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니케아회의 이후의 교부들 |
이름 | 연도 | 목회지 | 대표 저서 | 주요 사실 |
락탄티우스 | - 240년경
- -320년
| - 이탈리아
- 고올(프랑스)
| | - 그의 아버지는 이교도였으며 성년기에 개종하였고 콘스탄티누스 황제 아들의 가정교사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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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비우스 | - 263-339년경
| - 가이사랴
| | - 교회사의 아버지로 불리우며 가이사랴의 신학교에서 가르쳤으며 그곳에서 감독직을 수행한 후 안디옥의 감독 요청을 사양하였다.
- 아리우스 논쟁에서 타협점을 모색하였지만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의 견해를 모두 동조하지 않았으며 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자문역으로 활약한 그는 천년왕국설에 완고하게 반대입장을 견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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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라리 | - 291년경
- -371년
| - 포아티에
| | - 생애 말년에 그리스도인이 된 그는 아리안주의에 서방측 반대론자로 활동하였으며 350년 포아티에 지역 감독일을 맡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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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나시우스 | - 296년경
- -373년
| - 알렉산드리아
| - 그리스도의 성육신론
- 아리안주의 반박서
- 아폴리나리우스 반박서
| - 정통 삼위일체론자의 대표적인 변증가로 알렉산더 주교의 비서일을 보면서 니케아회의에 참석하였다.
- 328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된 후 다섯 차례의 망명생활과 철저한 금욕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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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질 | - 329년경
- -379년
| - 갑바도키아
| | -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여 아테네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금욕생활로 일관한 그는 갑바도키아지역 가이사랴의 감독이 된 후 아리안주의와 논쟁을 벌였으며 나병환자 진료소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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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사의 그레고리 | - 330-394년경
| - 갑바도키아
| - 에우노미우스 반박서
- 아폴리나리우스 반박서
- 성자와 성령에 대하여
| - 바질의 동생으로 오리겐의 영향으로 은유론자가 되면서 결혼후에도 철저한 금욕생활을 추구하였다.
- 372년 권유에 못이겨 닛사의 감독이 되었고 아리안주의와 싸웠으며 삼위일체론 가운데 본체와 위격의 구분을 최초로 주장하였으며 콘스탄티노플회의에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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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시안수스의 그레고리 | - 330-390년경
| - 갑바도키아
- 콘스탄티노플
| | - 낫시안수스감독의 아들로 바질과 함께 그리스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는 철저한 금욕주의자로 374년 낫시안수스의 감독이 된 후에 381년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일도 보았으나 곧 사임하였으며 아리안주의에 반대한 당대의 웅변가요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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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로시우스 | - 340년경
- -397년
| - 밀라노
| | - 고올(프랑스)지방 총독의 아들로 태어나 관료가 되려고 준비중에 북이탈리아의 집정관에 오른 그는 374년 밀라노의 감독직을 맡았으며 그후 금욕생활을 표방하였으며 아리안파와 논쟁을 벌였고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데살로니가인을 학살하자 여기에 맞서 싸웠으며 그의 설교는 어거스틴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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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리소스톰 | - 374년경
- -407년
| - 안디옥
- 콘스탄티노플
| | - 그의 별명은 '달변가'로 고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였으며 그의 설교는 윤리적인 실천에 큰 비중을 두었고 로마 관료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수사학을 공부하였으며 수도생활을 자청하였다.
- 397년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직에 올랐으나 여황제 에우독시아에 의해 추방되어 망명지에서 여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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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 | - 345년경
- -420년
| - 로마
- 안디옥
- 베들레헴
| - 라틴어성서(Vulgate)
- 저자목록 색인[다수의 주석서]
| -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 수사학을 배웠고 수도원운동의 주창자로 대부분의 생애를 사막에서 운둔생활로 보냈으며 당대에 히브리어에 능통한 극소수의 사람으로서 로마의 감독 다마수스의 비서일을 담당하였다.
- 그의 영향으로 수많은 로마여성들이 금욕주의에 호응하였으며 그의 후반 생애의 35년간은 베들레헴에서 보냈고 그의 불후의 역작인 라틴어성서(Vulgate)는 가톨릭교회의 공식성서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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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르 | - 350년경
- -428년
| - 안디옥 몹수에스티아
| - 소예언서 주석
- 은유론자 반박서
- 원죄 옹호론자 반박서
| - 안디옥 신학파의 대부로 크리소스톰의 친구였던 그는 금욕생활을 청산하고 결혼하였고 392년 몹수에스티아의 감독이 된 후 성서해석을 위해 문법적, 역사적 자료의 활용을 주장하였다. 성서의 은유적 해석에 반대하였고 네스토리우스(경교)의 지도자가 된후 제2차 콘스탄티노플회의로 파문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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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 | - 354-430
| - 북아프리카
| - 고백록
- 명상록
- 신(神)의 도성
- 신학개요
- 재고록
| - 그리스도인 어머니와 이교도인 아버지에게서 출생한 그는 카르타고에서 공부한 후 젊은 시절 마니교에 심취하였으나 386년 개종하여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에게 강화를 받았다.
- 395년 히포의 감독이 된 후 수도원생활을 동경하였다.
- 마니교, 도나투스파, 펠라기안주의자들을 배격했으며 기독교 역사철학에 초석을 마련하였고 그의 저서는 거의 중세 신학논쟁의 모든 부분에서 폭넓게 수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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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릴 | - 376-444
| - 알렉산드리아
| | - 알렉산드리아 신학파의 거장으로 412년경 감독직에 추대되었고 그를 적대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표리부동하게 처신하였으며 크리소스톰, 데오도르, 네스토리우스를 배척하였고 마리아 숭배를 옹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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