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 차 례
제 1 장
1) 히브리서의 중요성 (1절∼3절) ................................................... 1
2)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1절∼3절) ......................... 3
3)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어떻게 나타났나? (2절∼3절) ................... 5
4) 선지자와 그리스도의 차이 (1절∼3절) ............................................................... 7
5) 만유의 후사이신 그리스도 (1절∼3절) ........................................................... 9
6) 영광의 그리스도 (1절∼3절) .......................... 11
7) 그리스도와 천사와의 비교 (4절∼14절) ............................... 13
제 2 장
8) 하나님의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죄 (1절∼4절) ............................. 15
9) 들은 것을 더욱 간절히 삼가라 (1절∼4절) ................................................... 17
10) 장차 올 세상의 주인공 (5절∼10절) ............................................... 19
11) 둘째 사람과의 신령한 연합 (11절∼18절) .......................................... 21
12)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신 이유 (11절∼18절) ............................................ 23
제 3 장
13)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절) ................................. 25
14) 모세와 그리스도의 비교 (2절∼6절) ........................................................... 27
15) 안식의 불합격자 (7절∼13절) ............................................... 29
16) 마음을 강퍅케 말라 (7절∼13절) ............................................ 31
17)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 (14절) ................................................................ 33
18) 믿음으로 들어가는 안식의 땅 (15절∼19절) .............................................. 35
제 4 장
19) 아직 남아 있는 안식의 약속 (1∼8절) ............................................. 37
20) 가나안 안식의 참뜻 (2절∼3절) ............................................... 39
21) 제 칠일의 참뜻 (4절∼9절) ................................................ 41
22)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10절∼11절) ............................................ 43
23) 하나님 말씀의 능력 (12절∼13절) .......................................... 45
24)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12절∼13절) ................ 47
25)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14절∼16절) ............................................... 49
26)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대 제사장 (14절∼16절) ..................... 51
제 5 장
27) 대 제사장의 자격 (1절∼4절) ...................................................... 53
28) 예수의 대 제사장 직분 (5절∼10절) ......................... 55
29)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가 되라 (11절∼14절) ................................ 57
제 6 장
30)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 (1절∼3절) ................................ 59
31)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 (1절∼3절) .......................................... 61
32)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 (1절∼3절) ............ 63
33) 믿음에서 떨어지는 죄 (4절∼8절) ................................. 65
34) 하나님이 기억해 두시는 것 (9절∼12절) ........................................................... 67
35)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 (13절∼16절) ............................................... 69
36) 누가 약속을 받을 자인가? (17절∼20절) ............................... 71
37) 견고한 영혼의 닻 (17절∼20절) .............................. 73
제 7 장
38) 멜기세댁과 그리스도 (1절∼10절) .............................................. 75
39) 멜기세대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1절∼10절) ............................................. 77
40) 율법 외의 별다른 제사장 (11절∼19절) ............................................... 79
41) 생명의 보증이 되신 예수 (20절∼25절) ................................................ 81
42) 영원히 온존케 되신 우리의 대 제사장 (26절∼28절) ..................... 83
제 8 장
43) 하늘 성소에 있는 우리의 대 제사장 (1절∼6절) .......................................... 85
44) 구약의 하자 (7절∼13절) ............................. 87
45) 새 언약의 축복 (7절∼13절) .......................... 89
제 9 장
46) 첫 장막의 속죄소 (1절∼5절) ................................ 91
47) 성령이 보이신 뜻 (6절∼8절) ...................................................... 93
48) 양심으로 온전케 할 수 없는 구약의 제물 (8절∼10절) ......................... 95
49) 온전치 못한 율법 아래 중보자 (11절∼17절) ................................ 97
50) 그리스도의 중보자 직분 (11절∼17절) ................................ 99
51) 신 구약에 나타난 언약의 피 (18절∼28절) ................................ 101
52) 주의 재림과 구원의 완성 (28절) .......................................... 103
제 10 장
53) 첫 것과 둘째 것 (1절∼10절) ............................................ 105
54)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오신 그리스도 (5절∼10절) ........................... 107
55) 영원한 구원 (11절∼14절) ............................................... 109
56) 그 날 후에 세울 하나님의 언약 (15절∼18절) ................................................. 111
57) 사죄자의 신앙적인 자세 (19절∼20절) .............................. 113
58) 보좌에 나갈 자격자 (21절∼25절) .............................................. 115
59) 짐짓 죄를 짓는 자 (26∼29절) ............................................. 117
60)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 (30절∼31절) ................................................ 119
61)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32절∼39절) ............................................ 121
제 11 장
62)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믿음 (1절∼2절) .......................................... 123
63)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1절∼2절) ............................. 125
64) 선진들의 증거 (1절∼3절) .......................... 127
65) 믿음으로 알 수 있는 두 가지 사실 (1절∼3절) ................................ 129
66)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 (4절) ...................................................... 131
67) 에녹의 믿음 (5절∼6절) ......................... 133
68) 노아의 믿음 (6절∼7절) ......................... 135
69) 아브라함의 믿음 (8절∼19절) ................................ 137
70) 본향을 바라보며 살아간 믿음의 선진들 (13절∼16절) ................................ 139
71) 이삭의 믿음 (20절) ................................ 141
72) 야곱의 믿음 (21절) .......................................... 143
73) 요셉의 믿음 (22절) ............................................ 145
74) 모세의 믿음 (23절∼26절) ........................................................... 147
75) 애굽을 떠나온 믿음 (27절∼29절) ............................................... 149
76) 여리고 성을 함락한 믿음 (30절∼31절) ...................................... 151
77) 기드온으 믿음 (32절) .............................. 153
78) 바락과 삼손의 믿음 (32절) .............................................. 155
79) 입다의 믿음 (32절) ............................................. 157
80) 다윗의 믿음 (32절) ............................... 159
81) 사무엘의 믿음 (32절) ............................................ 161
82)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의 행적 (33절∼40절) .......................................... 163
제 12 장
83) 벗어버려야 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 (1절∼2절) ............. 165
84)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1절∼2절) .......................... 167
85)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3절∼6절) ................................ 169
86) 참 아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징계 (5절∼13절) ................................. 171
87) 화평을 좇으라 (14절) ......................... 173
88) 거룩함을 좇으라 (14절) .............................................. 175
89)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 (15∼17절) ............................................. 177
90)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 (15절∼17절) ................................................ 179
91) 우리의 이른 곳 (18절∼24절) ............................................ 181
92) 경건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자 (25절∼29절) ......................... 183
제 13 장
93) 가장 긴요한 권면 (1절∼4절) ............................. 185
94)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5절∼6절) .......................... 187
95) 영원히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7절∼9절) ................................ 189
96)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10절∼13절) ....................... 191
97) 영구한 도성을 찾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14절∼16절) ......................... 193
98) 목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17절) .................... 191
99) 바울의 축복 기도 (18절∼25절) ......................... 193
(1) 히브리서의 중요성
(히브리서 1:1-3)
오늘부터 우리는 히브리 서를 공부합니다. 히브리서는 구약과 신약을 유기적으로 접목시킨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히브리 서를 배우면 구약과 신약과의 정확한 관계를 올바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구원 사역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성경적인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히브리 서를 배울 때, 성경에 있어서 구약이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되며 신약에 나타난 복음이 바로 구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과 죄인들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신 것으로 말미암아 모두 성취된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은 복음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읽고 공부하는 일은 복음을 확실히 하고 확고히 하는데 대단히 유익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 히브리서의 문제점
히브리 서에는 저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누가 기록했는지에 분명치 않습니다. 영어 흠정 역에는 그 표제에 바울의 서신이라고 나와 있지만 아메리카 개정 역과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번역에는 쓴 사람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히브리서는 사도 바울에 의해 기록된 성경이라고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히브리서라고 하는 이름이 부쳐진 것은 주후 200년경 마지막 4반 세기경의 일이지만 왜 그런 이름을 부쳤는 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율법적인 제사 제도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논증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율법에서 언약하신 메시야는 예수란 사실을 깨닫게 하여 그들로 복음을 받아 드리게 하려는 데 히브리 서를 쓴 목적이 수 있는 것입니다.
아 서신은 주후 70년 디도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기 전인 61년경부터 63년경에 쓴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2. 이스라엘, 유대인, 히브리인 등의 이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상식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호칭이 여러 가지란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란 말은 야곱이 얍 복강 나루에서 천사와 더불어 밤새도록 씨름하여 얻은 그의 새로운 이름으로 '하나 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언약의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라고 말할 때는 아브 2 \ 1:1-3
라함의 혈통적 자손들을 언약적으로 부를 때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의 이름으로 불리기는 예수의 태어나시기 이전까지의 일이요 그 이후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 들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3:29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를 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6:16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또한 유대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유대인이란 말은 성경에도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주로 신약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란 말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바벨론 포로 기간 이후에 사용되어 왔는데 '유다'에 사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북조와 남조가 서로 갈라져 북조를 이스라엘, 남조를 유다라고 불렀는데 그들이 포로로 잡혀 갈 당시에는 이미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받은 후이기 때문에 유다 또는 유다 땅이라고 불려졌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히브리인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란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을 가리키는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히브리인이란 말은 이스라엘이나 유대인보다 그 역사가 오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브라함 당시 그의 혈족과 고향을 구심점으로 한 광범위한 지역의 인종을 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 히브리인이라고 부르면 아브라함의 순수한 혈통적인 족속들을 일컫는 것으로 유대인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히브리서의 강조점
히브리서의 강조점은 신약이 구약보다 뛰어나다는데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신약이 구약과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구약에 있는 제사 제도나 제사 직분은 신약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 신약 성경이나 복음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히브리 서를 연구하면 신약은 구약의 본체란 점과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구약에 나오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 직분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이 구약에서 드린 동물의 희생보다 더욱 완전하고 영원한 것임을 설명하는 일에 히브리서는 빼 놓을 수 없는 성경인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히브리서를 배우면서 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며 구약의 모든 율법과 예언과 계시가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처리되는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으시므로 온전한 신앙으로 성장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 1:1-3
(2)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히브리서 1:1-3)
히브리서는 두 구분으로 나누입니다. 하나는 교리적 부분이요 다른 하나는 실행적 부분입니다. 교리적 부분은 1:1-10:18절까지이며 싱핼적 부분은 10:19-13:25절까지입니다. 우리가 히브리 서를 배우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세하고 깊이 있게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일은 은혜를 받는 일에 가장 가까운 길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올바른 길입니다.
1.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1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들려주신 말씀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말씀을 두 가지 방편을 통해서 주셨습니다. 그 하나는 선지자를 통해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1절 초두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방편은 그 아들을 통해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2절에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선지자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시대를 구약 시대라고 말하며 아들로 말씀하신 시대를 신약 시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2. 선지자와 아들로 말씀하신 하나님
(1) 선지자로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선지자란 말은 '네비임'으로 영감 받은 예언자란 뜻입니다. 예언은 사람의 생각이나 사람의 판단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오는 것입니다. 선지자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이신 비밀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전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출4:15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아론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의 입에 함께 있겠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들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비밀한 일을 계시 받은 사람들입니다. 암3:7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먼저 선지자들에게 보이시고 그 뜻을 여호와의 이름으 4 \ 1:1-3
로 말씀하라고 명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듣게 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은 간접적인 하나님의 의사 전달인 것입니다. 이 같은 의사 전달의 하나님의 말씀은 아담 때부터 세례 요한의 시대까지로 막을 내리셨습니다.
(2) 다음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이란 곧 말세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그 시기로부터 주님이 심판 주로 다시 오시는 그 시기까지의 역사를 말세라고 부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요1:1절에서 알려주시기를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으로 태어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모든 입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부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성령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또한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존시에 제자들이나 무리들에게 하신 그 입의 모든 말씀은 한 마디의 말씀도 예외 없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죄 값은 사망이요 사망이란 지옥을 의미합니다. 이제 그들은 죄에서 돌이켜 구원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인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들이 죄악 가운데서 죽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뜨거운 사랑을 가지시고 인간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에게 구원을 주실 위대하고 비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하나님의 계획을 인간들에게 전달하시려는 마음에서 구약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신약 시대에는 그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이 말씀을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서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되어 있는 성경을 읽고 깨닫는 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며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를 받아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히브리 서를 잘 듣고 깨닫는 마음으로 공부하여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 \ 1:1-3
(3)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어떻게 나타났나?
(히브리서 1:1-3)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인간들에게 들려주시려고 하신 것입니까? 옛적에는 선지자들로 조상들에게 그리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하신 바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말씀의 요지는 무엇이었나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구약과 신약에서 각기 한 절씩만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에는 사1:18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의미를 나타내신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신약에서 말씀하시는 요지는 요3:16절에 잘 나타난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은 그를 우리의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못박아 속죄의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구약에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이나 신약에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이나 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대상은 누구인 것입니까?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죄인들은 모두 내 말을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사55:1-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를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라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히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우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죄인이 그 죄악 가운데서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배반하여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간들을 불쌍히 보시고 이런 인간들에게 그의 말씀을 통해 구원의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크신 하 6 \ 1:1-3
나님의 사랑이며 이 얼마나 감사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까? 이런 사랑과 은혜로 죄인들을 부르시기 위해 구약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신약에서는 그의 아들을 통해서 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2. 죄인에게 경종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죄인의 구원을 위해 선지자들과 아들을 통해 부르시는 말씀을 세상에 보내셨지만 만약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죄악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들을 끝내 심판하시겠다고 경종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은혜로서만 죄인들을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을 얻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율법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확인하여 죄인의 죄를 소멸해 주시고 믿음으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사랑으로 죄인들을 부르시며 그리스도의 피로 그 죄를 용서해 주시며 믿음으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만 구약 시대에는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국한되었었다는 것뿐입니다. 이처럼 구약이나 신약이나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이처럼 부르시고 믿음으로 의를 주십니다. 죄인이 구원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의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를 얻는 방법은 선행이나 율법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르 믿는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롬3:21-24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다음에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영광을 주십니다.
결론 :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해서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죄인이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여 그리스도 앞에 나오지 않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는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그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치 않는 경우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죄인 중 어느 유에 속해 있습니까? 어느 쪽이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7 \ 1:1-3
(4) 선지자와 그리스도의 차이
(히브리서 1:1-3)
히브리서의 제목을 부친다면 '그리스도를 깊이 알자'라는 제목이 되겠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보물 창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절대적인 보화를 성경에만 계시해 주심으로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를 찾을 수도 배울 수도 소유할 수도 없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데 이 말씀은 오직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만이 깨닫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깨달음은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믿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에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깨달아 그곳에서 예수를 발견하여 그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축복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1절에서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선지자가 말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는 문제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엘리야나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선지자와의 관계의 차이점을 아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1. 선지자의 경우
선지자의 경우를 보면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그대로 선포할 사명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렇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만을 전해야 했습니다. 전하라고 하신 말씀 외에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었고 만약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 생각이나 자기 주장을 전한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반드시 렘1:3에 있는 말씀대로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고 하는 말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의사나 생각과 구분하기 위해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라고 하는 말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한 말씀은 선지자의 예언대로 반드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의 권위와 영광을 위하여 선지자들로 하신 당신의 말씀을 말씀대로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신명기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 78\ 1:1-3
니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고 하셨습니다(신18:22).
2. 그리스도의 경우
다음에 그러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말씀해 주었는데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과 어떤 차이점을 가진 것입니까?
(1) 아들의 말씀은 선지자가 대언한 것과는 달리 친히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십니다. 그 삼위 중 어떤 분이라도 하나님이시며 삼위 중 누가 말씀하셔도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풍랑과 바람을 향하여 명령을 내리셨을 때, 그것들이 순종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말씀으로 명령하셨을 때 살아났습니다. 그 분의 입에서 내리신 말씀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입의 말씀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게 하신 시기에 대하여 '이 모든 날 마지막'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모든 날이란 인류의 전 역사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모든 날이라고 하신 인류의 역사를 세 구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시기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기간은 약 2천년간입니다. 다음에 아브라함부터 예수가 탄생하신 시기까지의 기간입니다. 이 기간도 약 2천년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로부터 인류의 종말 시기까지입니다. 이 기간도 약 2천년으로 계시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기간이 끝난 후에야 두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안식 시대로 천년왕국 시대입니다. 하나는 영원 무궁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들이 참으로 회개해야 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게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 예수님은 참으로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분은 나의 선한 목자로 나로 풍성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분의 말씀을 배우며 이 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이시니 그 말씀을 순종하므로 놀라운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9 \ 1:1-3
(5) 만유의 후사이신 그리스도
(히브리서 1:1-3)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후사한 말은 상속자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후사가 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은 만유의 주인이신데 이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신 분이 곧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우주 만물의 소유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후사란 말은 인간 사회에서 자기의 재산을 자기 소생에게 넘겨주는 법적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후사가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후사의 자격에 대하여 창15:3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만유의 후사의 자격
그러면 그리스도는 어떤 이유로 만유의 후사의 자격을 얻으신 것입니까? 요1:18절 말씀을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 품속이란 하나님의 몸으로 본체를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몸에는 영원 전부터 독생하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혀 줍니다.
하나님께는 오직 이 한 분, 그리스도밖에는 그 몸에 그와 함께 계시는 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밖에는 그 분의 후사가 될 자격자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으로 그 후에나 그 전에나 하나님의 후사는 이 분밖에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요10장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누구이건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절도요 강도입니다. 그가 누구이든 인간에게 생명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아버지께로서 나와서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분은 만유의 후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 같이 '나는 기리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
2.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후사로 받으신 권한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후사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권한은 무엇입니까?
10 \ 1:1-3
(1) 첫째로 요3:35절에서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 만물을 다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은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신 것입니다. 이 만물 중에는 모든 인류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2) 다음에 요5:22절 말씀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가지고 계시는 만물의 심판의 권세를 모두 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마28:18절에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권세와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것은 그분만이 하나님의 후사이시기 때문입니다.
(3) 그리고 요16:25절에서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고 말씀하심으로 아버지께 있는 것은 모두 주님의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4) 행10:42절 말씀을 보면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이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상에 열거된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한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권세를 주실 상속자로 오직 그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습니다.
3. 왜 그리스도를 후사로 세우셨는가?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그리스도를 후사로 세우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1)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을 하나님의 후사의 자격을 그리스도와 함께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가장 적격한 후사의 자격자이시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녀들로 그 안에서 함께 후사된 자격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롬8:17).
(2) 다음에 하나님은 그 아들을 믿는 자들을 그 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주시기로 섭리하셨습니다(요1:12-14). 이리하여 우리들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후사가 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갈4:4-7).
결론 :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들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본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주님과 같은 영광의 몸으로 영광의 자리에 앉을 것이라고 약속 받은 사람들입니다.
11 \ 1:1-3
(6) 영광의 그리스도
(히브리서 1:1-3)
2절과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짤막한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광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되시며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계시며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을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실 때, 그의 이름을 지극히 높이시는데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높이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영은 그리스도를 낮추시는데 피조물의 자리에까지 낮추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
성경에는 모든 만물의 창조주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창1:1절에서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신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키는 복수의 하나님이십니다. 골1:15-17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존재 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의 존재는 모든 창조물보다 앞선 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은 피조물이 아니란 의미가 됩니다.
우리는 요1:1절에서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 되심을 논리적으로 조심스럽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느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등장시키고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태초로부터 계셨음을 증거하였고 이 말씀은 또한 하나님이심을 명시함으로써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분명하고 명백하게 명시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골1:16절에서는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같은 창조를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하신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16절 뒷절 말씀에서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12 \ 1:1-3
자신의 필요에 따라, 바로 당신 자신을 위해 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이런 말씀은 절대로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사42:8절에서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기이하신 아들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성부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도 아들만은 증거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뿐 아니라 전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그 이름의 지극히 높으심을 증거 해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다.
본문 3절 말씀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 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신 가에 대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빛이신 그 하나님의 영광은 바라볼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오신 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1:9절에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는데 이 빛이 곧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했습니다. 본체란 말은 한몸을 의미합니다. 빌2:6절 말씀에서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했습니다. 요10:30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본체란 뜻입니다. 요14:9절에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아버지와 아들은 한 본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는 만물을 붙드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붙드신다고 하신 말씀은 모든 만물의 섭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구가 공중에 떠 있는 것도 온 우주가 자전하며 혹은 공전하는 일도 주님이 붙드심으로 한치의 오차 없이 가능한 것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는 정결케 하시는 일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피의 권세와 능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피는 양심으로 죽은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합니다. 그리고 죄인들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결론 : 여러분, 우리의 주님은 이처럼 위대하신 분입니다. 이런 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 주신 것입니다. 이런 분이 지금도 나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에 이런 위대하신 분을 다시 한 번 바라보시고 그 분에게 소망을 가지시고 여러분의 모든 것을 그 분에게 맡기시기 바랍니다.
13 \ 1:4-14
(7) 그리스도와 천사와의 비교
(히브리서 1:4-14)
오늘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와 천사와의 비교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히브리 서를 쓴 기자는 왜 그리스도를 천사와 비교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의 바르지 못한 메시야 관을 바로 잡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은 천사를 영적인 위대한 존재로 보고 숭배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사자로 등장하실 때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천사보다 낮은 지위의 존재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리스도가 천사보다 얼마나 우위에 계시는 분이신가에 대하여 설명해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그리스도를 천사와 동일시하는 이단이 그 당시에도 많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천사의 위치를 밝힌 것입니다.
1.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참 뜻을 알자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 성부 성령과 함께 한 하나님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약간의 혼돈된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한 하나님이시지만 아버지는 아들보다 지위 상으로 더 위대하시고 권능이나 영광이 월등할 것이란 생각입니다. 다른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은 한 분이신 데 그 하나님이 지상에 내려오셔서 아들로 그 모습을 보이셨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을 때에는 하늘에 하나님이 공석이셨다는 이론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을 정리하는 일에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도 하나님이시고 아들도 하나님이시란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이 똑같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본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신 것처럼 아들도 스스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2)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신 것처럼 아들도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3)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신 것처럼 아들도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4) 하나님이 피조물이 아니신 것처럼 아들도 피조물이 아니십니다. (5)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로부터 영광을 받으셔야 하실 분이신 것처럼 아들도 그런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란 이름은 성부 성자 성령, 이 세분에게만 부칠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얼마나 높으시냐?
우리는 4절에 있는 말씀을 깊이 유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가 천사보다 얼마나 14 \ 1:4-14
뛰어남은'이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뛰어나다는 말씀은 천사와는 그 지위나 영광이나 거룩함에 있어서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천사는 피조물이고 그리스도는 그 천사를 만드신 창조주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에게는 아들이란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5절에서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느냐'고 했습니다. 천사 중에는 놀라운 권능과 영광의 천사들도 있지만 그들 중 아무에게도 아들이란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아들이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는 언약을 천사에게는 주신 일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천사와는 완전히 구별된 분이십니다. 6절에서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고 말씀해 줍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의 경배를 받으실 위치에 있는 분이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계5: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보좌에 있는 24장로들이나 천사들이나 네 생물들이 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그리스도에게 부어 네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란 이름은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만이 메시야의 자격으로 세상에 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명을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에게는 이 같은 사명을 주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천사는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러면 천사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아들과 천사와의 차이점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7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삼으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람이란 말은 난하주에 나온 말씀대로 영들이란 뜻입니다. 14절에 나온 말씀을 보면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부린다는 말은 심부름꾼이란 말입니다. 14절에 그 해답이 나오는데 '구원을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신 존재가 천사'라고 말씀해 줍니다. 천사들은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영적 심부름꾼으로 만들어진 피조물들입니다. 그러므로 천사와 아들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존재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성경에 나타나 있는 천사들의 직무를 보면 (1)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는 일을 합니다. (2) 다음에 성도들을 돕는 일을 합니다. (3) 성도들을 인도하는 일을 합니다. (4) 주 재림 시에 그의 백성들을 모으는 일을 합니다. (5) 죽은 성도들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합니다. 이처럼 천사는 영적 피조물 중에 우수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주님과는 비교조차 안되며 지금은 우리보다 나은 위치에서 영광을 누리지만 실인즉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면 우리는 천사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주님 앞에 더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5 \ 2:1-4
(8) 하나님의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죄
(히브리서 2:1-4)
3절에 보면 '큰 구원'이란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을 표현하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은 큰 구원입니다. 우리들이 만약 하나님의 이 같은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1. 큰 구원이란 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매 일반이지만 죄인에 대한 심판에 있어서는 신약에 와서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구약에서 정죄하고 있는 율법의 정죄외,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죄가 한 가지 더 첨가되어 있는 것입니다. 장차 모든 인류들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은 율법을 지키지 못한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긴 죄,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아니한 죄로 인하여 내려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히1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얼마나 존귀하시고 위대하신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이처럼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죄인의 구원을 이루시고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값없이 은혜로 주신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자의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구원을 큰 구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1)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드린 양이나 염소의 제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이루신 구원이십니다.
(2) 이 같은 아들의 회생은 하나님의 최대의 사랑의 나타나심입니다. 롬5:7절에서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삼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증거 하셨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사랑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이실 지라도 그 이상의 사랑을 나타내실 수는 없습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값진 하나님의 귀하신 구원의 은혜를 값없이 죄인들에게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이 구원을 받는 일에 아무런 조건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은 다만 죄인들을 향하여 이것을 가져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이요 큰 구원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큰 구원 앞에서 그 어떤 핑계도 댈 수 없습니다. 이 같은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노를 스스로 취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6 \ 2:1-4
2.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등한히 여긴다는 말은 그 사실을 마음에 두지 않고 예사로이 여긴다는 뜻입니다. 몇 가지로 구분해 보도록 합니다.
(1)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을 바라보면서도 그 사실을 의심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것입니까? 롬4:20절에서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2) 등한히 여긴다는 말은 귀중히 여기거나 소중히 간수하지 않는 일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의 보화이신데 이 보화를 세상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것보다도 등한이 여긴다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할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가장 값진 구원의 선물을 천히 여긴다면 그런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태도를 본 받아야 합니다. 그는 빌3:8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줍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든 것을 다 해로 여길 뿐 아니라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보다 그리스도를 더욱 귀히 여긴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찌하여 이 같은 하나님의 큰 구원을 귀히 여기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것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기업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등한히 여긴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이단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오히려 색욕 거리로 바꾸는 것입니다. 거짓 진리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미혹의 영에 현혹되어서인 것입니다. 한 번 이 미혹의 영에 미혹을 받는 날이면 비 진리인 줄 알면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4) 등한히 여긴다는 말은 순종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같은 하나님의 큰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 안다면 반드시 순종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결론 : 우리가 하나님의 이 큰 구원을 등한이 여기는 증거는 '불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구원을 소중히 여긴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분에게 순종하는 열매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의 생활로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않고 귀하게 여긴다는 증거를 나타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7 \ 2:1-4
(9) 들은 것을 더욱 간절히 삼가라
(히브리서 2:1-4)
히 2:1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히브리 서를 기록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크신 영광을 1장에서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날 마지막 그의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분이시며,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만유의 후사가 되시며, 그 아들로 말하면 모든 세계를 지으신 창조주가 되시며, 이 분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요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는 참 하나님이시며 죄를 정결케 하시며 지금은 하늘 높은 곳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분이심을 증거 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분 예수는 하늘에 있는 천사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그 천사를 사역 자로 부리시는 분이시며 모든 천사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우리는 무엇을 들었는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그리스도는 이처럼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은 이처럼 큰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간 시간마다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깊이 간직하여 흘러 내려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얻는 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들은 것은 이처럼 그 아들에 관한 올바른 지식입니다. 예수님은 요17: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 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같은 지식을 무엇으로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입니까? 3절에서 언급해 주신 바를 보면 처음에 주로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친히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표적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으로 증거 하셨는데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증거 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이 같은 구원의 증거는 성령께서 성경에만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성경 외에 나타난 그리스도나 성경을 떠난 복음은 어떤 경우에도 다른 복음으로 우리에게 올바른 구원의 길을 제시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는 오직 성령의 지혜로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도 성경을 깨닫지 못하면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3) 다음에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올바른 지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미혹의 영은 우리들로 미혹의 길로 이끌어 이단에 빠지게 하지만 성령은 우리를 진 18 \ 2:1-4
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요14:17절에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영을 받은 사람들만이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이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진리의 성령을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2. 우리가 들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음에 우리가 또 들은 것은 아들을 통하여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1절에서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리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아버지의 말씀은 같은 말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모두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가장 중점적인 뜻은 무엇입니까? 요6:40절에서 밝히시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아버지와 아들을 별개로 믿거나 따로 따로 믿거나 알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아들을 알고 그 아들을 믿고 그 아들을 경배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이 결과적으로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한 본체이신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12:44-45절 말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명심해야 할 일은 들은 그 말씀을 흘러 떠내려보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흘려 보내지 밀라고 하신 말씀은 깊이 간직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마음 깊이 간직해 두는 사람이 믿음의 비밀을 소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간직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사55:3절에서 '귀를 기우리고 내게 와서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는 할례를 받은 귀라야 하는 것입니다. 렘6:10절에서 할례를 받지 못한 귀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 내려가지 않게 받으려면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겔3:10절에서 하나님은 겔에게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마음으로 받으려 귀로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이토록 귀중한 것입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아야 받을 수 있고 간직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멀리하고 금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은사를 받은들 무슨 유익이 있을 것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 가운데서 그의 신앙이 바르게 뻗어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9 \ 2:5-10
(10) 장차 올 세상의 주인공
(히브리서 2:5-10)
바울은 히 2장에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의 미래에 관하여 말씀하면서 장차 오는 세상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장차 오는 세상이란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두 가지 새로운 세상이 우리에게 온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된 장차 올 나라
그 하나는 주님의 재림 시에 이 땅위에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나라로 천년왕국입니다. 천년왕국은 창 1:28절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에서의 안식의 축복을 약속하셨지만 그의 범죄 함으로 그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저주의 땅으로 내어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에덴의 안식의 약속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안에서 구원을 받은 그의 백성들로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다른 또 하나의 세계는 무궁 세계인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최종적으로 예비하신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이곳은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요 우리의 본향입니다. 우리는 이곳을 바라보면서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에게 장차 나타날 영광이란 바로 이곳의 생활과 이곳에서 받을 상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구원 성도의 궁극적 소망
6절 이하에서 보여 주신 말씀은 다윗의 시84:4-6절 말씀의 인용입니다. 다윗은 성령에 감동하여 이 말씀을 기록하게 되었는데 이 말씀은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며 그가 인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을 때의 그의 낮아지심과 그가 다시 존귀와 영광으로 관 씌우심을 받은 그의 높아지심에 관한 말씀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6절에서 사람과 인자란 말이 동시에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표현입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에 관한 계시를 받고 성령의 감동으로 이 말씀을 기록할 때, 그리스도의 천사보다 낮아지심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사건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렇다고 그의 신분이 천사보다 실제로 낮아지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기간은 잠깐동안입니다. 그가 지상에서 공생애를 보내시는 그 기간 동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에게 다시 존귀와 영광으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다스리는 모든 권세를 그에게 주심으로 더 영광스럽게 하신 것입니다.
20 \ 2:5-10
9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과 존귀에 대하여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천사들보다 잠깐 못하게 하심을 입은 육신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그가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행하신 목적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사보다 낮은 자리로 내려 오셔서 고난을 받으신 일은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죄악과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천사보다 더욱 낮추시는 인자의 몸으로 세상에 보내시고 그의 속죄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구원을 이루신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일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그 아들을 귀히 여기지 아니하며 영접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2:2절로 나오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 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천사를 통하여 모세에게 주신 율법도 어기면 그것이 범죄가 되어 정당한 보응을 내리셨거든 하물며 그 아들로 큰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는 자들이 받을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클 것인가 하는 경종인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큰 구원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많은 아들을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신 일이 합당한 일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8절 하 반절에서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란 말씀은 우리가 그 같은 주님의 영광을 실제로 보지 못하고 있지만 그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우리는 분명히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말씀입니다.
결론 :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께서 인자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셔야 하리만치 컸습니다.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소망은 순전히 이 같은 주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간직하여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21 \ 2:11-18
(11) 둘째 사람과의 신령한 연합
(히브리서 2:11-18)
우리는 성경을 인용하여 말씀을 전할 때 '안에서'란 말과 '연합'이란 말을 잘 인용합니다. 성경을 상고해 보면 인간의 조상을 둘로 구분하여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령적 조상이요 다른 하나는 육적 조상입니다. 육적 조상은 아담을 의미하고 신령적 조상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육적 조상에 대하여 고전15장에서 첫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둘째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죄인의 구세주가 되셔야 하신 이유
이 첫 사람 아담은 그의 범죄로 인류 최초의 죄인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그의 모든 육신적 자손들이 죄인의 자손으로 태어나 함께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 값은 사망임으로 사망은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에게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죄인에게는 소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죄 값으로 말미암은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죄인들에게는 한 가지 희망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 구세주가 나타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사망의 사슬에서 풀어 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희망은 절대로 바랄 수 없는 희망 사항에 불과합니다. 왜냐 하면 인류는 모두 구세주의 도우심으로 구원을 받을 대상만 존재할 뿐 구세주가 되어 죄인의 죄를 대속해 줄 무죄한 인간은 존재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둘째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여기에 있으셨든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분명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아담의 자손으로서가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는 둘째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심으로 분명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시면 서도 사람으로 세상에 오셔야 하셨던 이유가 실로 이런 사실에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둘째 사람이시기 때문에 우리 역시 둘째 사람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기업의 후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둘째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 같은 일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들에게는 그런 방법이나 그런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방법이란 어떤 것입니까? 요1: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22 \ 2:11-18
는 말씀이 바로 그 방법인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는 이 하나님의 방법에 의하여 둘째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후손으로 인정되며, 아담 안에서의 인생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생으로 바뀌어지고 사망 안에서의 생활이 생명 안에서의 생활로 바뀌어지고 이 세상에서의 소망이 하늘의 소망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육신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새로운 생명인 영이 살아났기 때문에 주님과 영적인 연합이 이뤄진 것입니다.
2. 둘째 사람의 특징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둘째 사람의 특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 분은 하늘에서 나신 분입니다. 첫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늘에서 나신 일은 당연합니다. 이 세상은 죄로 더럽혀졌고 모든 인간은 죄의 자손이기 때문에 땅에서는 둘째 사람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늘에 그의 생명이 속한 둘째 사람에게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2) 다음에 둘째 사람의 특징은 하늘의 생명을 가지셨다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이 세상의 생명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죄로 죽게 된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려면 하늘의 생명을 가지고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연합이 되었을 때 그의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왕 노릇했든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으므로 그의 의로 인하여 생명이 왕 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3) 다음에 둘째 사람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보다 그 지위가 높은 자가 아니시면 죄인들을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보다 더 높으신 존재가 누구이십니까? 하늘의 천사도 부리는 영으로 그의 지위가 결코 사람보다 높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둘째 사람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아들로 인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그 아들과 함께 자녀의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아담의 자손들이 아닙니다. 아담의 자손으로서의 우리의 신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으로 우리를 지배하게 하거나 죽은 사람의 죽은 생명으로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인 성령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서 새롭게 살아가야 할 하늘에 속한 새 사람들입니다.
23 \ 2:11-18
(12)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신 이유
(히브리서 2:11-18)
11절 말씀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 대하여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이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으신 일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인 마귀를 없이 하시고 사망의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 주님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1절은 아직까지 밝혀진바 없는 전혀 새로운 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큰 감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와 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 관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형님이 되시고 우리가 아우가 되는 형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는 그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과 우리는 한 가정의 가족 관계에서 한 형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님 한 번 잘 두어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운동선수들에게는 오빠 부대들이 많이 따르지만 예수님이야 말로 믿는 모든 여성의 참 오빠이신 분이십니다. 다 '오빠 한 분 잘 두었다.' 그런데 우리 형님이신 예수님은 어찌 겸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는 일에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더러운 죄인을 사랑하시고 한 형제라고 부르시는 일에 부끄러이 여기시지 않는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이 같은 우리 예수님을 부끄럽게 해 드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브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 들이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 앞에 나타내는 일을 창피하게 생각하는 일을 말합니다. 믿지 않는 친구들이나 사람들 앞에서 자기도 예수를 모르는 사람인 척 시치미 떼는 일 같은 짓은 예수님을 부끄럽게 하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잡혀 가시는 뒤 24 \ 2:11-18
를 좇다가 대 제사장 집 뜰에서 이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자기는 예수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딱 잡아뗐습니다. 나중에는 맹세하면서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비록 가진 능력은 적었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므로 칭찬을 들었습니다.
2.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신 이유
14절과 15절에서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던 일에 대하여 그 이유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이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끄시기 위해서는 우리와 똑같은 형제의 모습을 지녀야 하셨으므로 육신을 입게 되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려고 우리와 같이 혈육에 속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마귀를 잡으려면 그가 가지고 있는 권세를 무너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쥐고 있는 사망 권세를 우리는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으면 다시는 살아날 수 있는 권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만이 부활로써 이 권세를 이기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부활의 권세로 마귀의 사망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되어 한 형제가 되었으므로 우리도 우리 형님과 함께 사망 권세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신 것은 우리를 죄의 종의 자리에서 일으켜 주려 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종은 한평생 주인의 부림을 당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싹으로 받는 것이라곤 사망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비참한 처지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죄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이기시고 죄를 심판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죄의 종의 자리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3) 다음에 또한 시험 당하는 자들을 도와주려 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8절에서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위에 계실 때 많은 시험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시험을 당할 우리를 능히 도와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요14:18절에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하셨습니다. 시험에 지지 아니하시고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즉시 도와주시므로 우리로 시험을 이기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 어떤 방법으로 도우십니까?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는 일로 도와주십니다. 피할 길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인내하여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 이기게 하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일로 이기게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환난에 동참하시므로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25 \ 3:1
(13)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 3:1)
우리는 1절에 나온 말씀에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생각이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좋은 일에 생각이 깊은 사람은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생각이 미천한 사람은 그의 인격이나 그의 활동에 경솔한 면을 나타내 보입니다. 효자다 열녀다 하는 말들은 별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에게 깊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면 효자가 되고 일편단심 남편만을 생각하는 삶을 살면 열녀가 되는 것입니다.
1.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생각인 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유식하게 표현하면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생각하는 일들이 구별되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세상 사람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세상사람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골3:2절에서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사람이 돈을 생각하면 돈의 노예가 됩니다. 술을 생각하면 술꾼이 됩니다. 낚시를 생각하면 낚시꾼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의 생각을 언제나 위엣 것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잇는 것입니다.
생각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옅은 생각이요 하나는 깊은 생각입니다. 옅은 생각이란 육신에 새겨진 생각입니다. 이 생각은 마음에 품은 것이 아니라 머리에 기억되는 생각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좌우되기 때문에 변덕을 잘 부립니다. 예수를 믿어도 변덕스럽게 믿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입니다. 한때는 반짝했다가 얼마간 지나면 사그라집니다. 문제가 생겨야 교회에 나오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깊은 생각이 있습니다. 이 생각은 마음에 새겨진 생각입니다. 이 생각은 그 무엇으로도 지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 같은 생각을 말합니다. 예수의 생각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고 떠나지 않는 상태, 예수의 생각으로 마음이 꽉 들어찬 상태, 이런 상태의 마음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 26 \ 3:1
는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할 이유는 먼저 우리들은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부르심 곧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은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백성이란 놀라운 칭호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2. 예수님의 두 가지 사역
우리는 1절에서 우리 주님의 두 가지 사역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 시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입니다.
(1) 예수를 가리켜 '믿는 도리의 사도'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의 사도 시라는 뜻입니다. 사도란 말은 헬라어로 '아포스토로스'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란 의미가 됩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은 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예수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오직 단 한분의 믿음의 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2) 다른 한 가지는 예수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란 사람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서 속죄 제사를 드리며 그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속죄의 기도를 하는 직분 자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은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을 대변하여,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하시는 사도의 직분 자로서 다른 한 가지는 사람을 대표하여 사람의 죄를 하나님 앞에 속죄하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대제사장으로 세우심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역에 대한 예수님에 관하여 깊은 깨달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는 우리가 배울수록 그 진리가 깊으며, 더 알수록 더욱 신비스러움을 바라보며 더 깨달을수록 그 은혜가 말할 수 없이 큰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믿는 도리의 사도로서의 예수를,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히브리서는 바로 이 같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게 하기 위해 기록된 성경인 것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를 배우면서 믿는 도리의 사도이신 그리스도를 잘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예수를 내 마음에 깊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27 \ 3:2-6
(14) 모세와 그리스도의 비교
(히브리서 3:2-6)
히브리서 기자는 2절 이하에서 모세와 그리스도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세와 그리스도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왜 이곳에서 모세를 등장시켜 그리스도와 비교한 것일까요? 그것은 유대인들이 모세를 메시야의 표본 인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율법에서 메시야를 증거 할 때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하므로 그렇게 인식되어 온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모세와 비교하여 그가 모세보다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가 에 대하여 증거하므로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을 확실히 증거하려고 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집에서의 충성
저자는 본 절에서 모세와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집에서의 충성심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의 모세의 충성심은 성경이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민12:7절에서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세와 비교해 볼 때 감히 비교될 수 없을 만치 우월한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다욱 큰 영광을 받을 만한 분이심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비교에 있어서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다'고 한 것입니다. 집 자체는 존귀치 않습니다. 그 집을 짓고 그 집에서 영광을 누릴 집주인이 존귀한 것입니다. 모세와 그리스도의 비교가 그러하다고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4절에서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해 준 것은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킨 말입니다. 3절에서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 하다는 말씀으로 모세는 집에 비유되고 그리스도는 집을 지은 자라는 뜻인데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으로 집을 지으신 이로서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사실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2. 모세는 사환으로 그리스도는 아들로 충성
두 번째로 모세와의 비교에서 5절과 6절에서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충성한 것은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했다'고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세가 한 일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선지자로서의 충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장래에 말할 것 28 \ 3:2-6
이란 창3:15절에서 언약하신 구세주의 언약으로 구약 시대의 모든 선지자들은 모세를 비롯하여 말라기까지 모두 이 일에 대한 것을 증거하고 예언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모세가 일한 하나님의 온 집이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구약의 교회는 곧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께 충성한 일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분으로 이루실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충성한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을 사환의 사역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사환이란 메시야인 것이 아니라 메시야를 증거 하는 선지자로서의 위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6절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말씀해 줍니다.
그러면 그의 집 맡은 아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그의 집이란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모세가 충성한 하나님의 온 집과는 다른 의미의 집입니다. 모세의 충성은 이스라엘에 국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집 맡은 아들의 신분으로 등장하십니다. 그의 충성은 집 맡은 아들로서의 충성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그가 근본 하나님이시지만 인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그의 죽으시기 까지 복종하시는 충성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편협적인 것이며 이스라엘에 국한시킨 잘못된 것이며 모세를 메시야의 표본 인물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된 성경관이란 사실을 강력히 증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6절 하반 절에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집에 해당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소망을 뜻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 소망의 담대함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소망이야말로 우리의 자랑인 것입니다. 이런 자랑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감사도 나오지 않고 감격도 없으며 삶의 보람도 없습니다.
결론 : 이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놓치지 않으면 그의 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의 집이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말하며 영생과 천국의 유업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9 \ 3:7-13
(15) 안식의 불합격자
(히브리서 3:7-13)
우리는 그간 예수님의 위대성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만유의 후사로 세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천사와도 비교할 분이 아니시며 유대인들이 숭배하는 모세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심을 명백하게 밝혀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 예수께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 한 분만으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인생을 승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주신 8절 말씀을 보니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서도 마음을 강퍅하게 하면 그는 마치 광야에서 멸망을 받은 이스라엘처럼 안식에 들어갈 기회를 상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 광야의 시험을 거울 삼으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시험 중에 그들의 마음의 강퍅함으로 인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당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은 마음의 강퍅으로 인하여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가지 견고히 잡지를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실족하여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우리에 대한 하나의 경종과 거울로 보여 주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광야란 하나의 시련의 장소입니다. 왜 시련의 장소인가? 그곳엔 물이 없습니다. 양식도 없습니다. 고기도 없습니다. 길도 사납습니다. 안식할 곳도 없습니다. 그러면 광야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뱀이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적인 시험이 있습니다. 마귀의 시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광야는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길인 것입니다. 이 광야는 오늘날 교회를 상징해 줍니다. 세상에서 빠져 나온 사람이라면 천국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교회라고 하는 광야 길을 한평생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길을 나그네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광야는 육신적으로 살만한 곳이 결코 아닙니다. 물이 없는 곳이 광야니 기갈의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광야에는 양식이 생산되지 않으니 살아가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안식처가 없으니 쉴 만한 곳도 찾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온 것입니까? 그들은 하늘에서 내 30 \ 3:7-13
려오는 만나를 먹고 살아갔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와 마셨습니다. 이런 일등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입니까? 이 일에 대하여 신8:2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2. 교회 생활과 광야 생활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는 시련의 장소입니다. 그러면 이 시련은 어떤 시련입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게 하시는 시련의 장소인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육신대로 살아갈 곳이 아닙니다. 만약 교회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고 육신대로 살아가면 반드시 시행착오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인생을 실패한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생애가 왜 형통하지 못하며 어려움 속에서 실패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지난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육신대로 살아가려고 힘썼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광야임으로 육신으로는 교회 생활에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의뢰했었다면 그들은 광야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지 아니해도 좋았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의뢰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이 창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의 원칙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란 곳은 영적인 광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육신적으로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축복이 오지 않고 목이 갈하는 어려움이 오고 배가 주리는 가난이 오고 행로에 지치는 피곤이 오며 뱀에 물리는 질병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욱 하나님을 원망하고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국은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한 한 것처럼 신앙 생활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축복을 체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결론 : 오늘날까지 예수를 믿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언약한 축복된 생애를 살아가지 못하고 실패한 사람들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생애를 살아가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 왔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31 \ 3:7-13
(16) 마음을 강퍅케 말라
(히브리서 3:7-13)
광야 생활에 승리는 인내와 소망과 순종과 하나님 의뢰에 있었습니다. 광야란 시련의 장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때때로 어려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조금만 마음을 가지고 육신의 뜻을 따라 행동하면 그 때부터 광야의 어려움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려움이 와도 인내로 길이 참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면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기적이 창조되며 말씀대로 성취하는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 생활을 하는 사람은 소망을 견고히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받는 모든 시련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마음의 눈을 떠서 좀더 먼 시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의뢰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하나님을 의뢰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일체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생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인내도 버리고 소망도 버리고 순종도 버리며 하나님 의뢰도 버렸습니다. 그들은 왜 이 같은 광야 생활에 따라야 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버린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성경은 그들의 마음이 강퍅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분명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르시는 말씀을 가까이서 들었지만 그들의 마음이 강퍅했기 때문에 그 말씀이 먹혀들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마음이 왜 강퍅해 진 것입니까? 13절에 나와 있는 말씀을 보면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의 유혹을 받아 드릴 때 우리의 마음은 강퍅해 지는 것입니다. 강퍅하다는 말은 성질이 괴팍하고 고집이 센 악한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1) 마음이 강퍅한 자의 신앙 생활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순종치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순종을 하려 해도 생각뿐 순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한 상태로 있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강퍅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죄의 유혹을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유혹을 받아 드릴 때 그 마음은 순종의 의욕이 사라지고 육신의 정욕과 탐심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2) 강퍅한 사람이 하는 일이 세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이 미혹된다는 것입니다. 10절 하반 절에서 '너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라고 말씀해 주고 32 \ 3:7-13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에 죄의 유혹에 미혹을 쉬 받는 것입니다. 미혹을 물리칠 능력이 상실된 것입니다. 다음에 '내 길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가리키는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길은 그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등뒤로 던질 때 소망의 길이 어두워집니다. 하나님의 길을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마음이 강퍅한 자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바라보고 시험을 통해서 증험했지만 그래도 40년 동안이나 시험하는 생활을 계속하므로 이들에게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란 선언을 내리시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그러면 우리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것입니까? 12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는 악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는가 염려해야 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13절에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염려와 권면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할 수 있는 방법'임을 가리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말씀만을 순종하는 일을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하나님이 증거하신 것을 믿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에 대하여 증거하셨습니다. 이 증거를 무시하면 망합니다. 하나님은 안식에 대하여 증거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으면 안식의 축복에서 제외됩니다.
결론 : 우리는 마음이 강퍅하여 죄의 유혹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거역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처럼 육신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면 결국은 멸망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하여 멸망한 일을 기억하고 마음의 강퍅으로 인하여 안식에서 제외되는 불행한 생애를 살아가면 안돼는 것입니다.
33 \ 3:14
(17)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
(히브리서 3:14)
오늘 주신 14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시작과 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시작과 끝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시작은 좋은데 끝이 나쁘면 그것은 실상인즉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시작은 좋았지만 끝은 나빴다고 바울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은 참 잘 한 일이지만 그것이 육체로 마친 일은 대단히 잘못된 일로 좋게 시작한 일이 결과적으로 유익이 없었습니다.
1. 시작이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신앙생활은 시작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경우를 거의 모두가 신앙생활의 시작을 잘 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작이 잘된 사람은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먼저 교회에 잘 출석하는 사람입니다. 직분을 주면 신앙이 좋아진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판단입니다. 처음에 주일을 잘 지키지 못하는 가운데 신앙적으로 성장한 사람을 보면 직분을 받고 10여 년 후에 보아도 그 버릇 그대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주일 예배만 나오고 다른 예배에는 얼씬도 안 합니다. 그러면 왜 흐리멍덩한 신앙이 그의 온 생애를 주장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처음부터 견고히 잡아야 할 것을 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릴레이 선수들이 달려오는 선수의 배턴을 확실히 잡지 않고 무조건 뛰어가면 아무리 잘 뛰어도 등수에 들 수 없습니다. 잡아야 할 것을 잡지 않고 뛰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에 확실히 잡아야 할 것이란 무엇입니까?
2. 그리스도인들이 잡아야 할 것
(1) 이에 대하여 히10:23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줍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굳게 잡아야 할 것은 믿는 도리의 소망입니다. 그러면 믿는 도리의 소망은 무엇을 말합니까? 빌3:9-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꽉 잡아야 할 믿는 도리의 소망이란 첫째로 그리스도에게서 난 의입니 34 \ 3:14
다. 우리는 이 의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완전한 의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의를 소유하게 된 것은 우리의 공로나 노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것으로 그리스도의 의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의를 내 것으로 소유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 의를 내 소유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 의를 끝까지 견고히 붙잡아야 합니다.
(2) 다음에 우리가 견고히 잡아야 할 것은 예수의 이름입니다. 예수란 분은 우리가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시간부터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실 분이시기 때문에 그 이름을 붙잡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예수란 이름보다 더 아름다운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란 이름보다 더 사랑스러운 이름을 불러 보신 일이 있습니까? 질병 중에 불러도 좋고 실패 중에 불러도 좋고 순교의 사형장에서 불러도 좋은 이름이 이 예수 이것만 왜 그 예수의 이름을 붙잡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은 왜 이렇게도 예수에게 차며 무심한 것입니까? 그 분에게 왜 이렇게도 인색한 것입니까?
우리는 이 예수를 처음 믿을 때부터 견고히 붙잡아야 합니다. 이 분께 소망을 두고 이 분만 붙잡는 생애를 보내신다면 우리의 생애는 이 예수로 말미암아 보람있고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예수를 견고히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3) 다음에 우리가 견고히 잡아야 할 것으로 부활의 권능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인과 부활은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시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령적 연합은 바로 이 두 가지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속죄의 은혜를 받았고 그의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하늘의 새 생명을 받아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시지 못하고 무덤에 묻혀 있으시다면 우리는 무슨 생명을 받아 영생하며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부활의 소망을 견고히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4) 다음에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견고히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의욕이 없습니다. 마음에 뜨거움이 없습니다. 이 소망을 견고히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그 출발점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의와 부활의 권능과 하늘의 상급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견고히 잡아야 할 절대적인 확실성을 하나님은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신 이는 미쁘신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는 거짓이 없으시며 천지는 없어져도 그 분의 말씀은 일점 일획이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이 분을 신뢰하고 그 분을 견고히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안식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35 \ 3:15-19
(18) 믿음으로 들어가는 안식의 땅
(히브리서 3:15-19)
우리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이 그리스도에게 약속한 안식과 직결된 사건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건에서 교훈을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히브리서는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히 4장에 가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의 안식의 땅을 밟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 받은 사실에 대하여 끊임없이 경종해 주므로 우리의 불순종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에 대하여 경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광야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이유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에서 멸망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세나 아론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친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격노케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만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결론적으로 19절에서 순종이 없는 그들에게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함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믿음과 순종은 떨어질 수 없는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3:36절에 나와 있는 말씀은 의미심장한 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아들을 믿는다는 말과 아들을 순종한다는 말이 똑같은 의미로 나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할 하나님께 대한 가장 큰 순종은 무엇입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이 순종을 저버리면 우리에게는 영생도 없으며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이 순종은 영생과 천국의 조건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할 순종은 무엇입니까? 그 아들에 대한 순종입니다. 아들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바를 순종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에게 영생이 있고 부활 있고 소망이 있다고 믿으면서 그에게 순종하지 못한다면 그런 믿음이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되겠습니까?
2. 듣는 사람의 태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36 \ 3:15-19
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마음이 강퍅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강퍅한 마음으로 들을 때 그 말씀이 어찌 좋은 밭에 씨앗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러면 어떤 자세로 말씀을 들어야 하는 거입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듣지만 마음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세상 말은 잘 알아듣고 대단한 흥미를 가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암만 들어도 캄캄하고 흥미를 상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세상 사람의 귀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할례 받은 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 말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할례란 말은 회개한 사람의 귀를 말합니다. 회개치 못한 사람의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혹 깨달아도 순종치 않으므로 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를 거부함으로 마음이 완악해 진 사람들에게는 그 귀를 듣지 못하게 하시고 그 눈을 감겨 보지 못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마13:14절에서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인용하시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은 할례 받은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10:16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목이 곧다는 말은 교만을 의미합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교만하기 때문에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순종하기를 즐겨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표식은 회개함으로 그 마음이 새로워지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아야 할 마음의 할례인 것입니다.
다음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멸망한 이유는 그들이 계속하여 죄를 짓는 생활을 해 왔다는 데 있었습니다.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40년 동안이나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 했습니다. 불순종은 죄가 되며 그 일이 계속될수록 보다 큰 죄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을 하지 아니함으로 안식의 약속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신뢰에서 오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순종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이 같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보여 주시면서 우리에게 엄숙하게 경종해 주시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라고 하는 광야생활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이 광야생활을 성공적으로자 하는 사람만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안식의 땅을 밟을 수 있습니다.
37 \ 4:1-8
(19) 아직 남아 있는 안식의 약속
(히브리서 4:1-8)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애굽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 받은 이유는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하나의 신앙 생활의 큰 경종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 일에 대하여 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들이 느끼고 깨달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깨달음을 위해 히브리서는 강도 높게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과정이 교회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의 안식 세계로 가는 하나의 노정기의 그림자로 보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천국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이 같은 실패를 통하여 그들처럼 안식에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1. 가나안 안식의 참 뜻
히브리서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언약하신 가나안 안식의 약속은 우리들에게 주신 참 영적 안식의 그림자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보여 주고 있는 몇 가지 사실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애굽이라는 도성이 나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애굽이란 나라는 그리스도인 들에게 세상을 상징해 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기 전까지는 애굽이란 나라에서 노예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들은 이 노예 생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애굽에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난 그들은 한평생 노예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는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생애는 우리들이 죄악 세상에 태어나 죄의 종으로 한평생 노예 생활을 하다가 급기야는 죄 값으로 죽어야 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용케도 애굽에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는 자기 신분을 얼마간 속여 왔지만 사람을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는 일로 죄인인 자신의 신분이 탄로되어 광야로 쫓겨난 것입니다.
(2) 다음에 애굽 왕 바로에 대하여 살펴보면 바로는 세상 임금으로 불려지고 있는 사탄의 상징적 존재입니다. 바로가 끝까지 이스라엘을 추적하여 죽이려 든 것과 같이 사탄은 끝까지 이 세상 사람들을 죄에 얽어매어 종으로 부려먹고 있는 것입니다.
39 \ 4:1-8
(3) 그리고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일은 교회와 세상과의 간격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홍해를 하나님의 기적으로 건넜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일로 바로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홍해를 건넌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교회간에는 그 가운데 홍해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홍해를 건너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옛 생활이 그립고 애굽으로 되돌아가고 싶어도 중간에 홍해가 가로막혀 있으므로 건너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애굽을 사모했지만 결국은 단 사람도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광야에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아 멸망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갈 곳은 교회뿐입니다. 자신이 교회 생활이 싫다고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생활이 어렵다고 세상으로 나가 보세요. 세상으로 돌아간다고 세상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잔득 얻어맞기만 하고 되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3) 광야란 교회 생활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에서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한 것입니까? 그들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애굽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지난날 세상에서 살아간 방법대로 살려고 하다간 반드시 실패합니다. 광야에는 쌀이 없습니다. 물도 없습니다. 고기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애굽에서 살아간 생활 방법이 통할 리 없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없는 것을 있게 하시며 기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광야의 지도자로 모세란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율법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5) 광야에는 여호수아란 인물이 나옵니다. 이 여호수아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율법이 실패한 것은 가나안에 들어갈 일은 율법이 할 일인 것이 아니라 예수가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 광야 생활 40년은 그리스도인들의 교회 생활의 한 생애를 상징해 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 땅은 안식의 땅의 그림자일 뿐 참된 안식의 땅은 아니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안식이 아니라 다른 안식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알에 대하여 앞으로 며칠간 계속해서 공부하면서 안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깨달으려는 것입니다.
39 \ 4:2-3
(20) 가나안 안식의 참 뜻
(히브리서 4:2-3)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나안 안식은 실인즉 신약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울로 주신 것이며 그들에게 약속한 안식이란 그들에게 성취된 것이 아니라 장차 우리가 들어갈 천국 안식에 대한 그림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일에 대하여 고전10:1절 이하에서 그 신령한 뜻을 보여 주고 있으며 결론적으로 11절에 와서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6절에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로 안식에 들어가는 일에 그들이 당한 일을 거울로 삼을 일에 대한 분명한 언급입니다.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행한 것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1. 우리의 경계로 주신 이스라엘의 패역
(1) 고전10:6절 하반 절에서 저희가 악을 즐겨 하는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우리는 구원을 받았으니 멸망에 이르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지옥에 갈 염려는 없다, 우리는 영생을 얻었으므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다 이렇게 자랑하면서도 실인즉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경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악을 즐겨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찌하다가 죄를 범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즐거워하는 일은 없으며 죄란 사실을 알면 통회하는 심령으로 회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만약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자랑하면서도 죄의 길에서 돌이킬 줄 모르며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다면 그들은 마치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나님을 따르고 모세의 뒤를 따라가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 받은 것처럼 참 안식에 미치지 못할 것임을 경종 하신 것입니다.
(2) 다음에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이 거울이 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율법과 양심이 우리의 죄를 보여 주는 마음의 거울이 되는 것처럼 안식에 들어가는 거울로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3) 다음에 11절 후반 절을 보면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했다고 하신 것입니다. 안식에 들어갈 소망이 말세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만 가지고는 못 들어갑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경우로 보아 분명하다는 사실을 경계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강조한 점이 네 가지로 나옵니다. 하나는 7절에 40 \ 4:2-3
나온 말씀을 보면 우상 숭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탐심이란 우상 숭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탐심으로 움직이면 목사이건 장로이건 성도들이건 다 우상 숭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강조한 점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간음은 영적 간음과 육적 간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가 그리스도인에겐 치명적인 범죄인 것입니다. 영적 간음죄는 이단을 따르거나 거짓된 진리에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의 생명이 반드시 죽습니다. 육적 간음은 자신의 인생이 파멸되고 가정이 파괴되며 돌이킬 수 없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원망이 아니라 늘 감사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일에 대하여 2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생활에 유익이 될 수 없다면 그 말씀은 들으나마나 입니다. 지금 교회에 들으나마나 한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그러면 그 말씀이 왜 유익함이 되지 못한 것입니까?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함이라고 그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말씀과 화합치 못하면 그 말씀이 아무런 유익도 우리에게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자에게만 유익이 됩니다.
결론 : 참 안식은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아직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이 안식에 넉넉히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본보기로 보여 주시며 안식에 들어갈 하나의 경계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유의할 점은 안식에 들어가는 일에 말씀을 믿는 일과 순종하는 일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안식은 들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해 경계로 보여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안식의 땅입니다. 이스라엘이 걸어간 불신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일로 경계를 삼아 광야에서 멸망 받은 이스라엘을 본 받지 말고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41 \ 4:4-9
(21) 제 칠일의 참 뜻
(히브리서 4:4-9)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3절에서 이르기를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이 일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안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소망으로 기다리는 천국의 안식이 하나님의 안식으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안식
히4:4절에는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몇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일을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되는 날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중에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이 안식일의 성경적 유래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이 안식일 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칠 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을 절대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거룩하게 안식일을 지키려고 장로의 유전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오늘날 안식교 같은 기독교계의 일부에서도 이스라엘이 율법에서 지켜온 토요일 안식일을 고집하고 그리스도인이 만약 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룰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우리는 4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안식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우리는 이 안식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칠 일에 모든 일을 쉬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쉬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안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안식은 이레 중 제 칠일에 국한시킨 그런 의미에서의 안식을 가리킨 것이 아닌 것입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제 칠일에 누리신 안식은 율법에서 명령한 안식일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신 그 새로운 하나님의 안식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명하고 있는 안식일은 이 같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하나의 그림자로 온전한 안식이 올 때까지 존속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2. 두 가지 의미의 하나님의 안식
하나님께서 내 안식이라고 말씀하신 그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42 \ 4:4-9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안식에 들어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안식이 처음에는 하나의 모형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가나안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의 복음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안식이 약속되었지만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그 약속이 허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안식은 영영히 사라져 버린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다른 날의 안식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안식을 위해 재 칠일에 안식하셨고 이 안식이 확실하고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하나님의 안식이기 때문에 율법에 안식일을 정하여 그것을 지키도록 명령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식의 비밀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므로 안식의 소망은 아직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9절에서 '그런즉 안식 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여 쉬는 안식에 대하여 계14:13절에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저희 수고를 거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런 안식을 소망하면서 살아갔습니다(빌1:22-26). 이 안식이야말로 천국의 영원한 안식을 말합니다.
이제 율법적인 안식일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인데 그리스도께서 그 그림자의 실체로 오셨으며 참 안식에 대한 확실한 약속을 주셨고 그 안식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율법아래서 참 안식이 무엇인지 몰랐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나 율법에 따라 필요한 것이지 그리스도 안에서는 안식일이 존재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골2:16절에서 안식일을 인하여 폄론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결론 : 율법적인 안식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폐해졌습니다. 만약 이 안식일을 지키려면 다른 율법의 계명도 지켜야 하며 혹 그런 것들을 지켰다고 해도 의로워질 수 있거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의 저주를 받아 정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안식을 기념하고 그 안식에 소망을 두게 하시는 새로운 날을 주셨습니다. 그날을 성경에서는 주의 날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날은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영원하 안식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된 우리에게는 율법이 제시하고 있는 그림자가 아니라 새로 주신 주의 날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의 날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43 \ 4:10-11
(22)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히브리서 4:10-11)
11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확실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 제 칠일에 안식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안식을 보여 주셨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안식에 실패하므로 다른 안식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통해 안식일을 지키게 하심으로 그리스도로 이루실 안식의 그림자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의 속죄 제물로 죄에서 건져주시고 그의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며 하나님의 안식의 확실한 약속으로 그 안식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1. 안식에 들어가도록 어떻게 힘쓰나?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힘써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구약적인 율법적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힘쓰는 사람은 율법에 얽매어 율법의 저주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로 안식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힘 쓸 일은 안식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어떻게 힘써야 하는 것입니까?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하나님의 안식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앞으로 들어갈 하나님의 안식에 대하여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경종해 주므로 안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에 소망을 두고 그 소망을 향하여 생애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유혹을 받지 않도록 죄를 이기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3:13절 말씀에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했습니다. 죄는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 유혹을 받아 드리면 우리의 마음이 강퍅하게 되어 불순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마치 그들의 불순종으로 광야에서 멸망 받은 것처럼 우리에게 안식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죄를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롬6:11 절 말씀에서 그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 44 \ 4:10-11
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연합의 뜻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죄에 대하여 마치 죽은 자처럼 죄의 유혹을 받지 마라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과 영원한 생명적 연합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와 같이 여기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맺어야 할 열매는 바로 이런 생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2.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영의 사람과 육의 사람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의 사람이 죽은 줄로 여기고 영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으로 육의 정욕과 죄의 유혹을 이기는 싸움에서 육을 죽이는 훈련을 잘하여 마음의 강퍅을 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려면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히3: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자가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잡아야 할 대상은 우리의 소망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게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하신 참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의 안식을 우리의 소망으로 끝까지 잡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안식에 대한 소망과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므로 넘어졌습니다. 우리는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안식을 소홀히 여겨 불순종하는 생활로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2) 다음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생활을 하려면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볼 수 있는 소망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히11:6절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바울은 이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뒤에 있는 것은 잃어버리고 앞에 있는 상을 위하여 그의 생애를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결론 : 우리는 광야 같은 교회 생활에서 안식의 땅을 바라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확실한 안식의 소망을 끝까지 붙잡고 안식의 땅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은 것처럼 약속은 받았지만 실패한 전철을 밟지 말고 순종하고 힘쓰는 생활을 통하여 약속의 땅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45 \ 4:12-13
(23)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히브리서 4:12-13)
오늘 본문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약속과 그 약속을 이루는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가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입니다. 히1:1절에서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조상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구약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전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다음에 다른 하나는 이 모든 날 마지막 날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이 말씀이 오늘날 신약이라고 불려지는 성경입니다. 그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삼위 되시는 분 중에 한 분이시며 하나님의 본체를 이루고 계시는 절대적인 분이심으로 그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한 서신서 등은 아들을 증거하시는 아들의 영으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은 그 아들의 말씀 가운데 포함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말씀으로 무엇을 하셨나?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입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권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 사역을 그의 말씀으로 하셨다고 했습니다. 히11:3절 말씀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일이 창1:1절에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의 역사를 에스겔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깊은 골짜기로 옮기심을 받았을 때, 그의 눈앞에는 죽은 사람의 뼈만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앙상한 뼈를 바라보는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는가'고 물으셨습니다. 에스겔은 이 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뼈들을 향하여 명령했습니다. 그랬더니 에스겔이 대언한 하나님 46 \ 4:12-13
의 말씀대로 뼈들이 움직이더니 살아 있는 여호와의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말씀은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가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온전히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대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한 번 말씀으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안식도 이 같은 맥락에서 확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부터 몇 천년 전에 어느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다해도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이 땅에서 소멸됨이 없이 계속 살아 움직여 역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운동력이 있다는 말은 살아서 역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성경에는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장차 인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이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 낱낱이 심문을 받으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12장에서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하실 이가 있으니 곧 나의 말이 마지막 날에 심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인류는 한사람의 예외자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어떤 공력에 의하여 용서를 받거나 그 사람의 덕행이나 선행을 통하여 구원받는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사함 받는 일이나 구원받는 일이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이 누구를 심판하시느냐는 문제에 대하여 알려면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말씀해 주고 있느냐를 살펴보면 간단히 알 수 있습니다. 요3:18절 말씀을 보면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분명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느냐 믿지 아니하느냐는 문제에만 관계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안됩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7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남아 있어도 오직 그 말씀에 따라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만이 그 약속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안식의 언약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안식을 이루어주실 때까지 효력이 있습니다. 순종치 아니한 이스라엘을 본 받지 말고 약속을 믿고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47 \ 4:12-13
(24)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히브리서 4:12-13)
우리는 지난 시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한다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에 이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서 역사 하시는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숨길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라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하신 것입니다. 감찰하신다는 말은 '세심한 것까지라도 자세히 보아 살핀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감찰하시는 자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 존재로 나타낸 말입니다. 그리고 그 같은 일을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 앞에 숨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책망을 들을 때, '우리가 어찌 할꼬'하는 심정으로 마음을 찢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죄를 지적 받았을 때 아무리 그 말씀을 무시하려고 해도 드러난 죄에 대한 처리는 불가피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그 죄를 버리던가. 아니면 말씀의 책망을 들으면서 그대로 죄 가운데 살아가던가 입니다. 후자일 경우, 물론 하나님의 후속조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에 빛으로 들어옵니다. 이 빛 앞에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 중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어 내어 어떤 죄라도 드러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들어오면 이 말씀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성령에 의해 그런 권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마치 벌거벗은 자 같이 그 수치를 감출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드러난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통회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정결케 되며 죄 사함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양심 앞에는 숨겨진 죄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양심이 모르는 죄는 사람들이 회개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귀한 문제인 영생과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했던 일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이 가장 무서운 인간의 죄인데도 양심은 그런 것들에 대하여 전혀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49 \ 4:12-13
또 다른 한 가지는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듣기는 해도 회개치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죄를 고의적으로 숨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서 언제인가는 그 죄를 스스로 인정하여 회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하거나 마음이 죄로 멍들어 있거나 그 마음에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죄를 드러내어 책망하며 회개케 하는 능력이 나올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의 바른 생애와 얼마나 깊은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하여 시119:9절 이하의 말씀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우리의 행실을 무엇을 따라 삼가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주의 말씀을 따라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그 말씀에서 떠나지 않으려는데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생활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 생활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이유는 범죄치 않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깊이 박혀 있는 사람은 그 말씀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범죄 할 수 없습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앞에 직고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가 행한 그대로 행위 책에 전부 기록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행한 그대로 보응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 어떤 것이라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귀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영적 무기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한 것입니다. 마귀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위협을 느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견뎌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그 말씀대로 역사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좌우에 날선 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가져오는 모든 유혹을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사탄의 유혹 앞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으로 대항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드리고 그 말씀을 믿을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이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에는 이 말씀의 무기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성령의 검을 가지고 믿음으로 전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49 \ 4:14-16
(25)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4:14-16)
예수님과 대제사장과의 관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에 대하여 대제사장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은 율법적인 대제사장인 것이 아니라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른 대제사장이심을 거듭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일에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이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4:1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다'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1.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
14절에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대제사장은 곧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그러면 예수를 가리켜 왜 큰 대제사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그 분은 이 땅위에 존재했던 율법하의 대제사장과 같은 존재가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있었던 대제사장은 율법을 따라 세워진 사람들로 대제사장이란 직분을 맡아 왔습니다. 이들은 레위의 혈통으로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세워진 사람들로 직분만 대제사장일 뿐 모든 것이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율법에 의해 세워진 직분상의 대제사장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맹세로 되셨다고 했습니다. 히7:20-2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시110:4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누구의 반차를 좇았다고 하셨습니까? ? ( )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누구의 반차를 따라 되었습니까? ?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레위 족속인 것이 아니라 ? 멜기세댁이라고 한 것입니다. 무엇이건 순서를 따라 그 직위를 인계 받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예수님은 레위 족속이 아니십니다. 그러면 ? 족이신가요? 유다 족이십니다. 이 족속은 절대로 대제사장이 될 수 없는 족속입니다. 그런데 왜 그 분은 성경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에 근거해서 레위 족속도 아닌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의 직분을 가진 것일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바로 이 점을 성경적으로 증거하기 위해 이곳에 멜기세댁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멜기세댁은 레위 족속에 속하지 아니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제사장이란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창14:18절 참조).
2.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른 우리의 대제사장
멜기세댁은 유다 족속이 아닙니다. 멜기세댁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아브라함 밖 50 \ 4:14-16
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후, 이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은 아무에게도 인계되거나 전수된 일이 없습니다. 그 후에 생긴 제사장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레위 지파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직분을 취하신 일은 율법에 의해 내려온 레위 지파의 반차를 좇은 것이 아니라 바로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을 이어 받은 제사장 직분이심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우리의 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언제나 이의를 달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이 어떤 절차에 의해 받게 되셨는가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성경적 근거는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아무런 이의를 달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적 제사장직만을 고집하므로 예수의 대제사장 직을 거부해 온 유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세우시기 위해 이미 창세기에서 멜기세댁을 등장시키시고 그를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의 법적 증거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의 대제사장은 율법에 따라 실체가 오면 사라져 버릴 레위 족속으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로 세우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인간을 제사장으로 세웠다고 했습니다. 약점이란 온전해 질 수 없는 결점인데 이것은 인간의 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언제나 율법을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영원히 온전케 되신 분입니다. 그는 하늘의 생명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 분에게는 죄가 전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이 직분을 가지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분은 이 땅위에 계시는 제사장이 아니시오 하늘의 지성소에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위에서 제사장 직분을 가진 대제사장은 하늘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다만 지성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범궤 앞에서 하나님께 대속의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장차 나타날 일에 대한 분명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론 : 예수님은 그림자가 되시는 지성소에 들어가신 분이 아니라 새롭고 산길을 통해서 하늘의 지성소에 올라가신 분이십니다. 지상의 대제사장은 죽음으로 인하여 대제사장의 변동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영원한 우리의 제사장이시기 때문에 영원히 변동됨이 없는 분입니다.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보좌 앞에 나아가 우리의 대제사장 앞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아뢰시기 바랍니다.
51 \ 4:14-16
(26)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대제사장
(히브리서 4:14-16)
본분 15절에 나오는 말씀은 우리에게 대단히 고무적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는 말씀입니다.
1. 우리의 연약을 맛보신 대제사장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을 맛보신 대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계셨을 때 그 육체의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연약함을 맛보신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배곺음도 당하셨으니 배곺음의 고통도 아시는 것입니다. 시험의 어려움을 겪으셨으니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그 어려움을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에 대하여 염려치 말라고 하시면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버지께서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능히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또 시험 받을 즈음에 피할 길을 열어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히7:2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온전히 구원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모든 백성들을 한 명도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대언자가 되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요일2:1절에서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모든 죄의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계셔서 우리의 대언자로 우리를 위하여 변호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힘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힘입고 살아간다는 말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세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처리를 이미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힘입은 자란 뜻입니다. 마지막 다른 한 가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실한 소망을 가진 자란 뜻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힘입은 사람들은 온전히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52 \ 4:14-16
2. 우리에게 이 같은 대제사장이 있음을 기억하자
우리에게 이 같은 대제사장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얼마나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지 모르는 것입니다.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생각은 우리에게 소망을 든든히 해 주며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며 어떤 시련 속에서도 결코 낙심치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할 때 먼저 우리의 속죄의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은 지금도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심으로 어떤 경우에서도 나를 온전히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같은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주이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생명의 구주이심을 굳게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만 사죄의 은총이 있으며 그에게만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속죄도 의도 영생도 소망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6절에 있는 말씀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그릇들임으로 범죄하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죄를 범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대제사장을 찾아 그분께 간구하면 그는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그의 속죄의 피를 가지시고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뿐 아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도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죄 문제만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도 내려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주님의 도우심을 얻기 위해 항상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는 바로 우리가 주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그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새롭고 산길을 통해서 은혜의 보좌와 직통으로 뚫린 자리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 주님을 향하여 무릎을 꿇는 그 자리는 다른 자리가 아닙니다. 은혜의 보좌라고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안식의 땅까지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음성을 들을 때 지난날 모세의 음성을 듣고 패역했던 이스라엘처럼 강퍅하지 말고 순종하라고 경종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 죄를 범해도 시험이나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마시고 우리의 대제사장 앞으로 나아가기면 하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53 \ 5:1-4
(27) 대제사장의 자격
(히브리서 5:1-4)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히브리서에서는 이 직분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할애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존재했던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과 이스라엘의 제사장 직분은 동일한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의 그림자에 불과 했다는 사실을 알고 깨닫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1. 대제사장의 자격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람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거룩한 자라고 불려졌습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예물을 드리고 기도해 주는 직분자로, 몸을 씻고 예복을 입고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들은 절대로 머리를 풀 수 없었으며 옷을 찢을 수도 없었고 아내가 죽어도 과부를 아내로 취할 수 없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대제사장의 자격 요건이 나오는데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의 직분이 아무리 거룩하다고 해도 천사나 그밖에 다른 어떤 영적 존재도 이 직분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12 지파 중에 오직 레위 지파를 이 직분에 합당한 지파로 택하셔서 레위 지파의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부르시고 아론의 자손들로 대대로 제사장 직분을 맡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도 거룩한 자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었으며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고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대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레위 지파에 속한 아론의 자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사람들 가운데서 대제사장을 부르신 것입니까? 2절과 3절에 그 뜻이 나와 있습니다. ( ). 대제사장이 사람을 위하여 예물을 드리고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려면 먼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처지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속죄제물을 드리는 대상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리에 유식한 사람도 아니며 온전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무식하고 미혹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식하고 세상사에도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영적으로 어려서 사탄의 미혹을 받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54 \ 5:1-4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백성들을 대표하여 그들을 위해 속죄 제물을 드려야 할 대제사장이라면 이런 백성들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대언의 기도를 드리게 되고 모세처럼 눈물을 뿌리며 그들의 사죄를 위해 자신이 죄를 지은 자인 것처럼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대제사장이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늘의 천사들처럼 신령한 존재들이라면 이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대제사장도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는 고초나 시련도 겪으며 사람들과 똑같은 환난과 슬픔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의인이 없기 때문에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죄 문제로 고민하게 되고 자신도 지은 죄로 인하여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 자신도 자기의 죄와 허물을 위해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하는 일 중에 가장 뜻깊은 일이 있는데 그 일이란 일년에 한 번 씩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 제물을 드리는 일입니다. 이 때 대제사장은 먼저 자신의 속죄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서는 결코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자신의 죄를 인하여 먼저 송아지의 피로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의 죄를 위해 염소의 피로 속죄 제물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죄를 범하지 않을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에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란 단 한 사람도 존재치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을 세우실 때 연약한 사람 중에서 부르심으로 백성들의 어려움과 연약함을 이해하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도 하나님의 백성들과 똑같이 연약에 싸인 인간들로 당신의 종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를 천사로 알고 교회에 나오신다면 그런 사람은 몇 일이 못 가 목사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냄새가 풍기며 목사는 사람이지 사람이상의 존재가 아님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목사가 의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까? 누구든지 자기는 죄를 범한 일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자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목사라고 죄 없기를 바라겠습니까?
목사는 양떼들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경우처럼 뼈아프게 여겨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 중요하고 양떼들은 목자에게 허물이 있어도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덮어주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그런데 이런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온전한 제사장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며 자신을 위해서조차 속죄 제물이 필요한 사람은 온전한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얼마나 귀중하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55 \ 5:5-10
(28) 예수의 대제사장 직분
(히브리서 5:5-10)
본문 5절부터는 예수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제사장 직분이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오직 레위 족속 가운데서 택하시고 부르심으로 된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도 아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아 이 직분을 받으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예수의 제사장 직분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은 말씀으로 계셨던 영적 상태로는 받으실 수 없으셨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연약에 싸여 있기 때문에 이런 백성들을 위해 대제사장 직분을 담당하시려면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히4:14-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이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이 직분은 스스로 취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아론과 같은 부르심에 의하여 이 직분을 가지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6절에 나온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아론의 경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은 아론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으로서가 아니라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 되라고 하시는 명령에 따라 된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2.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게 된 이유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왜 아론의 서열을 따르지 않고 멜개세댁의 서열을 따르는 제사장이 되셨는가에 대하여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실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였습니다. 그리하여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율법아래서 범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드리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속량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율법의 속하지 않게 되었으며 은혜 아래 머물게 되었습니다. 요1:17절에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을 폐하시고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56 \ 5:5-10
를 옛 언약의 대제사장으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언약의 대제사장으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옛 언약의 대제사장은 오직 아론의 자손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자격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레위 자손이 아니라 유다 지파의 자손이심으로 대제사장이 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 언약의 대제사장으로 선택받으시고 부르심을 받은 예수님은 아론이 아니라, 멜기세댁의 서열을 좇아 대제사장으로 세우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멜기세댁에 관한 말씀은 히7장에 나오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간략히 설명하는데 그치려고 합니다. 창14:18-2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1) 멜기세댁이란 사람은 살렘의 왕이자,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율법에는 왕은 제사장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멜기세댁은 율법 아래 있었던 제사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율법의 구애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왕으로 오셨고 또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는 마땅히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제사장이 되실 분이 신 것입니다.
(2) 다음에 왕이요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댁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을 때 양이나 송아지나 염소의 피를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떡은 그리스도의 살이요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은 바로 그의 몸과 그의 피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 몸은 우리를 위하여 찢기신 화목제물이십니다. 그의 피는 우리의 죄를 사죄하는 속죄 제물이십니다.
(3) 다음에 멜기세댁은 그의 제사장 직분을 다른 이에게 넘겨준 일이 없으며 한 번 나타났다가 그 이후에 아무 말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을 이어 받을 만한 제사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댁은 그리스도의 상징적 인물입니다. 멜기세댁의 이 같은 제사장 직과 왕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넘겨졌습니다.
(4) 다음에 멜기세댁은 혈통이나 족보에 의하여 세워진 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부르심으로 세워진 제사장이었습니다.
결론 : 하나님은 그의 아들로 죄인의 구속을 위한 대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직접 체험하신 분으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를 이해하시며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우리를 도와주시며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누구보다 우리를 이해하시고 긍휼을 베푸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분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하늘의 지성소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 분을 의뢰하시기 바랍니다.
57 \ 5:11-14
(29)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가 되라
(히브리서 5:11-14)
히브리서 저자는 11절에서 멜기세댁에 관하여는 할 말이 많지만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정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먹는 자는 영적 성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때를 따라 받아먹지만 신앙적으로 장성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일이 안타까웠습니다. 멜기세댁과 같은 성경의 깊은 진리를 소화시키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아직 젖을 먹는 어린아이의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탄식했습니다.
1. 두 가지로 구분되는 하나님의 말씀
히브리서 저자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젖과 단단히 식물이 그것입니다.
처음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의 영적 식물은 젖에 해당되는 순한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젖밖에 소화시킬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자라는 이들은 젖이나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젖이라고 표현한 것은 기독교의 초보적인 교리를 말합니다. 이들은 아직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깊은 단계의 말씀을 이해하여 영적 양식으로 소화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의당히 젖을 사모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편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어린아이란 말은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고전3: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자란 영적인 사람으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롬8:5절에 있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을 생각하거나 결정할 때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들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신령한 사람이란 영으로 육신의 행실을 죽이는 사람들입니다. 롬8: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몸의 행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 본래의 성품을 영으로써 억제시키는 일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히브리서를 읽어야 할 사람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조차 가르침을 받아야 할 정도로 어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탄식한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58 \ 5:11-14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때가 이미 오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도 때가 오래면 그리스도 안에서 선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가 오래면 신앙적으로 크게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젖만 사모하며 젖만 골라 먹던 시절에서 벗어나 단단한 음식도 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월이 오래 지나 나이가 들면 그 나이에 걸맞은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5살쯤 되면 이제 뛰어다닐 줄 알아야 하는데 어린 아기처럼 기어다니는 생활을 한다면 이런 어린이는 기형아이지 정상적인 아이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2. 장성한 자
그리스도인은 신앙적으로 장성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장성한 자의 음식은 젖이 아니라 단단한 식물 즉 밥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어려운 말씀도 잘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말씀 안에 생활할 수 있는 신앙적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그 단계가 대단히 장성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삭을 살려준다는 약속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직 이삭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 하나님께서 네 자손은 이삭으로 말미암아 번성하리라고 하신 약속을 믿고 이삭을 제물로 드려도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말씀대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14말씀을 보면 믿음이 장성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세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첫째로 의의 말씀을 경험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그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경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말씀에 대한 순종의 생활을 통해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체험을 겪었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지각을 사용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지각이란 지혜의 감각을 말합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연단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즉각적으로 지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지각,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하나님의 징계를 맞을 것이라고 하는 지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사람은 선악을 분별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선악을 분별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잘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결론 : 우리는 어린아이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믿음이 없고 순종하지 못하므로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연수에 따라 제대로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장이 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열매를 맺으며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은혜의 생활 행복한 생활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59 \ 6:1-3
(30)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
(히브리서 61-3)
그리스도를 영접한지 이미 오래되어 단단한 음식을 취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조차 아직도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연약한 히브리 교회의 성도들을 안타까이 여긴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 초보적 교리에서 벗어나 완전한데 나아가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터를 닦지 말라고 하는 초보적 교리는 어떤 것들이냐에 대하여 본문에서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일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와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들로 성도들은 이런 교리적 지식을 잘 배우고 견고히 해야 젖을 먹는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같은 교훈에 대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자주 흔들렸던 것입니다.
1. 죽은 행실의 회개
우리는 초보적인 도리에 매달려 언제까지나 젖만 먹는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믿음의 성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매달리기 쉬운 그리스도 도의 초보적인 도리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한다는 말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입니다. 회개란 죄를 없애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기독교에서 회개라고 말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를 알지 못한 사람들의 회개입니다. 이들의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처음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반드시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회개 없이는 예수를 영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회개를 구원의 회개라고 합니다. 이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던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할 때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했던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던 일에 대하여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회개가 구원에 이르는 회개인 것입니다. 이 같은 회개는 오직 예수를 처음 믿을 때 단 한 번의 회개로 이루어지며 그 효과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회개로 우리는 우리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전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회개로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 회개를 마친 사람들입니다.
이 회개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고 의에 대 60 \ 6:1-3
해서는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회개가 없이는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 회개가 없이 우리가 우리의 생활이나 생애에서 하는 모든 회개는 회개의 가치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이 회개로서 우리는 아담으로 내려오는 사망의 원죄가 소멸되고 우리가 아직까지 지은 모든 죄가 용서받을 뿐 아니라 우리의 평생의 모든 죄까지도 사죄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롬6:2-7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으므로 우리도 그와 함께 죽었다고 했습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개
다음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후에 저지르는 죄에 대하여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문제에 당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서는 육신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육신이 죄의 유혹을 받아 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개 생활로 처리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회개는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의 회개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회개는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한 회개가 아닙니다. 이 회개는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그의 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범하는 죄는 정죄 받을 죄가 아닙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죄는 불신자들이 받는 정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처리를 받아야 할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불순종에 대한 회개인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회개가 없으면 세상 사람들과 성별되지 못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은 하나님을 향하여 새로운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불순종하면 그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죽은 육신의 사람의 죄악의 근성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영으로 육을 죽이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죽은 행실을 온전히 죽이지 못하고 그 가운데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짓는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하나님께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교회의 성도들은 이런 회개에 철저하지 못하므로 신앙생활 한지가 오래 되었으나 항상 어린아이들처럼 젖만 먹는 어리석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 정상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에 철저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새사람의 행실로 자신을 단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61 \ 6:1-3
(31)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
(히브리서 61-3)
히브리서를 받는 교회의 성도들이 젖이나 먹고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된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으면 신앙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성장이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그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이도 교회에 잘 나오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사람인가? 습관적인 믿음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성령이 주신 믿음이 아니라 육신적인 습성에서 자라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고 어려움을 당할 때 신앙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머리로만 자라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으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신앙은 뿌리 없는 고목 같으며 화병에 꽂은 꽃꽂이 같아서 겉보기에는 신앙처럼 보이지만 성장과 결실이 없는 죽은 신앙입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참 신앙
하나님께 대한 참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히11:6절에서 이르시기를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의 아들을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택정하시고 나를 구속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같은 믿음은 혈육으로 기질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혜나 지식이나 경험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칭찬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듣고 순종하는 신앙이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으로 성장하는 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갖지 못하면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도 못하고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흘러도 초보적인 교리에 얽매어 늘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62 \ 6:1-3
2. 세례에 관한 교리
그리스도인은 세례에 대하여 올바른 성경적 지식을 가져야 세례를 받은 교인 으로서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세례와 구원과의 올바른 성경적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천주교나 또 기독교 안의 어떤 교파에서는 세례를 구원의 조건에 결부시켜 하나님의 구원을 세례에 구속을 받게 하므로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세례는 구원에 절대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에 흔들리면 어느 교인이 침례 교회로 교적을 옮길 때 또 침례 형식의 세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선행에도 있지 않고 세례에도 있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하나만으로 얻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하나만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같은 예수를 믿어도 사회 혁명가로서의 인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메마른 세상에 사랑의 불을 지핀 사랑의 성현으로 받들어 섬기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루신 모든 사건을 믿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길이요 방법입니다.
세례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다고 하는 표로 받는 신앙고백의 의식입니다. 세례에 이런 믿음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례 자체엔 아무런 구원의 능력도 없습니다. 구원의 보증도 아닙니다.
회개란 우리가 이제 죄에서 깨끗해 졌다는 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증표도 아닙니다. 우리를 깨끗케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세례의 참뜻은 무엇입니까? 벧전3:21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줍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었으니 이제 그 가운데서 더 살아갈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의에 대하여 살았으니 내 생활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통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겠다고 하는 신앙적인 생활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이런 신앙을 가지지 못하므로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더 성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 세례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함입니다. 이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실을 명심하고 참 세례의 생활 가운데로 들어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영적 연합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63 \ 6:1-3
(32)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
(히브리서 6:1-3)
다음에 히브리서 저자는 말하기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고 했습니다.
1. 안수문제
안수는 성경적으로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 안수를 받는 경우가 있고 직분 자를 세울 때 안수를 받습니다. 어느 것이건 안수는 기름 부움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 합법적으로 실시해야 합니다.
눅13:10절 말씀을 보면 우리는 병자를 위해 안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수하심으로 많은 병자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병자가 병을 고침 받기 위해 주의 종에게 안수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막10:16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교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종의 안수 기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행8:17절 말씀을 보면 사도들의 안수 기도로 성도들이 성령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으려는 성도가 목사의 안수 기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로교 헌법 규칙 제12조에 의하면 '교회에서 헌법에 의지하여 성직을 받은 자 외에 병자를 위하여 함부로 안수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능력을 받았다고, 은사가 있다고 성직자가 아닌 집사나 장로나 권사들이 교인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하는 일은 삼가야 할 일입니다.
안수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하며 안수로 나타난 효과는 안수자의 능력이나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하여 나타난 사실을 인정하고 안수 자는 결코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직분 자들에게 하는 안수는 집사나 장로를 세울 때 시행하는 안수입니다. 교회는 특별히 이 안수에 신중하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안수에 대한 성경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안수를 함부로 주고받거나 안수 받는 일을 경솔히 여기면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대개 이런 유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늘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더 깊고 넓은 영적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죽은 자의 부활 문제
죽은 자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종적인 소망임과 아울러 그리스도 64 \ 6:1-3
와의 연합교리에 있어서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 관계도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소망도 희미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신앙이란 언제까지 가도 젖만 먹는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더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몸은 영체가 아닙니다. 부활체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기 위해 아들과 같이 부활할 것입니다. 이 부활에 관한 진리를 잘 배우고 이해하고 깨닫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부활의 교리가 아직 확고히 정립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부활 관을 가지고 부활을 소망으로 삼아 신앙 생활을 하려면 성도들에게 있어서 성숙한 신앙의 단계에 이르러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순교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첫째 부활입니다. 이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부활은 상급부활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부활입니다. 왜냐 하면 이 부활에 참여하는 순교자들은 지상의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천년동안 왕 노릇하게 되며 하늘에 올라간 후에도 그 왕권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시기에 이뤄질 것입니다. 또 하나의 부활은 일반적인 부활로 마지막 부활이라고 하며 생명의 부활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부활의 시기는 천년왕국이 끝나고 최종적으로 천국에 올라갈 때 이루어 질 것입니다.
3. 영원한 심판의 교리
다음에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되면 죄에 대하여 회개치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영원한 심판에 대한 경종으로 예수님이 비유적으로 경종하신 일이 있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두려운 말씀을 깨닫고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의 신앙은 성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젖이나 먹고 자라는 신앙이 언제나 어린 자리에 있는 것은 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 : 우리는 신앙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어제까지나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 같은 초보적 교리와 그리스인의 생활을 잘 감당하여 우리의 신앙의 차원을 영적으로 높여야 합니다. 완전한 대로 나가기를 힘쓰는 성도들만이 성장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65 \ 6:4-8
(33) 믿음에서 떨어지는 죄
(히브리서 6:4-8)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신학적으로도 많은 논쟁이 계속되는 구절입니다. 알미니안 주의를 따라 성경을 해석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인용하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도 타락하여 지옥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히6장에 나오는 이 말씀을 가지고 칼빈주의적 예정론을 공박하는 것입니다.
1. 문제의 풀이
(1) 이 문제의 키는 4-6절에 있습니다. 첫째로 '한번 비췸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한 번 빛을 얻었다는 말은 빛을 받았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잠시 동안 빛을 받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빛의 소유자인 것이 아니라 빛의 비췸을 잠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얻기까지는 빛의 비췸을 여러 번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의 비췸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게 하시고 어느 정도 이해하도록 하십니다. 때로는 은혜를 주시기도 하시며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도 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씨앗의 비유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는 분명 구원이 보장된 경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드리고 그 말씀에 소망을 가지고 그 말씀으로 인한 시험이 오기까지 얼마간 그리스도인처럼 살아가기도 했습니다. 그가 신앙에서 떨어지기까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으로 착각을 주었으며 구원받은 무리들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해 왔을 것입니다. 우리는 빛의 비췸만을 받아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빛을 받아 빛의 자녀로서 빛의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 두 번째로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은사란 표현은 성령이 주시는 각가지 은사를 말합니다. 은사는 고전12장에는 성령의 9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성령의 은사는 구원받은 포적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세례를 받은 것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반드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시는 은사가 아닙니다.
옛날 사울에게도 성령이 임하여 예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발람도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발람의 당나귀는 성령의 역사에 따라 사람의 방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다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은사를 받고 교회를 위해서 헌신해야 할 것이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은사를 받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66 \ 6:4-8
(3) 다음에 성령에 참여한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에 참여한 사람인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참여한다는 말은 잠깐동안 성령의 권능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을 말합니다. 부흥회 같은 곳에서 크게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았다든가 어떤 환상을 보았다든가 성령의 부인할 수 없는 역사를 체험한 상태를 성령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4) 다음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맛보았다는 말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그 말씀의 능력을 체험한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이 같은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순종은 지속적으로 계속하지 못합니다. 말씀으로 인한 시련이 올 때에는 말씀에서 떠나게 되어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세의 능력이란 말은 영생과 천국에 대한 어느 정도의 소망을 말합니다. 그런데 6절에서 이르시기를 만약 이런 생활을 하다가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하여 호개케 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타락은 어떤 범죄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옳은 길에서 벗어났다 다른 길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뜻으로 믿음에서 영영히 떠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2. 이 말씀의 참뜻을 생각하자
이런 사람들은 그들이 타락하기 이전까지는 얼마간 교회에 나와서 알곡처럼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자신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자신의 거짓된 모습이 들어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타락하는 일이 그 일입니다. 이 타락의 동기가 어떤 죄에 기인했든지, 다른 사람의 권면에서 온 것인지 환경의 변화에서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때 이들은 믿음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떨어지는 이유는 그들은 결과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 가라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적으로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은 구원받은 성도들은 어던 경우에도 멸망의 자리에 이르거나 구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것처럼 보일 때도 있겠지만 결국은 회개하여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해 온 사람들임을 8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의 신앙생활의 결실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일이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생명의 열매를 맺습니다.
결론 : 오랜 신앙 생활 중, 아무런 열매가 없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해당되기 쉬운 것입니다. 열매가 없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신앙 생활을 한다면 이런 경우에 해당하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경종으로 삼아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소망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67 \ 6:9-12
(34) 하나님이 기억해 두시는 것
(히브리서 6:9-12)
오늘 본문 10절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기억해 두시는 두 가지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은혜를 힘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1. 두 가지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자비는 두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모든 불의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 주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우리는 죄를 초월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혹 범죄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계속적으로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은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의 죄에 대해서는 용서해 주시고 그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하시지만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기억해 두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장사꾼이 외상 장부에 외상값을 치부하듯 우리가 행한 모든 일에 대하여 상급을 주시기 위해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짐없이 기억해 두신다고 하는 사실은 이 또한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똑같이 이처럼 자비하신 분이신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생각은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이신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 하사 너희 행위를 기억해 두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과연 우리의 어떤 행위를 기억해 두시는 것입니까? 우리의 행위란 신앙의 열매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우리의 축복과 하늘의 상급은 행위로 말미암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위란 곧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열매를 말합니다. 믿음과 행위는 따로 떨어져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우리는 그 말씀을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종의 결실이 행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다른 또 한가지의 열매가 있습니다. 잠12:14절에서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의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입술의 열매도 상급의 열매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록이 우리의 방정맞은 입술로 인하여 사라져 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믿음의 입술을 가져야 합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입술입니다.
우리의 구원에도 우리의 입술의 시인이 따릅니다. 롬10장에서 이르기를 '네가 만 68 \ 6:9-12
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2. 하나님이 기억해 두시는 것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기억해 두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그것을 밖으로 나타내는데 생명이 있습니다. 마음에는 품고 있지만 밖으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열매로 나타낼 때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랑을 나타낼 때 지극히 주의해야 하고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이나 공명심이나 자기의 자비심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의 이름을 위해 사랑을 나타내라는 것이 성경적 교훈입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나타내는 사랑이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해서 다른 이에게 베푸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은밀한 중에 베푸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자기가 한 일에 나팔을 불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해 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물질을 주는 것만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일도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는 일은 더 큰사랑입니다. 사랑의 결실은 진실이 따라야 하고 정성이 깃들여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성도들을 섬긴 일을 기억해 두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을 섬기는 일에는 인색하고 섬김을 받는 일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섬긴다는 말은 첫째로 성도를 돌보아 주는 일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먹을 것이 없을 때, 병들고 외로울 때 위로해 주고 도와주는 일입니다. 다음에 섬기는 일은 성도들을 진리의 말씀대로 올바르게 인도하는 일을 말합니다. 잘못된 길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늘 영적으로 돌보아 주는 사랑의 보살핌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모든 행위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런 일에 소망을 가지고 모든 성도들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기억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약하신 그 언약을 또한 기억하시어, 그 언약대로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 얼마나 기억되는 일을 한 것입니까?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보다 많이 기억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과 상급을 받는 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69 \ 6:13-16
(35)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
(히브리서 6:13-16)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소망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공허할 뿐입니다. 이 소망에 대하여 바울은 롬8장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구원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영생을 말합니다. 이 우리의 영생에 관한 것은 지금 우리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소망으로 삼고 우리의 전생애를 이 소망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 같은 질문의 해답이 곧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1. 맨세로 세우신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는 우리들과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일에 대하여 말씀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말씀을 믿는 자에게 그대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맹세로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 예로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맹세로 하셨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약속하신 것입니까? 1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란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맹세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갈대아우르 땅을 떠나 가나안을 향하여 떠났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당시의 나이는 75세였으나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에는 100세로 25년간이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과연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들 이삭을 받았으며 많은 재물을 받아서 당대의 대부호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경우를 통해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일에 있어서 인간적인 면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이삭을 낳을 당시는 아브라함의 나이가 이미 100세나 되어 죽은 자와 같이 되었고 아내 사라도 나이 많아 경수가 끊겼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맹세로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70 \ 6:13-16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면 우리의 처지가 아무리 어려운 가운데 빠져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하 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자신의 환경이나 세월의 흐름이나 자기 몸의 조건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중에 있었는데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약속하신 그것을 이루실 것을 믿고 끝까지 기다림으로 그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롬4장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의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우리들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맹세로 보이신 하나님의 약속
그러면 하나님은 왜 맹세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까? 이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를 그 이유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17절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 어떤 경우에도 변할 수 없습니다. 만약 형편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이 수시로 변할 수 있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구원을 받을는지 받지 못할는지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순종의 생활을 해도 약속대로 축복을 받을는지 그렇지 않을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일에 대하여 그 뜻을 변치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다른 또 한 가지는 18절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결론 : 언제나 맹세는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절대로 변함이 없다는 것을 확약하는 행위인데 하나님은 자기보다 더 큰 자가 없으므로 자기 이름을 가리켜 맹세하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처럼 약속하신 것을 변경하실 수 있다면 그 분은 이미 하나님이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고 그 약속의 토대 위에 믿음을 세워 약속하신 모든 것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71 \ 6:17-20
(36) 누가 약속을 받을 자인가?
(히브리서 6:17-20)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7절에서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을 자들에게 그 뜻을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약속을 기업으로 받을 자에게 하셨기 때문에 그 기업을 받을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자
(1)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사과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은 먼저 난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삭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사를 약속하실 때 이삭을 주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갈4:28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과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를 예로 든 것인데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으며 이삭은 성령을 따라 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며 이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자들인 것입니다.
(2) 다음에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함을 얻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을 자들입니다. 히9:14-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냐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정결케 하사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을 약속으로 받는 백성이 되려면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여야 하는 것입니다. 갈4장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4)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의 약속을 받는 자들이라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 72 \ 6:17-20
을 수 있는 자라야 합니다. 롬8: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주님의 영광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고난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영광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과 함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까?
(5) 그리고 하나님의 기업을 약속으로 받을 자라면 인내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히10:36절에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볼 때 다음 세 가지 조건을 항상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더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응답이 늦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어 주실 시기에 어김없이 이루어 주십니다. 더디게 응답하시는 경우도 없지만 일찍 응답하는 경우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적절할 때,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때 그 때에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내 뒤에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같은 하나님의 법칙을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을 쉽게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너무 더디다고 생각하는 사람,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참아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그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의 약속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멀리 저버리고 자기의 뜻만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뜻을 행한 후에 주시는 보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맹세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것입니까? 이 약속은 성경에 한줄기 힘찬 광맥처럼 뚜렷하게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맹세로 하신 약속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떠나서는 믿음의 뿌리가 내려질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느냐는 질문은 당신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느냐는 말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사람만이 시련 중에도 끝까지 참을 수 있습니다.
결론 : 우리는 분명 성령을 따라 난 사람들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저 높은 곳을 바라봅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하나님이 맹세로 약속하신 그 언약을 믿고 하나님을 의뢰하여 그의 약속을 소망으로 삼고 끝까지 달려가는 승리자가 되십시다.
73 \ 6:17-20
(37) 견고한 영혼의 덫
(히브리서 6:17-20)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약속의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 기업은 하늘에 간직한 놀라운 축복으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바로 이 축복의 소망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소망을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일에 맹세로 약속하심으로 그 뜻이 변치 아니하심을 확정지으셨습니다. 본문 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1. 영혼의 닻
이처럼 하나님께서 맹세로 보증하신 약속은 우리에게 있어서 마치 영혼의 닻이 된 것입니다. 배에 있어서 닻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바다에 파도가 일고 바람이 심히 불 때 만약 그 배에 닻이 없다면 그 배는 끝없이 표류하다가 침몰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닻은 튼튼한 줄에 단단히 매여져서 바다 밑창에 힘있게 박힘으로 배로 어떤 풍랑 가운데서도 파선되지 않도록 붙들어 줍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소망이 있는 것은 마치 이 배의 닻 같아서 세상 물결에 결코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망망한 바다와 같습니다. 이 바다에는 거센 바람도 불어오거니와 사나운 물결도 밀려옵니다. 광풍노도가 밀어닥치는 날이면 인생이라고 하는 연약한 작은 배는 이런 세상 풍랑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 혹은 낙심하기도 하며 혹은 침몰하기도 하며 혹은 절망에 빠지기도 하며 혹은 파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영혼의 닻이 있는 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풍랑 속에서도 염려할 바가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이 되어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닻이란 하나님의 맹세로 약속하신 우리의 소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닻은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휘장 안은 지성소를 말합니다. 이 지성소는 구약적인 지성소가 아닙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지성소는 일년에 한차례씩 대제사장만이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말씀하고 있는 지성소는 하늘의 지성소를 의미하며 이곳에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어떤 어려운 형편이나 처지에 따라 희미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은 영혼의 닻 같아서 이미 우리를 위하여 지성소 안에 먼저 들어가신 예수 그 74 \ 6:17-20
그리스도에게 튼튼하고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에 시련과 고난이 와서 우리가 그 거센 세파 가운데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어려움은 겪을지언정 우리의 소망은 결단코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맹세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은 하늘의 지성소에 견고히 박혀 있는 것입니다.
이 닻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이 계시는 하늘의 지성소에 견고히 붙들려 매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흔들어 뽑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롬8장에서 이처럼 외쳤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요5:24절에서 '우리는 영생을 얻었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밝혀 주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누구든지 아버지 손에서 빼앗아 갈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소망과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바치는 우리의 노력과 인내는 결코 헛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맹세로 약속하신 그 약속을 믿음으로 확고한 소망을 갖지 아니하면 마치 닻 없는 배처럼 우리 인생이 요동하여 세상으로 흘려 떠내려 갈 것입니다.
2. 휘장 안에 들어간 닻
19절에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휘장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휘장 안에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이 계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성전와 지성소와의 사이에 가로막혔던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로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리'고 하셨습니다. 이 성소 휘장이 찢겨지고 우리 예수님이 먼저 그곳에 들어가심으로 우리에게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지금 헛된 것을 붙잡고 헛된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영혼의 닻이 되어 이미 주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하늘의 지성소에 내려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차람 확실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소망 가운데 흔들리 말며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75 \ 7:1-10
(38) 멜기세댁과 그리스도
(히브리서 7:1-10)
멜기세댁이란 인물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을 위해 하나님께서 창세기에 예비해 두신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 멜기세댁은 창14장에 그림자처럼 나오다가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는데 이상하게도 시110:4절에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과 결부시킨 예언이 한 번 나오고 히브리서에 와서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과 연관되는 수수께끼의 인물로 등장하여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1. 창세기에 등장하는 멜기세댁
창14장에 보면 엘람 왕 그돌라 오멜이 자기를 섬기는 이웃 나라들이 자신을 배신한 일에 격분하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나라를 쳐 전쟁을 일으키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들이 싯딤 골짜기에서 싸울 때 소돔과 고모라 왕이 그에게 패하여 병사들은 역청 수덩이에 빠지고 왕들은 겨우 도망했습니다. 엘람 왕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 들어가 모든 재물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 때 그 성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도 포로로 잡혀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같은 롯의 소식을 듣고 집에서 길러온 용사 318명을 거느리고 단숨에 쫓아가 엘람 왕을 기습했습니다. 이 기습전에서 대승한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포로로 잡혀간 자기 조카 롯과 모든 사람들과 재물도 빼앗아 올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 올 때 소돔 왕이 친히 아브라함을 영접하러 마중 나왔으며 살렘왕 멜기세댁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이 때 멜기세댁이란 이름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고 있으며 이 자리에서 멜기세댁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습니다. 그의 축복은 '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너의 손에 부치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할 지로다'고 했습니다.
2. 멜기세댁의 신분
멜기세댁의 신분을 보면 그는 살렘 왕이라고 했습니다. 살렘이란 말은 평강이란 뜻입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려진바 없지만 지금의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한 도시로 아마도 그 지경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 살렘이란 지역을 지배하는 왕의 신분으로 있었으며 아브라함에게도 알려지고 그도 아브라함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면 신분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의 노략물의 십분의 일을 바칠 이유도 없었거니와 멜세댁에게 축복 기도를 받지도 아니했을 것입니다.
76 \ 7:1-10
그의 이름을 풀어보면 멜기란 말은 왕, 세댁이란 말은 의란 의미로 멜기세댁이란 의의 왕이란 뜻인 것입니다. 그의 신분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그를 살렘의 왕이라고 했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고 했습니다. 히7장을 보면 멜기세댁은 아브라함보다 높은 자로 나와 있는데 그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해 주었으며 아브라함으로부터 11조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멜기세댁은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설명하는데 반드시 성경에 등장해야 할 인물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은 그의 제사장직에 대한 성경적인 증명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제사장이시며 왕이신 그의 직분에 대해 증거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백성들의 속죄 제물이 되셨다면 그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따르면 그 속죄 제물을 드려야 할 사람이 대제사장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반드시 레위 지파의 자손 중에서 나와야 하는데 유다 지파이신 예수님이 무슨 성경적 근거로 대제사장 직분을 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일은 그가 유다 지파에 속하셨으며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에 인정을 받으실 수 있지만 그가 대제사장이 되실 수 없는 것은 그는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성경에 멜기세댁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제물과 제사장 직에 대하여 설명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멜기세댁이 등장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레위가 아니라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제사장이 될 사실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까? 멜기세댁은 레위 자파도 아니요 아론의 자손도 아닙니다. 아론이나 레위란 인물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댁을 만난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의 직분은 반드시 레위지파의 자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멜기세댁이란 사람이 이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제사장은 동시에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댁은 살렘 왕이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댁의 반열을 따라 제사장이 된 예수님은 멜기세댁처럼 왕과 제사장이 동시에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과 제사장 직분의 법적 근거를 만들어 놓으시기 위해 이미 창세기에 멜기세댁을 등장시키신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신분은 멜기세댁과 같이 영원히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의 제사장이신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그에게 간구하며 그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77 \ 7:1-10
(39) 멜기세댁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히브리서 7:1-10)
우리는 어제 본문에서 멜기세댁이란 인물이 가리켜 주는 의미를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아침은 그의 이름으로부터 그의 직위에 이르기까지 멕시세댁은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멜기세댁이란 이름에 담겨진 메시야적인 의미
멜기세댁이란 이름에는 메시야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연관되는 것입니다. 멜기세댁이란 이름이 의의 왕인 것처럼 사32:1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의로 통치하는 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언하고 있는 '장차 의로 통치할 왕'이란 그리스도가 장차 만 왕의 왕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실 일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이 예언은 유대인이 소망하고 있는 메시야왕국(천년왕국)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댁이란 이름은 그 이름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직분에 대한 예언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직분은 살렘 왕이라고 했습니다. 살렘이란 평화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살렘 왕이란 평화의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사53:5절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익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또 사9장에서 주님의 탄생에 대한 예언에서 '평강의 왕'이란 이름으로 나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신 평화의 왕이시며 평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또한 멜기세댁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주님에 대하여 히7:26절에서 '하늘보다 높이 되신 우리의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멜기세댁은 그의 이름이나 그의 직분등 모든 일에 있어서 다 그리스도의 예표 인물로서 적중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묘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멜기세댁은 그리스도의 높으심을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멜기세댁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높으신 분이신 가를 보여 주셨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에 대하여 기대와 소망은 가졌지만 그 분의 위치가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모세정도의 인물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78 \ 7:1-10
예수님은 어느 날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 각하느냐 뉘 자손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한 가지 문제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하시니 그들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셨지만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멜기세댁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바로 이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왕과 제사장이 되신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멜기세댁의 신분이 마치 수수께끼처럼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했습니다. 방불하다는 말은 똑같다는 뜻이 아니라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멜기세댁이 아담의 자손이 아니란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치고 아담의 자손이 아닌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멜기세댁은 천사였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천사가 왕으로 사람을 다스리며 제자상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는 일은 성경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이 말의 뜻은 멜기세댁의 인간적인 계보가 전혀 없다는 데서 한 말입니다.
멜기세댁이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족보가 없어야 합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성경에서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로 기록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멜기세댁을 성경에 등장시키실 때부터 그의 족보를 기록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마 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 족보는 예수님의 육신적인 혈통관계를 계보로 만든 것이지 그 분은 원래가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족보에 해당되실 분이 아니십니다. 멜기세댁은 육신적인 예수님의 예표가 아니라 그의 왕권과 제사장 직분에 대한 서열로 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인간적인 족보가 성경에서 삭제되었으며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아들처럼 등장시킨 것입니다.
결론 :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은 성경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넘겨 드림으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예표 인물로서의 성경적인 사명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는 이 멜기세댁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짐으로 우리 주님의 제사장 직분에대하여 놀라운 지식을 갖게 되며 우리의 신앙이 장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79 \ 7:1-19
(40) 율법 외 별다른 제사장
(히브리서 7:1-19)
이스라엘은 율법에 따라 제사제도가 운영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율법에 의해 레위 지파에서 계승해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사장 직은 아론의 서열을 따른 것도 아니며 율법에 따라 세워진 것도 아님으로 그의 제사직분은 율법 아래에서의 제사 직분과 다른 새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만약 율법에 의한 제사제도가 계속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결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은 예수를 새로운 제사장으로 세우시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에 따른 제사제도를 폐하시기 위해 70년 로마의 대도에 의해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폐허화시키셨습니다. 그 때부터 이스라엘은 율법에 의한 제사제도를 이행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의한 구약적 제사제도를 폐하시고 예수 그리스돌 말미암아 새로운 제사제도를 세우신 것입니까?
1. 하나님께서 새로운 제사제도를 세우신 목적
그 이유는 이 땅의 성전에서 드리는 구약적 제사제도는 죄인을 구원하는 일에 온전치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율법아래 제사장은 아론의 서열을 따라 제사장 직에 오른 사람들로 모두 아담의 혈통적 자손들입니다. 이들 역시 우리와 동일한 죄인들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율법아래 제사장들이 다만 지성소 안에 들어가는 일에도 자신의 속죄를 위한 제물을 가지고 1년에 한 번 식밖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제사장은 온전한 제사장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제사장은 온전한 제사장으로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신 예수님에 대한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28절 말씀을 보면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약점이란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거룩해야 할 제사장이 죄악이라고 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백성들의 죄를 위해 회개해야 할 제사장이 우리와 같은 죄인이요 죄라고 하는 약점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제사가 온전한 제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율법 아래 제사장은 언제인가 죽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제사장 직분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처럼 율법 아래 제사장은 온전치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 제사는 죄인을 구원하는 일에 온전치 못했습니다. 만약에 율법으로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율법 이외 다른 방법으로 구원의 길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사하지도 못하고 구원을 80 \ 7:1-19
베풀지도 못하는 것이 율법 아래의 제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계획하신 일은 죄인을 온전히 구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죄인들을 죄악 가운데서 온전히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불완전한 율법 제도를 변경시키야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외 다른 제사제도를 세우셔야 했습니다.
2. 율법 외 다른 제사제도
그러면 율법도 따르지 않고 아론의 제사장 직도 아닌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새로운 제사제도를 세울 수 있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해답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성경적 근거를 벌써 창세기에 예비해 두셨던 것입니다. 율법과도 상관이 없고 아브라함과도 상관이 없으며 레위 지파와도 상관이 없는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른 예수 그리스도를 왕과 제사장으로 세우시는 제사제도를 확립하신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율법에 의해 제사장 직분을 수행치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과 상관이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제사장 직에 오르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 범이 율법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는 온전한 법으로 롬8:2절에서 성령의 법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법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제사장들보다 온전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자기를 위한 속죄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 아래 제사장들은 자신의 죄를 위해 송아지의 피로 속죄 제물을 삼았지만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심으로 자신을 위해서는 회생 제물을 드리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제사장은 마땅히 율법 아래 제사장이 일한 것과 같은 자리에서 일하실 분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희생 제물을 삼으신 분입니다. 그가 드린 제물은 율법 아래 제사장들이 드린 짐승의 피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그의 영원하신 피로 제물로 삼아 단번에 드리셨기 때문에 또 다른 제물이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그가 드린 제물은 영원한 속죄 제물로 한 번 만으로 족한 것입니다.
다음에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은 영원히 변치 아니하십니다. 그에게는 죽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 : 이런 제사장은 우리에게 꼭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죄를 가지고 우리의 제사장 앞으로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긍흀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하늘의 지성소에서 나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다는 이 사실을 꼭 명시하시고 그 분께 소망을 두시고 그 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81 \ 7:20-25
(41) 생명의 보증이 되신 예수
(히브리서 7:20-25)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두 가지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 하나가 아담과 세우신 언약으로 창2:16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2절 말씀을 보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1. 첫 언약
사람이 처음 창조를 받았을 때는 생령이었습니다. 생령은 죄를 범할 수도 있고 범하지 않을 수도 있는 몸입니다. 그러나 생령은 육체와는 달리 죽지 아니할 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만약 죄를 범하면 정녕 죽으리라는 선언을 내리심으로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그는 생령이 육체가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아담의 자손으로 육체로 태어나 죄의 종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온전히 죄 가운데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생령으로 살아갈 당시엔 죄냐? 하나님의 말씀이냐에 대하여 아담에게 자유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이 선택에서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스스로 파기해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아담은 죄의 종으로 타락하게 되었고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인류의 대표자로 세워 생명의 언약을 주셨으므로 아담의 실패는 곧 인류의 실패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율법이 생명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율법으로 생명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지 아니하셨을 것이라고 성경은 계속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갈3:21절에서도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한 아담에게 정년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죽음의 언도는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육체의 죽음입니다. 아담은 범죄함으로 이제 생령이 육체로 전락되었습니다. 흙은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죄에 대한 온전한 심판은 영혼에 대한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10:2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히9:27절에서는 '한번 죽 82 \ 7:20-25
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육신의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 영혼에 대한 심판에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더 좋은 언약
그러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고 말씀하시는데 더 좋은 언약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세우신 새로운 언약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언약을 세우신 것처럼 그리스도와 언약을 세우셨는데 이 언약을 새 언약, 더 좋은 언약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율법 아래서 언제나 정죄 의식 가운데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아담의 죄 값을 담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란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법인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에서 명백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통해서 이 율법을 이기고 첫 언약을 파할 수 있는 더 좋은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 언약을 은혜 언약이라고도 합니다. 이 언약의 요지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속죄 제물이 되시어 아담의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으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첫 언약의 실패에서 회복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첫 언약은 아담과 다만 말씀으로만 세우셨지만 하나님의 둘째 언약은 그 아들의 피로 세우셨습니다. 이 언약은 그리스도에게 주셨지만 그를 믿는 자에게 그 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고 하는 약속이 따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이 언약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의 생명의 보증이 되시는가에 대하여 몇 가지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1절에서 이 언약은 하나님의 맹세로 세워졌습니다. 23,24절에서 그는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제사 직분도 갈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단번에 드리셨기 때문에 또 다른 제물이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25절에서 그가 항상 살아서 간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25절에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담이 실패한 첫 언약과는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을 받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맹세로 세운 언약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이 언약의 보증으로 삼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언약의 축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83 \ 7:26-28
(42) 영원히 온전케 되신 우리의 대제사장
(히브리서 7:26-28)
26절에서 '이런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대제사장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대제사장 직분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는 죽음이 없기 때문에 이 땅위의 제사장들처럼 자주 갈림이 없는 제사장입니다. 그는 죄가 없으심으로 자기를 위해 속죄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는 제사장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항상 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제사장으로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제사장입니다. 이런 분이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축복입니다. 이런 대제사장이야말로 우리에게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1. 첫 언약 밑에 있었던 제사장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의 직분으로 지성소에 들어가 대속의 제물을 드릴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 거룩함이나 의로움이 있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의 정죄를 받는 죄인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거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성소에 들어가기에 앞서 자신을 위해 송아지의 피로 속죄 제물을 삼아야 했습니다.
율법 밑에 제사장들에게는 그들에게 악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죄인의 마음속에는 악이 존재합니다. 악이 함께 존재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제사장 직분이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더러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의를 이룰 수 없는 몸이요 인간이 짓는 온갖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연약한 몸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2. 더 좋은 언약 아래의 제사장
그렇지만 우리의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아래의 제사장 같지가 않으십니다. 그 분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는 빛이시기 때문에 그의 거룩하심은 완전하십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오 하나님의 본체이심으로 그의 본질이 완전히 거룩하십니다.
그 분에게는 악이 전혀 없으십니다. 악이 없다는 말은 죄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심으로 악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세상에서 한 번도 죄를 범하신 일이 없기 때문에 악에 물든 일도 없으십니다. 그 분에게는 더러움이 없으십니다. 그 분은 죄인에게서 떠나 계십니다. 그는 세상에 계셨을 때에도 하늘의 생명을 가지신 분으로 계셨습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 84 \ 7:26-28
시기 때문에 죄의 지배를 받은 일도 없습니다. 그 분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심으로 실질적으로 거룩한 곳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위에서 우리의 제사장으로 일 하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양을 잡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짐승을 잡아 제단에 드릴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이 세상 제사장들은 자신의 죄를 위해 송아지를 잡아 제물로 드렸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위의 제사장들은 지성소 안에 들어가 법궤 앞에 서서 일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계실 분이요 지상의 지성소에 계실 분이 아니십니다. 율법 아래 제사장들은 1년에 한차례밖에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년에 한 번 만 들어가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이신 분이며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늘 그곳에 계십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었던 그런 제물이나 제사 제도가 필요치 않기 때문에 우리의 제사장도 필연코 구약시대의 제사장이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이미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가 한 번 흘리신 피는 우리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속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죄를 위해서는 양이나 송아지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흘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지금도 우리의 속죄 제물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양을 잡아 속죄 제물을 드릴 제사장은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그의 속죄 사역을 다 마치셨을 때 그는 다 이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성소의 휘장이 찢겨져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새롭고 산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휘장이 막혀 있는 지상의 지성소에 들어가는 제사장이 우리에게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한 의를 소유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고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이 같은 놀라운 자격을 가진 우리가 율법 아래 제사장들을 통하여 아무런 가치도 없는 짐승을 제물로 드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이런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합당한 이유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합당한 제사장은 오직 이런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의 제사장으로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의 공로를 힘입어 하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같은 대제사장이 있다고 하는 믿음과 확신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갖게 합니다. 여러분은 이 분께 소망을 두시고 이 분 앞에 나아가 간구하시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85 \ 8:1-6
(43) 하늘 성소에 있는 우리의 대제사장
(히브리서 8:1-6)
히 7장에서 우리는 하늘 성소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여러 가지 증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한 분이심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8:1절에 와서 '이제 한 말에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제사장이라 해도 그 분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라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1. 우리에게 있는 우리의 대제사장
그러면 이런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이 왜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합니까? 이에 대해 몇 가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런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들로 죄로 인해 결코 낙심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의인이 없는 것처럼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죄로 인하여 낙심하게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정죄의 두려움에서 낙심하게 됩니다. 구원에서 떨어졌을 것을 염려해서 낙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미워하고 죄를 범했을 때 원통히 여기며 마음을 아파하고 통회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이런 행동은 우리로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를 인하여 낙심한 나머지 비관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구원에서 떨어진 것으로 알고 두려워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죄를 범했을 때 곧장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이 계시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곳은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우리의 대제사장을 만나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의 의로운 피가 있어서 우리가 자백하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해 주십니다. 우리는 비록 용서 받기 어려운 가증한 죄를 범했어도 그곳에 들어가 우리의 대제사장 앞에 그 죄를 고하고 회개하면 그분의 긍휼히 여김을 받으며 죄사함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2) 다음에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구원이 주어졌는데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로 알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그 공로가 있고 우리는 다만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 86 \ 8:1-6
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정말로 깨닫기 전까지는 언제나 구원이 자기 행실이나 자신의 믿음을 따라 좌우되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늘 흔들거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보면 언제나 그 믿음이 흔들리게 되고 의심을 갖게 되며 낙심하지만 예수를 보면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이 무엇이고 멸망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 한 가지 사실만 제대로 깨닫는다해도 보통 놀라운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만약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갖지 못하였다면 내 생명은 파멸되어 영원한 멸망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로 말미암아 그곳에서 건지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2. 우리의 제사장이 계신 곳
제사장들은 일하는 곳이 있습니다. 율법 아래 대제사장들은 땅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특히 아론의 서열을 따라 내려 왔습니다. 아론의 큰아들부터 계속하여 그 장자가 이 직분을 맡아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장막 안에서 제사장 직분을 이루실 분입니다. 2절에서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의 제사장 직분을 참 생명을 주시는 영적 장막에서 이루십니다. 율법 아래 있었던 지성소는 하늘 지성소의 모형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참 성소에서 일하실 분이시지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지상의 지성소에서 일하실 분이 아닙니다.
이제 온전한 것이 왔으니 그림자는 물러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 이뤘다고 하신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말씀으로 땅위에 존속했던 성소는 찢겨진 휘장과 함께 물러갔습니다. 이제 온전한 제사장, 온전한 제물, 온전한 속죄의 피, 온전한 지성소를 모두 갖추었으니 그림자는 쓸모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림자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드리신 화목제물로서의 그 몸이나 속죄제물로서의 그의 피는 우리를 온전히 구원함에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의 제사장 직분도 영원하심으로 우리에게 미치는 사죄와 구원도 영원한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누가 이 같은 구원의 대상자안가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히7:25절 말씀을 보면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한길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아가는 길입니다. 구원의 길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통해야 합니다. 그 길은 찢겨진 휘장 안으로 열려진 길입니다. 이 길을 새롭고 산길이라고 했습니다. 이 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찢으심으로 열어 놓으신 길입니다. 여러분은 이 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소망의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87 \ 8:7-13
(44) 구약의 하자
(히브리서 8:7-13)
구약과 신약의 약이란 말은 계약이란 의미입니다. 구약이란 옛날 계약이고 신약은 새로운 계약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계약의 대상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상호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과 인간과의 계약이 필요한 것인가? 그 원인은 창2:16절에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과 아담과의 첫 언약에서 아담은 언약의 불순종으로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번 내려진 하나님의 선고는 취소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처럼 죄로 죽게 된 인간들에게 생명을 준다는 약속으로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저 맺은 계약이 구약이고 그 다음에 맺은 계약이 신약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구약과 신약은 둘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하나이라는 사실입니다.
1. 구약과 신약
(1) 우리는 먼저 구약에 대하여 올바른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과 세운 계약으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돌 판에 새겨 주신 내용이 그 주된 내용입니다. 간추려 말하면 십계명입니다.
이 계약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데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조건으로 그 안에서 약속된 의와 생명입니다. 이런 약속이 레18:5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 대하여 갈3:12절에서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러면 이 같은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의를 얻을 수 있고 생명이 약속된 구약이 있는데 왜 신약을 다시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구약에는 중대한 흠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율법에서 발견된 하자란 무엇입니까?
2. 흠이 있는 구약
그 첫째 결함은 율법 아래 살아가는 자는 그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의를 얻고 생명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사형 선고를 받은 기결수에게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그것을 지키기만 하면 살려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 88 \ 8:7-13
형수는 살려 준다는 말에 솔깃해서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재판관이 제시한 조건이란 10미터 높이를 단번에 뛰어넘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 사형수는 자기가 노력만 하면 10미터 높이를 단숨에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입니까?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일이란 이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롬3:20절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은 의로우며 거룩하며 마땅한 것이지만 인간의 힘이 그것을 이루는 일에 절대로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율법이 요구하는 의는 우리의 생활에서 실제로 얻을 수 있는 현실적인 의가 아니라 그림의 떡으로 바라만 보아야 할 의였었다는 데 하자가 있었습니다. 갈2:16절에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바울은 선언했습니다.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거늘 그 율법으로 의를 얻겠다고 노략하는 일은 모순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인간은 연약하여 범죄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아담이 범죄한 후, 모두 죄의 종으로 타락했습니다. 이 같은 위치는 그 어떤 경우에도 죄의 빚을 갚기 전에는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 법인 율법을 지킨다는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처럼 인간이 율법을 지키려다 그 율법을 범하므로 정죄를 받는데도 그 정죄에서 벗어날 길이 율법에는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은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결정적 함정이요 절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은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의를 주겠다, 생명을 주겠다는 약속은 좋지만 인간에게는 이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약속을 바라보면 소망이 있을 것 같지만 율법을 지키는 생활을 하면 당장에 그 덫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에서는 하나님의 자비나 긍휼을 얻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을 지킴으로 의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는 율법에 의한 정죄와 저주만이 있을 뿐입니다. 생명이냐 저주냐의 두 길만이 있는데 이 두 갈래의 길에서 어느 한 사람이라도 생명을 얻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2:21절에서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롬3: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심으로 한사람도 율법으로 생명에 이를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결론 : 이처럼 인간에게 생명을 준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있지만 생명은 고사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빼앗고 저주와 정죄만을 주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크나큰 약점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율법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해 주신 것입니다. 늘 그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89 \ 8:7-13
(45) 새 언약의 축복
(히브리서 8:7-13)
우리는 어제 구약의 결정적인 흠을 찾아보았습니다. 구약에는 이처럼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한다는 약속은 있었지만 그 약속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결함을 보충함으로 죄 가운데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참 생명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언약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약속은 구약에서 이미 언급된 것입니다. 히8: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를 허물 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으로 다시 세우신 언약은 구약의 모순점과 결함을 완전하게 보충하는 언약이기 때문에 인간을 온전히 구원할 수 있는 언약입니다. 죄의 문제와 사망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을 받을 수 있는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1. 새 언약의 축복
그러면 이 같은 새 언약은 언제 세워지는 것입니까? 10절에서 밝혀 주신 말씀을 보면 '그 날 후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날 후에란 말은 구약이 지나간 후에란 뜻입니다. 갈3:19절에서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영원한 생명의 계약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존속하도록 주신 임시적인 언약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율법을 폐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언약을 세우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율법이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언약에 들어온 백성들은 누구입니까?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이스라엘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신약에 와서는 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녀란 이처럼 하나님의 영적 자녀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자녀란 약속의 자녀를 말합니다. 롬9:6-8절 말씀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갈3:29절에서 말씀하기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신약에 와서 90 \ 8:7-13
하나님의 백성이나 아브라함의 자손은 구약에서처럼 육신적인 자손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약속의 자녀를 의미한 것으로 나와 있으며 그 약속의 자녀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1:12절 이하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이 육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에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이처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로 모두 한결같이 하나님의 새 언약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과 우리와 직접 세워진 언약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직접 언약을 세울 수 없는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죄인의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보자가 필요했습니다. 그 중보자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처럼 새 언약은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과 하나님과 세우신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약의 조건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계약의 조건을 온전히 이루어 그 계약을 성사시키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낮추시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이 계약을 만족스럽게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같은 새 언약에 동참하는 방법은 그 같은 사실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계약의 조건은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계약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두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위해 새 언약의 조건을 이루신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2. 새 언약의 완전한 성격
이 언약은 완전한 언약이기 때문에 다른 조건을 부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습니다. 십계명은 돌비에 새겨진 언약이었지만 새 언약은 마음 비에 새겨진 언약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이 언약에 참여하게 되면 성령께서 임재하시어 우리의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하나님의 율례를 행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 새 언약에 들어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백성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 언약에 들어온 사람은 영생을 얻는데 누구든지 이 영생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결론 :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에 들어가 있는 참 이스라엘입니다. 우리에게 언약을 이루게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의 보장이십니다. 우리는 이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91 \ 9:1-5
(46) 첫 장막의 속죄소
(히브리서 9:1-5)
우리는 아직까지의 히브리서 강해를 통해서 첫 언약의 지성소와 새 언약의 지성소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구약은 첫 언약에 대한 지성소에 대한 기록이요 신약은 새 언약에 대한 지성소에 대한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첫 언약에 관한 지성소는 이 땅에 속한 것이요 새 언약의 지성소는 하늘에 속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땅에는 율법을 따라 제사장 직을 맡아 일하는 제사장이 있었고 하늘에는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하나님의 맹세로 된 제사장이 있습니다.
1. 첫 장막의 모습
첫 장막의 모습이 1-5절까지 간략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땅의 성소에는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가 놓여 있습니다. 이 등대는 순금으로 만든 촛대인데 일곱 개의 불을 컸습니다. 다음에 상이 있습니다. 이 상은 향단이라고 부릅니다. 이 향단도 금으로 장식되었습니다. 다음에 괴어 놓은 떡으로 진설병이 있었습니다. 이 떡은 누룩이 섞이지 아니한 것으로 12개를 두절로 겹쳐 놓았습니다. 이 떡은 안식일마다 교대해 놓는데 묵은 떡은 제사장이 먹었습니다.
첫 장막 안에 성소가 있고 다음 둘째 휘장 뒤에는 지성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성소 안에는 금 향로와 법궤만이 있었습니다. 금향로는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대제사장이 가지고 지성소를 들어갑니다. 그리고 법궤는 전체가 금으로 입혔습니다. 법궤 안에는 세 가지 상징적 물건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만나가 담긴 금항아리입니다. 이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다음에 법궤 안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습니다. 이 지팡이는 하나님이 제사장으로 택한 자와 아닌 자와의 구별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를 거역하는 고라와 다단과 온의 무리들을 불로 심판하신 하나님께서는 지팡이 한 개씩을 취하여 두령의 이름을 쓰게 한 후, 그 지팡이들을 법궤 앞에 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그 지팡이 가운데 하나님이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이로서 하나님의 택한 제사장과 아닌 제사장을 구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튿날 그 수많은 지팡이 중에 오직 한 지팡이에만 싹이 났는데 그 지팡이는 바로 아론의 지팡이였습니다.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 살구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패역한 자의 표징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다음에 법궤 안에는 언약의 비석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돌이 모세가 시내산에 92 \ 9:1-5
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입니다. 이 돌 판은 두 개의 돌 판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1-4계명까지요 다른 하나는 5계명부터 10계명으로 대신 관계와 대인 관계로 구별지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구릎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적 존재들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좌의 모형으로 은혜 언약의 그림자로 보이신 것들입니다.
2. 성소에서 섬기는 사람들
구약에서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대제사장이 있고 다음에 제사장들이 있었으며 제사장의 일을 도와주는 레위인들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아론의 아들로부터 시작이 되면서 그 대제사장의 큰아들이 이 직분을 계승해 내려 왔습니다. 이들을 성별 시키고 그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들은 매일 백성들을 위해 소제를 드렸는데 소제란 식물로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한 속죄 제물에 피를 뿌렸습니다.
다음에 제사장들은 아론의 자손들입니다. 이들은 제사 드리는 일을 맡아 왔으며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여러 가지 의식을 인도하였고 백성들을 축복하였으며 민사재판을 집행했습니다. 이들이 제사장 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몸의 여러 부분에 기름과 피를 뿌렸으며 기름은 붓지 아니했습니다. 기름을 부은 대상은 오직 대제사장뿐입니다.
다음에 레위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제사장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의 어린양의 희생으로 그들의 장자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의 사람들을 이스라엘 장자로 구분하여 그들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이들에게는 기업이 따로 없고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로 생활을 하게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제사 제도를 만드신 것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는 반드시 화목 제물과 속죄의 피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나 죄를 범하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것을 이들을 통해서 그 길을 열어 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런 제사 제도는 우리의 화목 제물로 보내실 그리스도의 희생의 그림자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는 이 땅위에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목 제물로서 그 몸을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속죄의 피를 십자가에서 흘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새롭고 산길을 열으신 그 순간 땅의 지성소는 없어지고 하늘의 지성소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스도를 힘입고 누구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93 \ 9:6-8
(47) 성령이 보이신 뜻
(히브리서 9:6-8)
구약이건 신약이건 죄 값이 사망이란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성소에는 피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구약에서는 백성들의 죄를 피로 속하는 속죄일이 율법에 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7월10일을 속죄일로 지켰습니다.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일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1. 피 없이 들어갈 수 없는 지성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속죄를 받아야 합니다. 죄인은 어떤 모양으로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에서 짐승의 피를 흘리면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고 말씀해 주고 있으므로 하나님께 속죄 받는 방법으로 자신의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시켜 짐승으로 자기의 죄 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 그 짐승을 잡아 그 피로써 하나님께 자신의 속죄 제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언제나 하나님의 성소에서 속죄 제물을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연수가 많아지면 죽게 되며 그 직분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언제나 지성소에 머물러 그의 백성들을 위해 항상 간구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일정한 기간만 그곳에 머물러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그 직분의 갈림이 없이 영원히 그곳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분은 죽음이 없는 대제사장이 시요 멜기세댁의 서열을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세우심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도 속죄의 피를 가지고 그곳에 들어가셔야 했습니다. 오직 피만이 속죄 제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죄를 위해서는 이 땅의 대제사장처럼 송아지의 피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자신의 속죄 제물은 드릴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속죄 제물로서의 피만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염소의 피로 그의 백성의 속죄 제물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흠과 점이 없으신 자신의 피로써 속죄 제물을 삼으시고 그 피를 가지고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가 드리신 속죄 제물은 단 한 번만으로 영원히 효력이 있는 영원한 제물이기 때문에 한 번 흘리신 피로써 그의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온전히 이루실 수 있는 것입니다.
94 \ 9:6-8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지성소에 항상 계실 뿐 아니라 그의 피로 삼은 영원한 속죄 제물을 가지고 들어가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항상 간구하시는 직분 을 영원히 계속하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힘입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온전히 구원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성령이 보이신 뜻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주님이 오시기 이전까지는 이 성소의 휘장이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이런 일로 우리에게 보이신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8절에서 '첫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첫장막이 서 있을 기간이란 구약 시대를 의미합니다. 그 때에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대제사장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모든 사역을 이루시어 이 휘장을 찢으시고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심으로 우리들에게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다음에 예수님의 이 같은 사역을 통해서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고 했습니다. 휘장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휘장이 찢겨진 것입니다. 그 찢겨진 자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새롭고 산 실로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다른 곳은 아직도 휘장으로 단단히 막혀져 있습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누구를 통해서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열어 놓으신 그 새로운 길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일은 이처럼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이처럼 생명에 이르는 일이기 때문에 축복 중에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성경을 읽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기도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그 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그 분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한 사람에게 말씀으로 깨닫게 해 주십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이 은혜를 받으려는 사람은 잘못된 은혜를 받아 오히려 참된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우리의 생애에는 바람이 불어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태풍이 닥쳐올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닻을 오직 그리스도에게 내리 운 사람들만이 시험을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95 \ 9:8-10
(48) 양심으로 온전케 할 수 없는 구약의 제물
(히브리서 9:8-10)
본문 9절 말씀을 보면 '율법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로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구약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일에 있어서 의식을 통한 형식적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의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짐승의 피로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우리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일은 다만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의 하나의 그림자일 뿐 그리스도가 오신 후로는 이 같은 그림자는 마땅히 사라져야 했습니다.
1. 음식으로 구별한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다름이 없습니다. 벧전1:16절에서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레11:45절에 나온 것을 베드로가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면서 그들로 어떤 방법으로 거룩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들의 생활에 나오는 의식으로 구별시키셨습니다. 먼저 먹는 식물로 구별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이 율법적 규례가 레11:1-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음식을 먹는 일에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을 구별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이 같은 음식으로 성별케 하는 거룩함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이유는 온전한 것이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음식 중에는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이 없으며 아무 음식이나 감사함으로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을 구별해서 먹게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정말로 정결한 음식을 먹어야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주신 구례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생활을 해야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데 참 의미를 두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먹는 속된 음식은 속된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율법의 결례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단 음식으로만 거룩을 구별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생활에 적용하도록 결례란 의식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몸을 더 96 \ 9:8-10
럽혔을 때 물로 씻는 일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말합니다(민19:11-13). 바리새인들은 이런 일을 과장하여 장로의 유전이란 것을 만들어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다던가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몸에 뿌리지 아니하면 먹지를 아니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물로 씻는다는 결례의 의미가 신약에 와서 어떤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딛3:5절에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물은 우리의 죄를 씻는 회개를 말하며 종국적으로는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 와서는 물로 씻어 거룩하게 하는 의식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레17:11절 말씀을 보면 짐승이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의식은 우리의 육체에 나타난 죄를 속하는 일에 형식적으로 적용될 뿐 우리의 양심의 죄를 소멸하는 일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입니다.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우리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는다고 하는 하나의 의식은 될 수 있을지언정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원죄에 대한 죄를 사죄하거나 사망에 이르는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실 일에 대한 하나의 그림자로 보여 주신 일에 지나지 않으므로 오늘날에는 짐승의 피로 속죄 제물을 드리는 일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히10:22절에서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뿌림 받은 것은 짐승의 피가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피인 것입니다. 이 피야말로 우리의 양심의 악을 깨닫게 하고 그 악을 정결케 씻어 주시는 맑은 물인 것입니다.
이처럼 음식이나 물이나 짐승의 피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거나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온전한 것이 올 동안만 존속하도록 하신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양심이란 사람의 생명의 원천인 영혼을 말합니다. 인간이 죄로 죽어 있는 것은 육신인 것이 아니라 양심입니다.
업2:1절에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하셨는데 살리신 것은 우리의 영적 생명, 우리의 영혼인 것입니다.
결론 : 양심으로 온전케 되기 위해서는 마음에 피 뿌림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언약하신 새 언약의 피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을 깨닫고 정결하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의 피를 속죄 제물로 믿는 우리의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 받아 우리의 모든 죄를 사유해 주심으로 우리의 양심으로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이 온전한 양심을 가지시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생활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97 \ 9:11-17
(49) 온전치 못한 율법 아래 중보자
(히브리서 9:11-17)
우리는 아직까지 많은 시간에 걸쳐서 구약적 제사나 제물이 우리의 속죄 제물로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구약적 중보자인 제사장의 온전치 못한 중보자직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5절에 나온 말씀을 보면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1. 중보자의 의미
중보란 말은 두 편의 원수 관계를 없애고 서로 화해시키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중보자란 말은 바로 이 같은 일을 담당할 중재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에는 왜 중보자가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계약을 순종치 못함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받게 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무조건 용서하시고 선언하신 심판을 거두시고 생명을 주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죄인 중 하나도 멸망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겔18:23절에서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사야를 통하여 많은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벧후3:9절에서는 '오직 너희를 위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전 내용은 아담 이후 죄로 멸망 받게 된 인간에게 어떻게 구원해 주실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꽉 들어차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결정적인 방법으로 취하신 것이 바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공의도 이루시고 그의 불같은 사랑도 이루시기 위하여 세우신 것이 바로 중보자이십니다. 이 중보자가 구약에서는 제사장으로 나왔으며 신약에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보자는 둘인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하나인 것입니다.
98 \ 9:11-17
2. 구약의 중보자
이 중보자에 대하여 먼저 구약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에서 세우신 제사장은 이 직분을 어떻게 감당함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켜 드리는 화해의 사명을 이룬 것입니까?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차례씩 지성소에 들어가 염소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물을 드리는 일로 죄 값이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어 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같은 제물을 받으심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1) 첫째로 중보자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구약의 제사장은 자신도 죄인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죄인은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먼저 자신의 죄를 속하는 속죄 제물을 드린 후에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백성들의 중보자로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 속죄 제물을 드림으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해 왔던 것입니다. 이 같은 제사장의 사역은 그가 온전한 중보자가 될 수 없다는 증거가 되며 온전하신 분이 오시기까지만 존속했던 임시적인 중보자였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증보자는 언제나 살아 있어서 이 소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중보자가 죽는다면 이런 중보자는 임시적인 직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이 세상에서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가 맡았던 중보자 직분도 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제사장 직분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시는 다른 중보자가 세워질 때까지만 필요했던 임시직이었습니다.
(3) 제사장의 중보자직은 일년에 한차례씩 지성소 안에 들어갈 때만 효력이 있기 때문에 언제나 죄를 지을 수 있고 속죄의 은혜를 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온전한 중보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제사장의 중보자직은 지성소 앞에 내리어진 휘장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 휘장이 있는 한 하나님과 죄인들의 화해가 온전치 못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자신도 그것을 제치고 겨우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온전한 중보자로서의 제사장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휘장을 찢어 그 가운데로 새로운 길을 열어 줄 중보자가 나타날 때까지만 필요한 임시직으로의 중보자로 세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결론 : 그러므로 우리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구약의 제사 직분은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화목을 이루게 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장래 하실 일에 대한 하나의 예표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가 됨에 온전한 중보자로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99 \ 9:11-17
(50) 그리스도의 중보자 직분
(히브리서 9:11-17)
어제는 구약에 나오는 제사장의 중보자적 직분이 불완전한 이유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율법에 나오는 구약의 모든 제사 제도나 제사 직분은 그리스도에게 와서 온전해 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은 매우 중요한 지식입니다. 이 기초적 성경 지식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을 이해할 수 없으며 구원론에 대한 구약적 배경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일에 많은 장애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11,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장래 좋은 일이란 우리가 장차 들어갈 천국의 영광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이 같은 축복을 이루는 대제사장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1.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피
우리는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우리의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될 수 있느냐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떻게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사 우리에게 오히려 긍휼하심을 얻게 하시어 도리어 생명을 얻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까? 이 문제에 해답을 찾으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한 지식부터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품속에 계셨던 분이십니다. 그 분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이런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시어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 분이 흘리신 피는 그 무엇보다 더 소중합니다. 그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일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지은 모든 죄값을 지불하고도 남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일은 우리의 죄값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치르고도 남을 만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그의 아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죄에 대한 공의로우신 심판을 내이심으로 인간이 범한 죄값을 다 치루게 하신 것입니다.
100 \ 9:11-17
2. 공의 뒤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
죄의 심판을 공의로 내리신 하나님은 이제 그가 베푸시고자 원하시는 사랑을 나타내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일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사실들입니다. 아직도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과 등져 있는 인간들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제 너희들의 죄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두 용서 받았다. 이제 돌아 오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내게로 돌아오면 내가 너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고 너희에게 영생을 줄 것이며 나는 너희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이렇게 메시지를 전하시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가 바로 복음입니다.
이사야 선지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사5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하여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업2장에서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온전한 중보자의 자격을 갖고 계시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자기의 피로서 속죄 제물을 삼으셨기 때문에 속죄 제물로서의 그 효과가 영원한 것입니다. 다시는 죄 때문에 짐승을 잡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 그 분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부활한 몸으로 지성소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중보자가 갈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분은 항상 그곳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그의 피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 분의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 분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원수의 담을 허셨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일은 바로 이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결론 : 이처럼 우리 예수님은 갈보리의 십자가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온전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피는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뿐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예수를 확실하고 분명하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이 예수를 견고히 의뢰하시어 여러분의 생애를 그 분에게 맡기시기 바랍니다.
101 \ 9:18-28
(51) 신구약에 나타난 언약의 피
(히브리서 9:18-2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세우실 때에도 피로서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 피는 짐승의 피였지만 이 피는 곧 그리스도께서 흘리셔야 할 피를 상징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약이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이 새 언약은 이미 구약 여러 곳에서 예언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55:3절에서 '너희는 귀를 기우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영원한 언약이라고 한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운 신약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렘31:31절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고 한 것입니다.
1. 새 언약이 세워지려면
그런데 새 언약이 세워지려면 먼저 그 조건이 조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 값을 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를 가지고서는 이 언약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이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언약의 피이십니다.
마26:18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의 유전적인 죄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키는 일은 오직 한 가지 길 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으로 저주 받아 죽으셔야 했습니다.
2. 첫 언약의 피
구악에서 첫 언약이라고 하는 말은 대개의 경우,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인간이 지켜야할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고 이 법을 지키는 생활을 통해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한 법이 첫 언약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언약에도 피를 사용하셨습니다. 죄인이 새로운 생명을 얻으려면 그 죄를 속하는 피 흘림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범했을 때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피 흘리는 제사 제도를 통해서 보여 주셨던 것 입니다. 이 같은 일은 죄인들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데는 육체의 정결 102 \ 9:18-28
을 얻어야 했는데 그런 일은 짐승의 피로써 족했던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히9:13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케 하거든'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 있는 지성소의 법궤가 아니라 하늘의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양심의 정결함을 얻어야 하는데 그것은 짐승의 피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고 다만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피로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3. 새 언약의 피
하늘의 지성소는 땅의 지성소와 다릅니다. 하늘의 지성소에는 법궤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보좌에 앉아 계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정결하게 하는 방법도 모형으로 할 수 없습니다. 실체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실체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림자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와 동등한 자격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온전한 속죄제물이기 때문에 자기가 죽어서 그의 피를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 해마다 새로운 제물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해마다 자주 드리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어린양이시기 때문에 한 번 흘리신 피로 족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예수님은 언제나 그곳에 계시기 때문에 새로운 제물을 드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지을 적 마다 이 땅에 다시 내려오셔서 자주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7절 말씀을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생령이었지만 그 근본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범죄한 인간은 생령의 상태에서 다시 흙의 상태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그 근본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범죄한 인간의 심판이 아닙니다.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심판은 흙으로 돌아간 후, 말하자면 육신이 죽은 후,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 가서 받는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범죄 한 후 육체로 타락하므로 그 상태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결론 :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되며 마지막에는 죽지 아니할 부활한 몸이 되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생명의 언약에 들어가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임을 명심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3 \ 9:28
(52) 주의 재림과 구원의 완성
(히브리서 9:28)
28절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관한 말씀으로 우리의 속죄와 구원의 완성의 과정을 단순하고 간략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었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성경에는 예수님이 두 번 오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예수님의 초림이요 두 번째가 재림입니다. 왜 두 번 오시느냐? 그 이유는 오시는 이유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의 목적은 죄인의 구원에 있습니다. 28절에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초림의 예수는 온유하고 겸손한 분으로 그 모습을 세상에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서 그의 초림의 사명을 모두 이루셨습니다. 단번에 드리신 바 되었다는 말씀이 바로 이 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입니다. 초림 때와 재림 때의 죄인의 관념이 다르게 나타나 있습니다. 초림 시에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오셨는데 재림 때는 '좌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나타나시기 위해'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 죄인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요3:18절에서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는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죄의 종목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그의 사랑으로 보내신 자 그의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죄는 없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심판을 위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의 모습을 가장 실감 있게 보여주신 계시는 계19장에 나와 있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심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104 \ 9:28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초림의 예수님도 재림의 예수님도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같은 신분을 가지신 분이시지만 이처럼 초림과 재림과는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2. 주의 재림은 어떻게 오는가?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오늘 주신 말씀을 보니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소망 중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소망은 지금 우리에게 이뤄진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이뤄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온전해 지고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생명으로 변화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일은 오직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처럼 구원에 이르는 대상에 대하여 두 가지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죄와 상관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기를 바라는 자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죄와 상관이 없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사유함을 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자기를 바라는 자들이란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 중에 바라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의 재림을 소망 중에 기다리는 성도들이 그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초림과 재림의 차이점을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초림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베들레헴 땅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 때에는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신 영광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초림의 예수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재림의 예수는 죄와 상관없는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초림의 예수는 그를 영접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의 주님은 자기를 바라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그러면 언제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재림하실 예수님은 '때와 기간은 아버지께 속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그러나 때와 징조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예수님은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이란 주의 재림의 관한 별도의 성경을 주심으로 주 재림을 준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주님을 맞이할 신부는 죄와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죄와 상관이 있는 성도가 되지 마시고 죄를 회개하고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죄와 상관이 없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05 \ 10:1-10
(53) 첫 것과 둘째 것
(히브리서 10:1-10)
오늘 본문 9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폐하신 첫 것은 무엇을 말하며 세우신 둘째 것은 무엇인 것입니까? 왜 하나는 폐하심을 받고 또 하나는 세우심을 받은 것인가? 이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일에 중요한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1. 첫 것은 왜 폐해졌나?
하나님은 첫 것을 폐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폐하여 버리신 첫 것이란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을 가리킵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의를 약속하신 첫 번째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폐하셨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율법이 인간에게 의를 약속하였지만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에 유명무실한 이 법을 폐지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1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장차 오는 좋은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실 구속의 은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의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우리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여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아직도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법도로 살아 있습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짐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서 벗어났다,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뜻은 율법이 그 법을 어기는 그리스도들에게 대하여 구속력이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간통죄란 죄목이 있습니다. 미국이나 일본에는 이런 법 조항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도 앞으로 간통죄가 형법에서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는 사람들이 간통을 했어도 법으로 그 사람을 다스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간통죄를 범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같은 죄는 구속력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인간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의 경우도 이와 똑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구속력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8:1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이 율법의 구속력 때문에 율법을 지켜 왔지만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죄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지키는 것입니다.
106 \ 10:1-10
2. 둘째 것으로 세우신 은혜의 법
여기서 하나님은 둘째 것을 세우시게 된 것입니다. 율법은 의도 줄 수 없고 생명도 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이 안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도 주시고 생명도 주시는 다른 법을 세우시게 된 것입니다. 이 법이 은혜의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율법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은혜의 법으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십니다.
이 둘의 차이점은 굉장히 큰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들에게 그것을 지키는 자들에게 의를 주겠다고 약속은 하고 있지만 우리 인간들은 선천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율법이란 법은 절대로 지킬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빚 좋은 개살구 격입니다. 약속이 있으면 무엇합니까? 그것을 지킬 수 없을 때는 그 약속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신기루 같은 율법의 약속을 폐하시고 새로운 은혜의 법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시는 믿음의 의의 법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의와 생명을 주시는 일에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작정하시고 율법으로 주실 것이라고 하신 첫째 것을 폐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두 번째로 하나님이 폐하신 첫 것은 불완전한 속죄 제물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의와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그 정죄로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아시고 그 율법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속죄제물을 드리는 제사제도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사람에게 온전한 의를 줄 수 없는 법이었기 때문에 그 속죄제물 역시 온전히 죄를 용서해 주는 제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것도 율법처럼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짐승의 피가 죄로 죽게된 인간의 죄를 용서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법을 떠난 인생들이 근본적으로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첫 것인 짐승의 속죄 제물을 폐하시고 둘째 것인 그리스도의 속죄의 법을 새롭게 세우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왜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이 완전한 제물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완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우리를 정죄했지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는 율법처럼 계명을 지키는 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시는 믿음의 의인 것입니다.
107 \ 10:5-10
(54)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오신 예수
(히브리서 10:5-10)
우리는 어제 첫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왜 폐해지고 둘째 것을 세우셨는가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첫 것이란 곧 율법을 가리키는데 이 율법은 1절에서 밝히시기를 다만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그림자는 참 형상이 올 때 마땅히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장차 오는 좋은 일의 참 형상으로 오셨기 때문에 첫 것인 율법은 폐해지고 둘째 것인 예수 그리스도로 세우신 은혜의 법이 세워진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왔나이다.
7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것을 폐하시고 둘째 것을 세우실 사명을 가지시고 세상에 오실 일에 대한 시편40편에 예언된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기록은 다윗의 기도로 나오지만 실인즉 구약적인 제사와 율법을 폐하시고 새로운 은혜의 법을 세우시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한 시이지만 그 영적 배후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임하실 일에 대한 예언으로 계시된 것입니다. 5절에서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란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실 일에 대한 것이며 그 때에 이루실 주님의 사역에 대한 자기 고백의 예언으로 보여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제사와 예물은 첫 것인 율법에 대한 의식인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는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기 때문에 원치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해답이 4절에 나와 있는데 '이는 황소와 송아지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제사와 예물은 원래가 속죄 제물이 될 수 없는 것이며 참 형상이 아니라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와 예물이 아니신 것입니다. 삼상15:22절에서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미6:8절에서 '공의와 인애와 사랑과 겸손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원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므로 이 같은 그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원치 아니하신 것은 폐하시고 원하신 것을 취하신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 108 \ 10:5-10
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고 하셨습니다. 두루마리 책은 구약을 말합니다. 두루마리는 옛날 구약성경을 기록할 때 사용한 양피지를 가리키는데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이 같은 두루마리에 율법서, 시가서, 역사서, 선지서 등을 기록했습니다. 두루마리 책은 바로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으로 구약성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그런데 7절 말씀에 의하면 이 같은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곧 자기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새로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실 일에 대한 예언으로 기록된 책이 성경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두루마리 책에 나를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루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것입니까? 요6:38-40절 말씀을 펼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그런 사람들은 하나도 잃어버린바 되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뜻을 이루시기 위해 어떻게 세상에 오신 것입니까? 빌2: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인 율법을 이루심으로 그것을 폐하시고 자신의 피로 새로운 둘째 것, 은혜의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결론 : 이처럼 예수님은 첫 것을 폐하시고 둘째 것을 세우시기 위해 세상에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는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운명하실 때, '다 이뤘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림자인 첫 것은 폐해지고 참 형상인 둘째 것이 세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나와 깊은 관계를 가지신 분입니다.
109 \ 10:11-14
(55) 영원한 구원
(히브리서 10:11-14)
오늘 본문 말씀 중 14절 말씀은 우리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 중요한 진리가 되는 말씀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알기 쉽게 간략히 말한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이 되심으로 그의 피의 대가로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원한 구원이 이뤄진다는 뜻입니다.
옛날부터 신학적 크다란 논쟁이 되어 온 교리 문제로써 구원에 관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를 받고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생애 중, 죄를 범했을 때에, 그 죄로 인하여 멸망을 받느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속한 장로교회의 입장은 분명하고 명쾌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른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멸망할 수 없으며 한 번 주어진 구원은 절대로 변함이 없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1. 한 번 에 족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왜 한 번으로 족한 것인가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얻는 구원은 새로운 생명을 받는 일을 말합니다. 요1:12절에서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는데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난 자는 죄와 사망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한 명의 의인도 없으며 한 명도 구원에 이를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이치와 동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그의 생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한 명도 아담의 자손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의 자손들은 아담 안에서 온전히 아담과 하나가 된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이 생명적인 연합에서 벗어날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자기에게 오는 자는 한 명도 잃어버린바 되지 않는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6:37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범했다고 그 이유로 영생이 취소되거나 생명을 잃어버린바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모두 가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하지만 그 110 \ 10:11-14
러나 죄는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죄를 짓는 경우와 그리 스도 안에서 죄를 짓는 경우입니다. 아담 안에서 짓는 죄는 하나는 원죄요 하나는 고범 죄입니다. 인간은 원죄로 심판을 받게 되고 고범 죄로 그 받는 형벌의 경중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범하는 죄는 이미 원죄는 소멸되고 고범 죄뿐인데 이 고범 죄는 이미 용서받은 것들입니다. 용서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되었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인의 죄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처리되는 것입니다. 이 처리는 두 가지가 따릅니다. 하나는 징계가 따르고 하나는 하늘의 상급에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이미 드려졌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 드린 속죄제물은 양이나 송아지나 염소 따위의 피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죄를 범할 때마다 잡아서 피를 흘려야 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죄를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제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소나 양이나 염소와는 달리 거룩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신 분입니다. 그의 피는 죄인들을 단번에 온전히 속죄할 수 있기 때문에 구원과 영생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만일 죄를 범할 때마다 새로운 제사를 드려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이 죄를 범할 때마다 다시 세상에 오셔서 계속적으로 십자가를 지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은 그가 한 번 피를 흘리신 것으로 죄인의 온전한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4) 다음에 우리의 구원이 영원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과 구원의 예정은 이미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생각 뿐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를 알고 계시며 우리가 언제 어떻게 범죄할 것이란 사실까지 벌써 아시고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그런 장래적인 일이 우리의 구원을 소멸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4) 다음에 우리의 구원이 영원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보증해 줍니다. 롬8:1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정죄란 말은 죄 값으로 받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죽은 사람은 또 죽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소멸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기 때문에 영원히 변질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 예수님은 하늘의 지성소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히10:14절에서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11 \ 10:15-18
(56) 그 날 후에 세울 하나님의 언약
(히브리서 10:15-18)
11절에서 14절까지는 땅에서 제물을 드린 제사장과 하늘의 지성소에 계시는 제사장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땅위의 제사장들은 매일 하나님의 성전에 서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 이유는 한 번의 제사로는 계속적으로 범하는 사람의 죄를 속죄할 수 없기 때문에 죄를 범할 때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사람의 죄를 기억나게 하거나 사죄의 은총을 맛이나 볼 정도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는 모든 인간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영원한 속죄 제물로 단번에 드리신 것입니다. 12절에 나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 분은 이제 속죄제물로서의 그의 사명을 마치시고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1.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것입니다. 이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새 언약은 예전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16절에 그 자세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 날 후'라고 하신 말씀은 첫 것이 지나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을 드린 이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날에 세울 언약은 돌비에 새겨진 율법으로 된 언약이 아닙니다. 16절 이하에 있는 말씀은 예레미아31:33-34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우리의 마음에 새기는 새 언약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두고 우리 마음에 기록하십니다.
112 \ 10:15-18
이것은 진리를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주 하시는 역사를 말합니다. 성령은 진리를 증거 하십니다.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로 진리를 믿게 하십니다. 우리는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이유는 이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새 언약을 우리들로 믿게 하사 우리에게 사죄의 은총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새 언약의 체결자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에 두고 우리 생각에 기록하는 일은 성령의 내주로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서 나의 영과 하나가 되어 나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배하시고 나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 새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남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새 언약을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정립되는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관계를 롬8:14절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원수의 담은 무너지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는 언약이 새 언약인 것입니다.
다음에 새 언약의 약속은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서 다시 기억치 않으시겠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난날의 더럽고 추한 모든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기억도 아니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분명히 회개한 죄에 대하여 다시 들추어내어 추억하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미 완전히 용서를 받은 일이며 하나님께서도 기억에서 잊으신 것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끄집어내어 상처를 입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한 다른 사람의 죄를 들추어내거나 그 사람에게 회상시켜 주는 일로 상처를 입혀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진 일을 사람이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잠정적인 것이거나 일시적인 것이거나 조건부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며 영원히 변함없는 구원이심을 믿고 우리의 구원에 결코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113 \ 10:19-20
(57) 사죄자의 신앙적인 자세
(히브리서 10:19-20)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신앙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처럼 영원하신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세로 그의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로 그냥 죄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 그 고귀한 피로 속죄해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신 것일까요? 그렇다면 이미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상실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 죄의 용서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어떠해야 한다는 기준을 엄격히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롬7: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어도 좋으냐는 문제에 대해 바울은 롬6:2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라고 말씀했고 6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죄를 받은 사람은 그 사죄함에서 오는 참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죄의 용서에서 오는 기쁨과 평안이 그 마음에 넘치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에게는 두 가지 면에서 축복이 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평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른 또 한 가지는 내 인생에 평안함과 감사가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너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는 선언을 들었을 때의 기쁨과 감격은 형용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우리의 사죄에서 오는 축복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신 온전한 제사로 얻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받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로 알아보겠습니다.
2. 그리스도인의 특권
(1) 우리에게 지성소가 열려져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땅위의 지성소는 성소 뒤에 있어서 휘장으로 막혀져 있으며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차례씩 114 \ 10:19-20
들어갔지만 이 지성소가 하늘로 옮겨진 후에는 땅의 지성소는 소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첫 것을 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이 지성소에 어떻게 들어가는 것입니까? 그 지성소에도 휘장이 내려져 있는 것입니까? 이 문제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직 문제와 직접적 관계가 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휘장이 사라져 버렸다거나 휘장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말씀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성소 휘장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까? 휘장 한 가운데가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휘장 가운데로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하늘에 지성소에도 들어가는 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새롭고 산길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그 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열어 주신 길인데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자신의 몸을 드리심으로 열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휘장이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 휘장을 찢으시고 우리로 그 길로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롭고 산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휘장이 찢겨져 하늘의 지성소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말은 하늘 문이 열렸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다만 우리들의 신령한 눈이 어두워 바라볼 수 없을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성소에 들어가는 시간은 언제가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제사장의 직분을 행할 때 그 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제사장의 직분은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자신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드릴 그 때입니다. 다른 하나는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속죄제물을 드릴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죄나 형제들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그 찢겨진 휘장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보좌 앞, 지성소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히4: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긍휼하심이란 사죄의 은혜요 돕는 은혜란 하나님의 인도하십입니다.
결론 : 죄를 가지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정결하게 씻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또한 그곳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새롭고 산길이 항상 열려져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115 \ 10:21-25
(58) 보좌에 나아갈 자격자
(히브리서 10:21-25)
22절에는 하나님의 보좌에 나갈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밝혀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말씀했습니다.
1. 누가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가?
누가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가에 대하여 몇 가지 자격 요건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22절에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참 마음을 가진 자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양심의 악을 씻고 몸을 맑은 물로 씻은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서 씻음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 받아 그 양심의 악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몸을 맑은 물로 씻음 받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온전한 믿음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23절 말씀에서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는 자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믿음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은 이 땅위의 것이거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롬8장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소망에 흔들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염려하는 생활로, 세상을 바라보는 생활로, 죄악의 유혹을 받는 생활로 소망에 흔들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소망만 굳게 잡되 결코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2. 모이기를 힘써라
교회 생활에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24절과 25절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했습니다. 교회 생활의 중요한 원 116 \ 10:21-25
리는 서로 돌아보는 일인데 특별히 사랑과 선행에 대하여 격려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란 곳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시기 잘하는 사람, 투기심이 많은 사람, 다른 사람을 헐뜯기를 좋아하는 사람 등등 실로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잘 섬기며 선행하는 사람에게는 중상이나 모략 대신에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모범적인 성도들에게는 주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고 격려를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다음에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교회란 곳은 모이는 곳입니다. 사람들의 모임이 없이는 교회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불러모으신 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을 이루는 곳입니다. 주님이 머리가 되시고 우리가 그 지체가 됩니다. 그래서 주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이는 일에 서로 권면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시는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그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일예배에 모이고 주일 찬양예배에 모이고 삼일 밤 예배에 모이고 구역 예배에 모이고 새벽 기도회에 모이고 심야 기도회에 모이고 여하튼 모이기에 힘쓰는 교인이 온전한 교인 구실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임의 유익에 대하여 몇 가지 알아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모이면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에 말씀으로 교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임이 있는 곳에 우리 주님이 친히 임재하시어 축복해 주십니다. 내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그곳에 나도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임에서 다른 사람의 흉이나 보고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고 신앙에 유익이 없는 무익한 말이나 늘어놓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모임은 많은 시간을 질질 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모임이 끝나면 곧 집으로 달려가 집안 일도 살피고 아이들도 보살피고 남편에게도 아내로서의 의무를 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에게 거부감을 주거나 예수를 믿는 여자가 왜 저러냐는 식의 비방을 들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은 참 믿음을 가지셨습니까?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올바른 회개를 하신 것입니까? 또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소망을 견고히 잡지 못하고 세상일로 흔들리는 일은 없습니까? 여러분은 저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17 \ 10:28-29
(59) 짐짓 죄를 짓는 자
(히브리서 10:28-29)
오늘 본문에는 '짐짓 죄를 범하는 자'에 대한 두려운 경종이 있습니다. 26절에 나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에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린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짐짓 범하는 죄'란 무엇이며 이 죄가 어떤 것이기에 '다시 속죄하는 제가가 없다'고 하신 것인가?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1. 그리스도의 제물을 욕되게 하는 죄
예수님은 우리의 온전하신 속죄 제물이 되신 분입니다. 아무리 큰 죄라 해도 그 죄에 대하여 사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일1:9절에 있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씩이라도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는 죄'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일5:16-17절을 보시겠습니다. ( ). 이 말씀으로 볼 때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죄에 대하여 두 가지 면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12:31-32절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에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한가지는 히6:3절 이하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했습니다.
2. 짐짓 범하는 죄의 종류
이 말씀을 정리해 보면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았다고 한 말씀은 그 진리를 믿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성령의 끊임없는 감동과 인도하심을 받아 교회도 나오고 복음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드리 118 \ 10:28-29
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그는 짐짓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짐짓 이란 말은 '일부러' '고의적으로'란 뜻입니다. 이미 진리를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일부러 거역하는 사람들, 그 진리를 못들은 척 하는 경우, 그에게 구원의 은혜가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짐짓 죄를 범한다' 또는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죄를 범했다' '타락했다'는 말은 우리가 육체로 범하는 어떤 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거짓말했다거나 살인을 했다거나 간음죄를 범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죄는 어떤 죄라도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미해 주는 죄란 진리에서 떨어지는 죄, 구원의 은혜에서 벗어나는 죄로써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고 그 은혜를 멸시하는 죄를 가리킵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 역시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영이십니다.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에 경종을 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믿음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성령의 역사 하심과 인도하심을 끝까지 거역하는 자들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같은 죄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구분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여 구원의 길에서 스스로 떠나는 일입니다. 이런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은혜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히6:6절에서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을 보내신 것 이상, 우리를 구원해 주실 다른 사랑의 방법이 없습니다. 아들을 속죄 제물로 보내신 일은 하나님의 최대 최상의 사랑이요 그 이상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같은 죄에 대해서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았는데 어떻게 속죄의 제물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까?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데 그 분을 짓밟고서는 다시 드릴 속죄 제물이 없기 때문에 오늘 본문 27절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죄'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히4:2절에 있는 말씀처럼, 들은 말씀과 자기의 믿음이 서로 화합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예수를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믿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들은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119 \ 10:30-31
(60)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생활
(히브리서 10:30-31)
본문 32절에서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고 말씀해 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 우리의 생활에 두 가지 변화가 온 사실을 실감 있게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는 우리의 심령의 변화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의 마음은 죄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 열매를 맺는 생활을 추구하기 때문에 새로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환경의 변화입니다. 주위로부터 우겨 쌈을 당하는 곤고함을 당하게 됩니다.
1.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신32:35-36절 말씀을 30절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원수라고 하신 말씀은 두 종류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26절에서 말씀해 주신 바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들의 죄는 속죄 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겨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위해 드릴 속죄 제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 원수들에게 엄중한 심판으로 갚으십니다. 이들에 대한 심판은 이 땅위에서 하심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끝까지 참으시면서 누구든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이들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것에 비례해서 심히 두렵게 나타납니다. 그들의 육체가 죽는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히9:27절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자색 옷 입은 부자가 들어간 음부란 곳이 그 심판의 장소입니다. 그리고 세상 끝 날에 백보좌 심판을 거쳐 둘째 사망의 장소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둘째 사망의 두려움에 대하여 예수님은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주의 백성들에 대한 심판
다음에 다른 또 하나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 심판에 대하여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심판 받을 대상자가 원수인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이라고 하신 일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들을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20 \ 10:30-31
(1) 이들 중 하나는 교회의 가라지 들입니다. 교회에는 알곡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가라지도 함께 있어서 알곡과 함께 자라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라지의 존재는 교회에 암적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 대하여 원수가 이들을 심었다고 말씀하시고 마지막 날에 이 원수를 불태우는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또 하나의 심판의 대상자는 누룩입니다. 누룩은 악한 교훈으로 진리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진리에서 돌이키게 하고 이단을 형성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나오는 이세벨의 교훈이 이 누룩에서 나온 쑥물입니다. 바울은 이 누룩에 대하여 갈5:7절에서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했습니다.
(3) 다른 또 하나의 심판의 대상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받은 은혜를 망각하고 육신의 일로 하나님의 일을 등한히 하는 자들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악한 종이 이들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증거도 없는 믿음을 인정하지 아니하십니다. 믿음을 나타내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열매인 것입니다. 열매를 맺을 시기에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어 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데 있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생활은 믿음을 스스로 저버린 생활이 됩니다.
3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두려 울진저'라고 경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살아 있는 믿음이란 열매를 맺는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가 스스로 시험해 보라는 말씀을 명심하여 자기 신앙에 대한 온전한 확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면 빨리 돌이켜 열매 맺는 생활에 들어가야 합니다. 자신이 교회에서 가라지 노릇을 하는 자가 아닌가 늘 자기를 살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열매도 없으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려 하고 죄를 회개도 하지 않으면서 속죄의 은혜를 받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은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바른 생활을 하게 하시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인줄 믿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들이 아닌가 스스로 살펴보는 가운데 소망을 견고히 붙잡고 흐트러짐이 없는 믿음의 생활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121 \ 10:32-39
(61)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히브리서 10:32-39)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은 언제나 그 믿음의 담대함에 승리의 비결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35절 말씀에서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상을 얻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히브리서는 구약적 언약에서 좀처럼 빠져 나오기 어려운 유대인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이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구약적 율법에 얽매어 믿음에 많은 제한을 받으면서 확고한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에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구약에서 언약된 메시야이시며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구약적 속죄 제물의 완성임을 성경적으로 증명하며 배도적인 신앙의 두려움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로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면으로 새 힘을 얻어 앞으로 닥쳐올 여러 환난과 핍박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의 담대함을 주기 위하여 지금 이모저모로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빛을 받은 후에 받는 고난
히브리서 저자는 32절에서 지난날 그들이 믿음을 받아 드린 후에 그로 인하여 겪지 않을 수 없었던 고난을 회상시키고 있습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고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받아 읽는 성도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들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빛을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역사적으로 많은 국가에서 핍박을 받은 일은 명백한 사건으로 종교사나 역사 서적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절대시하는 동족들에게 많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사도행전에 많이 나타나 있으며 사도들과 많은 복음의 일꾼들은 이런 상황에서 순교의 제물로 많은 피를 흘린 것입니다. 이들이 받은 고난에 대하여 몇 가지로 밝혀 주고 있습니다.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비방은 복음이 이방 종교와 전혀 다른 방법의 의와 구원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독교가 우상 숭배를 반대하고 거절하는 일은 지금도 같지만 이런 배타적인 성경 진리가 그 당시 이방 사회에서는 크나큰 비방거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잡아 가두거나 매질을 하거 122 \ 10:32-39
나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는 혹독한 환난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업을 이어가는 산업도 빼앗겼습니다.
2. 고난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소망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이 같은 고난과 환난을 참음으로 이길 수 있었는가? 어떻게 이런 시련을 기쁘게 당할 수 있었던가? 34절에서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산업은 이 땅위에 있지 않습니다. 이 땅위에서 우리가 경영하는 산업은 다만 더 낳은 우리의 영구한 산업을 얻기 위한 삶의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위의 산업을 포기하므로 영구한 산업을 얻을 수 있다면 기쁨으로 그 길을 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태도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산업에 대하여 우리에게 너무나도 분명하게 언급하셨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늘에서 있을 상은 바로 우리의 영원한 산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4:12절에서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는데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우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실 일은 영구한 산업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신앙의 담대함을 가지고 그 어떤 고난과 환난의 시험 중에도 배도 하는 일을 하거나 불순종하는 일로 그리스도를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 :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매우 가까운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 살아가는 성도이건 주의 재림에 소망을 두고 고난과 환난을 이겨야 합니다. 뒤로 물러가는 생활은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윤에 빠질 자들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할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로써 심판 받을 대상자들이 아니라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어떤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인내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23 \ 11:1-2
(62)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믿음
(히브리서 11:1-2)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며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성경에는 믿음에 대한 말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도 이 믿음을 떠나서는 생활 할 수 없을 만치 믿음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뢰합니다. 우리는 천국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며 우리는 가장 불쌍한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생애를 나그네 생활이라고 믿고 살아가고 있으며 장차 그곳에 들어갈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고난을 당하며 시련과 환난의 고통도 참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믿음이라고 하나는 것인가? 이에 대한 정의가 히11:1절에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첫째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여기서 바라는 것들이란 말은 바란다, 희망한 다의 뜻을 나타내고 있는 '바라지고 있는 것들'이란 뜻입니다. 이 바라지는 것은 인간의 어떤 신념이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계속 바라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바람, 곧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우리가 바라지는 소망도 있을 수 없고 그 소망에 대한 믿음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상이란 말은 본질, 혹은 실재 확인이란 뜻입니다. 이 말씀을 쉽게 간추려 설명한다면 우리의 믿음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미래의 소망에 대하여 우리의 생활 속에서 성취되고 이루어지는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소망으로 얻은 것입니다. 천국도 소망에 속한 장래적인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그 많은 약속도 우리들이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들이며 실제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롬8:24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우리는 믿음으로서가 아니라 그곳으로 달 124 \ 11:1-2
려가는 노력을 통해서 그 소망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특징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꿈속의 일처럼 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잡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약속에 의지하여 그것들을 우리가 소유한 것처럼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약속한 것들
우리가 천국의 경우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천국에 가 본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권사님이 천국에 다녀왔다는 간증을 통해서 그 천국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천국은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가 볼 수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바라는 것일 뿐입니다. 소망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소망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학작품이나 신념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 존재를 믿는 것입니다.
천국은 약속을 받은 사람이 소망으로만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에겐 천국을 볼 수도 없으며 보여 줄 수도 없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막11:24절에서 실감 있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믿고 기도한 일에 대하여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그 목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이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헛것이 아닙니다. 허망한 것도 아닙니다. 실재이기 때문에 믿음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약5:15절에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시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 말씀은 허황 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인즉 허황 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기도를 드렸다면 아직 병든 상태에서 호전되지 않았어도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결론 :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런 믿음이었습니다. 롬4:18-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다고 했습니다. 그의 바람은 자기의 신념이나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네 자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에 따른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생애를 살아간다면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125 \ 11:1-2
(63)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히브리서 11:1-2)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지 못하는 것들이란 보여지지 않는다는 뜻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보여지지 않는 상태에 숨겨져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증거란 말은 드러나다, 선포하다 는 의미의 뜻이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하나님에 의해 비밀히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과학적으로 체험적으로 증거가 안되지만 그러나 믿음은 그 비밀한 것들을 확실한 증거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천국은 없는 것을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비밀한 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비밀한 곳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찾고 우리의 믿음으로 그곳을 확실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1. 믿음이 없으면 소망으로 살아갈 수 없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믿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죽어 있는 사람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신앙의 증거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삼았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 뿌리가 견고하고 확실합니다. 견고하고 확실한 뿌리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마24:35절에서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꿈이 아닙니다. 모두 실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꿈에서 보는 허상으로 생각하면 그 말씀에서 오는 축복을 하나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손으로 지금 잡을 수 있는 실체인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순종의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2.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 우리가 이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첫째로 믿음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들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습니다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이 믿음을 자기자신이 만들어 보려고 힘쓰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엡2:8절 말씀에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이 선물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선물을 받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이 선물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십니다. 롬10:17절에서 '믿음은 126 \ 11:1-2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셔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며 그 말씀을 깨닫기를 원하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다음에 믿음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선물로 주실 하나님을 만나야 믿음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영적으로라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 만남이야말로 성경적인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모습은 그의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영적인 교통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그 안에서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때 확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믿음은 회개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회개한 사람과 회개치 못한 사람과의 신앙적인 수준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과 회개는 언제나 정비례한다는 사실을 알고 언제나 회개하기에 재빠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사람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순종의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바람직하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믿음의 생활입니다. 순종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어렵고 무거운 짐은 모두 자신이 지시고 우리에게는 가벼운 짐만 지우십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순종이 어렵다고 하는 말은 믿음이 없이 순종을 하려니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한 믿음으로 받아드리면 순종은 쉬운 것입니다. 믿음의 힘으로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순종하려고 하는 진실한 마음을 하나님께 보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힘을 반드시 공급해 주십니다.
결론 : 믿음이 없으면 소망도 한낱 꿈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이 분명하게 언약하신 축복도 떠도는 구름처럼 우리 손에 잡혀질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습니다. 증거 없는 믿음은 그 생활에 흥미가 없고 힘들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른땅을 촉촉이 적시는 이슬비처럼 우리의 메마른 심령을 적셔서 믿음을 통해서 바라는 소망을 실상으로 붙잡아 여러분의 소유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7 \ 11:1-3
(64) 선진들의 증거
(히브리서 11:1-3)
성경에는 소망이란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소망이란 말은 성경적으로 볼 때 신앙적인 말입니다. 우리들이 소망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분명하고 확실하지만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거나 우리의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거나 우리의 노력으로 그것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소망이 아닙니다.
1. 무엇으로 소망을 보는가?
그러면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이란 영원한 생명을 말하며 부활을 말하며 하늘에 있는 천국을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이 같은 소망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선진들이란, 믿음으로 살아간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이요 선배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증거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골1:5절 말씀을 보면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소망을 쌓아 두셨습니다. 그러면 이 놀라운 소망을 우리는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아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안경을 쓰고 그곳을 바라보면 확실한 증거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모든 일에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천국을 보아야 그 천국이 보이며 믿음의 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어야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의 안경은 무슨 재료로 만들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다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소망을 찾으며 그 말씀을 믿는 믿음에서 그 소망이 확실해 지고 확실한 증거를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잘못된 신앙들
오늘날 교회에 믿음으로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소망을 이루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말씀이 아니라 이적으로 믿음을 가지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은 이적은 복음도 아니며 믿음도 아닙니다. 이적은 사람에게 믿음을 주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메시야로서의 여러 가지 이적을 보여 128 \ 11:1-3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많은 이적을 친히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적으로 예수를 믿지 못했으며 또다른 이적을 원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이적을 원하는 것이라고 책망하시고 요나의 이적 밖에는 보일 이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이적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시는 주님의 부활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 대한 이적을 부활에 대한 이적으로 한정시키셨습니다. 부활에 대한 이적을 믿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인 것입니다. 이적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여부를 시험하시려고 하나의 시험의 도구로 쓰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신13:1-5절 말씀을 보면 어떤 선지자가 일어나 혹 이적과 기사를 보이고 그들이 말하는 대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룰지라도 그 말을 청종하면 안 된다고 경고해 주신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그 사람을 하나님이 시험하사 이적을 중히 여기나 하나님의 말씀을 중히 여기나 시험하시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사 신앙입니다. 은사 신앙이란 은사를 받아야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은사위주로 신앙 생활을 것을 말합니다. 약 20여년 전, 한때 방언 운동이 굉장히 번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 받은 증거는 방언에서 나오기 때문에 방언을 받지 못하면 구원을 확인하 수 없다는 주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거나 교회 성전에서 이 방언 받기 위해 할렐루야 고함을 지르고 방언을 흉내내려고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부린 것입니다. 방언은 성령의 은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성령께서 필요한 사람에게 은사로 주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상에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무엇인가 보려고 하고 무엇인가 들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런 일에 기우러져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환상이니 이상이나 환청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이런 신앙에 마음이 쏠리게 되면 신비적인 신앙에 빠져 들어가 믿음이 병들게 됩니다.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어도 귀에는 들리는 음성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의뢰하며 그 말씀을 따라가는 신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실한 믿음인 것입니다.
결론 : 우리의 신앙의 선진들은 믿음으로 증거를 삼는 생활을 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믿음으로 증거를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사람입니까?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실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29 \ 11:1-3
(65) 믿음으로 알 수 있는 두 가지 사실
(히브리서 11:1-3)
히브리서11:1-3절 말씀은 우리의 믿음과 중요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시간 이 문제를 가지고 강해했습니다. 오늘은 본문 3절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사실을 배우려고 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다윈의 진화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어떻게 탄생되었는가에 대한 논란은 옛날부터 과학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지구의 형성의 각가지 학설은 비 성경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고려해 볼 가치조차 없는 것이고 우리는 다만 성경에 나타난 말씀에 의하여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사실과 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것으로부터 온 것인 줄 믿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설에 가장 위협적으로 나온 것이 소위 다윈의 진화론입니다. 다윈이란 사람은 1809년에 태어나 1882년까지 살아온 1800년대의 사람으로 영국의 세계적 물리학자로 진화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다윈은 케임브리지 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사람으로 목사가 되어야 할 사람이 박물학에 흥미를 가지고 깊숙이 연구한 것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앞잡이가 된 것입니다.
진화론을 간략히 말한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단순물질로부터 여러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생명체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경우를 예로 들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흙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수 만년 전의 모습은 원숭이였으며 그 이전의 모습은 더 단순한 존재로 그 기원을 거슬려 올라가면 아메바와 같은 단순 세포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주장의 증거는 세계도처에서 수집한 화석에 의하여 발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것을 체계화하여 쓴 책이 다윈의 진화론으로 오늘날 초등학교로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교과서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주는 책으로 사탄의 작품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창조역사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창조를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창1:1절에 나오는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증거해 주는 첫 번째의 130 \ 11:1-3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천지창조는 저 하늘의 뭇별이나 해나 달이나 우주 만물의 모든 존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45:12절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친수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이 우주의 탄생 기원에 대하여 별의별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있지만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엷은 지식과 천박한 지혜를 비웃으시는 것입니다. 렘31:37절에서 '위로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아래로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행한 모든 일을 인하여 그들을 다 버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창조역사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셨으며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시어 축복해 주셨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을 때 그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원숭이가 아니라 지금 우리보다 더 완벽하고 성숙한 인간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에게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온전한 모습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지금 눈에 보이는 이 세계가 보이지 아니하는 것에서 온 것인 줄 아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영적 존재까지도 없는 곳에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들입니다. 모든 만물에는 만물의 시작이 있습니다. 이 시작 이전에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존재한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계셨을 뿐입니다.
이 우주만물이 하나님으로 창조된 사실을 믿음으로 알 수 있고, 이 모든 세계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을 알 수 있다면,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사실을 믿음으로 안다면 우리의 소망이 비록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확실한 실상으로 그리고 증거로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언약을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죄 사함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의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천국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이 언약을 확실히 받을 수 있습니다. 선진들이 가지고 살아온 믿음이 바로 이 같은 믿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우리의 생애에 우리가 바라는 모든 소망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이뤄진다고 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소망 가운데 축복된 생애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안에서 생활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성숙해 지며 그 믿음으로, 말씀에서 언약하신 실상을 볼 수 있으며 말씀을 증거로 삼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131 \ 11:4
(66)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
(히브리서 11:4)
히브리서를 쓴 저자는 2절에서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말씀하고 4절부터는 이 선진들의 믿음으로 증거를 삼고 살아온 사람들의 믿음의 생활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첫 인물로 등장시킨 믿음의 선진으로 아벨을 들고 있습니다.
1. 제사로 의로운 자라 증거 받은 아벨
창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인류 최초의 제사입니다. 이 제사에서 아벨이 믿음으로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최초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경우는 어떠합니까? 롬4:1-3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믿음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줄을 끝까지 믿었는데 하나님은 이 같은 그의 믿음을 기쁘게 보시고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4:18-22).
가인과 아벨은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후, 저주받은 땅에서 낳은 아들들입니다. 이들이 장성해서 제각기 기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제사 때가 되매 제각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이 제사에서 하나님은 양을 잡아 제물로 드린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농산물로 제물을 삼은 가인의 제물은 물리치신 것입니다. 이 때 가인은 시기심이 가득하여 아벨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그러면 왜 가인의 제물은 물리치시고 아벨의 제물은 열납 받으셨는가 이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받는 일에 결정적인 해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여기서 제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야 하겠습니다. 제사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제사라고 하는 하나의 방법을 주심으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제사는 제물을 드리는 형식으로 치러졌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양으로 가인은 농산물로 드린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두 가지 제물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화목 제물이요 다른 하나는 속죄 제물입니다. 화목 제물은 짐승을 잡아 각을 떠서 하나님의 제단에 드리는 것으로, 속죄 제물은 짐승의 피로 드려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몸이 찢기시고 그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속죄하신 일에 대한 그림자로 율법에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132 \ 11:4
2.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
아벨과 가인은 하나님께 드린 제물이 각기 달랐습니다.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제물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에 대하여 언제나 분명하게 명하셨습니다. 곡식으로 화목제와 속죄제로 삼는 일은 없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공로를 내세웠습니다. 자기가 애써 노력하여 수확한 것으로 제물로 삼고 그것을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이 같은 제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가인의 마음에는 선한 것이 없었습니다. 6-7절. 가인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9절.
그러면 아벨의 제물을 보겠습니다. 아벨은 양을 제물로 삼았습니다. 양이란 제물에 믿음의 근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양을 잡아 드리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므로 아벨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은 것입니다. 아벨은 아담으로부터 전수 받은 하나님의 속죄의 언약을 믿고 따랐습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잡았다고 했는데 왜 잡은 것입니까? 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창9:1-3. 그것은 양으로부터 피와 기름을 빼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양과 기름으로 제물을 삼았다고 한 것입니다. 양의 피와 기름이 어떤 일에 쓰여졌는가 알아보면 민18:17절에서 양의 피는 단에 뿌리고 그 기름은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린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물인 것입니다.
아벨이 드린 제물은 가인의 제물보다 더 나은 제물이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인정받은 제물만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제물이란 사실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는 선언을 받았습니다. 아벨은 인물이나 인격이나 선행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 드린 제물로 인해서인 것입니다. 아벨의 제물은 믿음으로 드린 제물이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결론 : 지금 세상은 두 종류의 인종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가인의 자손이요 하나는 아벨의 자손입니다. 이 같은 후손은 다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제물 한 가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물을 드리는 인류는 가인의 후손이요 아벨의 제물을 드리는 인류는 아벨의 자손입니다. 가인의 자손은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려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후손은 그의 믿음의 제물로 인하여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삼으시어 화목제물과 속죄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 다른 속죄제물이나 화목제물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믿음이 없는 자가 아니라 믿음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33 \ 11:5-6
(67) 에녹의 믿음
(히브리서 11:5-6)
오늘은 에녹의 믿음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녹은 어떤 이유로 믿음의 선진으로 볼 수 있는가? 오늘 본문을 보면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란 증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증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에녹이 죽음을 보기 전 그를 하늘에 옮기 우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벨이 믿음의 제사로 하나님의 의를 인정받았다면 에녹은 그의 생활,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믿음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1. 에녹이란 인물
성경에서는 에녹의 인물과 생애를 아주 짧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기록 속에 담겨진 그의 생애는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창세기에 나와 있는 에녹의 일생은 간단명료합니다. 그는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300년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 속에서 자녀들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결국 365세를 살았는데 그의 생애는 하나님이 데려가심으로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365세란 나이만도 노인인데 그 당시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나 하와까지도 땅에 살아 있을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 인류의 조상들이 누린 연세를 살펴보면 깜짝 놀랄만한 장수였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아담이 930년, 셋이 912세, 에모스가 905세, 게난이 910세, 마할랄렐이 895세, 야렛이 962세, 에녹이 365세, 므두셀라가 969세, 라멕이 777세, 노라가 950세 그리고 그 후, 아브라함이 175세로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의 나이가 홍수 심판 이전까지는 굉장히 길었지만 그 후에는 급격히 줄어들어 200세를 넘기지 못했으며 아브라함은 175세로 줄어들었고 그 후부터 더 단축되어 갔습니다. 다윗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80세를 넘기기가 어려운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시90:10절에서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고 했습니다.
2. 에녹의 믿음
에녹은 믿음의 생애를 보낸 사람입니다. 그는 무려 300년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애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300년간의 세월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의 생애 중에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134 \ 11:5-6
생애를 살아온 것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더니'란 말씀의 원어는 '그 하나님 곁에서 행하다' 또는 '그 하나님 가까이서 살더니'란 뜻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시140:13절에서는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고 했습니다. 요일3:24절에서는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에녹은 세상에 죄악이 관용했던 시대에 살아온 사람입니다. 에녹에 대한 기사가 유다서에 약간 언급되어 있습니다. 유1:14-16말씀을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이 경건치 않은 죄인의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에녹은 원망하는 자들과, 불만을 토하는 자들과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에게 뜨거운 사랑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순종치 않고 그 마음의 완악함을 버리지 못하여 노아 홍수 심판 시에 물에 잠겨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에녹은 365세에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가셨다고 했습니다. 에녹은 주검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에녹을 승천시키신 것입니까? 이 일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아들을 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에녹처럼 죽지 아니하는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른 또 한 가지는 에녹의 승천은 하나님의 심판 이전에 있을 그리스도인의 공중 휴거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하늘로 취하신 것은 에녹으로 장차 이 땅에 임할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인류의 종말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은 어느 한 지역에만 해당하는 심판이 아닙니다. 방주에 들어간 생명체만이라도 살 수 있는 심판이 아닙니다. 이 지구가 세 갈래로 갈라지면서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드러나 이 지구를 온통 불태우는 심판입니다. 이 심판에서 살아남을 인류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에녹처럼 하늘로 이끌리심을 받는 성도들만이 새시대의 유업을 받을 수 있습니다. 홍수 심판에서의 구원은 에녹과 노아로 나타나 있습니다. 에녹은 심판 전에 들림 받은 구원이요 노아는 심판 중에 방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방주로 구원을 베푸셨지만 인류의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 시에는 에녹과 같이 하늘로 끌어올리심으로 구원하십니다.
결론 : 에녹은 수도승처럼 산에 입산하여 도를 닦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집에서 자녀를 기르면서 그리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애를 살아간 사람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얼마 안됩니다.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35 \ 11:6-7
(68) 노아의 믿음
(히브리서 11:6-7)
히11:6절에 나오는 말씀은 1절에 나오는 말씀과 같은 맥의 말씀입니다.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는데 6절에서 이 말씀을 주석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면 그런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하여 두 가지로 구분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리 신앙생활의 연륜을 쌓아도 헛수고입니다.
1.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믿음
그러면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무엇을 근거로 믿을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분명한 길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심을 믿게 되며 그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을 찾는 이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가장 악한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도 주시지 아니하시고 화도 내려주시지 않는다'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반드시 상을 주신다고 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사상입니다. 그런 중에도 가장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은 그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는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따라간다는 의미입니다. 따라간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노아의 믿음
오늘은 노아의 믿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구원함을 받으므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심판의 경종을 받았을 때, 아무 것도 본 것이 없었습니다. 홍수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가운데서 경종을 받은 것이 아니라 노아는 다만 하나님의 말 136 \ 11:6-7
씀을 믿음으로 심판의 경종을 받은 것입니다. 인류의 종말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그 심판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불의 심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의 종말의 심판에 대하여 노아와 같은 믿음이 없이는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의 심판은 노아 시대에 홍수로 이미 끝났고 앞으로 장차 이 세상에 임할 심판은 불의 심판입니다. 우리는 물의 심판을 거울삼아 장차 우리에게 닥쳐 올 불의 심판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의 심판과 불의 심판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인간의 죄악이 관용할 때 내려진다는 사실입니다. 창6:13, 계18:4. 인간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여 물의 심판이 내려진 것처럼 불의 심판은 인간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침으로 내려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의 공통점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이 없는 생활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종말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노아의 때에 비유해서 경종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장가들고 시집가고 먹고 마시는 탐심과 환락 위주의 생활을 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의 공통점은 홍수 심판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인줄을 몰랐던 것처럼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핵전쟁으로 죽고 천재지변으로 혹독한 재앙을 만나도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인줄 모르고 더욱더 악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공통점은 그 당시에는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곳에 들어간 노아의 가족들만 살아남은 것처럼 마지막 심판 시에는 믿음으로 예수를 영접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구원을 얻어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은 노아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노아와 같은 믿음으로 종말적인 불의 심판에서 건지심을 받으려면 우리의 한평생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생활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창6:8절 말씀을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이유에 대하여 노아는 그 당시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다고 했습니다. 노아의 의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은 의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기 때문에 노아처럼 심판에서 건져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 노아는 장차 임할 하나님의 경고를 믿음으로 그와 그의 가정이 구원을 받았으며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의의 후사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노아처럼 우리의 온 생애 동안 그 심판을 준비하는 생활을 통해서 노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137 \ 11:8-19
(69) 아브라함의 믿음
(히브리서 11:8-19)
아브라함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중심 인물이며 성경 전체에서 아브라함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큽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믿음을 몇 가지로 밝혀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였으나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거할 때에도 외방에 있는 나그네처럼 장막에 거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같은 생활을 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을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나이 많아 경수가 그쳤으나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삭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하신 하나님을 미쁘신 분으로 그 분을 믿고 의뢰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족보에서 첫째 인물로 등장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신 것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형성하시고 그 민족을 통하여 메시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가 성경에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히11:18절 '네 자손이라 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갈3:16절 말씀에서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제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한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창12: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땅이 어디인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길을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의 순종을 기뻐하셨습니다.
(2)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희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온 우리의 생활이 새롭게 그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새로운 땅, 하나님 나라를 소망으로 삼고 살아갈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고향을 떠난 것처럼 우리의 신앙 생활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일에 근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138 \ 11:8-19
2.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에 이를 의로 여기셨다'고 하신 말씀대로 믿음으로 의를 얻은 사람입니다. 행위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만큼 온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의를 얻은 것은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믿음으로였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하여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네 후사'라고 약속하셨는데 이 후사한 이삭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이삭을 통해서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갈3:16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통하여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언약을 믿었으니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요8:56절에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처럼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일생 일대의 큰 시험이 왔습니다. 그것은 백세에 나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려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왜 이 같은 시험이 온 것인가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17-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사랑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순종의 한계를 아브라함에게 가장 귀한 것인 이삭을 통해서 알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시험에 아브라함은 합격했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아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부활의 신앙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믿음은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19절에서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의 명을 따라 제단에 바친 것입니다.
결론 :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으며 하나님은 그의 믿음대로 그에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형성하셨으며 이삭의 씨로 예수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아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생활을 이루시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아브라함과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39 \ 11:13-16
(70) 본향을 바라보며 살아간 믿음의 선진들
(히브리서 11:13-16)
본문 13절로 16절까지는 이들 구약시대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소망으로 삼고 살아온 근원적인 근거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들 믿음의 선진들의 소망은 이 땅에 둔 생활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의 한 성, 다시 말하면 하늘의 예루살렘 성으로 곧 천국을 소망으로 살아간 것임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받지 못했지만 그 약속을 멀리서 바라보고 환영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생활을 했는데 그 본향이란 하나님이 저희를 위하여 하늘에 예비한 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말씀을 통해서 구약 시대에 살아간 사람들 중에도 믿음을 따라 천국에 올라간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믿음을 따라 죽은 선진들
13절에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따랐다고 하는 믿음이란 무엇에 대한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으로 표현된 천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고 했는데 그들이 그들의 생애 중에 멀리서 보고 환영한 것이란 그들이 찾아갈 본향으로서의 천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은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살아서 이 같은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한 채 죽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표현은 아벨이나 에녹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실행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그들의 생애를 살아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특히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10절 말씀을 보면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는 말씀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나라의 소망 가운데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는 생활을 하면서 그 나라를 동경하고 그 나라가 반드시 성취될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이 같은 선진들의 증거는 무엇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보다 더 확실한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요14:2-33절 말씀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약 성도들에게는 이런 확실하고 분명한 약속이 없었지만 믿음으로 그 나라를 소망하고 그들의 삶의 목적을 그 나라에 두었던 것입니다.
140 \ 11:13-16
2.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선진들의 믿음
이 같은 믿음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의 신앙에 큰 교훈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먼 장래의 일로 생각하는 나머지 재림의 준비나 신부의 단장에 대해서는 듣기조차 싫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까? 마24:42절에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하셨으며 44절에서 이어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눅21:36절에서는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으로 미루어보아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처럼 비록 우리의 생애 중에 주의 재림이 없을지라도 그것을 바라고 재림의 주를 영접할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이들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늘에 예비된 본향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서의 생애를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말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이 땅이 자신들의 본향이 아니라 장차 본향에 들어가는 나그네길이란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이들이 자신들이 등지고 나온 고향 땅이 본향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언제인가 그곳에 돌아갈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소망한 본향은 그들이 떠나온 고향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의 본향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절에서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땅에 있는 우리의 본향보다 더 나은 본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본향은 이 땅에 있어서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본향이 있는 곳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사모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본향이 눈에 보이는 곳이거나 지금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은 우리들이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실상'이요 '증거'로써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이 성에 대하여 고후5: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하늘의 본향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장막과는 전혀 다른 하늘의 본향인 사실을 믿으시고 그 나라에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141 \ 11:20
(71) 이삭의 믿음
(히브리서 11:20)
본문 20절에서 이삭의 믿음에 대하여 매우 간략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은 약속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에덴에서도 이 약속으로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죄로 죽게 된 인생에게 그 아들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언약의 백성이 되어 그 언약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언약을 믿은 이삭
이삭의 생애 중에는 훌륭한 일이 많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신 믿음은 이삭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두 아들에게 그 언약에 따라 축복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태어난 아들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원래 무자한 처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75세시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언약에 의하여 이삭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남녀간의 단순한 결합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결정되며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예정에 대해서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정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이삭을 아들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약속 없이 태어난 아들이요 이삭만이 약속을 따라 태어났습니다. 이스마엘은 육신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약속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업의 후사가 될 수 없습니다.
이삭의 믿음에 대하여 창세기에는 자세히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의 신앙적인 면을 보여 주는 몇몇 사건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삭이 어렸을 때 아버지의 손에 끌려 자신이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 제물 인줄을 모르고 모리아 산에 올랐습니다. 산에 올라가 자기를 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할 때 이삭은 아버지께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노쇠한 늙은이요 이삭은 기력이 왕성한 소년이었습니다. 아버지께 반항하고 그 손을 뿌리쳐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 손에 순순히 자신을 맡겨 밧줄로 묶게 하고 나무 덤이 위에 올려놓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삭은 어려서부터 순종의 신앙을 가진 믿음의 아들이었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제물로 원하신다면 제물로 바치기를 원했던 아름다운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142 \ 11:20
2. 이삭이 아들에게 한 축복 기도
이삭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한 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믿으며 자라 온 이삭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야곱과 에서를 낳았습니다. 창25:21절 말씀을 보면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치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함에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삭은 그 성품이 심히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창26장을 보면 이삭이 아비멜렉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가서 장막을 칠 때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시기하는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들과 싸우게 되었을 때 이삭에게는 그들을 물리칠 힘이 있었지만 싸우지 않고 다른 곳에 이르러 우물을 팠습니다.
이삭은 노년에 이르러 자기 아들들에게 축복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두 쌍둥이 아들 가운데 야곱보다 에서를 더 좋아했습니다. 에서가 장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리브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동생인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이르기를 '너는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나로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삭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작전으로 야곱으로 하여금 에서와 같은 모습으로 분장시켜 눈이 어두운 남편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게 했습니다.
아마 이삭은 하나님께서 이삭보다 야곱을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 이유로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두 아들에게 축복 기도를 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장남의 약속이 야곱에게로 돌아갔을 때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두려운 마음으로 장자의 축복이 이삭에게로 돌아갔음을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삭의 집에 난데없는 환난이 닥쳤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죽이려 하기 때문에 이삭과 리브가는 야곱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시킨 것입니다.
결론 : 이삭의 위대함은 그의 믿음과 순종과 기도에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이런 인간성과 믿음은 그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적 유산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우리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고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실상으로 바라보고 증거로 잡으시기 바랍니다.
143 \ 11:21
(72) 야곱의 믿음
(히브리서 11:21)
본문 21절에서 야곱의 믿음에 대하여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야곱의 생애는 파란만장했지만 그의 임종시에 가서 요셉의 각 아들들에게 믿음으로 축복해 주었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1. 야곱의 생애
우리가 성경에서 야곱이란 사람을 대할 때 야곱은 너무나도 평범한 인물이라는 데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삭의 가정에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 중 동생입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아이를 생산치 못하여 아기가 없자 이삭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은 아들입니다. 이들 쌍둥이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싸웠는데 역대로 그 자손들이 싸워 왔으며 이 싸움은 인류의 종말에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야곱은 해산할 때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하여 부쳐진 이름인데 그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잡는다'는 뜻입니다.
야곱이라 하면 얻어맞는 사람의 전형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연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만드는 징계의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형을 제치고 형이 받을 축복을 자기가 받으려 고하는 이기적 성품,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자기 것으로 만든 욕심, 아버지를 속인 간교한 행동 등은 하나님이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그에게 약속한 축복을 받기에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의 전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시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사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야곱의 연단
야곱은 자신을 죽이려는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괴나리봇짐을 지고 벧엘에 이르렀을 때 꿈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시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언약을 주셨고 야곱은 그 자리에 돌 단을 쌓고 그 위에 기름을 부어 하나님께 서원 하기를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144 \ 11:21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살아갈 동안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라반으로 야곱을 미워하게 하셨고 그 집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형을 골탕먹인 대가로 라반으로부터 품삯을 자주 변경 받았으며, 그리고 아버지를 속인 대가로 라반으로부터 20년간이나 속임을 받는 생애를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야곱이 결정적인 순간을 만나게 되었는데 라반의 집에서 도망하여 고향으로 가는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에 의해 환도 뼈를 꺾임으로 깨져 야곱이란 이름을 '이스라엘'로 고침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의 생애는 새롭게 전개되며 육신적인 야곱은 죽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새사람 이스라엘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야곱의 변화는 오랜 세월에 걸친 하나님의 연단의 손에 의해 가능했습니다. 인생의 어려운 고비에서 시련을 받고 계시는 분은 그 시련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를 연단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본문에서 말씀해 주시는 야곱의 믿음이란 요셉의 아들들에게 준 믿음의 축복기도를 말합니다. 야곱은 형 므낫세와 동생 에브라임에게 기도할 때 손을 어긋맞겨 기도했습니다. 오른손을 동생에게 올려놓고 기도한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옛날 자기처럼 형을 팥죽으로 기만하지도 않았고 아버지를 속이지도 아니했지만 야곱은 손자들에게 기도해 줄 때 동생에게 장자의 축복 기도를 해 준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믿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 야곱의 기도대로 에브라림은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다른 또하나의 야곱의 믿음은 그가 고센 땅에 온지 17년만에 자신의 주검이 가까이 왔을 때 자기 몸의 장사를 위해 애굽 땅에 매장하지 말고 조상의 무덤에 묻히기로 아들에게 맹세시킨 일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지팡이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하고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의 믿음이 드러났습니다.
결론 : 이삭의 인생에 비하여 야곱의 생애는 너무나도 험준하고 굴곡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야곱에게 반드시 그의 인생의 변화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생애에도 하나님의 손길에 의하여 야곱과 같은 우리들의 변화를 반드시 이루신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야곱의 인생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야곱의 인생을 배워 환도 뼈가 부러진 연후에 가서야 변화되는 그런 방법이 아니라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내 몸을 주님께 헌신하므로 야곱으로부터 이스라엘로 변화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145 \ 11:22
(73) 요셉의 믿음
(히브리서 11:22)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았고 또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몸종들을 첩으로 맞아 4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그들의 몸에서 나온 아들들이 12명으로 이들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야곱의 가장 큰사랑을 입고 있었던 아내 라헬의 아들로 태어났고 라헬은 요셉 밑으로 베냐민을 해산하다가 아기만 살고 어머니는 그만 죽었습니다.
1. 요셉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섭리
우리는 요셉의 생애에서 너무나도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뜻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요셉이란 사람의 일생은 완전히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의하여 이뤄진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의 온 생애를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뢰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요셉의 믿음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그에게 약속하셨는데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약속을 소망으로 삼고 그 소망을 믿음으로 그의 생애를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꿈이 있어야 합니다. 이 꿈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주신 꿈을 소망으로 삼고 하나님을 의뢰하여 자신의 인생을 살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 꿈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기 위해 요셉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믿고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요셉에게 어떻게 꿈을 이루게 하셨는가?
요셉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꿈은 곡식 단과 하늘의 별들에 관한 것으로 자기가 모든 형제들의 아비가 될 일과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가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형의 곡식 단들이 요셉에게 절을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들의 양식을 요셉이 먹일 일에 대한 것이며 하늘의 있는 형들의 12별들이 자기별에게 경배한 것은 요셉이 모든 형들 위에 뛰어난 왕이 될 것이란 꿈으로 하나님은 이런 꿈을 이루시기 위해 요셉의 온 생애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요셉에게 주신 꿈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으로 몇 번인가 주검을 초월한 위험한 시련을 겪게 하셨으며 유혹을 이 146 \ 11:22
기게 하시고 인내로 기다리게 하시는 방법을 통해서 그를 애굽의 바로 왕다움의 치리자로 삼으심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믿음의 생애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나의 모든 일은 내가 하려는 내 의도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임을 알고 그 일이 실패해도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어처구니없는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갔지만 낙심하거나 원망치 아니했습니다. 그가 그 오랜 감옥 생활 속에서도 모범적인 죄수 생활을 했으며 모든 사람에게 두터운 신망을 받았습니다. 요셉의 믿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그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는 요셉은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자기가 해야 할 바를 성실하게 했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잠16:3절에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요셉은 이런 신앙을 가지고 애굽에서 자신의 길을 오직 하나님께 의뢰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의 꿈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믿음에 대해서 그의 임종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날 것과 자기 해골에 대한 조치에 대하여 명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창50장에 마지막 절에 가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의 언약의 땅이 아닙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렸지만 그 땅이 영원한 도성이 아니고 하나님이 약속한 땅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가나안에 있음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정착하려고 하지 말고 이 땅을 떠나라고 명한 것입니다. 애굽에서 영광을 누리고 부요한 생애를 살아간다고 그곳에 소망을 두고 삶의 터전을 삼아서는 안됩니다.
요셉의 믿음은 견고하고 단호했습니다. 자신은 애굽에서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라가 큰 영광을 누렸지만 그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애굽 땅에서 살았지만 자신이 죽은 후, 그 해골만이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땅에 매장하리라고 결심하여 이스라엘에게 명한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이런 요셉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우리가 요셉의 생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만 하면 우리의 생애 주변의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147 \ 11:23-26
(74) 모세의 믿음
(히브리서 11:23-26)
본문에는 모세의 부모와 모세의 믿음이 나옵니다. 천하의 큰 흉년을 만나 야곱이 요셉을 따라 애굽에 왔을 때, 요셉의 식구까지 모두 70명이었는데 400년이 지나자 60만 명이 되었습니다. 그 후 요셉도 죽었고 요셉을 아는 애굽의 왕들도 죽었습니다. 애굽의 새로운 왕이 치리 할 때, 수효가 많아진 이스라엘 민족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게 되었고 아들을 낳을 수 없도록 법으로 조치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밀리에 아들들을 낳았고 슬기로운 이스라엘 산파들은 이스라엘 여자들의 생리적인 핑계를 대어 이스라엘 남자아이들을 살려내어 인구를 번식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 중에 레위족인 그랏의 아들 아므람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아 모세을 낳은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더 이상 집에서 키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넣어 강물에 떠내려가게 하므로 때마침 강가에서 목욕을 하든 바로의 딸 공주에게 발견되어 공주의 아들로 키우게 된 것입니다. 모세란 이름은 '물에서 건졌다'는 뜻으로 이 이름은 바로의 공주가 지어 준 이름입니다.
1. 모세의 믿음
모세는 어려서부터 유모로 젖을 먹였던 어머니로부터 자기가 이스라엘 사람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동족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루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예로 일하는 공사장에 갔다가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 사람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탄로가 나게 되어 애굽에서 도망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는 미디안 지방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목축업을 하고 있는 이드로의 집 머슴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도로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고 40여 년간을 목동 생활을 계속해 오다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모세의 믿음에 대해 24절 이하에서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란 칭함을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세상의 영광에 도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태어나게 하신 것은 그로 애굽의 왕이 되게 하시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를 통해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려는 뜻에서인 것입니다.
다음에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어떤 생활을 해야 하며 어떤 생애를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목적에 대하여 148 \ 11:23-26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낙은 잠깐동안만 지속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낙은 어떤 낙이든 죄악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낙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받게 되는 고난을 더 귀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을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일이란 사실입니다.
2.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
그런데 26절 말씀에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신 분은 여호와의 사자로 이 분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에는 비록 신약에서 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동행하시며 인도하시는 분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풀무불 속에 들어갔을 때 그 안에 또다른 한 명이 그들과 함께 거닐고 있었는데 그를 가리켜 신의 아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모세는 장차 될 일에 대한 예언에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날 메시야에 대하여 '나 같은 선지자'란 표현을 썼습니다. 모세는 이 때에 이미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하여 알고 있었으며 자신이 하는 그 모든 일이 오직 그 분을 위한 일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처럼 애굽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재물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을 더 기쁘게 여겼다고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다음 구절에 나와 있는 대로 '이는 상 주심을 바라보임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같은 모세의 믿음을 상기하시면서 마5:11절에서 이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모세는 눈앞에 있는 이 세상 상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늘에 예비된 더 나은 상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상을 바라본 것입니다.
결론 :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모세는 믿음을 가지고 그의 생애를 살아간 사람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모세와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상주시는 이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승리적인 생애를 살 수 있습니다.
149 \ 11:27-29
(75) 애굽을 떠나온 믿음
(히브리서 11:27-29)
27절부터 29절까지에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올 당시의 모세의 위대한 믿음을 몇 가지로 구분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을 떠나 올 때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유월절의 예를 정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다음에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넌 사실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1. 애굽을 떠난 담대한 믿음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 그는 이 소명을 기피하려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모세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애굽 땅에 정착하고 있는 이스라엘 벡상들을 설득하여 애굽을 떠나게 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노예로 부려먹고 있는 애굽 사람들의 손에서 빼내는 일은 더욱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시고 애굽에 있는 동족에게 가서 말하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시고 그 지팡이로 뱀이 되게 하시고 그의 손을 폼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문둥병이 발하게 하시는 등, 모세에게 이적의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담대한 믿음으로 애굽에 가서 바로 왕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바로 왕의 협박과 핍박을 견뎌내고 열 재앙의 이적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이끌어 낸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며 자기를 이스라엘의 인도자로 섭리하셨음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모든 일을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친구처럼 모세를 만나서 이야기 하셨으며 모세를 사람 앞에서 하나님처럼 높여 주셨습니다.
2.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서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왕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시고 결과적으로 열 번째 재앙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열 번째 재앙이 애굽에 사는 모든 가정의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유월절을 정하여 어린양을 잡아 그 피로 문 150 \ 11:27-29
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죽음의 천사가 피를 바른 집은 장자를 죽이지 않고 그냥 넘어가리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모세는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로 말씀대로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유월절을 지키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드렸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양을 잡아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대로 양의 피로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것입니다.
이로 애굽의 모든 장자들은 그날 밤 죽임을 당했지만 고센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를 유월절의 영원한 절기로 정한 것입니다. 이런 유월절의 예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을 때 제사제도가 생겨나게 되었고 이런 유월절의 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이루신 것입니다.
3. 홍해를 건넌 믿음
모세의 인도를 받고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주변에 장막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왕의 정예군이 이스라엘을 뒤쫓아 왔습니다.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바로 왕의 군대의 추격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이 두려운 일이 그들의 눈앞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으로 떨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모세를 원망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으로 말하기를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믿음을 보시고 모세에게 명하여 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홍해로 내밀게 하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지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바다를 믿음으로 건너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 군대는 갈라진 홍해 바다에 들어가 뒤쫓기는 했지만 그들은 물에 엄몰되어 죽었습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홍해를 건넜기 때문이지만 애굽 군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믿음의 근거도 없이 홍해를 건너다가 물이 수장되어 버린 것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내려집니다. 그 말씀을 근거로 순종할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결론 : 우리들의 생애에는 간혹 홍해를 건너가야 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무모하게 자기 생각대로 홍해를 건너가려다 간 애굽 군대처럼 홍해를 건너는 것이 아니라 그 물 속에 엄몰되어 수장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홍해를 만났을 때 믿음으로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51 \ 11:30-31
(76) 여리고 성을 함락한 믿음
(히브리서 11:30-31)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고 광야에 나오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가나안이 마주 보이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죽었습니다. 모세가 죽게 되자 모세의 시종으로 충성스럽게 일했던 여호수아가 모세를 대신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1. 여리고 성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들
여호수아가 당면한 처음 난관은 요단강을 건너는 일이었습니다. 이 강을 건너야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는데 때마침 강물이 창일하여 건너갈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을 앞세우고 요단강으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이 갈라지리라는 말씀을 따라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여리고 평야에 도착했습니다. 그 때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을 침공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높고 든든한 성문으로 굳게 닫혀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성을 통과해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축복이 클수록 관문이 높다는 사실을 가리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행로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가마득히 높이 솟은 여리고 성벽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느냐 아니면 여리고 성을 뚫고 지나가느냐 하는 문제가 가로놓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들로 여리고 성을 매일 한바퀴씩 6일간 돌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일해 째 되는 날에는 제사장들로 양각 나팔을 불게 하여 그 소리가 백성에게 들릴 때는 백성들은 큰소리로 고함을 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방법을 바라볼 때 인간의 지혜나 지식이나 경험으로는 너무나도 어리석고 미련스러운 방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능력을 나타나실 때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어리석은 방법을 쓰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심으로 인간 스스로를 의지하는 자들로 멸망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전1:21절에서 이르시기를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셨는데 이런 방법을 쓰시는 이유는 인간의 지혜나 지식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하는가의 여부를 보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매일 그 성 주위를 일곱 번 152 \ 11:30-31
씩 돌고 다닐 때 여리고 성벽에서 이런 괴이한 행동을 본 여리고 사람들은 얼마나 우습게 여겼을 것입니까? 그러나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높고 높은 여리고 성이 일시에 와르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위대한 믿음은 어디서 옵니까? 위대한 순종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은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할 때 약속하신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2. 라합의 믿음
그런데 여리고 성이 무너져서 여리고 성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전부 멸절을 당할 때 오직 그 가운데서 구원을 받은 한 사람과 그의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가 라합이란 기생이요 그 기생의 가족들입니다. 그러므로 31절에서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정탐꾼 두 명을 성안에 들여보냈습니다.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에 몰래 들어가 정탐할 때 기생 라합의 집에 몰래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탄로되어 정탐꾼들이 사로잡히게 되었을 때 라합은 거짓말로 왕을 속여 도망치게 했습니다.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 둔 지붕 위에 올라가 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점령했을 때, 자기와 자기 가족의 생명을 구원해 줄 것을 맹세시킨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라합의 믿음을 보면 라합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여리고 성을 점령하게 하시고 이스라엘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라합은 조만 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점령하여 그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여리고 사람들을 죽일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하여 상천 하지에 한 분 뿐이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이 능히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떨었습니다. 라합은 자기들 가족들이 살 수 있는 증표를 요구하게 되었는데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이르기를 창문에 붉은 줄을 매고 모든 가족을 다 그 집에 모으되 집 문밖에 나가는 자의 생명은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약속했습니다. 라합이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살린 것은 이 같은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라합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그의 생명을 보장하신 것입니다.
결론 : 라합은 자기 집에 곧 붉은 줄을 달았습니다. 이것이 구원을 얻는 언약의 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표징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표징을 라합처럼 우리 가정에 매달아 놔야 합니다. 온 가족이 이 언약의 집에서 한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153 \ 11:32
(77) 기드온의 믿음
(히브리서 11:32)
32절에는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의 이스라엘의 믿음의 선진으로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등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에 대해서는 히브리서를 쓴 기자의 시간 관계상 생략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기드온의 믿음의 행적은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사기는 사사들의 한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기나안에 들어온 후,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죽게 되자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등장할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재판을 맡아 처리하고 외적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싸운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사사들입니다.
1. 이스라엘의 사사들
사사는 제사장들처럼 성별된 지파 중에서 선출된 사람이 아니라 그 때 그 때 하나님의 뜻에 의해 쓰여진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온 후에도 툭하면 하나님을 떠나 이방 신을 섬김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하시는 수단으로 외적을 끌어들여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 전쟁에서 그들로 번번이 참패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사를 세워 이방인에게서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면서 그 주변의 이방인들과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이방인들에게는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었는데 그들의 신은 모두가 우상들로 이들 신들을 섬기므로 우상을 숭배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들의 신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그들이 전쟁에 이기거나 농사가 잘 되었을 때 그런 일이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강한 분이라고 여기게 되어 그 신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에 이방 신상을 세우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2. 기드온의 믿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드온은 여룹바알이란 이름을 가진 요아스의 아들입니다. 기드온 시대의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로 하나님께 등을 돌렸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멜렉 사람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침공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자 그들은 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 154 \ 11:32
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뜨거워지셔서 기드온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그 사자를 기드온에게 보내셨습니다. 하루는 기드온이 포도주 틀에서 일하고 있는데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 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기드온의 아버지 여아스는 아세라 신상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읍 사람들이 섬기는 아세라 신상 곁에 하나님의 단을 쌓고 밤중에 아세라 신상을 헐고 그 우상을 도끼로 찍어 그 나무를 가지고 송아지를 번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일로 온 성읍 사람들이 소동하여 기드안의 소행이니 우리가 그를 죽이겠다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미디안 사람, 아멜렉 사람, 동방 사람들이 큰 연합군을 이루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이스라엘 골짜기에 진을 쳤습니다.
이 때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력하게 임하셨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후, 소명과 승리를 확신하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기 위해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하게 되었습니다. (양털 한 뭉치) 이런 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진 기드온은 32.000명의 군사를 데리고 기르앗 산에 집결했습니다. 적군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군대의 수효가 많으니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300명만 따로 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미디안의 군사들은 메뚜기 떼같이 중다했고 약대의 수효만도 해변의 모래의 수다함 같았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기드온은 부라란 이름의 부하를 데리고 몰래 미디안 진영으로 정탐을 갔습니다. 그 때 기드온은 적군의 진영 안에서 미디안 군사들끼리의 은밀한 대화를 듣게 되었습니다. 대화의 내용인즉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들어 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 보리떡이 그 장막을 쳐서 무너뜨려 쓰러뜨렸는데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부치셨느니라'는 꿈이야기와 해몽까지 듣게 딘 것입니다.
이 같은 미디안 군사들간의 이야기를 들은 미디안은 하나님이 미디안 군대를 자기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은 것입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들로 둘로 나뉘게 하여 항아리에 횃불을 숨기게 하고 나팔 소리가 들려 오면 항아리를 부수면서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요 하면서 적군의 무리를 공격하라고 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그들로 자기들끼리 싸우게 하여 칼날로 서로 죽이게 하고 도망가는 적의 무리들을 쫓아가 섬멸한 것입니다.
결론 : 구원은 하나님의 권능에 있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실 하나님만을 믿고 그 하나님만 의뢰하면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 주십니다. 승리는 수효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55 \ 11:32
(78) 바락과 삼손의 믿음
(히브리서 11:32)
오늘은 바락과 삼손의 믿음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락은 이스라엘의 네 번째 사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사사로 맨 먼저 세운 인물은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었습니다. 삿3장에 있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시려고 그 주변에 몇몇 나라들을 멸하지 아니하시고 남겨 두셨다고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 가나안 사람, 시돈 사람, 히위 사람 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이스라엘이 과연 그들의 열조들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가의 여부를 알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이들 이방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로 삼고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며 그런 연대 관계로 인하여 결국 그들의 신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1. 사사를 세우신 하나님과 바락의 믿음
이처럼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여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겼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이웃 나라들의 침공을 받게 하며 그들의 압제를 받아 고통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중에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 왔을 때 하나님은 사사를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맨 먼저 세움을 받은 사사가 옷니엘이며 그 후에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입니다. 에훗이 모압 왕 에글론을 죽인 후, 이스라엘은 80여 년간 태평한 세월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에훗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또 하나님께 불의를 행하여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지배아래 20년간 고통을 당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또 부르짖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여 선지 드보라를 세우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재판을 맡게 하셨습니다.
드보라는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불러 그에게 야빈 왕의 군대를 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바락은 드보라로부터 하나님의 명하시는 말씀을 듣고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쟁터인 다볼 산으로 간 것입니다. 바락은 적은 군사를 가지고 강력한 야빈의 군대를 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어 하나님께서 바락 앞에서 가나안의 온 군대를 칼날로 쳐 멸하게 하신 것입니다.
2. 삼손의 믿음
다음에 삼손의 믿음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사 중 가장 유명한 사사를 든다면 삼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40 년간이나 이스라엘을 괴롭힐 때 단 지파의 마노아라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삼손은 20여년간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으면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웠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과의 싸움은 이방 여인과의 결혼에서 발단됩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으로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게 하심으로 불레셋 사람을 치실 계획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삼손의 담대함과 그의 괴력에 가까운 놀라운 힘은 블레셋 사람들을 치시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능력이셨습니다. 하루는 그가 딤나의 포도원을 지나칠 때 사자와 마주친 일이 있었습니다. 사자는 삼손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덤벼들었습니다. 삼손이 이 때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 사자와 싸울 때 손에 아무 것도 든 것이 없이 그 사자를 염소새끼 찢듯 찢었습니다.
하루는 자기를 위해 처가 집에 마련된 피로연에서 블레셋 청년들에게 수수께끼를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수수께끼가 블레셋 청년들의 간교한 협박으로 인하여 탄로 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삼손은 여우 300마리를 잡아 서로 꼬리끼리 연결시킨 후, 그 꼬리 사이에 횃불을 달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을 불태워 그들의 노여움을 샀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겨줄 때, 삼손은 든든한 밧줄에 묶여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임하시매 그는 결박을 불탄 삼과 같이 끊고 주위에 있는 나귀뼈다귀를 취하여 그 뼈로 1천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그 후, 삼손은 아내로 얻은 들리라에 의해 블레셋 사람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의 신전에서 성대한 행사를 할 때 노리개로 끌려가 재롱을 부리게 되었습니다. 이 때 삼손은 자기를 이끄는 소년의 손을 의지하여 신전을 버티고 서 있는 기둥 사이에 의지하고 섰습니다. 그 신전 안에는 방백들, 지도자급 인사들만 모여 있고 지붕에 있는 자들만도 3.000명이 넘는 많은 수효였습니다. 여기서 삼손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소서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들에게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갚게 하옵소서' 기둥을 좌우로 껴안고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부르짖으면서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니 그 큰 신전이 일시에 무너져 그 가운데 있는 블레셋 사람들이 모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결론 : 삼손은 하나님을 의뢰하므로 나귀 뼈로 천명을 죽였습니다. 삼손은 담대하여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최선을 다해 싸웠습니다. 삼손은 이방 여인에게 가까이하여 실패한 생애를 보냈지만 그러나 그는 어려운 고비마다 자신의 생명을 던져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는 그의 일사 각오의 믿음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삼손의 위대한 믿음의 징표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157 \ 11:32
(79) 입다의 믿음
(히브리서 11:32)
입다라는 사람은 성경에서 하나님께 잘못 서원하므로 귀중한 딸을 제물로 드리게 된 이스라엘의 사사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비록 그가 어리석은 서원으로 그의 생애에 큰 비극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아름답고 소중한 믿음을 보여 믿음의 선진 대열에 들게 된 믿음의 사람입니다.
1. 입다의 출생과 나라 형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랑의 보답을 악으로 나타내곤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평안하게 살게 하시면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는 우매한 생활을 되풀이하곤 했습니다. 바알이라고 하는 태양신을 섬기고, 아스다롯이라고 하는 아세라 여신을 섬기며, 모압의 신, 아람의 신, 암몬 자손의 신, 블레셋 사람의 심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뒷전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이스라엘을 포기하시거나 그들의 생각대로 맡겨 두시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암몬 자손의 손에 맡기시어 18년간이나 학대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 같은 어려움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매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입다를 그들의 사사로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암몬 자손의 손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원래가 입다는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그 본처 자식들에게 쫓겨나 아버지의 기업조차 누리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입다는 어려서부터 용맹스러운 용사였습니다. 그의 용맹을 잘 알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돕 땅으로 입다를 찾아가 이스라엘의 장관이 되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입다는 자기가 암몬 자손과 싸워 승리하면 이스라엘의 어른이 될 것을 약속 받고 이스라엘의 장관이 되었습니다.
2. 입다의 믿음
입다는 미스바로 가서 하나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아뢰었습니다. 이처럼 입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입다는 하나님을 믿고 원수의 무리와 싸우니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므로 이스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20 성읍을 치고 그들의 군대를 모두 죽이고 항복을 받아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입다의 훌륭한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의 믿음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용감히 싸 158 \ 11:32
웠습니다. 그리고 입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적군을 물리쳐 암몬 자손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입다의 또다른 하나의 믿음은 그가 하나님께 서원한 서원을 큰 대가를 치르면서도 서원 한대로 이행했다는 사실입니다. 입다는 암몬 자손과 싸우러 나가면서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고 서원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전쟁에 이기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누가 그를 맞이했는가 하면 그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면서 밖으로 나와 아버지를 영접한 것입니다. 입다는 이 같은 장면을 바라보면서 가슴을 쳤습니다. 입다는 서원대로 딸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입다의 서원을 생각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어려운 서원을 이행했다는 그의 믿음입니다. 민30:2절 말씀에는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으면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전5:4절 말씀을 보면 '네가 하나님께 서 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 서원한 것은 갚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시15:4절에는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갚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서원은 한 마디로 경망스러운 서원이었습니다. 자기를 영접할 자라면 집에 거하는 식구임에 틀림없을 것인데 사람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다고 한 서원은 경망스러운 서원이며 자기 아들이나 딸을 불로 태워 우상에게 드렸던 이방인들의 제사를 본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서원을 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비록 서원한 것이라도 자기 딸을 제물로 드리는 서원을 받으실 리 없는 것입니다. 입다는 차라리 자신의 경솔한 서원을 회개하고 하나님이 내리실 징계를 기다렸어야 했습니다.
처음 주님을 영접하고 은혜를 받았을 때, 시집을 안가고 처녀로 살겠다는 서원을 하는 일,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처럼 감당치도 못할 일을 서원하는 일은 삼가야 하며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고 올바른 신앙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결론 : 롬12:3절 말씀에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특별한 서원이 없을지라도 순종의 생활을 통해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159 \ 11:32
(80) 다윗의 믿음
(히브리서 11:32)
다윗이란 인물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그리고 이 왕은 예수님의 족보상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며 메시야의 계보와 왕권에 있어서 빠트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다윗이란 이름은 '사랑스러운 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새의 여덟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BC 1.000년부터 960년 사이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었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나이가 자랄 때까지 아버지 집에서 양을 치는 목동으로 일해 왔습니다. 그는 선천적으로 용감하고 신앙적으로 대담한 소년이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칠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양 새끼를 움켜 가면 좇아가 입에 있는 양의 새끼를 빼앗고 짐승이 덤비면 그 짐승의 수염을 잡아 동댕이쳐 죽이곤 했습니다.
1.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다윗
다윗이 아버지 집에서 목동으로 일하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다윗의 아비 이새의 집에 보내시어 그 형제 중에서 한 아이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들을 하나씩 불러 드리는데 처음에 큰아들 엘리압이 들어 왔습니다. 사무엘이 그를 보니 인물이 출중하고 과연 왕의 제목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부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둘째 아들 아비나답도 아니었습니다. 셋째 삼마도 불합격이었습니다. 7째까지 지나가게 했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또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새의 말이 '아직 말 째가 있는데 그는 양을 치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사무엘은 그 말 째를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가 다윗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날 이후로 하나님의 신이 다윗에게 크게 감동하였다고 했습니다.
2. 다윗의 믿음
다윗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의 기사가 수도 없이 많지만 여기서는 네 가지로 간단히 추려 보겠습니다.
(1) 첫째는 어린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보여준 믿음입니다. 다윗이 아직 목동으로 아버지 목장에서 일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을 때 이웃의 강대국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군대를 모아 에베스 담밈에 진을 쳤습니다. 블레셋 군에는 골리앗이라고 하는 유명한 거인 장수가 있 160 \ 11:32
었는데 이 자가 이스라엘 진앞에 나타나 싸움을 걸어오는 날이면 이스라엘 군사들은 혼줄이 나서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골리앗은 키가 2.7미터, 입은 갑옷의 무개는 1.200근 놋으로 만든 단창을 메었는데 창자루는 베틀 같고 창과 칼에 사용된 철의 무게만도 140근이었습니다.
이 때 이새가 다윗에게 전쟁터에서 자기 형들에게 먹일 도시락을 싸서 엘리 골짜기로 보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진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골리앗이 나타나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있었으며 이스라엘 진영은 두려워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 앞에 나가 '왕은 낙망치 마소서 주의 종이 나가 싸우리라'고 말하면서 왕이 허락해 줄 것을 청원했습니다. 다윗은 왕이 준 갑옷과 창을 벗어 던지고 개울가에 내려가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취하고 손에 몰매를 잡고 골리앗에게 다가갔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향하여 '나는 칼과 창과 단검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하나님께서 너를 내 손에 부치시리니 내가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새와 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게 하겠고 또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창과 칼에 있지 아니함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고 외치면서 몰매로 골리앗을 향하여 던지니 그 돌이 골리앗의 이마 중간에 박혀 땅에 쓰러트린 것입니다.
(2) 다음에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의 용맹과 신망에 시기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여러 번 시도했습니다. 하루는 다윗을 잡으려고 깊은 골짜기로 좇아가다가 다윗이 들어가 숨어 있는 굴속에 들어가 혼자 잠을 잔 일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때 얼마든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었지만 다윗은 사울 왕의 옷자락 베는 것까지 두려워하면서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치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바라'하여 자기 군사들에게도 사울을 죽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3) 그리고 다윗은 회개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이 암몬 사람들과 싸울 때 어느 날 저녁 왕궁을 거닐다가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보고 그를 데려다가 동침했습니다. 그는 그 후 그의 남편까지 죽이고 밧세바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이에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나타나 이 일을 책망했을 때 다윗은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 그의 회개에 대하여 시편에서는 눈물이 요를 적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다윗 왕을 용서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결론 : 다윗은 수욕을 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 왕이 왕위를 압살롬에게 빼앗기고 도망 갈 때 시므이라는 자가 다윗 왕을 저주했지만 부하들로 그 자를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기를 불쌍히 보아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믿음은 우리들의 믿음의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161 \ 11:32
(81) 사무엘의 믿음
(히브리서 11:32)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오늘 믿음의 선진으로 등장하는 사무엘입니다. 이스라엘에 지도자가 없어 나라가 위경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레로 준비하시고 이스라엘에 보내신 사사겸 선지자겸 제사장이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이 태어날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선지자도 없었고 제사장도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으며 백성들은 다 방자하게도 여호와 하나님을 멀리 하고 이방신을 섬기는 그런 어려운 난국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 때 제사장은 엘리였는데 그 아버지의 대를 이어 제사장이 될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불량하기 짝이 없는 위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사무엘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태어난 것입니다.
1. 사무엘의 성장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가 하나님께 서원하여 응답으로 받은 아들입니다. 이 사무엘은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믿음으로 구원한 사람입니다.
(1) 사무엘은 하나님의 예정된 제사장으로 태어났습니다. 사무엘이 아직 어렸을 때,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에게 네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 삼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사무엘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집에서 자라났으며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잠을 잤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이 휘귀한 시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상을 보게 된 것은 그가 여호와의 전에서 떠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나실인답게 성별된 생활을 했습니다. 나실인이란 나면서부터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독주와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시는 생활로 하나님께 특별히 바치는 성별 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삼손도 나실인었지만 그는 나실인다운 생활을 못하여 실패하였고 사무엘은 성별된 생활을 이루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이 자라나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로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 삼으시려고 엘리의 집안을 심판하시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블레셋 군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크게 패하자 이스라엘은 홉니와 비느하스를 앞세워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그들은 블레셋 군대에게 패하게 되었고 언약궤마저 빼앗겼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이 전쟁에서 죽었고 이 소식을 듣게 된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서 자빠져 머리가 부러져 죽었습니다.
162 \ 11:32
2. 미스바의 역사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제사장 자리에 앉게 되자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로 미스바로 모이게 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스라엘이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쳤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참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길이 이스라엘이 살 수 있는 길임을 강조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되 진심으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진심으로 돌아오란 말은 마음을 오직 하나님께만 행하라는 뜻입니다.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갈라져서는 안됩니다. 사업이나 가족 때문에 갈라져도 안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은 모든 일에 우선하여 그 마음이 전심으로 하나님께만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고 했습니다. 이방신을 제하라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께만 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눈이 위로 향할 때 소망이 있습니다. 평강이 있습니다.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을 받는 비결은 '그만 섬기라'는 이 한 마디에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두 미스바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미스바에 모여 금식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이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아뢴 기도 내용이 삼상7:6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고 하는 회개 기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구해야 할 일은 그들의 범한 죄에 대한 사유에 있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진노가 가시고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하나님께 온전한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그리스도인의 헌신적인 생활을 의미합니다. 죄를 자복했으면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결정적인 믿음은 이스라엘이 맞은 최대의 위기에서 나타났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맨손 뿐이요 오합지졸인 이스라엘을 단번에 결판을 내려고 싸움을 걸어 왔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여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결론 :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홍해에서 갈팡질팡하는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은 이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여호와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처럼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63 \ 11:33-40
(82)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의 행적
(히브리서 11:33-40)
33절부터 40절까지는 아직까지 언급한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의 행적에 따른 고난과 승리의 삶에 대한 기록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신앙이 얼마나 위대했는가에 대한 증거를 보여 주고 있으며 이런 귀한 믿음을 위해 그들이 당한 고난의 생애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증거는 받았으나 약속은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1.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의 행적
33절에서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나라들을 이기기도 했다는 말은 여호수아를 비롯하여 역대의 위대한 사사들이나 왕들에 의해 이스라엘의 땅이 넓혀졌으며 국위가 널리 선양된 것을 의미합니다. 의를 행했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사사들이나 제사장들이나 왕들의 의롭고 정의로운 통치를 말합니다.
약속을 받기도 했다는 말은 39절에서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씀과 상반되는 것 같으나 믿음의 선진들이 받은 약속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언약한 개인적이며 국가적인 문제에 대한 약속을 의미하고 39절의 '약속을 받지 못했다'는 약속은 종말론적인 약속으로 최종적으로 생명을 얻어 영생하는 부활이나 천국에 대한 약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인류의 종말에 받을 것이며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대 앞에서 받게 될 것입니다. 사자들의 입을 막은 일은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사자들의 입을 봉한 사건을 의미해 줍니다.
불의 세력을 멸한 일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왕의 신상에 경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극렬히 타는 불 풀무 속에 들어갔으나 하나님의 권능으로 승리한 사건을 말합니다. 이들 믿음의 위대한 사람들은 또한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한 것입니다.
2.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해 생명을 버린 믿음의 사람들
그런데 우리는 35절 이하의 말씀에서 부활과 더 좋은 부활에 관한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이 부활은 실인즉 부활이라고 말하기엔 미흡한 사건입니다. 왜냐 하면 여기에 언급한 부활자들은 그 후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자들이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은 사건은 사르밧 과부의 경우 엘리야가 살려주었고 수넴 여인의 경우 엘시 164 \ 11:33-40
사가 살려 주었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과 나사로의 경우, 예수님이 관과 무덤에서 살려 내셨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여자들에게 돌아갔으나 사실인즉 그들은 다시 죽어 무덤에 장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부활의 한 그림자일 뿐 부활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을 보면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라고 했습니다. 부활로 받았다는 말과 부활을 얻고자 했다는 말은 다른 말입니다. 하나는 현재 받은 상태를 말하고 하나는 앞으로 받을 것을 소망으로 바라본 것을 말합니다. 더 좋은 부활이라고 한 말은 방금 전에 여자들이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표현한 말이 아닙니다. 더 좋은 부활이란 부활의 상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한 가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15장에서 바울은 부활의 형체는 여러 가지라고 말씀해 줍니다.
하늘에서 장차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상급은 부활의 상급을 의미합니다. 부활은 모두 영광스럽지만 그 등급이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부활은 주님의 부활입니다. 주님은 이 부활로 최고의 영광을 누리셨는데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으며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인이 누릴 최고의 부활은 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자에게 주시는 첫째 부할의 상급입니다. 더 좋은 부활이란 이 첫째 부활자가 받을 영광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이들은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는 축복을 누리게 되며 천국에서도 세세토록 왕 노릇 하는 축복을 받아 누릴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이 같은 부활을 바라보고 주님을 위해 그의 생명을 바치는 일에 조금도 주저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35절로 3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38절 말씀을 보면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이런 사람을 이겨낼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39절과 40절 말씀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켜 주는 연결고리가 되는 매우 중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들은 증거는 받았지만 약속은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는 약속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약속으로 이 약속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으로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도 받은 사람들이요 증거도 가진 사람들로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이들 구약 시대의 믿음의 선진들보다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의 은혜를 말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나 옛날의 믿음의 선진들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분명한 약속을 받았으니 그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영광의 그날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65 \ 12:1-2
(83) 벗어버려야 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
(히브리서 12:1-2)
11장에서 믿음의 선진들의 위대한 신앙의 행적을 살핀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사실들을 그들 신앙인 들의 뒤를 따라 갈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생활에 대한 교훈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는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을 경주와 연결시켜 11장의 믿음의 선배들과 한 경주장을 달린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그런 경주를 제대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 경주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바가 두 가지 있는데 이 경주를 방해하는 요소가 바로 우리의 몸을 지배하는 죄악이라는 사실과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은 우리를 얽매이게 하고 믿음의 경주장을 달리는 일에 결정적으로 장애 요소가 되는 이 죄를 친히 다스리시기 위해 징계를 내리시며 이 징계의 결과 우리는 그 경주를 끝까지 달릴 수 있다고 하는 징계의 유익에 대해 누누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우리 앞에 당한 경주
1절에서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달려가는 믿음의 생애는 외로운 투쟁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증거도 증인도 없는 허공을 달리는 무익한 경주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허다한 증인들은 우리의 믿음의 생활에 증거로 세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이 걸어간 믿음의 생애를 본받는 일은 결코 허무한 일이 아니며 부끄러울 일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는 일에 벗어버려야 할 일과 바라보아야 할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함에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요일2:15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우리의 발목이 세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롯의 시대나 노아의 시대 사람들이 이런 생활을 했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우리 주님께서 경종하신 것입니다. 롯의 아내는 세상 것을 사랑하는 나머지 뒤를 돌아보다가 구원의 결정적인 자리에서 소금기둥으로 굳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은 우리의 경주를 달리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을 찾기 166 \ 12:1-2
위해 주님을 찾아 나온 한 부자 청년은 그의 재물이 그에게 무서운 짐이 되어 근심하며 주님을 떠났습니다.
2.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다음에 벗어버려야 할 것이 '얽매이기 쉬운 것'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 대상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말씀했습니다. 얽매인다는 말은 얽어매어 그 자리에서 빠져 나올 수 없도록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바로 죄가 그런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날 우리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죄가 시키는 대로 끌려 다녔습니다. 죄가 명하는 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 죄의 종의 자리에서 벗어났으며 죄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멀리 떠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배했던 죄의 권세는 사라졌지만 죄의 세력은 우리의 육신의 정욕과 탐심 가운데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들로 믿음의 경주를 하지 못하게 그 가운데 얽매이게 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끌고 가지 못합니다. 죄는 우리를 지옥으로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그런 권세는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우리들에게서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부려먹을 권세는 분명 상실하여 종이 호랑이가 되었지만 먹지 못할 곶감 찔러나 본다는 격으로 신앙 생활의 방해꾼으로 우리 주변을 맴돌면서 우리의 경주에 걸림돌 구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죄의 함정에 빠져 그 가운데 얽매인바 되면 더 이상 경주를 계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벗어버리는 일에 대하여 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죄는 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죄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굴복할 사람들이 아니요 죄와 더불어 맞서 싸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이미 결정된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싸워 이길 수 있는 권세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죄를 대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경주장을 달려야 할 경주자들입니다. 이 경주장의 목표는 주님이 계시는 천국입니다. 우리의 소망의 완성을 이루는 그 나라에 가기까지 이 경주를 달리려면 먼저 세상 것으로 무거운 짐이 된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과 우리를 얽매이게 하여 이 경주장의 경주를 방해하는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벗어버리고 이 경주에 끝까지 달려가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67 \ 12:1-2
(84)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히브리서 12:1-2)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는 1절에서 우리 앞에 당한 믿음의 경주를 위해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경주해야 할 것을 말씀해 주고 2절에서 우리가 이처럼 달려갈 믿음의 경주의 목표점에 대하여 밝히고 있습니다. 경주에는 분명한 목표지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목표가 잘못됐다면 아무리 잘 달려가도 그 경주는 허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1.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
히브리서 기자는 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적 경주의 목표를 예수께 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경주의 목표로 삼고 달려가려면 그 분이 달려가신 길을 따라 가야 할 것임을 밝히면서 그가 걸으셨던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믿음의 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란 단어는 지배한다는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믿음을 지배하는 분으로 우리의 믿음은 오직 그 분에게만 있다는 뜻입니다. 선진들이 증거와 실상으로 삼고 달려온 믿음도 그 분께 목표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목표도 그 분께만 있는 것입니다. 다른 존재를 목표로 삼고 경주한다면 그 경주는 올바른 믿음의 경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진리로 오신 분이시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분 예수를 우리의 믿음의 주로 삼는다면 우리의 생애는 오직 그 분만을 위한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10:37절에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2. 온전케 하시는 분이신 예수님
다음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온전케 하신다는 말은 자기 스스로의 온전을 의미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분을 믿는 사람들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그 분을 왜 믿는 것입니까?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168 \ 12:1-2
예수는 우리의 죄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죄를 단번에 없이해 주셨습니다. 그의 피는 우리의 죄를 소멸하셨을 뿐 아니라 영원히 말소해 주시므로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구원을 온전케 하시는 분입니다. 히7:25절에서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분을 믿는 일은 이미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들을 보장받는 일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요5:2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이 분 예수만이 홀로 믿음의 주가 되십니다. 이 분 외에는 다른 어떤 믿음의 주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행4:12절에서 베드로가 말하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 분만이 우리의 믿음의 경주의 목표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계속되는 말씀에서 이 분 예수가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고 우리도 그 분을 본 받아 믿음의 경주장을 달리는 일에 장애 되는 모든 어려움을 인내로써 이겨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않으셨느니라.' 아멘. 예수님이 바라보신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란 물론 이 일을 감당하심으로 얻으신 그의 말할 수 없는 영광을 가리킵니다. 이 일에 대해 빌2:6절 이하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 6 - 11).
예수님은 이런 영광을 바라보시면서 그가 당하실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는 말은 부끄러움을 부끄럽다고 마음에 새기지 아니했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선진들도 그들이 겪은 시련과 핍박을 개의치 않았던 것입니다. 히11:35절에서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마5:11-12절에서 하신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결론 :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이 분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경주장을 달려가되 그 분이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시며 십자가의 부끄러움까지도 개의치 않으신 그 믿음을 본 받아 그 분과 함께 누릴 영광을 소망으로 바라보면서 끝까지 인내로써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169 \ 12:3-4
(85)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12:3-4)
3절부터는 목표점을 향하여 달려가야 할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생애에 대하여 인내로써 승리하기 위해 우리의 믿음의 주시며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본으로 삼으라는 권면의 말씀으로 교훈해 주십니다. 이 일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씀해 주시는데 하나는 죄와 싸우는 일이요, 하나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일입니다.
1.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 생애 달려갈 경주장은 우리의 삶에 피곤을 주며 낙심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일들을 만나게 합니다. 우리가 악과 더불어 싸울 때 그 싸움의 기간이 길고 상대방이 악랄할 때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피곤에 지치게 되는 경우를 많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오는 모든 어려움을 인내로 참으셨습니다. 2절에서 이 일에 대하여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경주장을 달려가면서 우리 앞에 부닥치는 이런 난관들을 만났을 때 이 분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그 분이 겪으신 고난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가 종의 형체로 세상에 오신 일, 그가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이에게 죽도록 충성하신 일, 십자가에서 겪으신 그의 괴로움은 우리로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해 본으로 보여 주신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들이 이겨야 할 악의 세력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평안한 중에 주님 앞에 이르기를 바라는 생활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애에는 고난과 시련과 징계와 핍박이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럴 때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하며 또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은 우리의 생애 중에 주를 위해 받는 고난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늘에서 받는 상급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11:35절에서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70 \ 12:3-4
이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대가가 클수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로부터 받는 즐거움과 기쁨이 더욱 큰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놀랄 만한 상급을 준비하시고 우리에게 그 영광에 동참케 하시기 위해 약간의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롬8:17절에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후4:17절에서는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받을 영광에는 이 땅에서의 고난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하고 만날 때마다 피곤하여 낙심될 그런 시기에도 결코 좌절하지 말고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 예수를 생각하므로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피 흘리기까지란 말은 순교의 자리에 이르기까지란 뜻입니다. 히브리서를 받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르기를 그들이 악의 세력에 의해 많은 시련과 연단을 받고 핍박 가운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러나 아직 피를 흘리는 순교의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는 말로 힘을 내라고 격려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1장에서 거론한 믿음의 선진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고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인내로써 끝까지 싸울 것을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에 나오는 죄와 싸운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밖으로부터 오는 죄와의 싸움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는 우리의 안에서 우리를 찌르고 우리의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요인이 되는 죄를 말합니다. 이런 죄와의 싸움에도 게을리 하면 안돼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달려가야 할 믿음의 경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달려가야 할 경주입니다. 이 경주의 낙오자가 된다면 우리의 소망은 허사가 되며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은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경주장에서 만나는 이 같은 고난을 인내로써 견디고 이기려면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신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171 \ 12:5-13
(86) 참 아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징계
(히브리서 12:5-13)
5절부터는 하나님의 징계의 유익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징계가 그리스도인들을 온전케 하는 일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하여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징계가 없이는 믿음의 경주장을 달리는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또 징계를 받을 때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하여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히12장에 징계에 관한 문제가 제기된 일은 이 글을 받아 읽는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서 많은 시련을 받고 있으며 또 낙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은 고난이나 시련은 믿음의 경주에 유익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밝혀 주면서 힘을 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는 징계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의 채찍을 맞는 징계와 우리의 육적 사람을 벗게 하시며 영적인 결실을 맺게 하시기 위해 내리시는 훈련으로서의 징계가 있습니다. 어느 것이건 징계는 아버지와 자식간의 올바른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징계를 받을 때 이것을 올바로 받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주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때 그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경히 여긴다는 말은 징계를 징계로 여기지 않거나 자신에게 온 어려운 일에 불만을 품는 일을 말합니다. 노아 홍수 시,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은 홍수로 물에 빠져 죽으면서도 그 일이 하나님의 심판인줄 인정치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어려운 일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징계인줄 모르면 사람이 회개할 수 없고 오히려 불만을 토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꾸지람도 징계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럴 때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 말대로 징계로 나타납니다. 혹은 병으로 혹은 실패로 혹은 고난으로 혹은 시험으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징계는 우선 우리의 생애에 괴로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든 낙심은 금물입니다. 낙심은 우리의 신앙을 퇴보시키며 침륜에 빠지게 할 뿐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172 \ 12:5-13
2. 징계를 받는 태도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징계를 받을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징계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참 아들들에게만 내리신다는 사실과 징계는 아들의 유익을 위해 필수적이란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비가 자기 아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일에 대하여 징계가 없다면 그 아들은 버리운 자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징계를 받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된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로부터도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징계 없이 장성한 아들이 어디 있을 것입니까? 하물며 영의 아버지께서 어찌 징계가 없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영의 아버지의 징계가 육의 아버지의 징계보다 우선하는 이유는 육신의 아버지는 자기 뜻대로 하는 징계지만 영의 아버지는 우리의 참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기 위해,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과 하늘의 상급을 위해 주시는 징계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9절 말씀에서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에게 있는 나쁜 습성을 고치고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한 채찍으로 내리시기 때문에 육의 사람이 죽고 영의 사람으로 열매를 맺기까지 오랜 기간 지속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참음으로 이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11절에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징계는 채찍이기 때문에 쓴 것입니다. 징계를 즐겁다고 여길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받을 당시에는 슬펴 보입니다. 슬퍼 보인다는 말은 쓰게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얻어맞는 일이기 때문에 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한 것입니다. 연달한 자란 익숙하게 단련 받은 자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연달하기 까지엔 많은 징계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의의 열매는 저절로 맺어지는 게 아닙니다. 징계로 연달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12절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은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좌절되고 소진된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일으키는 일은 징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13절에 나오는 말씀 중에 저는 다리란 마음의 동요로 흔들리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흔들리는 발을 똑바로 세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라는 뜻입니다.
173 \ 12:14
(87) 화평을 좇으라
(히브리서 12:14)
우리는 14절에 나오는 말씀에서 우리의 신앙 생활에 나타나는 열매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목표에 비하여 얼마나 미약한가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움을 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를 보지 못하리란 말씀은 구원에 절망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은 왜 화평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고전14:33절에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화평의 반대말은 어지러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지러움은 질서가 파괴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화평이 없는 사회는 무질서의 사회이기 때문에 분쟁이 생기고 싸움이 생기고 전쟁이 일어납니다. 결국 인류에게 파멸을 주는 것입니다.
화평에 대하여 주님은 마5: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화평의 범위에 대해서 롬12:18절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화평은 어떻게 하는가.
화평의 결과는 화목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원수들과의 화평을 통해서 우리에게 화평을 이루는 일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원수들과의 화평을 위해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과의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 종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사랑과 겸손을 말합니다. 사랑과 겸손이 없이는 어떤 화평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원수와의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롬5: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라고 했습니다. 화평은 상대방이 어떤 형편에 있던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74 \ 12:14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인들과의 화평을 이루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성도들간의 화평이 없으면 질시와 투기가 따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으며 경원을 당하게 되어 결국 복음의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성도들간의 화평은 먼저 죄의 용서로 이루어집니다. 이 죄는 특히 자기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지은 성도의 죄를 용서해 주는 일입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의 생활에 중대한 도전을 받는 말씀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구원을 박탈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중생하여 구원을 가졌다고 해도 우리는 죄를 범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때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하여 죄의 용서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죄에 용서가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적인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 회개하여 사죄를 받을 때까지 우리는 은혜로운 성도의 생활을 못할 것이며 영적인 많은 괴로움을 받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의 경우의 도전은 마18:21절에 있는 베드로의 질문에서 나옵니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용서의 생활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도저히 불가능 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평은 죄의 용서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화평의 자세에 있어서 내가 먼저 화해를 상대방에게 청해야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형제와 화목하는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마5:23-26절 말씀. 그런데 화평은 다른 사람 아닌 나의 유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주님은 25절과 26절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음에 우리는 그러면 세상 사람들과의 화평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먼저 선행으로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마5:15-16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세상 사람이 본다면 그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셨습니다.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화평에는 어느 경우건 진실과 희생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이 없이는 화평의 기초가 무너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화평이 불가능합니다. 회생이 없이는 화평의 재료가 없기 때문에 화평이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화평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추구해야 할 주님의 명령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화평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까? 교회에 내 가정에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 화평이 이뤄져야 평안한 가운데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75 \ 12:14
(88) 거룩함을 좇으라
(히브리서 12:14)
지난 시간에 이어 14절 말씀 중 '거룩함을 좇으라'는 말씀에 대하여 공부하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거룩함을 좇으란 말씀은 여러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에 대하여 교훈하시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1. 거룩과 그리스도인
거룩함을 좇으라는 말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거룩해졌다는 뜻이요 다른 하나는 거룩한 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이요 세 번째는 거룩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1) 그리스도인은 이미 거룩하다는 선언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거룩하다'는 선언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무리 가운데 들어갔습니다. 이 같은 선언은 우리가 거룩해서이거나 거룩해져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졌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의의 소유자가 됩니다. 구원의 확정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지 못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구원에도 이를 수 없습니다. 천국 백성으로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이상, 우리에게 거룩하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선언은 합법적인 것입니다. 변질될 수도 없고 빼앗길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성취된 우리의 영적 신분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뤄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온전히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2. 거룩한 자가 되라
우리는 또한 거룩한 자가 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벧전1:15절 이하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씀은 거룩한 자신의 위치를 지키라는 뜻입니다. 이런 자 176 \ 12:14
신의 거룩함을 지키라는 말씀은 진리의 말씀에 굳건히 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그리스도인의 거룩이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항상 믿음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좇으란 말씀은 거룩의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생의 열매를 맺어야 할 생명 나무들입니다. 그 나무에는 필연적으로 거룩함의 열매가 맺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의 본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성장하는 나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거룩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열매가 맺지 않는다면 좋은 나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옮겨졌으며 우리의 행위가 죄를 행하기에 담대한 자리에서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할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할 나무들입니다. 예수님은 요15장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에 접부침을 받은 가지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열매는 내가 맺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내가 맺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열매를 가리켜 성령의 열매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라고 말하는 것은 성령의 권능으로 성령에 의해 맺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나약하고 도저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함의 결실을 맺을 수 없는 죄인들임을 깨닫고 통탄스러운 심정으로 성령께 의지하며 그의 도우심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믿음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는 간절한 열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믿음의 생활을 한다면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빌1:6절에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을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거룩함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거룩함의 공동체를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시는 의미는 하나는 우리들로 사람들 앞에서 거룩함의 표적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지 않는 일에 결코 합류하거나 한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지 않은 자리에서 빠져 나오라는 의미가 됩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곳이 그의 설자리요 거룩한 자리가 그의 앉을 자리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말이 아니면 듣지 말아야 하며 거룩한 곳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항상 거룩함을 좇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다운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77 \ 12:15-17
(89)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
(히브리서 12:15-17)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두 가지로 나누어 오늘은 15절에서 말씀하시는바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에 대한 것과 내일은 16,17절에 나오는 '에서와 같은 망령된 자'에 대한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면서 특히 두려워해야 할 일에 대하여 몇 가지로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자란 뜻입니다. 교회에는 신앙 생활을 한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씨 뿌리는 비유에서 네 종류의 밭에 똑같은 씨앗을 뿌렸지만 열매를 맺는 밭은 한곳뿐이었습니다. 세 곳의 밭은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 구원의 은총을 말합니다. 왜 구원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까? 구원은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셔야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일에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시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값도 없이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거저 선물로 주시기 위해 치르신 대가는 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야말로 귀하고도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누구인 것입니까?
(1)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히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은혜를 보화가 감추인 밭으로 비유하시면서 한 나그네가 이 밭을 발견하고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팔고 그 밭을 샀다고 하셨습니다. 은혜는 이처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경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히 여긴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의 소중함을 모르고 자기 생애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 생활 태도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2) 다음에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란 은혜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사람을 말합 178 \ 12:15-17
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은혜로 주신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생애를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삶으로 새롭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열매를 맺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에 대해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은혜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은혜를 거역한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불신앙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깁니다.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며 회개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에는 여전히 나오며 교회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높이며 권리 행사를 단단히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불순종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행실을 고치지 않고 있으며 나중에는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2. 교회에서 자라는 쓴 뿌리
다음 두 번째로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열매를 맺는 나무에 있어서 뿌리란 그 나무의 생명과도 같습니다. 열매는 뿌리에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쓴 뿌리란 독이 있는 뿌리로 그 나무에서 자라난 열매란 자연히 독이 있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쓴 뿌리는 교인들이나 교회에 괴로움을 줍니다. 그래서 괴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특별히 경계해야 하는데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종류는 다른 사람에게 독을 주는 존재로 이들은 많은 사람들을 사망으로 이끄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계2장을 보면 두아디라 교회에 이런 쓴 뿌리가 나서 교회를 타락시켰습니다. 이 교회에 나타난 쓴 뿌리는 자칭 선지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이 자가 교회에 나타나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다'고 했습니다. 한 쓴 뿌리로 인하여 교회 전체가 피해를 본 것입니다.
다른 하나의 경우는 거짓된 진리, 배교로 더러움을 입게 하는 쓴 뿌리가 있습니다. 애초부터 배교자의 모습으로 교회에 침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떠난 자들이 사탄의 가르침을 받아 쓴 뿌리가 된 자들입니다.
결론 : 너희는 돌아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돌아보는 일은 먼저 자기 자신부터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늘 자신의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활이 과연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맺는 생활인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들로 자기가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더러움은 영적인 더러움이기 때문에 속히 진리 가운데 돌이키지 아니하면 양심에 화인을 맞게 되고 그렇게 되면 회개할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경종을 삼으시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179 \ 12:15-17
(90)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
(히브리서 12:15-17)
16절에서 음행하는 자와 망령된 자에 대한 경종이 나옵니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경종은 어느 시대의 교회이건 늘 거울로 삼아 성도들의 생활에 범하기 쉬운 이 종류의 죄를 멀리 하고 자기를 불 신앙적인 더러움에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1. 음행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성경에서는 구약이건 신약이건 음행하는 자에 대한 심판에 대하여 엄히 경종하며 경계하고 있습니다. 음행이란 성적인 부도덕을 의미합니다. 음행이란 단어는 간음이란 말보다 범위가 넓습니다. 간음은 법적인 문제에 국한할 수 있는 말이지만 음행이란 말은 모든 부도덕한 성적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음행에 관하여 혹독하리 만치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까?
음행은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모든 부도덕의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음행하는 생활을 계속하고는 거룩한 생활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음행이란 범죄 중에서도 가장 부끄럽고 은밀한 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 앞에서 감추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도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스스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가 음행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에게 달콤한 맛을 주며 육체적 쾌락을 주기 때문에 그 일을 벗어버리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음행은 자신의 인생 뿐 아니라 가정의 순결을 파괴하기 때문에 가정에 파탄이 오게 되고 부부간의 사랑에 금이 가게 되고 이런 현상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온 사회가 음란 화되어 소돔과 고모라 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이런 현상을 드러내 놓고 있으며 사탄은 성도들의 가정에까지 이런 미끼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음행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까? 부부간의 순결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늘 사랑 안에서 부부 생활이 원만히 이뤄져야 하며 그 자녀들에게 가정의 순결과 부부간의 사랑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성적 유혹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 유혹에서 이기려면 늘 자제하는 힘을 길러야 하며 경건 생활에 힘쓰도록 말씀을 묵상하며 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음행 죄가 무서운 것은 유혹을 좀처럼 물리치기 어려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처럼 그 자리에서 재빨리 빠져 나올 수 있는 결단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음행은 그 범하는 자에게 있어서 의도적이며 계획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회개가 어려운 것입니다.
180 \ 12:15-17
2.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를 두려워하라
다음에 히브리서 기자는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한 그릇 식물을 위해 판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는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중대한 비유적이 교훈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명분이란 하나님의 백성된 명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장자의 명분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많은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에게만 주신 특권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만한 선한 사람, 의로운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은 이 영광스러운 반열에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장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예정한 자만이 장자로서의 특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는 말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장자의 그 귀한 명분을 귀히 여길 줄 몰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구원, 곧 하나님의 백성된 이 특권을 귀히 여길 줄 모른다면 에서처럼 망령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에서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물질이었습니다. 배가 곺은 에서에게 당장 자기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장자의 명분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동생 야곱의 계략에 넘어가 팥죽 한 그릇에 그것을 팔아먹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장에 자기에게 어떤 물질적 유익이 있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쉽사리 말씀을 버리고 물질을 취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우러 지고 행동이 따르는 것입니다. 장사하는 일 때문에 주일을 지키는 못하는 사람, 물질 때문에, 어떤 육신적인 긴요한 일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일 따위는 지금 우리 세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결론 : 17절에서 이르시기를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번 버린바 되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크게 경종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결코 자만하는 자리에 이르러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망령된 행실로 인하여 회개할 기회마저 얻지 못하고 버림받을 것이란 두려운 경종을 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180 \ 12:18-24
(91) 우리의 이른 곳
(히브리서 12:18-24)
오늘 본문에는 구약시대의 성도들과 신약시대의 성도들의 차이점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 율법과 복음과의 놀라운 차이점을 비교해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당시의 그 두려움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이처럼 두려운 시내산이 아니라 하늘의 시온산에서 내려진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으며 그곳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이 계시고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 곧 우리의 죄를 속죄해 주시므로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을 주는 속죄의 피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곳이 우리가 이른 곳이라고 한 것입니다.
1. 시내산의 두려움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에서 우리의 이른 곳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른 곳이란 우리가 와 있는 현재의 영적 장소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결코 시내산에 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내산은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타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으로 율법을 주신 곳입니다. 그곳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율법에는 죄인에 대한 정죄가 있을 뿐 사죄의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율법을 주신 시내산의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내산은 만질만한 불붙는 산이라고 했습니다. 만질만한 산이란 표현은 이 산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능히 가서 만질 수 있고 올라갈 수 있는 유형적인 산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내산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만한 신령한 산이 아닌 것입니다. 이 산의 형편에 대하여 불붙는 산, 검은 구름, 흑암, 폭풍, 나팔 소리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 산에 임재하셨을 당시의 두려운 모습을 구약 성경에 있는 그대로 나나낸 말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출19장에서는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고 하셨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고 나팔 소리가 커지며'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보고 떨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에는 사람들 뿐 아니라 짐승까지라도 가까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명하셨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하여 일제히 더 이상 말씀하지 말 것을 간청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율법은 이처럼 두려운 가운데 모세가 받았습니다. 율법은 이처럼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떨림을 주는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받은 자는 마땅히 이 계명에 의해 심판하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181 \ 12:18-24
2. 우리가 이른 곳
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이 예루살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와 있는 곳은 시내산이 아닙니다. 시내산의 두려움은 율법과 함께 사라지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시온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가 이른 곳은 시온산입니다. 시온산이란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지성소는 땅의 지성소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휘장을 찢으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시고 그 길을 통해서 올라가신 하늘의 지성소를 의미해 줍니다. 땅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애는 시내산에 임하셨던 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의 돌 판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 돌 판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종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른 산은 하늘의 시온산인데 그곳에는 법궤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이 계시며 그 안에는 소나 염소의 피가 뿌려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뿌려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약을 받은 곳은 이처럼 시온산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이른 곳은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장차 이 도성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의 택한 백성들을 위해 우리 주님께서 예비해 두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시내산에는 이런 영광스러운 하늘의 예루살렘이 약속되어 있지 아니합니다. 또 그곳에는 천만 천사가 있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천사들은 이 나라의 주인들이 아닙니다. 이 나라의 유업을 이어 받을 존재들도 아닙니다. 이들은 장차 우리들을 섬기는 심부름꾼으로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지켜 주고 보디가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가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는 장자들의 총회가 있습니다. 장자들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그들의 총회가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는 여러 교파가 갈라져서 서로 찢고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하늘에는 오직 하나 뿐인 장자의 총회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총회가 곧 하늘의 교회이기도 한 것입니다. 지상 교회는 하늘 교회의 하나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올라가서도 하늘의 교회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찬양할 것입니다. 그곳에는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계시며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이 부활을 기다리며 영적인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무엇보다도 대견스러운 것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뿌린 속죄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그의 백성들의 죄를 속죄해 주는 은혜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른 곳은 바로 이런 곳입니다. 그 나라에 소망을 두시고 그 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애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82 \ 12:25-29
(92) 경건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자
(히브리서 12:25-29)
오늘 본문에서도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에게 대한 엄중한 심판의 경종이 나옵니다. 신약 시대의 하나님의 새 언약은 결코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들을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심판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거역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까지 포함되는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1. 하늘로조차 경고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25절에서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신 자란 '땅에서 경고하신 자'이신 시내산의 하나님을 의미하고 또 '하늘로조차 경고하신 자'이신 시온산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땅이란 시내산을 의미하며 이처럼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내려 오셔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어긴 사람들에게조차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사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을 강조해 줍니다. 율법의 명령은 준엄했습니다. 누구든지 그 명령을 어긴 사람은 용서받지 못하고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 율법에 의해 죄인의 사슬에 얽매이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켜 하나님 앞에 의를 얻을 수 있는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이스라엘이 모든 일에 이 율법을 거역함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사실과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어떻게 연결시켜야 하는 것입니까? 이 일에 대하여 25절 중반에서 '하물며 하늘로조차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경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하늘은 22절에서 말씀하신 하늘의 시온산을 말합니다. 그 시온산에는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계셨지만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도 계셨고 아벨의 피보다 더욱 큰 사죄와 구원의 능력이 있는 그리스도의 뿌린 피가 있습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그의 피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땅의 시내산이 아니라 하늘의 시온산이며 그 은혜는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이 아니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피로 이루셨습니다. 율법과 그리스도의 피로 내리신 은혜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릅니다. 시내산의 율법은 정죄의 역할을 하지만 시온산의 은혜는 속죄와 구원을 내려 주십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로조차 경고하신 183 \ 12:25-29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경고는 무엇입니까?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엄중한 경종이 따랐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요3:18절에서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더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더 무섭다는 것은 율법에서 정죄하는 그 정죄보다 더 무섭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로조차 경고하신 분을 배반하는 불순종의 자리에 빠지거나 배교하는 죄를 범하지 마라야 하는 것입니다.
2. 진동하지 아니할 나라의 유업
26절을 보면 두 종류의 '진동'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했다'고 했습니다. 이 진동은 시내산에 하나님이 임하셨을 때 있었던 진동으로 이 진동에 대하여 18, 19절에서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 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진동은 율법의 엄위와 그 율법을 범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진동과는 달리 더 무서운 진동이 있을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6절에서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의해 또 한번 있을 이 진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주의 재림으로 인한 인류의 최종적인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계6:12절 이하에 나오는 여섯째 인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운다'고 하셨습니다. 이 진동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한 자들에 대한 무서운 심판으로 율법에 의한 심판보다 더 두려운 심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동치 아니할 새로운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2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 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진동치 아니할 나라는 하늘의 시온산을 의미하며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입니다. 그곳에는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우리의 영원한 교회가 있으며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도 계십니다.
결론 : 이처럼 우리는 영원히 진동치 못할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는 생활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184 \ 13:1-4
(93) 가장 긴요한 권면
(히브리서 13:1-4)
히브리서 13장은 히브리서의 결론으로 히브리서를 받는 교회 성도들에게 교회 생활의 권면과 당부가 나옵니다. 특히 1절로 4절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가장 긴요한 몇 가지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형제 사랑과 손 대접하는 일과 어려움을 당하는 형제들을 생각해 줄 것과 혼인을 중히 여기며 침소를 더럽히지 말 것에 대하여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형제 사랑하기와 손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1절에서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형제란 단어는 혈육적인 형제를 의미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로 연합된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히2:11절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가 되시며 우리의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25:40절에서 최후의 심판의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을 심문하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내 형제'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형제의 사랑 중에 가장 귀한 것은 용서에 있습니다. 이 용서는 거의 무제한적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어려움을 당할 때 도움을 주는 일입니다.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고 한 가지로 슬퍼하며 기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사랑은 교회를 이루는 끈끈한 연결 줄입니다. 이 사랑의 줄로 서로서로 연결되어 교회가 믿음으로 견고해 지며 사탄의 공격과 핍박으로부터 진리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손님 대접하는 일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일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천사를 대접했다는 말은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든 것인데 아브라함이 자기 집을 찾은 손들을 극진히 대접한 일이 있었는데 그들이 알고 보니 여호와의 사자들이었으며 이 일로 아브라함은 이삭의 잉태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확고히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최후의 심판의 자리에서도 주님께서 반드시 물으실 것이란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마25:35절에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185 \ 13:1-4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3절에서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 옥에 갇힌 자들과 학대를 받는 자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2.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고 했습니다. 혼인을 귀히 여기란 말씀은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는 끝까지 한 몸으로 서로 사랑하고 위로해 주며 존중해 주라는 뜻입니다. 혼인을 경히 여기는 나머지 혼인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고 쉬 이혼을 하거나 부부간 경망스럽게 행동하는 일은 마땅히 금지되어야 합니다.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부간의 침소는 깨끗하고 거룩합니다. 부부간의 성적 결합을 더럽다고 여기면 안됩니다. 침소를 더럽히는 경우가 더러운 것입니다. 침소를 더럽힌다는 말은 혼외 정사를 뜻합니다. 침소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부부지간입니다. 이를 벗어나면 침소를 더럽히는 결과가 되며 이런 일은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침소를 더럽힌다. 음행한다, 간음한다는 말은 모두 비슷한 내용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모두 성생활에 관한 경종이 되는 말입니다. 왜 성경에서는 이런 성적 범죄에 대하여 엄중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까? 인간의 성적인 범죄는 인간의 도덕적 마지노 선이 무너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의 질서가 무너지면 가정이 설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회 질서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음행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한 음란한 행위를 말합니다. 짐승과의 교접이나 남성들간이나 여성들간의 동성애 등의 온당치 못한 성행위를 가리킵니다. 간음이란 말은 율법적인 의미가 주어진 말입니다. 부부간이 아닌 이성과의 음란한 행동이나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에 대하여 엄히 다스리시겠다고 경종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이 금하신 죄에 대해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경건의 연습이 필요하며 죄에 대하 두려움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신앙적인 의지가 필요합니다. 올바른 부부생활과 지식을 가지고 이처럼 무서운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186 \ 13:5-6
(94)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히브리서 13:5-6)
본문 5절에 나오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과 생애에 지침이 되는 교훈입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주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란 사실을 들고 있습니다.
1. 돈을 사랑치 말라
5절에서 '돈을 사랑치 말라'고 했습니다. 돈 곧 재물에 대한 경종은 성경 여러 곳에 나와 있습니다. 딤전6:10절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왜 이처럼 돈에 대하여 대단히 위험한 것처럼 경종해 주는 것입니까? 돈은 정말로 우리가 가까이하면 안될 그런 존재인 것입니까? 그러면 왜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의 축복을 주시는 분으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까?
돈을 사랑한다는 말은 돈의 비중을 하나님보다 더 우위에 둔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는 일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재물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애 중에 우리에게 내리시는 축복 가운데 하나일 뿐, 그것을 섬기거나 우리의 마음을 재물에 빼앗겨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딤전6:9-10절 말씀을 찾아보시겠습니다. ( ). 이 말씀에 따르면 돈을 사랑한다는 말은 돈을 사모한다는 의미로 나와 있습니다. 사모한다는 말은 사람이 어떤 대상을 우러러 받들고 마음으로 섬기는 일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돈을 사랑하는 자들은 자연히 돈에 미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미혹은 우리로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롯이 이런 길을 걸었습니다. 발람이 이런 길을 걸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러했고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이런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재물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재물에 초연 하라든가 재물에 관심을 갖지 말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재물을 소유해야 합니다. 지혜롭게 사업을 경영해서 많은 재물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일은 결코 죄악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보편적인 축복이기도 합니다. 돈에 마음이 빼앗기고 돈에 의해 자기 생애가 좌지우지된다면 이런 사람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결국 돈 때문에 믿음에 큰 손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적인 생활 태도는 어찌해야 하는 것입니다. '있는 바를 187 \ 13:5-6
족한 줄로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내 생활에 대하여 언제나 만족스러운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재물에 대하여 족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안다고 해서 발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며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의 축복을 주시는 법칙을 잘 지키는 생활을 하면 우리의 재물은 날로 많아지며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하며 저축하므로 더 나은 생활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족한 줄 모르는 사람은 미혹을 받기 쉬우며 부정한 방법에 마음이 기울기 쉬운 것입니다. 현재의 내 생활에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장차의 축복을 만들어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2. 주님은 나를 돕는 자이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아야 할 충분한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은 그가 우리의 모든 생애를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 역시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신다면 그 분이 그의 백성들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고 그가 언약하신 모든 축복을 우리에게 내려 주신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입니다. 마6:31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모든 일에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만의 비밀한 비법을 가리켜 주신 것이 아닙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6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란 말은 과연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또 나를 떠나지도 아니하시니 우리는 어떤 경우에나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는 이처럼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엇을 무서워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만 확고히 가진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보시고 지켜 주시는데 사람들이 내게 어찌할 것입니까?
결론 :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어 나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난하건 부유하건 높은 자리에 있건 낮은 자리에 있건 잘살건 못살건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나가야 합니다.
188 \ 13:7-9
(95) 영원히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13:7-9)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이루신다는 사실과 이 같은 진리는 창세 전에 이미 결정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들을 택정하신 사실을 의미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가르치며 말씀으로 인도하던 인도자들을 생각하여 그들의 교훈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을 본받아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라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르고 성도들을 인도하는 지도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갈리리 호숫가에서 가진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너는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세 번씩이나 하셨습니다. 이처럼 교회에는 주님의 양인 교회의 성도들을 말씀으로 먹이고 인도하는 목자가 있습니다. 이 목자는 주님이 세우시고 주님에 의해 관장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를 받은 교회에게 이들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 말씀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인도해 온 지도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생각하라는 말은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그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 두고 때때로 그들이 가르친 교훈을 추억하며 자기의 신앙을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는 말씀은 그들이 어떤 생애를 지냈으며 어떤 모습으로 그의 생애를 마쳤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보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를 이끌어 온 교회의 지도자들, 하나님의 종들은 대개의 경우, 핍박 중에 고통을 당하며 시련 중에 환난을 이기면서 복음을 전했었습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그들의 생명까지 복음을 위해 버리는 순교의 자리에 이른 것입니다. 그것을 주의하여 살펴보고 그 같은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동일하시다.
8절에 나와 있는 말씀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그의 구원을 이루시며 그 아들을 믿음으로만이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영원하도록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는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을 주시고 신약 시대는 예수를 믿는 것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189 \ 13:7-9
사실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절대적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10:8절에서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창세 이후로 양의 문이신 구원의 주는 오직 예수님 뿐이란 사실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11:26절에서 모세의 믿음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7절에서 말씀하신 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온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 했으며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은 바뀌고 시대는 변해도 그 분만이 우리의 영원한 구주이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히브리서 기자는 9절에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른 교훈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교훈으로 잘못된 교훈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그 다른 교훈의 하나가 그 다음에 나오는 식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마음은 은혜로써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식물이란 말은 구약에 나오는 율법적인 규례를 의미합니다. 정결한 음식으로 깨끗케 하는 규례인데 이 같은 일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 육체에 제한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것을 이루실 때까지의 예법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예법 자체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는 것으로 온전한 것이 온 이후로는 그림자로 보여 주신 율법적 규례나 예법은 마땅히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골2:16절에서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장래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실 구속의 사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의 십자가와 부활로써 이것들을 온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으로 사람이 의롭게 되려거나 이 같은 율법적 규례에 얽매어 신앙 생활을 하는 일은 자기자신에게 전혀 유익이 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율법으로 굳게 함이 아닙니다. 어떤 음식의 규제로 의롭게 여김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은혜로써 굳게 해야 합니다. 은혜로써 굳게 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라는 뜻입니다.
결론 :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변할 수 없는 분입니다. 아울러 그 분에 관한 견해나 그 분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나 구원의 은혜는 시대를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동일하신 예수님에 대한 진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이 진리를 마음에 깊이 간직하시는 아름다운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191 \ 13:10-13
(96)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브리서 13:10-13)
오늘 본문의 내용은 구약적 제물인 짐승과 신약적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비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속죄의 제물로 고난을 당하신 예수를 따라 예수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할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는 좀 어려운 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 사실에 대한 구약과의 비교설명입니다.
1. 구약적 속죄 제물과 그리스도의 제물
10절과 11절에서는 구약적 제사 제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부치고 있습니다. 10절에서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고 하는 제단은 희생 제물을 올려놓는 구약적 제단을 의미합니다. 모든 제물 중 고기는 제단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었으나 속죄 일에 드리는 희생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들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 제물은 어떻게 처리한 것입니까? 11절에서 이르기를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차례씩 속죄 일에 지성소에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 때 제사장은 송아지의 피로써 자기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을 드린 후, 백성들의 죄를 위한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고기는 영문 밖에서 불사른 것입니다. 영문 밖이란 병영의 문으로 성문 밖이란 뜻입니다.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속죄 제물로 잡은 짐승의 고기를 불태운 것입니다. 이처럼 짐승의 고기를 성문 밖에서 불지른 이유는 속죄 제물로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레16:26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쇠제 염소의 피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였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를 것이라.'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12절에서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영문 밖이란 성문 밖과 같은 뜻인데 11절에서 '영문 밖에서'란 말은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장소를 암시해 주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 말씀이 의미해 주는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성문 밖에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일은 이스라엘이 속죄 일에 백성들의 속죄 제물을 불태운 것처럼 속죄 일의 속죄 제물을 온전히 이루신 사실을 나타낸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192 \ 13:10-13
모든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신 죄인의 자격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으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은 죄가 없으셨지만 그의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죄인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저주받으신 바 되어 성문 밖에서 그의 몸을 불사르시는 속죄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짐승으로 제물을 삼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에 다시는 짐승을 잡아 제물로 삼는 속죄 제물을 드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9:13,14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2.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고 한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로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 능욕을 지자'고 했습니다. '그 능욕'이란 말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12:2절에서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참으신 그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8:17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참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보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다음에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을 등지고 오직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을 의미합니다. 영문 안은 멸망 받을 도성입니다. 그곳에는 소망도 없고 속죄도 없으며 영생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영문 밖으로 나와 그에게 나아가야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에는 보다 큰 소망과 보상이 있습니다.
193 \ 13:14-16
(97) 영구한 도성을 찾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히브리서 13:14-16)
오늘 본문 14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삶의 목표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목표점을 우리가 찾아가는 본향으로 말씀해 주고 있으며 그곳을 영구한 도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에서의 생애는 나그네길을 걷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나그네는 그 길의 종착지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곳이 그 나그네가 목표로 삼고 걸어가는 본향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인 본향은 하늘에 영구한 도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이 목표점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의 나그네길을 걸어간다면 그는 소망이 있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1. 그리스도인들에게 장차 올 것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이 땅에는 없는 곳을 찾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곳은 장차 올 것인데 이 장차 올 나라는 우리가 찾는 영구한 도성으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에도 재물로는 갑부에 해당하는 거부였지만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서 살아갔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로 '히11:10절에서 이르시기를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영구한 도성이 없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 소망을 두며 호화스러운 집을 짓고 그곳에서 안락한 생활을 즐겨 한 것이 아니라 장차 올 도성인 하늘의 성을 소망으로 바라보며 살아갔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 11장에서 열거한 그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에 대하여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보다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기 위해 더 낳은 부활을 얻으려고 생명까지라도 바쳤다고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누릴 영광이나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구한 도성이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이 지신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생활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최상의 생활인 것입니다. 이 나라는 장차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장차란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생애가 마쳐지고 육신을 벗어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그날을 의미합니다. 다른 하나는 주의 재림으로 오는 인류의 종말 시기를 가리킵니다.
194 \ 13:14-16
2.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제사
15절에서 '이러므로'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 이러므로 란 말은 그러기 때문이란 뜻으로 우리의 삶의 목적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구한 도성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인 것입니다.
(1) 하나는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을 왜 제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까? 제사란 구약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제단에 제물을 드리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제사는 지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제물로 하나님의 제단에 드려지므로 구약적 제물을 제단에 드리는 제사는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드려야 할 제사는 구약적 제물을 제단에 올리는 제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찬미의 제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는 하나님께 열납되는 영적 제사인 것입니다. 이 찬미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라고 하셨습니다. 이 찬미에 대하여 15절에 나온 말씀을 보면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미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인 것입니다. 롬10:10절에 이르시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마음으로 진실한 신앙 고백이 동반한 찬양은 바로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는 열매이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는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찬미에 대해서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늘,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 찬미의 제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븐 좋을 때만 부르고 예배 시간에만 부르고 어쩌다가 생각나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부르는 찬양이야말로 찬미의 제사인 것입니다.
(2) 다음에 16절에서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일은 착한 일의 열매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착한 행실을 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서로 나눠주는 일은 구제의 손길을 말합니다. 있는 자는 없는 형제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 이런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의 축복을 주시는 목적은 형제들에게 선을 베풀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선한 일을 하라는데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입을 주신 것은 그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데 있습니다. 그런 일에 우리의 입술을 쓰고 그런 일에 우리의 재물을 사용하면 하나님은 더욱 많은 은혜와 재물의 축복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제사,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릴 것과 선한 일과 서로 나눠주는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195 \ 13:17
(98) 목자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자세
(히브리서 13:17)
17절에 나오는 말씀은 양인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에게 꼴을 먹일 목자간의 상호 관계를 나타낸 말씀입니다. 여기 나와 있는 말씀은 물론 양 무리들에게 그들을 주안에서 양육하는 목회자에게 대할 태도에 대한 교훈적인 권면이지만 또한편 목자들이 어떻게 양 무리들을 돌 볼 것인가에 대한 목회자의 목회 자세에 대해서도 아울러 교훈해 주신 말씀입니다.
1. 교회를 인도하는 목회자의 자세
먼저 본문에 간단히 나온 목회자의 자세 즉 주님이 바라시는 목회자 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양 무리들의 영혼을 위해 경성하는 자임을 말씀해 줍니다. 너희 영혼을 위해 경성하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경성이란 말은 깨어 있다는 뜻입니다. 목회자는 양 무리들을 위해 마땅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목자들이 자기 양떼들을 위해 밤새워 지키며 길을 이탈하지 않도록, 사나운 짐승에게 잡혀 먹지 않도록 늘 보살펴 주는 목자로서의 책임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다윗이 어렸을 당시 자기 아비 집의 양 무리의 목자로 양을 칠 때에 그가 어떻게 그 양 무리들을 지켰는가에 대하여 다윗의 고백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삼상17:34절에서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고 사울 왕에게 고한 것입니다.
교회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탄의 공격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두 가지 방법으로 교회를 공략합니다. 하나는 거짓 진리로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참 생명을 죽이는 쑥물입니다. 다음에 세상의 영화와 영광으로 유혹합니다. 기복적인 신앙은 이 유혹에 넘어간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종말의 시기를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다고 하신 것은 교회가 세속에 물들어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버리고 세상의 영광과 재물을 따라가는 시대가 될 것이란 경종인 것입니다. 주의 종들은 이런 위기 상황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양 무리들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양 무리들을 기키는 자세가 바로 경성인 것입니다.
(2) 경성하는 자세에 대하여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회개할 자란 말은 빚 보증인이란 뜻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빚을 보증하는 사람의 책임은 대단히 무겁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빚 보증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196 \ 13:17
경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빚 보증을 잘못 서 주면 그 책임을 증인이 고스란히 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양 무리들에게 이 같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교회가 하나의 기업화되고 또 목회자가 권위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기 때문에 이런 성경적 교훈은 진부한 이야기처럼 들려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양 무리를 맡은 목회자에게 반드시 빚 보증인으로의 그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24:45절 이하의 말씀에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들에게 주시는 상급과 악한 종들에 대한 심판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인도하는 자에 대한 양들의 자세
교회를 인도하는 목회자들에 대한 양들의 자세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씀해 줍니다. 하나는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희로 이 일을 즐거움으로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는 것입니다.
(1)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양과 목자는 같은 그리스도인이지만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위해서 여러 가지로 직분을 배정하셨습니다. 엡4:11절에서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주님은 이처럼 여러 직책을 주셨습니다.
특별히 성도들을 인도하는 목회자의 직분은 귀하고도 중합니다. 이런 직분은 모든 교회 성도들이 알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당신을 대신하여 교회에 세우신 목자임을 알고 범사에 순종하며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말을 인간적인 대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먼저 전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명하는 바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왜냐 하면 이들은 우리 영혼을 위해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2) 다음에 즐거움으로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영혼을 위해 애쓰며 힘쓰는 목회자로 그런 사명을 즐거움으로 하게 하도록 하는 일은 성도들의 의무인 것입니다. 그런 일을 근심으로 하게 할 때 자신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종을 대적하는 일은 주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자기 영혼의 보증인으로 기도하는 하나님의 종을 괴롭히는 일은 교회를 넘어지게 하는 일입니다.
결론 : 우리의 생애는 교회에서 시작되고 교회에서 마감됩니다. 교회야말로 양의 우리인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에서 순종하고 복종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종을 대접하여 그들로 근심으로서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197 \ 13:18-25
(99) 바울의 축복기도
(히브리서 13:18-25)
작년 12월 2일 처음 히브리서를 강해하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오늘 아침 100회 째로 강해를 다 마치게 됩니다. 히브리서를 쓴 저자는 이 서신을 받는 교회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서신을 마감하면서 그들에게 권면의 말을 쓴 것을 용납하라는 겸손한 양해를 구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있기를 축원하면서 서신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1. 저자의 기도와 송영과 축복
저자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부탁하면서 그들을 향한 이 서신의 내용이 선한 양심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속히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기도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 이 편지를 마감하면서 20절과 21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몇 가지 사실에 대하여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말로 송영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원함에 예수님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20절에서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양의 큰 목자가 되시는 분입니다. 큰 목자란 말은 양의 오직 하나뿐이신 진실한 목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양의 목자라고 하셨고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자가 없기 때문에 예수야말로 양의 큰 목자이십니다. 그 분은 세상에 있는 모든 양 무리들의 참 목자이십니다. 이 땅위에 목자의 직위를 가지고 양 무리들을 돌보는 하나님의 종들이 많지만 이들은 큰 목자이신 예수님이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잠정적으로 주신 직분에 불과할 뿐, 예수님만이 영원한 양의 큰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언약의 피입니다. 구약의 짐승의 피는 이 분 예수가 오시기 이전까지의 언약의 그림자로서의 피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한 언약의 피로 그의 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완전히 이루셨으며 이제 이후로는 다른 피를 흘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다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부활로써 그가 모든 인류의 속죄의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하여 롬1:4절에서 '이 아 199 \ 13:18-25
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 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피로써 우리와 평강을 이루셨습니다.
히브리서를 보낸 저자는 이 평강의 하나님이 히브리서를 받아 읽는 모든 성도들에게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한다'는 축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각하여 그의 뜻대로 살 수 있기를 원하는 의지만 보인다면 하나님은 우리로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 우리의 생애를 주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선한 일에 온전케 하시는 것은 우리들로 자기 뜻을 우리 안에서 행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다음에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선행은 하나님 앞에 즐거움을 주는 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이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생활이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우리들로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간구한 것입니다.
2. 마지막 인사
21절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이 편지를 받아 볼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로 경계하고 훈계하며 책망한 말에 대하여 '권면의 말'이란 부드런 말로 표현하면서 그 같은 권면을 용납하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용납하란 말은 본문에 나와 있는 모든 훈계에 비해서 보다 부드러운 말로 위로를 주려는 생각에서 사용한 말입니다. 23절에서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디모데를 우리 형제란 이름으로 부르고 그에 관한 기사를 이곳에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 히브리서를 쓴 저자가 사도 바울이란 설이 유력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24절에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문안이란 주 안에서 평안을 주고받는 인사입니다. 이 서신은 아마 이 서신을 전달한 사람이나 이 서신을 받을 만한 처지에 있는 직분자가 교회 안에서 읽는 것으로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모든 사람들의 문안에 대한 인사를 빼지 않으므로 친밀감을 표시했으며 그들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결론 : 25절에서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 지어다'는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새벽마다 이 말씀을 귀담아 들으신 여러분들에게 히브리서를 받아 읽은 그 옛날 히브리 교회 성도들에게 저자가 선언한 것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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