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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초대교회사( 주후 200년까지 )

하나님아들 2018. 6. 29. 21:28

초대교회사( 주후 200년까지 )

 

0. 서론

 초대교회가 성립된 이후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 (Konstantin d.G.)가 기독교에 관용칙령 (Toleranzedikt, 소위 밀란칙령 Mailaender Edikt)을 내리기까지를 기독교의 제1기라고 부를 수 있다. 관용칙령 전에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더러운 종교(religio prava 또는 illicita)"였다면  그 이후부터는 "인정된 종교 (religio licita)"가 되었기 때문이다.

0.0. 복음전파

 기독교가 아직 더러운 종교의 위치에 있을 당시에,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당시에 기독교의 최대의 노력은 복음전도에 있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라는 행 1:8이 복음전도의 기본적인 정신을 보여주듯이 초대교회는 세계를 향해 불처럼 번져나갔다. 사방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가능성은 이미 행 2:9이하에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오순절을 체험한데서 볼 수 있다. 복음의 전파를 조금 더 살펴보자. 사도 바울은 서방으로 나아갔다. 그는 심지어 스페인까지 갈 계획을 하였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것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스페인으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에게서 약간 만족을 받으면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롬15:23-24). 이 계획은 실현된 것이 분명하다. 클레멘스가 바울이 서방의 끝까지 갔다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1Clem 5,7). 또한 복음은 동방으로도 퍼져 나갔다. 도마행전에 의하면 사도 도마는 인도까지 갔다고 한다. 도마행전의 첫 부분을 읽어보자.

(도마행전의 첫 부분)
 사도 유다 도마의 (첫 번째) 행전. 그때 그는 자신을 상인 합반에게 팔아 인도로 내려가서 인도를 개종시켰다. 1. 그리고 모든 사도들이 한번은 예루살렘에 모였다... 그들은 나라들을 분할하였는데, 각 사람이 자기에게 해당된 지역에서, 주님께서 보내시는 장소에서 전도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인도는 제비와 분할에 의하여 사도 유다 도마에게 해당되었다.  그리고 그는 가기를 원치 않아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이것을 감당할만한 충분한 힘이 없다. 나는 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히브리인이다. 어떻게 내가  인도사람들을 가르치겠는가?" 그리고 유다가 이렇게 핑계를 대고 있을 때, 우리 주님께서 밤에 환상 중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도마야, 두려워 말라. 나의 은혜가 너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전혀 설득을 당하지 않고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은 어디라도 나를 보내십시오. 단지 인도만은 가지 않겠습니다".

남방으로도 복음은 나일강 유역을 따라 아프리카 깊숙이 전파되었다. 이것은 이미 행 8:26이하에 이디오피아의 내시가 복음을 받은 것으로 시작되었다. 사실 복음 전파로 말미암아 주후 4세기경에는 나일강 유역에 기독교회가 견고하게 서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는 4세기 중엽에 태어나서 상애굽에 있는 소학 (Sohag)에 소재한 "백색 수도원 (Wei es Kloster)"의 원장으로 봉사하다가 451년 이후 사망한 쉐누테 (Schenute, Sinuthios)를 들 수 있다. 그는 애굽 국민교회의 교부이며 동시에 위대한 곱트어 저술가이다. 그는 사히드 방언으로 수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특히 다른 언어의 작품을 곱트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쉐누테는 콘스탄티노플 회의 (381년)와 에베소 회의 (431년)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복음이 확산되는 동안에 기독교는 박해와 이단이라는 두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0.1. 박해

 초대기독교가 지면한 첫째 어려움은 초대교회와 외부와의 문제이다. 기독교가 인정받은 종교가 아니기에 로마제국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참조. J.Molthagen, Der roemische Staat und die Christen in zweiten und dritten Jahrhundert (Hypmnemata 28), Goettingen 1975, 2. Aufl.). 로마에 의한 핍박아래서 기독교인들은 두 방향으로 반응을 나타낸다. 하나는 이 환난에서 묵묵히 순교의 길을 가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 환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변증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시대에서 기독교가 보여준 강점은 변증이 아니라 순교이다. 왜냐하면 변증은 주로 소수의 지식인 기독인들이 행한 반면에 순교는 지식인, 비지식인을 막론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변증가들이라도 결국은 변증이 수용되지 아니하면 순교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 저스틴). 변증은 어디까지나 순교를 전제로 하고 실행되었던 것이다. 또한 변증이 강한 힘을 가졌던 이유는 순교가 동반되고 있었다는데 있다. 만일에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회피한 채 논리적인 변증만을 일삼았다면 그 변증은 별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순교를 토대로 하여 변증이 가능했고 힘이 있었다.

0.2. 이단

 초대 기독교를 위협한 둘째 어려움은 기독교의 내부적인 문제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동안 기독교 내에 수다한 이단들이 발생하였다는 점이다. 이단은 두 가지 양태로 성립되었다. 하나는 복음에다 고대의 철학 정신이나 이교적인 사상을 첨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복음을 몰이해하여 어느 한 면만을 크게 강조하는 것이다. 이단들의 발생에 직면하여 기독교는 다시 두 가지 방향으로 반응을 나타낸다. 하나는 이단에 대한 공격이다. 이단들의 거짓된 속성을 파헤치고 기독교의 바른 가르침을 일러준다. 다른 하나는 교회의 내실화 (內實化)이다. 기독교의 이단에 대한 방어정책으로 신학이 성숙하고 정경이 정립되고 교회의 제도가 설립된다.

1. 박해와 순교와 변증

1.1. 박해

 로마에 의한 기독교 박해는 조직적이라기보다는 산발적이었고 회중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지도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Bainton, 24). 그러나 일단 박해가 시작되면 지도자들 뿐 만 아니라 일반 성도들까지 처형을 당했다. 그러므로 "희생당한 것은 양떼가 아니라 목자뿐이었다 (it was only the shepherd and not the flock that was immolated)"는 주장은 잘못되었다 (Bainton, 24). 예를 들면, 폴리캅의 순교 전에 수다한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박해를 당했다 (참조. Mart.Pol.II.).

1.1.1. 박해의 과정

1) 클라우디우스 (Claudius, 41-54년)
 로마에 의한 기독교의 박해는 대략 황제 클라우디우스 당시에 처음으로 일어난다. 수에톤 (Suetonius, 약 60 - 약 140)은 클라우디우스가 "어떤 크레스토스에 의하여 선동되어 유대인들이 계속 소요를 일으키기에 이들을 로마로부터 추방했다(Judaeos impulsore Chresto assidue tumultuantes Roma expulit)"고 기록하고 있다 (De vita Caesarum, vita Claudii 25,4). 이에 대하여는 행전 18:2이 기록하고 있다.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아굴라)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아로부터 새로 온지라". 클라우디우스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말미암아 이 부부가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는 큰 사건이 벌어진다. 이 부부는 후에 사도 바울의 후방으로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롬 16:3-4; 고전 16:19; 딤후 4:19). 환난이 오히려 은혜가 된 것이다!
 이것은 대략 49/50년경의 사건이다.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순례차 왔다가 복음을 듣고 돌아가서 다른 유대인들과 심한 논쟁을 한 것이 그 주요동기인 것 같다. 로마서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기  전에 이미 거기에는 기독공동체가 있었다 (롬 1:7). 이 당시 로마에는 약 3-4만 명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G.Eichholz, Die Theologie des Paulus im Umriss, S.27).

2) 네로 (Nero, 54-68년)
  가장 유명한 기독교 박해는 황제 네로의 통치 하에서 있었던 것이다  (Tacitus, Annales XV,44). 64년 7월에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아마도 네로는 궁궐주위에 있는 슬럼가 (3-6층으로 된 임대주택들이 있었음)를 불태워 정원을 만들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그런데 바람이 세게 불어 9일이나 화재가 계속되었다. 백성은 네로가 방화범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궁지에 몰리자 그리스도인 방화범이라고 내세웠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말세에 대한 기대를 근거로 댔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종말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를 불태웠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수다한 군중 (ingens multitudo)이 아무런 죄목도 없이 원형경기장과 네로의 정원에서 야간 축제시에 화형을 당했다.
 수에톤은 네로의 핍박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 즉 새로은 유해한 미신을 믿는 일군의 사람들에게 형벌이 부과되었다" (Suetonius, De Vita Caesarum, vita Neronis, 16)고 간단히 언급하지만, 타키투스는 이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다. 타키투스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계속된 것은 방화 때문이 아니라 인간종족에 대한 증오 (odium generis humani)때문이었다고 한다. 네로에 의한 기독교박해에 대하여 117년 경에 타키투스가 보고한 내용을 살펴보자 (독역: T.Lenschau, Alterum [R.Oldenbourgs geschichtliches Quellenwerk, Tl.1], M nchen 1930, 141):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화재가 고관의 명령에 의해 방화되었다는 소문이 계속되었다. 이 소문을 방어하기 위하여 네로는 백성에 의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고 악행 때문에 일반적으로 미움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내세웠고 가장  뛰어난 고문 하에 처형을 하였다. 그 이름은 티베리우스 통치시에 총독 본티우스 필라투스에 의하여 사형을 받은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한다. 그때 잠시동안  억제되었던 해로운 미신이 이제 다시 살아났다. 그것도 이 악덕의 본산지인 유대에서 뿐 만 아니라 로마 자체에서도 말이다. 이곳으로 모든 천한 것들과 더러운 것들이 흘러 들어와서 꽃을 피우고 있다. 우선 이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자들을 체포하였고 그 다음에는 이들의 고시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방화에 대하여서가 아니라 인간종족에 대한 증오에 대하여 유죄인정이 되었다. 그들은 짐승의 털을 꿰매어 입고 개들에게 찢김으로써 죽음을 당하는 중에도 조롱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불태움을 당했다. 다른 이들은 날이  저물자마자 밤을 밝히는데 사용되었다. 네로는 자기의 정원들을 이 구경거리를  위해 허락하였다. 그는 동시에 서커스놀이를 만들어 한번은 마부의 옷을 입고 군중가운데 섞이기도 하고 한번은 마차 위에 서서 구경하기도 하였다. 가장 가혹한 형벌을 받고있는 범죄자들이 문제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공익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일개인의 잔혹함을 만족시키지 위하여 죽는 것이기에 그들에 대하여 동정이 야기되었다".

3) 도미치안 (Domitianus, 81-96년)
 도미치안은  처음으로  자신을 "주와 신 (Dominus et Deus)"로 칭하고 황제의 이름으로 서약하는 것을 의무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처형을 당하였다. 95년에 Titus Flavius Clemens가 처형당했고 그의 부인 Flavia Domitilla는 유배를 당했다 (B.Reicke, Neutestamentliche Zeitgeschichte, Berlin/NY 1982, 280과 295-301; P.Lampe, Die Stadtr mischen Christen in den ersten beiden Jahrhunderten [WUNT 2.18], T bingen 1987, 166-172를 참조). 클레멘스는 도미치안의 사촌이었고 도미틸라는 조카 (도미치안 황제의 죽은 여동생의 딸)였다. 도미치안황제는 이 부부의 두 아들인 Vespatian d.J. 와 Domitian d.J.을 황제계승을 위하여 양자로 삼았다. 게다가 원로원은 95년 신년에 도미치안과 클레멘스를 양 집정관으로 선출을 하였다. 말하자면 클레멘스는 도미치안 황제 다음으로 로마제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도미치안에 의하여 처형을 당한 것이다. "이 두 사람에 대한 고소는 무신론자 (아테이오이)라는 명목이었다, 이 명목 때문에 유대적인 관습을 좋아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처벌을 받았는데, 어떤 이는 목숨을 잃었고 어떤이는 적어도 재산을 잃었다" (Dio Cassius, Hist. LXVII,14,2). 무신론자라는 명칭은 유대교적인 또는 기독교적인 유일신론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그리이스 역사가인 Dio Cassius의 눈에는 유대교나 기독교가 별 차이없이 보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도미틸라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증거가 있다. 그녀는 가솔들이 죽으면 로마의 남쪽 지역에 있는 자신의 부지를 묘지로 제공하였다 (Corpus inscriptorum latinum VI, 8942. 16246). 그런데 후에 이 묘지들을 주위로 하여 유명한 기독교카타콤들이 형성되었다. 이 카타콤들 가운데 하나에서 도미틸라의 이름이 발견되었다. 가장 오래된 카타콤가운데 하나가 Domitilla에게 속해있던 것으로 보아 (The Apostolic Fathers I [K.Lake], Loeb Classical Library, 4) 이들이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이 당시에 벌써 로마의 고관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모든 계층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보다 30여년 전에 황제의 시위대와 황제의 가문에 복음이 전파되고 있었다 (빌1:13; 4:22 "가이사 집 사람 중 몇"; 아마도 1Clem 65에 언급되는 Klaudius Ephebus와 Valerius Vito도 황제가문에 속하는 사람들로 추정된다). 도미치안의 박해에 대하여 로마의 클레멘스 (Clemens von Rom)가 고린도에 보내는 첫번째 편지 (1Clem, I)에 암시되어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에게 갑작이 반복해서 닥친 불행들과 재난들로 말미암아 너희들에게서 논의된 일들에 관하여 주의를 돌리는데 어느 정도 지체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도미치안의 핍박 당시에 사도 요한은 밧모 (Patmos)섬으로 유배를 당한 것같다. "나 요한은 너희의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하는 섬에 있었다" (계 1:9). 이것은 도미치안 황제 때에 일어난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한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계 13:18에 나오는 사람의 수 (짐승의 수) 666은 아마도 도미치안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이 숫자의 비밀에 대한 해결책으로 일반적으로는 네로 (        )가 이 수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G.Stemberger, Die Roemische Herrschaft im Urteil der Juden [EdF 195], Darmstadt 1983, 31). 왜냐하면 네로 황제를 히브리어로 쓸 경우          (n       )가 되는데 각 문자를 숫자로 해석하여 (  = 100,   = 60,   = 200,   = 50,   = 200,   = 6,   = 50) 이 모든 수를 더하면 n       가 666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E.Stauffer, Christus und Caesaren, M nchen/Hamburg 1966, 273-277는 이것이 히브리어에 의한 계산이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사도 요한은 그리이스어 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이스어에 의한 계산을 원칙으로 하며,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한다. 1) 이 수는 상거래와 관계되는 도구이다 (즉 돈):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계 13:17). 2) "사람의 수"라고 부름으로써 어떤 사람에게 속한 수임을 알려주고 있다 (계 13:18). 3) 이 사람은 짐승이라고 불린다: "짐승의 이름" (계 13:17), "짐승의 수" (계 13:8). 이러한 내용들에 근거하여 Stauffer는 도미치안 황제가 로마인, 헬라인, 유대인, 그리스도인에 의하여 "짐승"이라고 불린 것을 지적한다. 또 그는 도미치안 통치시대에 통용되던

동전에 그의 직명 (Amtsname)가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 그런데 동전의 크기 때문에 이 이름을 다 적을 수가 없어서 다음과 같이 약자로 실리는 경우가 많다:                   . 이것을 숫자로 환산하면:
     =   1                     =   1
     =  20 +  1 + 10           =  31
     =   4 + 70 + 40 + 5 + 300 = 419
     = 200 +  5 +  2           = 207
     =   3 +  5                =   8
--------------------------------------
                               = 666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하나의 가능한 설명일 뿐이지 본문이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는 이상 이것을 절대화해서는 안된다. 이 숫자가 말하는 중요한 요점은 이것이 인간에게 속한 수라는 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떠난 "사람의 수"이다. 여기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배신성 (背神性)이다. 이러한 성격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에게 가깝기보다는 짐승에게 가깝다. 이러한 까닭에 이 숫자는 다시 "짐승의 수"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 수는 666이다. 6은 불완전의 수이며 실패의 수이다. 그런데 6을 세 번 겹쳐 씀으로써, 배신성에 근거하여 하나님보다는 짐승쪽에 가까운 사람들은 실패하고, 실패하고, 실패할 것을 나타내 준다. 완전한 실패이다!

4) 트라얀 (Traianus, 98-117)
 트라얀은 처음으로 기독교인 소송에 관한 국가적인 법을 제정한 황제이다. 112년 경 비두니아 (Bithynien)의 총독이던 C.Plinius d.J.가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을 다루어야 할지 질문을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트라얀은 다음과 같은 답변을 주었다. 일반적인 규범을 세울 수 없다는 것, 그리스도인을 추적하지 말 것, 고발이 들어 왔을때 완고한 자는 처벌하고, 후회하는 자는 석방할 것, 익명의 고발은 무시할 것 등이었다 (R.Freudenberger, Das Verhalten der roemischen Behoerden gegen die Christen im 2. Jahrhundert dargestellt am Brief des Plinius an  Trajan und  den Reskripten Trajans und Hadrians, Muenchen 1969, 2. Aufl. 참조). 트라얀과 플리니우스와의 서신왕래를 살펴보자 (참조. Plinius der Juengere, Briefwechsel mit Trajan. uebers. von W.Prollius, Halle 1909).

(1) 플리니우스가 트라얀에게 (96번째 서신):
 "그들이 자백한 바에 의하면, 그들의 가장 큰 잘못과 과오는 관습적으로 어떤 정해진 날에 해가 뜨기 전에 모이고, 그들의 신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교창 (交唱)으로 노래 (carmen)를 부르고, 범행을 하지 않을 것과 도적질도 강도질도 음행도 하지 않으며 약속을 깨지 않을 것과 물건을 맡은 후에 떼어먹지 않을 것을 의무적으로 할 것을 서약한다. 그리고 나서 통상적으로 헤어졌다가, 후에 다시 모여 함께 일상적이며 순결한 식사를 한다" (7절).

(2) 트라얀이 플리니우스에게 (97번째 서신):
 "그대에게 그리스도인으로 처벌신청이 제시된 사람들에 대한 사건들에서 법적인 조사와 관련하여 그대가 따라야 할 조처를 실제로 취하였다. 처음부터 결정된 사건에 조처를 행할 만한 일반적으로 유효한 법을 전혀 세울 수가 없다. 그들을 찾아내서는 안된다. 만일 고발이 들어오고 회부되면 그들은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예외가 있는데 그리스도인인 것을 부인하고, 그것을 행위로써 즉 우리의 신들에게 경배함으로써 입증하는 자는 비록 과거에 관하여 혐위가 있을지라도, 보여준 행위적인 뉘우침에 근거하여 용서를 받게 된다. 그러나 발신자가 적히지 않은 고발은 결코 법적인 처벌신청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이것은 아주 나쁜 소송을 의미하는 것이며, 우리 시대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5) 하드리안 (Hadrianus, 117-138)과 피우스 (Antonius Pius, 138-161)
 하드리안은 소란이나 밀고 등을 통해 관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을 압박하는 것을 금하였다. 피우스도 마게도냐와 그리이스에 보내는 여러개의 칙령에서 비슷한 조치를 하였다.

6)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kus Aurelius,161-18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은 스토아 철학자로서 여러면에서 탁월한 인물인데 그리스도인들의 순교를 보면서 고집스러움을 느꼈다. 낯선 종교들에 대한 신법제정으로 소아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과도한 박해를 당했다.

1.1.2. 박해의 이유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로마신들에의 거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보다 훨씬 우상숭배에 대하여 공격적이었다 (Bainton, 20). 이것은 로마의 종교적인 복합주의 (Pluralismus)에 거절이었다.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하는 주요한 원인은 종교정책 때문이다. 로마는 고래로 국가의 번영은 단지 신들의 은총에 의한다고 생각하였다 (Bainton, 21). 로마의 종교원리는 do ut des (내가 주기에 네가 준다)였다. 즉 내가 신에게 주면 신이 나에게 준다는 원칙이다. 그러므로 로마의 종교는 "안전그물 (safety net)"였다. 이 원칙이 로마와 신들 사이의 평화를 보장하였다 (pax deorum). 이를 거부하는 종교는 더러운 종교로 낙인찍혔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 원칙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 당국자들은 이것을 국가숭배를 망칠 위험으로 여겼다. 이것은 국사범(國事犯)이다 (crimen laesae maiestatis, crimen laesae Romanae religionis = sacrilegium).
     실제로 모든 종교는 그 생성 지역에서 로마법에 위반되지 않는 한 관용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드루이덴 (Druiden)의 인간제물은 관용되지 않았다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아인들의 드루이덴교 [Druidenkult]를 비인간적인 잔인함으로 근절시켰다", 수에톤, Vita Claudii 25). 또한 오래전부터 제국전역에 확산되어있는 종교는 인정되었다 (Bainton, 21). 유대교는 바로 이러한 종교들 가운데 하나였다. 유대교는 관용하고 기독교는 박해한 이유는 유대교는 별로 성장하지 않는데 반하여 기독교는 대단한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Bainton,23). 만일에 기독교가 계속 퍼져 나간다면 국민의 대다수를 삼킬 우려가 생겼다.

2) 로마황제 숭배거부
 플리니우스의 편지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사형에 처한 유일한 이유는 황제숭배에 대한 거부였다고 한다 (Bainton, 22).

3) 반역자로 여김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방인들처럼 애국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계의 종말을 선전하였다.

4) 기독교에 대한 몰이해
 기독교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 핍박의 한 원인이 되었다. 177년에 가울 (Gaul)에 있는 리용 (Lyon)과 비엔네 (Vienne)에서 기독교를 몰이해한 군중이 핍박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대하여는 교회역사가인 유세비우스는 갈리아교회의 편지를 소개하면서 잘 진술하고 있다 (Eusebius, H.E. 5.1)

 "가울의 비엔네와 루그두눔(Lugdunum)에 있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구속의 신앙과 소망을 가지고 있는  아시아와  브리기아의  전역에 있는 형제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로부터  오는  평강과 은혜와 영광이 있기를. 우리는 이곳의 핍박의 극심함과 이방인들의  성도들에  대한 분노와 복된 순교자들의 고난의 정도를 설명할 역량이 없다...  우리는 공공건물, 목욕탕, 시장에서 배척받았을 뿐 만 아니라 우리 중의 누구든지 어느 장소에건 얼굴을 나타내는 것이 금지되었다... 우선 그들은 떠밀어대는 군중과 폭도들의 손아래서 그들에게 찾아온 모든 것을 위엄있게 견디었다. 그들은 야유를 받았고, 얻어맞았고, 질질 끌려 다녔으며, 약탈을 당하고, 돌에 맞았으며, 감금을 당했다. 그리고 그들은 분노한 폭도들이 적과 원수들에게 가하는 모든 모욕을 감당하였다. 드디어 그들은 천부장과 시의 중직자들에 의해 광장으로 이끌려 와서 폭도들 앞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리하여 총독이 도착할 때까지 감금을 당했다... 그들은 또한 우리의 이방인 하인들 몇 명을 체포하였다. 총독이 우리 모두가 공개적으로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명령했기때문이다. 그들은 사탄이 숨어 기다림으로써 성도들이 당하는 고문을 보고 두려워하여 군인들이 강요하는대로 우리에 대하여 튀에스테스(Thyestes) 잔치를 하며, 외디푸스(Oedipus) 성교를 한다고 거짓된 고소를 하였다. 그외에도  사람들사이에 일어났다고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일들로 고소를 하였다. 그리고 이 말들이 널리 퍼져 나가자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 대하여 격분하였다. 그리하여 친척관계 때문에 우리에게 온건하게 대하던 이러한 사람들조차도 이제는 크게 화를 내게 되었고 우리에 대하여 분노를 하였다. 이때 우리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때가 이르리니 너를 죽이는 자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게 되리라"... 이제 루그두눔의 감독직을 맡았던 90세 이상된 몸이 몹씨 연약한 복된

포티누스 (Pothinus)가 시의 관원들과 온갖 야유를 던지는 모든  폭도들의 호송을 받으면서 재판석으로 끌려왔다. 총독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이  누구냐고 물었을때, 그는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합당한 사람이라면 알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집회시에 어린아이를 잡아 먹는다고 생각했다 (Thyestean banquets). 이것은 성찬시에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을 잘못 이해한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근친상간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Oedipodean intercourse). 이것은 비밀집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박해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잃었다.  이때 리용의 감독이었던 포티누스 (Pothinus)도 순교하였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대신학자 이레네우스 (Irenaeus)가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핍박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근절되지 않고 오히려 성장하였다 (Bainton, 25f).

1.2. 순교

1.2.1. 순교의 의미

 기독교는 박해를 피하고 않고 받아들였다. 이것이 일반 종교와의 차이점이며, 다음에서 살펴보겠지만 특히 당시에 유행하던 사상인  영지주의 (Gnostizismus)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W.Farmer, Jesus and the Gospel). 순교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긍정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견지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본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도하지 않는 것이다. 순교는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에 대한 긍정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순교함으로써 세상을 피하지 않고 머무른다. 이 환난 많은 세상을 떠나지 않고 그것을 인내하며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남아 죽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신앙의 인물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1.2.2. 순교의 인물들

1) 이그나티우스 (Ignatius)
 트라얀 통치시 약 110년에 안디옥에 있었던 박해로 말미암아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로마로 끌려가 맹수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이그나티우스는 로마에 도달하기까지 소아시아에 있는 6개의 교회들 (에베소, 마그네시아, 트랄레스, 로마, 필라델피아, 서머나)과 서머나의 감독인 폴리캅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가운데서 순교의 정신을 나타내는 글을 읽어보자.

 "나 자신은 모든 교회들에게 글을 쓰며 그들에게 진실로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죽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확신시키고 있도다... 나로 하여금 야수들의 먹이가 되도록 내버려 두기를 간구하노니,  그것들이 바로 나에게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예비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순전한 떡이 되기 위하여 사자의 이에 곱게 갈리는 그분의 밀이로다" (Ign. Roem 4, 이형의 역).

2) 폴리캅 (Polycarp)
 폴리캅은 스미르나 (서머나)의 감독이었다. 폴리캅이란 이름은 "열매가 풍성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는 소년시절에 사도 요한을 자주 보고 들었다. 그는 사도 요한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고 (유세비우스 교회사 5.20.6에 실린 이레니우스의 증언), 서머나의 감독으로 "사도 요한에 의하여 세움을 받았다" (터툴리안의 이단항변  De Praescrip. haeret. 32.2에 실린 서머나교회에 대한 보고. 참조. 이레니우스의 이단논박 Adv. haer. 3.3.4). 그는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그나티우스는 위에 본바와 같이 순교의 여행를 하면서 폴리캅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레니우스도 그와 교분이 있었다 (유세비우스, 같은 곳). 그는 "우리가 아직 어렸을 때 그를 보았다" (이레니우스, 같은 곳)고 말하였다. 그는 심지어 "폴리캅이 앉아서 강론하기를 좋아하던 장소를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유세비우스, 같은 곳). 이레니우스에 의하면 폴리캅은 "이웃 교회들을 견고케 하기 위하여 몇 형제들에게 권면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편지들"을 썼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폴리캅의 편지들가운데, 빌립보에 보내는 편지 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폴리캅은 155/6년에 80세라는 고령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폴리캅의 순교에 대하여는 그의 순교 직후에 기록된 "폴리캅의 순교사"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이레니우스도 폴리캅의 순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를 한다: "그는 대단히 오래 살았는데, 결국 아주 노년에 이르러 참으로 영광스럽고 장려한 순교를 하였다" (이레니우스, 같은 곳). 폴리캅은 처음에는 성도들이 강권을 이기기 못하여 도피를 하였으나 순순히 체포를 당하였고 불과 단검으로 고귀하게 순교를 하였다. 그의 순교장면을 살펴보자.

 IX 3. 그러나 총독은 윽박지르면서 "맹세하시오. 그러면 내가 그대를 놓아주리다. 그리스도를 모독하시오"라고 말하였을 때 폴리캅이 말하였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기고 있소. 그런데 그분은 한번도 나에게 불의를 행하지 않았소. 내가 어찌 나를 구원한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소?"... XI. 그러나 총독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에게는 맹수가 있소. 만일 그대가 돌이키지 않는다면 이것들에게  그대를 내주겠소". 그는 말하였다. "부르시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더 좋은 것들로부터 더 나쁜 것들로의 돌이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악한 것들로부터 의로운 것들로의 변화는 좋은 일이오". 2. 그러나 그가 다시 말하였다. "만일그대가 맹수들을 우습게 여기고 돌이키지 않는다면내가 불로 그대를 삼켜버리게 할 것이오". 그러나 폴리캅이 말하였다. "그대는 잠시동안  타다가 조금 후에는 꺼지고 마는 불로 위협을 하고 있소. 왜냐하면 그대는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마련된, 장차올 심판의,  영원한 형벌의 불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오. 왜 머뭇거리시오? 그대가 원하는 바를 보내시오". XII. 이것들과 더 많은  것들을 말하면서 그는 담대함과 기쁨으로 가득찼고,  그의 얼굴은 은혜로 충만했다. 그리하여 그는 결코 그에게 말해진 바에 의해 동요되어 연약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역으로 그 총독이 당황하여  자신의 전갈자를 경기장 가운데로 보내  세번 전달하게 했다. "폴리캅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승인했다".

3) 저스틴 (Justinus)
 저스틴은 165년에 로마에서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참수당하였다.

4) 기타
 177년 리용 (Lyon)에서 그리스도인을 잘못 이해한 민중이 분노하여 약 50명을 고문과 재판 후에 맹수에게 던졌다. 180년에 스칠리 (Scili, 북아프리카)에서 온 여섯 명의 그리스도인이 신앙때문에 총독 Saturninus에 의해 사형당하였다.

1.3. 변증

1.3.1. 디오그네투스에의 편지

 이 편지는 익명으로 되어 있다. 이 편지는 우선 종교적인 진술로 우상신들의 허무성을 주장하고 유대교의 오류를 지적한다. 이 편지는 이어서 윤리적인 진술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설명한다. 이 편지의 중요한 단락들을 살펴보자.

 I. 존경하는 디오그네투스여,  내가 보니 귀하가 그리스도인들의 종교를 배우려고 애쓰고 아주 자세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들에 관하여 조사하기를, 그들이 어떤 신을 믿고,  어떻게 그분을 예배하기에 그들 모두가 세상을 경시하고 죽음을 얕보며 헬라인들에 의하여 믿어지는 신들을 (신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유대인들의 미신을 지키지 아니하는지, 어떤 사랑을 서로에 대하여 가지는지, 그리고 왜 이 새로운 인종이  또는 삶이 드디어 이제야 태동하게 되고 전에는 생기지 않았는지 (알고자 하므로), 나는 이러한 선의를 가진 귀하를 칭찬하며,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을 우리에게 선사하시는  하나님께 구하기를 나에게는 말하는 것을 주셔서 듣는 귀하가 훨씬 더 좋게 되어지고,  귀하에게는 듣는 것을  주셔서 말하는 자가 슬프게 되지 않기를 (빕니다). II.1. 자 이제까지 귀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모든 생각들로부터 귀하를 깨끗하게 하고,  귀하를 기만하는 관습을  버리고, 처음부터 새사람인 것처럼, 마치 새로운 이야기를 - 귀하 자신도 인정하듯이- 들으려고 하는 사람처럼 되어, 눈으로만 아니라 이성으로 여러분들이 신이라고 부르게 될, 그리고 그렇게 여기는 것들이 어떤 본질과 형태를 가지고 있는지 보십시오. 2. 하나는 돌조각이 아닙니까? 짓밟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다른 것은 청동으로서 우리를 위해 유용하게 쓰이도록 불리어서 만든 그릇들보다도 못하지 않습니까? 다른 것은 나무토막인데 이미 썩어 빠지지 않았습니까? 다른 것은 은이라 도난당하지 않도록 경비원을 필요로 합니다. 다른 것은 철이라 녹슬어  망가졌고, 다른 것은 사기조각으로 가장 보잘것없는 용도로 생산해 낸 것들보다도 볼품이 없지 않습니까? 3. 이 모든 것들이 없어질 재료에 속하지  않습니까? 철과 불로 불려서 만든 것이 아닙니까? 그들 중에 하나는 석공이, 다른 것은 구리 대장장이가, 다른 것은 은세공사가,  다른 것은  토기장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까? 이들의 기술에 의하여 이러한 모양으로 구상되기 전에, 그것들 각각이 각 사람에 의하여 변형될 수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그러합니다. 지금같은 재료로부터 나온 그릇들이 같은 기술자들을 만나게 되면 이것들과 같이 되어지지 않습니까? 4. 지금 여러분들에 의하여 경배되고 있는  이것들은 다시 사람들에 의하여 다른 것들과 같은 그릇들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모두 말 못하고, 눈 멀고, 생명이 없고, 감각이 없고, 움직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들은) 모두 ?어지고, 부패할 것이 아닙니까? 5. 여러분은 이것들을  신이라 부르며, 섬기고, 경배를 하며, 결국 그것들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6. 여러분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이것들을 신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7. 여러분이 찬배한다고 생각하고 믿으면서도  훨씬  더 그것들을 경멸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그것들을 오히려 더 조소하고 비웃지 않습니까?  돌이나 진흙으로 된 것들을 경배할 때는 경비원을 두지 않는 반면에, 은이나 금으로 된 것들은 밤에는 자물쇠로 채우며 낮에는 경비원을 곁에 두어 도난당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조병수 역)

1.3.2. 아리스티데스 (Aristides)

 117년에서 138년 경에 아덴의 기독교 철학자인 아리스티데스는 하드리안 황제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기독교의 신앙을 변증하였다. 아리스티데스는 모든 종교가 그 신 개념의 고상함으로 측정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기독교인은 참된 신 개념을 가지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윤리적 성결로 두드러진다는 것을 밝혔다.

1.3.3. 저스틴 (Justinus)

 150년 경 저스틴은 피우스 황제에게 기독교 변증서 (Apologie)를 보내었다 (후론을 참조할 것).

1.3.4. 사르데스의 멜리토 (Melito von Sardes)

 172년 경 멜리토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기독교를 변증하였다. 멜리토는 국가와 교회의 친화는 쌍방에 큰 축복이 있을 것을 천명하였다.

1.3.5. 아데나고라스 (Athenagoras)

 177년 아덴 출신의 기독교 철학자 아데나고라스는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그의 아들 코모두스(Commodus,180-192)를 방문하여 청원하였다.

* 178년 경 플라톤 철학자 켈수스 (Celsus)가 "참된 로고스"라는 글에서 기독교 신앙을 논박하였다. 그는 무에서의 창조와 신의 성육신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며, 그것은 신의 불변성에 거스린다 주장하였다. 245년 경에 오리겐 (Origenes)이 이의견에 대하여 상세하게 반박하였다 (Contra Celsum).

1.3.6. 터툴리안 (Tertullian)

 197년 경 카르타고 출신인 법률가며 수사학자인 터툴리안은 개종이후 기독교의 변증서 (Apologeticum)을 씀. 그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소송에서 위법을 공격하였다. 변호사가 없다는 것, 자백을 위한 고문이 아니라 배교를 위한 고문을 한다는 것, 범죄 때문이 아니라 이름 (nomen christianum)때문에 판결을 받는다는 것, 이방 철학자들이 신들의 존재를 부인할 때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 등을 비판하였다. 터툴리안은 기독교인에 대한 처형이 신앙을 말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산시킨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의 피는 씨앗이다" (semen est sanguis christianorum).

2. 이단과 논박과 정립

2.1. 이단

2.1.1. 영지주의

 복음이 전파되는 동안 복음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생겼다. 그 가운데 영지주의가 대표적이다. 그노시스란 지식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구원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사상이다. 물질과 정신의 화해할 수 없는 대립에서 인간의 기원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인간의 영이 몸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다.

1) 영지주의의 주장의 요지
 원광 (Urlicht)가운데 한 불꽃이 천상적인 빛의 세계로부터 지상으로 떨어져 육체에 갇히게 되었다. 불꽃은 세상의 소음에 의해 귀가 멀고 자신의 본래 상태에 대하여 망각하게 되었다. 이때 원광은 구원자를 보내어 불꽃에게 원래 상태에 관한 지식을 전함으로 망각으로부터 일깨운다.

2) 자료

(1) 일차 자료:
 Corpus Hermeticum Traktat 1 (Poimandres)와 Traktat 13, 도마행전 (Thomasaktten)가운데 들어있는 진주의 노래 (Perlenlied), 솔로몬의 송시 (Odae Salomis), Nag Hammadi문서, 만다교 (Mandaeismus)문서, 마니교 (Manichaeismus)문서 중 "Kephalaia", "Manichaeischen Homilien", "Manichaeisches Psalmenbuch".

(2) 이차자료:  
 이레니우스의 Adversus Haereses
 히폴리투스의 Refutatio omnium haeresium (Philosophumena)
 에피파니우스의 Panarion

3) 신학

(1) 신론:
 영지주의에서 "신은 완전히 초월적인 존재로서  우주를 창조하거나 통치하거나 하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이다" (Hans Jonas, The Gnostic Religion, Boston 1963, 2. Aufl. 42). 그는 우주와 완전히 반립되며 "초월적인 신 그 자신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감추어져 있으며 자연적인 개념들에 의하여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에 관한 지식은 초자연적인 계시와 조명에 의하여 얻어진다" (42f).

(2) 우주론:
 신으로부터 하급의 신적인 존재들이 나왔다. 이들은 통치자들(Archons)이라고 불리우며 우주를 만들었고 그것을 거처로 삼는다. 우주는 이들이 거처하는 일곱 영역으로 겹을 이룬다 (바실리데스에게서는 365 하늘). 이들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을 지닌다(Iao, Sabaoth, Adonai, Elohim, El Shaddai). 아르콘들은 우주를 다스리는데 그들의 사명은 인간을 신으로부터 격리시키고 그리하여 지구를 감옥으로 만드는 일이다. 이들의 폭군적인 세계통치를 운명 (heimarmene)라고 부른다. 아르콘들의 지도자는 데미우르그 (demiurg)이다.

(3) 인간론:
 인간은 아르콘들에 의하여 감옥에 갇힐 뿐 만 아니라 그 자신에 의하여도 감옥에 갇힌다. 인간을 몸, 혼, 영이라는 세 요소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서 영은 위에서 말한 원광의 불꽃이다. 이 불꽃이 몸과 혼에게 갇혀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우선 영이 혼과 몸을 벗어나는 것이며 이어서 아르콘들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4) 구원론:
 그러나 이러한 구원은 인간 스스로가 이룰 수가 없다. 신이 구원자를 보내어 인간에 대한 지식을 건네줄 때 구원이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이 이 지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미 그가 원광의 불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꽃이기에 원광의 지식을 전달받을 수가 있다.  이때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에 의하여 안다" (Gleiches wird durch Gleiches erkannt)는 것이 중요한 원칙이 된다. Corpus Hermeticum에서는 신지식을 위하여 이 원리가 사용된다. Poimandres 17에서 "原人은 생명으로, 빛으로부터 혼과 정으로 되었다.  생명으로부터는 혼으로, 빛으로부터는 정으로"라고 말한다. 이때 안트로포스는 원인 (原人)을 가리키지만, 원인의 유래에 대한 정의는 일반인에게도 적용된다.  빛과 생명은 만물의 아버지인 신 곧 누스를 가리킨다. Poimandres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신적인 본질의 씨가 있다. 인간에게 누스가 있기 때문에 神인 누스를 인식할 수가 있다. 이 사실이 CH Tract. XI 20에 아주 분명하게 언급된다: "만일에 네가 네 자신을 신과 동등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너는 신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같은 것은 같은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5) 윤리: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을 악한 것으로 여겨 금욕적 (Rigorsm)이거나, 방종적 (Libertinism)이 된다.

4) 비판
 영지주의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을 혼합주의 (Synkretismus)이다. 바빌론의 점성술, 이란의 신비주의, 유대의 용어, 그리이스의 철학 등이 혼합되어 있다. 신론, 우주론, 인간론이 보여주듯이 영지주의는 삼원론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다(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원론을 주장). 신은 세상과도 인간과도 격리되며, 인간은 신과도 세상과도 격리되어 있다. 우주론과 인간론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세상과 인간에의 부정적인 세계관이다. 인간론에서 인간의 한 구성요소를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인간의 구원을 신격화 (Vergoettlichung)로 여기는 것에 반하여 재신화 (Wiedergoettlichung)이다. 인간의 영은 본래 신적인 존재였는데 물질세계에 갇혀있다가 지식 (Gnosis)를 가짐으로써 다시 신이 된다는 것이다. 유유상식 (類類相識) 이론에 의하여 구원자와 피구원자가 동일시된다. 인간론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윤리이다. 영지주의는 물질적인 몸을 악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것을 금욕을 통해 제어하든가 (Askeptismus) 아니면 어차피 몸은 썩어질 가치없는 것이라는 생각하에 방탕한 생활로 빠지거나 (Libertinismus) 하였다.

5) 영지주의의 대표자들

1) 시몬 마구스 (Simon Magus)
 이레니우스에 의하면 시몬의 추종자들로부터 영지주의가 시작하였다 (Ad.Haer.I,23,4). 시몬 마구스는 사도행전 8:9이하에 언급되어 있다. 그는 사마리아의 마술사로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보고 돈으로 이 능력을 사려고 하였다. 그는 베드로에 의하여 꾸중을 들었다. "그는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았고 질투심을 가지고 사도들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또한 명성을 얻기 위하여 더욱 더 모든 마술에 몰두하였고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처럼 경배를 받은 이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쳤다. 그는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성자로 나타났고, 사마리아에서는 성부로 내려왔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성령으로 왔다고 하였다" (Ad.Haer.I,23,1).

2) 케린트 (Cerinth)
 약 100년 소아시아. 그는 세상을 창조한 이가 하나님이 아니라 어떤 중간적 존재 (데미우르그, Demiurg)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는 단지 한 인간이며 세례받을 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했으나 수난받기 전에 떠나갔다고 가르쳤다.

3) 바실리데스 (Basilides)
 약 120-145 알렉산드리아. 원시충만 (Pleroma)에서 수많은 영적인 존재들 (아르콘들 Archonten, 에온들  onen)이 나왔는데 이들의 세상을 다스린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보내진 것은 사람들을 아르콘들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인간의 형상은 단지 환영에 불과하다 (가현설, Doketismus).

4) 발렌티누스 (Valentinus)
 약 135년 알렉산드리아. 모든 지상적인 것은 최고의 충만 (Pleroma)로 돌아갈 것을 열망한다. 인간안에 있는 영적인 요소는 구원자가 보내는 참된 지식 (그노시스)을 통하여 강하게 된다. 이 요소는 말세에 빛과 다시 하나가 된다.

5) 마르시온 (Marcion)
 140년 로마. 두개의 최고 존재를 구분: 하나는 데미우르그, 창조자, 율법의 신, 공의의 신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안에서 계시된 사랑의 신이다. 마르시온은 데미우르그를 구약의 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신약가운데서 데미우르그의 영향을 나타내는 부분을 모두 버린다. 그는 단지 누가복음 (유아사 1-2는 제외)과 열 개의 바울서신 (히브리서와 목회서신 제외) 만을 인정한다. 그는 144년에 로마교회에서 추방되었다.

2.1.2. 몬타누스주의
 170년 경 창시자 브리기아 (Phrigien) 출신의 몬타누스 (Montanus)는 여선지자라는 브리스킬라 (Priscilla)와 막시밀라 (Maximilla)를 동반하여 다니면서 세계의 종말과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선전하였다. 그는 계속적인 금식과 결혼포기를 강조하였고 순교를 피하는 것을 금하였다. 교부 터툴리안이 후에 이 입장의 많은 부분을 받아들였다.

2.2. 논박

2.2.1. 이레니우스 (Iren us)
 이레니우스는 소아시아 출신으로서 폴리캅의 제자이다. 그는 리용의 감독이었다. 영지주의 교리에 대하여 다섯 권으로 된 반박서 (Adversus haereses)를 저술하였다. 그의 논증은 신약성경의 신학적 권위에 기초한다. 교회의 교리는 사도들의 전승에 일치할때 참되다고 하였다.

2.2.2. 히폴리투스 (Hippolytus 170년 경 - 235년)

2.3. 정립

2.3.1. 신학 정립

1) 열두사도의 교훈 (디다케, Didache)
 이 교훈집은 세례, 기도, 금식, 성찬시의 기도 등을 가르치고 있다. 세례는 본래 침수를 원칙으로 하되 불가피한 경우에는 물을 부음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하루에 세번씩 주기도문을 할 것과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할 것을 말한다. 이 교훈집의 첫 부분을 살펴보자.

 열두 사도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주는 주님의 교훈.

 I. 두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며 하나는 사망의 길이다.  그러나 두 길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2. 그러므로 생명의 길은 이것이다. 첫째로, 너는 너를 만드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할 것이다. 너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너는 다른 이에게 행하지 말라.  3. 이 말씀들의 교훈은 이것이다. 너에게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금식하라. 만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면, 무슨 은혜이냐? 이방인들도 이것을 행하지 않느냐? 너희는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을 친애하고, 원수를 갖지 말라. 4. 너는 육적인 정욕들로부터 멀리하라. 만일 어떤 이가 너에게 오른 쪽 뺨에  매를 주면, 그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라. 그러면 네가 완전하리라. 만일 누가  너에게 일 마일을 강요하면, 그와 함께 이 마일을 가라. 만일 누가 너의 겉옷을 요구하면, 그에게 속옷도 주라. 만일 누가 너에게서 너의 것을 취하면, 돌려받지 말라. 네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5. 너에게 구하는 모든 이에게 주고 돌려받지 말라. 아버지께서 모든 이에게 자신의  은사들로부터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계명을 따라 주는 자는 복되다. 그는 무죄하기 때문이다. 취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 만일 누가 부족하여 취하면 그는 무죄하다. 그러나 부족하지 않은 자는 왜, 무엇을 위하여 취했는지 벌을 받을 것이다. 그가 감옥에 들어가면, 그가 행한 일들에 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푼 (Kodrant) 을 갚을 때까지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6. 그러나  이에  관하여 이런 말이 있다. 누구에게 주는지 네가 알 때까지, 너의 구제가 너의  손안에서 땀에 젖게 하라.
 II. 교훈의 두번째 계명. 2.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너는 간음하지 말라. 너는 남색하지 말라, 너는 음행하지 말라, 너는 도적질하지 말라, 너는 마술하지 말라, 주술하지 말라, 낙태로 태아를 죽이지 말며 산아를 죽이지 말라. 3. 너는 이웃의 것들을 탐내지 말라, 너는 거짓 맹세하지 말라, 너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너는 악한 말을 하지 말라, 너는 악한 것을 생각하지 말라. 4. 너는 두 마음을 품지 말고 두 혀를 가지지 말라, 두 혀는 죽음의 뱀이기 때문이다. 5. 네 말이 거짓이거나 헛되어서는 안되고, 행위로 실천되어야 한다. 6. 너는 탐욕적이며 탈취적이고 위선적이며 악하고 교만해서는 안된다. 너는 네 이웃에게 거슬리는 악한 뜻을 가져서는 안된다. 7. 너는 누구도 미워하지 말아라. 그러나 어떤 이들을 책망하고, 어떤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어떤 이들을 네 생명보다 사랑하라.
 III. 나의 자녀여, 모든 악과 그와 비슷한 모든  것에서 피하라. 2. 분을 내지 말아라. 분은 살인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질투하지 말며, 다투지 말고, 욕심을 내지 말아라. 이 모든 것들로부터 살인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3. 나의 자녀여, 탐욕자가 되지 말라. 탐욕은 음행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말을 하지 말고, 높은 눈을 가지지 말라. 이 모든 것에서 간음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4. 나의 자녀여, 새점장이가 되지 말라. 그것은 우상숭배로 이끌기 때문이다. 미혹자나 수학자나 마술사가 되지 말라. 이러한 이들을 보기를 소원하지 말라. 이 모든 것들로부터 우상숭배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2) 저스틴 (Justinus 팔레스티나의 네아폴리스에서 출생)
 저스틴은 본래 플라톤 철학에 몰두하던 사람으로 그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기독교에 입문하여 기도로 하나님과의 교통을 얻은 후에 "유일하게 믿을 수 있고 유용한 철학" (Dial.8)이라고 말하였다. 방랑교사로 로마에 학파를 건설하였다. 그의 제자 중에 타치안 (Tatian)은 유명하다.
 그는 두 권의 변증서를 썼다. 그는 여기에서 로고스교리를 발전시켰다. 하나님의 로고스가 세상창조를 위하여 아버지께로서 나왔고 아버지에게 종속하는 인격 (Subordinatianismus)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비난을 약화시키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고대의 철학과 기독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시도하였다 (G.Rauschen, Grundriss der Patrologie, Freiburg 1913, 42). 이것을 시행하기 위하여  그가 내놓은  이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배아적 (또는 산출적) 로고스 사상이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인 로고스가 가장 충만하게 나타났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의하면 각 사람은 자신의 이성 안에 로고스의 씨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처음 나신 자라고 배웠다. 그는 로고스로서 그에게 모든 인류가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증거를 하였다. 이 로고스를 따라 산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하나님 없는 자들이라고 불리었을지라도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다. 헬라인들 중에서는 소크라테스, 헤라클레이토스 등이 그러하였고, 야만인들 중에서는 아브라함... 엘리야 등의 그 이름을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하였다" (첫째 변증서, 46).

 그러나 이 로고스에 대한 참여와 진리에 대한 능력은 사람에 따라 다르고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크다.

 "각 사람이 각기 '산출적 로고스'를 분유하고 있는 비례에 따라서 그  로고스에 관련된 것을 봄으로써 훌륭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변증서, 13)

 이러한 로고스 사상에 "부적당한 점들이 생겨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것은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데 일어나는 부득이한 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로고스 교리를 전개함에 있어서 저스틴은 그 근본 목적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그 당시의 지성인에게 알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데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한철하, 고대기독교사상, 서울 1982, 37f.과 39).
 그의 첫번째 변증서 (1. Apologie)에는 세례와 성찬에 대한 중요한 설명이 담겨있다.

3) 안디옥의 테오필루스 (Theophilus, 180년 경)
 테오필루스는 하나님에 대하여 처음으로 "삼위 (Trias)" 개념을 사용하여 하나님, 로고스, 지혜 (Sophia)를 말하였다.

4) 로마의 감독 빅토르 (Viktor, 190년 경)
 빅토르는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절을 유대인의 유월절 다음 일요일에 지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부활절을 유대인들처럼 니산 (Nisan)월 14일에 지키는 사람들 (Quartodecimaner)의 의견을 물리침.

* 빅토르 당시의 삼위일체론 오류:

1) 테오도토스 (Theodotos)는 유일신 사상을 지키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단지 사람인데 신적인 능력으로 충만해졌다고 가르쳤다 (dynamistischer Monarchianismus).
2) 프락세아스 (Praxeas)는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의 현현방법으로서 한 번은 성부로, 한 번은 성자로, 한 번은 성령으로 나타난다고 가르쳤다 (Modalistischer Monarchianismus, Modalismus). 그러면 그리스도의 수난은 곧 성부의 수난이 되고 만다 (이때문에 Patripassianer라고도 불리움). 후에 사벨리우스 (Sabellius)가 이 교리를 대표하게 된다 (220년 경).

2.3.2. 정경 정립

 마르시온 (Marcion)과 같은 인물이 140년경에 로마에서 활동하면서, 한편으로는 구약을 버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약가운데서 단지 누가복음 (유아사 1-2장은 제외)과 열 개의 바울서신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몬) 만을 인정하는 주장을 함으로써 교회 내에는 정경에 대한 입장을 공고히 할 필요가 생겼다. (정경성립에 대한 켈리, 고대기독교리사, 71을 참조할 것).
 초대교회 문서들은 정경을 위하여 적어도 세 가지 큰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구약성경이며, 둘째는 주님의 말씀이며, 세째는 사도들의 권위였다.

1) 구약성경
 구약성경은 처음부터 교회의 정경으로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이 룻기를 제외하고는 모든 구약성경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2) 신약성경
 신약성경 가운데 복음서들은 주님의 말씀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어려움없이 받아들여졌다. 열두 사도의 교훈 (95-120년 경)은 이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너희가 우리 주님의 복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디다케 15:3,4; 참조. 1:3; 8:2; 11:3). 그런데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 (Papias von Hierapolis, 60-70년 출생)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다섯 해설"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유세비우스, 교회사 3.39.4), 기록된 복음서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마태 [히브리어]와 마가 [베드로 통역자], 교회사, 3.39.15) 구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나는 살아있고 영속적인 말씀보다 더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치 않았다". 폴리캅은 그의 빌립보서 (135년)에서 구약과 신약을 나란히 둠으로써 신약성경의 권위를 확고히 하였다 (후론 참조). 저스틴은 첫째 변증서 (Apol. I, 67.3)에서 선지자 저술들과 사도들의 언행록을 동일시하였다 ("기록되었다"로 둘을 연결). 이러한 연결은 이미 벧후 3:16에서 나타난다. 여기에서 바울과 구약성경이 동일한 권위로 인증된다.

 구약과 신약은 다같이 예배에서 사용되었다. 구약과 신약은 동일한 인용방식으로 인용되었다. 초대교회에는 이미 사복음서와 바울서신 (P46)과 일반사도들의 서신들이 수집되고 있었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정경성과 정경기준이 아주 이른 시기에 완료되었음을 알려준다.

출처 : 메타-성경신학연구회
글쓴이 : 펄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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