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컬 운동
헬라어 ‘오이쿠메네’ 곧 ‘거주하는 세계’에서 나온 에큐메니컬 운동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협동과 연합을 추구해 왔다. 역사상 교회들이 서로 일치하지 못했기에 이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에큐메니컬 운동은 힘찬 활동을 벌였다. 많은 교회들이 힘을 합쳐 세계 기독교 협의회를 만들었고 그 규모도 엄청나게 커졌다. 그러면서 과연 이 기구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교회의 본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는 의문도 강하게 일어났다.
1. 배경
초대 교인들은 자신들이 사도의 복음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로 연합되었다고 믿었다. 사도의 뒤를 잇는 속사도들은 교회간의 차이를 전혀 말하지 않았고 당연히 동서방 여러 교회들은 연합하는 것을 전제하였다. 니케아 신조에도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고백하고있다. 물론 이것은 무형의 교회를 의미했지만 많은 신자들은 유형의 교회에도 이 의미를 적용했다.
그러나 교회의 일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리는 거의 일치했지만 서로 연합해서 무슨 일을 하기에는 로마 제국이 너무 넓었다. 특별히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간에는 주도권때문에 알력이 있었다. 결국 중세에 가서 이 둘은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과 희랍 정교회가 서로를 이단으로 파문한 것이었다. 그래서 1054년에 완전히 분열하고 마는 결과를 빚었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수많은 교파들이 난립하는 결과를 빚었다. 독일과 스칸디나비아는 루터교, 제네바와 네덜란드는 칼빈주의, 영국은 성공회 그리고 대부분의 지역은 가톨릭으로 그냥 남아 있었다. 또한 이미 가톨릭과 갈라진 정교회는 희랍과 러시아를 지배하였다. 그뿐 아니다. 여러 군소 교단들, 재침례파들과 신비주의자들 등 여러 분파들이 수없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후 몇 백 년 동안 개신교단은 숫자가 계속 늘었다. 이 서로 다른 교단들은 아무런 유대가 없었다. 서로 함께 일하는 경우도 없었다. 심지어는 지역의 개교회들끼리도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옆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건 전혀 무관심인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개교회주의로 나가서는 사회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교회끼리의 유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많은 신자들은 여러 교파들이 난립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교단이 다르면 아무런 유대가 없었다. 그러니 서로 따로따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개교회들이 어떤 부분에서라도 협동해서 일하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만약 서로 협동한다면 여러 가지 재정이나 인력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서로 경험도 나눌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에큐메니칼의 시작이다.
19세기 초 미국에서는 많은 교회와 교단들이 서로 협력했다. 선교사를 보낸다든지, 전도 집회나 부흥회, 성경 반포회, 교도소 전도 그리고 각종 구제 활동 등에서 서로 협조했다. 이 일은 평신도 차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성직자들보다도 평신도들이 교리의 미묘한 차이에 별관심이 없고 그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힘을 합쳐서 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성직자들 사이에도 퍼져 나갔다. 그러다가 1846년에는 미국과 영국의 50개 교단이 ‘복음주의 연맹’(Evangelical Alliance)을 형성하였다. 신앙적인 자유와 선교 및 교육 활동 분야에서 서로 협력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여기에서는 개신교도들 간의 교리나 교회 정치 구조 등은 상관하지 않았다. 단지 선교하는 일과 교육에 있어서 힘을 합하고 인력을 서로 교환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것이 발전하여 1908년에 미국에 31개 개신교 교단이 ‘교회 연합회’(Federal Council of Churches)를 구성하게 되었고, 1950년에는 더 큰 규모의 ‘전국 교회 연합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 of Christ)가 발족하게 되었다. 현재 한국에도 교회 연합회(KNCC)가 있는데, 대체로 진보적인 교단들이 포함되어 있다. 각국의 교회 연합회가 세계적인 규모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세계 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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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러 분야와 특성
에큐메니칼 운동은 하나의 뿌리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여러 흐름이 모여진 것이다. 그중 한 분야가‘선교 사역’이다. 이는 선교 현장에서 교파 사이의 경쟁이나 재정과 인력 낭비를 막기위해서 자연적으로 취해진 움직임이었다. 본래부터 선교지에서는 초교파적으로 일이 진행 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본국의 선교회가 초교파적으로 많은 평신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1854년에 뉴욕과 런던에서 범세계적인 선교 대회가 열렸다. 그 후 간헐적으로 비슷한 모임이 있었다. 그렇게 8차로 모인 것인 1910년의 에딘버러 세계 선교 대회였다. 이때부터 모임은 각 선교회의 공식 대표들로 이루어졌다. 완벽한 자료에 의해서 선교사들과 선교 지역의 현지 대표들이 장래 선교의 방향과 영감을 나누었다. 이 대회는 이전의 것들과는 규모나 내용 면에서 획기적이었다.
이 여파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상임 위원회가 생겼고, 다시 이것은 1921년에 국제 선교 협의회로 성장했다. 회의 의장은 에딘버러 대회를 주재했던 존 모트(John Mott)였다. 그는 미국 감리교회의 평신도였다. 이리하여 대표적인 선교회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고, 선교를 받은 지역의 교회 대표들도 다수가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1938년 마드라스 대회 때에는 절반이 신생 교회 대표들이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두 번째로 중요한 분야는 ‘청소년의 사역과 교육’이었다. 이 분야의 선구자적인 기구는 조지 윌리엄스에 의해서 1844년 세워진 YMCA였다. 초교파적인 이 단체는 처음부터 에큐메니칼적이었다. 다음해에는 전 세계를 상대로 YMCA 세계 연맹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비슷한 성격의 YWCA가 세워지고 1894년에는 이 단체의 세계 연맹도 결성되었다.
청년들을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운동은 해외 선교를 위한 학생 자원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이었다. 1886년 미국에서 무디의 영향 아래 시작된 이 운동은 존 모트의 지도 아래 1895년 스웨덴에서 세계 학생 기독교 연맹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나라에서 기독 학생 운동을 지도하였
다. 그리고 후에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가 될 남녀 학생들의 훈련장이 되었다.
세계 기독교 교육(World Christian Education) 운동도 1889년 시작되었다. 그것이 1907년에는 세계 주일학교 협회가되었다. 후에 이 단체는 여러 나라로 하여금 초교파적 기독교 교육 기구를 만들게 하였다. 결국 이 운동은 1950년 기독 교육과 주일학교 협회 세계 협의회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 운동은 초교파적으로 젊은이들이 기독교 교육에 조직적, 기술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하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 번째 분야는 ‘삶과 일’(Life and Work)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이 분야는 기독교적인 봉사와 윤리를 위해서 연합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이 분야의 처음 출발은 1846년 런던에서 결성되었던 복음주의 연맹이다. 이 단체는 초교파적으로 활동해서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연맹은 교회와의 공식적인 관계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1908년에는 조시아 스트롱에 의해서 미국 기독교 협의회가 조직됐다. 이 단체가 목적하는 바는 첫째, 교회들의 교제와 보편적 일치, 둘째, 교파 구별 없이 그리스도와 세상을 위해 함께 봉사, 셋째, 교회의 영적 삶과 신앙 활동에 관해 상호 교제하고 권면, 넷째, 삶의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법을 적용하여 도덕
적,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도록 영향력을 모으는 것 등이었다.
이것이 1950년 국내외 선교, 선교사 및 기독교 교육, 고등 교육, 여성 활동 등에 관심을 가진 국내의 여러 초교파적인 기구를 병합한 미국교회 협의회(Nation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U.S.A.)로 발전하였다. 이미 프랑스, 스위스, 영국, 캐나다 등지의 나라에서도 거의 같은 조직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결국 이들이 세계적인 차원으로 응집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네 번째 분야는 ‘신앙과 제도’(Faith and Order)였다. 신앙적이고 교리적인 부분까지도 연합하고 일치하려는 이 분야는 당연히 근본적인 갈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각 교단간의 교리적인 차이는 심한 것이었다. 1927년 로잔 회의에는 100개 교파 400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놀라운 것은 교리의 차이에 대해서 서로들 많은 양보를 하여 많은 부분에서 동의했다는 것이다.
1937년에는 에딘버러에서 다음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문서가 작성된다. 이때 기본적인 교리 가운데 80% 이상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신앙과 제도’분야는 ‘삶과 일’분야와 합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 위트레흐트에서 다음과 같은 선언이 선포됐다. “세계 교회 협의회(WCC)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받아들이는 교회들 간의 교제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다섯 번째 분야는 ‘교회의 유기적 일치’(Organic Church Union)였다. 우선 몇 개 교단이 서로 통합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들이 통합했고 미국의 몇 교회가 북 장로교회와 통합해서 1906년 연합 장로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남 장로교회와 합쳐서 미국 장로교회가 된다. 이런 식으로 비슷한 몇 교단들이 서로 합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여섯 번째 분야인 교파들의 세계적인 연합과 친교 기구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앞의 여러 분야들이 차츰 세계 교회 협의회(WCC)로 통합되었다. 거기다 1960년에 획기적 변화가 나타났다. 로마 가톨릭이 WCC에 가입한 것이다. 이로써 에큐메니칼 운동은 그 세력의 절정에 달한 느낌이었다. 공산권에서 온 대단히 수상한 대표들을 포함해서 WCC는 이제 엄청난 규모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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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제점과 한계
가능하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교회끼리, 교파끼리 서로 합치고 교제하고 친교하려는 운동이 바로 에큐메니칼이다. 교회들이 서로 연합하고 하나가 되겠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조직이 강화되고 구속력이 커지고 재정이 많아질수록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다
른 내면적인 어려움이 나타나고 있었으니, 이는 목적의식의 불분명이었다.
우선 교리적인 부분에서 가능하면 포괄적으로 다루려는 것이 이 운동의 성향이었다. 각 교파 신학의 특징들을 깎아서 모난 면이 없게 하다 보니 개신교와 가톨릭 같은 현격한 차이를 가진 교단끼리도 별문제 없이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의 교황 피우스 12세는 1928년에 교회 일치 운동에의 협력을 금지한바 있었다. 그러나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요한 23세는 그동안 금지시켰던 에큐메니칼 운동에 협력하는 것을 장려하는 결정을 공포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과거에는 개신
교도들을 이단자라거나 분파주의자라고 묘사했던 것과는 달리 ‘분리된 형제들’이라고 묘사했다.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교회가 교리나 정체 상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교황 요한 23세의 주장대로‘사목적’인 회의 곧 개신교와 정교회와의 관계에 영향을 줄 새로운 태도를 만들어 낸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교회 일치 운동을 주창하는 이들은 로마 가톨릭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동참한 것만으로 만족하여 저들을 수용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각 교단의 전통적인 신학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아시아나 라틴아메리카 같은 지역의 극단적인 좌파 신학을 주로 말하게 되었다.
신학적인 차이들을 수용하면서 외형적인 일치를 추구하다보니 자연히 정치,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집중할 수밖에 없게되었다. 그 한 예로, 1960년부터는 세상에 대한 봉사로 관심이 모아졌다. 이전의 어느 회의보다도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의 대표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그러므로 자연히 제3
세계의 관점이 강하게 제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 모임에서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은 거의 잊혀졌다.
세계교회협의회는 1968년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개최된 제1차 회의 이후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경향을 취했으며, 구원을 영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것으로 보았다. 1973년에 태국의 방콕에서 개최된 선교회의에서는 그 주제인 ‘오늘날의 구원’(Salvation Today)을,
인간을 모든 형태의 학대에서 해방하며 세상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사회의 인간화’(humanizing of society)라고 해석했다. 1975년에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개최된 제5차 회의에서는‘비군사적 게릴라 혁명 계획’을 지지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해방신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채택하였다.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격차가 지적되고 제3세계의 독재 상황이 부각되었다. 그러면서 필요한 경우에는 폭력을 포함해서라도 그리스도인이 혁명적인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해서 정치적인 활동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신자가 폭력을 주창하는 입장까지 이른 것이었다.
그 후 세계교회협의회의 방향은 거의 완전히 세상적인 관심에 집중되었다. 전쟁과 평화, 인권, 여권, 전쟁 반대, 인종 차별, 난민, 경제 정의, 민족주의, 지역주의, 국제 구조, 조세 제도, 기아 문제 등이 토론되었다. 영혼의 구원이나 하나님의 뜻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이기적이고 정치적인 대표들에 의해서 회의의 방향이 정해지고 수백 수천만 불의 재정이 그들 뜻대로 사용되었다.
선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강력한 재정 지원에 의해서 선교 신학과 방법이 연구되고 논의되었다. 그러면서 자유주의자들의 선교관이 제창되기 시작했다. 1932년 ‘선교의 재고’(Rethinking Mission)란 이름의 책이 하버드대학 교수인 호킹(Hocking)에 의해 보고서 형식으로 출판되었다. ‘선교 일백 년 후의 평신도들의 연구’란 부제의 이 보고서는 엄청난 파문을 불러왔다.
이 보고서의 주요 관심은 타종교에 관한 기독교의 접근 방법과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포되는 메시지였다. 여기서 기독교의 메시지는 역사적 사실이기보다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원리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같은 종교들이 ‘전투적이고 비판적인 기독교 운동’에 의해서 고통당한다고 주장하였다. 한마디로 기독교를 그들 대표적인 종교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한 것이다.
이 보고서는 “더 이상 어느 예언자 또는 어느 성경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예언자, 성경, 계시, 의식, 교회를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모든 예언자들은 새 표적을 보고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연합해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다른 종교를 파괴하면 안 되고 그들을 도와서 그들이 가진 종교의 고유성과 장점들을 발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60여 년 전부터 선교 신학에 이러한 움직임이 있었다. 세계 선교 협의회(WCC)는 선교의 전통적인 의미를 외면했다. 다른 종교에서 개종시키는 것을 죄악이라고 선언한 것은 오래전 일이었다. 이제 많은 과격한 대표자들에게 있어서 선교는 정치, 사회적인 변화에 도움을 주는 일이었다. 남미 독재 국가를 전복시키는 일이 선교이고, 그 일을 위해 세계 교회 협의회는 무기를 사 줘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바야흐로 세계교회협의회는 교회일치운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일치 운동으로 나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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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보수적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한 교단은 거의 다 신학에 있어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950년대에 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교단이 참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가장 큰 교단인 장로교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되었다. 전자는 WCC의 신학적인 경향과 노골적인 세속성을 의심하였고, 후자는 믿는 자들이 협조와 화해의 정신으로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비단 교회의 일치를 위한 불일치는 장로 교단만 분열시킨 것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교단에서 비슷한 분열을 경험했다. 자연히 진보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교단들은 한국의 교회협의회(NCC)에 가입해 결국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속하게 되었다. 반면에 보수적이고 반 에큐메니칼적인 교단들은 복음주의협의회(NAE)에 가입했다.
복음주의협의회는 1941년 시카고에서 결성되었다. 이 모임은 본래 에큐메니칼측에 대항하자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 보수주의인 국제교회연합회(ICCC)에 대한 반응이었다. 국제교회연합회는 분리주의자 칼 매킨타이어에 의해서 구성된바, 전투적으로 복음을 방어하고 자유주의에 대항한다는 목적을 선포했다. 그러나 사실상 열심이 부족한 보수주의자들을 비난하고 있었다.
국제교회연합회(ICCC)에서는 WCC에 가입한 교단이나 기관에게 거기서 탈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자유주의와 함께 한 교회를 형성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성경에 비추어 볼때도 옳지 않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었다. 매킨타이어가 주필이 된「크리스천 비콘」이란 신문이 발간되고 각종 소책자들이 나왔다. 여기에는 WCC 지도자들의 설교와 글들이 사진과 함께 실려 분석, 비판되었다.
차츰 기독교 연합회 내에서 매킨타이어의 지도력에 대한 반발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1954년에는 그것이 터져서 분열하고 말았다. ICCC의 지도자들은 ‘거짓, 사기, 과장’을 자행하고 각 교파의 지도자들을 이간시켜 교단을 분열시킨다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매킨타이어는 ICCC를 탈퇴하였다. 차츰 여기 소속된 지도자들은 자신이 속한 교단이나 기관에서 분열주의자로 백안시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건전한 복음주의 연합체를 만드는 것이 NAE의 이상이었다. 구성원들은 자유주의의 배교와도 분리되어야 하지만 신앙인들의 ‘모든 종류의 완고함, 불관용, 중상, 증오, 질투, 거짓 판단, 위선’ 역시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2년 세인트루이스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 34개 교단과 단체에서 약 200명의 대표들이 참가했다. 여기서 해롤드 오켄가(Harold Ockenga)가 지도자로 떠올랐다.
이때부터 국제교회연합회(ICCC)에 실망한 수많은 보수주의 기관의 가입 지원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다음해 시카고 모임에는 50개 교단(도합 1500만의 신자)에서 1000명의 대표들이 모여들었다. 참석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복음주의협의회를 축복하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운동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전통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은 부흥회 운동을 통해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는 특히 1950년대 이후에 빌리 그래함에 의해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나 부흥회에 참석하는 이들은 교파에 관계없이 서로 협조하며 설교를 들었다. 한 장소에서 집회가 열리면 교파를 구별하지 않고 은혜를 사모하는 여러 교파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함께 예배했다.
그러나 NAE에 대해서 많은 교회들이 우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 소속된 많은 학자들이 성경관에 있어서 대단히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비교적 건전하게 진행되던 보수적 에큐메니칼 진영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보수적 에큐메니칼을 주도하던 대표적인 인물인 빌리 그래함 목사는 “나는 나의 신앙과 로마 가톨릭의 신앙이 본질적으로 꼭 같은 것임을 발견했다.”라고 공공연히 말할 뿐 아니라, 세계적인 개신교 지도자들과 부흥사들의 상당수가 ‘복음 전파의 한 목적’이라는 미명아래 로마 가톨릭과 손을 잡는 것을 당연시 하더니, 1994년 3월 29일에는 소위 ‘복음주의자와 천주교 연합’(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이란 이름으로 이른바 ECT선언을 발표하여 세계 기독교계를 놀라게 하였다. 개신교의 대표적인 전도자인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를 위시하여 빌 브라이트(Bill Bright), 휘튼대학의 마크 놀(Mark Knoll), 풀러신학교의 리처드 뮤(Richard Mouw), 유명한 ''Knowing God’의 저자인 파커(J. I. Packer), 감옥 설교자로 알려진 찰스 콜슨(Charles Colson), 오스 귀네스(Os Guiuness), 패트 로버트슨(Pat Robertson) 등 이른바 쟁쟁한 복음주의자들이 천주교와의 통합에 앞장선 것이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 교리나 정체를 변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파의 한 목적을 위해서는 서로 연합해야 한다고 하는 이런 연합 운동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앙의 근본적인 차이들을 무시한 외형적인 일치가 과연 그리스도의 뜻인가? 그리고 일치해서 모여진 지도력과 재정이 오히려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가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이 WCC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소망적인 것은 아직도 많은 교회들의 최대 관심은 일치된 교회 활동 자체보다 영혼의 구원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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