전멸시켜 버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때 영국 왕 죠지 6세가 온 영국에 “어떻게 하든지 영국 군대를 건져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전 국민에게 기도의 날을 선포하기 기도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날 독일군 편에는 큰 폭풍우가 일어서 비행기가 한 대도 뜰 수 없었다. 너무 비가 많이 와서 탱크 한 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데 영국군 편에는 이상할 정도로 도버 해협이 잔잔하고 고요하고 거울같이 맑아서 수천의 배가 30만의 영국 군대를 무사히 영국까지 옮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온 영국 국민이 하나님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37세된 새 교우의 기도


청장년회 헌신예배 때 일이다. 기도 많이 하는 부인 따라서 교회에 나온 새 교우가 대표 기도를 자청하고 주일 밤 예배 때 기도하게 되었다. 부인이 적어 준 시편으로 기도를 하던 도중 갑자기 기도가 멈추었고 교인들은 일제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새 교우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하나님 난 기도할 줄 모릅니다. 기도 잘 하게 해 주세요.” 그때 모든 교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하며 통성 기도가 터져 큰 은혜를 받았다. 기도 잘 한다는 것은 유창한 말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손


많은 성화(聖畵)들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다. 그림 하나 하나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위대한 설교일 수가 있다. 그런데 그 그림의 의미를 이해할 때, 또는 그 그림이 그려지게 된 배경과 동기를 알게 될 때, 더 큰 감동적인 설교가 될 수 있다. 그런 그림들 중 하나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도하는 손’이다. 거칠어진, 그래서 힘줄까지 눈에 뜨이는 손, 그러나 경건히 아름답게 포개진 채 위로 향해져 있는 손! 이 그림 자체만 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경건한 마음, 기도하고픈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일화가 있다.
한 마을에 두 소년이 살았다. 그림을 즐기는 같은 재간을 가졌기 때문에 피차의 나이는 서너 살 달랐지만 늘 좋은 친구였다. 어느 날 두 소년은 이런 의논을 했다. 즉, 도시로 나가 둘이서 힘을 모아 그림 공부를 하자는 것이었다.
두 소년은 드디어 도시로 나갔다. 둘이 다 함께 공부하면 밥을 먹을 수 없으므로 나이 많은 소년이, 자기가 일을 할테니 어린 소년이 먼저 공부를 하고 공부가 끝나면 서로 바꾸기로 했다.
먼저 공부하기로 된 소년은 열심히 공부하여 몇 년 후에는 그림을 팔 수도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하루 저녁에는 대단히 기쁜 마음으로 처음으로 그림을 판 돈을 들고 다른 소년이 일을 하고 있는 식당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 소년은 창 밖에서 식당을 들여다보고 말문이 막혔다. 콘크리트 바닥에 자기의 친구가 꿇어앉아 빗자루를 옆에 놓고 기도드리고 있었다.
“하나님, 저는 심한 일을 오래 했기 때문에 뼈가 굳어져서 이제는 그림을 공부해도 훌륭한 화가는 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제 친구는 더욱 유명한 화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창 밖에서 소년은 이 기도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곧 종이를 꺼내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그렸다. 자기를 위하여 봉사한 그 거룩한 손, 비록 거칠지만 친구를 위하여 희생된 그 손을 그려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응답받는 기도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가 어느 날 자기 집에 친구들을 초청하였다. 얼마 후 친구들은 잠자리에서 주인이 없어진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는데, 마당 한가운데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에 애통하여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는 “오 하나님이여,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옵소서. 아니면 이 생명을 거두어 주소서.”하며 부르짖었다. 그의 기도는 실로 한 나라의 운명을 걸머지고 백성을 대신하여 생명을 바치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이와 같은 기도가 응답 못받을 리가 없는 것이다.
여왕 메리는 일만 군대보다 존 낙스의 기도가 더 무섭다고 하였다. 국가는 기도로 터를 닦고 성을 쌓아야 한다.
미국 역사에서 새 나라 헌법을 제정하기 위하여 헌법 제정 회의가 필라델피아에서 소집되었을 때였다. 그들은 한가지도 의견일치를 못보고 서로 분열하여 퇴장하려고 할 때에 벤자민 프랭크린이 말했다.
“여러분,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이 나라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가운데 탄생한 국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모두 기도의 응답을 믿습니다. 우리 다같이 무릎을 꿇어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이 어려운 궁지와 문제에 해답을 주시기를 기다립시다.”
그러자, 그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고, 드디어 불후의 문서인 미합중국 헌법을 제정하였던 것이다. 기도로 세운 헌법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기도로 세운 나라는 번영한다. 미국 의사당에는 기도실이 있다고 한다.




6.25 때 장마를 멈추게 한 기도


우리 나라도 6.25때에 공산군에게 밀려 낙동강까지 내려갔을 때에 유엔군이 비행기로 공격하려고 했으나 그 때가 심한 장마철인고로 비행기 한 대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에 피난온 목사님들을 불러모아 놓고 장마를 그치게 하기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 때 대통령과 모인 수 많은 목사님들이 하나님께 매어달려 기도하게 될 때 억수같이 퍼붓던 장마가 맑게 개어서 유엔군이 상륙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행복한 부부 이야기


결혼한 지 5년 된 임집사 내외는 매우 금실이 좋았다. 그런데 3살 짜리 아들 녀석이 장난하다 깨뜨린 청자 때문에 서로 몹시 다투게 되었다. “아이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집에서 뭘했어!” “내가 집에서 애만 붙들고 살 수 있어요?” “뭐야?” 서로가 성이 나서 각각 딴 방으로 들어가 문을 “꽝”하고 닫았다. 아내는 밤잠을 못 자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내가 가만히 문을 열어 보니 소파에 얼굴을 묻고 남편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주여, 오늘도 참지 못하고 혈기를 부려 사랑하는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아내는 눈물이 핑 돌았다.




평화를 구하는 농부의 기도


김형석 교수가 미국에 체류하던 시절에 유엔 본부를 견학한 일이 있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기구인 만큼 큰 기대를 가지고 방청석에 앉았다. 마침 안전보장 이사회의 소집이 공고되어 있었고, 정해진 시간 10분 전부터 회의 시작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되었어도 제시간에 출석한 대표는 하나도 없었다. 무려 한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하나 둘 씩 자리를 잡고 앉았고, 회의에 임하는 자세는 더욱 엉망이어서 진지한 구석이라고 전혀 없었다. 각자의 주장을 끝내고 나면 다른 대표의 이야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딴전을 부리거나 잡담을 하다가는 회의장을 빠져 나가더라는 것이다. 실망감이 컸다. 이들에게 세계의 평화를 맡겨도 좋을것인가?
무거운 마음으로 그날 저녁에 초대받아 간 한 농부의 집 식탁에 앉았다. 조촐하지만 단란한 식탁에 마주 앉아서 농부는 기도를 드렸다. 양식을 주셔서 감사하고, 김교수의 나라인 한국을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고, 온 세계가 평화 가운데서 인류애를 가지고 살아가게 해 주십사고 간절히 기도했다. 김 교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유엔 본부에서의 답답했던 가슴이 한 농부의 기도를 통하여 평안하게 되었다. 김교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세계의 평화는 유엔이 지키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드리는 한 농부의 진실어린 기도가 있어서 세계의 평화는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응답 안해 주시면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안 계신 정영창 선생님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거창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셨다. 학교에 부임하고 보니 그 학교는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교장 선생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굴속에 들어가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성경을 읽으며 사흘 동안 금식 기도를 드렸는데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 앞에 떼를 썼다. “하나님! 이렇게 응답 안 해 주시면 서울로 올라가 제일 많이 팔리는 일간신문에 ‘하나님은 안계시다’라고 광고를 내겠습니다.” 그리고 침상을 젊어지고 산에서 내려왔다. 학교 가까이 오자 교장을 기다리던 서무 직원이 미국에서 수표가 왔다고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꼭 빚을 진 액수만큼의 돈이 왔다. 그 후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22만 달러를 보내와 그 돈으로 교사와 강당을 지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였다.




유혹을 이긴 기도
지금은 훌륭한 교역자가 되어 성역에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젊은 시절 군대 생활을 할 때 잊을 수 없는 일 가운데 하나는 그가 아버지로 모시는 목사님께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이다.
“저는 오늘도 하루의 고달픈 군대 생활을 했습니다. 그것도 제일 밑바닥 하급자로서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잘못한 일도 없이 억울한 단체 기합을 받았습니다. 저녁을 먹고 내무반에 돌아오니 내무반장이 모두 우울한 기분을 풀러 나가자고 하면서 돈을 거두었습니다. 저도 그들과 동참하여 내무반장의 인솔로 한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거기는 술집들이 즐비하고 전등불이 혼란하게 번쩍거리며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여기저기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를 혼자서 기르시고 가르치셔서 군대에 입대케 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과 책망을 하실 듯하면서도 인자하게 웃으시는 아버지(목사를 말함)의 모습이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선임하사에게 내무반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가 무수히 매를 맞았습니다. 겨우 내무반으로 돌아온 저는 혼자 있으면서 왜 이렇게 불쌍한 인간이 되었는가 하는 불만 속에서 불평을 하며 한없이 울었습니다. 울다 지친 저는 무릎을 꿇고 곰곰히 생각하다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저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다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의 마음 속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주님의 평안과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저는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신학생으로서의 올바른 군대 생활을 하리라는 것을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랑이 아닌 고백으로 이러한 형편을 아버지께 알리며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저를 위해 염려하시고 늘 기도하여 주시는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글월을 올립니다.“
목사는 이 편지의 내용을 교인들에게 공개해서 큰 감동을 받게 했다.
기도는 만능의 열쇠


어느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직장에 가는 남편이 한참 동안 비탈길을 걸어서 시내 버스를 타려고 줄을 서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직장에 필요한 서류 뭉치를 그만 잊어버리고 집을 나온 것이었다. 비탈길을 뛰어올라 집에 도달하니까 부인이 방문을 잠그고 금방 어디를 갔다. 잠긴 문을 열어 보려고 젓가락으로, 칼끝으로, 숟가락으로 아무리 애써 보았지만 열 수가 없었다. 별의별 수단을 다 써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부인이 쫓아오면서 “남편씨, 미안합니다. 당신 옷을 세탁소에 맡기고 오는 길” 이라고 하며 애를 등에 업고 달려왔다. 그 부인은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더니 아무리 애써도 안되는 자물통을 철컥 열어 주었다. 남편이 그렇게도 억센 존재인 것 같지만, 열쇠를 갖지 못하니까 아내보다 약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문제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기도하면 불가능한 것 같은 일도 가능해진다. 우리도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




하늘에까지 연결되는 기도라야


전깃불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시골 사는 노인이 서울 아들 집에 갔다가 밤에 전깃불을 처음 보았다. 그 밝기가 대낮과도 같았다. 낮에 그것을 살펴보니 전구, 소켓트, 전선이 전부였다. 시골로 돌아가는 길에 아들에게 부탁하여 전구, 소켓트, 전선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노인은 서울에서 구경한 여러 가지를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면서 햇빛 같은 전깃불을 사왔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오늘 저녁에 어두워지면 보여줄테니 자기 집으로 모이라고 하였다. 노인은 전선을 마당에 쳐 있는 빨랫줄에다 연결하고 저녁이 되기를 기다렸다. 저녁에 동리 사람들이 서울서 사온 전깃불을 구경하러 노인 집에 가득 모여들었다. 어둡기 시작하자 노인은 이제 전깃불을 보여주겠다며 일어나 전등의 스위치를 켰다. “탁!” 하는 소리는 서울에서와 같이 나는데 전깃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다시 틀어도 전깃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왜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았을까? 전선을 빨랫줄에다 연결했기 때문이다. 전선이 발전소에까지 연결되어야 전깃불은 들어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도 하늘에까지 연결(상달)되어야 응답이 된다. 우리의 기도가 땅에서만 맴돌지는 않는지, 사람에게만 들리고 있지 않은지 돌이켜 보자.




문은 넓게 열려 있다


무디 목사가 하나님을 떠나고, 아버지의 교훈과 어머니의 충고마저 저버린 채 이리 저리로 헤매다가 깊은 죄에 빠져버리고 만, 한 스코트랜드 소년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밤 이 소녀는 에딘바라 시에서 무서운 고민에 빠져 자살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죽기 전에, 자기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옛 집에 가보고 싶었다. 소녀는 한 밤 중에 옛 마을로 돌아가 어머니가 계시는 집의 대문 앞에 섰다. 사방이 아주 캄캄했기 때문에 소녀는 대문을 밀치고 살짝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서 현관 문 앞에까지 가 보았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문은 활짝 열려 있는 것이었다. 별안간 늙은 어머니에게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하여, 소녀는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자 어머니의 대답이 들렸다. 소녀가 “어머니! 어째서 문을 열려 있어요?” 하고 물으니 “아가야 네가 집을 나가고 정말 오랜 세월이 흘렀구나. 그러나 나의 가슴속에는 항상 기도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늘 이렇게 기도하곤 했지. ‘주여, 내 딸을 돌려보내 주소서. 그 아이가 밤에 돌아오든지 낮에 오든지 열려 있는 문을 보고 집에서는 항상 그를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당신들의 어머니들 중에서도 항상 당신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던 분들이 많이 계실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당신은 당신의 마음과 생활을 그리스도에게 의탁하지 않고 있다. 어쩌면 당신의 어머니는 이미 하늘나라로 가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분은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며 문은 아직도 열려 있다. 주께서는 지금도 권면하시고 호소하시며, 간청하시고, 또한 요구하시며 환영하신다.




합심 기도


일본 오오사카 산기슭에 고아원이 하나 있다. 산 뒤편에 위치한 까닭에 언제나 산에 가리워 햇볕이 들지를 않았다.
1946년 겨울 제대로 입지도 못한 고아들이 추위에 떠는 것을 본 원장은 고아들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원장은 그날 밤 원내 모든 사람들에게 합심해서 기도하자고 말하고 계속해서 기도를 했다.
기도를 시작한지 3주만에 응답이 있었다. 미군 비행장을 만들기 위해 산을 헐기 시작한 것이다.
더 좋은 조건을 갖춘 장소도 많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곳이 비행장 부지로 결정된 것이었다.




지혜를 구하는 기도


미국의 유명한 치즈 제조업자였던 크래프드라는 사람은 처음에 마차에 치즈를 싣고 다니면서 팔았다. 그런데 그는 매일 아침 치즈를 팔러 나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나서 떠났다. 그때마다 그에게 지혜가 생겨서 사업이 점점 번창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수많은 트럭으로 치즈를 보급하는 ‘치즈 왕’이 되었다. 그에게 ‘당신이 성공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그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 모든 일을 처리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이처럼 축복을 해주셨다’고 고백했다.




리듬이 있는 기도


지금으로부터 170여 년 전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독일의 성 니콜라스 교회에 성탄 예배를 보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교회 오르간이 고장나 버렸다.
당황한 목사 요셉 몰은 오르가니스트 글뤼버에게 즉석에서 기타 반주곡을 작곡하게 하고 그 노래에 자작시를 붙여 임시 변통의 연주회를 가졌다.
그리하여 1818년 니콜라스 교회에서 기적처럼 새롭고도 감동적인 찬송가 하나가 탄생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6.25동란 당시, 우리 국군이 북한의 인민군에 밀려 나라가 적화될 뻔한 위기에 처했을 때다. 만약 유엔군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 절박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 있었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유엔 평화유지군의 한국 파병을 의결하기 위한 안보리 상임이사회가 열렸고, 그 중 한 회원국이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부결되는 것이다.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 거의 확실한 소련 대표는 그 회의 개최 시에 급격한 복통 설사를 만나 의결 시간에 맞춰 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파병 결의안이 무난히 가결되고 유엔군이 참전하여 공산군을 물리치게 되었다.
하나님은 핍박과 고통과 설움으로 점철된 우리 민족의 정황을 모두 보고 계셨고, 나라 곳곳에서 이름도 없는 백성들이 간절하게 기도하는 음성을 모두 듣고 계셨다. 그리고 그토록 결정적인 순간에 직접 개입하신 것이었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다음은 미국 L.A에 있는 바이올라 대학의 교수이자 목사인 어느 분의 간증이다. 그가 틴 에이저였을 때 친구의 인도로 바이블 캠프에 참석하여  예수께서 자기 구세주요 주님이란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마침내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고 싶었다. 그리하여 부모님께 그의 심정을 이야기 하였더니 신학교를 가려면 모든 인연을 끊고 집에서 나가라고 하였다.
부모를 설득시키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서 그는 어린 나이로 부모의 도움없이 대학에 입학하고 신앙생활을 하였다.
많은 갈등 속에서 6개월이 지났을 때 그의 생활비는 바닥이 나고 친구가 조금씩 도와주던 것 마저 끊어져서 더 이상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하는 수 없어서 그는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어머니 제가 비록 집을 나왔지만 저를 향한 어머니의 애정은 변함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를 도와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지금 등록금도 떨어지고 기숙사비도 못내고 있습니다. 아직도 저를 사랑하시는 어머니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런데 어머니의 답장은 냉담했다.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네가 집을 나갈 때 무어라고 했니? 너는 나에게 분명히 큰  소리쳤다. 내 하나님이 나를 돌볼 것이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너를 돌보지 아니하느냐? 네 하나님께 구하라.”
이 편지를 받고 그는 너무 막연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다시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저의 부모님도 저를 돌보지 않습니다. 저의 어머님이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는데, 왜 저를 돌보아 주시지 않습니까?”
수 일 후에 어머니로부터 또 편지가 왔다. 그 내용은 앞으로 일주일 후에 어머니가 로스 엔젤레스에 갈테니 공항으로 마중을 나오고, 그때까지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음이 분명하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일주일이란 기한부 시간을 두고 그는 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그렇게 엿새가 지나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드디어 어머니가 오시는 아침이 되었어도 응답이 없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은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짐을 쌓았다. 그리고 실망하여 축 늘어진 모습으로 학교 문을 나서다가 그 학교 교무과장을 만났다. 그의 표정을 보고 그 선생님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며 잠시 함께 이야기를 하자고 하였다.
그의 절망적인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은 “아침에 네 편지가 온 것 같은데 못보았느냐?”고 하였다. 그래서 체크를 해보니,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백 불 짜리 수표가 왔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 속에 그 수표를 들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그를 보자 어머니는 “네 하나님이 너를 돌보았느냐?”고 물었다. 그가 가만히 있자 하나님이 안 돌보신 줄 알고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래서 그가 말하였다. “어머니, 이것을 보십시오. 저는 어머니께 60불을 구하였는데 하나님은 40불을 더 보태서 100불을 주셨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화가 나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에 어머니한테서 편지가 왔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믿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믿을 수 있는지 가르쳐다오.”
그로 인하여 그의 온 가족은 구원을 받았고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




다만 제게 일사 각오 있을 뿐입니다(순교자 명 설교)


-의에 살고 의에 죽겠습니다-


“나로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나는 저들의 손에 몇 번째 체포되어 이번에는 오래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가 이 산정현 강단(講壇)에 다시 서게 되니 하나님의 은혜 감사하오며 나를 위하여 기도하며 기다리시던 교우 여러분 앞에서 다시 설교하려 하니 감개무량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설교가 아니고 갇히운 중에서 늘 기도하던 다섯 가지 제목 곧 ‘오 종목의 나의 기도’란 제목으로 말씀하겠습니다.


1.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 권세를 이기게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무릇 숨쉬는 인생은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가 합니다.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 의(義)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고자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무섭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아담 하와 범죄 후에 사람은 다 죽습니다. 제왕, 장상, 재사, 가인도 다 죽었고 성현, 군자, 위인, 열사도 다 북망산에 갔습니다. 죄없이 억울하게 죽는 약자도 불쌍하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죽는 사람, 가엾은 아이를 두고 가는 어머니 비참한 죽음도 허다합니다.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갇히우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어 죽는 죽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 최대의 영광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열 백 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년 천년 산다 한들 그 무슨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 되어도 주님 계명을 지키게 하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 주님 모르는 체 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 있을 뿐이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주님, 사망 권세를 이긴 예수여! 나도 부활을 믿고 사망 권세를 내 발 아래에 밟게 하시옵소서. “죽음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아멘 할렐루야.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시오. 풀과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시오. 나는 내 주님 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는 살 수 없습니다. 더럽게 내 주님 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나의 주님을 따라서의 죽음은 나의 기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 각오만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싯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33세에, 스데반은 청장년의 때에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제물이 되어지이다.


2. 장기(長期)의 고난을 견디게하여 주시옵소서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 두 번에 죽어진다면 그대로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일년 십 년 계속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 준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데 용감한 신자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약한 약졸(弱卒)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버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끝까지 참는 사람이 구원을 얻으리라”(마 4:13)고 신신 부탁하였습니다. 주님도 십자가를 직면하사 그 받으실 고난을 인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십자가상에서 그 혹독한 고통을 이기셨습니다.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질 때 그 아픔 어떠하였으리오! 나와 여러분의 죄, 억만 죄인의 죄 짐을 대신지실 때 그 고통이 너무나 중대하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고통의 핏방울 소리를 우주도 감당할 수 없이 지축(地軸)이 흔들리어 지진이 터졌던 것입니다. 내 주 예수 날 위하여 이렇게 고난을 참으셨는데 내 당하는 고난이야 그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그러므로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지어줍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 주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받는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느니라”(롬 8:8). 이제 받는 고난은 죽을 몸이 죽는 것 뿐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생 불사의 몸이오 영원 영화의 몸입니다. 길이 참아 주가 나타나시기를 기다리라(약 5:7).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3.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는 80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남의 아들로의 의무도 지중하고 남의 가장, 남의 아비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① 자식을 아끼지 아니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 어머님이 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고 가르치신 은혜 태산같이 높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 어머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내 어머님이 금지옥엽으로 길러주신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매맞아 상할 때, 내 어머님 가슴이 얼머나 아프실꼬! 춘풍추우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 고요한 밤 달빛이 철장에 새어들 때, 어머님 생각 간절하여 눈물 뿌려 기도하였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한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신의 아픔도 잊으시고 십자가 밑에서 애통하는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시던 주님 심정 어떠하였을꼬! 십자가 밑에서 가슴치며 애통하는 성모 마리아의 아프신 가슴 어떠하였을까? 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도 부탁합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는 주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나의 어머님을, 80 넘어 늙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②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연모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내 아내는 병약한 사람으로 일생을 내게 바치었거늘 나는 남편 된 의무를 못합니다. 병약한 아내를 버려두고 잡혀 다니는 이내 마음 또한 애처롭습니다.
오!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되는 어린 교회를 뒤에 두고 골고다로 나가시는 심정이 어떠하셨습니까! 병든 내 아내도 주님께 부탁하고 불초 이 내 몸은 주님의 자취! 주님의 눈물 자취를 따라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소서.


③ 세상에 제 자식을 돌보지 않는 자 어디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아니하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도 네 명의 아들이 있어 어린 것도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키우고 가르칠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우리 어린 것은 뒤에 두고 잡혀 다니는 마음 또한 애처롭기 끝없습니다.
아버지가 나라에 역적으로 잡혀 죽으면 그 자식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하거든 어린 자식 떼어 두고 죽음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이 내 마음 끝없이 비참합니다.
주님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당신의 자식 같은 제자들을 앞에 모으시고 위로하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눈물 어린 말씀이었고 교훈하시는 말씀, 말씀이 피 끓는 소리였습니다. 어린 자식과 같이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님의 마음 어떠하셨으리까!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골고다로 향하신 주님께 나의 자식을 부탁합니다. 어미 죽은 어린 것을 주님 품에 부탁합니다.
④ 나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떼 나의 사랑하는 교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저들을, 내 양떼를 뒤에 두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한 세대 악한 세상에, 이리떼 중에 내 양들을 두고 나가지 못합니다. 맡기나이다. 내 양들 다 목자되신 예수님 손에 맡기나이다.
나의 어머님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나의 병든 아내도 주님 손에 부탁하는 것이 이 못난 사람의 도움보다 좋을 줄 압니다. 나의 어린 자식들을 자비하신 주님 품에 두는 것이 변변치 못한 아비의 손으로 기르는 것보다 복될 줄 믿습니다. 나의 양떼도 선한 목자 주님께 부탁합니다. 병들고 상한 자를 주님이 싸매어 주시고 길 잃고 헤매는 자를 주님 손수 인도하여 주시고 낙심하고 범죄한 자를 주님 보혈로 사유하여 주시옵소서. 악하고 험한 세상에 양떼를 두고 가는 이내 마음 차마 못 할 일이올시다. 저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님 지켜주시옵소서.
나의 늙으신 어머님과 나의 병든 아내를 주님께 부탁하고 나의 어린 자식들과 나의 사랑하는 양떼들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으로 이 산정현 이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의 피 자취를 따라가려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자식들을 여러분에게 짐되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자못 무소불능하신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면 철석같은 마음도 변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자식의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돌아선 신자도 허다합니다. 인간의 얽히고 얽힌 인정이 줄이여 나를 얽어매지 말라. 주님 따라가는 나를 얽어매지 말라. 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께 합당치 아니합니다.


4. 의에 살고 의에 죽게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臣民)이 되어서는 충절(忠節)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갈공명(諸葛孔明)은 무너지는 한(漢) 나라를 붙잡고 오장원(五丈原)에 스러질 때까지 국궁진쇄  사이후이(鞠躬盡碎 死而後而) 죽기까지 애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교회와 그 의를 붙잡고 국궁진쇄  사이후이(鞠躬盡碎 死而後而)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백이(伯夷) 숙제(叔齊) 두 형제는 은(殷) 나라의 신민으로서 주(周) 나라에 살 수가 없어 수양산에 숨어 서산(西山)의 고사리를 뜯어 먹다가 굶어 죽으니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불고 있습니다. 정몽주(鄭夢周)는 망하는 고려 나라를 위하여 선죽교에 피를 뿌리니 대(竹)야 났으랴마는 그 절개 대보다 청청창창 싯푸르도다. 


이 몸이 죽고 죽어 一百번 다시 죽어
백골이 진토되고 넋이야 있건 없건
임향한 일편단심 변할줄이 있으랴


이는 우리 선인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충의대절(忠義大節)입니다. 사람이 나라에 대한 의가 이러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 향한 일편단심 변할 수 있으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대의를 붙잡고 풀무 불에도 뛰어들었고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사자 굴 속에도 들어갔습니다.
예수를 사랑하여 풀무 불이냐! 예수를 사랑하여 사자 굴이냐, 그 무엇이 두려울 것이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습니다.
백제 나라의 도미부인(都彌夫人)은 개루왕(蓋婁王)의 협박과 부귀의 유혹도 물리치고 두 눈 뽑힌 남편 도미를 찾아 일엽편주 조각배로 만경창파 서해 바다에 떠서 황주(黃州) 마늘 뫼 아래에서 한평생 그 남편을 섬기었습니다. 이는 우리 조선의 딸들이 정절을 지키던 피 눈물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신부되어 주님 향한 정절을 변할 수 있으랴! 주 후 200년 카르타고의 벨 뼈추어는 22-3세의 방년에 젖먹이와 늙은 아버지의 우는 소리를 뒤에 두고 형장에 나가서 사나운 소뿔에 받쳐 죽었습니다. 천고의 열녀 벨 뼈추어는 주님 나라에서 승리의 찬송을 부를 것입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 예수 안에서 헌신하기로 열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이 어찌 구구도생(苟苟盜生) 피할 줄이 있으랴!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 백 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다.
“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죽고 죽어 열 백번 다시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정절(大義貞節) 변치 아니하오리다.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몸 드립니다. 우리 초로 인생 살면 며칠입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살으사이다. 의를 버리고 더구나 예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개 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계십니다.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사이다.


5.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 받으시옵소서.
아버지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 길을 걷게 하시옵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아멘
(주기철 목사)




믿음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


영국의 자선 사업가 조지 뮬러는 오직 믿음의 기도로써 6천여 명의 고아를 길러냈다. 어느 날 고아원에 양식이 떨어졌다. 식당 담당자가 뮬러에게 말했다.
“저녁 식사 시간인데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뮬러의 대답은 엉뚱한 것이었다.
“염려할 것 없네. 식사 종을 치고 아이들을 식당에 모으게.”
종을 치자 아이들이 우르르 식당에 모여들었다. 식탁 위에는 빈 그릇만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뮬러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이제 머리 숙여 일용할 양식을 주실 하나님께 식사 기도를 드립시다.”
아이들이 수군대기 시작하였다.
“빈 그릇을 놓고 무슨 기도야?”
이 소리를 들은 뮬러는 다시 말했다.
“염려하지 마세요. 하니님께서 곧 주실 것입니다.”
아이들이 고개를 숙이자 뮬러는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 기도가 막 끝나자마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어떤 낯선 신사가 인부들의 손에 큰 통 몇 개를 들려 들어섰다. 그는 말했다.
“뮬러 선생님, 오래 전부터 무엇인가 도와 드리려고 생각했는데, 오늘에야 이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통들 속에는 빵, 야채, 고기 등의 음식이 가득 들어 있었다. 빈 접시를 놓고 기도를 드렸던 뮬러의 믿음은 실로 놀라웠다.




아빠를 회개시킨 기도


다음은 어느 목사님의 간증이다.
어느 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한 집사 부부의 가정에 식사 초대를 받았다. 남편이 간증하기를 자신의 모친이 권사였고,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으나 대학 1학년 때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며 교회를 떠났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어린 아들이 기도할 때마다 아빠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다. 아빠는 엄마가 시켜서 그런다면서 아내를 몹시 구박했다.
그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이름 모를 병으로 피골이 상접하여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 아이는 의사에게, “선생님, 아무리 선생님이 훌륭하셔도 하나님이 제 병을 고치시기 전에는 못 고쳐요. 그러니 꼭 기도를 하고 고치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교회 장로였던 의사가 감탄하여 간절히 기도한 후 진찰하려 하자, 아이는 또 “선생님, 기도하실 때 꼭 한 가지를 빠뜨렸어요. 우리 아빠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으셨어요”라고 덧붙였다.
깜짝 놀란 의사는 아이의 아빠를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했다. 숨어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빠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는 곧 회개하고 여생을 주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후, 지금까지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며 집사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회개하자 아내의 병도 완쾌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위대한 인물들의 공통점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사용하셨다. 육 십 년 동안 새벽 네 시에 일어나고 구십 세까지 살던 건강한 존 웨슬리를 사용하셨는가 하면, 한 편의 설교를 하고는 강단 아래서 한 사발의 피를 토하곤 하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와 같이 곧 쓰러져 죽을 듯한 연약한 사람들도 사용하셨다. 열 아홉 살에 예일대학의 교수가 된 조나단 에드워드와 같은 천재를 사용하셨는가 하면, 드와이트 무디와 같은 무학자를 들어서 위대한 복음 사역의 꽃을 피우게도 하셨다. 이름 있는 목사는 사용하시는가 하면 이름 없는 평신도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던 이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하루에 두 시간씩 기도하며 바쁠 때는 더 많이 기도하던 마틴 루터를 들어서 독일과 유럽의 교회를 영적인 어두움에서 깨어나게 하는 나팔로 사용하셨다. 또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한 해에 천 편이 넘는 설교를 하면서도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기도하던 웨슬리를 들어서 영국을 변화시키셨다.
뿐만 아니라 우유 배달부보다 늦게 일어난 날이면 괴로워하며 자책하던 기도의 사람 조셉 얼라인은 비록 다른 목회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를 누렸지만,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자신보다 두 배나 더 산 목회자들도 이룰 수 없는 수확을 거두게 하셨다.
화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기도하던 보헤미아의 후스를 들어서 칠흑같이 어둡던 중세 암흑의 교회사를 밝히는 종교개혁의 새벽 별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일주일에 하루를 오직 기도에만 바쳤던 아도니람 저드슨을 들어서 불교에 잠들어 있는 절망의 땅  버어마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도 하셨다.
사람들은 발달된 기계문명이나, 새로운 조직, 반짝이는 아이디어에 의해 교회를 교회되게 만들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들에 의해 이 모든 일을 해 오셨다. 사람들은 방법을 찾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신다. 그들은 언제나 기도의 사람이었다. 이 나라가 치유되는 길도 기도밖에는 없다. 라일의 말과 같이 “기도의 죄를 죽이고 죄는 기도를 죽인다.” 기도 없이 이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언제나 꿈일 뿐이다.




첫 아침을 주님과 함께


영국의 노예해방 운동가 윌리엄 월버포스는 아들에게 새벽기도의 중요성에 관해 편지에 써서 보낸 적이 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이 하나 있단다. 그것은 결코 아침기도를 무시하거나, 짧게 해버리거나, 성급하게 마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골방에서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등한히 하지 않도록 주의했으면 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보다 치명적인 것은 달리 없다. 만약 네가 아침부터 하나님과 친근한 교제를 하게 된다면 너는 지금보다 더 훌륭하게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노예해방을 지지하고 살아있는 신앙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투사의 삶을 살았던 그였지만, 그런 행동 뒤에는 새벽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루의 첫 시간을 어떻게 시작하는가에 따라서 하루의 결과가 어떨 것인가를 예상해 볼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 새벽을 여는 사람은 아침 햇살만큼이나 찬란한 은혜가 임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긴 밤의 고통과 기다림을 알기에 그는 밝아오는 새벽을 하나님과 함게 깨우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타오르는 것이다.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시 119:147-148)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


시인 괴테는 죽을 때 “더 많은 빛을, 더 많은 빛을!”하고 뇌까렸다. 허망하고 비참하다. 박식한 최고의 지성인이 어둠밖에 보이지 않아 빛을 갈구하며 죽어 갔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는 이렇게 죽을 수 없다. 김활란 박사는 “내가 죽으면 슬픈 찬송을 부르지 말고 즐겁고 명랑한 노래를 불러 주시오”라고 유언했다. 그래서 정말 그의 장례식에서는 할렐루야 코러스가 합창되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에게 죽음은 개선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가 남기신 것, 부활의 믿음


그리스의 한 철인이 친구에게 쓴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그는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이런 말을 썼다.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새 종교집단이다. 사람이 죽어도 슬퍼하지 않고 기뻐하며 그들의 신에게 감사의 예식을 드린다. 그들은 시체를 들고 묘지로 행렬할 때 마치 즐거운 소풍이나 가듯이 노래를 부르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행진한다.”
초대 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전해주는 산 증거이다. 초대 교인들은 부활의 신앙, 영생의 확신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남기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남겼으며 예수는 영원한 생명을 남겼다.”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유산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남기신 부활의 믿음,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부활신앙은 힘의 근원


주기철 목사는 1943년에 옥중에서 순교했다. 그는 감옥에서 날마다 같은 기도를 반복하였는데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하는 기도였다. 그가 모든 고통을 극복하고 의를 위하여 죽을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인 부활의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다. 부활의 신앙은 힘의 근원이다.




부활은 고난으로부터


대학교수인 포세이는 신앙을 생활화하려고 최근 시카고의 빈민촌으로 입주했다. 범죄의 소굴이므로 들어가자마자 강도, 폭행을 당하는 등 괴로운 나날이었다. 그는 이런 체험 수기를 썼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을 십자가에서 이룩하셨다. 결코 안전하고 평안이 보장된 곳에서 성취된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출발되었다. 안전하고 편안한 곳에서 부활이 싹튼 것은 아니었다.”




부활을 체험하라


월남전에서 포로가 되어(1967년) 6년간 죽음의 수용소에 있었던 풀럼(Charlie Plumb) 씨는 그후 서적과 순회강연을 통하여 청년 전도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월남에 도착한 청년 조종사 풀럼 중위에게는 꿈이 많았다. 그 꿈을 성취할 중요한 일들을 손꼽아 계획했다 우수 조종사라는 칭찬을 받은 그는 우선 공을 많이 세워 계급이 오르는 것이 꿈이었다. 그리고 마음속에 있는 고향 아가씨를 설득하는 것도 중요했다. 그러나 첫 출격을 하였다가 격추되고 불구자가 되어 포로가 되었다. 마침 그 날은 이가 아파 치과 군의관에게 가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이를 치료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중요한 것들은 1초 사이에 달라졌다.
6년간 불구의 몸으로 포로 수용소에 있으면서 그는 개인적인 부활의 체험을 했다. 그는 전도집회 때마다 호소한다. “여러분에게 더 중요한 일이 있음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친구와의 우정, 남을 돌보아 주는 사랑, 여러분의 마을과 나라와 인류를 위한 생각, 가치있게 살고 가치있게 죽어야 할 더 중요한 일들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아침부터 밤까지 사다리를 올라가고 있습니다. 바쁘게, 땀 흘리며 올라가지만 그것이 정말 중요한 일일까요? 이기적인 사다리, 욕심의 사다리는 아닙니까? 예수의 제자가 되어 부활하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에게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도스토에프스키의 삶


러시아의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가 28세 되던 해에,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끌려나가게 되었다. 영하 50도가 되는 몹시 추운 날, 기둥에 묶여서 총살을 당하게 된 것이다. 땅 위에서 살아 있을 시간을 계산해 보니, 꼭 5분이 남아 있었다. 그는 이제 5분밖에 남지 않은 생명을 어떻게 사용할까 하고 생각했다. 아는 사람들에게 최후의 인사를 한 마디씩 하는데 2분, 오늘까지 살아온 생활과 생각을 정리하는데 2분, 그리고 발을 붙이고 살던 땅과 자연을 돌아보는데 나머지 1분을 쓰기로 했다.
그래서 옆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남은 가족을 잠깐 생각하고 나니 2분이 후딱 지나갔다. 이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니, 문든 3분 후에 자기는 어디로 가는가 하는 생각에, 그만 눈앞이 아찔했다. 28년간, 세월을 한 순간 한 순간 아껴 쓰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이제 다시 한 번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시간을 아주 뜻있게 사용하리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 순간 총알을 장전하는 소리가 ‘철컥’하고 났다. 그는 그 소리와 함께 견딜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바로 그 때에 장내가 떠들썩하더니 소란이 일어났다. 멀리서 병사 하나가 흰 손수건을 흔들면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병사는 황제의 특사령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그는 거기에서 풀려나, 시베리아로 가서 4년 동안 유형 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후, 남은 생애 동안 기독교와 관련된 작품을 쓰며 값있는 인생을 살려고 노력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번 죽고 인생을 다시 살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죽음의 굴속을 통과하여 부활의 기쁨을 맛보게 된 도스토예프스키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명히 깨닫고, 만인이 숭앙하는 올바른 인생살이를 했던 것이다.




예수라고 하는 빛을 보고 새 삶을 얻다


다음은 정수환(충북 단양 영춘교회)목사의 간증이다.
옛날에는 엉망으로 살던 사람이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어 바르게 사는 사람의 예는 부지기수로 많다. 술 먹고 노름하며 싸움질만 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교회를 다니더니 그 생활이 180도로 달라졌다고 하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일이다.
자기에게 조금만 기분 나쁜 소리를 하면 얼굴에 핏대를 세우고 욕설을 하며 큰소리치던 사람이 웬만한 욕을 먹어도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부드럽게 말한다든지, 전에는 매사 부정적이고 불평만 말하던 사람이 이제는 무엇이든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좋은 쪽으로 말하게 되었다는지 하는 이야기도, 교회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나와 먼 친척이 되는 어느 형님의 이야기도 그 한 예에 속한다. 지난날에는 술로 시작해서 술로 하루를 마치는 사람이었다. 이른 새벽 술집 문을 두드리면 밤늦게까지 술을 먹고 인사불성이 되어 거리를 헤메이고 다녔다. 집에 돌아오면 집안 살림을 부수어 대는 것은 일과가 되다시피 했다. 장독대는 남아 날 수가 없었고, 문짝이며 가재도구가 엉망진창이었다. 아내에게 주먹질하는 것은 상식에 속한 일이어서 아내를 때리거나 욕설을 해대지 않으면 밥맛을 잃을 정도였다. 자식들도 아버지가 술 먹고 나타나면 도망 다니느라 정신이 없고, 동네 사람들도 그 형님이 나타났을 때에 재빨리 피하지 않으면 무슨 봉변을 당하든지 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형님이 사는 동네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그 형님도 교회에 장난삼아 다니게 되었다. 예배드리기 위해서 가는게 아니라 술 주정을 하러 다녔다. 그러나 그가 거짓말같이 새 사람이 되었다. 정말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것이다. 즐기는 것이 아니라 술에 빠져 살던 그가 술을 끊고 담배도 끊었다. 동네의 궂은 일은 그 형님이 도맡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형님이 전도에 방해꾼 역할을 했으나, 지금은 그 형님 때문에 교회가 크게 부흥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그 형님은 그 동안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으나 예수라고 하는 큰 빛을 보고 새 삶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가 아니었으면 그 형님은 많은 사람에게 피해와 고통만 안겨 주는 독종으로 지내다가 저주스러운 생애를 마감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만다행(千萬多幸)이도 형님 사는 동네에 교회가 들어가 그가 예수를 믿게 되어 새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거듭난 삶


어느 장로님 가정에 딸을 다섯이나 낳고 여섯 번 째 외아들을 낳았다. 너무 기뻐 이 가정에 대 경사가 되었다. 이 외아들은 귀엽게 자랐다. 그러나 그는 부모와 누님의 사랑 속에 버릇없이 빗나간 생활을 하였다.
온 마을의 골칫거리 아들이 되고 말았다. 이 외아들은 동네 마을에 못된 일을 저질러 온갖 손해를 입히고 아버지 장로님을 욕되게 할 뿐 아니라 교회도 욕을 먹게 하였다. 손해를 입히면 부모님은 그 사람들에게 가서 용서를 빌고 손해 배상을 해주고 갖은 욕설과 창피와 모욕을 당하였다. 그러나 어찌할 대책이 없어 그들은 매일같이 눈물로 세월을 보내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금식을 하였다.
어느 날 못된 아들이 술을 먹고 인사불성 상태로 집에 들어 왔을 때 부모님들은 방에 엎드려 눈물로 뺨을 적시며 기도하느라고 눈이 통퉁 부어 있었다. 이때 아들은 “무엇을 하느냐”고 발길로 차고 행패를 부렸다. 그러나 눈이 시뻘겋게 부어 있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자 목석같던 아들이 숙연해지며 말을 못하고 주저앉았다.
날이 새자 술에서 깬 아들은 부모님 앞에 가서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며 용서를 빌었다. 이때 부모님들은 “오냐, 그래야지” 하며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목사님을 청하여 가정 예배를 드렸다. 이때 이 아들은 마루에 나와 대들보에 무수한 못이 박혀 있는 것을 보고 저 못이 왜 저렇게 많이 박혔느냐고 물었다. “그 못은 네가 못된 짓을 할 때마다 하나씩 박은 것이란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요?’ 하며 다시 눈을 감고 눈물을 흘린 아들은 “아버지, 내가 좋은 일을 하고 나서 저 못을 하나씩 뽑으면 되겠네요?” 하고 말했다. 그후에 이 아들은 선행을 열심히 하여 못을 다 뽑았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 이제 못을 다 뽑았으니 됐지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못 자국은 그대로 있지 않느냐? 너는 저 못 자국을 보고 겸손히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된다”고 타일렀다.




옛 생활을 버리지 못하는 삶


옛날 중국의 어진 임금이 민정 시찰을 다니는 중에 다리 밑에서 거지 고아를 발견했다. 측은한 마음에 궁궐로 데려다가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갈아 입혀 놓으니 거지 고아가 아니라 귀여운 소년이 되었다. 마침 임금은 자식이 없던 터라 왕후와 의논하여 그 거지 고아를 왕자로 맞아들였다. 왕자가 생긴 것을 축하하기 위해 온 궁궐이 떠들썩한 잔치를 벌렸다. 이제는 다리 밑에 사는 고아 거지가 아니라 당당한 임금의 아들 왕자가 된 것이다.
임금은 자기 방 옆에 왕자 방을 꾸며 고급 침대에 비단 이불을 펼쳐서 그곳에서 왕자가 생활을 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침에 왕자 방에 가보니 왕자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임금은 신하들에게 왕자를 찾아오라고 호령하였다. 그러나 궁궐을 샅샅이 뒤져도 왕자는 없었다.
그때 지혜있는 신하 한 사람이 급히 전에 왕자가 생활하던 다리 밑으로 가 보았더니 왕자가 거적떼기를 덮고 단잠을 자고 있었다. 왕자를 궁중으로 데려왔으나 다음날 밤에도 왕자는 궁을 빠져나가 더러운 거적떼기를 쓰고 단잠을 잤다.
그 이튿날 임금 앞에 불려가 호되게 야단을 맞은 왕자는 도무지 고급 침대와 비단 이불에선 잠이 오지 않으니 밤에만 다리 밑에 가서 자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임금은 왕자가 되고서도 여전히 거지 고아의 생활을 버리지 못하는가 라고 꾸짖으면서 만일 다시 거지 생활로 돌아가면 왕자의 입적을 취소하겠다고 엄히 명했다.




인생의 소망


1797년에 영국에서 에드워드 모트(Edward Mote)라는 한 어린아이가 출생했다. 그의 가정은 대단히 불우했다. 그는 사춘기의 시절을 반항과 원망과 열등의식 속에서 살아왔다. 그는 캐비넷을 제조하는 제조소의 목공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마음속에 말로 다할 수 없는 열등의식을 지닌 채 만나는 사람마다 반항하고 원망하며 거리를 방황하는 것이 그의 삶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범죄도 저질렀다.
어느 추운 날, 그는 런던의 거리를 방황하다가 문득 종소리가 울리는 교회에 들르고 싶었다. 교회당 안에 들어갔더니 마침 집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존 하이야트라는 목사님이 요한복음 3장을 주제로 거듭나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그는 이 말씀을 듣는 동안 거듭나야 할 필요를 강력하게 느꼈다. 그날 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왔다. 주께서 그로 하여금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고 그는 거듭났다. 그리고 그 체험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영혼이 거듭나자마자 내 눈동자는 내 생애 처음으로 생기를 되찾았고 내 마음에는 생수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공소에서 내가 들고 있는 이 망치는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행복한 목공이 되어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삶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남기기 시작했다.
37살이었을 때 그는 마침내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어 커다란 목공소도 차릴만하게 되었다. 55살이 되었을 때 그는 자기를 거듭나게 하신 그 주님을 위해서 전 생애를 완전히 던지고 싶은 열망이 그 속에 일어났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벌었던 모든 재산을 다 주 앞에 드려 교회를 지었다. 그리고 주의 부르심을 받은 목사로서 여생을 그리스도 앞에 바쳤다.
어느 날 그는 자기를 거듭나게 해주었던 그 교회 곁을 지나면서 언덕을 오르며 자기가 거듭났을 때 주께서 그에게 주셨던 놀라운 인생의 소망을 생각하며 찬송가를 하나 작사하기 시작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


미국의 젊은 피아니스트 론 세버린(Ron Severin)이 주류 상회 앞을 지나다가 그 앞에 산적해 있는 헌 맥주 캔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곧 주인을 만나 그 캔들을 자기가 치워 주겠다고 제의했다. 주인은 감사하다고 하며 그렇게 하라고 했다.
당시 세버린은 캘리포니아 롱비치 주립 대학의 학생으로서 다우니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있었다. 헌 캔들이 줄지어 쌓여 있는 것을 보자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음악적 영감이 섬광처럼 그의 영혼을 흔들었던 것이다.
세버린은 한아름의 캔을 실어 와서 손질하기 시작했다. 위와 아래의 뚜껑을 모조리 따내고 깨끗이 소독을 한 다음 긴 파이프가 되도록 납땜을 했다. 어떤 것은 길게, 어떤 것은 짧게 만들고 파이프의 주둥이 부분을 만들어 달았다. 그 파이프의 길이를 달리하여 플루트와 비올라의 소리를 나게 하는 데는 한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리이드의 음을 내는 데는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그는 3년의 세월을 투여하여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인류 역사에 새롭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악기 하나가 탄생한 것이었다.
문제는 인간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술이 담겼던 그릇을 아름답고 고상한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도구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같은 물이라도 뱀이 먹으면 독이 되지만 양이 먹으면 젖이 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면 성도가 되지만 세상 저잣거리의 명예와 탐욕을 뒤쫓아가면 그야말로 온 세상에 지천으로 널린 속물 가운데 하나가 되고 말뿐이다.




존 뉴튼의 거듭남


존 뉴튼은 당시 지중해를 오가는 상선의 선장이었던 아버지를 통해 나이 열한 살부터 선원이 되었다. 어렸을 때에는 경건한 신앙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신앙적인 훈련을 받았지만, 일곱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폐병으로 돌아가시고 난 후 선원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성격도 거칠어지고 삐뚤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라면서 더욱 난폭한 성격으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오는 노예선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는 배 안에서 온갖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 잔인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던 중 1748년 3월 1일 그는 배 안에서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동안 그는 오랫동안 그의 영혼 속에서 깊이 잠자고 있던 어머니의 기도 소리와 찬송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회개하게 된 것이다. 그후 그는 새로운 삶의 출발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삶의 정리하고 그가 대적했던 바로 그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받고 목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버킹검에서 16년간을, 올니교회에서 27년간을 사역했다. 그런 중에 그가 회개한 지 29년 되는 1779년,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작사하여 미국 민요 Amziging Grace곡에 붙여 부르게 되었다. 이 찬송가에서 그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방황하던 자신을 건져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늘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된 그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웨일즈의 부흥은 회개로 시작되다


영국 웨일즈의 위대한 부흥은 한 작은 교회의 부인의 회개를 통해서 일어났다. 어느 날 이 부인이 주기도문을 하다가 그는 것을 끝낼 수가 없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이 대목에 이르러 더 계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미워하고 있는 한 형제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도를 중단했다. 그는 부질없는 봉사를 중단했다. 그는 예배를 중단했다.
그리고 그는 나갔다. 오랫동안 찾아보지 않았던 형제를 만났다. 그리고 그분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를 회개한 것이다. 우리의 갈등은 당신의 책임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나의 책임이라고 그 여자는 자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못했던 내 죄를 회개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묶었다. 그 교회 속에는 부흥이 일어났다. 그것은 웨일즈라는 도시에 부흥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위대한 부흥의 불길로 타올랐다.




회개한 도둑


26살의 여자 목사 쿠퍼는 기독교 역사 시간에 한국 백성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자들은 공부를 안 시키고, 미신이 강해 무당굿, 택일, 점치는 것 등으로 점점 불행에 빠지며, 굿을 하다가 사람을 죽이는 등 말할 수 없는 무지한 일들을 하고 있다”는 말에 크게 놀란 쿠퍼는 불쌍한 한국 사람들의 생명을 건져 주고 쓸데없는 미신에 잡혀 밝은 날을 모르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행복과 소망과 평화로운 참 삶을 주어야겠다는 각오를 갖고 한국에 왔다. 사람에게 관심을 둔 ‘사랑’의 마음으로 시작한 전도 활동을 통해 한국 사람들의 삶을 참 삶의 생활로 개혁해 나갔다.
하루는 그녀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쿠퍼 목사는 무서워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이불 속에서 기도만 드렸다. “하나님 제 생명은 죽어도 좋습니다. 부디 저 도둑들을 회개시켜 유명한 목사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 도둑은 귀한 보배를 들고 나갔으나 쿠퍼 목사는 억울한 마음이 없었다. 언제나 잊지 않고 “회개시켜 목사가 되게 하셔요.”라고 기도만 드렸다.
하루는 성경 학교로 어떤 사람이 찾아 왔다. 언젠가 밤에 왔던 도둑이라는 그를 쿠퍼 목사는 반갑게 영접했다. “목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날에 훔친 것은 목사가 되어 그 이상 갚아 드리겠습니다.”라며 회개한 도둑을 쿠퍼 목사는 신학교에 입학시키고, 그 학비까지 대주었다. 쿠퍼 목사의 사랑이 열매 맺어 4년 후 그는 훌륭한 목사가 되었다.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한 죄수


알렉산더 대왕이 노예선을 방문했다. 많은 죄수들이 끌려와서 쇠사슬에 묶여 노를 젖는 비참한 노예선 이었다. 노예들은 왕에게 자기의 억울함과 죄 없는 것을 변명하고 자기 결백을 호소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만이 말이 없었다. “자네는 왜 말이 없나?” 하고 묻는 왕에게, “나는 여기서 고생을 해야 마땅한 죄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알렉산더 대왕은 “여기 모든 사람이 죄 없는 사람들인데, 왜 의인들속에 이 죄인을 함께 있도록 하느냐? 어서 돌려보내라”




개과천선


주처(周處)라는 이름난 깡패가 있었다. 그는 몹시 포악하고 싸움을 잘하여 마을 사람들의 걱정거리였다.
또 그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에는 교룡(蛟龍)이 살았고, 뒷산에는 호랑이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주처와 교룡과 호랑이는 모두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악당 세 놈’이라고 불렀다. 그 중에서도 주처의 횡포가 가장 심했다.
어느 날, 지혜로운 마을 사람 하나가 주처에게 호랑이를 죽이라고 설득했다. 이 말에 주처는 흔쾌히 호랑이를 죽이러 뒷산으로 들어갔다.
“둘 중에 하나는 죽겠지?”
“주처가 죽었으면 좋으련만...”
마을 사람들은 주처가 죽기를 바랐다. 그런데 주처는 호랑이를 찔러 죽이고 의기도 양양하게 마을로 돌아왔다.
“정말 용감한 일을 했네. 자네 덕택에 우리는 호랑이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네.”
“자네의 힘이면 교룡도 문제없이 해치울 수 있겠지?”
마을 사람들은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고 온갖 말로 주처를 꾀어 부추겼다.
그 바람에 주처는 강에 들어가 교룡과 격투를 했다. 막상막하, 불꽃 튀는 싸움이었다. 한참을 싸우던 교룡은 떴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수십 리를 떠내려갔는데, 주처도 그놈을 꽉 붙잡고 같이 떠내려갔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주처도 교룡도 행방이 묘연했다.
“두 놈이 모두 죽은 것이 틀림없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자, 마을 사람들은 “와!” 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함께 축하했다.
그러나 주처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교룡을 죽이고 강에서 살아나온 주처는 걸음을 재촉하여 마을로 돌아오고 있었다.
“엉? 사람들이 왜 저렇게 즐거워하지?”
주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사람들 곁으로 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사람들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렇게 즐겁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불안한 기색만이 가득했다.
주처는 비로소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걱정거리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심하게 부끄러움을 느낀 주처는 그 길로 마을을 떠났다.
어느 곳에 이르러 모두가 존경하는 현인을 만나게 되었다. 주처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그 현인에게 말했다.
“저는 이날까지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며 살았습니다. 이제 뉘우치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만, 제 나이로 보아 이미 때가 늦은 것 같습니다. 저는 끝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겠지요?”
그러자 현인이 말했다. 
“옛 사람들은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만족한다.’고 했는데, 당신은 아직도 젊으오. 또 사람들은 뜻을 세우지 못함을 걱정하오. 그런데 어찌하여 당신은 이름이 빛나지 않을 것을 슬퍼하오?”
드디어 주처는 개과천선하여 좋은 사람이 되었다.   


사랑의 편지에 회개한 지존파


97,1,4일자 국민일보에 ‘사랑의 편지에 지존파 회개했다’는 제목의 기사가 보도된바 있다.
그들이 회개하게 된 동기는, 서울 어느 교회에 50이 넘은 집사들로 구성된 ‘전도 특공대’에 의해서였다. 그 대원들은 96,10, 떠올리기조차 끔찍한 그 지존파, 그러나 그들의 영혼만이라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모임을 결성하고 밤을 새워가며 그들에게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지존파 일당이 체포됐을 때는 물론, 법정에서조차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던 강철같던 그들의 심장은, 그 전도 특공대의 끈질긴 사랑과 수 십 통의 편지, 그리고 전도지 등에 의해 녹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은 회개한 지존파들이 전도 특공대원들에게 보낸 답장의 일부이다.


“아저씨, 이 죄 많은 놈 때문에 고인이 되신 소윤오씨 자녀분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죽음으로써 사죄하고 싶습니다.”(강OO)


"법정에서의 거만스런 제 행동을 지켜보셨을 것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릅니다. 절대로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일 줄 몰랐습니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 자기 한 몸 살아가기도 바쁜데 제게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악마의 대리인”(김OO드림)


그리고 지존파의 두목격인 김OO은 11살 때, 교회에 다니다가 중단했다고 하면서, 만약 계속 신앙 생활을 했더라면 자신의 삶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편지를 통해 밝히고 있었다.    


진실이 없는 회개와 진실한 회개


여러분들, 일본 사람 좋아하는가?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싫어한다. 경제 동물이라고 불리운다. 왜 그런가? 우리 나라와 동남아 각국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회개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형식적인 반성뿐이었다. 침략을 수시로 정당화하고 있다. 국수주의자가 난동을 부린다.
이에 반해서 독일은 어떤가?
철저히 회개했다. 역대 수상들이 아우슈비츠에서 진정한 통회를했다. 조상들의 범죄를 진정으로 회개했다. 이스라엘에게 충분히 배상했다. 공식적인 배상 외에도 엄청나게 도왔다. 법률을 제정해 나치의 만행을 부인하는 언동을 하면 감옥에 가게 만들었다. 일본과는 전혀 다르다.
일본이 진정으로 관계 회복을 하려면 일복 국회가 회개를 의결하고, 피해 당사자와 당사국에 진정한 배상과 사죄를 하고, 일본의 만행을 부인하는 자는 감옥에 보내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


하나님께서 천사를 시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가져오도록 했다. 맨 처음 천사는 금덩어리를 찾았다. 천사는 “아니야, 아니야. 이런 것은 우리 임금님께서 충분히 가지고 있어”하고 외쳤다. 또 반짝 반짝 빛나는 한아름의 다이아몬드를 움켜쥐었으나  한 번 보고는 버리고 말았다.  천사는 하나님께 바치는 귀중한 물건을 찾아다니느라고 세상을 두루 살폈지만 가엽게도 찾을 수 없었다. 그 때 어떤 죄인의 부르짖음이 들렸다. 발끝을 들어올리고 살그머니 어떤 사람이 꿇어앉아 있는 곳으로 가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 사람은 죄로부터 구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하나님께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다.
“옳지 ! 이제야 찾았구나.” 천사는 금으로 만든 성찬 잔에다 그의 사랑의 눈물 방울을 담아 하늘로 가지고 왔다.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이 땅에서 제일 귀한 보석을 찾아왔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상한 심령이다(시 51:17).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며 자신의 사랑을 하나님께 다 드리는 자를 기뻐하신다. 그를 사랑하는 자가 그의 사랑을 입으며 그를 간절히 찾는 자가 그를 만난다.
































































































































예수님을 신뢰하고 한걸음 한걸음...


‘킴 윅스’는 빌리 그래함 목사 선교 팀의 일원으로 1981년 우리 나라 세종문화회관에서 간증을 했다. 그녀는 소경이기 때문에 어디로 가든지 사람들의 인도를 받게 되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은 그녀의 십 미터 전방에 무엇이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 놓으라’, ‘바로 앞에 흙탕물이 있으니 피하라’고 말한다. 그녀는 이렇게 자기를 인도하는 사람을 신뢰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면 언제나 목적지에 도달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말하기를 “저는 인생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나를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한 걸음씩 옮기다 보면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예비하신 그 영광스러운 목적지에 도착할 것을 확실히 믿는다”고...








자신이 구원받는 길


언젠가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은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겨우 몇 발자국 앞밖에 볼 수 없었다. 이 사람은 눈보라 속에서 몇 시간 동안을 힘겹게 걷다가 마침내 무엇인가에 걸려 눈 속에 쓰러졌다. “나는 너무 지쳐서 도저히 내 힘으로는 일어날 수가 없어. 조금만 자고 나면 계속 걸어갈 수 있겠지.”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할 무서운 혼수상태가 그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우연히 그가 걸려 넘어진 물체가 사람인 것을 발견했다. 그는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 속에 파묻혀 있던 사람의 맥박이 뛰는 것을 알았다. “그를 도와야 해. 그를 살려야만 해.” 초인간적인 노력으로 그는 쓰러진 사람을 어깨에 걸쳐 매고 다시 눈보라 속을 헤치며 힘겹게 걷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서 그는 오두막집을 발견했다. 그는 다른 사람을 구원함으로써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목자를 아는 양떼


부흥사 무디의 한 친구가 동방을 여행할 때였다. 어떤 지방에 갔을 때 양을 치는 목자가 재래의 습관대로 양의 이름을 불러 자유롭게 인도하는 것을 보았다. 무디의 친구는 목자가 있을 곳으로 가서 “내게 당신의 의복과 지팡이를 빌려주십시오. 그것을 입고 양을 불러보아 그들이 나를 따라 오는지를 시험해 보려고 합니다.” 목자가 그의 청을 허락하자 무디의 친구는 목자의 의복을 입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목자와 꼭 같은 음성으로 “매-매-매” 하면서 불러냈다. 그러나 양은 따라오기는 고사하고 모두 놀라서 도망쳐 버렸다. 그는 목자에게 “왜 내가 양을 부르면 한 마리도 안 따라 올까요?” 하고 물으니 목자는 대답하기를 “병든 것이라야 따라갈 것입니다”하였다 한다.




나의 야망, 영혼 구원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 대장은 자나깨나 영혼 구원밖에 몰랐다. 그래서 북을 치며 나팔을 불기도 하고, 영혼의 구원 군대(Salvation Army)를 만들어 전쟁하듯이 구령 사업을 했다. 많은 오해를 받다가 결국 국가와 국민에게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어느 날 에드워드 7세가 버킹검궁으로 부스 대장을 초대하여 “장군, 수고하셨소, 참으로 좋은 일을 하였소.”하며 앨범에 사인을 하라고 하니까, 75세난 그가 허리를 굽혀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각하!
어떤 사람의 야망은 예술에 있고
어떤 사람의 야망은 명예에 있고
어떤 사람의 야망은 황금에 있사오나
오직 나의 야망은 사람의 영혼에 있습니다“


전도 사업, 선교 사업, 즉 영혼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개인이나 교회나 그 국가는 번영하고 복을 받는다.




복음의 씨는 어떻게 자라는가?


19세기 미국의 부흥 전도자 무디 목사는 수십만 명을 주님께로 인도했고, 특히 주일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운 분으로 유명하다.
그는 하루에 한 사람에게 반드시 복음을 전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런데 어느 하루는 아무에게도 전도하지 못했다.
그날 밤 잠 자리에 들었으나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옷을 입고 거리로 나갔다.
밤중에 거리에 서서 말씀으로 권유할 대상자를 찾는데, 한 술 주정꾼을 만났다. 그는 다짜고짜 다가가서 “예수님을 아시나요?”라고 물었다. 그 술 주정꾼은 ‘예수’라는 말을 듣자마자 화부터 벌컥 내었다.
무디는 쫒기다시피 하여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후 3개월이 지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서 문을 열어보니 예전의 그 술 주정꾼이었다. 그 술 주정꾼이 고백하기를 그날 밤 예수님을 아느냐는 말에 크게 화를 냈으나 그로부터 그 말이 내내 귓전에서 떠나지 않아 예수를 믿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복음의 씨는 무디가 뿌렸으나 씨가 자랄 텃밭의 심령은 성령께서 내내 붙들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라는 형체도 없는 작은 씨가 그 박토의 텃밭에 뿌려져 묻히고 뿌리를 내려 계속 자라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그러기에 시편 기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하였다.




어린이 전도의 중요성


21세기를 바라보는 교회의 사명 가운데 하나는, 어린이들의 구원을 통해 삶의 긴 여정을 향한 출발 초기부터 복음의 씨를 뿌리는 일이다.
월버트 챠프만 박사가 4천 5백 명이 모인 집회에서 얻은 통계에 의하면 400명은 10살 이전에, 600명은 10-14살 사이에, 1천 명은 16-20살 사이에 예수를 영접하고 겨우 24명이 36살 이후에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다. 흥미를 느낀 챠프만 박사는 더 광범위하게 조사하여 다음과 같은 통계를 얻었다. 25세 이후에는 1천 명에 겨우 한 명, 45세 이후에는 20만 명에 겨우 한 명, 그리고 75세 이후에는 70만 명에 겨우 한 명 꼴로 예수를 영접했다는 것이다.
어린이 또는 젊은이의 영혼은 백지와 같아서 무슨 색깔이든지 잘 받아들인다. 빌리 그래함 목사를 비롯하여 위대한 전도자들의 생애를 조사해 보면, 젊은 시절에 회심을 하고 큰 일꾼이 된 경우가 많다.




영원한 반석 예수


어떤 젊은이들이 결혼하여 보금자리를 꾸몄다. 두 사람은 소문난 잉꼬 부부였다. 그들은 30년 동안을 함께 살면서 자기들의 말대로라면 단 한 번도 서로를 미워할만 한 부부 싸움은 한 일이 없었다는 그런 부부였다. 아들 하나에 딸 하나를 낳아 곱게 잘 길렀다. 예수를 믿으라고 주위에서 전도할 때면 부부가 너무 행복하기 때문에 둘 사이에 예수가 끼어들면 재수없다면서 거절할 정도였다. 그들은 늘 입버릇처럼 우린 한 날 한 시에 함께 죽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결혼한 지 31년째 되던 어느 늦가을 오후 심장 마비로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그토록 사랑하던 부인을 남겨둔 채 남편이 먼저 간 것이다. 그토록 믿고 의지했고 사랑했던 그녀의 반석이 무너진 것이다. 남편의 장례식을 마치고 그녀는 충격과 슬픔으로 자리에 몸져 눕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준비해 두었던 수면제를 먹고 남편 곁으로 간다는 유서를 남긴 채 두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행히 가족들에게 발견이 되어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녀가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전도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눈물을 흘리며 영원한 반석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 31년 동안 믿고 의지했던 그녀의 반석이었던 남편은 그를 떠나갔지만 그 대신 영원한 반석이신 예수님이 그녀 곁으로 다가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위로와 화평과 평안함과 기쁨을 주셨다.


십자가 고통의 의미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농부의 집에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 농부는 예수를 믿지 않고 그 부인은 늘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 목사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그에게 설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그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닭장엘 같이 가보자고 했다. 가보니까 그 닭장 둥우리에 암탉이 앉아 있는데 그 날개 밑에서 막 병아리들이 삐약 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농부가 그 암탉을 건드려 보라고 해서 툭 건드렸더니 그 암탉은 죽어 있었다. 농부가 말하기를 “저 머리에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그 몸에서 피를 다 빨아 먹었는데도 그 놈이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은 “오! 저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일 수도 있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나는 멸망받기 때문입니다.” 그 농부는 그 뜻을 깨닫고 즉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셔들였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과제,구원


유명한 미국의 전도자 무디는 “전도함으로써 이 악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나에게 전세계를 개혁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세상은 도저히 구할 수 없는 난파선과 같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구명대로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그 배로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독교인은 어디에서나 사회악을 제거하기 위해 애써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형받는 것이 더 낫습니다


17명을 죽이고 사형을 언도받은 김대두는 전도를 받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는 서울구치소에 있는 동안 수백 명을 전도하였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과거의 죄를 고백하였다.
“이건 제가 공연히 하는 말이 아니라 솔직한 저의 심정입니다. 누가 저에게 어느 큰 회사 사장자리를 줄테니 예수님 버리고 오라하면 확실하게 대 답할 것입니다. ‘사형의 날을 기다리며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기쁨을 기대하는 지금이 내게는 더욱 행복합니다’라고요.” 이러한 고백은 그의 어쩔 수 없는 처지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후 나온 진실한 마음이었다.




산 위로 올라가야 길을 찾을 수 있다


숲이 우거진 산길을 가는 나그네가 길을 잃고 방황만을 거듭하다가 천만 다행히도 산중 오두막집을 발견하였다. 그 집에 사는 노인이 고맙게도 빠져나갈 길을 알려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었을 때에는 이리 저리로 헤매일수록 더 위험하니 정상으로 올라가 방향을 정하는 것이 최상책입니다.” 그 말은 어떤 방황에서도 잊을 수 없는 말이다.




구원의 놀라운 결과


존 웨슬리가 네 살 때 하루는 그가 이층에서 자고 있는데 갑자기 아래층에서 불이 났다. 방이 전부 불에 둘러싸였다. 사람들은 미리 알아 물건을 정리해서 모두 빠져 나왔기 때문에 모두가 무사한 줄 알았는데 한참 후에야 이층에 어린 아이가 자는 것을 그냥 버려 두고 왔음을 알게 되었다. 불길이 사방에 퍼졌는데 올려다보니 깨어난 아이가 창틀에 매달려 울고 있는 것이었다. 이 아이를 본 어른들이 급히 사람 위에 사람이 올라서고 그 위에 사람이 서서 겨우 구했는데 그 아이가 바로 나중에 감리교를 창시한 위대한 웨슬리였던 것이다.




믿음의 배


인도의 세 힌두교 학자가 강을 건너려고 나룻터로 나왔다. 날씨가 잔뜩 찌푸러져 있어 비바람이 몰아칠 것만 같았다. 뱃사공이 세 사람을 태우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한 학자가 뱃사공에게 물었다. “노인 뱃사공! 천문학에 대해서 무엇 좀 아십니까?” 하고 묻자 “나는 평생 노만 저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학자는 “당신, 헛살았군요.”하고 말했다.
한참 건너다가 두 번째 학자가 뱃사공에게 물었다. “노인 뱃사공, 힌두교의 철학을 아십니까?” 그러나 뱃사공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노만 저을 뿐 철학같은 것은 전혀 모릅니다.” 그 학자는 노인에게 “한 평생을 헛 살았군요!”라고 말하였다. 이때 세 번째 학자가 “그러면 흰두교의, 생물학, 심리학, 경전도 모르겠군요”라고 말했다. 노인이 몹시 짜증스러운 태도로 “아무것도 모른다니까요” 하고 대답하자 그들은 불쌍하다는 듯이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때에 세찬 바람이 불어와 나룻배를 뒤집어 놓았다. 세 명의 학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이것을 본 뱃사공은 “여보시오, 당신들은 수영을 못 배웠오? 참 딱도 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이야말로 생 전부를 헛 살았군요!”라고 말했다.
세상의 과학이나 천문학, 철학은 인간이 편리하게 살도록 할 뿐, 인간 영혼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오직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길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믿음의 배를 타는 것뿐이다.


죄수의 석방


수 년 전에 한 남자가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는 영국 사람이었지만 귀화하여 미국 시민이 되었다. 몇 년 후 그는 만족하지 못하고 불안을 느껴 쿠바로 갔다. 쿠바에 체류한지 몇 년 뒤에 그 곳에서는 시민 전쟁이 일어났다. 때는 1867년이었고, 이 사람은 스페인 정부에 의해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모든 재판은 스페인어로 진행되었고, 불쌍하게도 그 사람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유죄 판결이 내려져 사형 선고를 받자 그는 영국과 미국 영사에게 자신의 결백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들은 사건을 검토한 뒤에 사형 선고를 받은 이 사람이 완전히 결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스페인의 장군에게 가서 말했다. “당신들이 사형을 선고한 이 사람은 결백합니다. 그는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스페인 장군은 이에 맞섰다. “그는 우리 국법에 따라 재판을 받아 유죄임이 드러나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니, 죽어야 하오.” 그 당시에는 해외 전보가 없었으므로 그들은 자기네 정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사형 집행일 아침이 되었다. 그는 수레에 실린 관(棺) 위에 앉히운 채로 형 집행 장소로 끌려갔다. 무덤이 파지고 사람들은 관을 꺼내서 그 위에 젊은이를 앉혔다. 검은 천으로 얼굴까지 덮었다. 병사들이 발포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영국과 미국 영사가 말을 타고 나타났다. 영국 영사가 말에서 뛰어 내려 영국 국기인 유니온 잭(the Union Jack)을 꺼내 젊은이의 몸을 둘렀다. 그리고 미국 영사는 성조기(the star-spangled banner)를 그 젊은이의 몸에 휘감았다. 그리고 나서 스페인 장교를 향하여 외쳤다.
“용기가 있거든 저 두 나라의 국기에 총을 쏴 보십시오.”
그들은 감히 그 국기들 위에 총을 쏠 수 없었다. 그 국기들 뒤에는 두 나라의 거대한 정부가 있었다. 그것이 그가 구원함을 받은 비결(secret)이었다.
“그가 나를 이끌어 연회장에 들어오니, 나를 두른 그의 기(banner)는 사랑이로구나... 그의 왼 손이 내 머리에 베개하고, 그의 오른 손이 정녕 나를 껴안는구나.”(아가 2:4,6)
-무디 ‘하나님께 가는 길’-




하나님의 간섭


보통 사람들은 간섭을 싫어한다. 자녀들은 부모의 간섭을 싫어하고 학생들은 선생님의 간섭을 싫어한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환영해야 할 간섭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간섭이다. 마귀가 간섭하면 망하게 되고 도적이 간섭하면 손해가 나지만, 하나님의 간섭은 생명이고 은혜이다. 비록 채찍과 징계일지라도 살리고, 은혜주시고, 구원하시고, 축복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간섭을 환영하고 감사하자. 당신이 예수님만 믿으면 - 그 조건 한 가지만으로 - 하나님은 당신을 간섭하시고 구원하신다.




하늘나라에서 온 답장


늙은 아버지만을 모시고 사는 초등학교 어린이가 있었다. 그런데 이 아버지가 그만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어린이는 할 수 없이 학교를 그만 두고 거리에 나가 껌을 팔고 심부름을 해서 아버지를 봉양해야만 했다.
다음 주일, 교회 학교에 갔던 어린이는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배웠다. 어린이는 너무나 기뻐 집에 돌아오자마자 하나님께 편지를 썼다. 아버지의 병이 중하지만 병원에도 가지 못한 사연을 쓰고 꼭 낫게 해 주실 것을 바라는 간곡한 편지였다. 아이는 편지 봉투에 ‘하늘나라 하나님 여호와 귀하’라고 쓴 뒤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 소년에게 며칠 뒤에 소식이 온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온 답장이 분명했다.
“너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하면 나을 수 있고 그 치료비는 염려 안해도 된다” 는 소식이었다.
소년의 아버지가 치료를 마쳤을 때 병원의 입원비는 정말 깨끗이 해결되어 있었다. 소년이 편지를 띄웠을 때 우체부는 이 이상한 편지를 우체국장에게 가지고 갔다. 이 편지의 내용을 보고 마음이 움직인 우체국장은 자신이 어린아이의 딱한 사정을 떠맡기로 작정하고 하늘나라의 소식을 아이에게 띄웠던 것이다. 소년이 찾아가는 병원을 확인한 우체국장은 이 답장을 보낸 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믿고 완전하게 이행했다. 그는 교회의 장로였다. 




강아지의 구원 요청


지난 금요일 새벽 1 시경, 몽실이의 깨갱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에 짖는 소리가 아니라, 주인 어른이 나오셔서 도와 줄 일이 있노라고 하는 요청의 소리였다. 일어나기가 귀찮아서 ‘조금 깨갱거리다 말겠지’ 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나 몽실이는 주인장께서 꼭 나와주셔야 합니다. 하는 듯이 계속 소리를 질렀다.
나는 하는 수없이 잠옷바람으로 나가 봐야만 했다. 나가보니, 목줄이 대문 틈에 걸려서 몽실이가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걸린 줄을 빼내 주었더니, 몽실이는 고맙다고 그 짧은 꼬리와 엉덩이를 흔들어 대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우리 주인이 최고지!’ 하는 것 같았다.
강아지는 알고 있었다. 새벽 1 시든지 2 시든지 간에 깨갱거리며 도움을 청하면, 주인이 구원해 줄 줄을 알았던 것이다. 몇 번 소리치다 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나올 때까지 구원 요청 신호를 발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6편에서, “하나님, 나를 지켜 주십시오”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며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환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보호해 주신다고 했다. 강아지가 어려움을 당하면 소리를 쳐서 주인의 도움을 얻듯이, 우리 인간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16편 2절에 “하나님밖에는 나의 행복이 없습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걱정없고 기쁘고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춘교회 정수환 목사-




역사에 나타난 속죄관(贖罪觀)


멕시코
AD. 1300년경에 멕시코에서는 유행병이 돌거나 재난이 오면 죄 때문에 온 신의 진노라 생각하여 속죄 제사를 드리는데 흠이 없고 잘 생긴 청년을 골라서 그의 소원을 다 해준 다음에는 벌거벗겨서 그 몸에 붉은색, 검은색, 푸른색, 흰색 등 여러 가지 색칠을 해서, 제사장이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서 그 제물되는 청년을 데리고 간다.
그러면 군중들은 그 청년에다가 대고 “내 죄를 가져가십시오(Take my sins), 내 죄를 가져가십시오”(Take my sins)하고 죄를 고백한다.
그리고는 높은 피라밋 식의 제단에 데리고 올라가서 그들이 보는 가운데 시퍼런 칼을 들어서 그 청년의 가슴을 찔러 피를 흘려 뿌린 뒤에 죄를 대속하고 신의 노여움을 풀었다고 하는 역사적인 기록이 있다.


아테네
세계 문화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서는 그 도시에 질병이 만연하면 죄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샀다고 생각해서 속죄 제사를 드리는데 가난한 사람을 돈을 주고 사서 많은 사람 앞에 세워 놓는다. 그러면 군중들이 자기들의 죄를 그 사람에게다가 고백한 다음에 돌로 쳐서 피를 흘리고 죽게 하면 자기들의 죄를 용서받고 신의 진노를 풀었다고 믿는 신앙을 갖었다고 한다.


색소니
구라파 Saxony에서는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리다가 나중에는 페르샤 전쟁 때 잡혀온 포로 중에서 몇 사람씩 잡아 피를 흘려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트레이드
Thrace라고 하는 곳에서는 그 도시의 죄를 정화하기 위해서 사람의 피로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집트
古代 Egypt에서는 사람을 잡아 심장을 찔러서 제사를 드리는데 정월 초하룻날 세 사람씩 제사를 드린 기록이 있다.


스키디안
현재 소련인에 해당하는 Scythian 사람들은 사람의 심장을 찔러서 나온 피를 병에 담아다가 신의 노여움을 푸는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아프리카
다호미(Cahomy)에서는 해마다 궁중에서 닭이나 거위나 소같은 짐승의 목을 찔러서 나온 피로 제사를 드리다가 후에는 전쟁포로를 잡아서 피의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우리 나라에서도 무당들이 푸닥거리 할 때에 보면 한참 춤을 추고 돌아다니다가 돼지의 목을 쳐서 피를 흘리게 한 다음에 칼로 열十자를 긋고 그 가운데 칼을 꽂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와같이 세계 역사를 더듬어 보면 세계 모든 사람이 죄를 속하기 위해서 모두 피로써 그들의 신께 제사를 드리는 습관과 풍습을 가졌다는 것이다.
프레이저(Frazer)교수는 “The Golden Bough”라고 하는 책에서 말하기를 “세계 인구의 90%가 종교적인 경축일에 피를 뿌리며 제사를 드렸다.”고 했으며 기독교 인간 학자 알렉산더 그리골리아(alexander Grigolia) 박사는 “세계 인구의 95%가 피로써 신께 제사를 드렸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렇게 피로서 죄 사함 받는 습관과 풍습에 대하여 그리골리아 박사는 말하기를 “사람이 신께 죄를 짓거나 악을 행했을 때에 어떤 종류의 피든지 꼭 피에 의해서만 속죄 받는다고 믿는 것이 사람이 원래부터 타고난 성품일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 인간 학자들이 발견해 낸 이런 피로써 죄 사함 받는 습관과 인간의 성품은 어디서 기원했겠는가?
이 해답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곧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멸망받을 인간들에게 다시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피로써 죄를 속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큰 선물


“여보, 당신은 정말 자랑스러운 가장이예요.”
“당신 역시 가장 멋진 여자요.”
여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처음으로 서커스 구경을 온 크리스 부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지루하게 긴 줄을 기다리다 차례가 되자 크리스씨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어린이 표 여섯 장과 어른 표 두 장이요.”
“30달러입니다. 손님.”
“얼마....라고 했소?”
“30달러예요. 손님.”
다시 묻는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는 난처한 표정이 되어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히 그 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는 않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돌아서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그의 아이들과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뒷줄에 서 있던 코모스씨가 갑자기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20달러 짜리 지폐를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몸을 굽혀 그 지폐들을 주워 크리스씨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여보세요, 방금 호주머니에서 이 돈이 떨어졌는데요.”
순간 코모스씨의 의도를 눈치챈 크리스씨는 붉어진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씀도 마십시오. 저 역시 예전에 이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저도 그 빚을 갚는 것뿐입니다.”
“고맙습니다. 이것은 나와 내 가족에게 정말로 큰 선물이 될 겁니다.”
그들이 극장 안으로 들어가고 난 후 코모스씨는 그의 여섯 살 난 아들의 손을 잡고 광장 쪽으로 돌아서 걸어가고 있었다.






































































































세 가지 손(가위, 바위, 보)


사람은 평생 동안 세 가지 손을 가지고 산다. 세 가지 손의 모습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상징하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바위손(주먹을 쥔 상태)을 가지고 온다. 무엇인가를 손안에 꼭 쥐려고 하는 모습이다. 세상 것을 자기 것으로 삼고자 하는 자기 본위적인 본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하는 소유욕이 강하다.
그러나 조금 자라게 되면 두 손가락을 펴는 작업(가위손)을 한다. 조금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식하고 내 것을 나누어주는 태도의 표시이다. 그러나 아직도 세 손가락은 자기를 향해 쥐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관심이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보다 높다는 표시이다.
마지막으로 성숙한 사람은 손을 활짝 펴는 것이다(보의 손). 이는 내 것은 하나도 없다는 표현이 되겠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을 뿐이다. 삶의 지표를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만을 향하여 손을 내어 미는 상징이다. 그래서 태어날 때는 주먹을 쥐고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손을 펴고 죽는 것이다.




성숙과 미성숙


두 아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고 있었다. 하나는 일곱 살이고 하나는 다섯 살인데, 어머니의 생일날이 돌아오자 각자 어머니께 선물을 드린다고 부산을 떨었다. 저금통을 깨뜨려 그간에 모아 놓았던 돈을 가지고 백화점에 물건을 사러 나갔다. 어머니는 그냥 내버려두었다. 큰 아이는 그래도 생각이 있어서 어머니의 루즈를 하나 사 들고 왔다. 어머니가 아침마다 바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둘째 아이는 장난감을 사 가지고 왔다. 제 생각에는 그게 제일 좋아 보이니까, 어머니도 틀림없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게 바로 미숙아라는 것이다. 어머니를 위한다면 어머니가 기뻐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아이는 제 시각에서, 자기 중심적(egocentric) 생각으로 사랑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 장난감을 가지고 어머니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성숙한 인격


영국에 어느 대학에서 1등, 2등 다투는 학생 둘이 있었다. 1등 하는 사람은 동양 사람이고 2등 하는 사람은 영국 사람이었다. 그런데 언제나 조금의 점수 차이로 동양 사람이 1등만 했다. 영국 사람들은 “야, 너 어떻게 해서든지 1등 좀 해봐라”고 늘 얘기했다. 한 번은 늘 1등만 하던 친구가 며칠 동안 계속 학교에 안 나왔다. 그래서 2등 하던 영국 친구가 알아 봤더니 교통사고로 그 친구가 입원해 있었다. 그래서 그 소식을 들은 그의 친구들은 “야 잘됐다. 이번에는 네가 일등 하게 생겼구나”라고 좋아했다. 나중에 학기가 끝나니까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학교에 못 나왔던 그 학생이 또 1 등을 했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에 그가 일어나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내 경쟁자가 꽃다발을 가지고 와서 위문해 주었고 학교에서 공부한 것을 전부 필기해서 날마다 찾아와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랬었기 때문에 내가 병원에 누워 있었어도 나는 공부를 다 할 수가 있었고 또 1등이 되었습니다. 난 공부벌레가 되어서 성적은 좋았지만 인격적으로는 저 사람이 나보다 몇 배 나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얘기할 때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2등 하던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공의 비결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원대한 목표를 갖는 동시에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체력과 능력을 갖는 것이다.
-괴테-


한 시간 일찍 일어나고 한시간 늦게 자는 것이 앞서가는 길이다.
인간은 서러움을 겪어야 남의 사정도 알고 고마움도 알게 된다.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만이 가장 훌륭한 일을 많이 할 수 있다.
큰 일을 하려면 피와 눈물이 따른다. 수양은 혀를 깨무는 것이다.


미국의 성공학의 권위자인 나폴레온 힐과 클레멘트 스토운은 미국에서 성공하고 승리한 사람 500여 명을 면접하고 연구한 결과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첫째가 적극적인 태도요,
둘째가 명확한 목표요,
셋째가 봉사의 정신이요,
넷째가 명확한 사고요,
다섯째가 자기 훈련이요,
여섯째가 주인 정신이요,
일곱째가 신념의 활용이요,
여덟째가 명랑한 성격이요,
아홉째가 솔선 수범이요,
열째가 열성이라고 했다.




최선의 노력


지미 카터(Himmy Carter)씨가 대통령이 되도록 크게 영향을 끼친 책이 하나 있는데 그 책이름이 “왜 최선을 다 하지 않았는가?(Why not the best?)”라고 하는 책이다.
거기에 카터씨가 해군 장교로 있을 때, 당시 해군 제독이던 하이만 리카버씨에게 부임 인사를 하려고 제독실에 들어갔더니 하이만 제독이 묻기를 “귀관은 사관학교 시절에 얼마나 공부를 했느냐?”고 하더란다. 그래서 카터씨는 “820명중에 59 등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더니 “귀관은 왜 최선을 다 하지 않았는가?”라고 칭찬 대신 책망 비슷하게 되묻더란다.
그러면서 카터 대통령은 말하기를 “나는 그의 칭찬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부모를 제외하고는 내 일생에 가장 큰 감화를 준 사람이다.”고 했다. 카터 대통령이 최선을 다 하는 습관이 땅콩 밭에서 일약 대통령이 되기까지 한 것이다.




성공을 조심하라


웃시아왕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강력한 국가의 왕이 되었으나 그가 강성했을 때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왕국과 자기의 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범죄했으며 하나님은 그에게 문둥병을 내리심으로 그를 징계하셨던 사실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대하26:16). 그러므로 성경은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무릇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한다.
만월(滿月)의 계절을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돈이 없다가 돈이 벌릴 때 조심해야 한다. 모든 일이 잘 될 때 우리는 더욱 근신해야 한다.
교회가 연약했다가 강해질 때 우리는 더 하나님 앞에 근신하고 경성하며 깨어 기도하며 저마다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오순절의 위대한 부흥이 일어났을 때 아니니아와 삽비라의 범죄가 뒤따라 온 것은 얼마나 슬픈 irony인가? 하나님의 축복과 부흥이 올 때 사탄의 역사도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더욱 경성하여 겸손하게 엎드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위대한 부흥과 축복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음모와 시련에서도 성공한 미켈란젤로


위대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개종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에게는 아주 가까운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이 친구가 미켈란젤로를 교황에게 소개해서 시스틴 성당의 천정화를 그리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 일을 진행하던 친구는 미켈란젤로를 도와주려는 목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켈란젤로의 명성을 손상시키려는 음모로 가득 차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끌을 사용한 조각은 잘하지만 붓을 사용한 그림은 서투를 것이라 생각하고, 그로 하여금 실패하여 망신을 당하게 만들어 명성을 땅에 떨어뜨리려는 음모였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1508-1512)을 천정에 매달려 그림을 그렸고,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그것은 유례없는 대작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지창조이다.




실명에서도 책을 쓴 사람


S. 스타인(Stanry Stein)이라는  사람은 문둥병을 앓다가 눈까지 멀었다. 그는 한때 자살하려고 까지 했으나 다시 삶의 용기를 가지고 “내게 남은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없을까?”고 생각하다가 책을 쓰기로 결심하고 “작가가 되는 법”이라는 책을 사 들고 왔다. 의사가 보고 그 책은 보지도 못하면서 왜 샀느냐고 물었더니 책을 써 보려고 한다고 하면서 이 책을 읽어 줄 사람을 찾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잃어버린 것들을 슬퍼하는 대신 나에게 아직도 남아있는 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 합니다.”고 대답했다.
S.스타인은 문둥병에 걸려 시력을 상실한 처지이지만 라디오와 녹음기를 늘 메고 다니면서 한 마디씩 녹음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써 달라고 해서 “이제는 외롭지 않다”고 하는 유명한 책을 썼다.




시작하는 것과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


모든 사람은 여걸 헬렌 켈러(Helen Keller)에 관해서는 잘 알지만  그녀를 그녀 되게 한 사람은 앤 설리반이었다는 것은 잘 모른다. 헬렌 켈러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의 인생이었다. 어찌 보면 나무토막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을 전 세계를 놀라게하는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그녀를 가르치는 것은 오직 한 길, 감각 기관밖에 없으니까 헬렌 켈러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소리를 내거나 상징적인 터치에서 가르치던 중 오랜 고난 끝에 결국 말하는 법을 배우고 열심히 공부도 해서 박사도 되고 많은 영감을 주는 위대한 인물이 된 것이다.
헬렌 켈러가 앤 설리반에 대해서 글을 쓸 때 자기가 자기된 것과 자기가 얻은 모든 지식은 다 앤 설리반 때문이라고 했다. 자기 선생님 앤 설리반은 늘 되풀이해서 한 말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시작하고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 실패할 때마다 무엇인가 성취할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것은 성취하지 못할지라도 무엇인가 가치있는 것을 얻게 되리라. 시작하는 것과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Keep on beginning and failing).
난관을 뚫고 쫓아가는 사람만이 성공한다.  




열매맺는 삶


어느 부잣집에서 사오십 명의 부부를 초청하여 파티를 열었다. 그들은 가장 멋진 옷차림을 하고 모여서 맛있는 식사를 하며 사회, 경제 문제, 나라의 장래 문제 등에 관해 고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이들의 맛있는 식사를 위해 여러 명의 가정부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음식을 준비하고 또 나르고 있었다. 이 두 계층 사이에는 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도 건널 수 없는 심리적인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초대된 사람 중 어느 소박한 부인 한 분이 자리에 슬쩍 빠져 나와 그들을 도왔다. 이렇게 해야 계급간의 긴장이 없어진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눈에 띄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들과 섞여서 열심히 시중을 들었다. 이것은 사소한 사건에 불과했지만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 소박한 부인으로 인하여 일하는 여인들과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 부인이 중대한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이와 같은 화해의 역할이 바로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열매맺는 삶이란 많은 소득, 많은 업적을 남기는 것만이 아니다. 위의 이야기에서와 같이 작은 일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결실의 삶인 것이다.




복음의 씨앗


1960년 가을, 가난한 농촌 마을에 24살 짜리 청년이 갓 결혼한 새댁과 함께 나타났다. 이 청년은 이 마을이 고향이었는데 수년간 어딘가 나가 있다가 어디서 배웠는지 어깨 너머로 배운 약방문 재주를 가지고 약방을 차렸다. 그런데 주일만 되면 코흘리개 어린애들을 모아 무슨 예수쟁이 노래를 가르쳤다. 그리고는 새색시가 국수를 삶아서 먹여 보내곤 하였다. 고향 친구들이 이 키 작은 녀석이 어디 가서 예수쟁이가 되어 왔다고 놀려대었다. 마을 부인들은 그 집 새댁을 놀려대곤 하였다. 그러나 이 청년 부부는 끄떡도 않고 그 일을 계속하였다. 30년이 흘렀다. 그 청년의 집 안방에서 코흘리개들과 함께 시작된 교회는 어느덧 170명의 교인으로 성장해 있었고 그 청년은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그렇게 놀려대며 기세 등등했던 친구들은 담배 냄새에 찌들은 별 볼일 없는 늙은이가 되어 가는데 이 놀림받던 청년은 교회에서는 장로요, 지역사회에서는 내노라 하는 유지가 되었다. 인생은 길게 보아야 한다. 그리고 긴 인생의 끝에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성공의 지름길


미국의 대 강철회사 사장인 카네기씨가 후계자를 지명하게 되자 전세계의 눈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 회사의 중역들 중에는 두뇌가 탁월한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카네기씨가 지명한 후계자는 쉬브씨였기에 일대 쎈세이션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쉬브씨는 초등학교 정도밖에 졸업하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쉬브씨는 처음 그 회사에 청소부로 들어왔다. 정원만 쓸면 될 터인데 공장 안까지 말끔히 청소를 하였다. 드디어 그의 성실함이 윗사람의 눈에 띄었다. 그래서 사무원으로 발탁되고 드디어 카네기 눈에 띄었다. 카네기씨의 비서가 된 그는 메모지와 펜을 들고 카네기씨의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카네기씨가 공장 확장과 생산 과정에 대한 연구를 하느라고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그 밖에서는 쉬브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카네기씨가 깜짝 놀라면서, “왜 퇴근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사장께서 언제 부르실 줄 모르는데 어떻게 자리를 비웁니까?”하고 대답했다. 드디어 쉬브씨는 연봉 2만 달러일 때 백만 달러라는 거액의 보너스를 받았고, 끝내는 대 강철회사 사장이 된 것이다.
카네기가 쉬브씨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주면서, “자네의 성실한 그 정신적 바탕 위에 이 회사는 성장하리라 믿네. 이 회사를 성장시키는데 학력이 문제가 아닐세. 요는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일을 해결하는 정신적인 자세가 가중 중요한 것이라네. 자네에게 지식과 충고가 필요하면 박사, 석사 학위를 가진 사람을 채용하면 되니 그 점은 염려말게”라고 하였던 것이다.




시각장애의 아픔을 딛고 일어난 피아니스트


‘남 앞에선 절대 울지 않겠다.’
‘식구들이나 보러 한국에 돌아오진 않겠다.’
10년 전 비행기 안에서 이런 결심을 하며 미국으로 건너간 한 맹인 소녀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1959년 충북 청주의 한 마을에서 어머니 김강숙 씨(56세)의 뱃속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성 시력 장애아로 세상에 온 한 아기. 그가 바로 오은경 씨다. 열 살이 되어 피아노를 만지기 시작할 때까지도 어머니 김강숙 씨의 한(恨)이 되었던 아이.
하지만 이런 은경이에겐 보이지 않는 눈 대신 좀 별난 재주가 있었다.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라디오에서 나온 노래의 음을 따라 흥얼거리곤 했다. 어머니 김강숙 씨는 흔히 보아 넘길 수 있는 이 재주를 무심히 보아 넘기지 않았다. 음감이 뛰어난 딸에게 열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게 한 것이다. 당시 청주맹아학교에 다니고 있던 은경이가 피아노 건반을 신기한 듯 짚어 보는 모습을 보고 나서였다. 도레미파솔라시도...도레미파솔라시도... 보이지 않을 텐데 용케도 은경이는 한 번도 틀리지 않고 건반을 짚어 나가는 것이었다.
피아노를 순전히 귀와 기억력, 손의 감각에 의해 배우기 시작한 그녀. 녹음기나 점자 악보도 없던 시절이라 그녀는 나중에 연습하기 위해선 빠르게 머릿속에 그 악보를 통째로 암기해야 했지만, 너무도 행복했다고 회고한다.
피아노를 배우기 1년만에 충북예술제에서 정상인들을 제치고 특상을 받은 것을 비롯. 청주맹아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각종 대회에서 열세 번이나 수상했고, 그중 여섯 차례 특상을 받았다. 그러나 아무리 피아노를 잘 쳐도 맹인이 공부하기엔 역부족인 우리나라 여건에서 오은경 씨의 음악 수업은 고등학교 졸업으로 끝을 맺어야 했다. 활짝 꽃피워 보지도 못하고 그 재능이 꺾일 운명에 처한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정주여사대 주최 콩쿨에서 입상, 예비고사 면제 혜택을 받긴 했지만 앞을 못 보는 그녀를 보곤 모두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고 받아주는 대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뜻밖의 전기(轉機)가 오은경 씨에게 다가왔다. 뜻을 가진 이에겐 길이 열리는 법이라던가. 유학을 가고 싶어도 여건이 허락치 않아 마음을 끓이고 있던 그 앞에 국제선교회 고원용 목사가 나타난 것이다. 청주맹아학교의 교장으로부터 오양의 얘기를 건네들은 고원용 목사가 서울로 이사한 그의 집을 찾아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오은경씨는 그후 캘리포니아 노스리지 음대에서 2년을 공부하고 아틀란타의 에모리 음대로 전학해 그곳에서 수석 졸업을 하게 된다. 영어를 배우는 과정도 그랬지만 미국 대학에서 시력을 요구하는 과목 외에는 보통 사람과 똑같은 학점을 이수해야 했던 오은경씨의 피나는 노력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를 배울 때 점자 교과서가 없어서 칠판에 선생님이 어떤 단어를 쓰면 옆의 학생더러 스펠링을 불러달라고 해 나중에 점자 영어 사전을 찾아봐야 하는 고달팠던 작업. 점자 영어 사전은 33권이나 되고 ‘A’자를 찾아보려고 해도 여러 권이어서 남들보다 10배의 시간이 족히 걸렸다.
미국에서도 그는 ‘88년 지미 카터 전(前)대통령의 초청 연주회를 비롯, 독일 6개 도시 순회 연주회 및 각종 초청 연주회를 갖고, 우수한 성적과 예술적 자질을 인정받아 각종 장학금 혜택을 받았다. 특히 영광스런 것은 그가 애머리대 최초의 캔들러 예술 장학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오은경씨의 지도 교수인 윌리엄 랜슨교수는 자신의 제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연주는 우아하고 표현이 풍부하며 유달리 맑습니다. 오양은 매우 뛰어난 음악가지요.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면 그녀가 맹인이라는 걸 자주 잊곤 합니다. 아무리 복잡한 곡도 그녀 손에서는 너무나 쉽게 제 모양을 갖춰 빠져 나오지요.”
미국에서 ‘영혼의 음악을 빚어내는 동양의 작은 손’이라는 극찬을 듣고 있는 오은경씨. 그는 10년만에 장애자가 아닌 피아니스트로서 이 땅을 밟았다. 정다운 고국 땅에 입맞추며 그녀가 한 첫 번째 귀국 소감은 간단했다.
“제 존재가 다른 맹인들에게 작은 용기를 주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맹인들이 제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쟤는 특수한 재능이 있으니까 한다’고 생각치 말고 ‘오은경이도 했으니 나도 할 수 있다’고 희망을 갖게 되길 바래요. 제가 잘 치면 얼마나 잘 치겠어요.”    




적극적 헌신의 승리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에 영국의 유명한 해군 제독이 있었다. 그는 너무 가난하고 의지할 것이 없어서 열두 살이 되던 해에 해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스물 두 살 되었을 때에는 미국독립전쟁에 참전했고, 36세 때에 나폴레온과의 전투에 나갔다가 오른쪽 눈을 잃고 그만 외눈이 되고 말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외눈이 되어서 쓸모 없는 인간으로 제대했을 터인데, 그러나 그는 안대를 붙이고 전쟁에 참가했다. 36세 때에 스페인 전투에서 다시 오른손마저 잃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는 모든 신체적인 난관을 극복하면서 결국 지휘관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넬슨 제독이다.
1805년 나폴레온이 영국을 정복할 계획으로 수많은 전함을 이끌고 쳐들어올 때에, 외눈에 외팔인 넬슨은 나폴레온 함대를 맞아 용감하게 싸웠고 결국 승리를 얻었다. 모든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는 적극적인 헌신은 그로 하여금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게 한 것을 볼 수 있다.




일곱가지 성공법칙


(1)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당신에게는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적극적인 사고방식은 위대한 창조의 원동력입니다.
(2)당신의 목표를 마음의 소원과 일치시키십시오.
(3)부정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는 안돼” “할 수 없어” “나 같은게” 라는 소리가 들려 오거든 “이제는 달라, 새 사람이 되었다”고 응답하십시오.
(4)언제나 긍정적인 말을 매일같이 반복하십시오.
“나는 성장하고 있다” “나도 성공할 수 있다” “해낼 수 있고 말고”라고 다짐하는 말을 합시다.
(5)대가(代價)를 지불하십시오.
진정한 성공은 땀과 수고를 통해서만 완성됩니다.
(6)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맙시다.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닥쳐도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선다는 용기와 신념을 가집시다.
(7)될 수 있는 대로 꿈을 크게 가지십시오.
꿈꾸는 데는 수고도 돈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 큰 것을 하나님의 품으로 가져가십시오.




빌 게이츠 “성공 경영 10계명”


훌륭한 경영에 마술 같은 비법이란 없다. 그러나 내가 제시하는 10가지 지침은 효율적인 경영에 도움을 줄 것이다.


1. 업종을 신중히 선택하라.
당신이 즐길 수 있는 일을 하라. 광적인 정열없이 생산적이 되는 것은 어렵다.
2. 조심스럽게 고용하고 기꺼이 해고시킬 준비를 하라.
당신은 강팀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경영을 잘한다 해도 변변치 못한 팀은 변변치 못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저 웬만큼 일하는 사람을 그대로 두는 것은 흔히 있는 실수다. 훌륭한 경영자는 그를 교체하거나 그가 분명히 성공할 수 있는 다른 일을 맡긴다.
3. 생산적인 환경을 조성하라.
이것은 각 회사가 처한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접근법을 요구하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다. 모두에게 자신의 사무실을 주거나 아니면 모두를 열린 공간에 둠으로써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때로는 금전적인 인센티브를 도입할 수 있다. 대개는 여러 접근법의 조합이 요구된다.
4. 성공을 정의하라.
당신의 직원들에게 성공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그들의 업적을 측정할 수 있는지를 분명히 밝혀라. 목표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프로젝트의 작업 일정은 그 일을 직접 하는 사람에 의해서 정해져야 하는 것이다. 달성이 불가능한 목표는 조직을 좀먹는다.
5. 훌륭한 경영자가 되려면 사람을 좋아하고 대화에 능숙해야 한다.
이것은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진정으로 즐기지 않는다면 그들을 잘 다루는 것은 어렵다.
6. 당신의 직원들이 당신보다 더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발전시켜라.
당신의 기술을 그들에게 전수하라. 부하 직원이 일을 잘해 당신 자리를 빼앗을지 모른다고 걱정이 되면 사장에게 “교육을 잘시키는 대신 저에게 맡길 새로운 일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라. 많은 똑똑한 경영자들이 이 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미개척 분야에서 새로운 일을 해낸다.
7. 윤리를 확립하라.
직원들에게 그들의 일이 회사와 고객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도록 하라. 훌륭한 성과를 얻었을 때는 모두가 그것을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한다.
8. 프로젝트를 직접 수행하라.
직원들이 제일 싫어하는 상사는 일을 분배만 하고 정작 자신은 일하지 않는 사람이다.
9. 똑같은 결정을 두 번 내리지 말라.
한 번에 확고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시간과 생각을 잘 활용하고 다시 그 문제를 다루지 않도록 하라. 자신없게 지나간 문제를 끄집어냈다가 같은 결정을 다시 내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10. 직원들에게 누구를 기쁘게 할지를 알게 하라.
그것은 당신일 수도 있고 당신의 사장일 수도 있으며 혹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직원들이 ‘이 사람을 기쁘게 해줘야 하나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하나’ 라고 고민하게 되면 당신은 조직에서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콜린 파월의 생활 철학


그는 자메이카 이민 2세이다. 출생지도 뉴욕의 ‘할렘’이다. 험한 빈민가에서 성장한 그는 학업 성적도 겨우 평균 수준이었다.
그러나 군문(軍門)에 들어선 그는 월남전과 파나마 사태, 그리고 걸프전을 거치면서 4성 장군에 세 명의 미국 대통령 국가 안보 담당 보좌관, 합참의장, 사막의 폭풍 작전 주도자로, 1925년 아이젠하워 장군 이래 미국 국민이 대통령으로 뽑고 싶어하는 현재의 인물이 되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콜린 파월(Colin Powell). 그의 성공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는 생활 철학은 이렇다.


콜린 파월의 규칙
Colin Powell's Rules


1. 좋지 않은 일이 생기더라도 생각하는 것만큼 나쁘지는 않다. 아침이 되면 더 좋아질 것이다.(It ain't as bad as you think, It will look better in the morning.)
2. 화나는 일이 있으면 우선 화를 내라, 그런 다음 이겨내라.(Get mad, then get over it.)
3. 자신의 주장에 너무 가까이 자아를 밀착시켜 주장이 무너질 때 자아도 함께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Avoid having your ego so close to your position that when your position falls, your ego goes with it.)
4. 하면 된다.(It can be done!)
5. 선택은 신중히 하라. 선택한 것을 얻을 수도 있다.(Be careful what you choose. you may get it.)
6. 좋은 결정을 내리는데 불리한 사실들이 방해를 하지 않도록 하라.(Don't let adverse facts stand in the way of a good decision.)
7. 다른 사람의 선택을 대신해 줄 수 없듯이 다른 사람이 당신 대신 선택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You can't make someone else's choices. You shouldn't let someone else make yours.)
8. 사소한 일을 점검하라.(Check small things.)
9. 공적은 나누어라.(Share credit.)
10. 침착하라, 친절하라.(Remain calm, Be kind.)
11. 비전을 가져라, 스스로에게 요구하라.(Have a vision, Be dema-nding.)
12.두려움이나 반대자들과 너무 상의하지 마라.(Don't take counsel of your fears or naysayers.)
13.지속적인 낙천주의는 힘을 증가시킨다.(Perpetual optimism is a force multiplier.)




성공하기 위해 자신을 개선하라


ꋻ자신의 잘못된 성격이 있으면 바꾸라
ꋻ자신의 결점을 지적해 준 사람을 고마워하라
ꋻ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라
ꋻ자신의 작은 결점부터 고쳐 나가라
ꋻ자신에게 꿈과 비젼을 주는 책을 읽어라
ꋻ현재의 고난을 기뻐하라
ꋻ흐트러진 생활을 하지 말라
ꋻ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라
ꋻ자신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라
ꋻ인생의 큰 목표를 기록하여 그곳에 서명 날인하고 하루에 한    번씩 반복하여 읽으라
ꋻ확립된 큰 목표를 왜 달성할 필요가 있는지를 기록하라
ꋻ목표에 수정이 가능할 수 있도록 탄력성을 두라
ꋻ원칙에 따라 매진하라




성공의 비결은 열심히 일하는 것


전에 오산 미공군부대에 ‘제너랄 멜러이’라는 공군 사령관이 있었는데, 모든 장교들이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인물이었다. 젊은 장교들이 ‘당신의 성공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 사령관의 대답은 단 두 마디였다.
“Hard work” (열심히 일하라)
"Hard work” (열심히 일하라)




실패와 성공 사이


“바보와 천재 사이는 종이 한 장 차이”란 말도 있지만, 실패와 성공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성공은 끝나지 않고 실패는 최후가 아니다”라는 로버트 슐러가 쓴 책에서 보기로 하자
그러면 실패란 무엇인가?
ꋻ일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실격하는 것
ꋻ위험이 따르는 모험을 피하는 것
ꋻ자신이 없다고 해서 인간으로서의 숭고한 의무를 피하는 것
ꋻ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권력에 굴복하는 것
그래서 “만일 위의 항목 중에 자기에 해당되는 것이 있다고 해도 낙심해서는 안 된다. 실패는 종점이 아니다. 사고방식(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운이 열린다. 최고의 재산인 자기 자신을 얼마나 훌륭하게 관리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성공으로 가는 사고방식은 다음과 같다.
ꋻ새로운 꿈을 갖자
ꋻ성공을 향하여 노력하자
ꋻ적극적 사고로 ‘불가능’에 도전하자
그래서 결심 하나의 차이가 실패자와 성공자를 만드는 갈림길이라는 것이다. 모자라는 것은 보충하고 상처 입은 곳은 고치고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라고 한다.
단, 희생 없이 성공을 얻을 수는 없고, 이기적인 인간에게 성공은 오지 않는다는 점도 명심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성공은 속 사람을 깨끗이 할 때


도둑들이 남의 집에 물건을 훔치러 들어가면 제일 먼저 그 집의 신발이 잘 정돈되었나 안되었나를 살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신발이 잘 정돈된 집은 내부의 질서가 잘 잡힌 집이라 훔칠 것도 없고 잡힐 우려도 많지만 신발이 어지럽게 놓여 있는 집은 가정내 질서가 문란해서 물건 훔치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내부가 혼란하고 더러우면 마귀에게 속고 시험 들고 실패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 사람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답도록 단장해야 한다.
어떤 부모가 자녀들에게 좋은 아내를 구할 세 가지 지침을 이야기했다.
첫째, 신앙이 좋은 여성을 구하라.
둘째, 명랑한 여성을 구하라.
언제나 우울한 표정을 짓고 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안 된다.
셋째, 부지런한 여성을 아내로 삼아야 한다.
남편이 저녁에 돌아올 때까지도 아침의 잠자리를 그대로 놔두는 사람은 가난해진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외모도 단정하게 가꾸는 여성이라야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다. 가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내가 게을러서 집안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기 집 앞에 쓰레기를 갖다버려 자기 집이 지저분하게 되어도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속에 쌓여 있는 영적인 쓰레기인 온갖 불의, 탐욕, 시기, 쟁투, 거짓 등 더러운 것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될 것이다. 마음속에 가득 찬 쓰레기가 우리 인생을 우울하고 침울하고 부정적이며 파괴적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속 사람을 깨끗이 하며 아름답게 단장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종류의 승리


승리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태고 이래의 황제, 죽음을
신앙으로 극복했을 때에
방안에는 승리가 있다.
오래 대결한 진리가
조용히 자기의 절대자를 향하여,
자기의 신, 그 일인자를 향하여 나아갈 때에
아름다운 정신의 승리가 있다.
한 눈은 버림받은 하늘을 보고
한 눈은 마음의 가책을 보며,
유혹자의 뇌물을 서서히
물리쳤을 때의 승리,
저 환히 드러난 법정,
여호와의 면전에서
무죄 방면되는 자가 경험하는
한층 통렬한 승리.




어둠에서 빛을 찾은 소년


일본에 어느 소년이 있었다. 집안이 부유하여 어린 시절을 호강하며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눈이 침침해 오기 시작하였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의사가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한 그대로 두면 앞을 못 보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절망에 빠지게 되었고, 그의 성질이 급격히 난폭해졌다. 그의 집은 대대로 불교를 믿어 왔기 때문에 방안에는 불상들이 가득했다. 그는 불상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다. 그 바람에 불상들은 깨어지고 마침내는 강 아래로 던져졌다. 그의 부모는 그를 데리고 점쟁이를 찾아갔고, 커다란 굿판을 벌리기도 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결국 장님이 되었다. 그의 인생은 이제 어두운 인생이 되고 말았고, 아무런 소망도 없었다. 그는 비관하여 자살을 하고자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동생의 권유로 대만 기독교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맹인학교에 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소경이 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
그 이후 그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많은 책도 저술하였는데, 그 중에 ‘어둠으로 빛을 찾았다’라는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는 일본 ‘반사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의 강의 시간에는 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자리를 잡았고, 강의가 시작되면 강의실은 물을 뿌린 듯 조용했다. 얼마나 진지하게 가르치는지...














신사참배 투쟁은 주기철 목사‘ 삶의 축’


주기철목사(1897-1944)에 대한 논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이에 대한 그의 태도 곧 그의 일관된 저항과 투쟁이었다. 이 문제가 그의 목회적 삶의 행로를 결정했고, 오늘의 주기철상을 주형하였기 때문이다. 이점은 그의 생의 여정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소양이 직접적으로 신사참배 문제에 연루된 때를 경남노회가 신사참배를 거부키로 결의했던 1930년으로 본다면 그는 이때로부터 1944년 순교할 때까지 14년간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싸웠고 드디어는 자신의 신념과 확신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런 그의 생의 여정을 살펴볼 때 신사참배 문제는 싸움이었고, 그의 싸움의 기초는 ‘신앙적 정의’(Recht)였다. 따라서 그의 생애와 신앙의 자취, 그리고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적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신사참배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신사참배 반대와 투쟁은 그의 삶을 이끌어 간 축이었으므로 이 문제와 관련된 그의 삶의 여정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주기철의 순교는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주기철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와 저항에 대한 기존의 해석에 있어서 두 가지 문제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첫째는 그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약화 혹은 무의미화 시키는 경우이다. 이들은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니라 국민의례일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신사참배 강요가 일제의 주장대로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면 주목사의 투쟁과 순교는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며, 따라서 그의 순교는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둘째는 그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저항을 민족적 혹은 민족주의적 동기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일부의 목사들은 주기철의 신사참배반대와 저항을 민족적 혹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서 그의 삶의 축을 형성했던 신앙적 동기가 무시되거나 경시되고 있다. 그는 오산학교에서 수학한 분으로서 민족 혹은 민족주의에 무관심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의 행로를 결정했던 것은 신앙적 동기였지 결코 민족적 동기는 아니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는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고난과 투쟁의 길을 간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신사참배 반대 투쟁의 동기와 의미를 신앙고백적(confessional)관점, 곧 ‘신앙적 정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한국에서 신사참배가 ‘문제시’된 것은 1930년대 이후인데 한국교회는 근대 시민 의식의 계몽은 물론 민족 의식의 선구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고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또 교회라는 전국적 조직과 학교, 자선사업 등을 통해 국민적 신뢰를 얻고 있었고 선교사들을 통해 국제 여론 형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총독부는 기독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식민통치에 이용하든지, 아니면 기독교를 탄압하여 그 영향력을 약화시키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숙명적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신사참배는 이와 같은 맥락 가운데서 강요되었고 전쟁 정책 수행을 위한 소위 ‘국민정신 총동원’운동의 일환으로 권장되었다. 특히 일제는 신도를 국가적 종교로 전국민에게 참배토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에 보은하는 국민 도덕’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신사참배 강요의 과정 속에서 이를 강하게 반대하고 저항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주기철 목사였으므로 그의 구속은 필연적이었다.
그는 1931년 경남노회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안 결의의 주동 인물이었고 1934년에 행한 설교를 보면 벌써 이때 순교적 각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소양이 1935년 12월 17일부터 19일까지 평양신학교 사경회에서 행한 설교 “일사각오”는 일제의 거대한 조직적 폭력에 대항할 굳은 의지로 넘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가 일제와 대항한다는 것은 성난 사자 떼에게 덤벼는 한 마리의 양과 같은 허망한 시도처럼 보였지만 이제 그는 하나님의 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유로운 양심을 위하여 황량한 들판에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1936년 7월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한 것은 신사참배 강요의 중심지로 진입한 것을 의미한다. 이제 그는 한국 교회 마당 안으로 서서히 죄어 오는 어두움의 사슬을 척결해야 하는 보다 거룩한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산정현교회는 신사참배 반대의 정신적 중심지여야 했다.
주기철은 공개적으로 일제의 종교정책, 특히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했기 때문에 그의 체포와 투옥은 예정된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신사참배 행위는 명백한 우상 숭배였으므로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피검 시기와 피검 기간에 대해서는 상이한 기록이 없지 않으나 그는 이때로부터 4차례, 곧 1938년 2월에서 6월까지, 1938년 8월에서 1939년 2월까지, 1939년 9월에서 1940년 4월까지, 1940년 8월에서 1944년 4월 21일 순교 시까지 투옥되어 5년여 동안 형언할 수 없는 고난과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래도 주목사의 신앙적 의지를 꺽지 못했다. 그가 4번째  투옥되었을 때 평양노회는 주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했고, 신사참배 반대의 상징적 보루였던 산정현교회는 폐쇄당했다.
그가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신사참배는 하나님의 계명에 반하는 우상 숭배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신앙의 순수성과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산사참배 반대와 관련하여 3가지 점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 그의 신사참배 반대는 그의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적 신학 바탕 위에 근거했다는 점이다. 신학은 한 사람의 사회적 활동을 규정짓는 가치 체계인데 그의 신학은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으로 믿는 보수주의였다.
둘째, 그는 신사참배는 반대했으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반대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이기신이나 한상동과의 차이점이다. 주기철이 개인의 신념을 강조하였다면 한상동은 조직화된 강요에 대해서는 조직적인 반대로 대응하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주기철은 조직의 약점을 우려했으나 한상동은 조직의 장점을 이용하려 하였다. 주기철은 신사참배가 우상 숭배요 계명을 범하는 죄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반대 투쟁을 벌였으나, 이를 조직화하고 운동으로 전개하려 한 시도나 흔적은 발견할 수 없다. 그는 1938년 장로교총회의 신사참배 가결을 전후해서나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기원했던 시기에 싸웠으므로 직접적으로 반대운동을 주도하거나 가담할 수도 없었지만 그는 신사참배에 대한 반대는 개인의 신앙 양심과 확신에 따라야지 반대 운동을 조직화하고 이를 운동의 차원에서 전개하지는 않았다. 비록 주목사 자신의 친필 기록은 아닐지라도 약 30여편의 설교를 남겨주고 있는 그의 설교에서도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이를 권고한 사실이 없다. 셋째, 주기철은 신사참배를 반대함으로서 교회의 순결과 순수성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신사참배 반대자들의 별도의 치리회 조직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점에 있어서는 평안북도의 이기선이나 경상남도의 한상동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점은 한상동 목사가 일시 석방된 주목사를 만나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이들만의 새 노회 구성을 제안했으나 주목사는 이를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반대한 사실에 잘 나타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한상동과 주기철의 입장이 달랐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두 지도자간의 교회관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주목사님은 신사참배에 대한 투쟁과 이로 인한 희생의 대표적 인물이었고 신사참배 반대의 상징적 존재였다. 주목사는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의 폭풍 아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처음부터 단호한 거부 입장을 표명하여 신사참배의 범죄로부터 한국 교회를 지키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그는 뜨거운 가슴과 함께 냉철한 이성을 지닌 교육받은 목회자였고, 합리적인 사고와 심리적 평정을 지닌 양심적인 목사였다. 따라서 그는 신앙적 정의에 대한 확신으로 5년간의 긴 형고의 날을 인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하였지만 그의 투쟁은 결코 민족적 동기나 정치적 동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철두철미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었고, 그의 신사참배 반대의 싸움은 신앙적 동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 점은 그의 목회 생활 속에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정교 분리의 이념을 고수하였고, 정치적 독립이나 민족주의적 동기가 신앙보다 우선 시 될 수 없다는 분명한 인식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신사참배 반대와 투쟁을 민족운동 혹은 민족적 동기에서 보는 것은 주기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라고 볼 수 없다. 그는 복음을 위해 ‘사슬에 매인 사신’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받았고, ‘결박과 환난’앞에서도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일사각오의 신앙인이자 순교자였다.
-이상규 교수(고신대 역사신학)-




전쟁의 참상


1차 대전 때 죽은 사람의 수는 약 2천만 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2천만 명을 죽이기 위해서 든 비용은 4천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또한 2차 대전 때에는 1차 대전의 3배인 6천만명이 죽었으며, 이에 사용된 비용은 1조 4천억 달러가 허비되었다고 한다.




전쟁무기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인명 살상용 지뢰의 수는 매일 약 3만개에 달해 공식적으로 보고된 것보다 10 배 가량 더 많으며 이에 따라 제 3세계의 많은 지역이 점점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미국 인권 단체들이 폭로했다.
인권 단체인 ‘인권 파수꾼’은 이날 510쪽에 달하는 ‘지뢰:죽음의 유물’이라는 보고서에서 과거 미 국방부의 비밀 문서들과 몇몇 소식통을 통해 얻은 새로운 수치를 제시하면서 이같이 주장했다. 보고서는 현재 1억 개 이상의 지뢰가 폭발되지 않은 채 최소한 62개국에 묻혀 있으며 특히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앙골라, 캄보디아 등에 집중돼 있다고 전했다.
미국 적십자사는 지뢰로 인해 전 세계에서 매주 약 2백 명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고 추정했다.
보고서는 지뢰 생산국인 이란, 이라크, 덴마크, 멕시코 등 추가로 밝혀진 나라까지 합쳐 모두 48개국이며 그 중 중국, 이탈리아, 구 소련이 최대 수출국이라고 밝혔다. ‘인권 파수꾼’측은 “지뢰도 화학 무기와 같이 무차별, 비인간적인 무기로 인식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선교사의 분쟁


동아프리카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 간에 몇 가지 문제들로 심각한 분쟁이 발생했을 때였다. 그런 상황을 바라보던 현지의 교인들이 결국 선교사들을 찾아왔다. 그리고 아주 도전적인 어조로, “우리는 당신들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충격을 받은 선교사들이 “왜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현지 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말해 주려고 왔다고 하셨죠?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들을 구원해 주시지 않고 계시잖습니까? 당신들은 함께 사이좋게 살지 못하잖아요.” 






































































































































두려워 말라


리챠드 범브란트 목사는 1948년부터 14년 동안 루마니아의 공산정권에 의해 감옥 생활을 했다. 그 중에서 3년간은 전혀 빛이라곤 볼 수 없는 독방에서 지냈다. 그러나 범브란트 목사는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는데, 마침내 노르웨이 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어 미국에서 공산권 선교를 위해 크게 사역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 성경을 읽다가 발견한 사실이 있는데, ‘두려워 말라’는 구절이 모두 365개라는 것이다. 범브란트 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1년 365일 언제나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며 힘을 주신다고 깨달았던 것이다.




죽은 딸의 무덤 앞에서 찾은 행복


미국의 어느 젊은 부부가 딸아이를 낳고 화목하게 생활하다 갑자기 그 아이가 죽고 말았다. 장사 지내고 돌아온 부부는 슬픔에 젖고 또 서로 불화 하여 다투다가 이혼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부부는 서로 헤어졌지만 귀여운 딸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짙어져 가끔 묘지를 찾아가게 됐다.
어느 날 부인은 부인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각각 눈물에 젖은 모습으로 그 사랑하는 딸의 무덤 앞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부둥켜안고 울면서 우리 이렇게 살지 말고 다시 사랑으로 화목하여 귀여운 아기도 낳고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하고 다시 결합하여 밝은 생활을 찾았다고 한다.




천하를 통일할 사람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천하를 통일할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그 자의 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맹자-




풍랑속의 평안


태평양을 항해하던 여객선이 태풍을 만나 항로대로 운행치 못하고 표류하게 되었다. 선장과 기관사, 수백 명의 여객들이 파선의 공포와 죽음의 두려움에 쌓여 우왕좌왕하며 소란스러웠다. 그런데 선실 모퉁이에서 6살 난 남자아이가 두려움 없이 싱글벙글 웃으며 손장난을 하고 있었다. 기가 막힌 곁의 신사가 “얘 꼬마야 배가 파선할지 모르며 모두 겁에 질려 있는데 넌 왜 그리 즐거운 표정이냐?” 하고 물었다. 그때 그 소년은 “예, 저는 걱정 없어요. 이 배의 선장이 바로 우리 아버지인걸요.” 아버지가 운전하는 배 안에서는 어린 아들은 평안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이 운전하는 세상의 배 안에서 우리 성도들도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거친 바람과 풍랑이 있음에도...




기독교 인구가 늘어간다고 평화가 올까?


카톨릭 300년, 개신교 100년의 역사가 지난 오늘날 그리스도 복음의 씨앗은 실로 기적적이라 할만큼 성장되어 왔다. 우리 나라 전체 인구의 25%에 달하는 기독교인의 수적 증가는 앞으로 100년 후에는 전체 인구의 90%이상을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태를 기대할 만큼 놀라운 것이다. 그리나 기독교 인구가 25%에서 90%가 된다고 해서 우리 나가 자유와 평등과 정의가 실현되는 평화롭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까?




평화를 방해하는 세력


불트만 교수는 오늘의 세계 평화를 방해하고 인간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네 가지 악의 세력은
①가난과 착취
②폭력과 억압
③문화적, 인종적 차별
④공업 발전으로 인한 자연 파괴와 오염이라고 했다.










무엇을 심고 싶은가?


인생은 꿈이 아니고 연극(演劇)도 아니다. 엄숙한 사실이다. 당신이 씨를 뿌리면 굶주린 배를 채우는 사람이 있게 되고 당신이 나무를 심으면 그 나무를 베어 때는 사람이 있고 그 그늘에서 더위를 식히는 사람도 있게 된다.
당신이 산불을 놓으면 타 죽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 당신이 오이를 심으면 오이가 열리고 콩을 심으면 콩이 열린다.
청소년들이여, 당신은 무엇을 심고 싶은가.
-호적(胡適)-


인생에서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될수록 선을 행하고 무엇보다도 자유를 사랑하고, 설사 왕좌에 앉더라도 절대로 진리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
-베토벤-




심은대로


‘검은 진주’를 쓴 멕시코의 유명한 시인 아마도 네르보(1870-1919)는 누구보다 “아픔의 세월”을 보낸 예술가였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아름다운 언어로 승화시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인생을 회고하면서 이런 시를 썼다.
“내가 인생에서 단맛과 쓴맛을 뽑아 낸다면 그것은 내가 단맛과 쓴맛을 심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정직 지수는 얼마?


97년 1월 숭실대 사회봉사관 3층 회의실에서 진행된 기윤실 전국 대의원 총회에서는 그 동안 기윤실이 펼쳐 온 정직 운동의 가시적인 성과로서 ‘정직 지표’에 대한 연구가 보고됐다.
지난해의 한 설문 조사 결과 응답자의 62.1%가 ‘한국 사회에서 정직한 사람은 성공하기 힘들다’, 58.8%가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더 많다’는 견해에 동의함으로써 한국 사회에 만연된 부정직 지수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같은 조사의 미국, 일본, 한국 부패 비교 평가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깨끗한 사회를 1백 점, 부패한 사회를 0점으로 했을 때 일본이 평균 점수 60.04점, 미국이 58점이었던데 반해 한국은 43.85점에 그치고 있다.
이날 ‘정직지표’ 특강을 진행한 한기수 교수(연세대)는 “한국 사회 변화와 개혁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 요인은 바로 부정직”이라며 “개인, 집단, 사회 전체에서 구조화된 부정직으로 인해 상호 불신과 갈등이 만연돼 한국 사회의 효율성과 국가 경쟁력을 저하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야기된 농어촌의 피폐화, 전통 문화 및 윤리 가치의 붕괴, 물질주의와 소비 문화의 범람 등 사회적 위기 속에 자신에 대한 실존적 불안, 개발로 인해 얻어진 재화의 분배에 있어 자신의 몫을 담보해야겠다는 강박관념 등이 상당수의 국민들을 부정직한 삶으로 유혹하고 있다.”고 밝힌 한교수는 “복음 증거의 기본적인 수단(벧전 2:12)이며 성도의 의무(고후 13:7)인 정직, 한 개인의 사고, 언어, 행위 사이의 조화와 일관성을 의미하는 정직, 사회적인 도덕 질서의 확립과 유지를 위한 덕목으로서의 정직을 회복하고 스스로 부정직한 행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줄 아는 사회가 되기 위해선 바로 정직에 대한 지표 제시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한국 갤럽연구소가 전국의 20세 이상 남녀 1천 5백 6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직업인들에 대한 윤리 수준 평가’에 따르면 카톨릭 신부가 62.6%, 교수가 48.1%, 승려가 44.9%, 목사가 41.6% 등을 얻어 상위를 차지했으며 국회의원이 7.7%, 대기업 사장이 8.6%, 장관 및 고급 공무원이 12.1%를 얻어 하위를 차지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은 그나마 한국인들이 종교인의 정직 및 윤리성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한국 사회의 부패 지수 평가 결과도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종교인의 부패 지수는 1.1%로 정치권(75.4%), 공무원(7.4%), 법조계(3.3%), 경제계(2.7%), 교육계(2.5%)에 비해 상당히 낮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은 정직한 풍토가 점차 자리잡아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우리 사회가 5년 전보다 더 부패해졌느냐는 질문에 그렇다(25.1%)라는 대답이 아니다(50.1%)라는 대답보다 적고, 우리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배경(10.9%), 돈(18.2%), 학력(7.8%)보다 실력(57.7%)이라고 대답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한교수가 실시한 이번 정직지표 조사는 전국(제주도 제외) 20세 이상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으로 조사 결과의 오차 한계는 ±3.1%이며 신뢰 수준은 95%이다.




정직은 평생 행복의 비결


하루를 행복하려면 이발을 해라.
일주일 행복하고 싶거든 결혼을 해라.
한 달 동안 행복하려면 말을 사고,
핸 해를 행복하게 지내려면 새 집을 지어라.
그러나 평생을 행복하게 살려면 정직하여라.
(영국 속담)
거짓을 버려라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참회하라. 거짓은 협잡을 낳고, 협잡은 불신을 낳고, 이 불신에서 모든 불행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를 망친 최대 원인의 하나도 바로 이 거짓이다.
(안창호)














끝까지 성실해야


어느 훌륭한 건축가가 있었다. 그는 대기업의 중견 사원으로 성실하게 일하면서 많은 빌딩과 주택을 설계도하고 짓기도 했다.
그렇게 공을 세우던 그가 정년 퇴직을 할 때가 되자 그의 회사 사장이 마지막으로 부탁하였다.
“그 동안 우리 회사에서 수고도 많이 하고 공도 많이 세웠는데 마지막으로 견고하고 아름다운 주택을 하나만 지어 주길 바라네.”
사장의 부탁으로 그는 마지막 작품을 짓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떠나는 시기에 일을 해야 하다니... 편히 쉬다 퇴직하지는 못하고”하며 불평을 했다. 불평하며 설계하고 불평하며 집을 짓자니 자재도 질이 떨어지는 것을 들여오고 목수도 기술이 없는 사람을 이용하여 대충대충 지었다.
그렇게 집을 다 지은 후에 사장이 찾아왔다.
“훌륭하게 잘 지었으리라 믿네. 자네가 그토록 성실하게 일을 해 주었는데 정년 퇴직을 하게 되니 무척 섭섭하네. 그래서 이 집을 자네에게 선물하고 싶네. 자네가 이 집을 갖도록 하게.”




도산 안창호선생의 성실


근세 한국을 대표할 만한 인물 도산 안창호 선생. 그는 애국자요, 교육자요, 진실한 신앙인 이었다. 그가 미국에 건너가 청소부로 일하면서 공부할 때였다. 한 번은 어느 미국인의 저택에서 한 시간에 1불씩 받고 청소를 하게 되었는데,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구석까지 청소 도구를 만들어서 청소를 하였다.
그 집의 주인이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까 마치 자기 집을 청소하는 것 같이 성실히 하는 것을 보고 감동이 되어 일이 끝난 후, “도대체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요?” 하고 물었다. 그때 도산 안창호 선생은 한국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주인은 처음에 약속한 것보다 50센트씩 더하여 12불을 주었다고 한다.
그와 헤어 질 때 그 주인은 말하기를, “당신은 청소부가 아니라 참으로 신사입니다”라고 말했다.




무릎을 기운 바지


정원사를 구하는 구인 광고가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신문에 실렸다. “전에 직장에서 입었던 작업복 바지를 필히 지참해 가지고 오시오.”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 자신들의 더럽고 누덕누덕 기운 바지를 가지고 정원사를 구하는 집으로 갔다.
광고를 낸 사람은 노부인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온 바지를 열심히 검사를 하더니 어느 한 청년을 채용하겠노라고 말했다. 정원사로 채용이 된 사람은 젊은 청년이었는데 그는 노부인에게 물었다. “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낡은 바지를 검사하셨지요?”
그러나 노부인은 그 청년의 바지를 흔들어 보이면서 사람들 앞에서 대답했다. “당신의 바지는 무릎을 기웠더구만. 난 엉덩이 쪽을 기운 바지를 가지고 온 사람들을 계속 퇴짜를 놓았다우.”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일랜드의 역사가 William F. P. Napiel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소녀가 깨진 병 조각을 들고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발걸음을 멈춘 네 필이 자초지종을 물으니 ‘주인의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병을 깨뜨렸기 때문’이라며 울먹였다. 측은한 생각이 들어 네 필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니 아뿔사! 돈이 없었다.
“아가, 도와주고 싶은데 가진 것이 없어 미안하구나. 내일 이맘 때 나온다면 내가 지불해 주마” 약속을 한 후 집에 돌아와 보니 다음날은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그의 연구비를 지급하기 위해 후원자가 오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밤새워 전전긍긍하던 그는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연구비를 포기하고 길을 나섰다.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와 보니 뜻밖에 후원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늘 못 가서 미안하오. 하루를 기다리게 한 죄로 내일 두 배 지급하겠습니다.” 연락을 받은 네 필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절름발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조승


사기(史記)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평원군 조승은 조나라 왕의 아들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식객을 대접하기를 좋아했으므로, 식객이 된 사람이 몇 천 명이나 되었다. 조승은 조나라의 혜문왕과 효성왕 시절에 재상이 되었다. 그 동안 세 번이나 재상을 그만두었으나 세 번이나 복직하여 그 지위에 올랐다.
그가 사는 집에는 높은 누각이 있었는데 민가를 내려다 볼 수 있게 지어져 있었다. 그 민가 주변에 어떤 절름발이가 절룩거리며 물을 긷고 있었다. 이를 보고 누각 위에 있던 아름다운 여인이 크게 웃었다.
다음 날 옆집에 사는 절름발이가 조승의 집으로 와서 소원이 있다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각지의 인재들이 천 리 길을 멀다 않고 당신 집에 와서 식객이 되는 것은 당신이 인재를 귀하게 생각하고 첩을 천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저는 불행하게도 곱사병에 걸려 모습이 흉합니다. 그런데 당신의 애첩이 저를 보고 비웃었습니다. 부디 부탁드리오니 저를 보고 웃은 그 애첩의 목을 주셨으면 합니다.”
조승은 이에 대해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끝내 이 여자를 죽이지 않고 절름발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런데 일 년 남짓 지나자, 식객이 점점 빠져나가 반 수 정도밖에 안 남았다. 조승은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 그 이유를 빈객에게 물었다. 그러자 빈객이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절름발이를 비웃은 여자를 죽이지 않은 까닭을 손님들은 당신이 여자를 사랑하고 인재를 경시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유는 그 뿐입니다.”
그래서 조승은 절름발이를 비웃은 여자의 머리를 베고 스스로 절름발이 집으로 가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했다. 그렇게 하고 나니 전에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되돌아 왔다.




































악마들의 가장 값비싼 무기


유대인들의 옛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악마가 죽을 때가 되어 자기가 사용해 왔던 무기를 전시해 놓고 다른 악마들에게 무기를 팔게 되었다.
그 중에서 아주 낡은 무기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제일 고가의 가격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한 악마가 “도대체 이 낡고 오래 된 것에 왜 이런 고가를 붙였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이 노련한 악마 대답하기를, “너는 모른다 이 무기가 얼마나 유용한 것인가를..., 나는 이 무기로 수많은 불신자들을 지옥으로 가게 하였고 또 이 무기로 많은 크리스찬들을 쓰러뜨렸다”고 하였다. 그 무기 밑에는 ‘절망’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절망을 이기는 처방


노만 빈센트 피일 박사는 적극적인 사고로 유명한 분이다. 그가 갓 목사가 되었을 때였다. 그는 주일 저녁에 한 설교가 너무 박력이 없었다고 생각이 되어 스스로 낙심이 되어 있었다. 그는 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친구를 찾아가서 “여보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목사가 될 자질이 전혀 없는 것 같아.”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그 친구가 약을 조제하는 방에 친구를 앉힌 후 “자네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의 무기력감과 낙망, 그리고 나는 아무 쓸모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쓰레기 더미 같이 쌓아 두고 있는 것이네. 내가 사는 법을 들어보겠나? 나는 밤마다 하룻 동안에 쌓인 여러 가지 기분 나쁜 느낌, 무거운 마음을 내 마음 문 밖으로 내몰아 버리곤 해”




절망의 세 종류


임상 심리학자 브랜트 박사는 절망을 세 종류로 분석하였다.
하나는 ‘자기 중시형’으로 자기를 남달리 특별히 대우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사람들이 자주 절망한다. 이런 사람들은 우선 자기의 기대가 너무 확대되어 있다는 사실과 자기의 이기주의를 인정하지 않으면 절망 증세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둘째는 ‘냉소형’이다. 여기에 속하는 사람은 대개 어려서 혹은 청소년 시기에 많은 절망의 전력이 있어서 절망이 생활화(혹은 만성화)되어 있다. 자기를 방어(혹은 변명)만 하려 하고 불평 불만이 끊일 새 없다. 이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셋째는 ‘묵종형’이다. 여기에 속하는 사람은 눈치 작전과 아부로써 남의 관심을 자기에게 모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왜냐하면 자기가 기대하는 것처럼 남들이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기 때문이다.








소망 없는 사회의 비극


한 젊은이가 열려진 부잣집 현관으로 들이 닥쳤다. 마침 책을 읽던 그 집의 딸이 소리쳤다.
“당신 누구예요? 누군데 남의 집을 허락도 없이 들어오는 거예요?”
“허락도 없이 들어왔으니 보나마나 도둑이지. 빨리 112에 신고해서 도둑을 잡아가라고 해. 그런데 부탁할 것은 이 도둑이 백 만원을 내 놓으라고 협박했다고 해.”
경찰이 들이닥쳐 청년에게 수갑을 채웠다. 그는 평온한 얼굴로 형사들에게 체포돼 경찰서에 끌려갔다. 신원 조회를 해보니 전과가 5범이나 되었는데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왜 또 이런 짓을 했는가?”
“생각해 보세요, 제가 어디가서 취직을 합니까? 저는 감옥이 좋습니다. 그곳에는 밥도, 옷도, 누울 집도 있고, 또 친구들도 많지 않습니까?”
사회가 불안해질 때마다 범죄를 하고라도 교도소를 자원해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불행한 일이다.
             
ꋻ절망은 어리석은 사람의 결론이다.
-디스레일리-




비극의 원인


비극은 결국 사상과 이념의 빈곤에서 오는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염려 없을 줄로 알지만은 풍부한 물질 속에 빈곤한 思想은 언제나 더 큰 비극을 가져온다.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면


일제 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평양 산정현교회는 문을 닫았는데 그 이웃 교회는 신사참배를 하고 교회 문을 닫지 않았다. 이웃 교회는 교인들이 많이 모여서 기도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목사도 열심히 성경을 가르쳤다. 그때에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이웃 교회라도 나가야 될까 하고 망설였다. 그것을 알고 최권능 목사님이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면 젖은 나오지 않고 피만 나온다”고 말씀하였다. 진리를 떠난 교회에는 차라리 나가지 않는 것이 좋다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산정현 교인들은 가정에서 몇 사람씩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양보하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섞어서 교회를 인도하면 육신적으로는 평안하고 외부적으로는 부흥이 되며 큰 교회가 만들어질지 모르나 순금 촛대는 만들어지지 못한다(계 2:5). 순금 촛대가 되지 못하는 것은 인본주의요, 인본주의로 만들어진 것은 다 불에 타서 없어지고 만다. 교회에서 말씀의 역사 곧 영적 생명의 역사가 끊어지면 예배당 건물이 아무리 훌륭하고 교인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그것은 이미 죽은 교회가 된 것이다.




공룡의 소멸 원인


한때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번성했던 동물 공룡이 어떻게 소멸되었는가 하는 학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아사설도 있다. 즉 공룡이 굶어 죽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는 거대한 물질문명의 몸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지탱할 정신적 가치관이 너무 미약해서 죽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인이 아닐 것이다.




젊은이의 여행담


세 젊은이가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저녁 늦게 30층 짜리 호화 호텔에 도착했다. 그런데 호텔이 만원이어서 30층의 방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잘 됐다 싶어 방을 정한 뒤, 늦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짐을 맡기고 호텔 밖으로 나가 자정 무렵까지 즐긴 후 되돌아와 짐을 챙겨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다. 그런데 늦은 시각 고장난 엘리베이터를 고치기 위해 운행이 정지되어 있었다. 꼼짝없이 걸어서 올라가게 된 이들은 지루함과 힘듦을 덜기 위하여 이야기를 하며 올라가기로 했다. 1-10층까지는 즐거운 이야기를 한 사람이 하기로 하고, 11-20층까지는 무서운 이야기를, 나머지 21-30층까지는 슬픈 얘기를 하기로 했다. 1-10층까지는 여행담의 체험과 즐거움으로 희희낙낙 힘든 줄 모르고 올라갔다. 11-20층까지 무서운 얘기로 가슴 졸이며 다소는 힘든 계단을 올랐다. 이제 21층부터는 슬픈 이야기를 하며 오를 차례였다. 그러나 얘기를 맡은 청년은 침묵하며 걱정스럽게 계단을 오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빨리 얘기하라는 채촉에도 불구하고 계단을 다 오른 청년은 30층에 이르러서야 입을 열었다. “열쇠를 가지고 올라오지 않았어!”
이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우리는 서두른 나머지 정작 해야 할 일을 제쳐두고 목적전치에 빠져 있다. 




겨레 일깨운 민족시인 한용운


3.1 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지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변절하여 중추원 참의라는 관직까지 받았다.
육당이 길에서 만해를 만났다. 만해는 그를 외면하고 모른 체하며 지나갔다. 육당은 따라와 앞을 가로막고 인사를 했다.
“당신 누구시오?”
하고 육당을 물끄러며 바라보았다.
“나 육당 아닙니까?”
“육당이 누구든가?”
“최남선입니다. 잊으셨습니까?”
“내가 아는 최남선은 벌써 죽어 장사까지 지냈는걸.”
하고는 뒤로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정신이 죽고 나면 그 사람은 죽은 거나 다름이 없기에 한 말이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는 불교에 관한 소설을 쓸 때면 늘 만해를 찾아와 의견을 묻곤 했다.
그 춘원이 창씨 개명을 한 뒤에 만해의 집으로 찾아왔다. 춘원이 찾아온 것을 안 만해는 문을 열고 내다보며 그가 인사말도 꺼내기 전에 호통부터 쳤다.
“네 이놈! 당장 물러가라! 네놈의 꼴도 보기 싫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춘원은 날벼락 같은 호통 소리에 얼굴을 붉힌 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거듭나기 위한 죽음


한국 초대 교회사에 보면 능력 있고 유명한 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는 황해도 안악 산골에서 유명한 불량배요 깡패였다. 어느 하루도 술 안 마시는 날이 없었고, 사람들과 안 싸우는 날이 없고, 또 그에게 괴로움을 안 당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는 그 일대의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구속의 진리도 깨달았다. 그는 과거의 죄를 참회하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다. 하루는 “김익두는 O월 O일 O시에 죽어서 장사를 지냅니다”하고 부고장을 돌렸다. 그 때에 그 부고장을 받아 든 사람은 모두 기뻐하고 시원해 하면서 좋아했다. 이 청년 김익두는 과거의 김익두가 아니라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기 위해서 한 일이었다. 사실 그는 믿는 그 순간부터 완전히 과거 옛 사람은 벗어지고 새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세례 받는 날이 되어 그는 교회에 갔다 오는데, 동네 사람들은 김익두라는 사람이 정말 죽은 줄만 알고 있었는데 그가 죽기는커녕 성경책을 끼고 교회에 다녀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물어 보았다. “김익두씨 당신이 세상을 떠났다고 부고가 왔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묻게 될 때에 그는 “예, 옛날 불량배요 깡패였던 김익두는 오늘 장사 지내고 지금의 김익두는 옛날 김익두가 아닙니다”고 대답을 하고, 사실만이 아니라 실제로 변화 받아 중생의 체험을 하고 능력 있는 부흥사가 되었던 것이다.
세계적인 성자 어거스틴은 원래 방탕아였다. 그러던 그가 예수를 믿고 회개하여 변화받은 다음부터는 그 전에 짓던 죄를 생각하면서 오랜 세월을 두고 참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길을 걷다가 옛날에 같이 지내던 창녀를 만났다. 이 여인은 어거스틴을 보자 따라오면서 “여보세요! 당신이 어거스틴이 아닙니까? 왜 요사이는 눌러 오지 않습니까?” 하며 물을 때, 그는 뒤돌아 보지도 아니하고 “네가 전에 부르던 그 어거스틴은 이미 죽었다”고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
문호 ‘빅톨 위고’는 ‘죽음은 어둠에 싸여 있는 미로가 아니라 곧게 뻗어 있는 밝은 길이며, 죽음의 철문 뒤에는 희망의 황금 문이 열릴 것을 믿는다’라고 말했다.


무디 목사님은 자신이 임종을 당하여 슬퍼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내일 아침에 이 무디 목사가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정말로 내가 죽은 줄로 생각지 마시오.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좀더 높은 곳으로 옮겨가는 것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영국의 어떤 시인은 외동딸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고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겼으나, 다음과 같은 시를 쓰고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내 가정 식탁에는 한 식구 줄었으나
하늘나라에는 한 식구 늘었으리
땅 위에 있을 때보다
더욱 아름답게 더욱 거룩하게 변화되어 한 식구 늘었으리




비와 죽음


영화나 드라마. 소설 속에서 연인이 헤어 지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남자나 여자 어느 쪽이 먼저 헤어 지자고 했든 아니면 둘이 합의해서 만나지 않기로 했든지 간에 그 배경은 대개 공간적으로는 바닷가요, 시간적으로는 붉은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이나 밤인 경우가 많다. 감수성이 예민한 감독이나 PD들은 여기에다 ‘비’라는 매개체를 추가해 효과를 극대화시키기도 한다.
왠지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는 출근하기도 싫고, 하루종일 집안에서 뒹굴면서 음악을 듣거나 차 한잔 마시면서 분위기를 내고 싶어한다. 또 잊었던 연인이 불현듯 생각나 추억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이처럼 비가 오는 날씨는 맑은 날씨보다 기분이 침울해지고 일의 생산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실제 조사에서도 비가 오는 날에는 정서가 불안정해져서 우울증 환자의 수가 증가하고 사람의 실수도 잦아진다고 한다. 또 우울증의 극단적인 결과인 자살도 비가 오는 날에는 평상시보다 30% 가량이 증가한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미국에서 자살율이 가장 높은 도시인 시애틀의 경우를 보면 이것은 더 명확해진다. 이곳은 1년이면 6개월은 찌푸르고 흐린 날씨이거나 비가 내리는 곳이기 때문. 이렇게 본다면 비만큼 사람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기상 현상도 흔치 않은 셈이다.




죽음에 대한 문화적 차이


가까운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경우에 보이는 반응도 국민성에 따라 많이 다르다. 미국인과 일본인은 슬픔을 안으로 삭이는데 비해 한(恨)과 미련이 강한 우리는 슬픔을 밖으로 표출시키는 편이다. 괌 공항 사고에서는 이런 문화적 차이가 뉴스 거리가 되기도 했다.
미국인들이 腦死(뇌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죽음을 냉정하게 보는 그들의 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족이 뇌에 치명적 손상을 입어 소생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도 선뜻 인공 호흡기를 떼라고 하지 못한다. 바로 情(정)과 恨(한)의 문화일 것이다.
미국에서는 주치의를 포함한 의사 여러 명이 뇌사 여부를 판단한다. 일단 뇌사로 판정을 하면 장기 제공 의사를 확인한 후 인공 호흡기를 끄게 된다. 미국 의학계는 이런 결정을 환자 가족에게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가족에게 너무나 큰 심리적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결정을 환자 가족의 판단에 미룬다. 그러나 孝(효)전통이 강한 우리는 차마 부모의 인공 호흡기를 떼라고 하지 못한다. 병원이야 손해볼 일이 없겠지만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한 의료 서비스는 가족들에게는 물론이고 사회 전체로도 낭비라는 주장도 있다.
지난 87년 민주화 시위 도중 사망한 이한열군의 경우도 그런 논의가 있었다. 뇌 손상으로 이미 사망했는데 외부 압력 때문에 호흡기를 끼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 일부의 지적이었다. 그러자 주치의는 “부모가 호흡기를 떼어 달라고 해도 이에 응할 수 없는 것이 의사”라고 했다. 죽음을 보는 우리의 시각에도 변화가 올 것인가.




죽은 교회 장례식


미국 오클라호마의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마을에 새로 목사님이 부임하게 되었다. 이분은 도착하자마자 매우 의욕적으로 집집마다 심방을 다니며 오는 첫 주일에 자기의 설교를 들으러 오라고 요청했다. 그리고는 정성을 다해 설교를 준비했다.
주일이 되자 목사님은 흥분된 가운데 마을 사람들을 기다렸지만 막상 예배가 끝났을 때까지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불과 두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다.
다음날 목사님은 지방 신문의 광고란에 조그만 안내문을 실었다.
“교회가 죽었습니다. 따라서 담임 목사로서 장례식을 치르려 하오니 모두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을 사람들은 신문을 보고 모두 놀라고 의아해 하다가 주일이 되자 교회로 찾아왔다. 교회의 강대상 위에는 관이 있었고, 그 위에는 아름다운 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목사님은 의식에 따라 장례식을 거행하였고, 그는 마지막으로 떠나시는 분에게 조의를 표하라고 하였다. 조객들은 차례로 앞으로 나와 관을 들여다보고는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 관속에는 정확한 각도에 큰 거울이 들어 있어서 그 관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어 있었다. 각자가 본 죽은 교회는 바로 자신이었던 것이다.
오두막 생명 구조소


침몰 사고가 잦은 위험한 해안에 작은 오두막 생명 구조소가 있었다. 장비라고는 보트 한 대 뿐이었으나 구조소원들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조난자를 찾아 바다를 헤쳤다. 이 헌신적인 구조소에 의해 생명을 건진 사람들은 재산과 시간을 바쳐 구조 사업을 돕기 원했다. 새로운 보트가 구입되었고 새로운 사람들이 입소해서 오두막 생명 구조소는 일약 유명해졌다.
이제 사람들은 구조소의 오두막 건물이 너무 초라한 것을 못마땅히 여기게 되었다. 오두막을 대신하여 아주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 들어섰다. 이 웅장한 집은 일종의 사교장으로 사용되었고 그 안에서는 매일 즐거운 교제가 계속되었다. 생명의 구조를 위하여 바다로 나가는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어졌고, 대신 그 일을 위하여 몇몇 선원들을 고용하였다. 간혹 구조되어 이 집에 실려 오는 사람들은 불결하거나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많은 회원들은 클럽의 사교 활동에 방해가 되고 불쾌하기도 한 구조 사업을 중단해 버리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건물의 이름이 생명 구조소라 불려지고 있음을 감안하여 단지 그 작은 지역 안에서 구조 활동만 하도록 결의하였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가까운 곳에서는 또 다른 구조소가 세워졌고 새 구조소는 또 클럽으로 발전해 갔다. 그 바다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해안을 따라 서 있는 수많은 배타적 클럽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건물들이 즐비함에도 불구하고 바다에서는 조난 사고를 당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이는 데오드르 웨델(Theodore Wedel)이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험인 사회에 대한 무관심을 묘사한 비유이다. 그 위험은 교회가 외적 성공을 거둘 때 더욱 심각한 것임을 지적한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2)








타워링


문인이며 시인이 괴테는 건물을 보는 방법을
① 올바른 장소에 있는가
② 안전하게 지어졌는가
③ 성공적으로 관리하고 있는가의 세 가지로 말했다. 주님도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다 (마 7:24-27).
수년 전 미국 영화 타워링을 감상한 적이 있었다. 건축 설계사는 규격품 전선을 쓰도록 했는데 사장의 사위는 설계대로 하지 않고 값싼 전선을 사용하여 전기 시설을 하였다. 아주 큰 빌딩을 지어 놓고 맨 위층에서 기관의 내빈들과 많은 손님들을 모시고 개관식 칵테일 파티를 하고 있는데 전기 누전으로 그 빌딩은 삽시간에 모조리 타 버리고 만다.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비행기를 동원하여 사람을 실어 날라도 희생자는 엄청났다. 설계사도 부상을 당한 채 허탈감에 빠져 혼자 독백을 한다. “그대로 해야지, 그대로 해야지.”
우리들은 법대로, 믿음대로,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언제 어떤 충격을 우리가 받을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목사로서, 장로로서, 예수를 믿는 자로서 있을 자리에 서 있는가, 나의 양심에 거리끼지 않도록 살았는가 돌아보아야 한다. 이 타워링은 건물이 타는 것뿐 아니라 인생에게 많은 생각을 하도록 의미를 부여해 준 영화이다. 부실 건물의 결과는 실패로 나타나지만 정성들인 건물은 튼튼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 위에서 과연 어떤 시험에 충격을 받지 않고 성공적으로 살아왔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건축이 잘못되었으면 쓸어버리고 새롭게 건축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가 마지막 생을 마친 후 내 관 속에 흙이 들어갈 때 우리 주변 사람들이 어떤 얘기를 할까? 하나님께 공력이 인정 받도록 신앙 건축을 잘해야 한다. 




고양이의 이름


어떤 사람이 품종이 우수한 고양이 한 마리를 선물로 받았다. 한눈으로 봐도 예사 고양이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고양이의 이름을 ‘호랑이고양이’라고 지어 불렀다.
한 친구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호랑이는 백수의 왕이지. 그러나 용보다는 못하니 ‘용고양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래서 용고양이라고 불렀다. 얼마 후 집으로 찾아온 다른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용이 하늘로 오르려면 구름을 타야 하네. 그러니 ‘구름고양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네.”
“자네 말을 들으니 그도 그럴 듯하네.”
고양이의 이름은 구름고양이가 되었다. 그런데 또 다른 친구와 와서 말했다.
“구름은 하늘을 가리지만, 바람이 불면 흩어지네. 그러니 구름보다 바람을 따서 ‘바람고양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네.”
이리하여 바람고양이가 되었는데, 또 다른 친구가 말했다.
“바람이 아무리 세다고 해도 벽만 하겠는가? ‘벽고양이’란 이름이 어울리네.”
벽고양이로 불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친구가 말했다.
“벽은 진정 단단하지만 쥐가 구멍을 뚫으면 허물어지네. 그러니 쥐고양이라고 하게나.”
그래서 쥐고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이 이야기를 듣고 비웃으며 말했다.
“가소로운 일이로다. 쥐를 잡는 것이 고양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고양이에게 쥐의 이름을 붙인단 말인가. 고양이는 그저 고양이일 뿐이다. 무엇 때문에 엉뚱한 이름을 붙여 괴상망칙한 고앙이를 만든단 말인가?”
예로부터 동양인들은 이름에 집착했다. 이름을 지을 때 가급적 위엄 있고 웅장하게 지으려는 심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작자는 거기에서 힌트를 얻어 허명(虛名)을 구하는 인정을 풍자했다.
사실 이름은 거창한데 실속은 보잘것없는 경우가 많다. 별것도 아닌 것에 어마어마한 이름을 붙여 허풍을 떠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홍만종의 「순오지」에서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우화가 있다. 언서혼(鼴鼠婚), 즉 ‘두더지의 혼인’이라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두더쥐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과 혼인을 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가장 높고 존귀한 하늘에게 청혼을 했지만, 하늘은 해가 더 강하다고 했다. 해는 구름이 강하다고 했고, 구름은 바람이 강하다로 옮겨지다 결국에는 동류(同類)에게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이다.
이 우화의 객관적인 우의는 제 분수에 넘치는 엉뚱한 희망을 버리고 실제를 구하라는 것이다.
























































시간이 없어요


너무 바빠서 정말로 너무 바빠서 무릎 꿇어 기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세금 고지서의 마감 날짜에 맞추느라 바삐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예배가 끝나기도 전에 설교만 듣고 서둘러 일어나야 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는 다했다 싶어 그래도 마음만은 편했답니다.
하루가 다 가도록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줄 시간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할 시간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이 나를 비웃을까 봐 겁이 나기도 했었구요.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없어요.”


이것이 항상 나의 외침이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에게 베풀 시간은 더 더욱 없었습니다.
드디어 생명이 다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불리어 갔을 때 나는 고개를 떨구고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는 한 권의 책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록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생명록을 펼치시더니, “네 이름은 여기 없구나. 한때 너의 이름을 기입하려고 했었는데... 시간이 없었단다.”




가장 소중한 때, 지금


중국에 해군 제독이었던 ‘첸’이라는 사람이 캔톤이라는 곳에서 한 부흥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거기서 설교에 큰 감명을 받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나눠주는 결심 카드에 이름을 적어 내려고 했다. 그때 옆에 있던 한 보좌관이 “뭐가 그렇게 급하십니까? 나중에 천천히 적어 내시지요”하고 말했다. 그래도 첸 제독은 그 말을 뿌리치고 연필을 꺼내어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셔 드립니다”라고 쓴 결심 카드에 주소 성명을 쓰고 싸인을 했다. 예배가 끝나자 그 부흥회 장소에서 나오는데 한 군인이 밖에서 첸 제독을 기다리고 있다가 총을 쏘아서 첸 제독은 그 자리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첸 제독은 그 때밖에 기회가 없었다. 그는 옆에 있던 사람의 권고를 뿌리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의 말을 듣고 기회를 놓쳤더라면 그 사람은 영원히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회는 아무 때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자원은 기회라는 자원이다’
-빅토르 위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때


여객선이 부두에 닿아서 손님들이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아가씨가 발을 헛딛는 바람에 그만 바다에 풍덩 바지고 말았다. 아가씨는 물에서 첨벙이며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원들은 멀거니 바라보기만 할 뿐, 아가씨를 구조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때 나이가 많은 승객 중에 한 사람이 쳐다 만 보는 선원들을 야단치며 말했다. “야 이 사람들아 정신이 있어? 없어? 빨리 들어가서 건져내지 않고 뭘해?”
야단을 치는데도 선원들은 그저 잠자코만 있었다.
아가씨는 물 속으로 쑥 들어갔다가 떠오르고 다시 들어갔다가 떠오르곤 했다. 사람들은 방관하고만 있는 선원들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 때 아가씨가 세 번째로 떠오름과 동시에 선원 하나가 잽싸게 들어가더니 아가씨를 건져냈다. “물에 빠졌을 때에 바로 건져내지 않고 어째서 실컷 물을 먹은 후에야 건져내느냐”고 사람들이 나무라자 그 선원이 대답했다.
“처음에는 살겠다고 악을 쓰며 있는 힘을 다해 허우적거립니다. 이 때에는 그 힘이 장사와 같아서 누구도 못 당합니다. 급하다고 들어갔다가는 둘 다 죽습니다.”
그래서 힘이 거의 빠졌을 때에야 건져낸다는 노련한 선원의 말이었다.




하나님께 기회를 드린다면


미국 시카고의 빈민가에서 있었던 일이다. 목사와 이발사가 걷게 되었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 주변은 몹시 지저분하고 악취마저 풍기고 있었다.
회의론자인 이발사가 입을 열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고 그가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세상에 어찌 저렇게 처참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신단 말입니까?” 그때 히피 청년 하나가 지나가는 것을 본 목사는 이발사에게 물었다.
“저 친구를 보십시오. 저 친구는 수염도 깍지 않고 머리는 어찌나 긴지 어깨를 완전히 덮어 버렸군요. 어찌 당신같이 훌륭한 이발사가 젊은이들이 저렇게 이발도 하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도록 내버려두십니까?”
그러자 이발사는 이렇게 변명했다. “그야 저 친구가 이발해 달라고 이발소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죠. 만약에 그가 들어와서 요청하기만 한다면 아주 미남자로 만들어 줄 텐데 말입니다.”
이 말은 들은 목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나님도 당신과 마찬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와 하나님께 기회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으실 것입니다.”




일생동안 행복한 시간과 하나님을 위한 시간은?


스위스의 한 노인이 자기의 80년 생애를 시간으로 계산해 놓은  통계는 퍽 흥미롭다.


취침 26년, 노동 21년, 식사 6년, 남이 약속 안 지켜 기다린 시간 5년, 불안스럽게 혼자 낭비한 시간 5년, 세면 228일, 넥타이 착용 18일, 담뱃불 붙이는 데 12일, 아이들과 노는 데 26일,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불과 46시간이었다고 한다.
미국의 어느 연구소에서도 인생 70년을 분석하여 비슷한 통계를 내놨다. 잠자는 데 24년, 일하는 데 11년, 오락하는 데 8년, 기다리는 데 6년, 걷는 데 6년, 모양 내는 데 6년, 독서하는 데 3년, 대화하는 데 3년, 그리고 교회 가는 데 6개월 정도의 시간을 허비한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영원


이태리 ‘미란 대사원’ 문 위에 쓰여진 글들


좌측 문(장미로 조각된 문)위에
-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
우측 문(십자가로 조각된 문)위에
- “모든 고난도 잠깐이다”
가운데 큰 현관 문 위에는
- “다만 중요한 것은 영원이다”




순간의 중요성


승리하지 않으면 실패가 시험되는 때가 있다. 콜럼버스에게 그러한 가장 중요한 때가 있었다. 만약 그가 때를 놓쳤더라면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불행한 재난이 되었겠는가? 그는 장래의 운명이 걸려 있는 중요한 시기를 잃는 일이 없도록 시계를 응시하고 있었다. 교황의 명령서를 불태우려 하고 있는 루터도, 메어리 여왕의 앞에 있는 녹스도,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려 하는 순간에 있었던 것이다. 인생의 싸움, 국민의 싸움은 종종 순간에 있어서의 결단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과제


톨스토이는 「사랑과 일력」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시기가 가장 중요하며,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일이 가장 중요하냐고 물을 때 현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가장 중요한 시기는 현재뿐이다. 왜냐하면 현재에 있어서만 사람은 자기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인간이란 현재 이 순간 그대가 관계하고 있는 인간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가 다시 다른 것과 관계를 맺게 될지 어떨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일이란 그대가 현재 관계하고 있는 그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만 인간의 인생에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오늘을 중요시 여겨 오늘 해야 할 일을 성실히 하여야 한다.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기회


무디 선생이 전도 기행 중 한 청년을 만났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간청하자 이 청년은 말하기를 나는 아직도 많은 행운을 잡기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아직은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 청년이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하자 나는 결코 죽지 않고 많은 행운을 잡은 후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겠다고 말하였다. 얼마가 지난 후에 다시 병원에 찾아가 보니 그때 청년은 ‘이제는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병상 위에서 투병하다가 죽었다.




전도의 기회를 잃으면


여러 개의 방을 세를 주고 사시는 강 집사님이 계셨다. 나는 그 분에게 늘 말하기를
“집사님은 참 좋으시겠네요, 집에 세 들어 오는 사람들에게만 전도하셔도 한 속을 만들 수 있으니. 그러니까 집사님은 열심히 전도하셔서 집사님 집에 세 들어 사는 이들과 함께 한 속회를 만드세요.”
그러던 중에 그 집에 한 가구가 이사를 왔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강 집사님에게 빨리 전도를 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집사님은 말하기를
“그 사람은 절대 믿을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보면 믿고 안 믿을 사람을 다 알지요”
면서 전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계속 전도하라고 권했다. 그 집사님은 끝까지 전도하지 않았다. 그후 3개월쯤 지나서 세 들어 사는 그 집의 부인이 이웃 장로교회로 나가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집사님이 교인인 것을 알고 함께 교회를 가자고 권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3개월을 기다려도 교회에 함께 나가자고 권면하지 않으므로 오히려 섭섭한 마음이 들 정도가 되었다. 그러던 중에 이웃 교회 교인이 찾아와서 전도하게 되어 그를 따라 다른 교회로 나가게 된 것이다.


복음 증거의 시급성


우리 교구 내에 믿지 않는 한 젊은 여인이 쌍둥이를 낳고 산후가 좋지 못해 병들어 눕게 되었다. 여러 날이 지나도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병은 점점 심해져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정신적으로도 많은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중 성탄절 새벽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멀리서 들려 오는 새벽 찬송 소리를 들으면서 이상하게 마음에 평안을 느끼게 되었고 또 자기 집에 와서 찬송을 불러 주었으면 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마침 자기 집 옆에 사는 교인 집 앞에까지 와서 찬송을 부르게 되었다. 병든 그 여인은 교인들이 자기 집 앞에 와서도 찬송을 불러 주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교인들은 그 여인의 집을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날이 새도록 막연하게나마 기다리던 그 여인은 말할 수 없는 섭섭함을 느끼면서 새벽을 보내고 날이 밝았다. 아침 밥상을 받고 억지로 힘들게 식사를 하던 중 그 여인은 세상을 떠났다.














시간과 기회


세 명의 아들을 둔 자상한 아버지가 있었다. 이 아버지는 자식들의 어려움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모두 해결해 주는 정말 좋은 아버지였다. 연말이 되자 아버지가 세 아들을 불렀다.
“벌써 한 해가 다 갔구나. 그 동안 너희들은 어떻게 한 해를 보냈는지 말해 보아라.”
아버지의 이 이야기에, 첫째 아들이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대답했다.
“예, 저는 한 해 동안 사업이 내내 부진하여 많은 돈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여유 있게 말했다.
“얘야, 그런 일에 그렇게 우울해 할 필요는 없다. 네가 잃은 돈은 이 아비가 다 회복시켜 줄 테니 자신감을 잃지 마라!” 
둘째 아들이 대답했다.
“저는 연초에 직장 상사와 서로 오해하여 크게 다투었다가, 지금은 미움을 받아 한직으로 밀려나 힘든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얘야, 사람이 살다 보면 그렇게 일이 잘 안 풀릴 때도 있단다. 그것도 그리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네 직장 상사를 찾아가 너에 대한 오해를 풀어 달라고 얘기해 보겠다.”
끝으로 셋째가 대답했다.
“예, 저는 1년 동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연초부터 무언가를 해 보려고 생각은 많이 했지만, 아직도 시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 해가 다 지나고 보니 아무런 결실도 없어 그저 세월이 아까울 뿐입니다.”
셋째의 이 말에 아버지는 앞의 두 아들에게 보여 주었던 여유 있던 태도와는 달리 몹시 침통한 표정이 되더니 깊은 한숨까지 내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는 정말 한 해를 잘못 보냈구나!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값지고 소중한 시간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보냈으니 말이다. 이 아비도 그것만큼은 도무지 보상해 줄 방법이 없구나!”
첫째 아들이 잃어버린 것은 ‘돈’이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쉽게 회복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둘째 아들이 잃어버린 것은 ‘명예’였다. 그것도 조금 힘들기는 해도 회복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셋째가 잃어버린 ‘시간’은 아버지가 도무지 회복시켜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또 그 무엇을 가지고도, 회복시켜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자상한 이 아버지의 안타까운 한숨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시간은 절대적이고 또 필연적인 것이어서 한 번 사용하면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도저히 회복이 되지 않는다. 이 소중한 시간을 황금이나 명예보다도, 열 배, 백 배 더 소중히 사용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네가 네 인생을 사랑한다면 네 시간을 사랑하여라. 왜냐하면 네 인생은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벤자민 프랭클린-




변장자의 호랑이 사냥


변장자(卞莊子)라는 힘이 센 사나이가 여관에 투숙하고 있었다. 그런데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급히 칼을 들고 나섰다. 이때 여관의 심부름하는 소년이 그를 가로막았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왜?”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황소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황소를 잡은 두 호랑이가 서로 맛있는 부위를 먹으려고 다툴 것입니다. 다투게 되면 반드시 싸울 것이요, 싸우면 힘이 센 놈이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힘 센 놈이 이기기는 했지만, 상당한 상처를 입고 지쳐 있을 것입니다. 그때 그 허덕이는 놈을 찔러 죽이면 일거(一擧)에 두 마리의 호랑이를 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듣고 있던 변장자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기다리기로 했다. 조금 있으니 과연 두 마리의 호랑이가 싸움을 하여 한 놈은 상처를 입고, 다른 놈은 죽었다.  변장자는 상처를 입고 허덕거리는 호랑이를 아주 쉽게 찔러 죽였다. 그리하여 한 번에 두 마리의 호랑이를 잡은 장사라고 평판이 자자해졌다.
알묘조장


성미가 괄괄하고 매우 급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날마다 논에 나가 자기 논의 모가 빨리 자라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자라나는 속도가 너무 느린 것 같았다.
궁리 끝에 그는 논으로 들어가서 모를 하나씩 쑥쑥 잡아당겨 주었다.
“아! 땀흘려 노력한 보람이 있구나. 하루해만에 벼가 많이 자랐어.”
그는 스스로 만족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말했다.
“오늘은 병이 날 지경이다. 나는 온종일 모가 빨리 자라게 해주느라고 녹초가 되도록 일했다.”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한 아들이 논으로 뛰어가 살펴보니, 모가 뽑힌 채 말라죽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때와 순서가 있다. 이것을 무시하고 억지로 이루려고 하면 도리어 해를 당하게 된다는 우화이다.
이 우화는 마치 작금의 우리 사회를 신랄하게 꼬집고 있는 듯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름도 희한한 ‘빨리빨리 병’에 걸려 있다. 매사에 결과를 빨리 보려고 하기 때문에 정신없이 서두른다. 밥을 먹어도 남보다 빨리 먹어야 하고, 토목, 건축 등의 작업을 하더라도 후다닥 해치워야 직성이 풀린다. 또 교육이나 일상 생활에 있어서도 속도 경쟁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어제까지 멀쩡하던 고층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다리가 꺼지는 등의 사고가 도처에서 일어나서 엄청난 인명과 막대한 재산 피해를 안겨 주고 있다.
민주화도 너무 서두르다 보니 일그러진 민주주의가 고착되었고, 수시로 바뀌는 교육정책으로 말미암아 교육은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하고 있다.
결과 제일주의가 서두름을 낳고, 서두름은 반드시라고 할만큼 졸속을 낳는다. 그 졸속에서 생겨난 부작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이미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달팽이의 꿈


중앙에 사는 달팽이가 하루는 이런 생각을 했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뜻 있는 일을 하고 죽자.”
달팽이는 명산대천을 두루 구경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동쪽에 있는 태산에 가려고 하니 3천 년이 걸릴 거리였다. 남쪽에 있는 장강(長江)과 한수(漢水)에 가려고 했는데, 역시 3천 년이 걸릴 거리였다.
“나는 얼마나 살 수 있을까?”
달팽이는 자신의 생명을 헤아려 보았다. 3천 년에 비하면 조석간에 불과했다.
“아아, 뜻을 이루기에는 생명이 너무 짧다. 생명의 짧음이 한스럽다!”
달팽이는 비분을 이기지 못하고 한탄만 하다가 쑥대 위에서 말라죽었다. 그것을 보고 개미와 땅강아지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분수를 모르며 우유부단한 사람을 풍자한 우화이다. 달팽이가 큰 뜻을 품은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았기에 조롱거리가 된 것이다.












































가시나무새


일생에 단 한번 우는 전설의 새가 있다. 이 새의 울음소리는 이 세상의 어떤 소리보다도 아름답다. 보금자리인 둥지를 떠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이 새는 가시나무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가 가장 길고 날카로운 가시를 찾아 스스로 자기의 몸을 찔리게 한다. 죽어가는 새는 고통을 초월하면서 이윽고 종달새나 나이팅게일조차도 흉내낼 수 없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노래를 부른다. 자신의 목숨을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와 맞바꾸는 것이다. 이 때 온세상은 침묵 속에서 귀를 기울이고 하늘의 신까지도 미소를 짓는다. 가장 위대한 고통을 치러야만 가장 아름다운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새가 보여 주고 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십자가의 가시를 향해 평생을 걸었던 나사렛의 청년. 아, 그는 가시나무새가 되어 십자가 위에서 가장 큰 고통을 치르면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일곱 마디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창조주를 흡족히 미소짓게 했던 그 가시나무새의 노래는 우리 영혼의 가지 끝에서 오늘도 영원과 생명의 맑고 투명한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


역사가 필립 쉐프(P. Sohaff)는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의 최후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처형자들은 그를 채찍으로 몹시 때렸으며 마침내 불태웠다. 신체의 극히 내부에 있는 내장까지 환하게 드러났다. 처형자들은 미처 타지 못했던 신체를 창끝에 걸어 놓고 야수의 밥으로 던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화형에 처하기 직전에
‘네가 만약 로마의 시저를 숭배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지금까지의 이 박해를 그만두고 특별히 대우하겠다’
라는 제안 앞에 폴리캅은 이렇게 대답했다.
“86년간 나를 해침이 없이 나에게 성실하셨던 나의 왕, 나의 주님, 그분을 지금 이 나에게 부인할 이유가 어디 있겠소? 나는 그를 사랑하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가장 극심한 박해와 고난을 당한 서머나 교회를 향해 성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ꋻ사람이 고통을 경험하지 않고는 창조에 관하여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로망 롤랑-
대속의 고난


옛날 희랍에 로그리양 왕이 있었는데, 그 나라에서 간음죄를 범한 사람은 두 눈을 빼는 법을 공포했다.
이 법령을 공포한 지 하루만에 자기 아들 황태자가 간음죄를 지어서 두 눈을 뽑히게 되었다. 형리가 칼을 들고 황태자의 한 쪽 눈을 도려내고 한 쪽 눈을 마저 빼내려고 할 때, 왕은 형의 집행을 중지시키고 그 칼을 달라고 하여 자기의 눈 하나를 빼 버렸다. 왕으로서의 공의를 살리기 위하여 비록 자기 아들이지만 그 눈을 빼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기의 눈을 기쁘게 빼 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부자의 사랑이 유지되고 군민(君民)의 공의가 확립되어 왕과 아버지의 사명을 완수하게 되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인류의 죄를 위하여 대속하는 공의를 나타내고 그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인류를 사랑하는 극진한 사랑의 십자가로 표현한 것이다. 주님의 대속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내며 우리는 이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죄의 대속을 받아 구원받는다.




강재구 소령


갈보리산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서 있는데 양쪽에 선 강도들의 십자가는 마땅히 받아야 할 죄 값을 자기들이 받는 십자가요, 가운데 서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전혀 자신은 죄가 없는 온전히 남을 위해 받는 고난의 십자가, 대속의 십자가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행위는 남을 위해서 대신 받는 고난이다. 강재구 소령의 죽음이 고귀하다고 찬양하는 이유는 그가 부하의 실수로 수류탄이 터져  수십 명이 죽게 되었을 때 자기의 배로 수류탄을 깔고 엎드려 대신 죽음으로 많은 부하들을 살렸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보통 사람들의 회생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그러나 강재구 소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을 실천하여 한 알의 밀알이 썩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진리를 몸소 실천하였다.




헤레나


주후 4세기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친 헤레나(Helena)는 예수님을 잘 믿는 분이었다. 예수님을 믿고 그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자 그녀는 자기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현장을 찾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그녀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났다. 현지에 도착한 헤레나는 그 옛날의 이교도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는 그 흔적을 없애 버리려고 갖은 애를 다 쓴 사실을 보고 놀랐다. 그리스도가 못 박히신 갈보리산은 돌과 흙무덤으로 덮어놓았고, 그 한쪽 모퉁이에는 미의 여신 비너스를 숭배하는 신당을 세워 놓고 있었다. 헤레나는 수행원들에게 돌과 흙으로 덮어놓은 그곳을 깊이 파라고 명령했다.
그들이 삽과 곡괭이로 돌과 흙을 헤치고 파 들어가자 거기에 십자가 셋이 묻혀 있었다. 그 세 개의 십자가는 똑같은 크기에 똑같은 모양이어서 조금도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히브리어와 희랍어와 라틴어로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This is Jesus, the King of the Jews)”고 쓰여진 죄패가 따로 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헤레나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셋 중의 한 십자가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였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였고 어느 것이 강도들이 졌던 십자가인지를 도무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함께 동석했던 예루살렘의 주교가 동네에 내려가서 난치병 들린 중환자를 데리고 와서 그 십자가를 만지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십자가를 만지는데 능력이 나타나서 그 난치병이 완치가 되었다. 헤레나는 세 십자가를 구분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 십자가는 로마의 국보가 되었다. 어머니인 헤레나에게 감화를 받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72-337) 황제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그는 A.D. 313년에 기독교 신앙 자유령을 내렸고, 기독교를 국교로 삼게 되었다.




고난의 신비


우리 시대 가장 예수님처럼 살다간 사람이 있다면, 바로 마틴 루터 킹 목사일 것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짓밟히는 형제들의 인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자신의 일은 전혀 돌보지 아니했다. 그는 인권 운동을 하다가 30회 이상 끌려갔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전혀 무서워 아니했다. 불의와 항거하여 싸우는 킹 목사의 모습은 오히려 거룩해 보였다. 그의 피부 색깔은 검었지만 그의 눈과 정신은 항상 빛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늘 힘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심어 주었다. 비록 그는 고난 속에 살다가 1968년 4월 4일 암살 당했지만 지금 그는 하나님 품에 안겨 있을 것이다.
킹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무엇인가를 터득한 사람이었다. 고난 속에서 죽어야 비로소 새 생명이 탄생한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간 이 시대 작은 그리스도이며 위대한 목사이다.




4월의 고난


T. S. 엘리어트는 “불모의 땅에서 라일락을 꽃피게 하고, 추억과 정욕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어나게 하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억울하고 슬픈 달이다. 4월 4일(1968)은 미국의 흑인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을 당했고, 4월 9일(1945)는 독일의 본 회퍼 목사가 히틀러에 의해 처형을 당했고, 4월 15일(1865)은 흑인 해방자 링컨 대통령이 저격을 당했고, 4월 21일(1944)은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주기철 목사가 옥중에서 순교를 당한 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억울함을 풀 수 없는 것은 1960년 4월 19일 186명의 목숨을 바쳐 쟁취한 자유 민주주의가 그 이듬해 군사 독재의 쇠망치에 무참히 부숴졌기 때문이다.




흙덩이를 뚫고


관현악의 명 지휘자 토스카니니(A.Toscanini)는 지독한 근시였다. 그는 오케스트라의 첼로 연주자로서 근시 때문에 악보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는 연주를 할 때마다 실수할 것 같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어서, 이런 그가 고민 끝에 취한 방법은 악보를 외우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그가 속해 있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갑자기 무대에 서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 유일하게 악보를 외고 있던 그가 지휘자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 음악회를 계기로 토스카니니는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자기의 불리한 조건을 딛고 승리한 것이다. 인생의 긴 여정에서 우리는 많은 어려움에 부딪힌다. 어쩌면 토스카니니처럼 장애를 느끼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입학 시험에서 낙오자가 되거나 교통사고를 당하는 등 크고 작은 돌뿌리들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세상에 잠복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이런 고난들은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씨앗이 무거운 흙덩이를 뚫고 자라나야 하듯 예비된 축복과 삶의 승리를 위해 우리도 자신을 연단시키는 계기로 고난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없나니“(고전 10:13)라는 말씀에서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만큼의 어려움을 주시고 그 대처 방안까지 예비하시기 때문이다.
고난에 대한 금언, 격언, 속담


(1)“고난은 축복을 갖다 주는 지름길이다.”
-M. 루터-
(2)“하나님 앞에 진실 되게 살려고 하는 이는 고통을 보석으로 삼는다.”
-하천풍언-
(3)“고난은 성공의 축대를 쌓는 것과 같다.”
-M.NL. 영안-
(4)“고생보다 더 중요한 교육은 없다.”
-지스레지-
(5)“고난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없다.”
-도미트아스-
(6)“고난이 크면 클수록 그 영광도 크다.”  
-M. T. 시세로-
(7)“초년 고생은 말년 낙의 근본이라. 네가 자라면 오복이 구비하고 남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되리라.”
-이광수-
(8)“대부분의 생의 고난은 우리 자신이 햇빛에 서 있기 때문에 생긴다.”
-에머슨-
(9)“고난은 하나님의 심부름이다. 어려움이 우리에게 찾아 왔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로써 하나님의 신임의 증거라고 간주해야 한다.”
-비쳐(H.W. Beecher)-
(10)“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고 할 때, 반드시 먼저 그 심지(心志)를 괴롭히고 그 근골(筋骨)을 고생시키고,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 육체를 궁핍케 하고, 그의 하는 일을 다 어지럽게끔 한다.”
-맹자- 




고통은 수와 같다


어거스틴은 고통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고통이란 수를 놓은 천을 보는 것 같다. 천의 뒷면을 보면 많은 색깔의 실이 무질서하게 얽혀 있어 보기에 나쁘다. 고통은 다만 괴로움이나 부조리로 보는 것은 뒷면만 보기 때문이다. 천의 앞면을 본다면 혼란하던 실들이 형태와 색채가 아름답게 조형되어 있다.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혼잡을 뚫고 아름다운 미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영문학에 있어서 잊혀질 수 없는 나다니엘 호돈은 어려서부터 절름발이 장애자로서 밖에 나가 놀 수도 없는 몸이었지만 그는 문학의 큰 탑을 세웠다.
독일의 시인, 하이네는 척추병으로 인해 생애의 마지막 8년 동안은 누워서만 살았다. 그러나 고통의 침상으로부터 영원한 시간에 메아리치는 위대한 시가 흘러나온 것이다.
영문학의 대가 찰스 램은 심한 말더듬이어서 대학 입학도 거절당한 사람이었고, 자기의 누이가 정신병에 걸렸으나 그 누이를 평생 간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 문호가 되는 업적을 남겼다.
사람들이 살면서 어려운 일을 겪게 되면 대체로 실망을 하거나 좌절을 하게 된다. 그러나 힘든 상황을 극복했을 때 반대로 유리한 조건이 될 수도 있고 더욱 귀한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토마스 아켐피스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의 위로를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려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과 함께 잔치에 참여코자 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금식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과 함께 떡을 나누기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고난의 잔을 마시기 원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의 기적을 보고 경탄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십자가의 수치를 감당코자 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한다. 그러나 자기에게 어려움이 닥치지 않을 때에만 주님을 사랑한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한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축복을 받을 때에만 찬양한다. 자기의 위로와 만족을 구하니 아니하고 오로지 주님만을 위하여 주님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한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항상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비록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축복을 받지 못할지라도 변함없이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할 것이다. 이처럼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주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을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


차가 좋고 나쁜 것은 길이 험할 때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며, 크리스천들의 참다운 신앙은 환난 날에 나타난다. 찬송가 ‘눈을 들어 하늘 보라’의 작사자 석진영 여사는 그녀가 미국에서 발행하는 ‘복음의 전령’에 이르기를 “사이비 기독자는 평시에는 그럴듯하게 보입니다만 한 번 폭풍우가 불어닥치거나 모든 것이 제 뜻대로 되지 않고 고난과 불행이 엄습하기만 하면 덧없이 흔들립니다. 찬송을 부르던 입에서 독 먹은 분노와 불평과 저주가 튀어나오고 천국을 꿈꾸던 마음이 낙담하여 어둠에 삼켜져서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다고 슬퍼하고 원망합니다마는 이미 당신의 외아들인 그리스도를 희생시키는 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변하겠습니까? 변한 것은 오히려 신앙의 지조를 잃은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쓰고 있다.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시 18:6, 롬 8:35).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는 오히려 환난을 즐거워하며(롬 5:3) 어떠한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승리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점자를 발명한 윌리암 문


윌리암 문은 소경 대학생이다. 그는 “주여, 소경 되어 감사합니다. 나로 소경 된 재능을 투자하여 주께서 오실 때 당신의 소유물의 높은 이자를 붙여서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세요.”라고 기도하였다. 결국 그는 소경을 위한 점자를 만들어 오백여 방언으로 번역하여 존경을 받았다.
불구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선교에 쓰임을 받느냐, 또한 이를 위하여 기도하느냐가 문제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 쉽다. 그러나 현재의 어려움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라고 부르는 타종 소리다.
낙심 말고 기도하고 새벽마다 기도하고 썩을 몸, 불 타 버릴 세상, 물질 때문에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여 보라, 죽음 대신 삶을, 지옥 대신 천국을, 가난 대신 자족을, 불안과 고통 대신 평안과 기쁨을, 업신여김 대신 칭찬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신다.




창조적 삶은 고난과 시련도 이긴다
불구의 몸이라 해도 강한 정신력으로 그 핸디캡을 극복해 내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미국의 역사를 훑어보아도 창조적인 인물들은 대부분 극심한 핸디캡을 극복하여 자기의 길을 닦아 성공한 인물들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13세 때 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의 조수가 되었으며, 제 7대 미국 대통령 앤드류 잭슨은 14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틈나는 대로 법률 서적을 독학으로 배워 대통령까지 올랐으며, 루즈벨트 대통령도 소아마비 환자였다.




불행을 한 번도 당해보지 않은 집의 솥을 빌려오라


어느 곳에 행복한 가정이 있었다. 두 부부와 어린 아들과 셋이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아들과 같이 사냥을 나갔다. 아들은 산밑에 두고, 짐승을 쫓아서 점점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날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어느덧 날이 저물어 갔다. 그래서 아버지는 처음 아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만 어떤 사나운 짐승이 사랑하는 아들을 물어 죽였다. 아버지는 죽은 아들을 안고 한없이 울다가 하는 수 없이 아들의 시체를 거적에 둘둘 말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에게 급해 말했다.
“오늘 내가 깊은 산에 가서 특별한 짐승을 잡아왔는데 이것은 아주 유별난 것이어서, 지금까지 불행한 일을 한 번도 당해 보지 않은 가정의 솥을 빌려다가 요리를 해야 하니까 지금 즉시 그런 집의 솥을 빌려오도록 하시오.”
그래서 아내는 마을로 나갔다. 그러나 온 동리를 다녀도 지금까지 불행이나, 슬픔을 당해 보지 않은 가정은 없었다. 끝내는 솥을 빌리지 못하고 돌아와서 남편에게 말했다.
“온 마을을 헤매였지만 그런 집은 없어서 솥을 빌리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왔소.”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가 불행한 일을 한 두 번씩은 다 겪어 본 모양이구려, 그럼 이제는 우리가 불행한 일을 당할 차례요.”
하면서 죽은 아들의 시체를 풀어놓았다.




고난이 없다면


폭풍이 오기 전에는 모든 동물이 신경질을 낸다. 고기들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말들은 사나워진다. 사람도 우울하면 저기압이다라는 표현이 있지만 폭풍을 일으키는 낮은 기압은 가스와 냄새를 배출하기 때문에 동물들이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폭풍이 없는 지역이 있다면 낙원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바람이 없는 것은 공기가 없다는 뜻이므로, 만일 그런 별이 우주에 있다면 낙원이 아니라 생명체가 없는 지옥일 것이다.
바람은 배를 뒤엎는 무서운 힘이 될 수도 있지만 배를 전진시키는 원동력도 된다. 어려운 사건과 고통은 바람과 같다.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파멸의 원인도 될 수 있고 도약의 에너지로 될 수도 있다. 고통은 악은 아니다. 벨이 전화를 발명한 것은 본래의 연구 목적에서 빗나간 것이다. 청력을 거의 잃은 아내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보청기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전화를 발명케 했다.




미즈느겐조 이야기


일본의 불구 시인 미즈느겐조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질로 몹시 앓다가 심한 고열로 뇌성 소아마비가 되어 전신이 마비되고 말았다. 단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는 것 이외에는 말도 못하고 팔다리도 전혀 쓰지 못하는 불구자가 되었다. 그러한 절망적인 그에게 하나님은 두 사람의 은인을 보내 주셨다. 한 사람은 마이오 목사로서 그에게 복음을 심어 주었다. 다른 한 사람은 그 어머니 우메지 여사로서 그가 믿음을 간직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성경을 읽을 때도 누가 넘겨주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 다행히 녹음기를 들을 수 있어서 신구약 성경을 녹음으로 여러 차례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특별히 고린도후서 12장에 있는 바울이 3층천에 올라갔다 온 이야기와 그러한 신앙의 깊은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일생을 괴롭힌 가시가 있었다는 바울의 간증을 들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특별히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니라” 한 그의 고백을 읽으면서 놀라운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 은혜를 받고 믿음 안에서 살 때 그렇게 모든 것이 감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시를 써서 그의 감사를 표현했다. 그가 쓴 170편의 시를 일본의 여류작가 미우라 아야꼬가 묶어서 75년도에 출판했다. 그랬더니, 베스트 셀러가 되어서 한 해 동안에 6판을 찍어내게 되었다.
그 한편을 소개한다.


당신의 가르침을 듣지도 않으면서
소원만을 몹시 구하는 나를 위하여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죽음을 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감사하여라.
소원을 들어 주셨는데도
감사하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
거기다 쓸모 없는 나를 위하여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내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감사하여라.
돌아가는 길을 알면서도 자기의 지혜만 믿어서
가는 길이 막혀 버린 나를 위하여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죽음에 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감사하여라.
친구들까지 다 떠나가 버려
삶의 희망과 살아가는 모든 것을 잃어 버린
나를 위하여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죽음에 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감사하여라.




태어나기 위한 몸부림


찰스 코우만 여사는 나비를 연구하는 학자이다. 그는 많은 연구 중에서도 애벌레가 나방이 되는 과정만을 1년간이나 연구했다. 큰 애벌레가 작은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나오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코우만 여사는 애벌레의 몸부림이 안타까워서 가위로 애벌레 집을 잘라 주고는 흐뭇해했다.
그러나 화려한 날개짓을 기대했지만 나방은 코우만의 행위로 신세를 망쳤다. 날지도 못하고 기어다니는 처량한 신세가 된 것이다. 오히려 작은 구멍을 뚫고 나오려는 몸부림이 날개에 힘을 주고 화려한 날개를 펴게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애벌레가 나방이 되고자 하는 몸부림은 거듭나기 위한 신앙인의 몸부림과 같은 것이다.




대속의 보혈


스코틀랜드의 성자로 존경을 받는 성 카일스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는 본래 아덴의 한 왕자로 태어났지만 예수를 믿은 다음에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깊은 산에 들어가서 수도사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키웠던 암사슴 하나만은 자기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데리고 갔다.
그는 산에서 다닐 때도 이 암사슴과 같이 다니고 또한 암사슴의 젖을 짜서 먹으면서 기도 생활을 했다. 그때 마침 프랑스의 어떤 왕이 사냥을 하기 위해서 깊은 산 속에 들어갔는데 한 골짜기에 가보니 먼 곳 바위 아래 사슴 한 마리가 보였다. 그는 그 사슴을 향하여 활을 겨누어 쏘았다. 그때 성 카일스가 조용히 묵상 기도를 하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급히 눈을 떠보니 화살이 자기가 사랑하는 암사슴을 향하여 쏜살같이 오고 있었다. 이 성자는 이 화살을 막기 위해서 재빨리 자기 손을 내밀었다. 그 화살은 성자의 손을 뚫고 나가면서 사슴을 맞혔다. 사슴이 맞긴 맞았지만 손을 뚫고 지나간 살이라 힘이 없어서 사슴은 별로 다치지 않았다.
프랑스 왕은 이런 것도 모르고 사슴이 죽었겠거니 하고 죽은 사슴을 얻기 위해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런데 와 보니 난데없이 어떤 성자가 손을 들고 있는데 그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프랑스 왕은 갑자기 주님의 피 흘리신 손을 보게 되었으며 그 순간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려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주님의 손과 발과 옆구리의 피는 세상의 모든 인생들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흘리신 보혈이다.




나를 대신하여 마신 십자가의 쓴 잔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서 독이 든 잔을 대신 마셔 주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당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 대신 누가 품속에 방울뱀을 품은 사람이 있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다.
당신은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 대신 누가 인생의 전성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은 사람이 있는가?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
언젠가 우리는 영광 가운데서 예수를 보게 될텐데 그때에 예수님의 손과 발의 못 자국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갈보리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셨던 옛날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며 예수님에 대한 모든 의미를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왜 우리를 구원했으며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알았을 때 우리는 정말 ‘나를 위해서였구나!’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세세 영원토록 우리는 주님께 드리는 감사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을 체험함


다음은 박경천 목사의 간증이다.
어린 조카 중에 하나가 척추병에 걸려서 허리가 굽어지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결국 세브란스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 상한 척추뼈 세 마디를 빼고 대신 뼈를 넣어 주어야 하는데 특히 어린 아이기 때문에 산 뼈를 넣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 뼈를 빼 주기로 하고 환자와 함께 수술실에 들어갔다. 내 허리 옆에 있는 부채뼈 3cm를 잘라 주어서 수술 받게 한 일이 있다. 그 애는 지금 커서 출가하여 잘 살고 있다. 나는 그 뼈를 빼어 주면서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어서 지금은 감사하게 생각한다. 3cm의 뼈를 절단하여 준 자리는 만질 수도 없이 아픈 것은 물론이지만 숨을 크게 쉴 수도 없으리만큼 절단한 뼈 부위의 울림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고통이 있기에 병신으로 죽게 될 아이가 정상인이 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서 참고 견딜 수 있었다. 또한 성한 사람의 뼈를 잘라서 오래 고생하는 것을 보고 이해 못하는 친척들도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고통을 참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조금이라도 따를 수 있게 된 것을 보람으로 생각하며 지금도 그 흔적을 만져 본다.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


성 프란체스코는 십자가의 수난을 체험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주 예수님!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내려 주옵소서.
첫째는 저로 하여금 영혼과 육체의 괴로움을 겪어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을 맛보게 허락하시고,
둘째는 당신이 우리 죄인들을 위해 그처럼 참으실 수 있었던 그 타는 듯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하옵소서”아멘.




실명도 하나님의 도구


「어둠을 비추는 한 쌍의 촛불」이라는 책을 쓴 강영우씨는 14세까지 정상시력을 가졌었다. 외상에 의한 망막박리로 시력을 잃어가는 4,5년 동안 약시로 사물을 볼 수 있었으나 여러 번의 수술 실패로 완전히 실명하게 되었다. 수술대 위에서 생명을 거두어 가지 않은 하나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으나 역경 속에서도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미국으로 장애인 최초로 정규 유학을 갔으며 3년 8개월만에 한국 최초의 맹인 박사 학위(피츠버그대학)를 받고 결국 “나의 실명은 하나님의 도구로서 맹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으로 사용되어졌다”고 고백하였다.
영어로 「빛은 내 가슴에」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것이 의외로 반응이 커서 위싱턴 포스트, 뉴욕 크리스찬헤럴드, 가이드 포스트 등의 잡지에 소개되었다. 장애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수 있었으며, 정상인들에게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제거할 수 있었다.




삶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


어떤 비행사가 비행기를 몰고 가는데 엔진에서 찍찍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엔진속에 생쥐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비행사는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만약 이 생쥐가 전선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치명적인 고장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이 비행사는 무엇을 했을까? 그가 순간적으로 생각한 것은 얼른 비행기를 높은 곳으로 몰고 가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쥐 한 마리를 잡기 위해 핸들을 놓거나 안전벨트를 풀어헤치지 말아야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는 산소 마스크를 쓴 채 가능한 높이 높이 비행기를 몰고 갔다. 얼마 후에 찍찍거리는 소리는 멈추었고, 지상에 내려와 살펴보니 엔진 속에 쥐 한 마리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렇다. 우리 생활 속에 삐걱거리는 게 있으면 이 조종사처럼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 삶의 위기가 있으면 높이 올라가야 한다. 사업에 문제가 있을 때 기도의 빨간 신호등이 켜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높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며 그에게 간구하는 것이다. 삶의 위기를 극복하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시련과 고난을 이기는 방법(창조정신)  
    
시련과 고난을 헤쳐 나 가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남보다 한 발 앞선 창조 정신이다. 그것을 잘 발휘하면 돈도 벌 수 있고 세도할 수 있는 길도 열린다.
새로운 아이디어 개발이나 창조에 적합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①기회를 포착하고 추구한다.
②불가능으로 여겨지는 일을 가능하도록 노력한다.
③낡은 것을 탈피하여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④미래를 동경하고 비전을 그린다.
⑤직관, 과학적 사고, 정신력의 조화를 이룬다.
⑥주어진 일을 즐거움으로 소화시킨다
⑦창조적 노력 속에 기쁨이 있다.












걸음 수에 맞는 상급


어느 원로가 사막에서 살았는데, 그의 독방에서 12마일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 가야 물을 얻을 수 있었다. 가서 물을 길어 와야 했던 어느 날은 거기까지 갈 힘이 없어서 중얼거리기를 “왜 이런 피곤을 스스로 겪고 있담? 물이 있는 근처로 가서 살아야겠군”했다. 그런데 그 말을 한 후 고개를 돌려보니 누군가가 따라오며 그의 걸음 수를 헤아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대는 누구요?”하고 묻자, 상대방은 대답하기를 “나는 주님의 천사요. 그대의 걸음 수를 헤아려 보고 거기에 맞는 상급을 주라고 보냄을 받았다오”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원로는 원기 백배하도록 위로를 받아 물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자기의 독방을 지었다 한다.




인내의 비결


중국의 장공예씨는 한 집에 4대가 동거했다. 어떤 날 친구가 찾아와서 4대 동거하는 비결을 물었다. 그때 장 공예는 친구의 손목을 잡고 자기의 광으로 들어가서 항아리 뚜껑을 열어 보이며, ‘여기에 비결이 있노라’고 하였다. 항아리 속에는 참을 인(忍)자 종이 조각이 가득 쌓여 있었다. 어느 가정인들 불평 불만이 없으리요 마는 우리 가정에는 마음이 상할 때마다 참을 인(忍)자를 써서 항아리에 넣고 참았다는 것이다. 그 옆에는 글씨를 쓰는 붓과 벼루가 있었다.




끝까지 실천하는 것이 문제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인내를 지닌 사람은 그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였다.
백 세를 산 사람이 장수의 비결을 묻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절대로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나는 절대로 과식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기자가 “당신처럼 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왜 오래 살지 못한 겁니까?”라고 말하자 지혜로운 노인이 대답하기를 “그 이유는 그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지속하지 않았기 때문이요”라고 하였다. 인내란 중요한 것이다.
미국의 30대(代)대통령 칼빈 쿨릿지는 “무엇으로 인내를 대신할 수 있는가? 많은 재능 있는 사람이 성공하지 못한다.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용기 있는 사람도 실패하는 것을 보는데 이도 인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시편 37편 7절에는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라고 하셨다. 성경은 인내하지 못하여 실패한 많은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다.


ꋻ기다린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속담- 




줄 하나와 파가니니


이태리가 낳은 세계적인 바이얼리니스트 니꼴로 파가니니(Niccolo Paganini)가 어느 날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주 도중 바이얼린 줄 하나가 끊어졌다. 숨을 죽이고 있던 청중들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파가니니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남은 세 줄로 연주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한 줄이 또 끊어졌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두 줄로 연주를 계속 했다.
그때 세 번째 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그는 잠시 연주를 멈추더니 한 손으로 바이얼린을 높히 치켜들며 “줄 하나와 파가니니”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다시 노련한 솜씨로 연주를 했다.
그의 연주가 끝나자 관중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처칠의 명 강의, ‘포기하지 마시오’


영국의 위대한 정치가인 윈스턴 처칠은 국립묘지에 묻히지 않고 옛날 자신이 다니던 교회 옆의 묘지에 묻혔다. 1943년 전시 내각을 수립하고 독일 비행기들이 하루에 1천여 대씩 런던을 폭격할 때, 그는 하루에 18시간씩 근무를 하면서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전쟁 중에 BBC방송을 통해서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땀과 눈물  밖에 바칠 것이 없다”고 전 영국 국민에게 호소했다. 그 방송을 들은 영국 국민과 영국 군인들은 3일 밖에 먹을 수 없는 적은 양식을 가지고, 보름이나 견디면서 싸워 마침내 전쟁을 승리고 이끌었던 것이다.
처칠 경은 고등학교 시절에는 영문학을 공부하려고 했으나 낙제를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2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써서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했다. 그가 은퇴한 후 그의 모교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교장 선생은 학생들에게 “여러분의 대 선배이신 처칠 경이 말씀하실 때 한 마디도 빼놓지 말고 모조리 받아 쓰라”고 했다. 처칠 경은 지팡이를 짚고 강단에 서서 두꺼운 안경 너머로 학생들을 한참 동안 응시하더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는 뚜벅뚜벅 걸어 내려갔다. “여러분 결코 포기하시 마시오! 결코! 결코!”
  


콜룸부스의 용기와 인내
남극 탐험대에 캡틴 스카트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영하 50-60도의 추위에서 남극에 같이 갔던 동료 탐험가들이 낙심하자, “전진하자! 용기를 가지고 전진하자!”고 하며 용기를 불어넣어, 드디어 성공적인 탐험으로 공적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콜룸부스가 신대륙을 항해할 때 선원들은 모두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들은 지구가 둥글고, 신대륙이 어떻고 하는 콜룸부스의 말을 믿지 못하고, 실망하고 낙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항해하면서 용기있게 끝까지 밀고 나간 콜룸부스는 마침내 미 대륙을 발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용기를 가지고 인내하는 사람이다. 인내는 우리를 소망의 정상에 도달하도록 도와준다.




나이팅게일의 선택과 인내


간호원 폴로렌스 나이팅케일은 원래 이태리 사람이다. 그는 부유한 가정, 문화적인 교육을 받은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는 그 딸에게 좋은 가정을 갖도록 행복한 결혼을 권유했지만, 나이팅케일은 거부하였다.
그가 31세 때 허무감에 젖어 일기를 썼는데 ‘살아갈 의욕이 없다’라고 했다. 그는 그 공허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는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그는 간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부모의 만류도 뿌리치고 이 젊은 여인은 전쟁터를 찾아갔다. 피 흘리며 쓰러지는 전상자들을 붕대로 싸매 주고 닦아주고 사랑하면서 3년 동안 그들을 도왔다. 외로운 군인들은 나이팅게일만 지나가면 마치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처럼 인사를 하고 경배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희생을 거쳐서 그는 현대 간호학의 기초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후 병원마다 간호원이 없어서는 안되도록 제도화되었다. 나이팅게일은 세상을 떠날 때에 그의 시체를 영국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모시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자기에겐 그럴 자격이 없으니 가족 묘지에 묻어 달라고 했다.
나이팅게일은 31세 때 더 나아갈 수 없는 절망과 좌절 속에서 죽음을 생각하였지만 새로운 가능성과 전진의 의미를 찾고야 말았던 것이다. 위대한 삶을 사는 사람은 그 값을 지불해야 한다. 버릴 것은 버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어떤 상황에서도 참고 견디어 나갈 때에 결국은 승리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석수장이의 인내


석수장이가 대리석을 깰 때에는 한 번 내리치고 두 번 내리치고, 열 번, 스무 번, 쉰 번, 목표를 정하고 내리친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 친다. 아흔 번, 백 번, 백 한 번을 칠 때에 목적한 대로 대리석이 쪼개진다. 백 번까지 깨지지 않았지만, 치는 동안 힘이 저축되어 있다가 마지막 한 번을 내리칠 때에 깨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목표를 가지고 낙심하지 않고 전진하면 어느 땐가는 그 목표를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끝까지 신랑을 기다린 처녀


아버지는 장로, 어머니는 권사인 미스터 김은, OO공대에 1등으로 입학한 수재, 믿음 좋고 인물도 또한 잘났으니 교회에서나 학교에서나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미스 리 역시 신앙 좋고 용모도 아름다와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두 사람은 친구로 사귀며 같은 대학-대학원까지 공부하며 지냈다. 두 사람은 말로는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배우자로 점을 찍어 놓았다.
그런데 어느 날 미스터 김이 보이지 않았다. 미스 리는 이제나  저제나 무슨 소식이 있을까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식도 없이 5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미스 리는 고등학교 교사로 교직에 있었고, 여기저기에서 혼처가 생겼지만 미스터 김을 한 번 만나기 전에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모든 혼담을 거절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외국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것은 꿈에도 그리던 미스터 김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설레이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하고 편지를 뜯어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미스 리, 그 동안 소식 없이 무심했던 것을 용서하오. 나는 지난 5년 동안 미국 하버드 대학(과학 연구소)에서 공부를 다 마치고 지난주에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소. 앞으로 워싱턴에 있는 첨단 과학 연구소에서 근무하게 되었소. O월O일 김포공항에 도착하게 되는데,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았으면 나와 결혼해 줄 수 없겠소...”
미스 리는 편지를 읽고 또 읽고... 얼굴은 기쁨과 감격의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미스 리는 미스터 김을 끝까지 기다린 보람이 헛되지 않아 두 사람은 아름다운 한 쌍의 부부로서 결실을 맺게 되었다.




누구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직장에서 계속 10년 동안 근무한 사람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라.
20년 동안 계속해서 한 가지 일을 하는 사람 앞에서는 허리를 구부려라.
그리고 30년 동안 한 가지 일에 종사한 사람 앞에서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릎을 꿇어라.










집사님이 당한 시험


모 집사님은 가정 형편이 극빈하여 식생활도 곤란하고 월세방에서 살던 때에 교회 건축 헌금으로 일천 만원을 작정했다(1984년). 그 해 여름 기도중 먼저 하나님께 작정한 것을 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억지로 헌금을 마련하여서 제단에 바치고자 했을 때 사업에 실패하고, 이 일 저 일을 계획하고 있던 남편이 그 돈을 몇 달만 돌려달라고 하였다. 건축 헌금은 그후에 드리자고 하는 것을 듣지 않고 그대로 바치려고 하니 남편은 교회까지 따라오면서 “융통을 안 해 주면 당신과 이혼하겠다”고 까지 하는 것을 오직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먼저 이행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제단에 바쳤다. 이러한 믿음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대로 지나치지 않으셨다. 그후에 그녀와 남편의 사업은 번창하여 지금은 큰 회사를 서너개 운영하는 부자가 되었고 그녀를 통해서 교회 건축, 교회 버스 구입, 해외 선교, 교회 주택 마련 등 이루 헤일 수 없이 많은 일들을 하나님께서 하도록 허락하시었고 지금도 그렇게 쓰이고 있다. 하나님이 그녀에게 주신 음성은 “내가 네 일을 해 줄 테니 너는 내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어려운 시험을 이겨내면 반드시 보다 큰 축복을 주신다는 산 증거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찬송가 470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을 작사한 스패휘드는 시카고 유수한 사업가요 변호사요 저명한 법리학 교수였다. 그러나 그는 마치 욥과 같이 시카고 대 화재 시에 그의 소유 재산 전부를 불태워 버렸고, 여행 중에 있던 아내와 네 아이가 해상 사고를 당하여 부인만 기적적으로 살고 네 자녀(메기, 타니타, 애니, 베씨)는 숨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나에게 어떤 희생이 올 때에도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 기쁘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죽음 가운데서 살아난 아내를 데리고 영국으로 가는 도중 해상 사고를 당해 네 자녀가 죽은 그 바다 위를 지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음속에 일어나는 갈등과 싸웠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어찌하여 나의 하나님은 나의 사랑하는 네 아이를 데려가셨을까? 하나님은 나를 저버리신 것인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괴로움을 참으며 그 날 밤 하나님께 울부짖을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한 응답을 주셨다. 그것은 시험과 고통 중에도 평안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스패휘드는 평안한 마음으로 그 날 밤에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시로 노래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 영혼이 편하다’라는 이 찬송가이다.














지진 대피법


“지진과 할아버지의 노여움은 닮은데가 있다”고 일본인들은 말한다. 요령 좋게 피하기만 하면 곧 지나가 버린다는 뜻이다. 땅이 갈라지고 산사태가 나는 진도 6의 烈震(열진) 이하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건물이 무너지는 진도 7의 激震(격진)일 경우에는 다르다.
♠ 지진이 나면 대나무 밭으로 피신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한다. 대나무 뿌리는 너무나 단단하게 얽혀 있어 웬만한 지진에도 땅이 갈라지지 않는다. 대나무가 쓰러져도 크게 다칠 위험이 적고 또 헤집고 빠져 나오기가 쉽다. 산업화 이전 농촌에서는 어린이들에게 그렇게 지진 대피법을 가르쳤다.
♠ 사무실이나 집안에 있을 때 지진이 나면 먼저 출입문부터 열어야 한다. 지진이 나면 전기 합선과 가스 누출 등으로 화재가 뒤따르기 쉽다. 그럴 경우 문틀이 비틀어져 문이 열리지 않으면 탈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책상이나 식탁 밑으로 몸을 피해 건물이 무너져도 직접 충격을 받지 않도록 한다.
♠ 일본에서는 벽돌집을 못 짓게 되어 있다. 지진으로 건물이 붕괴될 경우 벽돌은 총알처럼 튀어나와 피해를 더하기 때문이다. 목조 건물은 화재가 뒤따라도 뛰어내리면 살수 있는 2층으로 제한하고 있다. 그리고 콘크리트 건물은 耐震(내진)을 위해 반드시 철근을 써야 한다.
♠ 우리 나라에서도 지진이 잦아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한 번도 어려움을 경험하지 않아서 그런지 지진에 둔감하다 건물은 물론 전선과 가스 시설 등도 지진을 감안해서 설계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격진은 예고하고 오지 않는다. 갑작스런 지진 피해도 선-후진국간에 큰 차이가 있다.




부끄럼 없는 삶을 삽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다 산 다음 역사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가지 질문을 할 것이다.
첫째, 용감하게 살았는가?
둘째, 성실하게 살았는가?
셋째, 지혜롭게 살았는가?
넷째, 헌신적으로 사랑하며 살았는가?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하여 “네, 나는 그렇게 살았습니다”고 대답할 수 있도록 부끄럼없는 삶을 살아갑시다.
-J. F. 케네디 대통령-




죽음의 준비
 
어떤 사람이 웨슬리에게 물었다.
“당신이 만일 내일 밤 12시에 죽는다면 오늘 무슨 준비를 하겠습니까?”
웨슬리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글쎄요, 무슨 준비가 필요할까요? 별로 다른 일을 할 것이 없을 듯 싶은데, 평상시와 같이 하는 것뿐이지요 뭐.”
그리고 이어서 말하였다.
“그렇게 지내다가 12시에 죽는다면 그 이튿날 새벽에는 천국에서 눈을 뜨게 되겠지요.”




깨어 있는 자가 특채됨


어느 해운 회사에서 무선사를 모집하는 중에 필답 고사 합격자들이 면접하기 위하여 시간 전부터 20여명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는데도 접견실에서는 아무도 부르질 않고 스피커로 감미로운 음악 소리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기하던 청년 중 한 명이 아무 소리 없이 일어나더니 접견실로 무턱대고 들어갔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20여명 다른 대기자들이 의아해 하며 귀추를 주목하고 있을 때, 좀 전에 들어갔던 청년이 신나는 모습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구동성으로 그 연유를 물은즉 “나도 여러분들처럼 초조해 기다리며 책을 읽고 있노라니까 음악 소리와 함께 무선 신호(모리스부호)로 ‘이 소리를 듣는 사람은 즉시 접견실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듣고 뛰어 들어가 합격하고 나온다”고 하였다. 무수한 세상의 소리가 있으되 언제나 하나님과 주파수를 맞추고 사는 자가 하늘 위로와 축복과 영광의 자리를 참여하게 된다.




펜실바니아주 댐 사고
펜실바니아주의 강물을 막고 있는 댐을 조사한 기술진들은 그 댐이 안전치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다음 해에도 조사반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여러 차례 경고했으나 주민들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위험 아니냐’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마지막 경고가 있은 지 보름도 못되는 1889년 5월 31일에 그 큰 댐은 결국 장마 비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 댐의 붕괴로 존스타운 주민 2,200명이 순식간에 몰사한 미국 역사상 대 홍수 사건이 발생했다. 여러 번 경고를 받고도 태연하던 자들이 맞게 된 결과였다.


































































































































현대인의 정신적 범죄


현대인이 저지르기 쉬운 세 가지의 정신적 범죄가 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알면서도 가르치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할 수 있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다.
-케리 여사-




죄의식의 결핍


어떤 엑스레이(X-Ray)기사가 약간의 소화 불량증이 있어 위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평소에 건강했으므로 곧 잊어 버리고 근무했다. 이튿날 여전히 출근하여 전날 찍은 엑스레이(X-Ray)필름 여러 장을 정리하는 중 어떤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고 “지독한 암이로군”하고 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 사진이 바로 자신의 것인 줄 알지 못 하였다고 한다. 실로 현대인의 최대 위기는 죄의식의 결핍에 있다고 하겠다. 자신의 마음속에 암 같은 치명적인 병을 키우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어리석은 세대이다.




악한 흐름


철학자 볼테르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하였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개와 비슷하다. 먼데서 개 한 마리가 짖기 시작하면 동네에 있는 모든 개가 따라서 짖기 때문이다.” 이래서 우리 사회의 전염병적인 악한 사상과 악한 흐름은 우리 사이에서 확산되어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ꋻ20세기의 가장 큰 비극은 인간들의 부정적 사고(negativism)이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




죄의 결과


농장의 많은 동물들이 즐거운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린 망아지가 어미 망아지에게 불평을 토했다.
“엄마, 저기 돼지를 좀 보세요. 우리는 일한 만큼만 먹는데 돼지는 그렇지 않아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먹기만 하잖아요. 이건 정말로 불공평한 처사예요. 우리는 일하는 것에 비하여 먹이가 더 있어야 해요.”
어미 망아지가 어린 망아지를 핥으며 말했다.
“아가야 좀 기다려 보렴. 그 이유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란다.”
그 농장에도 풍요로운 가을이 찾아 왔다. 그런데 돼지가 농부의 손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이것을 본 어린 망아지는 어미 망아지에게 물었다.
“엄마, 돼지가 어디로 끌려가요.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제서야 어미 망아지는 알았냐는 듯 어린 망아지에게 말했다.
“돼지는 많이 먹고 살이 찌면 죽는 단다. 그래서 주인 어른은 돼지에게 많은 먹이를 주는 거란다.”




죄는 불안과 공포를 준다


영국의 런던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떤 사람이 장난 삼아 런던 시내에 살고 있는 유명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그 내용은 ‘당신의 부정한 생활이 다 들통이 나서 그 때문에 신문기자들이 당신의 집을 찾아갈 것이다. 그러니 빨리 이 런던을 떠나가시오.’
그 후에 그 편지를 보낸 집마다 찾아가 보았더니, 집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몬로의 고백


마릴 몬로는 이런 고백을 했다. “나는 한 여성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다. 나는 젊다. 나는 아름답다. 나는 돈이 많다. 나는 사랑에 굶주리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백 통의 편지를 받고 있다. 나는 건강하고 부족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미래에도 이렇게 살 수 있다. 그런데 웬일일까? 나는 이렇게도 공허하고 이렇게도 불행하다. 이유 없는 반항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이유 없이 불행하다.” 그러나 이유는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속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 덮개 속의 가짜 믿음


사치를 좋아하는 여인이 있었다. 이 여자는 세상적인 욕심이 너무나 많았다. 친구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면 자기도 사야하고, 옆집에서 멋진 가구를 사면 자신도 사야하는 성미였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아도 끝은 있는 법이다. 그런데 갑자기 옆집에서 아주 비싼 외제차를 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차를 보니 너무나 멋지고 좋아서 자신도 사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돈이 모자랐다. 여자는 밤에 잠을 한 숨도 못 자고 궁리를 하였다. 여자는 날이 밝자 아주 멋진 외제차를 구입하여서 집 앞 주차장에 세워 놓았다. 동네 사람들은 여자를 부러워했고 여자는 그 모습을 보고 기뻐하였다.
구입한 차는 날마다 그 여자의 집 앞에서 덮개로 덮어져 있었고 동네 사람들은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덮개가 있는 차를 누가 볼 까봐 몰래 만지면서 여자를 부러워하였다. 사실 이 여인이 구입한 차는 움직이지 못하는 가짜 차였다. 첫날은 외제차를 전문적으로 렌트를 해주는 곳에서 하루를 빌렸으며 그 다음날부터는 낡고 고장이 나서 움직이지도 않는 차를 가져다 놓고 덮개만 덮어서 사람들을 속여 온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동네 사람들은 그 여자를 부러워했고 집안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는 여인의 얼굴에서는 묘한 미소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무신론자의 종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저서 「역사의 연구」에서 ‘세계를 지배했던 21개의 문명 가운데 19개의 문명이 자멸했는데, 그 이유는 무신론과 물질주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신앙의 마비 증세


어떤 심리학자가 개구리를 잡아다 뚜껑이 없는 솥에 물을 넣고 뛰어 나가지 않게 삶아 죽이는 것을 연구했다. 처음에 솥에 찬물을 붓고 개구리를 넣었더니 개구리가 솥에서 후다닥 뛰어 나오고 말았다. 그래서 더운물을 붓고 또 다시 개구리를 솥에다 넣었더니 마찬가지로 뛰어 나오고 말았다.
이 심리학자는 깊이 생각한 끝에 개구리가 제일 좋아하는 물의 온도, 초여름의 물의 온도와 같은 물을 솥에 붓고 개구리를 그 안에 넣었더니 가만히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 학자는 밑에서 불을 때는데 개구리가 말을 못 하지만 속으로 생각 할 때 “조금씩 따뜻해진다”하고 느낄 정도로 천천히 불을 때게 되었다. 물의 온도는 점점 올라가 섭씨 100도가 되어 죽을 때까지 눈이 말똥말똥 해서 그대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신앙의 마비 증세가 오면 서서히 죽음이 오는 법이다.




공산주의 이름으로 인류 1억 명 죽였다


볼셰비키 혁명 80주년을 맞이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발매한 ‘공산주의의 흑서(黑書)’라는 이 책은 프랑스 역사 학자 11명이 공동 집필했다. 8백 44쪽에 달하는 이 책은 거의 1세기 동안에 걸친 공산주의 살육의 실증적 대차대조표. 백서 혹은 청서 등과 대비, 그 참혹한 역사를 상징할 수 있도록 ‘흑서’라는 이름을 붙였다. 단순히 추상적 개념과 주장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예증, 사진, 자료 등이 곁들여 있는 고발장이다.
‘흑서’는 레닌 이후 오늘까지 지구상에서 공산주의 때문에 희생된 사람을 1억 명 가량으로 계산하고 있다. 그것은 ‘레닌에서 김정일까지’이어지고 있는 범죄(犯罪), 공포(恐怖), 압제(壓制)의 기록이다. 스탈린은 물론, 동독 국가 평의회 의장이었던 발터 울브리히트,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마오쩌둥(毛澤東), 베트남의 호치민(胡志明), 캄보디아의 폴 포트 등은 모두 ‘지상 낙원’을 약속했고, 이를 ‘지옥’으로 실현했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 소장이며 ‘흑서’의 대표 저자인 스테판 쿠루투아 교수는 서문을 썼다. ‘우리가 말하는 공산주의는 공허하게 하늘에 떠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국가의 한 시대에 실재하면서 유명 지도자들이 구체화했던 공산주의인 것이다.’ 저자들은 공산 독재자가 반대파를 분쇄하기 위해 기아(飢餓)를 무기로 사용했다고 분석했다. 이것은 체계적이고 고의적이었다. 레닌이 처음이었고, 스탈린이 본받았으며, 나중에 에티오피아, 모잠비크 등이 이를 원용했다는 것이다.








여성 범죄 증가율 남성의 2배


최근 10년간 여성 범죄자 증가율이 남성보다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나 앞으로 여성 범죄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여성 범죄자 중 30-40대 어머니의 비율이 매우 높아 가정 파괴 등 연쇄적인 사회 붕괴 현상이 우려되어 대책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국교정학회가 발간한 ‘한국 여성 범죄와 교정 대책’에 따르면 87-96년에 연평균 여성 범죄자 증가율은 13.9%로 남성의 5.5%에 비해 2 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여성 범죄자 수가 96년 현재 28만8천2백 명으로 남성(1백63만4천3백 명)의 20% 정도에 불과하지만 증가 추세는 남성을 크게 앞지르고 있어 여성 범죄가 중요한 범죄 현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96년 발생한 여성 범죄자를 연령별로 분석해 보면 30-40대가 60%로 가장 많고 기혼 여성의 비율(62.4%)이 미혼(16.6%)보다 3배 이상 높아 20대와 미혼인 경우에 범죄율이 높은 남성과 대조를 보였다.
이처럼 중년층 기혼 여성의 범죄가 높은 비율을 보이는데 대해 전문가들은 연쇄적인 사회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계명대 최응렬(崔應烈)교수는 “어머니의 범죄는 가정 파탄을 가져오기 때문에 자녀들이 이런 환경을 비관해 비행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유형별로는 재산 범죄가 75%로 가장 많고 간통 윤락 등 풍속범(9.7%)과 강력범(6.5%)이 그 뒤를 이었다. 70년대에는 강력범이 풍속범보다 80년대부터 유흥업소가 급증함에 따라 풍속범이 강력범보다 높은 비율로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교정 전문가들은 이처럼 여성 범죄자 수가 급증함에 따라 여성 재소자를 위한 교화 프로그램 개발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충남대 박광섭(朴光燮) 교수는 “여성이 가정교육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여성 범죄자에 대한 과학적인 교정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독교인의 위기


기독교인의 위기는
가)자기가 가지고 있는 불신앙적인 행위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나)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할 사람이 자기 중심적으로 살 때 생긴다.
다)자기가 변화하여야 하는데도 하나님을 변화시키려고 할 때 생긴다.
라)죄를 회개치 않을 때 생긴다.
마)타성에 젖은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 생긴다.
바)자기에게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때 생긴다.
사)하나님의 말씀을 이탈할 때 생긴다.
아)사탄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생긴다.




무신론자 볼테르


일찍이 교회를 핍박하고 없애려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오래 전에 불란서의 볼테르는 사람은 50년만 지나면 교회는 이 땅에서 없어진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죽었다” “성경은 거짓이다”라고 하며 많은 책을 써냈지만 50년이 지난 후에는 신기하게도 하나님은 없다고 하던, 무신론적인 책을 써내던 그 집에서 마룻바닥부터 천정까지 성경으로 꽉 차 있으며 없어진다고 하던 교회는 더 크게 부흥되었다.
교회를 핍박하고 없애려던 사람이나 민족은 망했어도 오늘날의 교회는 더욱 더 부흥되었다.
이단의 심리적인 교묘한 방법


1. 고립시킨다(Isolation).
ꋻ사회나 합리적인 것으로부터 육체적으로 분리하여 현실 감각을 잃게 한다.
2. 최면을 한다(Hypnosis).
ꋻ명상하는 것처럼 살짝 속여서는 최면술에 걸리게 한다.
3. 동료들의 압력을 받게 한다(Peer group pressor).
ꋻ새로운 생각에 저항하거나 의심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주변에서 같은 이야기를 주입한다.
4. 폭발적인 사랑을 준다(Love bombing).
ꋻ포옹을 하거나 키스하거나 만지거나 아첨을 하면서 한 가족과 같은 감정을 갖게 한다.
5. 사생활을 제거한다(Removal of privacy).
ꋻ미리 제정된 정관에 의해 논리적인 사고나 평가 능력을 상실하게 한다.
6. 잠을 재우지 않거나 피곤하게 만든다(Sleep deprivation & fatigu-e).
ꋻ적절한 휴식이나 잠을 뺏으므로 사고(思考)나 활동 능력을 저하시킨다.
7. 게임을 이용한다(Games).
ꋻ분명치 않은 룰의 각종 게임을 통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8. 집중적으로 전달한다(Meta communication).
ꋻ혼란스러운 강의로 긴 시간 동안 주입하고자 하는 말이나 뜻을 계속하여 전달하므로 의식 속에 그것이 잠재하도록 한다.
9.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다(No questions).
ꋻ질문을 못하게 하여 주어진 것을 그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10. 혼란스러운 교리를 제시한다(Confusing doctrine).
ꋻ이해할 수 없는 교리를 복잡한 강의를 통해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어 논리적인 것을 거부케 하고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한다.
11. 전통적인 가치를 거부케 한다(Rejection of old values)
ꋻ전통적인 가치를 부인케 하고 새로운 생활 형태를 받아들이게 한다.
12. 고백하게 한다(Confession).
ꋻ개인의 자아를 없애고 속에 있는 비밀을 고백하게 함으로 약점을 드러내게 하여 그 약점을 잡는다.
13. 죄의식을 갖게 한다(Guilt).
ꋻ이전의 생활 속의 죄를 침소봉대하여 자신들의 가르침에 매달리게 한다.
14. 두려움을 조장한다(Fear).
ꋻ부정적인 생각이나 말이나 뜻을 악화시켜서 그룹에 복종하게 하고 순종하게 한다.
15. 노래를 부른다(Chanting and singing).
ꋻ노래를 반복하여 부르게 함으로 그 노래에 몰입이 되게 한다.
16. 책임을 부인케 한다(Disinhibition).
ꋻ어른으로서의 책임을 포기케 하고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도록 조종한다.
17. 건강에 변화를 준다(Change of diet).
ꋻ어린아이들이 먹는 낮은 프로테인의 음식을 먹이므로 필요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게 하여 근육이나 감정에 손상을 갖게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한다.
18. 잘 잘못에 혼란을 겪게 한다(Controlled approval).
ꋻ비슷한 사건을 통해 한 번은 칭찬을 하고 한 번은 야단을 치므로 판단력을 잃게 하고 혼란스럽게 한다.
19. 제복을 입힌다(Dress).
ꋻ단체로 유니폼을 입게 함으로 개인적인 것을 없앤다.
20. 계급 제도를 이용한다(Flaunting hierarchy).
ꋻ이단의 권위를 받아들이게 한다.
21. 비난한다(Finger pointing).
ꋻ밖의 세계나 타 이단을 향해 손가락질하므로 자기들의 잘못된 의를 강조한다.
22. 인간 관계를 바꾼다(Replacdment of relationships).
ꋻ전의 결혼 관계나 가족 관계를 부인한다.
23. 재산을 모두 헌납하게 한다(Financial commtiment).
ꋻ위기감을 조장하여 전 재산을 바치게 함으로 조직에 전보다 더 의존하게 한다.  




세상 지식으로 본 성경


어느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을 훌륭한 목사님으로 모시고 싶어 외국에 있는 신학교로 공부를 하시라고 보내드렸다. 그 후 목사님은 박사 학위를 받았고 기다리던 교회에 돌아와 설교를 했다. “여러분 모세 오경이라는 것은 다 신화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설이나 신화를 수집한 책입니다.” 교인들은 설교를 들으면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다 잘라냈다.
그 다음 주일날 목사님이 다시 설교를 시작했다.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는 그 당시에 돌아다니던 민속 야담 자료를 꾸며놓은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은 얼마나 반지성적인 것입니까?” 이 말을 듣고 또 감동을 받은 교인들은 성경에서 그것을 다 도려내었다.
그 다음 주일 목사님은 다시 설교를 했다. “여러분 예언서라는 것은 밤에 꿈을 꾸다가 허깨비를 본 사람들이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을 현대 지식인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라는 분에 대한 제자들의 하잘 것 없는 소감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바울서신이라는 것은 예수에게 미친 사람 하나가 예수에 대한 자기의 황당무계한 이론을 펼쳐 놓은 것입니다.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는 동안 교인 수는 점점 줄기 시작했고, 마지막 주일에 이 목사님이 당당하게 등단하여 “여러분! 요한계시록이란 앞으로 일어날지 또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를 사람들의 단순한 기대를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라고 설교를 끝냈을 때 그 자리에는 한 사람의 교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의심이 암귀를 낳는다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 버렸다. 누군가가 훔쳐 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옆집 아들이 수상했다. 자기를 만나기만 하면 슬금슬금 피하는 것 같고, 걸음걸이도 꼭 도둑놈 같았다.
“그놈이 훔쳐 간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단정하고 보니 영락없이 옆집 아들이 도둑이었다. 말하는 것도 도둑놈이요, 표정이나 행동도 역시 도둑놈 같았다.
그런데 얼마 뒤,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잃었던 도끼를 찾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기가 그 장소에 도끼를 놓아두고는 깜빡 잊었던 것이다.
도끼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옆집 아들을 만났다. 그런데 일거 일동이 전혀 수상해 보이지 않았다.
의심이 암귀(暗鬼)를 낳는다는 우화이다.
빨강 렌즈를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온통 빨갛게 보인다. 파랑 렌즈의 안경을 끼고 보면 파랗게 보인다.
의심도 일종의 색깔 있는 렌즈와 같다. 의심의 눈은 온통 의심으로 보이게 된다.
의심의 눈을 버려야 한다. 의심은 무서운 병이다. 의심이란 참으로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중추신경이란 관성의 법칙에 따라 일단 형성된 관념은 좀처럼 지워지지도, 바꿔지지도 않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괜한 의심은,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에게 똑같이 흉기로 작용하여 상처받게 된다.


남을 믿는 것은, 사람들 모두가 반드시 성실한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이 성실하기 때문에 내 마음을 미루어 짐작함이다.
남을 의심하는 것은, 자신이 먼저 마음을 속이고 남도 마음을 속이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모조 하나님으로서의 돈


맘몬은 이제 모조 하나님으로서 등장하였다. 맘몬은 하나님이 받으실 경배를 요구하며, 인간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은 전능성, 초월성, 거룩성이라는 속성을 가지시고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신다. 마찬가지로 모조 하나님으로서의 돈도 그와 똑같은 다음의 세 가지 성격을 가지고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려 한다.


첫째, 모조 하나님으로서의 돈은 전능성을 가진다.
돈은 어디든지 침투할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인간의 특수한 욕구나 삶의 형식에 봉사한다. 신앙, 국가 및 형이상학적 사고의 차이에 따른 갈등 때문에 서로 결정적으로 대립되는 상황 속에서도 돈은 어느 쪽을 불문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가지고 거의 모든 목표들에 똑같이 봉사한다. 돈은 이렇게 철저하게 대립된 파벌들 사이에서도 봉사하는 신비스러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과 사회는 없다.


둘째, 모조 하나님으로서의 돈은 초월성을 가진다.
사물들이 모두 경제적인 대상일 필요는 없지만 경제적 대상이 되려면 그것들은 돈에 구체화된 가치평가법칙에 복종해야 한다. 즉 돈은 경제적 대상들의 보편적, 추상적 개념이다. 동시에 돈은, 중력의 법칙이 물체들의 크기와 그 물체들의 무한히 다양한 운동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재화들의 관계를 표현하면서도 그 재화들의 흐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셋째, 모조 하나님으로서의 돈은 거룩성을 가진다.
인간에서 있어서 돈은 거룩한 일면을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돈 문제는 중대한 것이다. 사랑이니 정의니 지혜니 생명이니 하는 것 따위는 말뿐이다. 흔히 인간관계에서 돈 이야기는 꺼린다. 돈 이야기는 아무 데서나 함부로 해서는 안되고 장난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어느 좌석이든 돈 문제만 나오면 엄숙해진다. 부부는 자녀들 앞에서 성과 죽음에 대해서까지 개방적이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지만 막상 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침실로 가서 문을 닫고서야 이야기한다. 돈에 대한 거룩한 감정은 모든 사람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돈은 전능성, 초월성, 거룩성을 가지면서 모조 하나님으로서 인간에게 경배를 요구한다. 돈은 인간에게 믿음의 대상이 되고, 신앙과 사랑의 대상이 된다. 또한 돈은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기쁨을 약속한다. 그러므로 돈은 인간에게 끝없는 추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돈이야말로 인간에겐 최고선이요 숭배의 대상이다. 이러한 돈의 사탄적 성격은 타락한 세상과 인간 속에서 무한한 욕망을 재촉함으로써 갖가지 돈의 왜곡 현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돈의 허상


맹자(孟子)는 “항산이 없으면 항심도 없다.”고 했다. 항산은 여유 있는 재산을 이야기하고 항심은 여유 있는 마음을 이야기한다. 로버트 번즈도 돈을 “독립의 바위”라고 했고 프랑스의 철학자 싸르뜨르도 돈을 “자유의 주조물”이라고 했다.
돈이 있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것이요 자유가 있다는 말이다. 반면 돈이 없다는 것은 힘은 물론 자유마저 없는 것이다. 돈은 우리에게 경제적 독립을 보장해 주며 인격 독립의 기본적 수단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돈이라고 다 귀하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옳은 방법으로 번 돈은 귀하고 값진 것이지만 나쁜 방법으로 치부한 것은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그래서 전자는 청부(淸富)라 하고 후자는 탁부(濁富)라고 하는 것이다.
돈은 확실히 인간 생활을 편하게 만들고 힘이 있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배금주의자가 되고 맘몬이스트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밀튼 프리드먼의 “돈의 이야기”(Money mischief)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남태평양 캐롤라인 군도의 야프섬 사람들은 돌을 화폐로 사용했다. 돈으로 사용되는 이 돌은 야프섬에서 6백여km 떨어진 다른 섬에서 나는 석회석을 다듬어 만든 운반용 구멍이 뚫린 바퀴 모양의 돌이었다.
‘페이’란 이름의 이 돌 화폐의 지름은 30cm에서 3백 60cm나 되었다니까 운반을 하려면 많은 공력이 들었다. 그런데 이 돌 화폐는 누구 것이란 표시를 할 필요가 없었다. 자기 것으로 인정만 받으면 됐던 것이다.
야프섬에는 돈 많기로 소문 난 부자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누구보다 큰 돌 화폐를 소유했다고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화폐를 본 사람도 만진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부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재산가의 조상 한사람이 크고 좋은 돌을 얻어 뗏목에 싣고 오던 중 폭풍우를 만나 그만 바다에 빠뜨리고 말았다. 일행은 돌을 두고 그대로 귀향을 했다. 그러나 그 돌은 엄연히 그 사람의 것이었고 그 동리에선 부자로 통용됐던 것이다.
때로 우리는 실상이 아닌 허상에 살 때가 많다. 남태평양 캐롤라인 군도의 야프섬 사람들처럼 말이다.




덕은 근본, 재물은 말단 (德者本也 財者末也)


덕은 근본 되는 것이고 재물은 말단 되는 것이다. 덕이 있으면 사람도 재물도 모여드는 것이니, 덕은 근본이 되고 재물은 말단이 된다. 그 본말을 잘못하게 되면 결국 백성을 서로 다투게 하는 결과가 되어 서로 빼앗는 짓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대학-




재물의 허망함


어느 곳에 돈을 좋아하는 자매 한 분이 간경화증으로 병들어 눕게 되었다. 병세가 악화되어 임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맡에는 금고가 놓여 있었다. 금고의 문이 열려 있고, 그 안에 1천 원권, 5천원권, 1만원권의 돈이 가득 차 있었다. 돈을 보고 위로 받으라고 그의 남편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는 자유를 잃어버린 그에게 돈이 위로를 주지는 못했다. 그 자매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돈보다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자유였다. 그녀는 내게 말하기를 “저 금고가 보기 싫어요. 한 번만이라도 일어나 마음대로 다녀 보았으면 좋겠어요.”하였다. 결국 그는 돈 통을 발로 차고는 임종을 맞이하면서 한 번만 자유롭게 다녀 보았으면 하며 절규하다 별세했다고 한다.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미국의 유명한 가수였던 엘비스 프레슬리는 본래 트럭 운전수였는데 우연히 콩쿨 대회에 나가서 노래한 것이 인정을 받아 최고의 인기 가수가 되었다. 그는 70억불의 재산을 모았고 10억짜리 저택에 10에어커가 넘은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노래 부를 때 수 백개의 다이어몬드를 청중에게 뿌렸고, 자가용 전용기로 여행할 때 수행원이 50명씩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는 마약 중독자가 되어 매일 마약 주사를 맞다가 40세에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고 말았다. 그는 호화로운 인생을 살다가 갔으나 그 많은 재산으로 고아원이나 학교 하나 세운 일없이 오직 자기 향락만을 위해 살다 갔다. 돈은 많았으나 참으로 가난하고 불쌍한 인생을 살다 간 것이다.




풍요가 위기일수도


혁명 이전의 제정 러시아교회는 물질적으로, 수적으로, 양적으로 풍요로웠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풍요는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다. 프랑스 혁명 이전 루이 16세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도 사치와 호화로운 생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그들의 욕심과 타락은 피바다로 흘러 내려갔다. 그릇된 역사의식, 심판의 때를 망각한 채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누리는 탐욕의 생활은 필연적으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


ꋻ자손에게 재산을 남겨 주는 것은 단지 자손에게 게으름을 가르칠 뿐이다.
-소학-




귀신들린 것


1)중생하지 못했을 때 들린다.
2)인간의 육체속에 거하기를 즐겨 한다.
3)귀신의 일을 한다.
4)하나님을 모독한다.
5)육체를 파괴한다.
6)거룩한 것을 더럽게 사용한다.




귀신의 무력함


어느 대가집에 새 며느리가 들어왔다. 그 며느리는 미신을 믿지 않고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반면에 시어머니는 조상 대대로 섬겨 오는 터주 귀신을 위하여 시시때때로 제사를 올렸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제사 준비를 조금도 거들지 않았다. 낙심한 시어머니가 집안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며느리를 달랬으나 막무가내였다. 세월이 흘러 시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며느리가 안주인이 되었다. 물론 터주 귀신을 위하여 물 한 그릇 떠놓지 않았다. 터주 귀신이 대노하여 며느리의 꿈에 현몽 하였다. 만일 터주 귀신에게 제사를 올리지 않으면 세 살 짜리 외아들을 잡아가겠다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귀신의 위협을 무시하였다. 그런데 그 외아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사흘도 되지 못하여 그만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며느리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여전히 제사를 올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귀신이 다시 현몽 하여 조상 대대로 자기를 섬겨 오던 그 집 조상들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아들을 하나 더 낳을 것인데, 만일 그때도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또 그 아들을 잡아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며느리는 새 아들을 얻고도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귀신이 다시 현몽 하여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테니 이번에는 어김없이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며느리는 듣지 않았다. 이렇게 하기를 무려 여섯 번, 이제 귀신은 비장한 모습으로 며느리에게 현몽 하였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하였다.
그녀는 또 아들을 낳았다. 터주 귀신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아예 칼을 들고 온 것이다. 만일 며느리가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당장 그 아들을 찔러 죽이겠다는 것이다. 그때였다. 며느리는 잽싸게 귀신의 칼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귀신의 손에 아들을 잃느니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죽이겠다고 하면서 자기 아들에게로 다가섰다. 깜짝 놀란 귀신이 어느 결에 다시 그 칼을 빼앗아 들고 할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앞서 죽은 여섯 아들은 죽을 팔자가 되어서 죽은 것이지 내가 잡아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다르다. 이 아이를 잘 키워라.” 귀신은 이런 말을 남기고 슬픈 얼굴로 사라졌다.




마귀가 인간을 사로잡는 5단계


어떤 분이 마귀가 인간을 사로잡는 5단계를 말했다.
1단계는 집착, 혹은 강박관념(Obsession)이다.
이것은 나쁜 생각, 죄 된 생각을 자꾸 거머리같이 달라붙게 한다. 안 하려고 하는데도 자꾸 좋지 못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2단계는 억압(oppression)이다.
이것은 마음과 생각을 마귀가 사로잡아서 그 죄악 된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3단계는 침울(depression)이다.
마귀가 조종하는 대로 행동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엔 후회가 되고 마음이 우울해지며 평안이 없어진다.
4단계는 포기(recession)이다.
이 넷째 단계부터 더욱 위험하다. 침울의 단계까지는 “이래서는 안 된다”하고 생각도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에라,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하고 포기해 버린다.
5단계는 사로잡힘(Possession)이다.
이제는 완전히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생각도 말고 행동도 마귀가  하라는대로 한다. 내 마음대로 못하고 마귀가 주인 노릇을 한다.
‘웨치만.니’의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생각은 악령으로부터 오는 생각이라고 했다.
ꋻ번개처럼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 즉 근거도 없이 의심이 오고 오해하게 되고 심지어 마귀의 소리까지 듣게 되는 것.
ꋻ이상한 환상과 영상이 자꾸 나타나거나 괴상한 꿈을 꾸게 되는 것, 즉 괴상하고, 성급하고, 어리석고, 환상적이고, 교만케 하고, 혼돈시키고, 비합리적인 환상과 영상이 자꾸 나타나는 것.
ꋻ불면증, 이유 없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결국 쓸데없는 고민으로 잠이 오지 않게 하는 것.
ꋻ건망증, 안 해야 될 생각은 자꾸 생각나게 하는 반면 중요한 해야 할 생각은 안 하게 한다.
ꋻ그래서 좋은 하나님의 생각을 깜박깜박 잊게 되는 것도 마귀의 역사이다.
ꋻ집중력의 결핍, 기도를 집중적으로 할 수 없게 되고, 성경 읽는 것에 집중할 수 없게 되고, 설교를 집중해서 듣지 못하게 되며 생각이 뚝뚝 끊어지고 생각이 분산되면서 방황하는 것도 마귀의 역사로부터 오는 것이다.
ꋻ무기력,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고 회상할 수 없는 혼미한 생각들, 아무 것도 하기 싫고 무슨 일이나 불가능하게만 보이고 중단하고 싶은 것, 모두 마귀의 역사이다.
ꋻ변덕스러움, 한가지 생각이 오래가지 못하고 얼마 안 가서 정반대의 생각이 들고 얼굴이 하루에 몇 번씩이나 칠면조 변하듯 하는 것도 악령의 장난이다.
ꋻ수다스러움, 다른 사람의 말을 오래 들을 수 없고 자기 말만 자꾸 하는 것, 농담이나 잡담이나 중상모략으로 입을 쉴 줄 모르는 것도 악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ꋻ고집, 완고함, 시험해 보거나 반성해 보거나 고려해 보는 것을 거부하고 다른 의견에는 아예 귀를 기울이지 않는 고집, 완고함도 악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내일을 권유하는 마귀


악마와 그의 막료들이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방해하기 위한 전략 회의를 열었다. 젊은 엘리트 출신의 마귀가 그리스도인들을 죽이자고 했다. 늙은 마귀가 순교는 교회 성장의 씨가 된다고 경고했다. 또 누군가가 매를 때리자고 했다. 매 한 대에 예수가 열도 더 생긴다고 경고했다. 가두자는 제안도 있었다. 가두면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므로 손해라고 했다. 죄를 범하게 하자고 했다. 그것이 가장 성공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전략을 모색하자고 했다.
가장 나이 많은 마귀가 지혜를 짜냈다. “열심히 전도도 하고 기도도 하고 사랑도 하자. 그러나 내일부터 하자”고 속삭이는 전략이었다. 이 전략이 마귀의 최대 성공 전략이었다.
주를 따르는 결단의 시기는 언제나 지금 현재이다.














주인이 된 고슴도치


고슴도치가 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침 구렁이 가족이 살고 있는 굴을 발견하고 함께 살자고 간청했다. 구렁이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고슴도치의 청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고슴도치가 굴속으로 들어온 다음에 보니 따가워서 도저히 같이 지낼 수가 없어서 구렁이가 말했다.
“고슴도치씨, 미안하지만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겨 주십시오. 당신은 몸집이 작은데 비해 가시가 너무 따가워서...” 그러니까 고슴도치는 성을 버럭 내면서 “내가 싫거든 당신들이 나가시오! 나는 다른 곳보다 여기가 좋소”라고 하였다.
사탄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겠다고 달콤하게 유혹하여 우리를 파멸 가운데로 이끌며, 끝내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우리를 종으로 삼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사탄을 문안에 결코 들여서는 안 된다.




송도 외장수


옛날 송도(松都)에 외장수가 있었다. 그는 산지(産地)에서 외를 사 가지고 그것을 팔기 위해 한양으로 들어갔다.
외장수가 한양에 도착했을 때 이런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의주 쪽에서는 외가 품귀 현상을 일으켜 값이 폭등하고 있다더라.”
외장수는 벌컥 욕심이 생겼다. 이왕이면 단 한푼이라도 더 많은 이익을 남기고 싶었다.
“가자, 의주로...”
외장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의주를 향해 줄달음질쳤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여 마침내 의주에 당도했다.
의주 시장에 나가 보니 이번에는 개성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외값이 치솟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자 그는 또 발걸음을 개성으로 옮겼다. 죽을둥 살둥 모르고 나는 듯이 걸음을 옮겨 개성에 도착했다. 그랬더니 과연 외값이 천정 부지로 오르고 있었다.
외장수는 좋은 자리를 골라 외가 든 등짐을 풀었다. 그런데 외는 이미 다 썩어 있었다.




끝없는 탐욕
 
어떤 도인이 주막에서 술을 마신 후 술값을 치르려고 했다.
“그냥 가십시오. 도를 닦는 분께서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주막 주인은 한사코 술값을 받지 않았다.  
‘고마운 사람이군.’
도인은 고마움에 보답하는 뜻에서 품속에서 약 두 알을 꺼내 샘물에 던져 넣고 갔다.
다음날 샘물이 들끓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주막 주인이 떠 마시니 온통 달콤하고 향기로운 술이었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그 샘물을 ‘신선주’라 불렀고, 주막 주인은 그 샘물로 인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훗날 도인이 다시 그 주막에 들렀다.
“술맛이 어떻습니까?”
도인이 묻자 주막집 주인 아내가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술은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술지게미가 없어 돼지를 먹일 수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이 말을 들은 도인은 탄식하며 손으로 샘물 속을 더듬었다. 그러자 두 개의 알약이 툭 튀어 올라왔다.
도인이 알약을 거두어 가 버리자 샘물은 예전처럼 되었다.




지옥에서 다시 만난 아버지와 아들


어떤 사람이 지옥을 구경갔더니, 어느 아버지가 먼저 와 있고, 다음에는 그 아들이 왔다. 부자가 지옥에서 만나게 되니까 아버지가 기가막혀,
“야, 이놈아, 네가 어떻게 지옥에 왔느냐? 너를 행복하게 하고, 잘 살게 해 주려고 못할 짓까지 하면서 이 지옥까지 왔는데...”
그랬더니 아들이 뻔뻔스럽게 대답하기를,
“차라리 내가 가난했으면 정직하게 살았을 것을, 아버지가 재산을 많이 물려주었기 때문에 허랑방탕 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까? 나는 아버지 돈 때문에 지옥 왔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에게 돈 물려주려고 못된 짓까지 하다가 지옥 갔고, 아들은 아버지가 물려준 불의한 돈 허비하다가 역시 지옥에 와서 지옥에서 ‘부자가 상봉’하게 된 것이다.




욕심의 결과


할머니 한 분이 선반에 얹힌 꿀단지를 내려놓다가 실족해서 꿀단지가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꿀 냄새를 맡고 문틈으로 들어온 파리 몇 마리가 방바닥의 꿀을 먹으려고 덤벼들었다. 할머니가 손을 휘둘러 파리를 쫓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할머니는 흩어진 꿀을 담아 그릇과 수저를 가지러 부엌으로 갔다. 파리 떼들은 ‘이때다’하고 방바닥의 꿀을 먹기 시작했다. 단맛에 취한 파리들은 꿀에 앉아 배가 터질 만큼 먹었다.
그때 할머니가 그릇과 수저를 가지고 와서 파리를 쫓으려 했으나 없었다. 다시 보니 방바닥에서 꿀을 먹고 있었다. 꿀을 먹는 파리는 쫓았으나 도망가지 못했다. 할머니는 꿀 위에 주저앉아 죽어버린 파리를 주워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조금만 먹고 날아갈 것이지 욕심을 내어 너무 먹었으니 이 꼴로 죽지. 미련한 것들.”
눈은 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앞이 가리워지고, 힘은 목적을 달성하려는 욕망 때문에 꺽이게 되어 있다.




준비하지 않는 삶의 결국


어느 배 한 척이 폭풍에 표류하다가 무인도 앞에서 파선되어 그 섬에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거기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몇 달 동안 먹을 양식이 있었고, 배에 마침 싣고 가던 종자도 있었다. 그 섬은 비옥한 땅이기도 해서 씨앗을 뿌리며 농사를 짓게 되었다.
땅을 파고 종자를 뿌리려고 하는데 땅속에서 누런 금 덩어리들이 솟아 나왔다. 그들은 금 덩어리만 파내느라고 종자 심을 것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식물은 점점 줄어들어 갔으며 어느새 음식이 다 없어졌다. 그때야 사람들은 밭을 파헤치고 종자를 심었으나 이미 때는 늦게 되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 금 덩어리들 틈에서 죽어버리고 말았다.




황금의 손


고대 리디아라는 국가에 마이더스라는 왕이 살고 있었다. 마이더스는 얼마나 황금을 갖고 싶어했던지 ‘디오니소스 신’에게 “무엇이든지 손대기만 하면 황금이 되는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했다.
결국, 그가 만지는 것은 모두 황금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하다못해 굴러다니는 돌덩이를 만지기만 해도 즉시 황금으로 변해 버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음식을 먹으려고 해도 몽땅 황금으로 변해 버렸고, 사랑하는 딸과 포옹하자마자 딸도 황금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궁전은 온통 황금 덩어리로 변해 버렸으나, 그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었다. 뒤늦게 자기의 탐욕을 뉘우친 그는 마법을 풀어 달라고 울며 애원하였고, 신의 지시를 따라 ‘파크토로스’라는 강에서 목욕을 하고, 황금 더미에서 해방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탐득자(貪得者), 분금한부득옥(分金恨不得玉)”이라는 말이 있다. 탐욕이 많은 사람은 황금을 나누어주어도 오히려 옥(玉)을 얻지 못함을 한탄한다.




욕심 때문에, 무효


어부가 낚시질을 하다가 이상한 고기를 낚았다. 
곧 고기가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저씨, 저를 살려주시면 아저씨 소원을 들어 드릴께요.”
어부는 고기를 살려 보냈다.
그러자 고기가 물 속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아저씨, 소원을 말씀해 주세요.”
“좋은 집과 편안히 먹고 살 수 있는 양식이 창고에 가득 차 있었으면 좋겠다.”
“돌아가 보세요. 그렇게 되어 있을 거예요.”
집에 돌아온 어부는 놀랐다.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살다 보니 어부는 슬그머니 욕심이 생겼다. 어부는 물가에 가서 고기를 불렀다.
고기가 나오자 어부는 다른 소원을 말했다.
“집에 하인들이 있으면 좋겠다.”
고기는 선선히 대답했다.
“돌아가 보세요. 그렇게 되어 있을 거예요.”
과연 집에 돌아와 보니 하인들이 드글드글 끓었다.
또 한참 지내보니 어부는 슬그머니 더 큰 욕심이 생겼다.
어부는 물가로 가 고기를 불러 말했다.
“그렇게 나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그 신비의 힘을 내게 다오.”
그러자 고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의 욕심은 이제 조물주의 자리를 엿보는구려. 못된 사람 같으니.”
어부가 집에 돌아와 보니, 좋은 집도, 양식이 가득 찬 창고도, 하인들도 없었다. 예전의 가난하고 초라한 초가삼간과 빈 자루만 있을 뿐.




욕심의 결과


안델센이 지은 “분홍신”이란 동화가 있다. 어떤 소녀가 마술사가 만든 분홍신을 몹시 가지고 싶어하다가 드디어 그것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러나 소녀가 그 분홍신을 신는 순간부터 불행이 찾아오게 되었다. 그 신은 신기만 하면 자꾸 춤을 추어야만 했다. 그칠래야 그칠 수 없는 춤을 일생동안 계속 추어야만 했다. 어떤 때는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을 때도 있었으나 그것은 잠깐이고, 또 다시 다른 곳으로 돌아다니며 춤을 추어야 했다. 집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써도, 이제는 좀 쉬어 보려고 하여도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이제는 제 마음보다는 분홍신에게 붙들려 다니는 것이었다. 이렇게 소녀는 결국 분홍신을 신고 춤을 추다가 지쳐서 죽어 버리고 만다는 이야기이다.


사람은 반드시 무언가에 이끌리어 살게 되어있다(롬 8:5). 그것이 육이 되었든, 영이 되었든 선택은 사람 자신이 한다. 세상의 좋아 보이는 것도 가지고 나면 언제나 우리의 주인이 된다. 그리고는 그것에 끌려 다니며 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이다.
우리는 창조의 원리대로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어 살아야 하며 그 영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이 된다.
원숭이 사냥법


아프리카의 원주민이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매우 특이하다고 한다. 먼저 자루에 바나나를 가득 넣어 놓고 주머니 입구를 아주 작게 해 놓는다고 한다. 멀리서 원숭이가 바나나 냄새를 맡고 와서는 손을 넣어 바나나를 잡고 꺼내려고 하면, 자루의 입구가 좁아서 손을 뺄 수 없다고 한다. 원숭이가 손을 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바나나를 놓아야 한다. 그런데도 미련한 원숭이는 원주민이 다가오는 데도 바나나는 놓지 않고 손을 빼는 방법을 생각한다고 한다. 제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바나나를 놓지 않고는 손을 뺄 재간이 없는 데도 원숭이는 바나나를 놓지 않는다. 결국 원주민은 아주 쉽게 원숭이를 잡는다. 이렇게 원주민은 원숭이를 잡아서 원숭이 골탕도 해먹고, 팔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는 세상 것과 주님을 같이 섬길 방법은 없다. 두 손을 모으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모두 다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아버지께 두 손을 모을 수 있다. 우리 주위에 아프리카 원숭이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세상 것을 버릴 수 없기에 자기의 생명을 잃는 것이다. 그것이 필경 사망의 길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사람이 보기엔 필경 바른 길 같은 데 말이다. 




듣는 것, 보는 것, 먹는 것의 절제


아무리 자기를 즐겁게 하는 소리일지라도 그 소리를 듣고 귀가 멀게 된다면, 그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 물욕에 빠지는 것은 귀만 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해치니, 더더욱 삼가야 한다.
아무리 자기를 즐겁게 하는 볼거리일지라도 그것을 보아 눈이 멀게 된다면 보아서는 안 된다. 물욕에 빠지는 것은 눈만 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해치니, 더더욱 삼가야 한다.
아무리 자기 입에 맞는 맛있는 음식이라도 그것을 먹어 벙어리가 된다면, 먹어서는 안 된다. 물욕에 빠지는 것은 단지 벙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해치는 것이니 더더욱 삼가야 한다.
-여씨춘추-




소유의 포기


어느 형제가 세속을 버리면서 자기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나 그 재산의 얼마간을 남겨두고 안또니오 교부를 찾아갔다. 원로는 그 사실을 알고 그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수도자가 되고 싶다면 마을로 가서 고기를 사게”
그리고 옷을 벗고 맨살에다 그 고기를 바른 후 다시 오게 했다. 그는 그렇게 했는데, 개와 새들이 그의 몸을 발기발기 찢어 놓았다. 안또니오 교부에게 돌아오니 교부는 그에게 명대로 했는가고 물었으므로, 그는 상처투성이인 자기 몸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안또니오 성인은 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세속을 버리면서도 돈을 갖고 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악마들이 그를 공격해 올 때, 그처럼 발기발기 찢기고 만다네.”




자기에게 없는 것만 보고


한 발 달린 괴물 기(夔)는 백 개나 발이 있는 노래기를 부러워하고 노래기는 발이 없는 뱀을 부러워한다. 발이 없이도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뱀은 바람을 무서워한다. 뱀은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갈 수가 없으나 바람은 움직이지 않아도 스스로 멀리 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바람은 또한 눈(目)을 부러워한다. 눈은 가만히 있어도 멀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눈은 또 마음을 부러워한다. 마음은 보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이란 모두 자기에게 없는 것을 보고는 그것을 훌륭하다가 여기기 쉽다.














세 가지를 경계하라


한나라 때의 사람인 양병은 자를 숙절이라 하고, 양진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환제 때 국방을 담당하는 태위 벼슬에 임명되었다.
조정의 정치가 잘못될 때마다 성의를 다해서 간언 했는데, 환제가 대개는 받아들였다. 양병은 원래 술을 마시지 않았다. 또 젊었을 때 아내가 죽었으나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장가들지 않았다. 어디를 가도 인정이 많고 결백한 사람으로 칭찬 받았다.
어느 날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경계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바로 술과 여자와 재물이다.




세 가지 유혹을 거절한 빌리 그레함 목사


미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이 일생 동안 이기기 어려운 세 가지 유혹을 받았다고 한다.
첫 번째는 상원의원에 출마하라는 공화당의 제안을 받았을 때였고,
두 번째는 공화당의 부통령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였고,
세 번째는 플로리다 주에 있는 세계적인 갑부가 수백 억 달러를  낼 테니 가장 이상적인 세계 제일의 기독교 대학을 세워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나는 전도자”라는 이유를 내세워 세 가지 유혹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만일 그때 빌리 그래함이 세 가지 중 하나의 제안을 받아 들였더라면 하나님은 그를 전도자의 명부에서 삭제하셨을 것이다.




경기에서 승리하는 비결


운동회 구경을 갔었다. 아이들은 응원을 하며 여러 가지 운동을 하고 있었다.
장애물 경주를 하는 아이들을 보았다. 신호가 떨어지자 8명의 아이들이 일제히 달려나갔다. 밀가루 속에 들어 있는 엿을 찾아 먹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한 아이가 뒤로 처졌다.
다음에는 고깔을 쓰고 사다리를 기어 나가는데 고깔이 눈을 가리는 바람에 여기에서 또 한 아이가 뒤로 처졌다.
그 다음에는 그물 속을 헤쳐 나가는 것인데 손발이 그물에 걸리는 바람에 두 아이가 뒤로 처지고 말았다. 마지막에는 각자 자기 마음에 드는 것 한 가지씩을 찾아서 골인 지점을 향해 달리는 것이었다.
한 아이는 계급장이 붙은 모자를, 또 한 아이는 몽둥이를, 또 다른 아이는 돈지갑을 쥐고 뛰었다.
그런데 이 모든 어린이들을 제치고 힘차게 골인하는 아이가 있었다. 저보다 큰 사람의 손을 잡고 달리는 아이였다.
장애물 경기는 인생의 축소판-
이 유혹, 저 장애를 헤쳐 나가야 하는 삶.
어떤 이는 감투를 쓰고, 어떤이는 무기를 들고, 어떤 이는 재물을 쥐고 달려가지만 골인에는 사람을(구원자를) 얻어 가는 것이 무엇보다 멋진 승리가 아니겠는가?




백화점에 없는 것들


대부분의 백화점 매장에는 창문이 없다. 쇼핑을 할 때에는 바깥 세상과 차단을 시켜 오직 물건을 사는 것에만 신경을 쓰게 만들려는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설계이다. 만일 밖에 비나 눈이 오는 것을 보게 되면 자녀들 귀가 걱정, 집 베란다에 걸어 둔 빨래 생각 등이 쇼핑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밝은 햇살이 들어오면 상대적으로 상품이 초라해 보인다는 것도 창문이 없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또 하나 특징은 백화점의 1층 매장에는 화장실도 없다.
서울 강남에 사는 주부 전모씨(33)는 며칠 전 백화점에 갔다가 ‘새로운 발견’을 했다. 전씨는 1층 잡화 매장에서 화장실을 찾아 다녔으나 1층 어디에도 화장실은 없었다. 점원에게 물어 보니 2층이나 지하층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상하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1층에 화장실이 없지.” 전씨는 나중에 다른 백화점 1층에도 하나같이 화장실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씨는 백화점 직원으로부터 이유를 듣고서야 궁금증이 풀렸다. 고객을 유인하는 백화점의 마케팅 기법이라는 것이다. 행인 한 명이라도 백화점은 고객으로 흡수하려고 한다. 1층엔 화장실을 안 만들어 최소한 한 개 층이라도 더 둘러보게 한다. 일종의 견물생심(見物生心)의 전략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노인 십계명(1)


아직도 인생에 대한 정설은 없다. 그러니 훌륭한 노인상도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1. 늙는데 저항하지 않고 순응한다...
노인에게는 평화로운 표정이 가장 제격이다. 생로병사는 인생의 철칙이요, 불로장생은 허망한 꿈이라는 달관만이 평화를 선물한다.
2. 호기심과 관심을 버리지 않는다...
“그건 알아서 무얼 해”가 늙었다는 징조이다. 세상사를 알려는 노력이 화제와 교류를 낳는다.
3. 지나치게 바라지 않는다...
물품 제공과 노력 봉사를 받는 것은 노인의 당연한 특권이 아니다. 반대로 남을 위한 봉사가 젊음에 정비례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4. 신변을 청결하게 가꾼다...
늙은이는 더럽고 냄새가 난다는 말이 있다. 몸을 항상 깨끗이 하고 치장에 신경을 써야 소외를 면할 수가 있다.
5. 가족간에도 매너가 있어야 한다...
정상 자리에 있다고 언동을 함부로 하면 미움을 산다. 칭찬과 위로의 말은 가족간에도 윤활유 역할을 한다.
6. 감사의 표시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고맙다는 인사를 노인의 유일한 무기로 알고 사소한 도움에도 감사 표시를 아끼지 않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7.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노인이 겪었다는 영광과 불행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흥미가 없다. 노인의 현재 위상은 과거를 실증하고 있으므로 이야기의 씨가 먹히지 않는다.
8. 혼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
특정한 취미가 있으면 화초를 가꾸거나 바둑 묘수 풀이라도 해야 한다.
9. 행동 범위를 넓히도록 한다...
모시러 올리는 만무하니 이쪽에서 나서야 한다. 참여와 활동이 삶의 보람을 준다.
10. 몸이 굳지 않을 만큼 움직여야 한다...
거동이 불편하면 소외를 당한다. 불용퇴화의 원칙을 명심하여 몸을 항상 놀려야 한다.




노인 십계명(2)


1. 은퇴하지 말지니 죽는 날까지 일할 수 있으면 그 이상의 행복은 없느니라.
2. 쌓아두지 말지니 잘 버려야 홀가분해지느니라.
3.대접받는 것을 기뻐하지 말지니 인간의 긍지는 일대일(1:1)의 관계에 있느니라.
4. 늙어 보이지 않도록 꾸미지 말지니 자연스러움이 가장 아름다우니라.
5. 중얼거리지 말지니 아무에게도 보탬이 안 되느니라.
6. 괴로움을 되새기지 말지니 즐거웠던 추억을 정리할지니라.
7. 젊음을 시기하지 말지니 백발은 노인의 영광이니라.
8.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지니 내 생활을 되도록 많이 가질지니라.
9. 무덤 걱정을 하지 말지니 그대는 아직 살아 있느니라.
10. 보이는 것은 그 정도로 단념할지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눈을 돌릴지니라.




이스라엘의 南北 분열은 老年의 지혜를 무시한 結果


솔로몬이 죽자 그 아들 르호보암이 王位에 올랐다(왕상 11:43).
이때 이스라엘의 회중이 르호보암에게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왕상 12:4)라고 요청했다. 르호보암은 삼일 후에 다시 오면 대답을 하겠다고 約束을 하고, 솔로몬 생전에 國家 行政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老人(長老)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 노인들이야말로 솔로몬의 성공과 실패를 몸소 체험하였던 國家의 元老들로서 統治의 묘와 치리에 익숙한 노련함을 갖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이같이 율법의 정신으로 뒷받침된 장로들의 진언을 저버리고 자신과 같이 자라난 동년배들인 소년들의 의견을 따랐다. 이 소년들은 경험이 불충분하고 사려가 깊지 못한 부정적인 면이 강조되는 젊은이들로서 권력과 힘을 추종하며 책임의 면을 고려하지 않은 “힘 지향적” 인물들이었다. 삼 일 후에 온 백성들에게 르호보암은 ①멍에를 더욱 무겁게 하며 ②전갈로 징치하겠다 라고 대답함으로 장로들의 고견을 버리고 모리배들의 아첨에 가까운 진언을 채택하여 강압책을 쓴 끝에 북부 백성들의 반발을 사 나라를 분열지경에 몰아넣고 말았다.




노년의 지혜


설화에 노인을 내다 버리는 기로국(棄老國) 이야기가 나온다. 그 기로국 임금이 이웃 나라 임금과 왕관을 걸고 몇 가지 알아내기를 했다. 양쪽 두께가 똑같은 박달나무 토막을 두고 어느 쪽이 뿌리이고 어느 쪽인 가지인가? 크기가 똑같은 말 두 마리가 풀을 뜯고 있는데 어느 쪽이 어미고 어느 쪽이 새끼인가? 를 알아내기였다. 어전 회의를 열고, 이 어려운 문제를 숙의 했으나 알 길이 없었다. 헌데 한 대신이 하룻밤 자고 나더니 임금 앞에 나아가 박달나무를 물에 띄우면 뿌리 쪽이 무겁기에 아래로 가라앉는다고 하고, 풀을 먹지 않고 밀어 주는 쪽이 어미말 이라고 했다. 그 지혜를 얻게 된 연유는 이렇다. 이 대신은 늙으면 들판에 갖다 버리게 돼 있는 아버지를 버리지 않고 토굴 속에 숨겨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토굴로 찾아가 노부에게 물어 국난(國難)을 타개하곤 했던 것이다. 그 뒤부터 기로(棄老)하는 법을 없애고 노인을 섬기는 기로(耆老)하는 국풍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팔도에서 병사를 모군하여 왕을 수호하고자 한양을 향해 싸우면서 올라왔다. 오합지졸이요, 무기도 훈련도 사기도 없는 터라 도중에 모조리 패주했는데 유일하게 연전연승하여 한양까지 올라와서 행주산성 대첩을 한 부대가 있었으니 곧 권율 장군이 이끈 부대였다. 전승할 수 있는 요인이 여럿 있으나 그 중 하나로 전라군에는 등에 업혀 다닐 만큼 노쇠한 지휘관이 많았다는 것을 든다. 비록 업혀 다니긴 하지만 지혜나 판단력은 뛰어났기에 그 지혜를 전승으로 접합한 것이다.
로마 멸망 3대 이유 가운데 하나가 ‘늙은이들은 다리 밑으로 떼밀라’는 구호가 공공연하게 나돌았을 만큼 체험과 지혜의 축적자인 노인을 박대하고 거부했으며 소외시켰다는 것을 든다. 진(秦)나라 멸망에 대해서도 목공은 같은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젊은 전사들보다 기운은 없지만 경험 많은 노인들 말을 듣지 않았기에 이같은 국망의 죄를 짓고 말았다’했다.














효도를 흉내내는 것은 좋으니라


옛날에 임금님이 시골로 행차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가까이에서 임금님을 한 번 보고 싶어했다. 지금처럼 사진도 많고, 텔레비젼도 많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옛날에는 실제로 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가까이에서든 먼데서든, 모두들 임금님이 행차하실 길가로 모여들었다. 한편, 멀리서 이 소식을 들은 한 할머니가 있었다. 자리에 누워 거동이 불편한지라, 이 노인이 아들에게 부탁했다. “얘야, 나 말이다 임금님 얼굴 한 번 뵈었으면 좋겠구나.” “예, 그렇게 하시지요.” 효자 아들은 아무 망설임 없이 대답하고는 어머니를 업고 70리 길을 걸어서 임금님 행차하시는 길까지  왔다. 제 어머니를 아기 업듯이 단단히 받쳐 업고서, 어떻게든 어머니가 임금님 얼굴을 가까이 볼 수 있도록 애썼다. 임금님이 지나가다가 이 모자(母子)의 모습을 보았다. “멈춰라!” 그리고 아들에게 물어 보았다. “어떻게 된 사연이냐?” “어머니가 임금님을 뵙고 싶다 하셔서 제가 모셔 왔습니다.” “참으로 효자로고,” 임금님은 그 자리에서 효자 아들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다른 마을의 아주 못돼먹기로 소문난 불효자는 배가 아팠다. 그래서 안가겠다는 제 어머니를 강제로 업고, 임금님이 행차하실 길목에 가서 떡하니 서 있었다. 역시나 임금님이 이 모습을 보고 흐뭇해했다. “이 근방에는 효자도 많구나. 기특한 일이로고, 너는 무슨 사연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왔느냐?” 불효자는 효자의 말을 그대로 흉내내어 아뢰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네 사람들이 “아닙니다, 임금님. 저놈은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라고 일러바쳤다. 이 말을 들은 임금님은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 “흉내라도 좋아. 효도를 흉내내는 것은 좋으니라.” 그리고 불효자에게도 상을 후하게 주었다.  




효자가 효자 아들을 둔다


가난하지만 아주 효심이 두터운 내의가 있었다. 마침 여름철이어서 모두 들에 일을 하러 나가고 늙은 할머니 혼자 집을 보게 되었다. 혼자 집을 보던 할머니는 심심하기도 하고, 무슨 일이든 거들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호박 구덩이에 거름을 주기로 했다. 그런데 눈이 어두운 터라 마루 구석에 있는 요강을 들고 간다는 것이 그만 막 짜다 놓은 참기름 단지를 들어다가 호박 구덩이에 붓고 말았다.
밖에 놀러 나갔던 손녀가 돌아와 이 광경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바로 할머니께 말씀드리면 놀라실 것 같아 모른 체하기로 했다가 조금 후 돌아온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어머니, 할머니께서 참기름을 오줌인 줄 아시고 호박 구덩이에 부으셨어요.”
“뭐야? 그래 할머니께서도 아시니?”
“아니예요. 말씀드리면 놀라실 것 같아서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어요.”
“오냐, 참 잘했다. 할머니께서 아시면 얼마나 놀라시겠니?”
며느리는 딸의 행동이 기특해서 등에 업어 뜰을 돌며 칭찬을 했다. 조금 후 들어오던 아들이 그 광경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아니, 여보! 다 큰 아이를 업고 웬 수선이요?”
“글쎄, 이 아이가 기특해서 죽겠구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다 들려주었다.
“어머니께서 거름을 주시느라 힘이 드셨을 것 같아 지금 찰밥을 찌는 중이니, 당신도 모른 체 하셔야 해요!”
이 말을 들은 남편은 갑자기 땅에 엎드려 아내에게 절을 올렸다.
“여보, 내 절 받으시오. 내 어머님을 그처럼 받드니 어찌 내가 절을 하지 않을 수 있겠소.” 




효자는 하늘이 도와준다


옛날에는 집에서 효도하는 사람이 나라에도 충성하는 것이라 하여 효자를 벼슬에 뽑아 쓰는 제도가 있었다.
조선 성종(成宗) 때, 한 번은 큰 가뭄이 들었다. 나라에서는 전국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하고, 금주령을 내렸다. 어느 날 임금님이 농민들과 고통을 함께 하기 위한 뜻에서 뜨거운 뙤약볕에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풍악을 울리며 잔치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감찰(監察) 벼슬에 있는 김세우의 집이라는 보고였다. 화가 치민 성종은 즉시 김세우를 붙잡아 오도록 명했다.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아 나도 수라상의 반찬 숫자를 줄이고 음악을 삼가고 있는데, 나라의 녹봉을 먹고사는 자가 그럴 수 있단 말이냐?”
김세우는 물론 잔치에 참여했던 사람들까지 모두 붙잡혀 와 갇혔다. 가족들은 생각 끝에 아들들 이름으로 한 번만 용서해 달라는 상소문을 써서 올렸다. 성종은 더욱 화가 났다.
“제놈들이 국법을 어기고 이제 어린 자식들을 시켜 용서를 빈단 말이냐?”
아이들까지 잡아들이라는 어명이 떨어지자 모두 도망하고, 감찰 김세우의 어린 아들 김규(金虯)만이 붙잡혀 왔다.
“너는 왜 도망하지 않고 잡혀 왔느냐?”
임금의 물음에 김규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비를 구하려고 글을 올렸는데 어찌 죄를 입을까 걱정하여 도망하겠습니까?”
“이 상소문을 누가 썼느냐?”
“제가 썼습니다.”
“글씨는 누가 썼느냐?”
“역시 제가 썼습니다.”
“몇 살이냐?”
“열 세 살입니다.”
성종은 차츰 화가 가라앉고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네가 ‘가뭄이 안타깝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을 수 있겠느냐? 내 마음에 들면 네 아비를 석방하겠다.”
“아버지를 위하는 일이라면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김규는 단숨에 글을 지었다.
‘옛날 동해에 원한을 품은 여자가 하늘에 호소하자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고, 은 나라 탕임금은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여 비를 빌었더니 비가 내렸습니다. 원하옵건대 임금께서도 이를 본받으소서.’
성종은 그 글을 다 읽고 나서 이렇게 명령했다.
“네 글을 보고 네 아비를 석방하고, 네 글씨를 보고 네 아비의 동료를 석방한다. 너는 아비에 대한 그 효심으로 나라에 충성하라.”




지극한 효성이 ‘도우미 의자’ 탄생


할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 한 여중생으로 하여금 발명왕 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케 했다.
특허청과 한국발명진흥회가 개최한 ‘98대한민국학생발명전시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전북 익산 삼기중학교 2학년 최보아양(15)이 주인공.
최양은 초등학교 6학년 때 할머니 손은철씨(67)가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져 군산에 사는 부모님 대신에 할머니를 돌봐야 했다. 이 일은 어린 최양에게는 무척 벅찬 일이었다.
특히 목욕과 대소변을 받아 내는 일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대소변을 쉽게 받고 이동하기 쉬운 장애인용 의자를 찾아 가구점을 헤맸으나 마땅한 제품이 없어 최양은 지난해 여름부터 직접 의자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설계도를 그리고 자료를 구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플라스틱을 자르고 홈을 파고 본드를 붙이는 일은 어린 여중생이 하기엔 버거운 작업이었다. 몇 번을 포기하려고 했지만 최양은 할머니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최양이 만든 ‘도우미 의자’는 미용실 의자처럼 눕히면 침대가 되고 세우면 의자가 된다. 의자 밑에는 바퀴가 달려 있어 환자를 목욕시키거나 이동시키기에 용이하다.
또 의자의 좌석 받침에 구멍을 뚫고 그 아래에 휴대용 변기를 설치해 환자가 의자에 앉은 채 용변을 볼 수 있게 했다. 최양이 어려운 과정을 극복하고 의자를 완성한 데는 담임인 황명화 교사(43)의 격려도 한몫 했다.
지난 94년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 마비로 고생한 경험이 있는 황 교사는 최양의 아이디어를 듣고 자료 조사와 재료 구입 등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최양이 발명한 ‘도우미 의자’는 아직은 모형 단계. 그러나 실용화하는 데 별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최양은 “힘이 약한 어린이나 노인들이 이 의자로 쉽게 환자를 간호할 수 있게 됐으면 좋겠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최양의 할머니 손씨는 지난 6월15일 서울로 올라와 손녀가 국무총리상을 받는 모습을 보고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하늘도 감동한 효성


도씨(都氏)는 집안이 빈한하였으나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숯을 팔아 고기를 사서 어머니의 반찬을 거르는 일이 없었다. 하루는 저자에서 늦게야 바삐 돌아오는데 매가 갑자기 고기를 낚아채 가므로 도씨가 슬피 울면서 집안에 이르렀더니, 매가 이미 그 고기를 뜰에 던져 놓고 갔었다. 하루는 병든 어머니가 철 아닌 홍시(紅柿)를 찾거늘 도씨가 감나무 숲을 방황하다가 모르는 사이에 날이 저물었는데 호랑이가 여러 번 앞길을 막고는 타라는 뜻을 보이는 것이었다. 도씨가 타고서 1백여 리 되는 산골 마을에 이르러 인가(人家)를 찾아가 자는데 조금 후 주인이 제삿밥을 대접하는데 보니 홍시가 있었다. 도씨가 기뻐서 홍시의 내력(來歷)을 묻고 또 자기의 사정을 설명하니 주인이 답하기를,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감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매년 가을이면 감 2백 개를 골라서 굴속에 감추어 두지만 이 5월에 이르면 온전한 것은 일곱, 여덟 개에 불과하였습니다. 금년에는 50개가 온전하기에 마음으로 이상하게 여겼더니, 이는 하늘이 그대의 효성에 감동한 것입니다.”
하고는 20개를 주었다. 도씨가 사례(謝禮)하고 문 밖으로 나왔더니, 호랑이가 그때까지 웅크리고 기다리고 있어 타고 돌아오니 새벽닭이 울었다. 후에 어머니가 천명(天命)을 누리고 돌아가니, 도씨는 피눈물을 흘렸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어느 며느리가 어찌나 시아버지에게 잘 하는지 그는 집에서 생선국이나 고깃국을 끓이면 고기는 시아버지에게 다 드리고 자기는 국물만 먹었다. 시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으나 듣지 않고 언제나 그렇게 하니까 한 번은 시아버지가 기도하면서 국그릇을 살짝 바꾸어 놓고 기도했다. 그것을 알게 된 며느리는 다음에 시아버지 국그릇에는 국물만 넣고 자기 국그릇에는 고기만 넣었다. 시아버지는 그것도 모르고 기도하면서 며느리의 국그릇과 바꾸어 놓았는데, 가만히 보니 고기만 있더란다.




금화를 거절한 효자


어느 사람이 고대 이스라엘의 두마라는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는 다이아몬드 하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금화 6,000개에 해당하는 값진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전(殿)을 장식하는데 사용하려고 금화 6,000개를 가지고 그 집에 찾아갔다. 그때에 그 다이아몬드의 주인은 그것을 넣어 둔 금고의 열쇠를 베개 밑에 넣고 잠을 자고 있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를 깨우기가 어려우니 금화를 거절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아들은 이토록 효성이 극진했다. 




늙은이 살 사람 없소


어느 날 신문에 이상한 광고가 실렸다. 늙은이를 판다는 광고였다. 이 광고를 보고 새벽같이 찾아온 젊은이가 있었다. 광고를 낸 노인은 기쁜 마음으로 그 젊은이를 방으로 안내하였다.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집이었다. 자리를 정한 다음 노인은 곧 용건을 물었다.
“늙은이를 파신다고 하니 도대체 누구십니까?”
“바로 나요. 그래, 무슨 동기에서 이런 늙은이를 산다는 거요?”
“사실대로 말씀을 드리지요. 제 아내도 어려서 부모를 잃고, 저도 아주 어려서 양친을 잃어서 항상 부모를 모시는 일이 그리웠던 차에 신문 광고를 보고 달려 왔습니다.
“그러면 나를 사겠소? 그렇다면 돈을 내시오.”
젊은이는 서슴치 않고 돈을 내 놓았다. 거래를 끝낸 노인은 떠나는데 며칠이 걸리니 집안 정리를 위하여 여유를 달라고 요청했다. 젊은이는 노인의 거동에 흥미를 가지고 그가 하자는 대로 며칠을 이 집에서 지냈다. 가족은 없고 일하는 머슴과 종들뿐이었으며, 집도 노인의 집이란 것을 알 수 있었고 그밖에 많은 재산이 있는 것도 짐작되었다. 그런데 그가 남의 아버지로 팔려 가겠다는 마음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내가 자네에게 팔렸으니 의당 자네를 따라가야겠지만 이 집으로 자네 식구를 데려다가 사는 것이 어떻겠소?”
“팔렸으면 저를 따라가야 합지요.” 젊은이도 버티었다.
“어디 자네가 나를 먹여 살릴 만한 재산이 있겠는가? 이 집은 물론 그밖에도 넉넉한 재산이 있으니 모두 자네 것이 될 수 있잖은가?”
“그만한 재산을 가졌으면서 왜 스무냥에 팔리려 했습니까?”
“내 집에 양자로 오려는 놈이 한 둘이 아니지. 그러나 그 놈들은 다 이 재산이 탐나서 오려는 것이지만 자네만은 재산이 탐나서가 아니라 자네 힘으로 부모를 공경하려는 사람이니 진정 내 아들은 자네일세, 자네야! 뿐만 아니라 이 재산도 자네 것이란 말일세. 자네 효성이 복을 부른 것일세. 지금부터 이 집안 처리를 다 맡기고 나도 좀 편안히 지내고 싶네. 효성 있는 아들은 애비 말에 순종해야 할 것일세.” 




노인과 청소년


UN이 정한 기준에 의하면 65세 이상의 노인이 전체 인구에서 7%이상을 차지하면 노령화 사회라고 한다. 우리 나라도 최근의 보사부 통계에 따르면 현재 65세 이상의 노인이 6%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2000년에는 6.8%가 될 것이며, 평균수명은 1990년 71.3세에서 2000년에는 74.3세로 급속히 늘어날 전망이라고 한다. 고령화의 속도가 미국의 3배가 넘고, 프랑스보다 6배가 빠른 셈이다.
노인들이 겪는 네 가지 고통은 첫째 소득 상실이나 수입의 감소로 인한 경제적 빈곤, 둘째 신체적 정신적 노화로 인한 건강의 악화, 셋째 사회적 심리적 고립이나 소외감, 넷째 가정과 사회에서의 역할 상실이다.
노인복지정책이 앞으로 확대되고 개선된다면 첫째 둘째 셋째의 세 가지 고통은 점진적으로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나 네 번째 노인들의 사회적 역할 상실은 쉽게 해소되지 않을 문제다. 그 원인이 노인들 자신에게 있으며 노인들끼리 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노인들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유대를 강화하고 다양한 사회 관계에 참여함으로써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우리 사회 청소년 범죄의 증가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흔히 범죄소년과 축범소년, 우범소년을 총칭하여 비행소년이라고 하는데 이중 우범소년을 제외한 12세 이상의 20세 미만의 범죄소년과 축범소년을 공식적 통계의 대상으로 삼는다. 소년범죄, 그 중에도 특히 소년형 법범은 무려 전체 범죄의 20%이상을 육박하고 있으며 소년 범죄자 수는 소년 인구 1만명당 1백15명에 달하고 있다.
청소년 범죄의 원인에 대해서 범죄자들이 여러 가지 원인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 청소년이 관습적인 사회에 유대를 갖지 못하고 관습적인 신념을 갖지 못하는데서 청소년 범죄가 비롯된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영국의 데블린 판사는 사회란 관념의 공동체라고 한다. 정치 도덕 윤리 등에 대한 공통된 관념 없이 사회는 존재할 수가 없으며 공통된 도덕은 사회를 결속시키는 시멘트와 같은 것이다. 사회의 존속을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도덕적 요청을 만족시켜야 한다.
노인들의 중요한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전통과 도덕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노인들이 아니고서는 어렵다. 왜냐하면 노인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손자 버릇 나쁘게 하는 할머니, 대접받기만 요구하는 할아버지들이 아니라 좋은 전통과 도덕의 수호자로서 긍지와 책임 의식을 가지고 청소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면 노인 문제도 해결되고 청소년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 본다 . 




우리 시대의 어버이 상(像)


최근 삼성생명은 이색적인 광고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그 광고란 다름아닌 아버지와 어머니에 관한 것으로서 그 내용은 이렇다.
스물 아홉... 열 네 시간을 기다려서야 자식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신을 믿지 않았지만 당신도 모르게 기도를 올렸습니다.
서른 일곱... 자식이 초등학교에 들어가 우등상을 탔습니다. 당신은 액자를 만들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었습니다. 아직도 당신의 방에는 누렇게 바랜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마흔 셋... 일요일 아침, 모처럼 자식과 뒷산 약수터로 올라갔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자식이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당신은 괜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마흔 여덟... 자식이 대학 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당신은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했지만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쉰 셋... 자식이 첫 월급을 타서 내의를 사 왔습니다.  당신은 쓸데없이 돈을 쓴다고 나무랐지만 밤이 늦도록 그 내의를 입어 보고 또 입어 봤습니다.
예순 하나... 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도둑 같은 사위 얼굴을 쳐다보며 함박 웃음을 피웠습니다. 당신은 나이 들고서 처음으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오직 하나 자식 잘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한평생.
하지만 이제는 희끗희끗한 머리로 남으신 당신...
우리는 당신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광고를 보고 울었다고 한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상을 숨김없이 표현한 글이라 그만큼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잔잔한 미소를 띤 아버지가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의 초상처럼 그려지기도 하는가 보다. 이 광고 문안과 함께 실린 사진의 주인공들도 평범한 가장과 가정주부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머니의 광고는 이렇다.


스물 하나... 당신은 고개를 두 개 넘어 얼굴도 본 적이 없는 김씨 댁의 큰아들에게 시집을 왔습니다.
스물 여섯... 시집온 지 오 년 만에 자식을 낳았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시댁 어른들한테 며느리 대접을 받았습니다.
서른 둘...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당신은 자식이 학교에서 돌아올 무렵이면 자식의 외투를 입고 동구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식에게 당신의 체온으로 덥혀진 외투를 입혀 주었습니다.
쉰 둘... 자식이 결혼할 여자라고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당신은, 분칠한 얼굴이 싫었지만 자식이 좋다니까 당신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예순... 환갑이라고 자식이 모처럼 돈을 보냈습니다. 당신은 그 돈으로 자식의 보약을 지었습니다.
예순 다섯... 자식 내외가 바쁘다며 명절에 고향에 못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동네 사람들에게 아들이 바빠서 아침 일찍 올라갔다며 당신 평생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오직 하나 자식 잘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한평생.




링컨의 아버지 상(像)


링컨의 아버지 토마스 링컨은 1637년 영국에서 이민 온 직공의 후예로 토마스 역시 신발 만드는 일을 하였다. 링컨이 대통령에 선출되었을 때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상원의원들은 매우 충격을 받았다. 대부분 높은 학력에 명문 귀족 집안 출신이었던 상원의원들은 신발 제조공 집안 출신에다 제대로 학교도 다니지 못한 링컨 밑에서 일해야 한다는 것이 여간 불쾌하지 않았던 것이다. 링컨이 대통령에 선출되어 많은 상원의원들 앞에서 취임 연설을 하게 되었다. 링컨이 단 앞에 막 입을 열려 할 때 거만해 보이는 한 상원의원이 일어나 링컨을 향해 말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다니 정말 놀랍소. 그러나 당신의 아버지가 신발 제조공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가끔 당신의 아버지가 우리 집에 신발을 만들기 위해 찾아오곤 했소. 이 신발도 바로 당신 아버지가 만든 것이오.”
그런 후 그는 자기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킥킥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링컨은 조용히 서 있었다. 키가 훤칠한 링컨의 몸집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엔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것은 부끄러움의 눈물이 아니었다. 링컨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의원님 때문에 한동안 잊고 있던 내 아버지의 얼굴이 기억났습니다. 내 아버지는 신발 제조공으로 완벽한 솜씨를 가진 분이셨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능가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위대함을 따라잡으려 노력할 뿐이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많은 귀족들의 신발을 만드셨습니다. 여기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 중엔 내 아버지가 만드신 신발을 신으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만약 신발이 불편하다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기술을 옆에서 보고 배웠기에 조금은 손봐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물론 제 솜씨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만은...”
훗날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런 고백을 받을 수 있다면 결코 우리의 생애가 헛되지 않았노라고 떳떳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됨이 부끄럽지 않고 어머니 됨이 부끄럽지 않는 삶, 그것이야말로 생애 최고의 목표인지 모른다.




어머니의 사진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했을 때의 일이다. 마닐라 해안을 향해 함포 사격을 하려 할 때, 한 해병의 옷이 물에 떨어졌다. 상사가 말렸지만 그 해병은 물에 뛰어들어 자기의 옷을 건졌다. 결국 명령 불복종 죄로 군법회의의 법정에 서게 되었다. 사법관 듀이 장군이 왜 불에 뛰어들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 젖은 옷 속에서 어머니의 사진을 꺼내어 보였다. 장군은 감동하여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어머니의 사진 때문에 이처럼 희생 정신을 발휘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자기의 목숨까지 걸고 건져냈던 빛 바랜 어머니의 사진 한 장. 그의 무죄 석방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베드로 장로님


해변가에 있던 ‘발산교회’라는 팻말이 붙은 작은 교회와 베드로장로님 이야기는 마치 동화 같았다.
베드로 장로님은 이 지방의 어부였다. 밤새 고기를 잡고 새벽녘에 돌아올 때면 항상 집으로 가기 전에 마을을 돌며 집집마다 굴뚝을 살폈다. 어려운 시절을 살아본 분들은 아침에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것이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한 풍경인지 알 것이다.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은 먹을 양식이 떨어진 가난한 집이다.  베드로 장로님은 만약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이 있으면 찾아가서 밤새 잡은 고기를 주고 오시곤 했다. 고기를 조금밖에 잡지 못한 날은 집에 빈손으로 돌아갈 때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방 사람들 모두가 이 장로님을 베드로 장로라 불렀다고 한다. 참으로 부유하지도 않고 빛나는 자리에 있었던 사람도 아니었지만, 베드로 장로님은 그 삶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자의 모습을 보여 준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실제 그분을 만나면 해풍에 쩔은 얼굴에 생선 비린내가 배인 팍팍한 늙은이의 모습이겠지만, 나는 그분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따스한 빛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향기는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은의(恩義)


은혜와 의(義)를 널리 그리고 많이 베풀면 언제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서 그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될지 모른다. 반면 한 번 맺은 원한은 언젠가 반드시 보복을 당하게 된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조선 선조(宣祖) 대 홍순언(洪純彦)이란 중국어를 잘하는 통역관이 있었다.
사신 일행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을 때 일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먹으려고 주막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어느 술집 앞을 지나려니 이상한 글이 문에 씌어 있었다.
‘하룻밤 술값이 일천냥임.’
호기심이 일어 그 집으로 들어가 까닭을 물었더니, 눈물겨운 사정이 있었다. 그 집에서 술을 따르는 아가씨의 아버지 장례를 모시기 위해서 일천냥이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저의 아버님은 꽤 알려진 분이예요. 그런 아버님이 얼마 전 남의 모함을 받아서 그만 처형을 당하셨어요. 그런데 시신(屍身)을 고향으로 모실 비용이 없어서...”
홍순언은 그 아가씨의 사정이 너무 딱하여 차고 있던 돈 전대를 풀어주고 그 집을 나왔다. 아가씨가 뒤쫓아 나와 성함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애원을 해 조선에서 온 통역관이라고만 일러주었다.
귀국하여 공금을 축낸 죄로 홍순언은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또 얼마의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홍순언은 명(明)나라의 응원군을 청하러 가는 사신 일행을 따라 다시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 사신 일행이 북경 근처에 이르렀을 때였다. 성안에서 어떤 사람이 달려오더니 물었다.
“조선 사신 일행 가운데 통역관이 계시거든 저를 따라 오십시오.”
홍순언은 영문을 모른 채 그 사람을 따라갔다. 어느 으리으리한 집 대문으로 들어서니, 한 귀부인이 방으로 안내해 들어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저를 몰라보시겠습니까? 십여 년 전 한 주막집에서 생긴 일을 잊으셨는지요?”
홍순언도 그제서야 문득 그 일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때 그 소저께서?”
“예, 그렇사옵니다. 저는 그때 대인께서 주신 돈으로 아버님을 고향 땅에 장사하였고, 그 후 아버님의 죄도 모함임이 밝혀졌사옵니다. 지금은 석상서(石尙書)의 아내입지요.”
홍순언은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나라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려운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조선은 왜적의 침입을 받아 온 백성이 무참하게 죽어 가고 있으며, 임금은 서울을 떠나 의주로 피해 계십니다. 이번 저의 임무는 명나라의 응원군을 얻어 우리 조선을 구하는 일입니다. 부디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석상서는 당시 명나라의 병부상서(兵部尙書)인 석숭(石崇)이었다. 자기에게 은혜를 입은 여인이 그 사람의 부인이라니, 이번 일은 잘 풀릴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염려하지 마셔요. 제가 힘은 없으나 대감께서도 항상 홍대인의 의리를 감탄하고 계셨으니, 잘 되리라고 생각되어요.”
이렇게 되어 석숭의 도움으로 명나라에서는 즉시 이여송(李如松) 등 많은 장수와 군사를 보내 우리 나라를 구원하게 되었다.
홍순언은 북경을 떠나는 날, 그 부인은 손수 수놓아 짠 비단 몇 상자를 실려 보내 왔는데, 거기에는 한 필 한 필마다 ‘보은(報恩)’이라는 무늬가 수 놓여 있었다.
홍순언은 명나라와의 외교(外交)를 잘한 공로로 통역관의 신분으로는 될 수 없는 광국공신(光國功臣)이 되고 당릉부원군(唐綾府院君)에 봉해졌으니, 당릉이란 중국의 비단이란 뜻이다.




선행에는 하늘의 보답이 있다


조선 영조(英祖)때 좌의정을 지낸 이사관(李思觀)은 남 돕기를 좋아하였다. 그가 충청도에서 고을살이를 하고 있을 때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순행을 하다가 주막에 들어가 잠시 쉬고 있는데 어떤 허술한 시골 선비 한 사람이 가족을 이끌고 들어서는데 보니, 등에 업힌 여자아이가 추위에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관하(管下)의 백성인 듯싶어 말을 건넸더니, 서산(瑞山)에 사는 김한구(金漢耈)로 살기가 어려워 서울 친척을 찾아가는 길이라 했다. 이사관은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자기가 걸치고 있던 수달피 갖옷을 벗어 그 아이를 덮어 주고 나섰다.
이런 일이 있은 뒤 12년이 흘렀다. 영조의 비(妃)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하고 계비(鷄肥) 간택에 뽑힌 처녀가 바로 이사관의 도움을 받았던 그 여자아이로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였다. 영조가 하루는 왕비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물었다.
“어렸을 때 집이 몹시 가난하였다고 들었는데,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은 없었던가. 내가 왕비 대신 후한 보답을 내릴까 하오.”
왕비는 평소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사관의 일을 아뢰었다.
“별로 생각나는 사람은 없고, 이사관이란 분이 주막집에서 벗어준 갖옷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 전하를 모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인연으로 이사관은 크게 발탁되고, 몇 년 후에는 정승이 될 수 있었다.
                      


시체의 저고리에서 나온 금덩이


옛날 어느 마을에 온화한 성품의 현씨 노인과 인색하고 악한 내씨 노인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내씨 노인이 자기 밭을 둘러보다가 어떤 시체가 내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로 인해 자신이 손해볼까 싶어 현씨 노인의 밭으로 슬쩍 밀어 넣었다. 얼마 후 밭을 갈던 현씨가 그 시체를 발견하자 그는 이를 불쌍히 여겨 정성스레 장례를 치뤄 주고자 했다. 그가 옷을 갈아 입히려는데 뜻밖에 시체의 저고리에서 금덩이가 나온 것이다. 정직한 현씨는 금덩이를 가지고 원님에게 가져갔다. 그러자 원님은 임자 없는 물건이니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 이 소문을 들은 내씨는 배가 아파 땅을 치며 후회했다고 한다.




선행을 베풀라


“만일 네가 신들을 본받는다면,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도 선행을 베풀라. 해는 악인에게도 떠오르고, 바다는 해적에게도 열려져 있다. 떨어질 비에 법을 정하여 악한 자와 포악한 자의 발에는 내리지 않도록 할 수는 없느니라”
-세네카-
착한 일을 할지라도 아무 보답이 없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 호박과 같이 남 모르게 풀 속에서 점점 자라나는 것이니 언젠가는 보답이 있을 것이다.
반대로, 악한 일을 할지라도 아무 죄과를 받지 않는 것 같으니, 그것은 마치 뜰 앞에 쌓인 봄눈과 같아서, 어느 땐가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변장한 왕을 선대한 농부


어떤 나라에 큰 난리가 났다. 급기야 왕이 그 왕궁을 버리고 시골로 피난을 갔다. 왕은 농부의 옷으로 갈아입고 신하 몇 사람과 함께 어느 마을에 몰래 숨어 들어갔다. 한 농부가 이 낯선 길손들을 잘 영접해 주었다. 변장을 한 왕과 신하들은 며칠 동안 거기서 잘 묵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라 정세가 회복되어 왕은 환궁하게 되었다. 환궁한 왕은 그 농부가 자기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 준 것과,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남을 잘 대접해 준 것이 기특해서 농부를 왕궁으로 불러들였다. 농부는 낯선 길손들이 사실 왕과 신하들이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왕은 농부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었다.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라.” 그러나 농부는 이렇다 할 소원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왕이시여, 이제와서 제가 출세를 원하겠습니까, 영화를 원하겠습니까, 그렇다고 금은 보화를 원하겠습니까? 그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다만 며칠 후 제 생일잔치에나 한 번 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침 환갑인 지라, 자식들이 힘을 모아서 조촐하나마 잔치를 열어 준다는군요.” 왕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드디어 며칠 후, 한 나라의 왕이 시골 초가집에 사는 일개 농부의 환갑잔치에 왔다 그 후로부터 그 집은 귀한 집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집이 되었다. 그일 하나로 인해 농부의 가문은 위대한 가문이 되었다.


무덤에까지 동행하는 친구-선행


어느 날 왕이 어떤 사나이에게 사람을 보내어, 즉시 자기에게로 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그 사나이에게는 세 친구가 있었다. 첫 번째 친구는 그가 몹시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 그 친구를 자기의 제일 다정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두 번째 친구는 역시 사랑하고는 있었지만 첫 번째 친구처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친구는 친구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왕의 명령을 받자 그는 자기가 어떤 악한 짓을 하여 벌을 받는 것이나 아닌가 하여 두려웠기 때문에, 혼자서 왕에게 갈 용기가 나지 않아 세 친구들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했다.
그는 먼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친구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이유도 말하지 않고서 싫다고 거절했다. 두 번째 친구에게 부탁하자, “궁궐 문까지는 함께 가지만 그 이상은 갈 수 없네”하고 말했다. 그러나 세 번째 친구는 의외로 “암, 함께 가주지. 자네는 아무 것도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니까 조금도 두려워 할 것이 없네. 내가 함께 가서 임금님께 그렇게 말씀 드려주지”하고 말했다.
여기에서 왕은 인간을 지으시고 그 영혼을 부르시는 하나님이다.
왕의 부름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왕의 부름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첫 번째 친구란 곧 재산이다. 사람이 아무리 돈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지라도 죽을 때에는 고스란히 남겨 두고 가야만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친구는 곧 친척이다. 무덤까지는 따라가 주지만 그를 거기에 남겨 두고 돌아가 버린다. 세 번째 친구는 선행이다. 착한 행실은 평소에는 별로 눈을 끌지 못하지만, 죽은 뒤에는 영원히 그와 함께 있기 마련이다.
 












나의 재산을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


1888년 인류역사상 최초로 다이나마이트를 만든 사람, 그는 부를 얻고 만인의 관심과 촉망을 한 몸에 받아 일약 당대의 명사가 되었다. 그가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와 같이 잠에서 깨어나 신문을 펴는 순간 “세계 최초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 죽다”란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동생의 죽음을 오보한 기사였으나 그에겐 큰 충격이었다. 자신의 사망 기사 앞에서 노벨은 깊은 침묵과 엄청난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내가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폭탄을 만들어 재물과 명성은 얻었지만, 결국 내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을...” 그는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훗날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쓰기로 결심했고, 그것이 저 유명한 알프레드 노벨의 <노벨상>이 제정된 이유이다.




하나님의 사업에 나의 재물을


설교자 하네스비의 고향에 신앙 좋은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그러나 그는 가족이 없어서 노후를 의탁할 곳이 없었다. 그 할머니는 그녀의 먼 친척을 찾아가 자신을 맡아 달라고 하였지만 아무도 맡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 잘 믿는 성도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자기를 맡아 달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내 비록 나이는 많지만 결코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죽음이 아름답게하여 달라고 주님께 기도 드렸고 주님은 나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은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그의 말을 믿겠는가? 아무도 받아 주지를 않았다. 그런데 어떤 신혼부부가 이 할머니의 간증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이 부부는 어머니처럼 그 할머니를 모시기로 하였다. 이 할머니는 장담처럼 여생을 평온하게 사셨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 날도 다른 날처럼 찬송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아침에 기척이 없어서 젊은 부부가 방에 들어가 보니 주무시듯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이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 편지 한 장을 발견하였는데 유서였다.
거기에 “아무도 나를 맞아 주지 않았는데 당신들은 나를 믿어 주었고, 내가 믿는 예수를 믿어 주었으며, 나의 신앙과 기도를 믿어 주어서 나와 함께 살아 주었고, 또한 그 동안 베풀어 준 은혜에 참으로 감사하오”라고 말 한 뒤에 그가 가졌던 깜짝 놀랄만한 막대한 재산을 유산으로 남기면서 “당신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재산을 가장 잘 관리할 사람들로 믿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에 이 재물을 써 주십시요”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작은 친절의 결과


비가 내리고 있는 어느 날, 가구점 밖에서 다리를 저는 할머니가 비를 피하면서 가구를 구경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 할머니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가구점의 한 점원이 나가서,
“할머니, 비도 피할겸 들어오세요.”
라고 말하면서 친절히 안내하여 가구점 안으로 모셨다. 할머니는 차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사양했지만, 점원의 권유로 편안한 의자에서 얼마동안 있다고, 기다리던 차가 오자, 점원의 명함을 한 장 받아 가지고 떠났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 점원에게 아주 놀랄만한 편지가 왔는데,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은 그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강철왕 ‘카네기’였다. 그 편지 내용은, 그 때 차를 기다리던 할머니는 자기의 어머니였으며, 그 어머니에게 베푼 친절에 감사드리며, 자기 집에서 필요한 가구를 그곳에서 전부 구입하겠다는 것이다.


친철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그리고 모든 비난을 해결한다. 얽힌 것을 풀어헤치고 곤란한 일을 수월하게 하며 암담한 것을 즐거운 것으로 바꾼다.
-톨스토이-


































































나 중심에서 우리로


심리학자들이 사람의 심리상태를 점검하는 방법 가운데 측정 대상자가 일정한 시간의 연설이나 대화 또는 일정한 길이의 문장에서 ‘나’라는 단어를 얼마나 자주 쓰는가를 조사하는 방법이 있다. 물론 ‘나’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심리상태는 건전하지 못하다는 결과가 나온다. 1940년 미국의 한 언어학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히틀러는 ‘나’라는 단어를 53단어에 한 번씩 썼고 뭇솔리니는 83단어에 한 번씩 썼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그에 대한 기사 6줄 중에서 나라는 말을 6번이나 사용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애나 기도 중에는 자기 중심적인 내용이 하나도 없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고 이웃을 위하여 사신 분이다. 나 대신 우리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자세이다. 
무관심 (1)


1964년, 뉴욕의 어떤 APT단지에서 끔찍한 사건 하나가 터졌다. 미세스 쥬노베즈라는 30대의 한 가정주부가 밝은 대낮에 괴한의 칼에 맞아 숨진 사건이다. 칼에 찔리면서 그녀는 비단 필을 찢는듯한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사람 살려.....강도야!”
이 단말마의 비명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서 APT단지에 퍼져나갔다. 그러나 현장에는 아무도 와 주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다. 그 단지에서 가까운 경찰서까지 이어지는 비상 전화가 있었는데 이 비상 전화마저도 울리지 않았다.
이 사건이 끝난 뒤에 경찰에서 조사해 보니까 그 여인이 칼에 맞아 죽는 현장을 먼발치서 직접 ‘목격한 사람’이 38명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느냐? 귀찮아서 그랬다는 것이다. 저 여자가 죽는 것하고 나 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너는 너, 나는 나, 아무런 ‘줄’이 이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이 쥬노베즈 사건은 도시인들의 비정과 시민 의식의 가사(假死)상태를 말해 주는 하나의 샘플로 꼽히고 있다.




무관심 (2)


쥬노베즈 사건이 있은 지 10년쯤 후에(1975년 5월) 일본의 공업도시 대판의 주택가에서, 죽은 지 2년 반쯤 된 중년 부인 자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검시 결과는 아사라고 나왔다. 굶어 죽었다는 것이다.
50대의 두 자매는 오오사카라는 대도시 한 복판에서 소리도 없이 굶어 죽은지 2년 반만에 백골이 되어 발견된 것이다. 그 시체가 누워있는 방에는 먼지가 1cm두께로 쌓여 있었고 천정은 온통 거미줄 투성이었다.
일본 역사 2,600년 유사 이래의 경제 성장을 구가하던 1970년대 중반의 일본에서, 그것도 일본 경제의 핵심 지역인 대판의 한복판에서, 두 자매의 완전히 소외된 채 소리도 없이 소리지를 기운도 없이 안개 사라지듯 그렇게 증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2년 반 동안 이 집을 찾아온 것은 수천 수만의 쉬파리 뿐, 사람의 그림자는 얼씬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싸늘한 콘크리트 문명의 사각 지대이다.




무관심 (3)


그로부터 10년 후 1984년 12월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이와 비슷한 사건 하나가 생겼다.
관악구 신림동 신모부인 집에 세들어 살고 있던 81세의 허씨노인과 75세 된 그 부인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검사 결과 죽은 지 20일쯤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노인 부부가 죽었는데 20일이 지나도록 아무도 죽은 줄 조차도 몰랐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관심이 없었으니까...
노인 부부는 자녀가 6남매나 된다. 그들도 부모의 죽음을 까맣게 모르고 지냈다. 왜? 관심이 없었으니까... 자녀가 6남매가 아니라 60남매가 있다고 해도 그들이 부모에게 관심이 없다면 다 마찬가지다. 당장 벌어먹기 바쁜데 딴 곳에 사시는 늙은 부모님, 무소식이 희소식이 거니... 속 편하게 살았겠지.














어떤 생각을 하고 바라보느냐?


세 사람이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을 여행했다. 첫 번째 미술가가 그 장관을 쳐다보고 하는 말이 ‘야! 이곳은 웅장한 하나의 그림이다. 이것을 내 화폭에 옮겨 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감탄을 했다. 두 번째 신학자가 보고서는 ‘놀라운 하나님의 솜씨다. 정말 하나님의 솜씨는 오묘하다’라고 찬양했다. 세 번째 카우보이는 그것을 바라보고 ‘야! 여기서 소를 잃어버리면 찾을 수가 없겠구나“라고 말했다.




딸로 보느냐, 며느리로 보느냐


어느 어머니가 아들과 딸을 미국에 두었는데, 자녀들의 사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먼저 딸의 집으로 갔는데,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그 이유는 아침이 되었는데, 자기의 딸이 일어나기도 전에 사위가 일찍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자신의 점심도 손수 싸 가지고 출근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을 그토록 아껴 주는 사위가 한없이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며칠 후, 이번에는 아들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아침이 되어도 며느리는 일어나지도 않고, 아들 혼자서 아침을 차려 먹고, 점심도 자기가 싸 가지고 출근을 하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본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너무 못나 보이고 불쌍해 보이는 동시에, 며느리의 행동이 얼마나 괘씸한지 참을 수가 없었다.
사실은 자기의 딸의 행동이나, 며느리의 행동이 조금도 다른 것이 아니었는데도 한쪽은 어머니로서 딸을 보았고, 또 다른 쪽은 시어머니의 입장에서 며느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가치가 처녀


어느 시골에 나이가 찬 노처녀가 있었다. 어느 날 그 처녀는 시장을 보기 위하여 길을 나섰다. 인적이 드문 길을 가는데 뒤에서 인신 매매 범같이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가 쫓아오는 것이었다. 처녀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발을 재촉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그 남자가 “가치가 처녀” “가치가 처녀”라고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처녀는 너무나 무서워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조금 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남자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처녀가 깨어나자 그 남자는 길을 가면서 “갈치가 천원”이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처녀 앞으로 지나갔다.




이중 잣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스캔들, 내가 하는 것은 로맨스’라는 말이 있다. 이런 식의 말을 흔히 2중 잣대라고도 한다. 내가 술수를 부리는 것은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 괜찮고, 남이 그러는 것은 나쁜 목적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악덕이다.
이런 2중 잣대에는 ‘나는 항상 옳다’고 하는 주관주의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 진리의 객관적인 기준이 없는 셈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 학파가 이것 때문에 머리가 터지게 싸웠다. 소피스트 학파가 늘 상황 논리를 내세웠던 까닭이다.
상황 논리는 이를테면 성인(聖人)도 시속을 따른다는 식의 논리다. 그러나 성인들의 그런 변신은 ‘변질’이 아니다. 동도서기(東道西器)가 동양의 알맹이를 유지한 채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듯 말이다. 그러나 소피스트의 상황 논리는 앞뒤가 맞지 않아도 그 차질을 상황 탓으로 돌린다.


남의 아름다운 점을 보는 것은 신의 마음이요 결점을 보는 것은 악마의 마음이다. 남의 결점이 잘 보이지 않고 오직 좋은 점만이 보이게 될 때에는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매우 닮아진 것이다.  




세 나라 사람의 마음


파리의 에펠탑에 한국인, 일본인, 독일인 세 사람이 올라갔다. 자라 온 과정도 주위환경이 다르듯이 각각 나름대로 하는 이야기와 그 행동도 달랐다. 그 각각의 모습에서 교훈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독일인은 이 에펠탑을 이루고 있는 금속이 어떤 것으로 만들어져 있나 하고 긁어보고 닦아보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유달리 기술 계통으로 앞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선천적으로 끌리는 심성이라 하겠는데, 이처럼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호기심이 있는 사람, 무관심한 사람 등 각 사람에게 맞는 교육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치부에 속하는 어린이를 앞에 놓고 장년 예배 설교처럼 한다는 교사가 있다면 큰 걱정이 아닐 수가 없다.
둘째, 일본인은 에펠탑의 설계 도면에 큰 관심이 있어서 직선과 직각을 그어 직접 설계도를 그려보았다. 한 직장에서 80%가 정년 퇴직을 한다는 일본인의 기획과 관리의 치밀성을 읽을 수가 있다. 이미 설계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만큼 장기전을 계산에 넣은 것이다.
셋째, 한국인은 탑에 오르자마자 “올라왔으니 이젠 내려갑시다”하고 내려갔다고 한다. 발로 밟고 사진을 찍으면 끝이라는 생각과 목적의식이 없는 일은 지양되어야 할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자기 관점
세상 물정에 어두운 어떤 관리가 있었다. 그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유난히 돼지고기를 싫어했다. 어느 날, 그는 부하 두 사람이 서로 치고 받으며 싸우는 것을 보았다.
“이놈들, 당장 그만 두지 못할까!”
그는 노하여 두 사람을 꿇어앉혀 놓고 호되게 꾸짖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벌로써 돼지고기를 먹게 했다. 싸운 두 사람이 마주보고 볼이 터지도록 돼지고기를 먹고 있자, 그가 엄숙하게 다시 경고했다.
“만약 또다시 싸운다면, 그때는 꼭 돼지고기에다 비계까지 넣어 먹게 할 것이다. 명심하렸다!”
자기 기준으로만 남을 판단하고, 자기 생각으로만 세상을 보는 어리석은 사람을 조롱하는 우화이다.
생각이 얕고 견문이 부족한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기준으로 남을 헤아린다. 자기가 이것을 좋아하면 남도 이것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저것을 싫어하면 남도 싫어할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지구상에서 인간처럼 복잡하고 흥미로운 동물은 없다. 저마다 개성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다. 또 지적(知的)으로 고르지 못한 것처럼 도덕적으로도 고르지 못하다.
그런데 이런 요소들을 무시하고 매사에 자신의 견해만을 고집한다면, 우화 속의 관리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무릇 물은 깊을수록 소리가 없고, 수레는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조금밖에 모르는 인간이 수다스럽게 떠들어댄다. 정작 지식이 풍부하고 지혜가 깊은 사람은 잠자코 있기를 즐긴다.
조잡한 인간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나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것을 아무에게나 자랑하고 싶어한다.


<人莫知其子之莫, 莫知其苗之碩>
사람은 자기 자식의 나쁜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가 키운 곡식의 모종이 큰 것을 알지 못한다. 전자는 사랑에 눈이 멀게 된 것이고, 후자는 욕심에 마음을 빼앗긴 때문이다.
-대학-














작은 것이 위대하다


같은 돌이면서도 큰 바윗돌에 비하면 작은 보석들이 얼마나 귀한가? 작은 것이 아름답고 위대하다.
영어 가운데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란 말이 있다. 큰 것만을 좋아하는 경향을 비꼬면서 오히려 작은 것의 가치를 강조해 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말을 아예 ‘작은 것이 위대하다!’(Small is Great!)라고 표현하는 면이 더 좋을 것이다.
실상 우리의 생활 주변에 보면, 작은 것이 귀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큰 일과 위대한 일은 대개 작은 일에서 비롯되는 것이 보통이 아닌가? 작은 씨앗이 하나 땅에 떨어져서 30배, 60배, 100배의 큰 결실을 가져오며, 씨 중에 가장 작은 겨자씨라도 크게 자라고 나면 많은 새들이 둥지를 만드는 큰 나무를 이루는 것이 아닌가?




작은 것의 위력


태산은 한 줌의 흙도 사양하지 않기 때문에 저렇게 크게 되었고, 황하나 큰 바다는 작은 세류(細流)도 구별하지 않고 받아들여서 저렇게 깊게 되었다. 모든 사물은 작은 것이라도 쌓아 모아야 한다.
-이사-


높은 곳으로 오르려면 먼저 낮은 곳에서 시작한다. 또 먼 곳을 가려면 가까운 곳에서 시작한다. 이처럼 모든 일은 손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작은 것도 아끼는 정신이 직장에 특채됨


회사 직원을 모집하는 시험에는 합격한 아가씨가 중역들 앞에서 여러 가지 면접의 어려운 고비를 치루고 나가도 된다고 하여 나오다 보니 바닥에 작은 실 핀이 떨어져 있어서 그것을 집어서 책상 위에 놓고 나갔다. 이를 지켜본 중역들이 의논하기를 이러한 아가씨라야 회사 물건을 아끼고 사랑하는 동료가 될 수 있겠다고 의견이 일치되어 합격을 통고하였다. 하나님의 걸작품인 세상을 아끼고 사랑하며 세심하게 가꿀 정신, 마음 등을 하나님은 중하게 여기신다. 작게 보이는 것 하나, 작은 생명, 보잘것없게 보이는 것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잊은 바 된 것이 하나도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과 나


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는 20세기 말의 특징을 묻는 제자에게 ‘피곤’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피곤한 인생들이 늘어나는 21세기로 향하고 있다. 인구문제 전문가들은 1990년 초 현재의 인구는 53억이라고 한다. 2,000-2015년경에는 75억, 2025-2050년에는 100억의 인구가 예상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100억대 1일지라도 한 사람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 ‘나’를 찾으시는 목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작은 실수가 큰 실패가 된다


한창 승승장구하던 시절의 나폴레옹이 한 전투에서 패한 일이 있었다. 그 원인을 철저하게 조사해 보았더니 실로 어처구니없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패전할 수밖에 없었던 직접적인 동기는 기병대대의 도착이 늦어 작전에 차질을 초래한 때문이었으나, 그 대대가 늦어진 것은 소속 중대 중 하나가 늦어진 때문이었고, 그 중대가 늦어진 것은 소속 소대 중 하나가 늦어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소대가 늦어진 까닭은 한 분대장이 탄 말의 발굽에서 작은 못 하나가 빠진, 참으로 사소한 사건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말발굽의 편자 관리를 맡은 병사가 작은 못 하나를 소홀히 함으로써 부대 전체로 하여금 패전을 이르는 쓴잔을 마시게 한 셈이었다.




소수와 약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다수를 기뻐하시거나 장자를 들어 쓰시지 않는다. 오히려 소수이며 약자인 사람들을 들어 쓰시어 영광을 받으신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 하였고 자기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하다고 했다. 소수를 들어 쓰신 경우는 성경 말씀에 허다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을 들어 믿음의 조상을 삼으셨고, 기드온 300명 용사를 들어 메뚜기 떼같이 무수한 미디안 대군을 물리치셨으며, 12사도를 들어 세계를 복음화 하셨다. 또한 약자를 들어 강자를 부끄럽게 하셨으니 소년 다윗을 세워 강자 골리앗을 쓰러뜨린 경우, 갈릴리의 어부 베드로를 들어 로마의 대국을 복음으로 정복한 경우가 그것이다.
하루는 손가락 다섯이 서로 잘났다고 뽐내며 말했다. 엄지손가락은 가장 굵고 제일을 나타낼 때 자기를 세우지 않느냐고 뽐내자, 검지손가락이 자기가 없으면 방향을 가리킬 수 없고, 물건을 집을 때 자기 없이 집을 수 없으니 자기가 가장 귀하다고 했다. 중지는 자기보다 큰 손가락은 없다며 큰소리쳤다. 무명지는 보석반지는 자기가 끼지 않느냐고 으시대며 말했다. 그때 새끼손가락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없으면 병신이 돼.” 소수이며 약자라고 결코 소심하지 말자.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살자.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


샤르니(Charney)라 하는 한 프랑스인이 나폴레옹의 노여움을 사서 토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곳에서 세월이 흘러갔다. 그는 친구들에게서 버림받고 바깥 세상으로부터는 완전히 잊혀진 듯이 보였다. 고독과 절망에 빠진 그는 작은 돌 조각 하나를 들어 그 쓸쓸한 독방 벽에다가 이렇게 새겼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토굴 감옥 바닥에 깔려 있던 돌들 틈에서 푸른 새싹이 돋아났다. 그것은 벽 위에 뚫린 작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향해 뻗어가기 시작했다. 샤르니는 간수가 매일 넣어 주는 물을 조금씩 남겨 그 푸른 잎사귀에 부어 주곤 했다. 새싹이 마침내 아들다운 파란 꽃을 피우는 꽃나무가 될 때까지 자라났다.
꽃나무가 탐스러운 꽃송이를 터뜨리자 그 고독한 죄수는 전에 벽 위에 새겼던 글귀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하나님이 돌보신다”라고 새겨 넣었다. 이 죄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샤르니가 갇혀 있는 독방 옆에는 또 한 사람의 죄수가 갇혀 있었는데, 그에게는 감방 면회가 허락된 어린 딸이 하나 있었다. 그 어린 소녀는 아버지를 면회 왔다가 샤르니의 감방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소녀는 물론 그 토굴 감옥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꽃나무를 보았고, 이 소식은 곧 조세핀(Josephine) 왕비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는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사람은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 없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상냥하고 진실한 여인이었으므로 그녀는 곧 황제에게 샤르니를 석방하도록 설득했다.
샤르니는 그의 꽃나무를 집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그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 꽃나무를 소중하게 돌봐 주었다 한다. 토굴 감옥에서 피어난 그 꽃나무는 샤르니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ꋻ돈도 음악도 예술도 사랑이 없이는 남을 감화시키지 못한다
-프랑스 속담-
ꋻ사랑은 장애에 부딪힐수록 격렬해진다. 마치 시냇물처럼
ꋻ사랑은 전등이 아니다. 사랑은 촛불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다


미국의 어떤 청년은 신앙생활을 누구보다도 잘 하는 가운데 어느 날 길을 걷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를 잘라 버리게 되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절망 상태에 빠졌다. 그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 목사님을 비롯해서 많은 교우들이 병 문안을 와서 모두가 위로의 말을 해 주었는데 그것은 로마서 8장 28절의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만 읽어 주고 가곤 했다는 것이다. 그 청년은 이 성경 구절을 자주 읽어 주므로 한편 생각할 때에 어제까지만 해도 성했던 내 다리가 끊어져 나가 불구자가 되었는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서 불쾌하게 생각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아멘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얼마 후 퇴원하여 고무다리를 하고 걸어 다니게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꾸준히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뜻이 있어 신학교를 다녀 후에 목사가 되었고, 그뿐 아니라 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을 하고 아프리카의 식인종들이 사는 곳으로 전도를 하러 떠나게 되었다. 그곳에는 가기만 하면 식인종들에게 잡혀 먹는 곳이었다. 이 선교사도 죽음을 각오하고 그들이 사는 고장에 찾아갔더니 그 식인종들은 좋아라 하면서 잡아먹으려고 했다. 그때에 이 선교사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한 후에 지혜가 떠올라 자기의 의족인 고무다리의 고무 한 조각을 손수 베어서 그들에게 주었다. 식인종들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자기의 살을 베는 사람은 못 보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잘라서 선뜻 내어 주는 것을 보고 그들은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신(神)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추장을 비롯하여 모든 식인종들이 이 선교사 앞에 엎드려 잘못을 빌더라는 것이다. 그후에 그는 그 식인종들을 회개시키고 복음을 심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후 그 선교사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기의 다리가 교통사고로 잘리어진 것이 지금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닫고 다시 그 말씀에 큰 위로를 받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거닐다가 죄인들을 가득 담은 새장을 가지고 있는 사탄에게 이르렀다.
“루시퍼, 거기에 무엇이 들어 있지?”
“세상이 들어 있습니다. 온 인류를 이 새장 속에 집어넣었지요.”
“그래, 그러면 그들을 어떻게 하려고 하지?”
사탄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약속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들의 가슴을 쪼개고 이들의 영혼을 파멸시켜 그들을 하나님 없는 지옥으로 보낼 겁니다.”
“사탄아 내가 그들을 갖고 싶은데.”
“예수님, 당신은 이들이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이들은 당신의 돈을 훔치고 당신의 성일을 더럽히고 당신의 이름을 모독할 것입니다. 이들은 당신의 약속을 깨뜨리고 당신이 흘린 피 안에서 춤을 추며 당신의 가슴을 찢어버릴 겁니다. 그래도 원한다면 당신은 그들을 위해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를 네게 주겠다. 땅 위의 모든 산들과 바다들을 주겠다.”
“그것도 충분치 않아요.”
“그렇다면 육지와 섬들까지도 주겠다. 이 모든 것들을 네게 주고 내 백성들과 바꾸고 싶다.”
“그것도 안돼요. 어림도 없어요.”
“그렇다면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나는 당신의 심장이라는 금을 원해요. 나는 당신의 눈물이라는 다이아몬드를 원해요. 당신의 피라는 루비를 원해요. 예수님, 난 당신을 원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런 값을 치르고 싶지 않을 걸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왕복을 벗기 시작하셨다. 그 분은 이 땅에 오셔서 완전한 삶을 사시고는 험한 십자가로 가셔서 피 흘리시고 죽으셨다. 그 분은 십자가를 통하여 천국에 이르는 길을 놓으셨다.




사랑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형제와 같이 사랑한다. 그들은 모두 구속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가난을 사랑한다. 예수님도 가난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부를 사랑한다. 부는 불쌍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파스칼의 ‘팡세’-




가장 소중한 나의 어머니


일본의 어느 죄수가 오랜 감옥 생활을 하며 자기 어머니 한 분이 얼마나 존귀하신지를 깨닫고 남긴 글이 있다. 그것은 “나에게는 백억 인의 다른 사람들의 어머니보다 한 분 나의 어머니가 가장 소중한 분이다”라는 말이었다. 비록 자기는 사형수이지만 자기 모친 한 분은 천하보다 귀한 분이라는 고백이다.




할머니 집사님의 눈물


C목사님이 결핵에 걸려 앓고 있었다. 섬에서 목회하므로 병원 치료를 받을 기회가 없기도 했다. 하루는 설교를 하는데 할머니 속장(집사)님이 울고 계셨다. C목사님은 자신의 설교에 은혜가 있어서 감동하여 울고 계신 줄 알고 더 크게 설교를 하였다. 예배를 마친 뒤 C목사님은 할머니 속장님께 “오늘 은혜를 많이 받으시던 걸요”하고 칭찬 받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할머니 속장님의 대답은 목사님의 목이 너무 가늘어서 애처로워 눈물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런 후 아침마다 목사님 주택의 문밖 짚 꾸러미에 굴 또는 조개가 담겨져 있었다. C목사님은 그 교회에서 오랫동안 목회하는 중 그의 결핵이 깨끗하게 나아 지금은 아주 건강해졌다.
장로님의 사랑의 약


K목사님은 목회에 열심이셔서 교회에서 매일 주무실 정도였다. 어느 날 아침 늦게까지 기도하는데 장로님이 아파서 고통 당하는 환상이 떠올랐다. 그 장로님은 한방 의사였다. K목사님은 기도를 마치고 장로님댁에 심방하였다. 장로님이 깜짝 놀라면서 “목사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제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목사님께서 편찮으시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 약을 짓고 있습니다.” 하며 반가이 맞았다. 그때 장로님의 눈과 K목사님의 눈에 눈물이 그득히 고였다.




사랑의 체온


오래 전 대전 교도소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음산한 겨울날 교도소 면회 시에 들어선 어떤 어머니가 있었다. 얼굴은 말랐고 드문드문 굵은 주름살이 보이고 늘어진 스웨터에 헌 고무신을 신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면회실 죄수 석에 푸른 죄수복을 입은 청년이 나오자 어머니는 손을 잡고 목이 메어 아들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눈물만 닦다가 간수가 시간이 되었다고 하자 당신의 앞가슴을 헤치더니 “애야 이것 식기 전에 마셔라”는 말만하고 저들은 헤어지고 말았다.
이 죄수는 자기 감방으로 돌아와 그 우유병을 가슴에 안고 밤잠을 못 자며 흐느꼈다고 한다.
그는 나이 30이 되도록 어머니의 사랑을 몰랐다. 그런데 이제야 어머니의 사랑을 체온으로 느낀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주려고 우유 한 병을 사서, 그것이 식을까봐 자기 젖가슴에 우유병을 품고 있었는데 아들은 그 우유병에서 어머니의 사랑의 체온을 느낀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의 열기는 그토록 난폭한 아들의 마음을 녹였다. 그는 그 회심의 계기를 글로 써서 재소자 문예작품 전시회에 제출하여 입선했고 그 후 모범수로 출소했다고 한다.
사랑의 힘


기독교의 최고 계명은 ‘사랑’이다. 예수님은 사랑을 가리켜 “이는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마 22:40)고 말씀하셨다. “사랑은 실로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롬 13:10). 아마 사랑의 최고 행위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일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이것은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최상의 무기이다.   
드 샤저는 제 2차 대전 때에 처음으로 동경을 폭격한 두리틀 소장의 폭격대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폭격대원에 자원한 것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 때에 아내를 잃은 원수를 갚기 위함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동경을 폭격하고 중국 중경으로 귀환하다가 엔진에 고장을 일으켜 불시착하게 되었는데 불행히 일본 지역에 떨어져 일본군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4년간 중국의 여러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면서 많은 고생도 하고 일본을 저주하면서 지나다가 우연한 기회에 예수를 믿고 회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종전 후 포로 교환 시에 선교사가 되어 일본 선교사로 가기를 간청하였다. 일본에 와서 그는 진주만을 처음으로 폭격한 폭격기의 편대장 후지다 대위를 전도하게 되었다.
샤저는 원수를 악으로 갚다가 오히려 고난을 당했으나 선과 사랑의 복음으로 봉사할 때에 마음의 평안을 받았다.




미물을 통해 깨닫고 회복한 부부 사랑


어느 곳에 가난하지만 정 좋게 사는 부부가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뜻밖에 중병에 걸렸다. 그러자 부인은 품을 팔고, 삯바느질을 해서 살림을 꾸려가며, 약을 사다가 남편을 극진히 간호했다. 그러나 남편의 병은 속히 낫지도 않고, 또 죽지도 않았다.
계속되는 병세에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고, 병을 치료할 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이, 인간의 도리는 아니지만 병든 남편을 버리고 달아날 결심을 했다.
마지막으로 죽이나 쑤어서 한번 더 대접하리라 생각하고, 쌀자루를 털어 한 줌의 쌀을 모아 우물가로 가서 쌀을 씻는데, 몇 알 흘린 쌀알을 작은 뱀이 와서 물어 가고, 또 와서 물고 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여러 번 계속하기에 부인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가만히 작은 뱀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그랬더니 뱀이 다리 밑으로 기어들어 가는데, 그 곳에는 꼬리에 상처를 입은 숫놈이 있었고, 작은 뱀이 흘린 쌀알을 물어 가는 것은 숫놈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이 광경을 본 부인은 ‘하찮은 미물도 그토록 부부애를 지켜가면서 사는데, 하물며 사람인 내가 병든 남편을 버리고 혼자 도망가서는 안 되겠다’라고 깊이 뉘우치고, 그 후부터는 남편을 이전보다 더 지성으로 치료한 결과 병이 완쾌되어 그 부부는 남은 여생을 참으로 행복하게 살았다.




사랑으로 지는 짐


어떤 사람이 작은 소년 하나를 만났는데 그 소년은 절름발이인 더 작은 소년 하나를 등에 업고 가는 것을 만나게 되었다. “업고 가기에 퍽 무겁겠군”하고 그 사람이 말하자 “무겁지 않아요. 내 꼬마 동생인걸요.”이라고 대답했다. 사랑으로 지고 사랑으로 운반하는 짐이란 언제나 가벼운 것이다.




이유 있는 강아지 사랑


한 소년이 애완 동물 가게에 와서 강아지 한 마리를 달라고 했다. 주인은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여러 마리의 강아지를 보여 주었다. 소년은 강아지들을 바라보더니 한 마리씩 집어들고 살펴본 다음 다시 상자에 넣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몇 분 후에 그는 주인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한 마리를 골랐는데 값이 얼마에요?”
주인이 가격을 말해주자 소년은 며칠 안에 돈을 가지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너무 오래 있다 오면 안 된다.” 그 주인이 주의를 주었다.
“이런 강아지들은 금방 팔리거든.” 소년은 돌아서서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걱정 없어요. 내가 골라 놓은 강아지는 그때까지 팔리지 않고 있을 거예요.”
소년은 돌아가서 열심히 일을 했다. 잡초를 뽑고, 유리창을 닦고, 정원 청소를 하면서 부지런히 돈을 모았다. 그리고 강아지를 살수 있을 만큼 돈이 모아졌을 때 가게를 찾아갔다. 소년은 카운터로 가서 주머니에 가득 들어 있는 돈을 꺼내 놓았다. 가게 주인은 돈을 세어 본 다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이제 네 강아지를 가지고 가도 좋다.”
소년은 상자가 있는 데로 가서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는 삐쩍 마른 개 한 마리를 안고 가게를 나서려고 했다. 가게 주인이 그를 잡아 세웠다.
“그 강아지를 가져 가지마라 그건 다리를 절지 않니? 그놈은 놀지도 못한단다. 너랑 달리기도 못할 것이고 또 심부름도 할 수 없단다. 건강한 놈으로 한 마리 가져가거라.”
“괜찮아요. 내가 원하던 강아지는 이거에요”
소년이 떠나려고 할 때 가게 주인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갑자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소년의 바지 밑으로 의족이 살짝 드러나 보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우리는 소중한 존재이다. 너무나 소중하기에, 우리와 가까이 지내기 위해 우리와 같이 되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 엄청난 값을 지불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나치 독일에 의해 처형된 신학자 본 헤퍼 목사는 순교하기 전에 이런 글을 남겼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은 언제나 당신의 가슴에 울려 있어야 하고 당신의 생활 속에 날마다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당신이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말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따지고 분석해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당신도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말씀을 일상생활 속에 받아들이십시오.”




사랑의 실천자


테레사(Mather Teresa) 수녀가 경영하는 ‘사랑의 집’에 어느 날 설탕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들렸다. 캘커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그 소문을 들었다. 그날 저녁 한 소년이 어머니에게 “어머니 오늘부터 사흘 동안 저는 설탕을 먹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제가 먹지 않은 사흘 분의 설탕을 제게 주십시오” 사흘 후 이 소년은 자기가 아낀 사흘 분의 설탕을 들고 테레사 수녀를 찾아왔다. 켈커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들었으나 어린 소년 한 사람만이 사랑의 실천을 했던 것이다.
인도에서 가장 소란하고 복잡한 도시에서 고아와 거지를 보살피고 연고자 없는 시체를 잘 처리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 테레사 수녀에게 영국의 신문사와 한 여기자가 물었다. “수녀님! 사랑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테레사 수녀는,
“사랑이란 켈커타의 한 소년이 ‘사랑에 집’에 들고 오는 사흘 분의 설탕입니다”고 대답하였다. 사랑은 먼 곳에 있는 굉장한 것이 아니고 가까운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작은 실천이다.




소박한 사랑의 실천자


1997. 9월 들어 우리는 아름다운 여인 둘을 잃었다. 하나는 다이애나비이고 또 다른 하나는 테레사 수녀다.
두 사람은 너무도 다른 환경에서 살았다. 다이아나는 왕세자의 빈으로서 가장 호화롭다는 영국의 황실에서 살았다. 그녀는 비록 상징적 존재로서의 왕이지만 그래도 영국 국민의 존경의 대상이 되는 왕세자 빈이었기에 국민의 관심이 한 몸에 쏠리는 위치에 있었다. 영국이 받드는 황실이니 돈이 그립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는 가장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살았다. 병든자, 부랑자, 맹인, 문둥병자, 버림받은 기아, 감옥에서 풀려나 갈 곳 없어 찾아온 전과를 가진 창녀들과 함께 살았기에 결코 그들보다 잘 먹고 호화로운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너무도 다른 환경에서 삶의 방법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두 여인의 죽음을 애도한다. 무엇 때문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두 여인은 자기 일신만을 위하여 살지 않고 병들고 갈곳 없어 굶주려 죽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생명을 위해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다는데 있다.
다이애나는 결코 행복한 결혼 생활을 못했다. 남편의 외도로 극도의 외로움을 타다가 이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혼녀로서 슬픔을 가슴에 안고 있으면서도 불쌍한 이웃을 위해 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죽기 얼마 전에 돈이 없어 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없는 에이즈 환자를 위해 생전에 즐겨 입던 수십 벌의 드레스를 경매 시장에 내 놓아 그 돈을 그들의 치료비로 헌납하기도 했다. 영국인 가슴에 깊은 사랑을 심었다.
테레사는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에게 한줌의 떡을 쥐어 주는 것이 바로 예수에게 주는 것이란 신앙을 실천하며 산 여인이다. 그녀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병든 자들에게 주고 갔다. 그 지고한 사랑의 크기에 세계는 지금 인도 캘커타의 성녀 테레사의 죽음에 눈길이 쏠려 있다.
테레사나 다이아나는 특출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졌다. 그럼에도 그들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줄줄 아는 소박한 사랑의 실천자였다는데 있다. 어둠이 깊어야 밤 별이 돋보이듯 죄악이 깊은 밤이기에 그들의 사랑이 돋보여진다.




사랑은 최후의 제왕


사랑은 최후의 제왕이다. 사랑 외에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세계 각국의 몽상가들은 모두 실패하였다. 진시황도, 알렉산더대왕도, 한니발도, 시저도, 나폴레옹도, 카이제르도, 모두 꿈과 같이 사라졌다. 총칼의 정복은 순간적인 것이고 그 위세도 한때에 불과하다. 사랑은 내면으로부터 사회를 공고히 한다. 그것은 하나의 띠이며 문설주가 된다. 사랑은 죽이는 일을 할 수가 없다. 일본은 이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세계를 정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구의 정복을 회구하는 사람은 직경 7,500마일의 지구면을 정복하는데 그칠 뿐이다. 그러나 영혼을 정복하는 자는 우주의 구석까지 정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죄의 은총을 받으면


김현희(일명 마유미) 그녀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대한항공 여객기를 폭파시킨 북괴의 여 공작원이었다. 200여 승객의 생명을 공중 분해시킨 장본인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살아 있다.
대통령의 특사로 지금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각 교회마다 신앙 간증을 하며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의 속죄의 은총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사랑합시다


한 왕자가 마녀의 마법에 걸려서 그만 보기 흉한 두꺼비로 변해 버렸다. 두꺼비로 변한 왕자가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처녀가 그 두꺼비에게 입맞춤을 해 주어야만 했다. 두꺼비로 변신한 왕자는 처녀만 보면 울었다.
“내게 입을 맞추어 주세요. 그러면 나는 당신을 나의 신부로 맞이하겠어요.”
그러나 어느 처녀가 그 징그러운 두꺼비에게 입맞춰 줄까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왕자들이 죄의 굴레에 씌여서 그만 두꺼비와 같은 흉한 모습들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의 왕자가 아닌 흉한 죄의 종의 모습을 하고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을 하나님의 왕자의 모습으로 되찾을 수 있는 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는 길밖에는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흉하게 변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꾸는 길을 보여 주셨다.




어머니의 은혜


K씨가 수원교도소에 노래팀을 데리고 갔을 때이다. 죄수들 약 600명과 함께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니의 은혜는 한이 없어라”하고 ‘어머니의 은혜’를 노래할 때 주먹으로 눈물을 닦는 죄수들의 모습을 여기저기에서 보았다. 우락부락한 사나이들, 아무리 악독한 살인자의 마음에도 어머니의 사랑은 이다지도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부모님의 사랑은 고치는 약이요, 돌이키게 하는 신호등이다.




엄마, 아빠 둘 다 필요합니다


행복한 가정이 있었다. 서로 신뢰하고 사랑으로 감싸여 사는 부부와 귀여운 어린 딸을 가진 행복한 가정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가정에는 부부간에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불평이 일어나고 의심이 생기고 서로 간의 이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행복한 가정이 살얼음을 딛는 것 같은 분위기로 바뀌게 되었다. 냉기가 도는 싸늘한 분위기로 바뀌더니 급기야 사랑하던 부부는 이혼까지 결정하고 법정에 서게 되었다.
재산 문제까지 합의되었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의 양육 문제로 부부간에 옥신각신 하게 되었다. 서로 자기의 딸이기 때문에 자신이 양육해야 한다며 양보하지 않고 고집으로 팽팽히 맞섰다. 결국 재판관의 결정권에 따르기로 했다.
재판관은 부부 사이의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어린 딸에게 결정권을 부여하기로 했다. 어린 딸은 눈물을 흘리며 오른손으론 아빠의 손을, 왼손으론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번갈아 엄마 아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는 엄마도 아빠도 모두 필요해요. 우리 모두 함께 살아요” 하더니 그만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방청객도 재판관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얼음같이 차갑던 부부의 마음도 딸아이의 순진함에 봄눈 녹듯 녹아져 전보다 더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사랑이 담긴 말


자라나는 나무에 어떤 음악을 들려주느냐에 따라 성장 속도가 달라진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밝고 쾌활한 음악을 틀어 준 실험 집단과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틀어 준 비교 집단과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비인격적인 자연 세계도 이토록 큰 영향을 입는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격체는 얼마나 큰 영향을 입을 것인가?
미국의 한 병원에서의 일이다. 환자가 수술을 받았는데 회복 되기는거녕 자꾸만 증세가 악화되어 갔다. 주치의를 비롯한 의료진들이 연일 모여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고 분석해 보았지만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의학적인 시술도 완벽했고 병 역시 그렇게 중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환자가 소생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긴장하기 시작했다.
또 다시 모여 마지막으로 회의를 하고 있는 자리에서 한 의사가 조용히 자리를 떠나 환자를 찾았다. 그리고 환자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저는 선생님의 수술 준비를 도왔던 의사입니다. 그런데 마침 마취 상태에 있는 선생님에 대해 제가 심한 농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자꾸만 마음에 걸려 사과를 하고 싶어했지만 기회를 못 얻었습니다.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환자는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면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도 모른 것을 어떻게 용서하나요? 그러나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진실한 의사를 만날 수 있다는 저는 행복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부터 환자의 병세는 눈에 띌 정도로 호전되기 시작했다.
사람의 생명이 끊겨 모든 기능이 정지되어도 마지막까지 살아 남아 있는 기능은 청각 기능이라고 한다.




훌륭한 부정


다음은 97. 8. 21일자 중앙일보 기사이다.
환경미화원 아버지와 고물상 어머니를 둔 장군이 버스 정류장에서 한 여성의 손 지갑을 훔친 것은 지난 3월말. 지갑에는 10만 원 권 수표 5장과 현금 30만 원이 들어 있었다. 장군은 4월 중순 이 돈으로 고급 브랜드의 청바지 등을 사 입고 집으로 들어갔다.
새 옷을 본 어머니는 ‘어디서 난 옷이냐’며 아들을 다그쳤고, 장군은 지갑을 훔친 사실을 실토했다. 
아버지는 ‘환경이 어렵다고 잘못된 길로 빠져서는 안 된다’고 아들을 크게 나무란 뒤 경찰서로 데려가 자수시켰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장군은 이보다 20일쯤 전에 물건을 훔친 사실도 털어놓았고, 피해 신고가 들어온 이 사건으로 소년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단기 보호 관찰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지갑을 잃은 여인이 나타나지 않아 이 사건은 계속 피해자를 찾느라 재판이 지연됐다. 끝내 피해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피해자 없이 장군의 진술만으로 재판이 시작됐다.
이 사이 평소 건강이 좋지 않던 아버지는 아들의 두 번에 걸친 절도 행각에 실망해 자책하다 아들을 경찰에 자수시킨 지 1주 일 만에 심장마비로 숨졌다. 이 날 법정에는 장군의 어머니가 나와, “남편의 뜻대로 아들의 버릇을 고쳐 바른 인간이 되도록 엄벌에 처해 달라”며 울먹여 주위를 숙연케 했다. 장군은 “아버지가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신 판사는 “많은 부모들이 비행을 저질렀더라도 자식의 범죄를 감싸기 바쁜데 장군 부모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가슴이 뭉클했다. 이런 부모의 자식이라면 잠시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바르게 자랄 것으로 믿고 불처분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어머니의 손길


남북전쟁 한창일 때 한 어머니가 아들의 부상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머니는 바로 열차를 타고서 아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전선에 여자는 더 이상 들여보낼 수 없다는 정부로부터의 명령을 듣고도, 위험을 무릅쓰고서 말이다. 드디어 천신만고 끝에 전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침내 아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알아내고는 의사에게 가서 말했다. “제가 대신 병실에 들어가서 간호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의사는 말했다. “지금 막 아드님께서 잠들었습니다. 지금 위독한 상태라 어머니를 보게 되면 너무 흥분해서 죽을지도 모릅니다. 잠시 더 기다렸다가 제가 아드님께 차근차근히 이야기하고 나서 만나시는 편이 좋을 듯 싶군요.” 어머니는 의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제 아들이 다시 깨어나지 못하여 더 이상 아들의 살아있는 모습을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 제발 들여보내 주십시오.”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겠다면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어머니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서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아들을 만나 보기를 바랬던가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어머니의 손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못하여, 사랑이 담긴 부드러운 손을 아들의 이마에 갖다 댔다. 그 순간이었다. 눈을 뜨지도 않은 채 아들이 울면서 말했다.
“어머니, 와주셨군요.” 그는 그 사랑의 손길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전달된 것이었다.




어머니의 사랑 (1)   


뉴욕주에서 지도력 있는 한 목사가 한 번은 내게 성품이 악한 어느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아버지에게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계속된 아버지의 악영향으로 그 아들은 온갖 종류의 죄를 짓게 되었고 마침내 흉악범이 되고 말았다. 그는 살인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아버지가 죽었으므로 재판 내내 홀어머니가 법정에 앉아 있었다. 증인이 아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때마다 아들보다는 어머니의 마음이 훨씬 더 상하는 듯했다. 그가 유죄 선고를 받고 사형을 언도 받았을 때, 그 판결이 정당하다고 느꼈던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 결과에 만족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사랑은 결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사형 집행 연기를 간청했지만, 기각되고 말았다. 사형 집행 후에 시신을 달라고 간청한 것마저도 거절당하고 말았다. 관습에 따라 아들의 시신은 감옥 뜰에 묻혔다. 그후 얼마 안 있어 그 어머니 자신도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숨을 거두기 전에 그녀는 아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녀는 살인자의 어머니로 알려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디 목사-




어머니의 사랑 (2)


다음 이야기는 스코틀랜드 지방의 어느 젊은 여자에 관해 들은 것인데, 그녀는 집을 떠나 글래스고우에서 부랑자가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백방으로 찾아다녔으나, 허사였다. 마침내 어머니는 자기 사진을 자정 선교회(Midnight Mission) 방의 벽에 걸게 되었는데, 그 곳은 버려진 여성들이 묵는 곳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그 사진을 흘깃 쳐다보았다. 한 사람이 그 사진 옆에서 서성거렸다. 그 사진의 모습은 어릴 때, 그녀를 내려다보던 바로 그 친근한 얼굴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죄 많은 딸을 잊거나, 버린 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그 사진이 결코 그런 곳에 걸려 있지 않았을 테니까. 마치 그 입술이 열려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얘야, 집으로 돌아오너라! 엄마는 너를 용서한단다. 그리고 여전히 너를 사랑한단다.” 그 불쌍한 소녀는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방탕한 딸이었지만, 어머니의 얼굴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게 되었고, 슬픔과 부끄러움을 가득 안고 자신이 버리고 떠났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두 모녀는 다시 한 번 하나가 되었다.
-무디 목사-




어머니의 사랑 (3)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에 있었던 일이다. 만삭의 가난한 여인이 해산할 곳을 찾아 눈길을 헤매고 있었다. 해산의 도움을 청할 곳을 찾지 못한 여인은 그만 어느 다리 밑에서 혼자 아이를 낳았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밤이었다. 산모에게는 아이를 덮어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옷에서 솜을 모조리 뽑아 아기의 몸을 싸 주고, 자신의 옷을 벗어 아기를 꼭 싸 주었다. 그리고 기진맥진한 자신은 길에 버려진 마대를 주워 덮었다.
다음날 아침, 한 행인이 우연히 그들을 발견했다. 아기는 동상에 걸려 있었고, 여인은 아이를 안은 채 얼어죽어 있었다. 마음씨 착한 행인은 그 아이를 구해 데려다 길렀다. 그 후로부터 10년 후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 날, 그 소년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물었다. 그를 데려다 키운 양부모는 10년 전의 일을 사실대로 알려 주었다. 소년은 어머니의 무덤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어머니의 무덤에 이른 소년은 갑자기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소년은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어머니의 무덤을 덮었다. 그리고는 벌벌 떨면서 큰 소리로 “어머니! 저 때문에 얼마나 추우셨어요”라고 슬퍼 울었다.
어린 자녀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부른 추위를 무릅쓰고 어린 자녀를 살렸던 어머니의 사랑, 이 얼마나 숭고한가? 이같은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깊고 높은 사랑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들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했다. 이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성탄절에 우리들에게 외쳐져야 하는 복음이다 .
고통을 나누는 사랑


인디아나 주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15세의 소년인 ‘브라이언’이 뇌종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소년은 계속해서 방사능 치료와 화학 요법을 받았다. 그 결과 소년은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고 말았다.
이때 소년은 같은 반 친구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돕기 위해 나섰다. 모든 학생들은 자기들도 삭발을 하게 해 달라고 자신의 부모에게 부탁한 것이다. 뇌종양을 앓고 있는 브라이언만이 학교 전체에서 유일하게 머리카락이 없는 학생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신문에는 가족들이 자랑스럽게 지켜보는 가운데 아들의 머리를 삭발하고 있는 어머니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뒷 배경에는 똑같은 모습으로 삭발을 한 수많은 학생들이 서 있었다.




진실한 사랑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다. 어느 날 남자가 군대에 가게 되었고, 급기야,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위험한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곧 사랑하는 여자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싸우던 남자는 부상을 당하고야 말았다. 폭탄의 파편을 맞아, 양팔을 절단하게 된 것이다. 이런 모습으로 그녀를 힘들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에게 전사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는 행여나 여자의 눈에 뛸까 숨어살았다. 얼마 후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그녀가 행복하기를 기도했다. 몇 년이 흐른 뒤 남자는 그녀의 모습을 멀리서나마 지켜보려고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담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니 그녀는 양팔과 양다리가 없는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한 채 살고 있었다. 사랑하던 남자를 생각하며 월남전에서 양팔과 양다리를 잃은 남자를 보살피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기다림의 사랑


만년설로 덮인 에베레스트산에는 이야깃거리가 많다. 히말라야산맥 중턱에 있는 어느 작은 산간 마을에 한 젊은 처녀로 보이는 여인이 찾아왔다. 그 여인은 등산객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숙소를 정하고 여장을 푼 뒤 그 여인은 말없이 마을 앞 냇가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생활은 항상 변함이 없었다. 밥을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냇가에 앉아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궁금하여 “왜 여기 앉아 있느냐”고 물었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누구를 기다리느냐고 물었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났다. 해가 바뀌면서 처음에 올라올 때 고왔던 그 여인은 점점 나이를 먹어 갔고 얼굴에는 주름이 생겼다. 그 여인이 할머니가 되었던 어느 날 그녀는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 녹아 흐르는 냇물에 커다란 한 물체가 둥둥 떠내려오고 있었다. 젊은 청년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 죽은 청년은 그녀의 약혼자였다. 수십 년 전 에베레스트산에 등산을 갔다가 발이 미끄러져 그만 눈 속에 묻히고 만 것이다. 그녀는 언젠가 그 눈이 녹을 것이고 눈이 녹으면 비록 죽은 시체이지만 약혼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기대를 가지고 이 마을에서 일생을 보낸 것이다. 이것은 히말라야 산맥의 어느 마을에 전해 오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불량소년을 세계적인 의사로 성장시킨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


“자식의 장래는 그 어머니의 노력에 따라 정해진다.”
나폴레옹의 말이다. 이 말은 인간이 생존하는 한 불변이며, 지금도 훌륭한 어머니는 자녀를 훌륭히 성장시켜 사회로 내보내고 있다.


(1) 한국 선교 90주년 맞아 내한한 소아 뇌수술의 일인자 벤카슨 박사(미국 존스 홉킨스대학 부속병원 소아신경외과 과장)의 어머니는 최악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세계적인 의사로 성장시켰다.
그는 디트로이트의 가장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8세 때 부모가 이혼하여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환경이 그러하다 보니 그는 자연스럽게 불량 소년들과 어울려 싸움질을 일삼기 시작했다.
학교 생활도 순탄하지 못했다. 흑인이라 늘 따돌림을 받았고,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도 산수 시험 30문제 중 한 문제도 맞히지 못해 급우들로부터 항상 놀림을 받았다. 언제나 꼴지는 그의 차지였다.
그의 어머니 소냐 카슨은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쉬지 않고 일했다. 밤이 늦어서야 납덩어리처럼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귀가했지만, 자녀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얘야, 넌 마음만 먹으면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어, 노력만 하면 돼.”
어머니는 날마다 이런 말로 용기를 주며 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카슨은 초등학교 5학년 때 꼴찌를 했다고 자신을 놀리는 급우들과 싸움을 했다. 상대편의 수효가 많았기 때문에 때리기도 많이 때렸지만 맞기도 많이 맞았다. 얼굴은 터지고 퉁퉁 부었다. 거기다가 눈에 티까지 들어가 몹시 쓰라리고 아팠다.
그날 밤, 늦게 귀가한 어머니는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도 말이 없었다. 묵묵히 약을 발라 주고 찜질을 해주던 어머니는 아들을 가만히 눕히고 유방을 내어 젖을 눈에다 두세 방울 떨구어 주었다.
벤 카슨 박사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부드럽게 눈꺼풀에 스며드는 젖에 쓰라리고 아프던 눈 속이 축축해져서 티가 빠졌습니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동물적이고도 뜨거운 사랑을 느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품에 꼭 안아 주며 평소처럼 용기를 주는 말을 했다.
“얘야, 넌 마음만 먹으면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어. 노력만 하면 돼. 노력이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란다.”
어떠한 경우라도 포기하지 않고 최면술사적으로 용기를 불어넣어 주던 어머니의 사랑은 마침내 아들의 인생을 변하게 만들었다. 그는 노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금씩 성적이 향상되어 사우스 웨스턴고교를 3등으로 졸업했고, 명문 미시간대학 의과대학에 합격하여 연구·노력한 결과 마침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2) 재수생을 위한 어느 특수 학원이 있었다. 이 학원은 마치 사관학교 교육처럼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엄격한 규율과 강훈을 통해 학력을 증진시켰고, 규율을 위반하는 학생을 가차없이 퇴교시켰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세 명의 재수생이 의기 투합해서 기숙사의 울타리를 넘은 후 옆 마을의 술집에 스며들어 술을 퍼마셨다. 입시에 대한 공포와 절망감은 규칙을 어겼다는 기묘한 쾌감과 어울려 세 명의 젊은이를 흠뻑 취하게 만들었다.
갑작스레 마신 술로 이성을 잃어버린 이들은 이윽고 학원으로 돌아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유리창을 깨고 의자를 던지는 등으로 해서 학원은 발칵 뒤집혔다.
이튿날 아침 교무 회의에 이 문제가 거론되었다. 무단 이탈·음주·기물 파괴의 죄를 물어 퇴교 처분이 내려졌고 당일로 집으로 보내졌다.
사흘이 지난 후, 퇴교 당한 한 학생의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학원에 나타났다. 그 어머니는 교사들 앞에서 못난 아들이 학원 규칙을 어기고 면학 분위기를 해친 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러면서 조심스레, 학생들 앞에서 자식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사과할 수 있도록 한자리에 모이게 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 부탁이 받아들여져 학생들이 강당에 모였다. 학생의 어머니는 빽빽이 들어찬 재수생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너희들은 내 아들과 똑같은 환경에 처해 있는 재수생들이다. 내 아들이 일시적 충동을 이기지 못 해 규칙을 어기고 너희들의 공부까지 방해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이 모두가 아들을 잘못 키운 이 어미의 잘못이다. 제발 너희들은 이것을 교훈 삼아 내 아들과 같은 길을 밟지 말고 더욱 학업에 정진해서 좋은 결과를 얻도록 해라.”
그 어머니의 정성어린 호소에 장내는 숙연해졌다. 교사도 재수생들도 이 말에 감명을 받은 것은 분명했다.
그 어머니가 아들의 손을 잡고 학원을 떠난 다음, 남아 있던 학생들은 저마다 자발적으로 그 학생을 학원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는 청원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학생 전원이 서명한 청원서가 교무 회의에 제출되었다. 학원 측도 그 어머니의 아들이라면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퇴교 당한 학생은 그 다음날 학생과 직원들의 따뜻한 박수를 받으며 다시 학원으로 돌아 왔다.














하나님의 은혜


미국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무수한 고난을 겪고 뒤에 백화점 왕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재무장관도 되었으며 미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가 된 워너 메이커는 뒤에 다음과 같은 감사를 한 일이 있다. “나는 어려서 돈이 없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벽돌을 교회에 바친 일이 있다. 지금은 혼자 교회당을 짓고, 하나님에게 정성을 바칠 수도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큰 은혜인 것이다. 은혜를 입은 쟘버즈 목사에게도 보은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라고, 이것은 그의 은인인 쟘버즈 목사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100만 달라의 돈을 기부해서 교회를 세운 낙성식 때 눈물을 흘리면서 워너 메이커가 한 말이다.




배은망덕


마음이 착한 늙은 부부의 집에 젊은 식모가 새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 젊은 식모는 행실이 좋지 못해 이웃에 사는 젊은이와 눈이 맞았다. 몇 달이 지나자 그녀의 몸에 아이가 생기게 되었다. 이것을 안 노부부는 식모를 나무라지도 않고, 다행히 어린애가 없어 애태우던 터라 친절히 식모를 위로하면서, ‘조금도 걱정말아. 어린애를 나면 우리가 양자로 삼을 테니까.’라고 말했다.
이윽고 달이 차서 식모는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노부부는 출산 비용을 전부 부담했고, 출생한 아이를 양자로 삼는 수속을 밟았다.
그런데 수개월이 지나자 식모는 또 다시 몸이 무거워졌다. 이때도 친절한 노부부.
“어린애가 하나뿐이면 쓸쓸해 할 꺼야. 동생이 있는 편이 좋아.”
하고서, 두 번째 아이도 양자를 삼았다.
식모에겐 같은 일이 세 번 있었다. 어디까지나 마음 좋은 노부부는 이때도 그다지 화내지 않고 출생한 아이를 또 다시 양자로 삼았다.
그런데 이러한 대은(大恩)을 받은 젊은 식모는 산후의 몸이 회복되자마자, 노부부의 집에서 나가겠다고 말한다. 깜짝 놀란 노부부가,
“대관절 어떤 불만이 있어서 나간다는 거지?”
하고 물으니까, 그 식모는 태연히,
“이렇게 아이 많은 집에서 식모살이 할 수는 없어요”




은혜 이야기


여인의 자태는 이슬 머금은 해당화가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몸가짐과 맵시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마음 또한 비단결 같았다.
이 여인은 위무자(魏武子)라는 노인의 첩이었다. 두 사람의 금술은 더없이 좋았지만, 애석하게도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그러나 위무자에게는 본처 소생의 아들 과(顆)가 있었다. 과는 효성이 지극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위무자가 병이 들자 아들을 불러 말했다.
“내가 죽으면 반드시 그녀를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위무자의 병은 악화되었다. 이제는 정신도 혼미하여 사람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을 불러 이번에는 간곡한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그녀를 죽여서 함께 묻어라.”
아버지가 죽자 위과는 그녀를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면서 말했다.
“병이 심하면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나는 정신이 맑은 때의 분부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 후 선공(宣公) 15년 7월, 진(秦)의 환공(桓公)이 진나라를 쳐서 군대를 보씨(輔氏)에 주둔시켰다. 이 보씨의 싸움에서 위과는 진의 이름난 역사(力士) 두회(杜回)를 사로잡았다. 한 노인이 두회의 발 앞에 풀을 엮어서 걸려 넘어지게 했음으로 그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위과의 꿈속에 그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당신이 시집보내 준 여자의 아비되는 사람이오. 당신의 선친의 바른 유언에 따랐기 때문에 내가 은혜를 갚은 것이오.




선재적 은혜


하늘의 새가 날 수 있는 것은 날개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공기가 있기 때문이다. 무거운 배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은 배의 강한 엔진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배를 떠받쳐 주는 물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이와 같이 먼저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이 먼저라고 하는 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선재적 은혜라고 한다.




값없이 받은 은혜
    
다음은 어느 전통 깊은 옛 수도원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다.
강물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 사이에 이런 질문이 오갔다. “우리의 생명이 물에 좌우된다고 하는데 물이 도대체 어찌 생겼길래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 서로 이야기하던 끝에 지혜롭다는 물고기가 동료들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큰 바다에는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 학자가 있다고 하더라. 우리 한 번 가서 물어보자.” 그리하여 몇 마리의 물고기가 학자 물고기를 찾아 큰 바다로 갔다. 자초지종을 조용히 듣고 난 늙은 학자 물고기는 이렇게 말했다. “내 어찌 자네들에게 물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마는 자네들은 물 안에서 생겨났고 물 안에서 움직이고 살다가 죽는다네. 물 안에서 살고 있으면서 이때까지 그것도 몰랐단 말인가? 자네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 전부가 물일세.”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하나님을 떠난 행복은 존재할 수 없다. 엄마 품을 떠난 아기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불안하고 고독한 존재이다. “하나님, 당신은 나를 하늘을 향해 살도록 창조하셨기에 우리는 당신 품에 거하기까지는 안식을 모르며 내 마음은 불안에 떨고 있을 뿐이옵니다. 한낮의 밝음도 한밤의 어두움도 삶도 죽음도 모두가 당신 손안에 있사옵니다”(어거스틴) 이처럼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은 이미 은혜 속에 있다
중국 고사에 있는 얘기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물이 생명에 필수적인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물이 없다면 우리의 땅도 메말라 버립니다. 모든 생물이 다 죽어 버릴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물고기가 겁에 질렸다. “나는 지금 물을 찾아야 돼. 그렇지 않으면 곧 죽게 될거야!” 그래서 그 물고기는 가능한 한 빨리 헤엄쳐 나갔다. 그러나 그 물고기가 어디에서 물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는 이전에 결코 물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물고기는 호수에 있는 다른 물고기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큰 강으로 헤엄쳐 나갔으나 어느 물고기도 어디에서 물을 찾을 수 있는지 말해 줄 수 없었다. 그 물고기는 바다의 가장 깊은 곳에 이르기까지 계속 헤엄쳐갔다. 거기서 나이 많고 현명한 고기를 발견했다. 그 물고기는 숨을 헐떡이며 “어디서 물을 찾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나이 많은 고기는 껄걸 웃었다. “물이라고? 지금 네가 그 안에 있지 않은가? 네 고향의 호수에서도 너는 물 속에 있었어. 네가 태어난 이래 물 밖으로 나간 본 적이 결코 없단 말이야!” 그 작은 물고기는 “나는 항상 물과 함께 있었는데 내가 그걸 몰랐군”하고 말하면서 고향으로 다시 헤엄쳐 갔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살아야 한다.














아브라함 링컨의 용서


나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던 한 청년에 관한 사건을 알고 있다. 그 청년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그 집에는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는 링컨의 삶에 대해 읽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오빠를 사랑하는지 만약 링컨 대통령이 아신다면 사형은 집행되지 않을 거예요.”
그 아이는 아버지께 워싱톤에 가서 간청해 보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말했다. “소용없는 일이야. 결국 법대로 집행될 텐데. 사형 선고자에 대해 사면 요구가 한 두 번 있었지. 그러나 군법회의에서 거절됐단다. 그리고 다시는 대통령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했고 말이야. 선고를 받았으니,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해.” 그 부모는 아들이 사면될 거라는 믿음이 없었다. 하지만 어린 여동생은 희망에 차 있었다. 그 소녀는 버몬트에서 기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떠났다. 백악관에 도착하여 들어가려 했을 때 경비병들이 막았지만, 간곡한 사정 얘기를 듣고는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었다. 대통령 비서실에서도 다시 막았지만 아이의 사정을 듣고는 비서의 마음도 변하여, 그 소녀를 집무실에 들어가도록 해주었다. 거기에는 상원 의원들과 장군들, 그 밖에도 여러 정치인들이 남북 전쟁에 대한 중요 사안을 토의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대통령은 문가에 서 있는 그 아이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는 그 소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그녀는 대통령께 가까이 가서 모든 이야기를 했다. 링컨도 역시 아버지였으므로 그의 두 뺨 위에 눈물이 흐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 청년을 위싱턴에 즉시 보내 달라는 내용의 긴급 공문을 군부대에 써 보냈다. 그가 도착했을 때 대통령은 그를 사면하고 1개월간의 휴가까지 주어서, 어린 여동생과 함께 집으로 보내어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었다.
-무디 목사-




바다보다 하늘보다 넓은 것-용서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에는 주인공 쟝발장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쟈벨 경사가 있다. 그는 쟝발장이 어느 소도시의 시장이 되었을 때도 그의 과거를 폭로하려고 했다. 그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쟝발장을 존경하는 청년 대원들은 이 악질 경사를 잡아 총살시키려고 계획했다. 이를 안 쟝발장은 그 사형을 중지시키고 자유인이 되게 해주었다. 그러자 쟈벨은 그를 향해 ‘당신이야말로 나를 가장 죽이고 싶을 텐데요?’라고 외쳤다. 그때 그는 ‘이 세상에는 넓은 것이 많이 있소. 바다가 땅보다 넓고 하늘은 그 바다보다 더 넓소. 그러나 그보다 더 넓은 것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용서라는 관대한 마음이요’라고 대답했다.  
                                     


내 아들 죽인 자 아들 삼겠소


손양원 목사는 급히 계엄 사령관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정중히 탄원했다.
“나의 죽은 아들들이 결코 자기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죽은 제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의 죽음의 값을 평가 절하시키는 일입니다.”
손목사의 이 엄청난 발언에 사령관은 어이가 없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손목사는 내친 김에 한 발짝 더 내디뎠다.
“우리 아이들은 예수 믿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예수는 자기 생명을 이웃을 위해 초개같이 버렸습니다. 친구를 사랑한다면 죽음까지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죽이시면 안됩니다. 저는 내 아이를 죽인 저 아이를 자식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손목사의 사랑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했다. 너무나 엄청난, 파격적, 아니 폭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손양원(孫良源)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양군 칠성면 구성리에서 손종일(孫宗一)장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손종일씨는 손양원이 7세때 예수를 믿어 장로가 되었고, 그의 두 동생 손의원, 손문준도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었다.
손양원은 칠성보통학교를 다닐 때 궁성요배를 거절했다가 등교정지 처분을 받아 선교사의 도움으로 다시 학교를 나가기도 했다.
1929년, 그의 나이 18세 때는 서울로 올라가 중동중학교에 입학을 했으나 아버지가 3.1운동에 연루되어 마신 형무소에 수감되는 바람에 학교를 중퇴하고 하향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다가 1921년 향학열을 누를 길 없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스가모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그는 교회 출석은 물론 노방 전도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중학교 졸업 무렵 성령의 감화를 받고 “몸바쳐 일하겠다”는 서원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1923년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귀국하여 경남 성경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까지 울산 방어진교회를 위시하여 남창교회, 양산교회, 부산 감안 나병원교회, 남부민교회, 원동교회 등지에서 조사로서 전도 사업에 종사했다.
손양원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1931년이었다. 손양원이 재학하는 시절은 신사참배 문제로 많은 고통을 당할 때였다.
교파적으로도 어떤 확신이 없이 갈팡질팡했다. 감리교는 처음부터 문제시하지 않았고 장로교도 선교사들간에 해서는 안 된다는 파와 해도 좋다는 파로 의견은 양분돼 있었다.
“신사참배가 뭐 그리 대단한 문제라고 생명까지 겁니까? 오히려 우리의 관심은 기독교의 생명이 이 나라 백성들의 마음에서 뽑히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캐나다 선교회의 자세였다. 그러나 남장로교 선교회는 반대였다.
“신사참배는 우상에 절하는 것입니다. 전남북노회에 경고하건데 만약 귀 노회에서 노회적으로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하면 우리 선교회는 노회를 탈퇴하여 다른 분야에서 선교 사업을 전개할 것입니다.
1938년. 손양원이 신학교 졸업반에 재학할 때였다. 바로 그 해 제 27회 9월 총회는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라고 가결했다 교직자들이 앞장서서 신궁으로 몰려가 참배를 했다. 이 참담한 광경을 지켜보면서 손양원은 눈물을 흘렸다.
그 해 가을 손양원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여수에 있는 나병환자 애양원교회로 부임했다.
그는 신사참배를 극도로 미워하여 강단에서 그 부당성을 공격했다. 자기 교회에서만 그 부당성을 공격한 것도 아니었다. 부흥사로서 전국 교회 부흥 사경회를 인도하러 나가면 “우상을 섬기는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고 소리쳤다.
1940년 9월 25일. 일경은 부정선인으로 그를 체포하여 여수경찰서에 감금해 버렸다. 고등계 형사는 엄하게 꾸짖었다.
“당신은 어째서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라고 하는가? 이미 교단적으로도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라고 가결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총회장이요, 노회장이고, 신학교수요 신학박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들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유독 국민의례를 우상숭배라고 공격하니 어인 일이요? 답답하다고 생각지 않으시오?”
“진정한 기독교인이면 신사에 절하는 것이 우상숭배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깨달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지식적 종교가 아니고 체험적 종교이기 때문에 박사가 못 믿는 진리를 무식한 노인들이나 부인들이 오히려 잘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유일신 종교라서 결코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은 어떤 위협이나 회유로서 돌아설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징역형을 언도받았고 공판 법정에서는 신사참배 반대 이유를 세 가지로 밝혔다.
첫째. 동방요배, 신사참배 반대는 하나님의 계명이니 이를 거역할 수 없다.
둘째. 우상에 절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탈선하는 것이니 시행할 수 없다.
셋째.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보아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으니 국민된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도 절하지 못한다.
그는 해방되기까지 6년 동안을 광주형무소, 서울형무소, 청주형무소로 이감을 계속했다. 그러나 신앙 앞에선 그 어떤 타협도 몰랐던 그였지만 감옥에 있으면서 두 번 울었다.
1945년 4월 13일 그의 부친 손종일장로가 별세했을 때 “나는 불효자”라면서 크게 슬퍼했고, 주기철 목사와 최봉석 목사, 박관준 장로가 순교했을 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주님, 종도 신앙의 진리를 굳게 지켜 그들의 뒤를 따라 순교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 주옵소서.”
손양원 목사는 통곡하며 기원했다. 그는 그 긴 옥중 생활을 찬송, 기도, 독경으로 일관했다. 성품 또한 너무도 비둘기 같아 ‘옥중성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1945년 8월 17일, 손목사는 해방이 되면서 출옥했다.
그는 다시 애양원으로 돌아갔다. 애양원 교우들이 손목사를 부모처럼 따른데는 그의 넘치는 사랑 때문이었다. 그는 나환자들과 같이 먹고 같이 잤으며 고름이 흐르는 몸을 껴안고 기도하기도 했다. 친동기도 못하는 엄청난 사랑을 전해 주자 모두들 손목사를 부모처럼 따랐다.
그러나 1948년 10월 20일 공사도배들의 여순반란 사건이 바로 그가 목회하는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다. 손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여수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다.
공산 프락치들이 두 아들을 브르조아로 몰아 총살했다.
여순반란 사건은 이내 육해공 삼군 작전으로 진압되었고 그를 죽인 전재선이라는 청년은 체포되었다. 물론 즉결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에 처할 것이었다. 그러나 손목사는 그를 석방케 했을 뿐 아니라 양아들로 삼았다.
두 아들의 영결예배에서 유족 대표로서 인사한 말은 심금을 울린다.
“여러분 내 어찌 긴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 느낀 바 은혜 받은 감사의 조건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나 같은 죄인의 가통에서 순교자가 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성도 중에서 이런 보배를 자식으로 주셨는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귀한 장차자를 바치게 된 것 축복 중 축복입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늘 두 아들을 순교 제물로 바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다섯재, 예수 믿다 와석종신해도 복인데 전도하다 총 맞아 죽게 되니 어찌 감사치 않으리요. 여섯째 미국 유학가려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갔으니 안심하고 감사합니다. 일곱째. 내 아들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을 마음 주시니 감사합니다. 여덟째. 우리 두 아들 순교 열매로 많은 순교 자녀 태어나겠으니 감사합니다. 아홉째. 역경 중에서도 여덟 가지 감사 찾게 하시니 감사하옵고 열째. 이 큰 영광은 먼저 가신 부모님이 이 아들 위해 35-36년간 기도하고 교우 여러분이 23년간 기도해 준 덕분으로 오직 감사할 따름입니다.”
1950년 6.25가 터지고 나서 교인들은 손목사에게 몸을 피하라고 권면했다. 그러나 손목사는 “양무리를 두고 혼자 피난할 수 없다”고 교회를 지키다가 9월 13일 여수를 쳐들어 온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어 여수 경찰서에 감금당했다가 그 달 28일 미평 과수원으로 끌어내어 총살시켜 버렸다.
그는 공산군의 총을 맞고도 환하게 웃으며 스데반처럼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아버지의 나라로 그 영혼이 옮겨갔다.   












































그리스도의 순종


그리스도가 순종의 옷이 되어 그 순종의 옷을 입어야만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신 순종은 어떤 모습인가? 첫째, 그리스도에게 있어 순종은 삶의 원리였다. 둘째, 그리스도에게 있어 순종은 기쁨이었다. 셋째, 그리스도에게 있어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삶 가운데는 성장과 진보가 있었다. 그리스도가 순종의 행동을 하실 때마다 하나님은 또 다른 명령을 하나씩 더 열어 보여 주셨다. 넷째,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순종은 죽음에까지 이르는 것이었다. 다섯째,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순종은 깊은 겸손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여섯째,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순종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에게 진정한 순종이란 본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우리는 최초의 불순종의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의를 덧입혀 주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전1:22)




순종하는 자가 얻은 상금


옛날 순 임금 때에 있었던 일이라고 전해 온다. 순 임금이 하루는 신하들에게 구럭에다 물을 길어다 부으라고 하였다. 그때에 모든 신하들은 수군수군하며 임금님을 비난하면서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충성스런 한 신하는 임금님의 명령을 어찌 거역하리요 하면서 하루종일 물을 길어다가 구럭에 부었다. 구럭에 물이 담기든 말든 간에 얼마나 퍼 담았는지 나중에는 우물 바닥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순간, 번쩍거리는 큰 황금 덩어리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그 신하는 그 황금을 건져 가지고 임금님께 가서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임금은 매우 기뻐하면서 “이것이 순종하는 자가 얻을 상금이니 그대가 가지시오.”라고 말했다.


ꋻ그리스도인의 가장 바른 자세는 첫째로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요, 둘째도 복종이요, 셋째도 복종이다.
-칼 빈-




다만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한 번은 레오날드 우드(Leonard Wood)경이 프랑스 왕을 방문했다. 왕은 그가 무척 마음에 들었으므로 다음 날 만찬에 초대한다는 기별을 보냈다.
레오날드 경은 다음 날 궁전으로 갔고, 한 홀에서 왕을 만났다. 프랑스 왕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반갑게 그를 맞으며 말했다. “레오날드 경, 나는 이곳에서 당신을 보게 되리라고는 정말 기대도 못했소. 어떻게 된 일이오?” 그러자 레오날드 경은 몹시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폐하께서 저를 초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었소, 하지만 경은 나의 초대에 아무런 응답도 보내지 않았소.”
비로소 사태를 이해한 레오날드 우드경은 정중히 대답했다. “왕의 초대에는 결코 가타부타 대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순종만 있을 뿐이죠.”
순종은 모든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다.(G. MacDonald)


ꋻ인생의 참 목적은 너의 자유를 발견하는데 있지 않고, 너의 주인을 발견하는데 있다.
-P. T. Forsyth-




나아만의 말씀 순종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문둥병자였다. 그러나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엘리사 선지자의 말을 듣고 순종함으로 깨끗이 고침을 받았다.




베드로의 말씀 순종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헛수고만 하고 바닷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이때에 주님이 그곳에 오셔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말씀대로 순종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다. 그랬더니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는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히게 되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 기술과 경험, 그리고 지식도 아무 소용없을 때가 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헛수고가 없다.




처음에 순종했다면..


옛날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 부자는 개를 좋아해서 족보가 있는 개를 키웠다. 강아지 때 사다가 어느 정도 중개가 되었는데 그만 잃어버렸다. 주인이 하인을 불러서 혼을 내고는 잃어버린 개를 당장 찾아오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하인이 말대꾸를 했다. “나는 주인의 종이지 개의 종은 아니므로 개를 찾으러 가지 못하겠습니다.” 하인이 거절을 하지 주인이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그러나 주인은 점잖게 다시 명령했다. “내가 가마를 타고 어디를 가야 되겠으니 곧 가마를 대령하도록 하라.” 주인이 직접 가신다고 하니 하인이 가마를 대령하였다. 주인이 가마를 타고 하인에게 “이제 가자.” 하였다. ‘예이’ 하고 하인이 가마를 메고 갔다. 하인이 주인에게 여쭈었다. “주인 영감님, 어디로 행차하시옵니까?” 주인이 점잖게 대답하였다. “잃어버린 개를 찾으러 가노라.” 처음에 주인의 말을 순종하였더라만 가마도 메지 않고 편하게 찾으러 갔을 텐데 불순종하더니 가마에 주인까지 태우고 열 배나 힘들게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축복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일본을 강대국이라 말한다. 과연 세계 도처에서 일본인과 일본제품을 보고 놀란다. 많은 사람들은 대국(大國)에 놀라고 만다. 사실은 대국을 이루는 것은 성실한 한 사람, 정직한 기업 정신, 작은 부분에 생명을 거는 연구의 결과이다.
나고야 근교에 도요다 자동차 본사와 공장이 있다. 일년에 400만대를 생산하는데 자동차 한 대가 완성되려면 2만개의 부품이 든다는 것이다. 100km, 200km를 달리는 자동차는 설계도에 딱 맞는 부속품으로 완제품이 되어 달리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설계에 맞는 부속품(순종)이다.














우찌야의 교만


솔로몬 다음으로 명성을 떨친 우찌야(783-724 B.C.E.)의 오랜 치세 아래 유다의 국력은 그 절정에 이르렀다. 우찌야는 군사력과 아울러 나라의 경제력도 크게 신장시켰다. 그는 불레셋 족과 아라비아 족을 정복하였고 암몬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으며 전 국토를 요새화 하였고 군대를 재편성하였다. “전군(全軍)에 방패, 창, 투구, 갑옷, 활, 물매를 마련해 주었고 활을 쏘고 큰 돌을 던지는 무기를 기술자에게 고안시켜서 예루살렘 성 망대들과 성 귀퉁이마다에 설치해 놓게 하였다”(역대기하 26:14,15). 그는 왕으로서, 행정가로서, 군의 총사령관으로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여 왕국 분열 이래 유다의 국토를 가장 넓게 다스렸다.
그런데 그의 능력이 곧 그의 약점이 되었다. 그는 교만 방자해져서 스스로 사제가 되려 했고, 사제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인 제단의 분향을 자기 손으로 하고자 했다. 대사제 아자리야와 ‘용감한’ 사제 팔십 명이 뒤따라 들어가 우찌야 왕을 가로막고 말하였다.
“우찌야, 야훼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일이 아니오. 분향하는 일은 선별된 아론의 후손 사제들이 할 일이오. 이 성소에서 나가시오.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셨으므로 야훼 하나님의 영광이 왕을 떠나시었소.” 이 말을 듣고 우찌야는 화를 내었다. 그런데 그가 화를 내는 사이에 문둥병이 그의 이마에 번졌다. 그리하여 우찌야 왕은 문둥병자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야훼의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몸이 되었으므로 별궁에서 홀로 문둥병을 앓으며 지내야 했다(역대기하 26:18-21).


사람은 산에서는 발을 헛디뎌서 넘어지지 않으나 아주 조그마한 개미 둑 같은 언덕에서는 넘어지는 수가 있다.
큰 일에는 조심하지만, 조그마한 것을 소홀히 해서 큰 일을 실패하는 수가 많다.  
스펄젼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기도하지 않고 성공했으면 성공한 것 때문에 망한다. 왜 망하느냐? 교만하기 때문에 망한다. 교만은 그 자체가 죄요, 겸손은 그 자체가 믿음이다. 교만은 그 자체가 부패한 죄요, 겸손은 곧 성결한 증거이다.”라고 말했다.




이기적 마음을 방치한다면...


수레 만드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부귀해지기를 바라고, 관을 만드는 사람은 타인들이 일찍 죽고 많이 죽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부귀해지기를 바라는 전자의 마음은 선량한 마음이다. 이와는 반대로 사람들이 일찍 죽기를 바라는 후자의 마음은 악한 마음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수레 만드는 사람은 마음은 본디 착하고, 관을 만드는 사람의 마음은 본디 악하단 말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수레 만드는 사람은 사람들이 부귀해져야 수레를 많이 팔 수 있고, 관을 만드는 사람은 사람들이 많이 죽고 빨리 죽어야 관을 팔 수 있다.
이렇듯 사람들은 자기의 이해 관계에 따라 그 마음이 달라진다. 때문에 이기적인 그 마음들을 그냥 놓아두면 필연적으로 사회는 혼란해진다고 믿은 것이다.
한비자는 모든 인간 관계가 이기적 목적에서 무엇인가를 주고받는다고 보았다. 심지어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도 이기적 목적이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해 관계가 부합된다면 서로 낯선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화합하고, 이해 관계가 맞지 않으면 부자지간이라 할지라도 서로 투쟁하게 될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자존심 때문에 파탄된 가정


영국 어느 가정에서 치약 하나 때문에 이혼하고 가정이 파괴된 사건이 있었다. 여자는 대범하고 한편 부주의한 여자인 반면에 남자는 꼼꼼하고 실수를 별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치약을 사용할 때 여자는 치약의 중간을 아무렇게나 꾹 짜서 퍽 집어던지는 반면에 남편은 치약의 꼬리부터 차근차근 눌러 사용하기 때문에 아내에게 왜 그렇게 쓰느냐고 잔소리를 하면 아내는 뭐 치약 하나가 얼마나 한다고 잔소리를 하느냐고 덤벼들곤 했다. 서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싸우곤 하다가 이혼하고 아이들은 고아원에 가고 귀한 가정 하나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부부가 서로 똑똑한 체하고 자존심만 세우려 들면 그 가정은 파괴되고 만다. 서로 서로 똑똑한 체하고 상대방의 잘 잘못만 따지고 옳고 그른 것만 따지려 들면 그 가정은 죽고 만다.








겸손하면


겸손하면 형통한다. 겸손한 덕을 지니고 있으면 높은 지위에 있는 자는 더욱 빛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자는 남이 업신여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겸손의 덕을 지니고 있으면 유종의 미를 거둘 수가 있다.
-역경-




대통령의 겸손


쏠버대학을 졸업한 ‘포항가리’는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으로 지낼 당시 쏠버대학에서 라비스 박사 교육 50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답사를 하기 위하여 단상에 오른 라비스 박사는 깜짝 놀랐다. 내빈석도 아닌 재학생석 맨 뒷자리에 포항가리 대통령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황급히 단상에서 내려가 대통령을 단상으로 모시려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끝내 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제자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오직 선생님뿐입니다.” 장내는 뜨거운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고, 포항가리 대통령은 더욱 명성 높은 대통령이 되었다. 허세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높아진 자는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섬기는 자로서 또는 종으로서의 사명을 다한 자는 큰 자로서 또 높아진 자로서 세세토록 존귀와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고아들을 위한 겸손


어느 작은 마을에 새로 고아원을 설립한 중년 부인이 고아원의 살림을 꾸려 가다가 돈이 떨어져 고아들의 먹을 것을 사기 위해 모금함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여인은 모금함을 들고 구걸하다시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불쌍하고 한심했고 또한 창피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아원에서 굶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해서 다시 힘을 내어 모금을 하기 시작했다.
저녁때가 되어 큰 길가의 네온 불빛이 화려하고 손님이 많은 어느 술집으로 들어갔다. 여인은 한 손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고아들을 위한 사랑의 손길’이라고 쓰인 모금함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 남자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저으며 저리 가라고 말했다. 여인은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지만 창피를 무릅쓰고 조그맣게 이야기했다. “고아들을 위해 사랑의 손길을 베풀어주시지요.” 그 남자는 갑자기 “이게 재수 없게 왜 이래.”하고 소리를 지르며 여인의 얼굴에 마시던 맥주를 홱 뿌렸다.
술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일어난 일에 놀라서 다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과연 그 여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한 모습으로 지켜보았다. 여인은 맥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 손님께선 저에게 맥주라도 주셨지만 우리 고아들에게는 무엇을 주시렵니까?” 이때 술집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그리고 손님들이 하나둘씩 그 여인에게 다가와서 모금함에 돈을 넣었다. 마침내 그 난폭한 남자도 자신의 지갑을 몽땅 털어 모금함에 넣는 것이었다.
여인의 마음속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다만 자신이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고아들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고아들에 대한 사랑이 이 여인을 이처럼 스스로 낮아지게 한 것이다. 이 여인은 스스로 비천함에 처함으로 존귀한 일을 했던 것이다.


겸손


존 번연(John Bunyan)은 「천로역정」에서 “낮은 데 거하는 자는 떨어질 걱정이 없다.”(He that is down, fears no fall)고 말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마음속에만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다윗 왕과 유대의 헤롯왕의 차이점은 선지자로부터 자신의 잘못을 책망 받은 후 취한 태도에서 나타난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후 나단 선지자가 와서 책망할 때 그는 겸손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았으나, 헤롯왕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후 요한이 와서 책망할 때에 교만함으로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가 목을 베어 죽였다. 그러므로 그는 저주를 받아 죽었다.




최고의 미덕-겸손


성 어거스틴이 어느 날 제자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선생님,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덕은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첫째는 겸손이다”라고 대답했다.
“둘째는 무엇입니까” “겸손이다.”
“셋째는 무엇입니까?” “셋째도 겸손이다.”
“그러면 겸손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교만이다.”
제자는 다시 물었다.
“선생님, 교만은 무엇입니까?” “나는 지극히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슈바이처의 겸손


1913년 아프리카의 람바네에 이른 ‘아프리카 흑인의 친구’인 슈바이처(Schweitzer,Albert)박사는, 함석과 판대기로 상자집 같은 병원을 세우고, 원시림을 개간하여 누구나 따먹을 수 있도록 과목을 심었다. 이것은 이 땅위에서 다시 보는 에덴이었다.
그는 세계를 지도하는 정신력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높은 의자에서 명령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파이프 올겐 위에서 은어와 같이 뛰노는 손을 소유한 예술가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내적 가치를 자부하여 뽐내지 않았다. 그는 광산의 광부같이 팽이를 들었고, 농장의 농부같이 밭을 갈았으며, 건축가과 같이 집을 지었다.
원시림을 개척하는 슈바이처는 간단한 노동복을 입었고, 그의 이마에는 구슬 같은 담이 흘렀으나, 그의 입에는 유머가 섞여 있는 쾌활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느 사람을 대하든지 겸손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자신을 정복하였고, 그를 대하는 사람을 정복하였으며, 그가 사는 세계를 정복하였다.




미 국무장관의 겸손


미국의 어떤 사업가가 호텔을 찾아와 투숙할 방을 하나 요청하였으나 그날은 호텔이 만원이라 방을 얻지 못했다. 낙망한 표정으로 걸어나가는 그에게 어떤 신사가 지금은 어디를 가도 방을 구할 수 없다며 자기와 동숙하자고 했다. 그 사업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 고마운 제의를 받아들였다.
방을 나누어 준 신사는 자기 전에 열심히 기도하는데, 동숙하는 사업가와 그의 사업을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성경 읽을 시간이라며 성경을 읽고는 또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었다.
아침 식사를 같이 하고 헤어 질 시간이 되었다. 어제는 서로 간단하게 인사 소개를 했지만, 한 방을 같이 쓴 친숙한 사이이므로 서로 명함을 교환했다. 신사의 명함에는 윌리엄 제임스 오브라이엔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업가가 의아스럽다는 듯이 “국무장관하고 이름이 꼭 같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신사는 겸손한 어투로, “네, 같은 인물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사업가는 그토록 겸손하고 사랑이 넘치며 섬기는 자세를 가진 오브라이엔 장관으로부터 큰 감화를 받았고,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죽은 나무는 지나치게 휘면 부러지고 말지만 산 나무는 부러지지 않는다. 오브라이엔 장관의 살아 있는 신앙이 그를 그렇게 겸손하게 했고 참된 사랑의 빛을 발하게 했다.




조만식 장로의 겸손


어느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려는 조장로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조장로는 손님과 얘기하다 그만 예배 시간에 늦고 말았다. 설교하던 주목사는 늦게 들어오는 조장로에게, “장로님, 오늘은 의자에 앉지 말고 서서 예배를 드리십시오”라고 했다. 옛 스승인 노장로에게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그러나 조장로는 그대로 순종했다.
설교를 마친 주목사는 조장로에게 기도하라고 했다. 조장로가 “하나님 아버지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애국 운동한다고 사람을 만나다가 하나님 만나는 예배 시간에 늦었습니다. 목사님이 얼마나 마음 아프시면 설교하다 말고 이토록 책망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종을 마음 아프게 한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은혜스러운 설교를 듣던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 것을 방해한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하며 눈물로 기도하자, 주목사와 온 교우들이 함께 울었다. 사람들은 “과연 그 스승의 그 제자요, 그 목사의 그 장로”라며 칭송했다.










성 프랜시스의 섬김


유명한 아씨시의 성자 프랜시스는 이런 고백을 남겼다.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그래서 힘을 행사하고 다른 사람들을 부리고 누려보는 삶을 나는 살아 보았다. 거기에는 약간의 기쁨이 있었다. 그런데 나를 희생하고 이웃의 발을 씻기고 섬길 때 이 삶은 나에게 숭고한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섬기는 삶을 보여준 슈바이처


‘20세기의 성자’로 불리는 알버트 슈바이처(1875-1965)는 의학박사요, 음악박사요, 또 신학박사였다. 그는 의료 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자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 투신했다. 그 이후의 숱한 공적으로 195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국제적 저명인사가 되었으며, 저서 「하나님 나라의 신비」와 유고집 「하나님 나라와 초대 기독교」 등 많은 체험적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아프리카 람바레네(Lambarene)에 설립한 병원은 철저한 자선병원이었으므로 그 유지가 매우 어려웠다. 한 번은 이 병원의 유지기금 마련을 위한 모금차 그가 고향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친척과 친지와 동료들이 그를 영접하기 위해 기차역에 나갔다. 이윽과 기차가 도착하고 모든 사람들이 1등 또는 2등 객실을 바라보며 그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정작 그는 일반 서민들이 타는 맨 뒤칸 3등 객실에서 내리고 있었다. 깜짝 놀라 달려간 영접객들이 “아니 박사님, 왜 3등 칸을 타고 오셨습니까?”라고 하며 언짢은 듯이 묻자, 그는 인자하게 웃으며 “4등 칸이 있어야지요”라고 대답했다.
또 한 번은 슈바이처 박사가 미국 시카고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시장을 비롯한 유력한 인사들이 그를 환영하기 위하여 기차의 도착을 기다렸다. 기다리던 기차가 도착하고 기차에서 내린 그가 시장을 향해 오다가, 힘겹게 큰 가방 두 개를 들고 기차에 오르려는 한 할머니를 보게 되었다. 그는 서슴없이 그쪽으로 뛰어가 할머니의 가방을 받아 들고 기차 안으로 들어갔으며, 좌석번호를 찾아 짐을 적당한 곳에 두고 할머니를 앉혀드린후 내려와서 시장 앞으로 갔다. 그리고 “시장님 미안합니다. 평소의 버릇 때문에 오래 기다리시도록 결례를 했습니다”라고 인사했다.














협력을 한다는 것


옛날 한 노인이 삼 형제를 두었다. 그러나 삼 형제가 서로 반목하면서 피차에 협력을 하지 않았다. 이 노인의 걱정은 자기가 물려줄 유산인 과수원을 어떻게 삼 형제에게 분쟁이 없이 나누어 줄 수 있는가였다. 노인은 꾀를 내어 아들들에게 싸리나무 한 가닥씩을 가져오게 하였다.
세 아들을 불러 놓고 각자에게 가져온 한 가닥의 싸리나무를 꺾어보도록 했다. 세 아들들은 별 힘들이지 않고 자기의 나무가지를 꺾을 수 있었다. 그 다음에서 큰 아들부터 가지 세 개를 함께 꺽어보도록 했다. 큰 아들도, 둘째도, 막내도 여의치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아들이 함께 힘을 합쳐서 한 묶음의 가지를 꺾어 보도록 했다. 세 아들이 함께 싸리나무 묶음을 별 힘 안들이고 꺾을 수 있었다.
그리고나서 노인은 자신이 평생 가꾸어 온 과수원을 물려줄 터이니 이처럼 함께 협력해서 유산을 나누어 팔지 말고 가꾸도록 부탁했다. 복음의 유산도 형제 교단끼리 협력해서 증거 하여야 하는 것이다.




신앙의 협력


비행기로 씨를 뿌려야 할만큼 큰 말 농장의 주인에게는 존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부부가 이웃집 파티에 다녀오는 사이에 그만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 아이는 집에서 혼자 놀다가 그만 무성하게 자란 밀밭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점점 깊이 들어가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밤새도록 밀밭 속을 헤매다가 이 어린이는 공포에 질린 채 밀밭 속에서 죽고 말았다.
존의 부모는 이튿날까지 아들을 찾을 수 없자 한 방법을 생각했다. 그 다음 날 동네 보이스카웃 대원을 동원해 손에 손을 잡고 밀밭을 훑어가며 찾아보았다. 얼마 후 존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밭고랑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존의 부모는 아들의 시체를 안고서 “진작 손에 손을 잡을 것을....”하고 한탄했다.
신앙생활도 이와 같다. 혼자서는 방황할 뿐이다. 우리는 손을 잡아야 한다. 서로 도우며 사랑하며 교회와 교회가 협력해 나갈 때 신앙은 성숙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은 각각 다른 교회들을 주신 것이다.














싸움의 결과
갈비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두 집 다 무난한 매상을 올리고 있었지만 같은 종류의 음식점으로서 늘 상대를 견제하는 눈치였다.
하루는 앞집에서 간판을 바꾸어 달았는데 ‘원조 닭갈비’하고 써 붙였다. 간판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손님이 늘어 재미를 보았다. 그러자 맞은편 식당에서는 다음날로 ‘진짜 원조 닭갈비’라는 간판을 더 커다란 글씨로 달아 놓았다. 조마조마하게 두 집 사이에 맴돌던 전운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폭발한 모양이다. 양쪽 집의 싸움은 감정 싸움이 되어 이성으로는 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전투 양상은 점점 치열해질 수밖에. 간판을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치울라면 비용만 해도 엄청날 텐데 이제는 그런 손익계산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다. 상대를 누르고 말겠다는 자존심과 오기만 발동해서....
“우리가 진짜 원조 닭갈비”하면 “원조 특허 받은 진짜진짜 닭갈비”라고 응수하고 뒤에다 ‘주의! 유사닭갈비!’하고는 경고문까지 내달았다. 다음날엔 ‘원조라고 다 원조냐?’를 선봉에 세웠다.
주인들은 물론이고 종업원까지 두 팔 걷어붙이고 나와서 멱살잡이하고 욕설에다 온갖 모함을 다 퍼부어댄다.
구경 중에 제일이 불구경, 싸움구경이라더라. 흥미있게 싸움구경하던 사람들도 험악해져가는 분위기에 질려 도망질했다.
입맛을 잃은 단골들은 혀를 차며 다른 먹자골목으로 옮겨갔다. 이젠 코빼기도 안 보인다.
이래저래 양쪽 식당 모두 단골을 잃어버리고 아예 재기 불능, 텅 빈 거리에 주저앉게 되었다.
‘상처뿐인 전투! 이젠 그만둡시다.’
그때서야 제정신을 찾았지만 이미 때늦은 뒤였다.




싸움의 대상을 정확하게 판단하라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이렇게 말했다. “이상하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마귀와 더불어 싸워야 할 성도들이 왜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가? 우리의 대적은 사탄이 아닌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다. 그런데 왜 성도들은 일치된 교제를 나누지 못하고 있는가? 우리의 대적은 사탄인데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왜 그리스도 예수 안의 다른 성도들에게 돌려 불편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