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십자가에 대한 예화 모음

하나님아들 2020. 2. 13. 15:18

십자가에 대한 예화 모음

 

*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골의 리옹에서는 블란디나(Blandina, 155?-177)라는 장애인 여성 노예가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고문을 당했다. 그녀는 황제에게 분향할 수 없다고 고집을 피웠다. 병사들은 블란디나를 경기장으로 끌고 가서 벌거벗긴 채 십자가에 매달고 굶주린 맹수를 풀었다. 그런데 맹수는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병사들은 그녀의 피부를 모두 벗겨내고 채찍질하고 나서 불에 달군 석쇠에 올려놓았다. 만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상처 입은 몸을 황소 우리에 내동댕이치자 성난 황소들이 들이 받았고, 결국 그녀는 순교했다. 숨죽이고 지켜보던 그리스도인들은 블란디나의 죽음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목격했다. 자신들처럼 야유를 당하고, 고통을 겪고, 슬퍼하던 예수님이 그곳에 있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신체의 고통은 오히려 용기로 바뀌었다.

유재덕(2008)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서울: 도서출판 브니엘 pp39-40에서 발췌

 

* 거리의 십자가(27:33; 15:22; 11:8; 4:10)

스튜더트 케네디(G. A. Studdert Kennedy 1883-1929 영국 성공회 사제. 1차 세계 대전 중 종군사제로 활약)가 길을 걷다가 영양실조에다 왜소한 독일 소년의 시체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었다. 그 소년의 머리엔 구멍이 나 있었고 배에도 상처가 나 있었다. 그는 거기서 골고다를 체험했다. “그후 내 눈에 세상은 십자가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빈민굴, 지저분한 인구 밀접 지역, 사치와 낭비가 만연하고 있는 번화가…… 어디를 가든 거기에 십자가가 있었다. 찢기고, 잃어버리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세계 소식을 전해 주는 신문 페이지 마다 나를 바라보고 계신 그 분을 볼 수 있었다”(D. A. Maclennan)

 

* 나를 위해 죽은 신은 없었소(53:4-7; 4:25)

보우먼(J. W. Bowman 미국장로교 선교사, 신약학자) 박사는 캘커타의 나환자 수용소와 결합된 하나의 예배당을 건립하였다. 그런데 82세가 넘은 환 노파가 거기서 설교자에 의해 하나님 앞으로 인도 되었다. 한 불신자가 그 노파에게 물었다. “당신이 믿던 종교의 많은 남신(男神)들과 여신(女神)들로 만족 할 수 없었나요? 그러자 노파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들 가운데 나를 위해 죽은 신은 아무도 없었다.”

 

* 솔제니친과 십자가(8:36; 12:1-3)

(A. Solzhenitsyn 1918- 소련소설가. 스탈린을 비난한 이유로 강제 수용소에 갇힘. 2차 세계대전 중 무용훈장을 여러 번 받음. 1970년에 노벨문학상 수상) 소련의 강제 수용소에 갇혀 지내던 솔제니친 은 매우 낙심하여 자신이 언젠가는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도 무관심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 날 작업 중의 휴식시간에 그가 밖에서 작업 공구를 손보고 있는데 낯선 사람이 그의 곁에 와 앉았다. 그날 처음 만났고 그 후로도 다시 볼 수 없었던 그 사람은 막대기로 땅 위에 십자가를 그려 보여 주었다. 솔제니친은 한참 동안 뚫어지게 십자가를 내려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이제 깨달았습니다. 이 십자가 속에 인간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십자가와 그것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는 죄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준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2:20; 2:16-18; 요일3:16-18)

(D. L. Moody 1837-1899 미국 복음 전도자. 무디성경학원 설립. 세계선교 운동에 크게 기여 ) 무디는 가장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결과를 낳는 메시지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단언했다. 훼일(J. S. Whale 1896-? 영국 회중교회 신학자. 케임브리지대학 크리스천 칼리지 학장) 박사는 십자가가 두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고 확신했다. 그것은 죄에 대한 심판과 용서의 사랑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를 다루신다. 그분은 죄를 저주하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인간의 조리를 폭로하신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과연 죄가 어디까지 갈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큰사랑을 본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 죄를 속해 주신 것이 바로 그 사랑이다.”(J. G. Bowran)

 

* 십자가와 이리떼(11:6-9; 16:8; 8:18-23; 8:25)(박성겸 성구금언예화)

어느 날 프란체스코(Francesco d Assisi 1182-1226 이탈리아 성인. 프란체스코회 창시자)가 구비보라는 지방으로 전도를 가게 되었다. 그 지방에는 이리떼가 있어서 혼자 가는 것은 위험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는 내가 예수님과 동행하는데 무슨 염려가 있는냐?” 하면서 십자가를 들고 갔다. 가는 도중 이리떼가 입을 벌리고 달려오자 프란체스코는 십자가를 높이 들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형제 이리들이여, 이곳으로 오너라. 내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희는 사람들을 해하지마라.” 그러자 곧 이리들은 입을 다물고 양과 같이 순해졌다.

 

*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사람은(53:5; 3:1; 고전1:13; 2:16)

시카고의 어느 유태계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한 유태인 여성이 앨리스라는 소녀로부터 <그리스도를 구세주, 주님, 친구로 아는 방법> 이란 전도용 소책자를 건네받았다. 그녀는 매우 기뻐했고 소제목을 읽고는 이렇게 물었다. “진짜 당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유태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믿는 건가요?”순간 앨리스는 속으로 이 질문에 바르게 대답하게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단 것은 나와 당신의 죄였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고는 구약성경 한 구절을 인용하였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왕국은 사랑했지만 십자가는 멀리한 사람들(10:38; 16:24; 8:34)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그리스도를 본받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예수에게는 그의 왕국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의 십자가를 같이 짊어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어 했지만, 불과 소수만이 끝까지 남아서 그의 쓴 잔을 마셨을 뿐이다.“(레슬리 D 위더헤드)

 

* 죄를 씻어 줄 종교(3:1; 2:14; 12:1-3) (박성겸 성구금언예화)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을 때에 종교회의가 있었다. 각 종교 지도자들이 한 사람씩 등단하여 회교는 불교를, 불교는 힌두교를 각각 소개하였다. 그때 조셉 쿡(Joseph Cook 1838-1901 미국 회중교회 목사 . 기독교 사상가. 보수정통주의 신학을 강조)은 기독교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누가 나의 붉은 죄를 희게 씻어 줄 것인가? 그대들은 능히 그리하겠노라고 주장하지 못하며, 그대들의 종교가 능히 그리하겠다고 말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바로 그 일을 한다고 주장하며 또 그 일을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예수가 십자가 위에 흘리신 피가 모든 죄인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 하늘과 땅과 이웃을 이어 주는 나무

(17:1-9; 1:20; 2:16) (가톨릭교신학원이야기로듣는 복음)

핀란드에 한 왕이 있었다. 왕은 나라를 잘 다스렸으므로 백성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왕에게는 커다란 근심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의 뒤를 이을 왕자가 없고 공주만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주의 신랑을 뽑아 대를 잇게 할 생각으로 왕은 전국에 사윗감을 구한다는 방을 붙였다. 드디어 공주의 신랑을 뽑는 날이 되자 전국에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몰려 왔다. 첫 번째 시험은 말 타기와 활쏘기였다. 이 시험에서 20명 정도의 건장한 젊은이가 뽑히게 되었다. 두 번째 시험은 지혜의 시험이었다. 왕은 문제를 냈다. “높은 하늘과 땅을 잇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는 나무를 구해 오너라. 기간은 100일을 주겠다.” 그러자 20명의 젊은이들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려면 우선 키가 커야하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려면 나뭇가지 또한 길어야 할 텐데·……라고 생각하며 제각기 길을 떠났다. 20명 중에는 수녀원에서 고아로 자란 존 페로라는 청년이 있었다. 페로 역시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커다란 나무를 구하려다가 찾지 못하고 수녀원 성당에 들어가 기도했다. 현명한 왕이 되어 세상의 불쌍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하여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오랜 시간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려던 페로가 갑자기 무슨 생각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나무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나무 십자가다!” 그 후 존 페로는 핀란드를 잘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 『주제별 교회사에서 골라낸 1,882 신앙이야기서울: 기독교문사 pp560-564에서 발췌

 

*나무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벧전2:24; 3:13; 5:30; 10:39)김춘배설교자료백과보전

어떤 이들은 나무를 만져보고 땔감 이외의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목수는 기둥과 대들보와 마룻바닥을 느끼고 집을 생각한다. 농부는 그 나무에서 과일만을 따고자 한다. 여행자는 더위를 피할 그늘을 찾는다. 약제사는 그 뿌리를 본다. 그리고 출판업자는 책의 페이지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제일 먼저 십자가를 생각한다.

 

* 너의 십자가를 지라

(9:23; 14:27; 8:34; 10:38; 16:24)신앙의 聖時

십자가의 길은 슬픔으로 가득하노라.

조롱하는 음성들이 고통을 더하여노라.

그러나 너의 십자가를 지고

, 하나님의 자녀아, 주를 따르라.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스스로 책망하기를 주저마라.

책망하라! 너희를 지켜주는 성경이 있으니,

열정과 눈물로써 잃은 자를 구하기 위해 꾸짖으라.

또한 죄와 지옥의 편에 섬을 부끄러워하라.

어떤 대가에도 하나님의 권능을 구하고 꾸짖으라.

내가 슬픔에 젖어 있을 때면 사랑이 식었다고

말씀을 거부하는 학식 있는 교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그분의 피를 조롱하는 주님을 믿는 듯하나 잘못된 친구들을

내가 형제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조롱받고 소외됩니다.

종은 그의 주인보다 낫지 아니합니다.

주님을 미워하는 세상이 나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참된 성도들은 이제 교회 문 밖으로 밀려나게 되엇습니다.

면류관이 아니라 다만 십자가가 진리를 가르치기에 적절합니다.

모든 성인들과 선지자들과 함께 내가 고통을 받으렵니다.

고통에 미소 지으며 갈보리의 길을 걷겠습니다.

마침내, 그분이 재림하시는 날, , 영광의 날! 얼마나 멋진 날입니까!

끝까지 참으시사 이기신 그분께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입니다.

너의 십자가를 지라주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리하겠습니다.

비록 내 사명의 길이 험하기는 하여도 다만 주께서 내게 은총을 주신다면,

이 인내의 경주를 달리렵니다.

그리고 명령하신대로 당신과 함께 십자가를 지렵니다.(J.R 라이스)

 

*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10:38; 16:24; 8:24; 9:23; 14:27) B.S 라즈니쉬길 없는 길

한 외롭고 불행한 남자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주여, 저에게 아름다운 여인을 주소서. 저는 매우 외로우므로 동반자가 필요하나이다.” 그러자 신이 웃으며 말했다.

 

어째서 십자가를 지지 않는가?”

그 사람은 화가 나서 말했다. “십자가라니요? 무엇을 위해서 십자가를 집니까? 제가 자살하길 원하십니까? 저는 그저 아름다운 여자를 원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아름다운 여인을 얻었다. 그러나 곧 그는 전보다 더 불행하게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목숨이 위태로웠으므로 다시 기도했다. "주여, 저에게 칼을 주소서.“ 그는 그녀를 죽일 계획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십자가 말인가? 이제 십자가를 보내 줄까?” 그 사람은 분노해서 말했다. “주님은 그녀가 십자가를 지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제발 저에게 칼을 주십시오.” 그래서 칼이 주어졌다. 그는 그녀를 죽였다. 그리고 그 소행이 발각되자 그는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

 

* 십자가

(27:26,31; 15:24, 25; 19:18; 4:10; 고전1:23; 2:8) 윤동주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十字架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윤동주)

 

* 오직 거기에만

(고전1:18, 23-25; 6:12,14) W. Cowper1731-1800 영국시인베이커성경주석

 

십자가, 거기에만, 오직 거기에만 이신론자가 무어라고 떠들든 무신론자가(이런 비열한 노예가 땅에 있다면 말이다) 무어라고 헛소리를 하든 거기에만, 오직 거기에만 구원의 능력이 있다.(쿠퍼)

⇑ 『주제별 신앙과 감동이 담긴 1,823가지 문학이야기서울; ()기독교문사 pp407-410에서 발췌

 

* 믿는 자가 볼 것(6:14; 9:23; 14:27)

(정상훈 무교회주의 신앙인. 성서조선창간동인. 성서조선1927. 10.15)

나는 내가 선인인지 악인인지 모른다.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러러 보려고 할 뿐이다. 나는 나에게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러러 보려고 할 뿐이다. 나는 내가 구원을 받을는지 멸망을 받을는지 모른다.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러러 보려 한다. 나는 내가 천국에 올라갈는지 지옥에 떨어지는지 모른다.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러러 보려 한다. 나의 전 운명을 그리스도의 거룩한 손에 맡기고 다만 죄인의 몸을 끌어 그의 십자가에 매달리려고 한다. 이것만이 나의 능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요 신앙이다.(정상훈)

 

* 십자가를 지고 흔들림 없이 가라(16:24; 6:14)

(문익환 1918-1994 장로교 목사, 시인. 신학자. 한신대학교수. 공동성서번역. 새누리신문1990.9.22) 문익환 목사의 노모 김신묵 권사가 항년 95세로 1990918일 소천했다. 럼평생을 항일, 민주화, 통일의 어머니로 현신한 애국을 배우며 자라났다. 남편 문재린 목사와 장남 문익환 목사, 차남 문동환 목사 세 사람의 옥바라지로 오랜 ntpdnjf을 고난 속에 살면서도 애국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문익환 목사가 892월 월북하여 김일성을 만나 통일에 대해 열성 있게 대화하고 그를 설득했던 일은 세상이 다 아는 바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문 목사를 과대망상증 환자’, ‘소 영웅주의자로 몰아 세웠다. 그렇지만 그가 체포되어 첫 번째 재판을 받을 때도 김신묵 여사는 95세 고령의 나이로 법정에 나가 재판장과 경비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 “......익환아! 너는 기독교 목사로서 네가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기독교 목사가 사랑과 화해의 정신으로 공산주의자 김일성 주석을 껴안아 그를 녹여 통일을 이루지 않으면 누가 하겠느냐 나는 네 십자가를 지고 흔들림 없이 가야 한다라고 외쳤다. 그의 둘째아들 문동환 목사가 국회의원으로 정치활동을 하는 것에 대하여도 일부 목사들이 비난했으나 입당하여 올바른 정치를 해서 민족을 구해야한다며 오히려 권했다.

 

* 십자가 미신(고전1:18; 24:12; 3:7, 11) 성서조선1933.9.1

교회 안에만 들어앉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미신이 있고, 또 성서만 읽으면 된다는 이상한 미신이 있는 것과 같이 십자가만 바라보면 된다는 아주 얄궂은 미신이 있다. 명백하게 진리에 위반된 일을 하고도 아무 회개가 없으면서 나의 구원은 십자가에 확실하다고 기쁨에 넘치며 전도를 하고 또 자기도취에 빠진다. 예수 그리스도가 피를 흘린 십자가까지도 미신의 꿈으로 만들어 버린 인간의 죄악은 도무지 어디까지 가야 멈출지 모르겠다. 십자가는 영으로써 우리 영혼 속에 나타날 때 비로소 구원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실과 그 교리는 악마라도 알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을 참으로 자기 구원의 능력으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지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이다.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아 그것이 구원의 반석이 되는 것은 그때 우리의 어깨에서 죄악의 짐이 떨어져 우리 속에 새 생명이 발동하여 죄악을 본능적으로 싫어하고 선을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사실이 일어나는 까닭이다. 이러한 사실이 나오지 않는 십자가는 미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우리의 할 일이 대신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와 아무 접촉이 없으면 그는 꿈이며 공상이며 책임 회피의 한 수단이다. 우리는 거룩한 일에 아주 가깝게 달려 다니는 미신을 타파해야 한다.

 

* 십자가 밑에 서서(2:20; 6:12) (유석동 무교회주의 신앙인 성서조선1934.1.1)

내가 죄인임은 처음 믿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확고한 사실이므로 십자가는 나에게 절대 필요한 것이다. 십자가 없는 나의 신앙생활은 있을 수 없다. 십자가는 나의 신앙의 근원이고 전부이다. 십자가가 나에게 이 같은 관계를 갖는 것은 주의나 이론으로써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사실 때문이다. 나는 내 자신의 가치를 잘 알아 항상 죄책감에 압박을 당하고 공허감에 전율을 느낀다. 이는 망각으로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나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비로소 자유스러워지고 충족함을 얻었다. 죄책감과 공허감이 나를 십자가로 밀어낸다. 나의 생존이 일시도 이 두 감각에서 헤어날 수 없으므로 내가 사는 동안 나는 십자가를 잊을 수 없다.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일단 십자가 밑에 서게 되니 비로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게 되었고 그의 거룩하심, 그의 무서움, 그가 한 치의 죄라도 용서하지 않는 분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무서움을 알게 되면서 십자가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십자가 밑에 서서 나는 비로소 거룩하신 그분을 쳐다보고 그분에게 말하고 그분에게 아버지라고 부른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길이기에 나는 이 길에 참여해야 만이 비로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되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 십자가 위에서 구원 얻은 강도(23:42, 43)

(길선주 1869-1935 한국장로교 최초7인 목사중 1. 평남 안주 출생. 1907년 부흥운동 주역.(강대보감))

1) 죄를 깨달음으로: 하나님은 회개의 한 방울 눈물도 사랑하신다(38:5).

2) 주를 앎으로: 하나님은 자기를 알기를 요구하신다(16:15).

3) 독실히 믿음으로: 믿음은 구원 얻는 영혼의 손이다(2:8).

4) 간구함으로: 하나님의 귀는 간구의 소리를 잘 들으신다.

5) 증거 함으로: 증거 하다가 죽어라(7).

구원은 순간에 있다. 시간이 짧음을 탄식하지 마라.

 

* 십자가의 도(고전1:18; 2:14) 설교예화집

어떤 신자가 목사에게 찾아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피로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으며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은 일인 것 같습니다.”불만 섞인 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던 목사는 즉시 성경을 펴 들고서 말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래도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은 것입니까?”이 말을 들은 불신자는 무안하여 얼굴을 붉히며 돌아갔다.

 

* 십자가의 생활(고후5:8; 1:20; 벧전1:2, 19) 성서조선1929.10.1

그리스도를 신앙하고 따르는 십자가의 생활이다. 십자가의 생활이란 이 세상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가진 것 을 버리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모를 가졌으면 부모를 버려야 할 것이다. 처자를 가졌으면 처자를 버려야 할 것이다. 형제를 가졌으면 형제를 버려야 할 것이다. 친구를 가졌으면 친구를 버려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바요 신자 누구나가 다 잘 아는 바다. 그러나 우리의 실생활을 보면 죽어야 할 것이 죽어 있지 않고 버려야 할 것이 버려져 있지 않음이 많다. 우리는 예수를 떠나서 죽지 않은 부분으로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사랑하고 친구와 친하고 있다. 여기에 신자의 이중생활이 있고 신앙생활이 병드는 이유가 숨어 있다. 신앙생활의 병을 퇴치하기 위하여 죽지 않고 남아 잇는 부분을 마저 죽여야 한다. 이는 말로써가 아니요, 사상으로써가 아니요, 용감하게 실제로 죽어야 하고 행위로 버려야 한다. 그렇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부모와 처자와 친구를 초개와 같이 버리고 그들을 위하여 쓰던 노력이나 시간을 모두 그리스도께 바쳐야 한다. 한번 이렇게 그리스도께 바쳐 성별된 노력과 신간으로 다시 그들을 섬기고 사랑하고 친하여라, 또 모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사귀어라. 여기에 신자 생활의 진미가 감추어져 있다.

 

* ‘올 래자 풀이(11:28; 27:38)

(전재선1893-1969 장로교목사 부흥운동가. 고택구 한국교회 신앙체험사)

전재선목사의올 래() 자 풀이설교는 꽤나 유명했다.

그는 한문으로올 래()’자를 써 놓고 성경 본문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를 적었다.

’(열 십) : 십자가

’(사람 인) : 예수 그리스도

人 人’(사람 인 둘) : 예수 십자가 좌우편 강도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과 그 양편 날개 아래 모인 죄인들의 모습을 그리며 죄인을 오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었다.

 

* 주를 따라 가리다.(10:38; 16:24; 8:34; 9:23; 14:27) 활천1936.3

주여 오늘은 비가 옵니다.

비 오는 이날도 주를 따라가리다.

산이 무너져 길이 막히고

다리가 끊어져 건널 길 없어도

십자가 지고서 주를 따라가리다.

주여 오늘은 바람이 붑니다.

바람 부는 이날도 주를 따라가리다.

물결은 노하여 하늘을 찌르고

십자가없는 바다에 파선을 하여도

십자가 지고서 주를 따라가리다.

 

주여 오늘은 눈이 옵니다

눈 오는 이날도 주를 따라가리다.

갈 길은 만리요 또 아득하고

눈보라 몰아 와 앞길을 막아도

십자가 지고서 주를 따라가리다.

 

주여 오늘은 죽음이 옵니다.

죽음이 오는 날도 주를 따라가리다.

앞에는 칼이 가로막히고

뒤에는 총이 위협하여도

십자가 지고서 주를 따라가리다.

(강치봉)

 

 

성구와 금언

우리는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6 : 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2 : 20).

또 십자가로 이 둘은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2 : 16).

5 : 24, 6 : 14,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이 없다고 했다(윌리암 펜).

나는 어떤 날 죽었다. 세상이나 친구들의 칭찬이나 책망에 대하여도 죽었다(죠지 물러).

십자가의 신학은 빛의 신학이다(루터).

중생한 성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난자다(막스웰).

 

실 화

캐네디 대통령이 암살 당할 때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택사스에서 성회를 인도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왔었다.

그러나 그 성회는 역사가 없었다.

이유를 알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데 독일에서 찾아온 자기가 잘 아는 평신도 한 사람이 말하기를 "오늘 왜 역사가 없었는줄 아십니까? 오늘 설교에는 십자가가 빠졌습니다." 이때부터 빌리 그레함은 결심하기를 설교에는 십자가를 증거하기로 했다.

옛날 로마시대에는 죄인을 잡아서 사형을 시킬 때는 이상한 방법으로 사형을 시킨다. 어떤 방법인가하면 죄인을 말뚝에다 팔과 다리를 묶어 놓고 난 다음 죽은 시체를 갖다가 정면으로 마주 대어 묶어 놓는다. 즉 입과 코, 눈 가슴 할 것 없이 마주 묶는 것이다.

그래서 놓아주면 죽은 사람의 독이 옮겨져 산사람이 죽게 된다고 한다.

이 방법은 십자가와 같이 가장 악날한 방법의 하나이다.

 

서울에서 어떤 30대 된 노처녀가 결혼을 하여 잉태된 아이가 이상이 있어 산부인과에 가보았더니 복개수술을 해야 아기고 살고 산모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피검사를 해보니 보통있는 혈액형이 아니고 이상한데 이런 피를 가진 사람은 만 명에 하나정도 밖에 없는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래서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광고를 했으나 타나지지 않았다. 8군에서 발간하는 미군신문에서 광고를 본 한 미군병사가 달려와 피를 검사하니 같은 형의 피였다. 미군병사는 여자에게 자기 피를 빼서 수혈하라고 허락하였다. 그런데 미군이 죽었다. 미군병사의 피를 받은 여자는 살고 어린애도 살았다. 예수님의 피는 인류를 구원하는 피이다.

 

옛날 중세기에 십자군에 대한 이야기이다. 십자군이 회교군에게 쫓기어 어느 통나무 다리위로 피래 갈 때에 다리가 오래돼서 썩은 나무 한 토막 때문에 무너질 위기에 있음을 발견한 한 병사가 내려가서 자기 다리를 통나무 대신 끼워놔서 많은 사람이 무사히 건너가고 그 병사는 다리가 찢기고 문드러져 죽었다.

이 병사는 동료들을 위해 진 십자가였다.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자로 존경받은 성 까일스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본래 아덴의 한 왕자로서 태어났지만 주를 믿는 다음에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깊은 산에 들어가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오직 하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사랑하던 암사슴 하나만은 자기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래서 산에 가서 다닐 때도 이 암사슴과 같이 다니고 또 암사슴의 젖을 짜서 먹고 초극목피로서 생활을 하면서 산에서 깊이 기도생활을 했다. 그때 마침 불란서의 어떤 왕이 사냥을 하기 위하여 깊은 산 속에 들어갔는데 한 골짜기에 가보니까 바위아래 사슴이 하나 있었다. 그는 이 사슴을 향하여 겨누어 쏘았다. 그때 까일스가 조용히 묵상을 하고 있다가 이상한 소리가 나서 어른 눈을 떠보니 자기가 사랑하는 사슴을 향하여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 막았으나 손을 뚫고 나가 사슴에게 얕게 박히었었다. 그래서 사슴은 약한 상처를 입었을 뿐이었다. 불란서 왕이 이런 것도 모르고 사슴이 죽었거니 하고 헐떡이면서 뛰어왔다. 와보니 어떤 남루한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데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왕은 예수님의 못 박힌 손을 연상하고 어쩔 줄을 모르고 사과하고 다시는 사냥을 안 했다고 한다. 이 왕은 피 흘리는 손을 보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고 자기의 만행을 뉘우쳤다는 것이다.

 

크리스챤 버나드 박사는 심장이식 수술을 창안한 사람으로 어떤 환자가 자기의 낡은 심장을 보여달라고 하였다. 만일 심장이식을 하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것을 생각하고 자기의 낡은 심장을 들여다보다가 버나드 박사를 바라보면서 감사하다고 말하였다.

몸에 관련된 것이나 영혼에 관련된 것이나 우리에게 심장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심장이 약하면 피 순환이 잘 안되고 피 속에 노폐물을 걸러낼 수가 없고 건전한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우리 영혼에 그리스도의 피가 없이는 맑힐 수 없는 것이다. 곧 십자가에 흘린 피이다.

 

로버트 지리 박사는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면서 맨 처음 갈보리를 찾아갔을 때 느꼈던 경험을 매우 실감나게 말해주고 있다. 그는 매우 흥분된 마음으로 안내자를 따라가다가 갈보리 언덕에 오를 때는 먼저 올라갔다. 그가 정상에 올라가 예수님이 피를 쏟으신 곳에 섰을 때 위대한 설교자의 감정이 복받쳐 몸이 떨려옴을 느꼈다. 안내원이 뒤따라와서 선생님 전에 한번 이곳에 왔던 일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대답 없이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지리 박사는 마음속으로 예 약 2천년 전에 이곳에 왔던 일이 있지요 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려 이곳에 오셨지요 어리석은 자들에게 끌려서 말입니다.

 

한 소년이 의사로부터 자기의 누이동생에게 약간에 피를 제공하여 주면 위독한 누이동생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6살 난 누이동생은 매우 위독한 상태에 있었다. 소년은 수년 전 바로 지금 동생이 앓고 있는 그 병에 걸렸다가 나은 일이 있다. 그러므로 누이동생이 나을 수 있는 방법은 면역성을 가진 오빠의 피를 받으면 된다고 한다. 두 형제는 같은 혈액을 가졌으므로 오빠의 피를 받을 수 있고 동생에게 피를 헌혈할 수 있게 되었다. 곧장 두 어린이는 수혈을 하게 되었다. 오빠는 창백하게 되지고 동생은 핏기가 발그레하게 올라왔다. 서로 아무 말 없이 눈이 마주 치자 싱긋 웃었다. 오빠인 소년이 고통스러운 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 나지막한 목소리로 "의사 선생님 나는 언제쯤 죽게 되나요." 하자. 동생의 가슴은 뭉클하였다. 오빠에 생명을 내가 빼앗는구나하고 소년은 자기의 생명을 포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콘스탄티 황제에게 나타난 십자가

로마제국은 주 후 64년부터 313년까지 기독교인을 핍박하였다. 주 후 313년에 데오크레틴 황제가 죽자 각지방에 있던 총독들과 왕자와 정권싸움이 일어났다. 이때 황제의 아들인 콘스탄틴이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터에 나갔을 때 그는 환상 중에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한다. 그 십자가 아래는 분명히 라틴말로 "너는 십자가의 깃발로 승리하리라."는 글을 보았단다. 그 때 그는 거기서 엎드려 회개하고 부왕이 핍박하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전쟁은 10년 간 계속된 끝에 승리하여 대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이때가 바로 주 후 313년 로마제국을 통일한 첫 사업으로 핍박당하던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정하였다. 이는 그가 본 환상의 십자가의 승리였다.

 

얼마 전에 필자는 한 선교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케냐 그들의 선교병원에 발에 상처를 입고 찾아온 한 소년이 지혈을 시키지 않고 먼길을 걸어와서 핏자국이 땅위에 남게 되었다. 병원 길을 몰라 이리저리 헤매이다가 마침 도착하였다. 조금 후에 어머니가 급히 찾아 오셨는데 어머니는 그 아들의 핏자국을 보고 몸조리며 뒤따라 온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일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으나 그 길을 잃을 염려가 없는 것은 그의 핏자국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발자국만 딛고 가면 주님을 만날 수 있다.

 

필리핀에 한 성도가 기도하기를 자기 병만 고쳐주시면 내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체험해 보겠습니다. 하고많은 재산을 모아 가지고 예수님 십자가 그대로 만들고 30관 되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산에 올라가면서 쓰러지면 옆에 로마군병과 같이 채찍으로 때리게 하고 상처를 당하면 의사에 치료를 받으며 못을 손에 박고 발에는 노끈으로 맷다. 그리고 십자가에 높이 올려놓았는데 20초가 되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내리게 하여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9시간동안 고통을 당하시고 운명하였었다. 그 고통이 얼만 심하였을까?

 

강원도에 도지사로 있었던 유성준씨가 내가 예수를 믿고 보니 진리가 밤송이 같다고 하였다. 그 뜻은 십자가의 도를 상징한 말인데 처음 밤송이는 가시가 있기 때문에 누가 얼른 취하려고 생각지 않으나 다 익어서 저절로 벌어지면 누구나 그 밤을 취하여 껍데기를 벗기면 고수한 맛을 보는 것 같이 십자가의 도가 처음에는 어렵게 생각되나 믿고 보면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영생의 도리인 것이라고 말하였다.

 

남미의 에콰도로 나라에는 미개하여 복음을 전해도 이해하지 못한 때가 있었다.

20년 전에 다섯 명의 선교사가 가서 선교하다가 살해되었다.그런데 그 후 몇 사람에게 의사를 전달하게 되어 복음을 받아들여 지금은 원주민들 가운데 그리스도께로 적지 않게 돌아와 예수 믿게 되어서 선교사들이 희생된 피의 댓가는 헛되지 않았고 살해된 그곳에는 예배당을 세웠다고 한다.

 

안악골 망나니였던 김익두가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다.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 믿고 구속의 진리를 깨달았다. 하루는 김익두 일에 죽어서 장사지냅니다.하고 부고장을 돌렸다. 부고장은 받아본 사람들이 모두 못된 놈 죽었으니 잘됐다고 좋아했다. 김익두의 과거 불량자가 새사람으로 변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리 위함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교회 갔다 오는데 동네 사람들이 죽은 김익두가 모질어서 귀신이 살아왔나? 의아스럽게 여겨 "당신 어떻게 된 거요?" 하고 물었더니 "예전에 못된 깡패가 죽고 예수 믿어 변화된 새사람 김익두 입니다." 하고 대답하더란다.

 

어거스틴은 원래 방탕하였던 자이나 예수를 믿고 변화 받은 다음부터 전에 지은 죄를 생각하며 오랫동안 참회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길을 가다가 옛날에 놀던 창녀를 만났단다. 여인은 어거스틴을 보자 따라오면서 "여보세요 당신이 어거스틴 아니요. 왜 요사이는 놀러 오지 않습니까?" 하고 유혹의 추파를 던졌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돌아보지도 않고 네가 전에 부르던 어거스틴은 이미 죽고 지금의 나는 예수님과 같이 사는 어거스틴이라고 마음속으로 대답하였다고 한다. 겸손하게 십자가를 지라.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리며, 또 새날이 시작되면 또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낙타는 당신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당신에게 짐을 얹어 주십니다.

이 때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짐을 받으십니까? 낙타와 같은 겸손한 모습입니까?

새에게 날개는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날 수 있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항해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짐이 되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감사

미국의 흑백갈등이 깊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어느 기차에서 백인과 흑인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백인이 칼을 던져 흑인을 죽이려 할 때 옆에 있던 백인 목사가 손을 들어 칼을 막아주었다. 칼은 목사의 손에 꼽혔고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싸움은 멈추어졌고 흑인은 목사의 희생으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고마움을 느낀 흑인은 일생동안 그 목사의 곁에서 자질구레한 일을 돕게 되었다. 종종 일에 싫증이 나면 흑인은 불평과 원망을 하곤 하였다. 그때마다 목사는 칼맞은 자신의 손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면 흑인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었는데 그 손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한 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불평과 원망을 그치고 감사해야 한다. 그 십자가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예수님의 희생이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능력을 상실하는 교회

내가 알고 있는 시골 교회의 발전과정을 보면서 나는 가끔 요즈음의 교회에 회의를 느낄 때가 있다. 그 교회가 세워진 것은 6.25전쟁을 어수선하던 때이고, 교회를 세운 주역들도 전쟁통에 피난온 피난민들이었다. 그들의 처지와 교회의 모습은 서로 비슷했다. 그때에 그 교회는 찬송 곡조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전도사님이 시무했다. 그의 설교는 자장가와 비슷했고 설교의 격식도, 내용도 빈약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바로 이 교회의 능력이었다.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교인들은 정말 어리석을 정도로 단순한 십자가의 신앙을 붙들고 있었다. 토담 초가집에 멍석을 깐 예배당에 무릎을 꿇고 소리치며 기도하는 소리가 4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나의 귀에 쟁쟁하게 들려온다. 그러나 이제 그 교회는 웅장한 예배당을 세우고, 격식에 맞는 설교와 예배가 있고, 그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은 그 마을의 유지가 되었지만 지금 그곳에 가면 그 때의 힘이 없다. 그때의 능력을 찾을 수가 없다. 그들의 입은 성공 사례와 교회의 부흥과 거대한 예배당 건물을 이야기하지만 기도의 소리는 죽었고 그들의 눈은 기를 잃었다. 나는 텅빈 예배당 구석에 앉아서 하나의 대답을 얻었다. 그들은 이제 유대인의 종교성도 찾았고, 헬라인의 지혜도 찾았으나, 그 대신 '오직 십자가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만을 알기로 하던 그 신앙'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교인들은 이제 격식에 맞는 설교와 예배와 거대한 예배당과 수많은 잘난 교인들에 가리워 예수님을 볼 수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잃었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잃어 가는 어리석은 한국 교회는 차라리 발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진정 성령의 능력을 되찾기 위해 예수님만을 외치는 교회로 다시 서야 하지 않겠는가?

 

어느 목수의 십자가

어느 목수의 십자가 독실하게 예수를 잘 믿는 어떤 목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믿음으로만 구원 받기에는 무엇인가 미흡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는 하지만 기도도 열심히 하고, 전도도 잘하고, 헌금도 많이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확실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 그위에 나의 공로와 선한 행위가 따라야 할 것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에베소서 28-9`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신 말씀을 제시하며 설명해 주어도 어쩐지 믿음으로만 구원받기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교회 출입문짝을 그 목수에게 맞추었습니다. 목수는 하나님의 집에서 쓸 성물이라 정성을 다하여 만들었습니다. 목사님은 문이 다 되었다는 전갈을 받고 목수를 찾아갔습니다. 완성된 문짝을 한참 바라본 목사님은 목수의 솜씨를 칭찬하더니 문득 생각이 난 듯 문작 위에다 사과 궤짝을 덧붙여 못을 잘 박아 달라고 말했습니다. 목수는 이상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렇게 잘 만들어 드렸는데 문짝에다 왜 사과 궤짝 나무판을 붙인단 말입니까?" 이때 목사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는 구원을 위한 완전한 걸작품입니다. 거기에 인간이 더하거나 감하여도 안됩니다. 다만 십자가를 믿으면 인간의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겸손하게 십자가를 지라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리며, 또 새날이 시작되면 또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낙타는 당신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당신에게 짐을 얹어 주십니다. 이 때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짐을 받으십니까? 낙타와 같은 겸손한 모습입니까? 새에게 날개는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날 수 있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항해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짐이 되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하게 만든다.

 

내게 맞는 십자가

상점을 경영하는 한 크리스천이 하나님께 자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상점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네 마음대로 십자가를 골라 보아라.” 그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골랐습니다. 한 십자가는 매우 아름다운 금십자가였는데 너무 무거웠습니다. 다른 것은 가볍기는 한데 표면이 매우 거칠어서 어깨에 상처를 입히기 십상이었습니다. 이것 저것 고르던 끝에 그는 방구석에서 자기에게 가장 잘 맞을 것 같은 십자가 하나를 골랐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세히 보아라!” 그것은 바로 그가 처음부터 지고 있던 십자가였습니다. 고난은 성스러운 것입니다. 고난은 작은 부스러기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에게 지워진 십자가에 대해 불평하지 마십시오.

 

붉은 십자가 외에는

에드워드 하이머씨는 유명한 조각가인 동시에 알프스 산의 등반가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마티호온이란 험한 정상을 오르지 못해 늘 야심에 차 있었습니다. 그는 몇 번이나 시도해보았지만 정상까지 오르는 데에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이태리 등반대들과 함께 그 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등반대는 네 명의 등반가와 세 명의 안내자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예정대로 모든 것 이 잘되어 그들은 드디어 그 정상을 정복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특히 하이머 씨는 그 자신의 생애에 최고의 환희를 느꼈습니다. 이제 그들은 밧줄을 타고 하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선두의 안내자가 먼저 밧줄을 몸에 감고 발 디딜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를 따르던 한 등반가가 비명을 지르며 선두 안내자에게로 덮쳐 내렸습니다. 이에 놀란 그 뒤의 두 등반가도 그만 중심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산장에 남아있던 두 안내자와 하이머씨는 밧줄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다시 중심을 잡도록 밧줄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밧줄이 힘없이 끊어지면서 네 사람은 4천 피트나 되는 빙하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붉은 줄이 들어간 규격품의 알프스 클럽의 밧줄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무서운 사고를 일으킨 것처럼 우리의 구원에도 다른 대용품이 있을 수 없다는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그 어떤 밧줄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런 것들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끊어져 버림으로 구원을 잃게 합니다. 당신은 붉은 줄을 섞어 만든 밧줄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줄로 말미암아 분명히 거듭나야 합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의 피가 나를 살리셨음을 믿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크신 계획을 날마다 찬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비행기 사고와 십자가

오래 전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산중턱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여섯 명의 희생자를 내는 사고가 있었다사고현장 가까이에 는 교회훈련센터가 있음을 알리는 68피트 높이의 철탑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AP통신이 전한 사고의 원인은 그 철제십자가에는 늘 불이 켜져 있었는데 그날 따라 그 십자가의 전등불이 꺼져 있었다 는 것이다그 지역을 운항하는 항공기들은 십자가탑이 밝혀주는 불빛을 보고 그곳을 지나곤 했는데 그날은 불이 꺼져 있던 탓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이다불꺼진 십자가와 피없는 십자가는 언제나 비극의 원인을 제공한다예를 들면 십자군 전쟁도 그 중에 하나이다도시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저 십자가들,도시를 뒤덮는 저 높은 십자가들,그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전하는 메시지여야 하며 민족 구원의 등불이어야 한다그러나 만일 피묻은 십자가의 원색이 바래고 장식용으로 전락한다면 십자가 때문에 존재하는 교회는 설자리를 잃고 말게 될 것이다고난주간에 즈음하여 십자가가 더욱 그리워진다

 

십자가 위의 비둘기

다음의 이야기는 어느 목회자의 경험담이다. 어느날 밤 오십여명의 성도들이 모여 성령의 은혜를 받기 위해 단순하게 춧점을 맞추어 함십기도로 집중해서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몇 시간인가가 흐르고 새벽무렵이 되었을 때 목사가 일어나 찬송을 시작하려는데 난데없이 강당 중앙의 십자가에 한 마리의 흰 비둘기가 날아와 앉았다. 의아한 목사가 이 비둘기가 웬 것이냐고 물었고 한 성도가 "비둘기는 성령의 상징이니 주님께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모였던 다른 성도들도 입을 모아 "아멘!"하였다. 분위기는 삽시간에 기쁨으로 들뜨게 되었고 목사 자신도 더 생각할 겨를없이 스스로 신령한 목사가 된 듯하고 기분이 이상해짐을 느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얼마전 중이 되겠다고 머리를 깎았던 한 청년이 일어서더니 "내가 집에서 갖고 와서 예배당에 날렸던 비둘기입니다."라고 하더니 다시 비둘기를 붙잡아 들고는 유유히 그 자리를 빠져 나갔다. 그 청년이 속인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속아 하나님과는 별개로 그날 밤을 기쁨에 젖어 보냄을 성도들은 서로 멍한 얼굴로 쳐다보았고 그 자리는 한참동안 어색한 채 지나갔다.

 

제목:십자가

토마스 아 켐피스의 명저[그리스도를 본받아]에 이런 글이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십자가를 피한다면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다. 그대가 밖으로 도망쳐도 거기 십자가가 있고, 안으로 숨어도 거기 십자가를 볼 것이다. 위로 올라가도 십자가가 기다리고, 밑으로 파고 들어도 십자가가 있을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의 십자가의 고통을 좇을 것이니라" 일본의 기무라라는 목사가 예수가 당한 그 고난을 보다 잘설명하기 위해 스스로 그런 경험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교인들에게 밝혔다. 그리고 못과 망치를 준비해 놓고 기도를 하는 중에, 어느교인이 그것을 치워버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외에도 예수의 고난을 체험해 보고자 하는 시도는 많았다. 어느 서양 청년은 실제 손에 못을 박고 매달려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 무모한 짓이다. 손바닥에 못을 한번 박아 보고 또 매달려 본다고 해서 그십자가의 고통과 아픔을 알 수 있겠는가?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목:십자가 다리

10:20; 1:20; 34:1; 6:10

 

가족과 함께 스위스에 살고있는 루이스는 어느 날 근처의 얼어붙은 호수를 어린 동생과 가로질러 가다가 얼음이 갈라져 틈이 생긴 곳에 이르렀다. 그 틈은 어린 동생이 건널 수 없을 만큼 폭이 넓었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루이스는 자신의 몸을 엎드려 다리를 만들었다. 어린 동생은 루이스의 몸 위를 걸어 그 틈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곤경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다리가 필요하다. 어떤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상대의 다리가 되기를 요구받으면, "이것은 사랑의 행위지만 너무나 지독한 요구다."라고 항변하곤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넘을수 없는 틈을 다리를 놓놓고자 자신의 몸을 희생하셨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십자가 다리처럼 커다란 희생은 할 수 없어도 수시로 작은 손길, 작은 다리를 필요로 하는 곳을 만나게 된다. 그 때 우리는 다리가 될 준비를 해야 한다.

제목:십자가 사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우주 최대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었던 러브 스토리 (love story)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 성서는 사랑의 편지, 성령은 사랑의 영, 우리는 그 사랑의 삼일성속에 빨려 들어온 사람들이다. 성도의 기도란 사랑의 밀어, 전도는 사랑의 전달, 사랑의 중매, 찬송은 사랑의 노래, 그리고 십자가는 사랑의 드라마의 절정, 사랑의 고백, 사랑의 심장파열 사건이다. 십자가는 예수가 하나님과 나의 이름을 부르고 부르다가 죽은 곳, 예수가 한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또 한 손으로는 하나님 손을 붙잡고 사랑의 심장이 터진 곳이 십자가다.

 

제목:십자가를 사랑하는 자

예수님과 그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있거니와 이 땅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니고 사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고자하는 사람은 많이 있으나 그와 함께 고난을 받고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읍니다. 그와 함께 만찬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은 많으나 금식을 같이 하고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기적에 경탄하지만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함께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에게 핍박과 어려움이 닥치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위로를 받는 동안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 자기 자신을 숨기시거나 저들에게서 위로를 거두어 가시면 그들은 곧장 불평을 말하거나 낙담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다만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의 특별한 민족이나 위안을 위하여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환난과 마음의 고통 가운데서도 최상의 위로와 기쁨을 누리던 때와 마찬가지로 그분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비록 주님께서 그들에게 위로를 전혀 내려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항상 주님을 찬양하고 언제나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제목:십자가속의 보화

여러 해 동안 늙고 병든 부인을 신실하게 정성껏 돌봐준 간호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간호하던 부인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노부인의 모든 재산은 그 부인의 유언대로 아주 먼 친척에게까지 분배되었습니다. 그러나 간호원의 희생적인 봉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상도 돌아오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 간호원은 다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죽은 노부인이 남긴 크고 검은 나무 십자가를 전해받았을 뿐이었습니다. 그 간호원은 실망해서 그 십자가를 안 보이는 곳에 치워놓았습니다. 그것은 별로 귀한 나무로 된 것도 아니었으므로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난 후 어느 날 집안을 청소하던 중에 그녀는 그 나무십자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그 십자가를 주워들고 과거를 생각하며 자세히 살펴보았을 때 그녀는 그것에 열쇠구멍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십자가는 열고 닫게 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녀는 노부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왜 자기에게 작은 열쇠를 주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열쇠는 너무 작아서 맞는 자물쇠가 없었습니다. 그 간호원은 열쇠를 찾아서 십자가의 열쇠구멍에 맞춰보니 놀랍게도 꼭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 크고 검은 나무 십자가는 열려졌습니다. 그때 그녀의 눈앞에는 휘황찬란한 보석들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 보석들은 이미 법적으로 그녀의 것이 되었으므로 그녀는 자기가 바랐던 것보다 훨씬 큰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십자가가 어떠한 것인가를 분명히 말해 줍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는 검고 추하고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아주 심한 중병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등이 그러한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또는 가정의 문제나 직장에서의 갈등. 우리를 언짢게 하거나 실망시키는 동료들이 검고 추한 십자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십자가에는 보배들이 숨겨져 이제 남은 일은 그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제목:십자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이 아니다. 여기에는 고통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다. 십자가의 참뜻을 알기 위해서는 언제나 예수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심한 형국의 고통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그분의 십자가를 지셨다. 그것이 그분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었다.이 십자가야 말로 그리스도의 사명이었다.

제목:십자가에 못박히는 것

A.W.토저 박사에 의하면 한 젊은 신자가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는 질문으로 오래 믿은 신자에게 접근하였다. 그 성숙한 신자는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세가지를 뜻한다. 첫째,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한 방향만 바라보고 있다. 둘째, 그는 뒤로 후퇴하지 않는다. 세째, 그는 자신의 앞으로의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이 세가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 첫째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오직 한 방향만을 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크리스챤들이 한꺼번에 두가지 방향을 대하려 하고 있다. 그들은 두마음이다. 그들은 천국엘 가기 원하면서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 그들은 롯의 부인과 같다. 그들은 한 길을 달리고 있으나 또 다른 것도 바라보고 있다. 둘째로. 못박힌 자들은 뒤로 후퇴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그에게 끝이다. 커텐은 드리워졌다. 드라마는 끝났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의 종말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그의 옛 생활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히 끝난 것이다. 셋째로 못박힌 사람은 자신의 계획이 없다. 그는 더 큰 집이나 더 좋은 차를 꿈꾸지않는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끝낸 것이다. 그의 쇠사슬은 모두 끊어졌고 그 매력도 다 가버렸다. 이러한 세가지 면에서 당신은 십자가에 못박혔는가?

 

제목:십자가의 능력

검투사 시합을 보려고 콜로세움으로 몰려가는 군중들을 보기 위해 어느 날로마에 도착한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텔레마쿠스? 8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날 모였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는 무리에 휩쓸려 떠밀려갔습니다. 그는 두 명의 검투사가 한 사람이 죽기까지 싸우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두 사람이 더 나왔습니다. 텔레마쿠스의 영혼은 혐오감으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운동장으로 뛰어나가서 경기자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멈추시오라고 소리쳤습니다. 군중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검투사들은 그를 옆으로 밀쳐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끼어들어서 그만두라고 애원했습니다. 군중들은 화가 나서 검투사들에게 그를 찔러 버리라고 소리쳤습니다. 검 하나가 번쩍이더니 무방비상태인 텔레마쿠스는 운동장에 쓰러지고 경기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텔레마쿠스의 피가 주변의 땅을 물들이자 콜로세움의 맨 꼭대기 층에 앉아있던 한 사람이 일어나서 가버렸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한 사람 한 사람씩 떠나가서 마침내는 그 큰 콜로세움이 텅비어 버렸습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 경기장에서는 한 번도 다른 검투사 시합이 열린 적이 없습니다. 텔마쿠스가 죽었던 자리에는 이런 말이 쓰여진 십자가가 하나 서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영혼속에 온 세상의 소망이 놓여 있습니다.”

 

제목:십자가의 능력을 상실하는..

내가 알고 있는 시골 교회의 발전 과정을 보면서 나는 가끔 요즈음의 교회에 회의를 느낄 때가 있다. 그 교회가 세워진 것은 6.25전쟁으로 어수선하던 때이고. 교회를 세운 주역들도 전쟁통에 피난온 피난민들이었다. 그들의 처지와 교회의 모습은 서로 비슷했다. 모든 개척 교회가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만 교회도 초가집 마루방을 빌어서 시작하였다가 버려진 땅을 다듬어서 초가집을 짓고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그때에 그 교회는 찬송 곡조에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전도사님이 시무했다. 그의 설교는 자장가와 비슷했고 설교의 격식도. 내용도 빈약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바로 이 교회의 능력이었다.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교인들은 정말 어리석을 정도로 단순한 십자가의 신앙을 붙들고 있었다. 토담 초가집에 멍석을 깐 예배당에 무릎을 꿇고 소리치며 기도하는 소리가 3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나의 귀에 쟁쟁하게 들려온다. 그러나 이제 그 교회는 웅장한 예배당을 세우고. 격식에 맞는 설교와 예배가 있고. 그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은 그 마을의 유지가 되었지만 지금 그곳에 가면 그때의 힘이 없다. 그때의 능력을 찾을 수가 없다. 그들의 입은 성공 사례와 교회의 부흥과 거대한 예배당 건물을 이야기하지만 기도의 소리는 죽었고 그들의 눈은 생기를 잃었다. 나는 텅빈 예배당 구석에 앉아서 하나의 대답을 얻었다. 그들은 이제 유대인의 종교성도 찾았고. 헬라인의 지혜도 찾았으나. 그 대신 .오직 십자가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만을 알기로 하던 그 신앙.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교인들은 이제 격식에 맞는 설교와 예배와 거대한 예배당과 수많은 잘난 교인들에 가리워 예수님을 볼 수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잃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십자가를 잃어가는 한국 교회는 차라리 발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진정 성령의 능력을 되찾기 위해 예수님만을 외치는 교회로 다시 서야 하지 않겠는가.

 

제목:십자가의 다리

여러 차례의 강도 상해죄를 저지른 두명의 범죄자들이 한 은둔자의 도움으로 회개하게 되었다. 그 두사람은 은둔자에게 자신들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어떻게 삶을 살면 좋을 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은둔자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성지순례를 할 것을 권했다. 두 사람은 곧 커다란 십자가를 만들어 길을 떠났다. 처음에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십자가의 무게가 대단했지만, 아직 그 정도를 짊어질 힘은 충분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어깨가 붓고 저려왔다.

두 사람은 십자가를 변형시킬 생각을 해냈다. 그들은 어느 마을 목공소로 들어갔다. 한 사람은 십자가의 긴쪽을 잘라냈다. "자 이제 훨씬 짧아졌지만, 그래도 십자가는 십자가지." 또 한 사람은 십자가의 두께를 반으로 쪼개어 두 개의 십자가를 만들더니 그 중에 하나는 바닥에 내려 버렸다. ", 이제 훨씬 가벼워졌지만, 그래도 엄연한 십자가지." 두 사람은 이제 한결 편해졌다. 그러나 먹을 것조차 찾기 힘든 사막 지역에 들어서자, 사정은 또 다시 악화되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사흘 동안 사막을 헤매었다. 나흘째 되던 날, 그들은 저 멀리 지평선 너머 도시를 발견하고는 기뻐 어쩔 줄 몰라했다. 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그들은 예기치 않은 장애물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 앞에 깊은 골이 패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건널 만한 다리는 아무 데도 없었다. 한 사람이 방법을 생각해 냈다. "우리 십자가로 임시 다리를 놓읍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십자가는 길이가 너무 짧았고 또 한사람의 십자가는 길이는 맞았지만 두께가 너무 얇아 약했다. 그래서 그 두사람은 그 자리에서 굶어 죽고 말았다. 우리도 가끔 우리의 십자가를 줄이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가볍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

 

제목:십자가의 무게를 느끼는 것

30년 동안 연극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맡은 안톤 레이지라는 유명한 배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형적인 미국 여행가들 중에서 모든 카메라 장비를 짊어진 어느 부인이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들어 옮기는 자기 남편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보기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그 부부가 무대에 접근하여 남편은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지만 그 십자가를 들어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십자가를 가지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동안 그 유명한 배우 레인지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 여행가는 그에게이것은 연극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사용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배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만일 내가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면 내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과 주님과 교회에서도 그와 같습니다. 내가 그러한 일에 아무런 값도 치루지 않는다면, 내가 피와 땀과 수고와 고통을 그 일에 쏟지 않는 다면 나에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만일 내가 그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면 내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염두에 두어야 할 희생이며 값입니다. 그 희생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손과 하나님의 손에 먼지와 재로 돌아올 것입니다.

제목:십자가의 삶

가가와 도요히꼬가 어느 날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설교를 마친 다음 밖으로 나오는데 두 학생이 자기들끼리 이런 말을 주고받는 것이었습니다. “나는가가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실상 오늘 그분의 말을 듣고 좀실망했어. 별로 말을 하지 않더군.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 보니 성경을 눈앞에 바짝 대고 겨우 읽더군.” 이 말을 들은 다른 학생이 말하였습니다.“자네는 그가 왜 성경을 그처럼 눈에 바짝 대고 읽는지 아나? 몇 년전 그가 고베의 빈민굴에서 살 때 한 거지가 그에게 하룻밤 잘 곳을 청했지. 가가와는 그 거지를 자기 오두막에 데려와 함께 자다가 그 거지가 갖고 있던 트라코마라는 눈병에 전염된 거야. 이 병 때문에 그는 거의 소경이 될 뻔했지. 그리고 말이야 내가 보기에는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에는 별로 많은 말이 필요없다고 생각해.” 가가와는 고아였습니다. 그가 폐병으로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선교사의 도움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진실한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대한 명상이라는 책을 쓰면서 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게된다고 가가와는 말합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주님이 몸소 보여주신 삶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삶이야말로 바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나?”에 대한 진정한 해답이 될 것입니다.

 

제목:십자가의 표준

22:2; 3:10; 49:2; 13:16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룻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22:2).

이 성경의 진리는 어느 날 워싱턴 D.C.의 갈보리 침례교회에서 새교인을 받아들인 일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설명된다. 그 교회의 담임자인 그린 목사는 어느 주일아침예배 때 귀족이며 고위 법관인 찰스 에반스 휴즈와 함께 중국인 한 사람과 세탁부로 일하는 여자 한 사람을 새 교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기 앞에 어색하게 서있는 그들을 보고 그린 목사가 말했다.

"친구 여러분, 여러분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는 맨 밑의 땅이 언제나 표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십 자 가

우리는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6 : 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2 : 20).

또 십자가로 이 둘은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2 : 16).

5 : 24, 6 : 14,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이 없다고 했다(윌리암 펜).

나는 어떤 날 죽었다. 세상이나 친구들의 칭찬이나 책망에 대하여도 죽었다(죠지 물러).

십자가의 신학은 빛의 신학이다(루터).

중생한 성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난자다(막스웰).

 

캐네디 대통령이 암살 당할 때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택사스에서 성회를 인도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왔었다. 그러나 그 성회는 역사가 없었다. 이유를 알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데 독일에서 찾아온 자기가 잘 아는 평신도 한 사람이 말하기를 "오늘 왜 역사가 없었는줄 아십니까? 오늘 설교에는 십자가가 빠졌습니다." 이때부터 빌리 그레함은 결심하기를 설교에는 십자가를 증거하기로 했다.

 

옛날 로마시대에는 죄인을 잡아서 사형을 시킬 때는 이상한 방법으로 사형을 시킨다. 어떤 방법인가하면 죄인을 말뚝에다 팔과 다리를 묶어 놓고 난 다음 죽은 시체를 갖다가 정면으로 마주 대어 묶어 놓는다. 즉 입과 코, 눈 가슴 할 것 없이 마주 묶는 것이다. 그래서 놓아주면 죽은 사람의 독이 옮겨져 산사람이 죽게 된다고 한다. 이 방법은 십자가와 같이 가장 악날한 방법의 하나이다.

 

서울에서 어떤 30대 된 노처녀가 결혼을 하여 잉태된 아이가 이상이 있어 산부인과에 가보았더니 복개수술을 해야 아기고 살고 산모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피검사를 해보니 보통있는 혈액형이 아니고 이상한데 이런 피를 가진 사람은 만 명에 하나정도 밖에 없는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래서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광고를 했으나 타나지지 않았다. 8군에서 발간하는 미군신문에서 광고를 본 한 미군병사가 달려와 피를 검사하니 같은 형의 피였다. 미군병사는 여자에게 자기 피를 빼서 수혈하라고 허락하였다. 그런데 미군이 죽었다. 미군병사의 피를 받은 여자는 살고 어린애도 살았다. 예수님의 피는 인류를 구원하는 피이다.

 

옛날 중세기에 십자군에 대한 이야기이다. 십자군이 회교군에게 쫓기어 어느 통나무 다리위로 피래 갈 때에 다리가 오래돼서 썩은 나무 한 토막 때문에 무너질 위기에 있음을 발견한 한 병사가 내려가서 자기 다리를 통나무 대신 끼워놔서 많은 사람이 무사히 건너가고 그 병사는 다리가 찢기고 문드러져 죽었다. 이 병사는 동료들을 위해 진 십자가였다.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자로 존경받은 성 까일스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본래 아덴의 한 왕자로서 태어났지만 주를 믿는 다음에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깊은 산에 들어가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오직 하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사랑하던 암사슴 하나만은 자기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래서 산에 가서 다닐 때도 이 암사슴과 같이 다니고 또 암사슴의 젖을 짜서 먹고 초극목피로서 생활을 하면서 산에서 깊이 기도생활을 했다. 그때 마침 불란서의 어떤 왕이 사냥을 하기 위하여 깊은 산 속에 들어갔는데 한 골짜기에 가보니까 바위아래 사슴이 하나 있었다. 그는 이 사슴을 향하여 겨누어 쏘았다. 그때 까일스가 조용히 묵상을 하고 있다가 이상한 소리가 나서 어른 눈을 떠보니 자기가 사랑하는 사슴을 향하여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 막았으나 손을 뚫고 나가 사슴에게 얕게 박히었었다.

그래서 사슴은 약한 상처를 입었을 뿐이었다. 불란서 왕이 이런 것도 모르고 사슴이 죽었거니 하고 헐떡이면서 뛰어왔다. 와보니 어떤 남루한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데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왕은 예수님의 못 박힌 손을 연상하고 어쩔 줄을 모르고 사과하고 다시는 사냥을 안 했다고 한다. 이 왕은 피 흘리는 손을 보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고 자기의 만행을 뉘우쳤다는 것이다.

 

크리스챤 버나드 박사는 심장이식 수술을 창안한 사람으로 어떤 환자가 자기의 낡은 심장을 보여달라고 하였다. 만일 심장이식을 하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것을 생각하고 자기의 낡은 심장을 들여다보다가 버나드 박사를 바라보면서 감사하다고 말하였다. 몸에 관련된 것이나 영혼에 관련된 것이나 우리에게 심장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심장이 약하면 피 순환이 잘 안되고 피 속에 노폐물을 걸러낼 수가 없고 건전한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우리 영혼에 그리스도의 피가 없이는 맑힐 수 없는 것이다. 곧 십자가에 흘린 피이다.

 

로버트 지리 박사는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면서 맨 처음 갈보리를 찾아갔을 때 느꼈던 경험을 매우 실감나게 말해주고 있다. 그는 매우 흥분된 마음으로 안내자를 따라가다가 갈보리 언덕에 오를 때는 먼저 올라갔다. 그가 정상에 올라가 예수님이 피를 쏟으신 곳에 섰을 때 위대한 설교자의 감정이 복받쳐 몸이 떨려옴을 느꼈다. 안내원이 뒤따라와서 선생님 전에 한번 이곳에 왔던 일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대답 없이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지리 박사는 마음속으로 예 약 2천년 전에 이곳에 왔던 일이 있지요 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려 이곳에 오셨지요 어리석은 자들에게 끌려서 말입니다.

 

한 소년이 의사로부터 자기의 누이동생에게 약간에 피를 제공하여 주면 위독한 누이동생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6살 난 누이동생은 매우 위독한 상태에 있었다. 소년은 수년 전 바로 지금 동생이 앓고 있는 그 병에 걸렸다가 나은 일이 있다. 그러므로 누이동생이 나을 수 있는 방법은 면역성을 가진 오빠의 피를 받으면 된다고 한다. 두 형제는 같은 혈액을 가졌으므로 오빠의 피를 받을 수 있고 동생에게 피를 헌혈할 수 있게 되었다. 곧장 두 어린이는 수혈을 하게 되었다. 오빠는 창백하게 되지고 동생은 핏기가 발그레하게 올라왔다. 서로 아무 말 없이 눈이 마주 치자 싱긋 웃었다. 오빠인 소년이 고통스러운 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 나지막한 목소리로 "의사 선생님 나는 언제쯤 죽게 되나요." 하자. 동생의 가슴은 뭉클하였다. 오빠에 생명을 내가 빼앗는구나하고 소년은 자기의 생명을 포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콘스탄티 황제에게 나타난 십자가

로마제국은 주 후 64년부터 313년까지 기독교인을 핍박하였다. 주후 313년에 데오크레틴 황제가 죽자 각지방에 있던 총독들과 왕자와 정권싸움이 일어났다. 이때 황제의 아들인 콘스탄틴이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터에 나갔을 때 그는 환상 중에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한다. 그 십자가 아래는 분명히 라틴말로 "너는 십자가의 깃발로 승리하리라."는 글을 보았단다. 그 때 그는 거기서 엎드려 회개하고 부왕이 핍박하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전쟁은 10년 간 계속된 끝에 승리하여 대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이때가 바로 주 후 313년 로마제국을 통일한 첫 사업으로 핍박당하던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정하였다. 이는 그가 본 환상의 십자가의 승리였다.

 

얼마 전에 필자는 한 선교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케냐 그들의 선교병원에 발에 상처를 입고 찾아온 한 소년이 지혈을 시키지 않고 먼길을 걸어와서 핏자국이 땅위에 남게 되었다. 병원 길을 몰라 이리저리 헤매이다가 마침 도착하였다. 조금 후에 어머니가 급히 찾아 오셨는데 어머니는 그 아들의 핏자국을 보고 몸조리며 뒤따라 온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일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으나 그 길을 잃을 염려가 없는 것은 그의 핏자국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발자국만 딛고 가면 주님을 만날 수 있다.

 

필리핀에 한 성도가 기도하기를 자기 병만 고쳐주시면 내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체험해 보겠습니다. 하고많은 재산을 모아 가지고 예수님 십자가 그대로 만들고 30관 되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산에 올라가면서 쓰러지면 옆에 로마군병과 같이 채찍으로 때리게 하고 상처를 당하면 의사에 치료를 받으며 못을 손에 박고 발에는 노끈으로 맷다. 그리고 십자가에 높이 올려놓았는데 20초가 되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내리게 하여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9시간동안 고통을 당하시고 운명하였었다. 그 고통이 얼만 심하였을까?

 

강원도에 도지사로 있었던 유성준씨가 내가 예수를 믿고 보니 진리가 밤송이 같다고 하였다. 그 뜻은 십자가의 도를 상징한 말인데 처음 밤송이는 가시가 있기 때문에 누가 얼른 취하려고 생각지 않으나 다 익어서 저절로 벌어지면 누구나 그 밤을 취하여 껍데기를 벗기면 고수한 맛을 보는 것 같이 십자가의 도가 처음에는 어렵게 생각되나 믿고 보면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영생의 도리인 것이라고 말하였다.

 

남미의 에콰도로 나라에는 미개하여 복음을 전해도 이해하지 못한 때가 있었다.

20년 전에 다섯 명의 선교사가 가서 선교하다가 살해되었다. 그런데 그 후 몇 사람에게 의사를 전달하게 되어 복음을 받아들여 지금은 원주민들 가운데 그리스도께로 적지 않게 돌아와 예수 믿게 되어서 선교사들이 희생된 피의 댓가는 헛되지 않았고 살해된 그곳에는 예배당을 세웠다고 한다.

 

안악골 망나니였던 김익두가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다.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 믿고 구속의 진리를 깨달았다. 하루는 김익두 일에 죽어서 장사지냅니다.하고 부고장을 돌렸다. 부고장은 받아본 사람들이 모두 못된 놈 죽었으니 잘됐다고 좋아했다. 김익두의 과거 불량자가 새사람으로 변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리 위함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교회 갔다 오는데 동네 사람들이 죽은 김익두가 모질어서 귀신이 살아왔나? 의아스럽게 여겨 "당신 어떻게 된 거요?" 하고 물었더니 "예전에 못된 깡패가 죽고 예수 믿어 변화된 새사람 김익두 입니다." 하고 대답하더란다.

 

어거스틴은 원래 방탕하였던 자이나 예수를 믿고 변화 받은 다음부터 전에 지은 죄를 생각하며 오랫동안 참회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길을 가다가 옛날에 놀던 창녀를 만났단다. 여인은 어거스틴을 보자 따라오면서 "여보세요 당신이 어거스틴 아니요. 왜 요사이는 놀러 오지 않습니까?" 하고 유혹의 추파를 던졌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돌아보지도 않고 네가 전에 부르던 어거스틴은 이미 죽고 지금의 나는 예수님과 같이 사는 어거스틴이라고 마음속으로 대답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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