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Ⅰ. 시작하는 말
Ⅱ. 증명의 논리
1. 섭리론
2. 찬양론
3. 예언론
4. 기독론
5. 성령론
Ⅲ. 종결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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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시작하는 말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 전 8:1 -
성경의 논리 확인은 대단히 중요하다. 논리가 확인된다는 것은 바로 깨닫는 것과 그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솔로몬은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였다. 그러나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한 그 자체가 솔로몬으로 하여금 깨닫게 만들도록 한 근본적인 동력인 것은 아니다. 솔로몬으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도록 한 근본적인 동력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이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기가 깨달은 잠언을 전도자의 말씀이라고(전 1:1) 하였다. 솔로몬이 깨닫게 되기 전까지의 상태는 비참하다고 할 정도로 눈은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 마음은 피폐해진 것으로 상상된다. 그는 보고 싶은 것을 다 살펴보았으며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보았다. 그러나 진정한 심령의 만족이나 즐거움은 본 것이나 행위의 결과로 오지 않았다. 결국 솔로몬은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게 되어 자기가 깨달은 것이 이것이다라고 하면서 논리적으로 외치게 되었다. 성경은 진리이며 진리는 바로 논리를 지니고 있다. 그 논리는 이렇기 때문에 이렇다라고 하는 분명한 근거와 사실을 지니고 있다.
성경의 논리는 증명하는 논리이다. 성경은 이렇기 때문에 이렇다라고 하는 분명한 근거와 사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근거로부터 출발되지 않은 주의나 주장은 억지에 불과하다. 억지는 올바른 감정이나 의지를 가져올 수 없다. 논리적인 깨달음이 감사하고 만족스럽다는 감정과 자원하는 행동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와 맥을 같이 하여 성경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단언하고 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 됨을 확인하는 것이 인간의 뇌를 말끔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이래서 이렇다라고 하는 증명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 증명이 없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미로에서 헤매며 죽어갔고 죽어가고 있다. 성경의 논리를 확인하는 것은 결국 성경이 진리됨을 확인하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
성경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성경의 내용을 근거로하여 성립된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정리함에 있어 성경론보다는 성경관이라는 용어가 표현이나 의미면에서 보다 자연스럽다. 일반적으로 문단(文段)이 결합되어 하나의 논(論)이 되고 논이 결합되어 하나의 관(觀)이 되며 관이 결합되어 하나의 학(學)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성경관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성경의 논리이다. 성경의 논리는 결국 하나이다. 성경이 본질적으로 하나로 정리될 수 있을 때 성경관이라는 의미가 제대로 부여되는 셈이다. 그래서 성경은 총체적이며 여러 부분이 모두 유기적으로 조화되어 입체화되어 있다. 올바른 성경관만이 성경신학을 산출할 수 있는 것이다. 올바른 성경관이라는 것은 성경은 오직 하나님 계시이며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것의 증명은 성경 자체의 논리에 의하여 가능해진다.
성경의 내용은 언약과 성취이다. 구약성경은 언약의 내용으로 신약성경은 성취의 내용으로 정리된다. 이것은 성경의 근본적인 목적과 본질이 하나라는 올바른 성경관에 의해서 가능해 진 것(박용기, 성경개론, 진리의 말씀사)이다. 구약성경을 언약으로 신약성경을 성취로 본 것은 성경이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논리에 의하여 분석된 것이다. 그래서 이것에 의하여 올바른 구약성경관과 신약성경관이 형성될 수 있다. 언약을 이루게 되는 요소 내지 방법이 세 가지로 되어 있는데 섭리와 찬양과 예언이다. 이 세 가지가 언약이라는 구약성경관을 이룬다는 점에서 각각에 대하여 논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관은 섭리론과 찬양론 그리고 예언론으로 이루어 진 셈이다. 마찬가지로 신약성경관은 성취인데 그 성취를 이루고 있는 요소 내지 방법이 예수를 통한 성취와 성령을 통한 성취이다. 여기서 성취라는 의미는 사역이라는 의미로도 통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관은 기독론과 성령론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이 글에서는 성경의 논리라는 제목으로 집약되었는데 성경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와 내용에 의하여 근거한 것이다. 논리의 전개를 위하여 언약과 성취라는 기본적인 논리에 의하여 단계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본론에서 전개되는 내용은 근본적으로 분석된 결과 자체를 각각 하나씩 따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전체속에서의 부분만이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의 제목과 목적이 배제되어 본론에서 전개된 것들이 다섯 개의 논점으로 분리된다면 이 글의 생명력은 잃게 될 것이다. 이 한 가지에 유의하여 필자나 독자가 이 내용을 보다 세밀히 연구한다면 기존의 교의신학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성경신학(박용기, 성경신학개론, 진리의 말씀사)이 보다 흥미진지하게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Ⅱ. 증명의 논리(언약 +성취)
무엇을 아는 데 있어서 확실한 증거는 꼭 필요하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지식은 궤변이나 억지에 불과하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의 논리는 증명의 논리이며 그 증명의 논리는 언약과 성취로 연결되어 있다. 증명하는 원리 내지 논리로 언약과 성취보다 나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구약성경은 언약의 내용이고 신약성경은 성취의 내용이다. 이 언약과 성취라는 내용 구조로서 성경은 완전한 논리를 지닌 셈이며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확실히 증거한다. 한번 언약해서 그대로 이루어지면 그 언약과 성취의 주관자는 완벽하게 증명되는 것이다. 물론 인간과 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이 지엽적으로 증명될 수도 있다.
진리가 되는 조건은 근거와 사실이다. 분명한 근거에 의해서 사실로 드러날 때 진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크게 언약과 성취로 되어 있다. 언약은 성취가 되는 근거가 되며, 성취는 그 언약에 따라 이루어지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가 진리라고(요 14:16) 한 이유는 여호와의 언약대로 오신 이가 바로 자기이기 때문이다. 언약은 그 언약의 근거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성취는 언약에 따라 이루어지는 사역(사실)을 중심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근거(목적) 없는 사역 자체는 무의미하며 사실로 드러나지 않는 근거만으로도 소용없다. 그러므로 근거와 사실은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 언약과 성취를 성경의 자체 논리를 따라 좀더 세부적으로 분석하면 섭리와 찬양과 예언을 통하여 언약되었고 예수와 성령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언약되기 위하여 섭리되었고 찬양되었으며 예언되었다. 마찬가지로 성취되기 위하여 예수가 오셨고 성령이 강림하였다. 이렇게 목적과 내용과 방법이 분명한 것이 성경의 논리이다. 목적이 빠진 내용은 무의미하며 또한 내용이 빠진 방법도 무의미하다. 반대로 목적이 분명한 내용은 정말 가치가 있으며 내용이 있는 모든 방법도 가치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언약이라는 것에 의하여 분석된 섭리론과 찬양론 그리고 예언론은 그 하나 하나가 모두 가치로운 것이다. 또한 성취에 의하여 분석된 기독론과 성령론도 성경을 조감하는데 모두 중요한 부분들이다.
이 증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본주의자들은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은 신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소위 지성인들을 자극하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나 속성을 증명하는 근거로 과학을 내세우다니 위험천만한 일이다.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계시되지 않았으며 그렇게 계시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한다면 그렇게 계시될 수 없는 것에 대해 짐작이 갈 것이다. 정말 성경에 근거한 신학은 있을 수 없는가? 성경에 근거한 신학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증명할 수 있다. 성경에 근거한 신학이 바로 성경신학(박용기, 성경신학개론, 진리의 말씀사, 1997)이다. 20c가 지나가기 전에 성경신학의 기초와 결론이 드러난 것에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이에 논자도 그것에 고무되고 힘입어 부분 부분들을 연구하고 확인하고자 한다.
요컨대, 언약과 성취라는 논리에 의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이 증명되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증명이며 포괄적인 증명이다. 성경의 논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증명하는 논리이다.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증명하기 위한 논리가 바로 언약과 성취라는 논리이다.
1. 섭리론
근본적으로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섭리(롬 11:36)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언약 섭리이고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성취 섭리이다. 천지만물의 창조와 보존과 심판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이다. 이렇게 성경전체의 언약 섭리와 성취 섭리를 전체적인 섭리라고 한다면 창세기부터 에스더서까지는 부분적인 섭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적인 섭리는 3대언약 섭리와 3대언약 성취 섭리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는 이 3대언약 성취 섭리를 기초로하여 섭리론을 연구하고자 한다.
이스라엘 역사 섭리의 근본적 근거는 하나님의 작정이며 영원한 언약이다. 이것은 가정이나 억지의 주장이 아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 섭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의하여 진행된다(왕상 1:35, 잠 16:33, 사 10:23)고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역사서에는 어떤 사건이나 일이 이루어졌을 때 그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나 명(命)대로 되었다는 해석을 자주 해주고 있다. 심지어 노아 방주에 들어가는 모든 생물의 내용이나 방법도 모두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되었다(창 7:5).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었던 성막이나 성전 모두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이 역사서 자체가 밝혀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명령이 근본적으로 시간에 맞추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원한 말씀이나 명령이 시간적으로 계시될 뿐이다. 예수님이나 사도들도 되어지는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작정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들의 행위나 의지에 따라 맞추어 진행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작정에 맞추어져 모든 것이 진행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본주의 자들이 주장하는 인과론(因果論)과 섭리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의 섭리는 창조주로서 피조물에 대한 통치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아주 구체적이다. 그것이 역사서에 나타난 언약 성취 섭리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언약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3가지 큰 언약(3대언약)을 했는데 그것들은 생육과 정복과 통치(창 1:28)이다. 섭리를 통한 언약은 세부적으로 그 내용이 언약과 성취로 되어있는데 그 언약은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였으며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으며 유다 왕국이 건설되어 보호되었다. 이처럼 역사서 내용은 성취성을 지니고 있다. 역사서는 표면상으로 많은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서는 사건을 단순하게 나열한 내용이 아니고 그것에 대한 해석과 해설을 내포하고 있다. 역사서에는 어떤 사건이나 일이 여호와의 언약과 명령대로 되었음을 설명해 주는 해설이 많이 있다. 이처럼 역사서는 사건의 시작과 과정과 목적 등을 설명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역사서의 언약과 성취라는 내용 구조는 증명하는 논리이다. 그것은 역사서가 하나님의 섭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 섭리를 통하여 언약됨을 밝힌 것이다.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핵심적으로 잘 증거하고 있다. 언약하여 이루는 것은 언약 성취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내용 구조이다. 더 나아가 여호와의 속성을 증거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한 셈이다. 또한 여호와의 사역을 증거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결국 하나님은 언약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섭리하시고 더 나아가 신약의 언약 자손들도 그 언약에 근거해 섭리하는 셈이다.
인과론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의 존재나 발생 그리고 결과의 원인으로 항상 구체적인 물체나 사람에게 돌리는 것이다. 이것은 얼핏보면 아주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설득력을 지닌 것 같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근본적인 원인이나 궁극적인 결과에 대해서 항상 가정할 수밖에 없는 함정이 있다. 대개 설득이나 인정은 부분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을 가지고 설명될 때 주어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것들과 부분적인 것들은 그것이 있게 되는 근본적인 근거가 증명되지 않을 때 여러 가지 가정만이 난무하게 될 뿐이다. 이러한 인과론은 때로 성경이 증거하는 섭리론과 유사하게 설명되고 보여질 때도 있다. 그러나 이 인과론은 결국 숙명론과 만나게 되어 있다. 근본적인 주관자나 목적 그리고 의미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것은 숙명론이며 인과론이다. 성경은 모든 범사의 주관자를 하나님께 두며 모든 성취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그런데 현대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작정이 언급되거나 관심을 가지는 일을 거의 볼 수 없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맹점이다. 대부분의 현대 교회는 가장 중요한 것을 빼버리고 항상 열매나 바라보는 환상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다. 취해서 잘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섭리론과 인과론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성경에 근거해서 밝히는 일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의 섭리는 언약대로 되고 그 언약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의하여 된다. 이것이 바로 섭리론의 논리이다. 영원한 작정 없이 어떻게 언약되고 섭리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작정은 모든 것을 밝혀준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역사서에 전개된 섭리의 근본적인 근거가 된다.
2. 찬양론
근본적으로 성경 전체는 하나님 계시 영광의 찬양(시 150:6)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을 찬양한 것이고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성취를 찬양한 것이기도 하다. 창조와 보존과 심판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는 찬양(유 1:25)이기도 하다. 이렇게 성경전체의 언약 찬양과 성취 찬양을 전체적인 찬양이라고 한다면 욥기서부터 아가서까지는 부분적인 찬양이 되는 셈이다. 이 부분적인 찬양은 하나님의 5대속성에 대한 찬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는 이 하나님의 5대속성에 대한 찬양을 기초로하여 찬양론을 연구하고자 한다
찬양의 근본적 근거는 하나님의 예정이다. 언약자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찬송하게 되는데 그 찬송의 근본적인 근거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택하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원하신 택하심이 기독교의 은혜의 본질이다. 이 은혜의 영광을 언약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전능성ㆍ성실성ㆍ주권성ㆍ영원성ㆍ자비성 등으로 세밀하게 찬양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택하시는 성질은 앞에서 열거한 5대속성과 모두 관련됨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도 찬송의 근거가 창세전 하나님의 택하심에 있음(엡 1:3~6, 벧전 1:3~4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찬양의 뿌리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 뿌리는 발견하여 깨달아 가면 갈수록 튼튼하고 풍성하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정의 근본적인 대상이 되시며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근본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예수의 구속만 언급되는 것은 진정한 구속론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구속론은 뿌리 없는 잘린 잎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찬양의 지엽적 근거는 언약자손의 깨달음이다. 언약자손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한 자손이며 반드시 하나님을 배워 알아 깨닫게 된다. 깨달음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대한 깨달음이다. 시가서는 언약 자손들이 여호와의 속성을 깨달아 찬양한 내용이다. 하나님의 많은 속성 가운데 특별히 다섯 가지를 각각 특징있게 부각시켰다.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하려고 하나님은 언약 자손들의 감정을 사용하셨다. 언약자손들은 하나님의 역사 섭리를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묘사하였다. 인간이 인간의 심리를 묘사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인간이 깨달아 듣고 보고 느끼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욥 42:3)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다. 욥은 하나님의 섭리의 전능성을 깨닫고 과거에는 여호와에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는데 이제는 눈으로 뵈옵나이다(욥 42:1~5)라고 고백하였다. 시편은 성실성을 과거의 역사를 연상시켜 잘 묘사하였다. 마찬가지로 잠언서도 여호와의 주권성을 개인사와 가정사와 국가사를 들어 여호와의 손길을 만난다고 묘사하였다. 마찬가지로 전도서와 아가서에서도 인간의 육체적인 감각으로는 전혀 보거나 만질 수 없는 여호와의 영원성과 자비성을 각각 마치 꿈속에서 듣고 보는 것처럼 잘 묘사하였다. 그래서 시가서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문체적인 특징으로 묘사성(描寫性)을 간과할 수 없다. 나타내고자 하는 여호와의 속성을 다른 것을 들어 계시하였는다는 점에서 이 묘사성은 비유적인 찬양(욥 38장~41장)과도 그 관계가 밀접하다. 즉 시가서에서는 여호와께서 직접 자기를 표현하지 않았고 언약자손들의 찬양을 통하여 여호와의 속성이 묘사되었다. 이러한 찬양은 여호와께서 언약자손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고 동시에 감동케 하심으로 되어진 것이다.
그런데 현대 교회 강단에서는 찬양의 근본적인 근거인 예정론이 거론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대해 두려움까지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예정론이 강조되지 않고 단지 구속만이 외쳐지고 있는 현대 교회의 실상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성을 느낀다. 그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비성경적인가를 확인하게 되면 몸서리치며 놀라게 될 것이다. 뿌리와 줄기에 붙어있는 무성한 잎과 가지에서 떨어져 말라빠진 잎은 다른 것이다. 붙어있는 것은 산 것이고 떨어진 것은 죽은 것이다. 예수는 예정대로 죽으시고 살아나신 것(행 3:20)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속이 예정대로 된다는 것이다. 예정대로 된다는 것이 강조되지 않고 구속만이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예정이 강조되면서 구속이 그 예정대로 된다는 것이 성경적이다. 현대 교회의 부흥회라는 것이 대개 구속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성도들을 열심내게 하려는 데 있다. 그래서 모이면 십가가를 부르짖으며 자기를 위해 죽으신 예수를 억지로 생각하여 감정이나 흥을 일으키려고 한다. 벌써 뭔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신사적(행 17:11)이지 못하다. 이렇게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감정들은 얼마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아니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하게 된다. 어쩌면 마취된 것이고 그 분위기나 기분에 자꾸 사로잡혀야 하는 충동을 계속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찬양이 나오는 논리는 분명하다. 찬양은 하나님의 작정(예정)대로 만사가 섭리된다는 것을 깨달으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대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를 예정하고 그 예정대로 그리스도께서 예정된 성도를 위하여 죽으시고 살으셨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확인하면 찬송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지정의를 섭리하여 찬양을 낳게 한다. 그래서 구약의 언약자손들도 인간으로서는 듣고 볼 수도 없는 하나님의 속성들을 찬양한 것이다.
3. 예언론
근본적으로 성경 전체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예언의 말씀(벧후 1:20~21)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을 예언한 것이고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성취를 예언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성경기록을 마감하면서 성경 전체를 예언의 말씀(계 22:18~19)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성경 전체로서 언약과 성취 예언을 전체적인 예언이라고 한다면 이사야서부터 말라기서까지는 부분적인 예언인 셈이다. 이 부분적인 예언은 하나님의 사역을 예언한 것이다. 여기서는 구약성경 선지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예언을 기초로하여 예언론을 연구하고자 한다.
예언의 근본적 근거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다. 이것을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단서로 선지서에 자주 언급된 ‘여호와의 말’과 ‘여호와의 말씀’과 그리고 ‘여호와가 말하노라’와 같은 표현(대선지서와 소선지서에 자주 나옴)이 많다는 점이다. 어떤 예언의 내용을 말하기 전에 먼저 ‘여호와가 말하노라’는 것으로 여호와의 말씀임을 못박았고 또 예언의 내용을 말하고 나서는 그 예언들이 분명히 여호와의 말씀임을 ‘여호와의 말씀’이나 ‘여호와의 말’과 같은 의미로 결론지었다. 이 모두는 비록 선지서가 여러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예언되었지만 그 모두가 여호와의 말씀임을 확실히 천명한 셈이다. 이러한 ‘여호와의 말’과 같은 단정은 과거 역사 섭리에 대한 해석과 미래 역사 예언에 대한 본질이며 결론이다. 선지서는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역이 계시되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때리신다고 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 너희들이 이렇게 잘못했기 때문임을 밝히신다(대선지서 전반부에 자주 언급됨).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가 모두 하나님의 섭리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잘못 섭리하시고 잘못에 대한 책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어 때리시겠다고 예언한 것으로 보인다. 얼핏 생각하면 여호와의 말씀이 모순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선지서의 예언들도 역사서와 시가서에 계시된 하나님과 연관되어 동일하게 하나님은 여호와로 계시되었지 다른 성질로 계시된 것이 결코 아니다. 이 문제 때문에 여기서 논해지고 있는 근본적인 근거를 연구하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과 예정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과 선지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여호와의 말’과 같은 의미는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근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을 영원적인 작정에 근거하여 예언하게 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뒤따라 예언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때리시고 싸매시는 것이다. 선지자들이 예언한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맞을 짓을 한 택한 백성을 때리시며 이방민족은 망하게 하시고 유다왕국은 결국 싸매어 회복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특히 대선지서에서 대개 전반부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국가를 낮추는 사역이 예언되었고 후반부에는 높이는 사역이 예언되어 있다. 그래서 전반부에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많이 지적하여 때리겠다는 예언이 많고 후반부에는 이스라엘이 많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회복하시겠다는 예언의 내용이 많다. 이러한 예언들은 모두 그리스도가 오실 것에 대한 언약이다. 그 언약대로 그리스도가 오셔서 죽고 부활하신 것이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예언은 하나님의 과거 섭리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다. 과거 언약에 맞추어 예언되는 것이지 과거에 언약된 것을 배제하고 예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예언에 있어서도 언약을 빼놓고서는 제대로 정리될 수 없다. 과거 섭리와 미래 예언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과거를 섭리하시는 하나님과 미래를 예언하시는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며 같은 언약을 하신 분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세 부분인 섭리와 찬양과 예언은 모두 동일한 성질로 여호와의 언약이 된다.
여기서 주의 해야 할 점이 있다. 그 주의 할 점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섭리나 예언의 근거를 보지 않고 어떤 일면이나 단면만을 보는 점이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가게 되고 죽도록 고생하게 될 것이라고만 하는 것은 근본이 빠진 지엽적인 설명이다. 그러한 해석은 선지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근거를 찾지 못하고 단지 인간의 역사서나 예언서로 여기는 것으로부터 주어지는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들보다 특별히 죄가 더 많아서 열방에 흩어져 죽도록 고생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영원한 여호와의 말씀을 빙자하여 성도의 행위나 삶에 협박이나 공포심을 조성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하여 바벨론에 포로가 되고 만방에 흩어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인데 성도로서 이런 식으로 살아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렇게 두들겨 맞게 된다는 식이 바로 그런 예이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 잘못하면 그 잘못의 대가로 벌을 받는다는 식은 교회 강단에서 쉽게 들어볼 수 있는 이야기다. 선지서의 말씀들이 이런 식으로 사용되라고 기록된 것은 결코 아니다. 심지어 선지자들이 예언했으니 하나님의 백성은 지금도 예언을 할 수 있다는 식도 있다. 이것은 성경의 본질을 모르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선지서가 여호와의 언약이라는 기본위에서 볼 때 하나님을 더욱 자세히 알 수 있고 선지서를 통해 참으로 위로를 얻을 수 있다.
결국 선지자들의 예언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계시된 것이다. 그 선지서들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의 지정의를 사용하시어 깨달아 예언하게 하신 것이다. 예언은 미래에 대한 선포인데 하나님의 작정과 감동하게 하심이 없이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역사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정과 언약대로 된다는 것으로 해설하는 성질이 강하고, 시가서는 여호와의 속성을 찬양함에 있어 묘사하는 성질이 강한 반면, 예언서는 단언하고 단정하는 성질이 강하다. 선지서에는 표현상으로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겠다든가 아니면 장래 일이 어떻게 되리라고 한 것이 많다. 결국 예언서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가 단정적으로 드러났다.
4. 기독론
근본적으로 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내용(눅 24:27)이기도 하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메시아를 언약한 내용이고 신약성경은 메시아가 성취되는 내용이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은 구약성경을 가리켜 자기에 대한 증거라고 정리하셨다(요 5:39). 이렇게 성경 전체는 메시아를 언약하여 그 메시아가 성취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 메시아 성취의 주제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이다. 4복음서에는 예수님 자신이 직접 자기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4복음서는 예수의 성취 사역이다. 여기서는 4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성취 사실을 기초로 하여 기독론을 연구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기독론의 중심 논제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어서 신성과 인성의 결합관계에 관한 것이다. 기독론에 관한 전통적 교의는 “한 인격 안에 참되고 바른 신성과 인성이 확실히 구별된 가운데 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의를 중심으로 기독론에 관한 논쟁이 역사적으로 계속 있었고 성경적인 결론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기독론을 연구하고 성경적으로 이렇다라고 대안을 찾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기독론에 관한 연구가 이 정도에 머물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성경 전체의 내용 구조를 언약과 성취라는 논리로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약과 성취라는 언약사적 관점으로 볼 때 기독론의 핵심적인 질문은 예수는 왜 오셨는가?라는 것이다.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질문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 근본적인 질문이 제대로 던져질 때 궁극적인 해답이 바로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직임이나 신분 그리고 사역과 본성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그것들을 포괄할 수 있는 질문은 근본적으로 예수는 왜 오셨는가?라고 하는 문제이다. 구체적인 내용이나 방법은 그것을 총괄할 수 있는 분명한 목적에 의해 다 설명될 수 있다. 왜 예수가 오셨는가?라는 것은 예수는 무엇을 하려고 오셨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더 근본적이며 핵심적인 것이다. 예수는 자기가 이 땅에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마 6:10, 요 6:38~39)고 밝힌다. 아버지의 뜻은 분명히 앞에서 밝힌 적이 있는 작정과 예정과 결부되어 있다. 예수가 이 땅에 오는 문제는 작정과 예정의 핵심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작정하고 무엇을 예정하셨는가에 있어서 예수를 제외시키고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이 메시아를 언약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 즉 역사 섭리와 찬양과 예언을 통하여 모두 언약되었다. 예수는 작정에 근거한 언약대로 오시는 것이다. 예수가 오시는 자체에 목적과 의미가 있다. 오시는 자체가 보내시는 이를 증거(요 4:34)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가 오시지 않았다면 구약성경은 모두 거짓말이 되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예수가 이 땅에 오는 의의와 목적을 살펴보는 것이 기독론의 핵심일 것이다. 결국 예수가 이땅에 온 것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지엽적으로 자신의 직임과 신분과 사역과 본성을 전하기 위해서다. 구약의 언약대로 오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신약성경 시작(마 1:1)에서 밝혀준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서론이자 결론이다. 아울러 구약성경과 논리적 연결을 아주 잘 해주고 있다. 예수의 직임은 선지직과 왕직 그리고 제사장직이다. 구약의 그림자적인 직임들은 모두 부분적이거나 불완전한 것이지만 예수가 이루시는 직임은 전체적이고 완전한 것(히 9:11)이다. 예수의 신분을 증거함에 있어서도 완전한 논리로 예수가 그리스도됨을 밝힌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 가장 낮아지신다. 그 다음에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만유의 주로 드러나 결국 주이신 그리스도로 증명되었다. 예수의 사역은 부분적으로 누가복음에 집약되어 있다. 사역은 이론을 증거하는 사역과 실제를 수행하는 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론적으로는 아들과 천국에 대해 증거하시고 실제적으로 몸소 죽고 부활하신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사역이다. 이 완전한 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 되심을 증명한 것이다. 예수의 본성은 신성이시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와서 다시 갈 수 있는 분은 신이 아니고는 할 수가 없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왔다가 간다는 사실을 증거하심으로 자기가 그리스도 됨을 증명하였다. 이렇게 예수는 자기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위와 같이 4가지를 입체적으로 조화하여 완벽하게 사용하였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예수가 온 것이 언약에 근거한 것이 강조되지 않고 단순히 죄인을 구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에 대개 초점이 맞추어 진다. 이것이 기독론의 핵심을 흐리게 하는 요점이다. 예수가 오시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계시되는 중요한 사건이다. 즉 약속대로 오심으로 하나님은 전능성, 성실성, 주권성, 영원성, 자비성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이 여호와 되심과 여호와 속성이 기본이 되지 않고 단순히 예수는 오로지 죄인을 구하기 위해 오셨다라고만 한다면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예수는 인간을 구하러 오셨기 때문에 인간이 예수를 영접해야 된다는 당위성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예수를 영접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능력자로 둔갑이 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인간은 영접하고 믿어 영생을 얻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영생을 얻도록 하신다는 것(요 3:16)이다. 보편적으로 영생을 얻게 하는 주체는 약화되거나 없어져 버리고 오히려 저를 믿는자마다 누구든지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부분을 정확히 해석하는데 성경의 구조적인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가? 성경의 구조적인 이해가 없이 단순한 인간의 본성에 의해 성경이 해석되고 강조됨으로 해서 결국 성경적인 신은 증거되지 않고 만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예정하신 예정의 근본적인 대상(벧전 1:20)이다. 지금의 교회들은 예수가 왜 이 땅에 오셨는가를 성경을 통하여 근본적으로 확인할 때가 되었다. 이러한 작업이 없이 단순히 인간중심적인 자기를 위하여 왔다는 생각은 엄청난 오해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오해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폐해도 엄청날 것이다.
예수가 이 땅에 오는 문제가 왜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그것은 하나님 계시와 근본적으로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수가 이 땅에 약속대로 오면 보내신 그 이가 여호와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전부 하나님을 여호와로 증거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처럼 구약성경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증거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예수가 오지 않는다면 그 초점이 맞지 않는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도 오셔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간구(마 6:9)하신 것이다. 아울러 성도들이 기도할 때도 예수의 이름으로 결론을 맺는 이유도 바로 예수가 하나님을 여호와로 증거하시기 때문이다. 예수가 이 땅에 오는 것은 하나님을 여호와로 증거하시기 위해서다.
5. 성령론
근본적으로 성경 전체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딤후 3:16)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언약된 말씀이고 신약성경도 동일하게 성령의 감동으로 성취되는 말씀이다. 그래서 창조와 보존과 심판도 모두 성령의 사역이다. 이렇게 성경 전체는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진 언약과 성취이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가면 성령이 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대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성령이 임했던 것(행 2장)이다. 그런데 신약성경 전체의 주제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이다.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성령의 성취 사역을 통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 성령의 성취 사역 부분을 기초로하여 성령론을 연구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성령은 하나님이라고 인정하며 그렇게 합의를 하고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면 성령론의 핵심 문제는 무엇일까? 성령은 왜 오셨는가 하는 것이 성령론의 핵심이다. 문제의 핵심이나 초점을 바로 잡지 못하면 모든 것은 흐려지고 만다. 한국 교회의 성령론이 성경적으로 잡히지 못하는 이유도 초점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은 근본 하나님이신데 강림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령이 오게 되는 근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성령론의 본질 문제이다. 성령이 강림하고 나서 성령이 강림한 것이 구약의 약속대로 된 것임을 밝히기 위하여 사도행전에서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행 2:16~21)하였다. 신약성경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대부분 구약성경의 약속대로 된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이것만 보아도 성경을 언약과 성취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언약하고 성취하는 내용속에 성령이 약속되어 있고 성령이 올 것도 약속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가시면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성령을 보내시기로 약속한 말씀이 없는데 예수께서 마음대로 성령을 보내시기로 약속하시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대로 오시고 뜻대로 가신다고 하셨다. 여호와의 근본적인 약속인 예수를 약속할 때에 그의 지체로서 교회도 약속된 것이다. 교회가 약속되었는데 성령이 오시기로 약속되지 않았다면 약속된 그 교회는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성령께서 교회를 세워서 승리하기까지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근본적인 언약은 예수이고 그 근본적인 언약 속에 지엽적으로 성령과 교회 그리고 지체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령은 여호와의 약속대로 강림하시는 것이다. 문도들이 모여서 기도한다고 해서 성령이 강림한 것은 결코 아니다. 성령이 임하니 감동을 받아 기도다운 기도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약성경의 두 부분 가운데 뒷 부분은 성령께서 교회를 중심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내용이다. 그 내용이 교회를 중심적인 매개로 하여 전개되기 때문에 교회중심의 논리라 하고 그것의 논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행전은 성령이 약속대로 임하여 교회를 설립한 내용이다. 성령이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성취의 구체적 작업인데 그 성취로 말미암아 결국 예수가 그리스도로 입증된다. 교회의 설립으로 증거하는 내용은 주로 설립의 동기 내지 근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 동기는 바로 약속이다. 성령의 약속 성취는 예수의 최후 약속을 이루는 것이다. 약속 때문에 성령이 임했고 약속이 있었기에 교회가 창설된 것이다. 성령께서 교회를 만들어 키우시는데 그 키우는 구체적 내용이 로마서부터 갈라디아서까지이다. 로마서는 교회를 칭의의 복음으로, 고린도전후서는 건덕의 복음으로, 갈라디아서는 은혜의 복음으로 각각 성령께서 양육시킨다는 것이다. 그 중심 논리가 양육의 양식(糧食)으로 전개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양식이 바로 복음 진리이다. 성령께서 시간과 공간과 상황에 적절하게 교회를 양육시킴으로 결국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함이 된다. 성령께서 교회를 양육하여 무장시킨다는 논리가 에베소서에서 빌레몬서까지 전개되어 있다. 그 논리는 먼저 교회의 진리로 무장시키고 다음에 교회의 생활로 무장시키며 그 다음에 투쟁을 위하여 교회의 체제로 무장시킴이다. 그 중심 논리가 무장의 절차를 따라 전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절차는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또는 이론적인 것에서 실제적인 것으로 그리고 머리에서 지체로 준비시키고 무장시키는 것 등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에베소서에는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冑)을 입으라는 권고로 무장시키는 내용이 상세하고도 재미있게 전개되어 있다. 성령께서 교회를 무장시켜 투쟁케 한다는 논리가 히브리서에서 유다서까지 전개되어 있다. 그 투쟁의 논리는 대상과 투쟁의 정도 따라 전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대주의에 대해서 경계할 것과 세속주의에 대해서는 배격하고 그리고 적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대적할 것을 증거하는 것으로 성취된다. 유대주의와 세속주의와 적그리스도는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최대의 적인데 그것은 통틀어 악의 세력 내지 마귀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투쟁으로 증거된 부분은 교회가 무엇과 투쟁하게 되는가를 논리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성령께서 교회로 투쟁하게 하여 결국 승리하게 한다는 논리가 계시록에 전개되어 있다. 그 승리의 논리도 크게는 약속을 성취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계시록의 전반부는 주로 어려움에 처해있는 일곱교회에 성령께서 이기는 교회에 주어질 것을 약속하는 말씀으로 되어 있고, 후반부는 약속대로 승리하게 되는 과정을 통하여 결국 그 약속을 이루는 것으로 되어 있다. 승리하는 성취를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리스도에게 영광과 권능이 있으므로 앞에서 언급된 대적을 진노하고 심판하여 승리와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계시록의 논리는 주로 승리의 주체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승리의 주체는 당연히 교회인데, 그 교회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는 근본적인 주체이며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교회(성도들)는 지엽적인 주체이다. 성령은 교회로 승리하게 만드는 주관자의 역할을 한다.
기존의 전통신학에서는 신약성경의 논리적 통일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비록 논리적 통일성을 찾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 증거 일변도로 가정하여 결국 논리의 비약이 있게 되어 비논리화 되었던 것이다. 한국교회처럼 성령에 대한 오해를 많이 하는 교회도 세계 교회에서 드물 것이다. 성령이 하나님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사람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는 존재로 성령을 오해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을 오해한 결과로 말미암는 것이다. 성령이 하나님이라면 성령은 자기의 능력과 뜻대로 성도들의 능력과 뜻과는 무관하게 교회를 세우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성령이 말씀을 깨닫게 하지 않으면 비록 천재라고 한다하더라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다. 말씀을 깨닫게 하는 것이 성령의 중요한 사역이다. 한국 교회는 성령론을 성경 자체의 논리에서 정리하지 못함으로 오해의 연속으로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다.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성령론을 정리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이 잘 기록되어 있다. 이런 차원에서 성경신학은 성령론을 성경 안에서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
성령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알게 하는 인식의 주관자이시다. 성령은 성경기록의 영감 사역부터 진리인 성경 인식과 중생한 이성(교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케 하는 사역까지 하신다. 위에서 살펴본 성령을 통한 성취 부분을 통해서는 성령께서 구체적으로 교회를 창설하고 양육하며 무장시키시고 비진리와 투쟁케 하시며 교회로 하여금 승리케 하심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여 결국 하나님을 여호와로 증명하신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한 것이 간접적인 사역이라면 예수께서 오셔서 자기를 그리스도로 증거한 것은 직접적인 사역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성경전체에서의 성령의 사역이 자리매김됨으로 언약을 함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과 성취함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 등과 같이 구체적인 부분에서도 성령론을 연구할 수 있다고 본다.
Ⅲ. 종결하는 말
성경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려는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을 위해 분명한 내용과 방법이 제시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의미와 목적이 상실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느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목적과 의미 의식을 중심으로 지금의 시대를 평가하고 진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긍정적이고 소망적인 평가를 얻어 낼 수 없을 것이다. 목적과 의미 추구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오히려 문화와 문명의 발전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기준이 없는 상대적인 학문은 더 큰 설득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얻는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성경적인 분명한 논리가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성경의 논리는 근본적인 목적 하나를 위하여 내용이 드러나고 방법론이 제시되었다. 그 근본적인 목적 하나는 하나님 계시이며 하나님을 여호와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 언약과 성취라는 내용으로 조직되었다. 언약을 증거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섭리론과 찬양론과 예언론이 제시되었고 성취를 증거하기 위한 방법론으로는 기독론과 성령론이 제시되었다.
언약을 위한 방법론으로 섭리론과 찬양론 그리고 예언론은 상호 유기적이며 근거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특히 언약을 위한 방법론으로 섭리론은 찬양론과 예언론의 역사적 배경을 지님으로 그 중요성이 각별하다. 찬양은 과거 섭리를 깨달을 때 가능한 것이며 예언도 과거 섭리를 배경삼아 미래의 결과를 선포하는 것이다. 또한 찬양과 예언도 깊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전능성과 성실성 등과 같이 속성이 증거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예언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성취를 위한 방법론으로서 기독론과 성령론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섭리론 안에 내재하는 언약과 성취가 찬양과 예언의 배경이 되는 것처럼 기독론 안에 핵심적으로 내재하는 예수 오심은 성령이 하는 사역의 배경이면서도 목적이 된다. 성령이 오셔서 교회를 창설함으로부터 승리하게 함까지를 하는 것은 결국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으로서 언약과 성취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증거하는 원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언약과 성취로 본다는 것은 성경관을 결정하게 되며 성도 생활에 힘을 부여하는 근거가 된다. 궁극적인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 구속사 일변도의 방법론이 성경의 내용을 산발적으로 보게 하고 결국 방법론 자체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언약과 성취라는 성경 내용 자체의 논리는 21c의 신학계에 중요한 영향을 가져오리라고 예측된다.
언약과 성취라는 내용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최고의 원리이다. 한번 언약하여 반드시 이루게 되면 그 언약 성취자의 존재는 분명히 증명되는 것이며 그 분은 전능한 분ㆍ성실한 분ㆍ주권자ㆍ영원한 분ㆍ자비한 분으로 증거될 수밖에 없다. 성경의 논리는 근거와 사실이 분명하다. 결국 “예수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호와이시다”라는 것이 성경의 논리이다.
출처 : 동산교회 김승일 목사 신학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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