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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종말' 시나리오 양자컴퓨팅이 예측했다
하나님아들
2025. 2. 23. 23:32
'우주 종말' 시나리오 양자컴퓨팅이 예측했다
입력2025.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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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만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빅뱅과 함께 시작한 우주도 언젠간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주는 거대한 충돌과 함께 끝날까, 아니면 조용히 사라져 갈까. 우주의 기원에 대해 늘 이야기하는 우주론자들도 사실 우주의 종말을 예측하는 것은 힘든 과제다.
그런데 최근 영국 리즈대 물리천문학부 즐라트코 파픽 교수와 독일 율리히 물리학연구소 자카 보뎁 박사가 주도하는 공동 연구팀이 양자컴퓨팅 기술로 우주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론을 시뮬이레이션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우주가 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과정이 드러났다. 과연 우주는 어떻게 끝나고, 그 종말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많은 공상과학(SF) 영화와 소설들이 지구와 인류의 멸망을 상상해왔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 중 한발 더 나아가 우주의 멸망까지 다룬 것은 드물다. 인류가 사라지고 지구가 폐허가 돼도 광대한 우주는 대체로 그 모든 것을 끝까지 지켜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과학자들에게 우주의 종말은 우주 탄생만큼이나 흥미로운 주제다.
우주 종말의 씨앗 '가짜 진공'
우주 종말의 시나리오에는 보통 다섯 가지가 존재한다. 우주가 계속 팽창하면서 빈 곳이 점점 많아지고 에너지가 점차 흩어지면 모든 물질들 역시 뭉치지 못하고 흩어져버리는 '열 죽음'부터, 어떤 작용도 거부하는 수상한 암흑에너지의 성질로 인해 결국 우주 공간을 이루는 망이 찢어진다는 '빅 립', 진짜 진공 상태로 인한 '진공 붕괴', 우주들이 서로 당구공처럼 부딪치다 멸망하는 '바운스', 우주가 쪼그라들어 모든 게 소멸하는 '빅 크런치'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현재 일부 과학자들은 '진공 붕괴' 방식에 더 집중하고 있다. 거의 50년 전 양자장 이론 연구자들은 우주가 '가짜 진공(False vacuum)'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가짜 진공이란 겉보기에는 안정돼 보이지만 사실 더 낮은 에너지 상태의 안정적인 '진짜 진공(True vacuum)'으로 무너질 수 있는 우주의 상태를 말한다.
진공은 우주의 기본적인 요소다. 우리는 대부분 진공을 공간에 어떤 물질도 전혀 없는 상태라고 알고 있다. 또 이런 진공이 우주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서의 진공은 빈 공간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아주 미약한 최저치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즉 비어 있고 정적인 공간으로 생각되는 진공이 우주의 종말에 이르게 하는 재앙적 사건을 이끌 수 있는 숨겨진 에너지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1927년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폴 디랙(Paul Dirac)은 이 같은 진공 에너지에 의해 입자와 반입자가 순간적으로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진공 요동 상태가 발생한다는 이론을 펼쳤다.
진공 에너지가 만드는 전자기장에 의해 여기상태(excited state·기준 에너지 상태 위로 에너지 준위가 상승한 상태)의 원자가 바닥상태(ground state·가장 낮은 에너지를 가진 상태)가 되면서 광자를 방출한다고 제안한 것이다.
가짜 진공은 마치 롤러코스터 트랙의 가파른 구간에 카트가 갇힌 것과 같다. 그래서 살짝만 밀어도 카트가 더 낮은 에너지 상태로 넘어갈 수 있다. 이 때문에 가짜 진공을 잔잔한 바다와 같은 '준안정' 상태로 간주한다. 진짜 진공은 에너지가 가장 낮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상태(바닥상태)이고 안정적이다. 마치 롤러코스터 트랙의 낮고 평평한 바닥에 놓인 카트와 같다.
현재 진공 에너지의 정확한 수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진공 에너지는 우주 전체의 상수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만약 현재의 진공이 준안정적 상태라면, 우주는 언제든지 우주의 한구석에서 더 안정적인 상태로 붕괴할 수 있다. 무언가가 우주를 밀어내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작은 양자 요동에도 진짜 진공으로 변화를 시작해 종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진공 붕괴라고 알려진 이러한 상태 변화는 바다가 갑자기 거대한 파도에 의해 압도되는 것과 같다. 진공 붕괴는 거품 모양으로 발생한다. 거품 내부의 진공 상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진공 상태보다 훨씬 에너지가 높다. 양자 거품 진공 붕괴가 발생하면 거품은 빛의 속도로 퍼져 나가면서 도달하는 곳마다 주변의 물질을 흡수한다. 우주 전체가 거대한 에너지 폭발에 휩싸이게 된다. 모든 물질은 파괴되고 우주는 순식간에 사라지게 된다.
'가짜 진공' 붕괴 시뮬레이션 성공
과학자들은 가짜 진공 붕괴 과정이 정말로 일어날 수 있는지의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여러 입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계산해야 하는 양자장 이론의 수학적 특성으로 인해 증거를 찾기엔 역부족이었다. 입자 수가 조금만 늘어도 계산이 기하급수적으로 복잡해진다.
영국의 파픽 교수와 독일의 보뎁 박사 연구팀은 이론적으로만 다루던 가짜 진공 붕괴의 문제를 양자컴퓨팅으로 시뮬레이션해 관찰하는 데 성공했다. 캐나다 양자컴퓨팅 기업 디웨이브 퀀텀의 5564큐비트급 양자 어닐러(Annealer)를 활용해서다. 양자 어닐러는 양자가 가장 안정적인 에너지 상태를 찾아가는 현상을 관측하는 데 특화된 양자컴퓨팅이다. 큐비트(qubit)는 양자컴퓨팅에서 양자 정보처리의 기본 단위다.
양자 어닐러 내부에는 초전도 큐비트라는 작은 스핀들이 일렬로 또는 링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거기에 인위적으로 자기장 같은 변수를 걸면 우리가 원하는 에너지 지형을 만들 수 있다. 가짜 진공 상태를 준비한 뒤 이 가짜 진공을 한 번에 확 뒤집는 방식으로 진짜 진공이 유리해지는 상황을 만들어주면, 스핀들이 뭉텅이로 뒤집히면서 '거품'이 생겨나는 과정이 나타난다. 가짜 진공 우주가 진짜 진공으로 바뀌는 부분이 거품처럼 그려지는 것이다.
연구팀의 연구 결과, 거품이 한두 개씩 생기다가 자기장이나 상호작용 정도에 따라 작은 거품이 이리저리 이동하거나, 두 개가 만나 크기를 교환하는 식으로 점차 진짜 진공 상태로 번져 나갔다. 가짜 진공 붕괴로 우주 거품이 형성되는 과정을 시간에 따라 실시간으로 관측했다는 점은 연구팀의 대단한 업적이다. 이 획기적인 연구는 양자컴퓨팅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연구팀의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피직스'에 실렸다.
이번 연구는 대규모로 가짜 진공 붕괴의 역학을 직접 시뮬레이션하고 관찰할 수 있었던 최초의 사례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우주 종말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우주가 종말에 이르기까지는 천문학적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만일 우주 어딘가에 진짜 진공이 생겼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것은 수십억 년 후의 일이 될 것이다.
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bluesky-pub@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