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적인 배경과 성경해석 | ||||
| 오광만의 성경해석 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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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만 교수/ 장신신학원
역사적인 문맥
어느 글이나 글이 나오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성경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사람에게나 유효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처음 주어졌을 때 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성경은 오늘 우리가 살던 시대와 역사적, 지리적, 언어적인 간격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가장 중요한 기초적인 명제인데도 실제로 성경을 읽을 때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읽거나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아래에 열거한 내용들은 실제로 성경 시대와 현 시대의 사이에 발생한 간격이며 본문이 나오게 된 직접, 간접으로 작용한 배경들입니다.
첫째, 역사적인 간격. 성경은 주전 2,000년경 고대 바벨론 문화권에 살았던 아브라함의 역사보다도 이전에 있었던 상황에서 시작하여 유대 멸망과 관련되고 주전 1200년부터 400년 사이의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거쳐 주후 1세기 로마 대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둘째, 문화적인 간격. 본문이 나오게 된 당대의 상황과, 당대의 사람들에게 인식되도록 표현하는 당대의 문화가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날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우리의 삶에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레위기 19:19의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라“는 것을 노새와 말 사이에 태어난 나귀를 생산하지 말라는 의미인지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짐승을 멀리해야 하겠지요.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라는 부분에서는 우리의 생활상 옷 입는 문제에 심각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폴리에스텔 40%, 나일론 40%, 면 20%로 만든 혼방 제품을 입지 말라는 명령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9:28의 “죽은 자를 위하여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는 말씀을 몸에 문신을 새기거나 색조 화장 또는 눈썹 그리기, 혹은 연지곤지를 찍는 것까지 금지하는 말씀으로 인식해도 되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1:4~16의 “여자가 기도시간에 머리에 수건 쓰는 것“과 관련된 문화 문제는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성경에는 이런, 또는 이와 유사한 문화적인 문제로서 그 당시에 한정된 문제들이 있습니다.
셋째, 언어적인 간격. 언어는 사상을 전달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언어마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민족성에 따라 독특한 표현법들이 각기 다르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심성과 사고 구조를 지칭하므로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지난 몇 차례에 걸쳐 우리가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던 문제입니다.
넷째, 세계관의 간격. 세상을 어떻게 보는 방법과 가치 기준이 현대의 그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혹시 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간에 차이가 있는가? 있다면 그 차이는 과연 어떤 것인가? 각 사람들 간의 취향이나 어떤 동일한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는가? 성경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과 현대인의 세계관은 어느 정도 공유하고 다른가의 문제들입니다.
1. 저자와 수신자들의 상황 이해하기 본문에 등장하는 화자나 청중(독자)들의 상황과 살았던 환경에 관한 배경을 가능한 한 많이 이해하도록 하십시오. 글이란 저자와 수신자가 만나는 장입니다. 자연히 어떤 글이든지 저자와 수신자 간의 관계가 전제되기 마련입니다. 이들 관계를 잘 살펴보면 저자의 글의 초점(즉 글의 목적)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a) 글을 쓰는 목적에 대한 이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와 “내가 …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가 그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글의 주제가 바뀔 때마다 바울이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을 매번 밝히고 있습니다(고전 1:11, 3:4, 4:6, 5~6장, 7:1, 18; 8:1, 12:1, 16:1; 고후 2:3~4, 7:5~8, 10~13장).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b) 저자의 상황에 대한 이해
저자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대표자로서 이 말을 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여기서 “나“를 성경 읽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 아니면, 저자만이 가진 독특한 상황에서 저자에게만 적용해야 하는가? 둘째, 32에 대답하기 위하여 전제해야 할 상황으로서, “내같는 어떤 처지에 있는가? 그것을 암시하는 내용을 전, 후 문맥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11~12절)? 셋째, 여기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하셨으면 빌립보서 4:10~19을 앉은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저자가 복음을 전하면서 재정적인 궁핍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과 그가 마케도니아의 중요한 교회들(데살로니가, 베뢰아, 아테네) 그리고 아가야 지방의 교회(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중에 어느 교회가 저자에게 최소한의 생계비를 지원하지 않는 중에서도(고전 9장과 비교) 빌립보 교회가 몇 차례에 걸쳐서 저자에게 재정적인 후원을 해주었습니다. 이 두 극단의 상황에서 저자는 상황의 지배를 받지 않고 처신을 잘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확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그렇게 처신할 수 있는 힘(은혜)을 주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의 은혜를 받으며 살아가지만 자신들도 여러 가지 역경을 잘 이겨내는 의지력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이 두 가지를 그의 사역의 어려운 상황에 적용하였습니다. 이 본문은 이러한 바울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에게 적용하고 난 후에, 독자들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c) 수신자의 상황
이것은 고린도전서 8장 전체에서 문제가 되었던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배려하지 않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사람들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특히 음식에 신통한 것이 들어 있어 그것을 먹고 먹지 않고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라고 선언하고는 그것이 종교성과 관련하여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느니라“고 지적합니다.
빌립보서에서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 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4~5)입니다. 보통은 5절을 4절과 상관없이 읽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5절 이하의 교훈은 1~4절까지의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 일고 있는 이기심과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교만이 공동체의 하나 됨을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이런 태도는 1:27~2:3에 언급된 다툼과 허영과 서로 협력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하라는 교훈(2:5~11)은 이러한 수신자들의 배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2. 역사적, 지리적 배경 이해하기 이제 보다 넓은 배경 이해에 대해 생각해보십시다. 성경은 진공 상태에서 주어진 도덕 교훈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실 때 역사 속에서 알리셨고, 그런 점에서 성경은 역사 문서입니다. 성경의 사건들은 그것이 기록될 당시의 문화나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그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이해할 수 있는 용어들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일차적으로는 당대 문화에 비추어 해석해야 합니다.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 본문 중에 열왕기하 2:9이 있습니다. 본문 “영감의 갑절을 내게 주소서“를 엘리사가 엘리야 선지자에게 현재의 영력에 두 배를 입혀달라고 구한 것으로 가르치거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영력 증강의 문제가 아니라 후계자 지명 문제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열왕기하 2장 전체는 엘리야 선지자에게서 엘리사 선지자로 선지 생도를 지도하는 지도권이 넘어가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2:9에서 엘리사 선지자는 엘리야에게 그를 계승하여 선지 생도들을 이끌겠노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영감의 두 배, 세 배 또는 그 이상을 달라는 문제가 아니라 “두 배“가 의미하는 상속권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15에는 다른 선지 생도들이 엘리사가 엘리야에 이어 선지자가 된 것을 인정하면서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고 말합니다. 본문을 이해하는 중요한 역사적인 배경은 구약의 장자의 유산을 받는 관례를 다룬 신명기 21:16, 17 본문입니다. “자기의 소유를 그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로 장자를 삼아 …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공동번역 성경은 열왕기하 2:9을 정확하게 상속 또는 후계자 지명과 관련이 있게 번역하였습니다. “스승님, 남기실 영검에서 두 몫을 물려주십시오.“
이처럼 본문은 당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배경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역사적인 배경입니다.
모든 본문이 그 구절이 나오게 된 역사적인 상황을 일일이 명시하지는 않지만 문맥을 찬찬히 읽어보면 어느 정도의 역사적인 배경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14~15과 같은 본문은 예수께서 유대 관원인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시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유대인 랍비라면 누구나 알 수 있고 또 마땅히 알아야 하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구약의 죄와 심판과 믿음과 하나님의 치유 등에 사용되는 출애굽의 고사(古事)입니다. 이 고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수수께끼가 될 것이다.
또 다른 한 예는 에스겔 37:1~6의 “마른 뼈로 채워진 골짜기“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스겔 37장 사건을 설명해주는 역사적인 언급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에스겔 33:21이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명시합니다. “우리가 사로잡힌 지 십 이년 시월 오일(주전 565년 1월 8일)에 예루살렘에서부터 도망하여 온 자가 내게 나아와 말하기를 그 성이 함락되었다 하였는데.“ 그리고 바로 나오는 환상이 마른 뼈 골짜기 이야기가 그런 상황을 그림으로 보여줍니다(겔 37:1~6).
그렇다면 이 환상은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 환상에 이어 하나님께서는 그 해석도 주셨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겔 37:11~12). 즉, 에스겔 37:1~6의 환상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마치 죽어 말라져버린 해골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강력한 백성들로 다시 태어나게 하겠다는, 제2의 출애굽으로 알려진 포로 귀환을 약속하는 계시입니다.
둘째, 성경 이외의 자료에서 찾을 수 있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대단히 많은 역사적 배경이 성경에서 발견되지만, 종종 성경 외적인 역사적 자료가 본문이해에 도움을 주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 2:31~45에 기록된 느브갓네살 왕이 꿈에 본 신상의 모습은 앞으로 있을 강대국들을 묘사한다고 생각됩니다. 정확히 그것이 어떤 나라들인지에 대해서는 약간 의견이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바벨론, 메데?바사, 헬라, 로마를 가리킨다고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실 나라는 이런 역사적인 과정을 거친 후에 나타날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런 과정이 비교적 모호하게 들렸겠지만, 신약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탄생으로 생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사시던 바로 그 시대에 출현하는 것이 적당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바벨론“이라는 나라 역시 고대의 바벨론이 아니라 로마를 부르던 당대의 방식에 비추어 이해할 때 요한계시록의 상황과 그 의미들이 한층 더 분명하게 이해될 것입니다.
셋째, 지리적인 배경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배경적인 문제입니다. 성경의 지리적인 언급들은 어떤 사건이 발생한 무대 그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의 지명마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옛날부터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알레고리적 해석 때문입니다. 지리적인 언급과 관련하여 많이 언급되는 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성경 저자들 중에서 예루살렘을 하늘에 있는 도시이며, 이것은 땅에 사는 사람들과 대비된다고 비유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히 12:22; 계 21:2, 10, 22~27, 갈 4:21 이하), 모든 경우에서 예루살렘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이웃 도시인 여리고로 여행하는, 흔히 있는 일을 이용하여 이웃의 문제를 교훈하고 있는 예수님의 비유도 그것이 지리적인 배경이 아닌 영적인 의미를 지닌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30 이하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장소에 관한 언급을 어떤 상황이 벌어진 지리적인 배경(setting)으로서의 의미가 있는지 아니면 그것이 지니는 다른 의미가 있는지는 결국 문맥에서 감지해야 한다. 그런 예를 다시 에스겔 47:1 이하의 기사에서 찾아보겠습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이것은 환상으로 본 것이지만 실제로 성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건립될 것이라는 약속과 성전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임재가 다시 이스라엘 중에 있을 것과 그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복이 이스라엘 전역에 확산될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성경에서도 장소와 관련된 언급은 어떤 사건이 발생한 지리적인 배경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넷째, 문화적인 배경에 대한 고려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시대와 장소의 제한을 받는 사회적인 생활양식과, 종교적 풍습, 생활 습관, 그리고 법적, 도덕적 규범들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글에 스며 있어 어떤 글이 기록된 그 시대와 장소를 아는 것은 글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먼저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문화적인 배경 을 살펴봅시다. 마태복음 15:2에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 하나이다“라는 언급이 있습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새로운 용어는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언급입니다.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비위생적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문제를 삼은 것은 처음에는 모호한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한다고 시작한 것이 그 후,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어 결국 한갓 유대인들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된, 정결예법과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마가복음 7:3~5과 그 폐해에 대해서는 마가복음 7:6~9; 마태복음 23:25~26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 이외의 자료에서 찾을 수 있는 문화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저자가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없는 당대에 생활 깊숙이 스며 있던 관습이거나 민족 정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요한복음 9:22에 언급된 “누구든지 예수를 시인하는 자마다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다“는 내용에 있어 본문 자체만으로는 본문의 초점인 “출교“의 장소가 무엇인지 모호합니다. 본문에 9장 전체의 사건이 발생한 장소가 명기되어 있지 않아 본문의 의미에 대해 궁금증만 더합니다. 성경 이외의 다른 자료에 따르면, 성전에서는 회원제가 없어 출교하거나 입교자를 받는 일이 없었습니다만 1세기 회당 제도에서는 입교 제도나 출교 제도가 있었습니다. 회당은 단순히 율법을 공부하거나 민회로 모이는 장소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사회의 집약체였습니다.
여기서 출교된다는 것, 즉 유대인 공동체에서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 시민권이 상실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배경을 알 때, 본문 요한복음 9장에 언급된 시각 장애인의 부모가 자기네 아들에 대해 왜 확실한 증언을 하기를 기피하였는지, 그리고 시각 장애인이 출교의 권한이 있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담대하게 말한 용기를 잘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오해를 일으킨 여러 본문들, 즉 고대의 언약 체결식을 반영하는 창세기 15:8~ 11, 혼인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칫집에 들어온 사람을 언급한 마태복음 22:11 이하의 비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마태복음 22:21의 말씀들은, 문화적인 배경을 잘 알면, 그 본래적인 의미를 잘 드러내며 바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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