基督敎의 등장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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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개관
基督敎는 1 世紀初 - 우리가 쓰는 西紀 및 世紀 단위의 연대편년 방식이 결국 기독교에서 유래한 것임을 想起하라. - 에 등장하여, 지중해 연안지방에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로마제국과 다소의 갈등과 마찰을 거치다 마침내 4세기초 제국의 公認을 받고, 이어 4세기말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기독교는 이렇게 해서 쇠퇴하는 로마제국을 지탱하는 하나의 기둥역할을 하면서, 로마제국의 制度와 사회적 기반에 적응하는 교회조직을 발전시켰다. 古代末·中世初期의 혼란과 문명전환 과정에서 기독교 교회는 고대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무엇보다 로마제국과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기구로서 중세문명의 형성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B. 주제에 관한 기본질문
1. 기독교는 어떤 조건에서 형성되었는가?
2. 槪念적으로 보아 기독교 思想體系와 교회조직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3. 고대 지중해세계에서 기독교가 전파되는 과정과 그 요인은?
4. 기독교 교회와 로마제국의 관계는? 과연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박해를 심각하게 받았던가? 박해의 원인은 무엇인가? 결국 어떤 관계로 귀착되었는가?
5. 로마제국체제와 공인된 기독교는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6. 기독교 내부의 갈등은 어디에 원인이 있었으며, 어떻게 수습되었는가?
7. 고대말기 기독교 특유의 관념체계, 세계관은 어떠한 것이며, 그 것을 완벽히 구현하는 제도는 무엇인가?
8. 기독교가 고대와 중세의 전환기에 수행한 역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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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과 전파
A. 기독교의 탄생
기독교는 一神敎이면서 種族宗敎였던 유대교에 기원을 두고 있다. 유대교는 고대 오리엔트 및 지중해연안 지방에 등장했던 수많은 종교 가운데 異例的인 一神敎였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전통에 연결되어 있으나, Jesus Christ(Jesus Christus, L.)의 등장과 그의 독특한 가르침에 따라 민족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메시아(Messiah, Gk. 救世主)라고 알려진 예수는 유대교의 편협한 교리를 변경하여 모든 인류의 아버지로서의 神, 人類愛, 원수에 대한 사랑, 自己否定, 세계의 終末과 救援(靈的救援)을 골자로 하는 가르침을 인민들 사이에 전파하다, 유대교 사제장과 기성세력의 모함으로 十字架刑에 처해졌다. 그의 생애를 전해주는 거의 유일한 자료가 신약성서의 4 복음서이다.
하나의 종교집단으로서 기독교도, 즉 예수의 제자들이 조직화된 것은 예수의 死後,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예수사망 직후 그 제자들이 조직화되어 "교회"를 형성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즉 초기 교회의 탄생을 전해주는 자료가 신약성서의 "사도행전(Acts, E.)"이다.
예수사후의 追從者로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使徒 바울(Paul of Darsus, E. F.; Paulus, Gk. L. G. )이었다.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전도하는 활동가이면서, 그의 가르침에 다소의 신학적 체계를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론적 체계화는 전도활동 중에 집필된 몇 통의 편지를 통해 이루어진 부분적인 것이었다. → 신약성서에 수록된 바울의 편지 12 통(그 중 바울이 작성한 것으로 확실시되는 것은 4~6통에 불과하다.)
B. 전파와 발전
기독교는 당시 로마제국의 infrastructure - 안정된 치안, 발달된 교통, 통신 - 에 힘입어 단기간에 지중해 전역에 전파되었다. 특히 그 특유의 교리 - 인류간의 형제적 사랑 - 로 제국의 하층민 사이에 급속히 신자층을 확대하였다. → 이러한 사정을 신약성서의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한에서 간취할 수 있다. (일독을 추천함, 그러나 역사학도의 차가운 눈으로; 지도 참조)
초기 교회의 조직: 신약성서, 특히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한에 신도들의 공동체조직이 형성되어 가는 모습이 드러난다. 예루살렘에서 최초의 신도공동체가 수립되고, 바울 자신은 전도하러 방문한 곳마다 신도들의 공동체를 조직하고 遠方에서 서한으로 지도.(바울의 서한)
기독교는 지중해 연안의 도시를 중심으로 전파되었다. (고대의 기독교교회는 도시적 배경에서 형성) 자연적으로 신도들의 공동체를 지도하는 우두머리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들이 결국 主敎(Bishop)로 서서히 등장. 이들은 종교적인 事案을 해결하고, 신도들을 보호하고 지도하는 즉, 牧者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나아가 믿음과 傳承을 해석하고, 공동체 내부의 분규를 해결하는 일을 담당.
교세가 확장되면서,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외곽지대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이미 사도 바울은 그의 서한에서 Hispania (오늘의 스페인) 전도를 계획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었다.(실현여부는 미지수). 특히 4세기초 기독교가 제국의 公認을 받은 뒤, 나아가 5세기경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살아남아, 북부유럽의 전도를 지속하였다. 제국이 존속하였을 때, 이미 로마화된 갈리아 지방 (Galloroman Area: 오늘의 프랑스 대부분)의 로마인은 기독교도가 되어 있었고, 정상적인 교회조직도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게르만지방에서 기독교의 침투는 라인과 도나우강을 연결하는 선의 以南에 한정되어 있었다.
주교들은 교회내에서 강력한 지위를 차지하였는데, 기독교도 공동체내에서 Bishop의 등장은 평신도(laity)와 사제(priest)의 분리라는 경향에 상응한 것이다. 한편 이에는 여성의 배제라는 사회적 차별화 과정도 포함된다. 제국의 全盛期와 末期에 걸쳐 5 개의 主敎區 형성 (Rome, Constantinople, Antioch, Alexandria, Jerusalem).
2) 로마제국과의 관계: 박해(?)에서 公認을 거쳐 體制內化로
A.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
로마인은 世界帝國의 主人으로서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발생하고 유래하는 각종의 종교를 기본적으로 관용하거나, "아무러면 어떠냐"는 식으로 일관하였다.
기독교도의 박해는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로마의 爲政者들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간헐적으로 일어나던 사건이었다. → 영화 "Quo vadis"가 전하는 그림에 지나치게 현혹되지 말 것.
로마제국은 유대교에 대해 예외적으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유는 유대교가 "一神敎원리의 민족종교"로서 反로마성향을 강하게 노출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기원 60-70년경 유대는 절망적인 저항 끝에 완전히 멸망. → 유대인이 자신들의 근거지를 상실하고 서양세계 전역에 흩어지게 되었던 계기. 로마인이 離散을 강제.
기독교도 一神敎로서 로마의 황제숭배, 신격화와 때때로 충돌하였다. 기독교도들은 황제숭배를 자신들의 唯一神에 대한 배반으로 간주, 로마인은 기독교도들의 고집을 帝國에 대한 반항으로 간주. 그러나 로마인은 기독교도들을 귀찮은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우세.(참고: Plinius secundus와 황제 Trajanus의 서신 교환, AD 111-3 경)
말기로마제국의 위기 속에 제국체제는 더욱 專制化되고, 황제의 神格化를 통한 사상통제가 강화.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도는 그 특유의 고집으로 자주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특히 Diocletianus 시대의 대박해.) 기독교는 순교의 피 속에 교회가 싹튼다는 사고로 제국의 박해에 대응. 殉敎의 서양말, Martyrdom (E.), Märtyrtum (G.)은 희랍어 語源을 두고 있는데, 원래의 말뜻은 "證據하다"라는 뜻. 즉 순교는 믿음의 최상의 증거였다.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도의 박해에 대한 傳承은 대개 기독교측에서 유래하는데, 순교에 대한 초기기독교의 독특한 자세와 입장에서 상세한 기록이 보존되었고, 다소의 과장도 섞이게 되었다. (허다한 순교성인과 敎父의 일대기. 3-4세기에 생존했던 최초의 敎會史家 Eusebius에 의한 정리).
B. 기독교의 公認과 國敎化
305년 Dicletianus 사후, 제위계승분쟁 발생. Constantinus는 Diocl.황제의 副帝의 아들로서 최후의 승리자로 등장. 제국의 통합을 유지하고, 혼란을 수습하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改宗하고 기독교를 公認. (Eusebius의 傳承: 물론 그는 황제 Con.의 정치적 의도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 자신 Con.의 비호를 받았던 인물.)
Constantinus는 황제로서 교회의 정치적 효용성을 간파. 교회를 로마제국을 유지하는 체제의 한 지주로 장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Nicaea에 종교회의 (Council of N. 325)를 소집하고 기독교가 그동안 처해있던 조건으로 인하여 내포하였던 교리상의 異見을 조정하였다. 그리하여 예수의 神聖을 부정하는 입장에 있던 Arius派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삼위일체설을 기본교리로 하는 Athanasius派를 정통으로 인정하였다.
기독교의 공인으로 교세는 급속히 신장, 4 세기경 신자수는 약 3000만으로 추정. 이와 함께 교회에 대한 황제의 장악욕구도 더욱 확대, 기독교공동체내의 지도자인 Bishop의 역할도 교회 밖으로까지 확대, 제국의 행정관, 정치적 영향력 있는 인사로 변모.
마침내 4 세기말경 황제 Theodosius 1세 - 우리의 사료 Theodosian Codex (E., Codex Theodosianus, L.)를 발포한 황제(Theodosius 2세)와 혼동하지 말 것. - 는 기독교를 국교로 하고, 기타의 종교를 엄금 → 제국이 정신적으로도 그 만큼 경색되고 전제적이 되었다는 사정을 反映.
3) 제국체제내의 기독교 교회
A. 교회의 조직과 제국
로마제국말기의 기독교교회는 主敎의 지도아래 잘 조직되었으며, 그 교구(diocese)조직은 제국의 행정조직과 일치되어 있었다.
한편 기독교자체는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던 기타 고대의 종교와 확연히 구분되는 여러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 중 두드러진 바는 특히 문서적 증거에 대한 예민한 태도였다: 신약성서의 撰述, 바울의 서한을 비롯한 허다한 殉敎 및 敎父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의 保存, 傳承, 整理. 이러한 사정에서 교회는 로마제국의 행정체제, 조직방식을 쉽사리 모방하여, 그 모범에 따라 치밀한 교회조직과 교계조직을 발전시켰다. 나아가 이러한 관리·행정의 know-how를 발전, 보존, 중세에까지 전달하였다. 중세의 敎皇은 그러한 면에서 로마제국의 한 계승체였다.
그런 한편 교회는 체제정비와 함께, 지중해 연안의 각 교회조직이 취하고 있던 교리상의 異見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에 더욱 심각하게 봉착. 이 과정은 때로 교회내 심각한 갈등을 야기, 나아가 세속국가의 개입을 초래.
B. 敎理상의 異見
기독교 교회의 교리는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역사적인 것이다. 使徒 바울이래 기독교 공동체의 수가 확대되면서, 특히 이들이 공간적으로 널리 산포되면서 각지의 사회적, 정신적 풍토에 적응함은 불가피해졌다.
이미 예수死後 바울시대에도 신앙의 기본문제에 대한 견해 차는 존재.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러한 견해 차는 점점 확대.
초기의 기독교는 제국체제의 박해도 고려되겠으나, 무엇보다 그 독특한 기본교리 - 唯一神思想과 人類愛 - 로 인해 대체적으로 적대적인 환경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입장을 내적으로 옹호하는 論理가 진작부터 발달하고, 殉敎를 통해 교회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태도가 왕성했다. 이런 행위에서 두드러진 사람들을 敎父(Church Father)라고 일컫고, 그들의 주장에서 소위 교부철학이 형성되었다.
결국 교리논쟁은 이런 교회사상가들에 의해 전개: 두 가지의 큰 쟁점으로 대강을 정리하면 Christ의 본성과 구원의 문제로 집약된다.
Christus의 本性논쟁
핵심적인 논쟁거리: 三位(Trinitas, L. Trinity, E.: Yahweh, Christ and Spirit)의 本性, 특히 Christus의 神性(divinity)과 人性(humanity).
배경: 고대말기의 知的분위기, 특히 그리스철학의 유산과 영향이 강한 지역에서 기독교를 조화시키려는 노력 -> 여러 개의 극단론이 병렬, 대립.
Origen of Alexandria: Trinitas의 관계를 탐구한 최초의 기독교사상가(敎父)로서 Christus의 神聖(divinity)을 강조, 그러나 Yahweh (Father God) 보다는 다소 열등한 神性을 부여하였다.
Arius: Christus는 아버지 神과 같을 수가 없다. 즉 Chr.의 인성을 강조, 고트족(Goths)을 비롯한 여러 게르만부족들 사이에 널리 전파.
單性論者 Monophysites: Christus에게는 단지 神聖만 존재, 인간적 속성은 없다는 입장. 시리아와 이집트에 지지세력 집중.
451 년 칼케돈의 종교회의(council of Chalcedon)에서 삼위일체설 재확인, Trinity만이 아니라 Christus도 완전한 human and divine nature를 소지 → Monophysitism이 번성하였던 동방에서는 거부.
구원론 salvation: 서방의 교부들이 집중
Donatus와 Pelagius와 같은 교부들은 모두 엘리트적 신학사상의 입장에서 보다 완전한 종교적 生을 영위할 능력이 있는 자들에게만 구원이 보장된다고 주장. (특이하게 D는 로마제국의 박해기간에 背敎한 자들을 교회에서 축출할 것을 주장하였고, P는 인간이 죄악에 저항할 능력을 갖고 있으며, Christ의 희생이 없이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
Augustinus of Hippo: D, P의 엘리트주의에 반발하여 기독교도들의 신에 대한 관계를 신학적으로 정립, 그 所産이 大著 civitas dei 였다. 신도들은 聖事sacraments를 통하여 진정한 "神의 都城 civitas dei"에 참여가능, 구원은 神이 선택한 者 모두에게 자유롭게 하사하는 은혜의 선물이라고 주장. -> 물질적 세계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는 교회"와 "선택된 자들만의 교회"라는 구분이 가능. 따라서 기독교는 지상의 나라인 로마제국이 존속하든, 멸망하든 무관한 것. → 로마제국말기, 특히 멸망무렵에 나올 수 있었던 護敎論
C. 수도 공동체(Monastic Communities)의 등장
제국말기 3-4세기에 일부의 기독교도들은 스스로를 인간세계와 격리하여 완전한 명상과 참회의 종교적 생활 vita contemplativa 을 선택: 자신의 재산을 버리고 사막으로 (cf. 신약성서의 예에 따라, "富者가 천국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는 2 개의 유형
a. 개별적인 수행생활(solitary life, hermit, Eremitenleben): Syria에 유행, 西方에는 희소.
b. 수도자의 공동체생활(communal organisation, caenobium, L.): Egypt에서 유행, 수도원장(Abbot)에 완전히 복종하고 엄격한 규율을 준수하는 단체생활 (로마제국의 제대군인 Pachomius가 시작)
Egypt식의 수도공동체는 많은 추종자를 유인, 널리 전파: ex. Hieronymus (Jerome, ca. 350-419), Palestine에 유사한 수도원건립. 이곳에서 성서의 라틴어 번역완성.
St. Basilius: 이집트식 모델을 그리스에 도입. Basil은 이집트의 수도원장보다 세속의 정치에 긴밀히 연결. 그의 수도원은 在俗司祭의 양성소로 변화. 그 자신 Caesarea의 주교가 됨.
St. Benedict of Nursia (480? - 547?)와 Benedictine Order
西方에 가장 일반적인 Model을 창시: Benedict's rule (regula Benedictina, L.)
청빈, 순결, 복종, 규칙적인 기도와 명상의 일과규정
동방과 달리, 세속의 정치와 격리
특히 수도사의 勞動義務를 규정: 수도사들은 筆寫작업을 그들의 노동으로 선택, 많은 서적과 古典을 필사 → 향후 서방문화의 보존에 다대한 기여. (물론 어떤 종류의 저작이 보존되었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 많은 논란이 있었던 문제)
D. 기타 초기 교회에 대한 사항
성직자의 獨身문제: 중세기독교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성직자의 獨身主義다. 이 원칙이 하나의 교리로 확립된 것은 3-4세기경의 일이었다. 이 시기 여성에 대한 독특한 태도 - 육체적 존재로서의 여성, 위험한 존재로서의 여성 - 가 독신주의 교리의 형성에 기여하면서, 한편 오랫 동안 적대적인 환경에 둘러싸여있던 초기교회의 조건과도 결부지을 수 있다. 특히 사도 바울은 그의 서한에 가급적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다는 견해를 밝힌 바가 있었다. 어찌됐든 聖職者 - 재속사제, 수도사 - 들의 독신주의는 중세교회에서, 즉 카톨릭교회에서 대단히 강력히 견지되는 원칙이다. 이러한 성직자의 독신주의는 육체적 욕망에 초연할 수 있는 聖職者의 俗人에 대한 우월성을 과시하는 의미도 있었다.
교황의 대두:
오늘날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에서 初代敎皇은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베드로(Petrus, L.; Peter, E.)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殉敎時代에서 전승된 단 한 件의 기록에서 유래되었다. - 대략 2 세기초의 것으로 알려지는 Clemens의 편지는 네로 황제의 박해를 언급하면서 그 당시 예수의 직전제자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주장했다. 후일의 敎皇, 특히 5세기중엽의 교황 Leo와 같은 이는 신약성서에 전해지는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마태오 복음 16:18-19, 누가 복음 22:32)를 근거로 베드로의 지위를 예수의 地上代行者로 설정하고, 로마의 주교(Bishop of Rome)를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논리를 발전시켰다. 바로 이 로마 - 고대세계에서 오랫동안 세계의 중심 - 의 주교가 교황이다. (중세의 라틴어기록에서는 이런 이유에서 교황의 지위를 sedes Petri - 베드로의 의자 - 라는 修辭로 자주 표현하고 있다.)
로마의 주교(교황)는 고대세계에서 자주 로마제국 황제의 통제를 받았었다. 이미 Const. 황제의 예에서 보듯이 제국은 교회를 장악하려했고, 그 방향은 로마의 주교에 대한 적지않은 압박이었다. 그러나 西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정치적으로 진공상태에 빠진 西로마제국에서 교황은 세속권력의 비호가 없이, 홀로서기를 해야 했으며, 나아가 로마시를 중심으로 그 주변지역을 정치적, 행정적으로 사실상 관리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은 정치적 리더쉽을 발휘하게 되었고, 제국멸망의 혼란기에 정신적, 문화적 권위의 중심으로 그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다. 6세기후반기의 교황 Gregorius the Great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교회의 典澧와 音樂을 정리하고(소위 Gregorean Chant라는 교회음악의 장르는 그의 이름과 업적에서 유래), 북방전도에 힘써 Anglia (오늘날의 英國)에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 이 전도사업의 결과 Britannia, Hibernia (오늘날의 Ireland) 지방에는 꽤 뿌리가 깊은 기독교 문화가 형성되었다. (참고: 영국에서 출토된 기독교도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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