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적인 언어와 인간적인 언어 | ||||
| 오광만의 성경해석 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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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만 교수/ 장신신학원
지난 6월 호에서 우리는 단어가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때에는 단어의 의미에 대한 문제를 번역 성경이 다양한 이유와 관련하여 언급을 했었지만, 이번 호에서는 어떻게 문맥과 관련하여 단어의 의미를 밝히고 해석에 이용할 것인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는 말하는 사람이 말할 때의 감정이나 태도, 심지어 사회적인 위치, 청중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쟤는 돼지야!“라는 말이나 “쟤는 돼지 같아“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상대방이 누군지(어린아이, 비대한 사람, 지저분한 사람, 코를 킁킁거리는 사람, 음식을 많이 먹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돼지처럼 귀엽고 토실토실한“ 아이라는 긍정적인 의미에서부터, “지저분하고 보기 흉할 만큼 살찐“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에 이르기까지 의미의 폭은 다양합니다.
우리가 경험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런 것은 그 말을 한 상황에서는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말을 문자로 옮겨놓았을 때가 문제입니다. 결국, 글로 표현된 의미 체계 속에서 특정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가 들어 있는 배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예는 비단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 사용이나 세속적인 책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표현에서도 단어의 의미가 문맥에 따라 달리 결정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티끌‘같이 해 주겠다“란 말이 있다고 칩시다. “티끌“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저는 언젠가 화장품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화장품 원료가 되는 돌을 깨어 미세한 가루로 만들면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경우 “티끌“은 사람들 대부분이 알고 있고, 그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먼지“나 “미세한 알갱이“란 뜻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보자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라고 쓴 욥기 2:12에 사용된 “티끌“이 이처럼 먼지로 사용된 경우입니다. 둘째는 티끌이 “많다“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창 13:16, 28:14)에 사용된 티끌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이것은 “내가 네 후손을 많게 해 주겠다“라고 풀어 쓸 수 있습니다. 셋째는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기 위해 땅에 강림하신 여호와에게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겠나이다“라고 말한 장면에 사용된 티끌의 의미입니다(창 18:27).
여기서 티끌은 천하고 낮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비하시키거나 상대방에 대해 깔보면서 “이 버러지 같은 자식“이라고 말을 할 때 사용하던 것을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말은 “이 버러지만도 못한 자식이지만, 주께 감히 부탁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 단어가 이처럼 다양하게, 그것도 양극단적인 의미를 지니면서까지 다양하게 사용되는 것은 단어마다 그 자체 고유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그것이 놓여 있는 무대, 즉 배경(논리적 배경과 역사적 배경)에 따라 미세하지만 다른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사실 사회적인 언어입니다. 긴 이야기에서만 아니라 간단한 단어, 어휘 하나라도 그것의 의미를 밝혀주는 데 작용하는 요소들이 다양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제로 이런 요소들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틀림없습니다. 다만 이런 표현법이 몸에 배어, 우리가 의식하지 않더라도 적절한 상황에 따라 그런 표현을 할 수 있고, 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한다는 점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장소에서 그 언어를 사용하는 배경에 익숙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단어 사용에 작용하는 요소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두 번에 걸쳐 공부하였던 논리적 배경과 역사적 배경에 들어 있던 요소들이 똑같이 단어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에도 관여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첫째, 말하는 사람과 관련된 것들. 그 사람이 말할 때의 감정, 태도는 무엇인가? 엄숙하게 말하는 말인가 아니면 비아냥거리는 말인가? 또는 조소와 희열의 말을 하는 것인가?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각 상황에서 지시 대상의 차이가 있는가? 그의 사회적 위치는 무엇인가? 화자가 말하는 대상은 또 어떤 부류의 사람이고, 어디서 말하고 있는가? 둘째, 듣는 사람과 관련된 것들. 청중은 어떤 상황에 있고, 화자의 말에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청중들이 그 말을 이해했는가 아니면 곡해하였는가? 청중들의 요구가 무엇이었나?
셋째, 한층 광범위한 상황.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속한 종교적인 배경, 관습, 시간, 지리적인 배경이 무엇이었나?
넷째, 어투와 문체와 문학 양식과 관련된 것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주어진 상황에서 교환한 말의 문체와 양식은 무엇이었나? 화자는 이것을 직접적인 언사로 표현하였는가 아니면 비유적으로 혹은 냉소적으로 표현하였는가? 이것이 시인가 아니면 율법인가 아니면 편지글인가?
이런 것들이 대화와 의미 전달이 이루어지는 데 영향을 주고, 실제로 우리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작용하는 요건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 해석에도 이러한 원리를 적용할 수 있는지, 아니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위에 든 예와 달리 적용해야 하지 않을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성경 언어“란 무엇인지, 성경 언어에 대한 두 극단적인 입장을 소개합니다. 성경 해석과 관련하여 성경을 기록하기 위해 사용된 언어는 완전히 신성한 언어로 이해하는 경향과 순전히 인간적인 것으로서 초자연적인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경향 등 양극단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번째 입장은 멀리는 초대교회부터 중세의 알레고리 해석에서, 가깝게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한 실존주의적 성경해석이 취한 성경 언어에 대한 이해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과 인간의 글에서 초월하여 계시므로 정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성경해석 방법을 지배해왔던 알레고리 성경해석은 성경 언어에 영적인 의미 부여를 시도하고, 실존주의는 삶의 매 순간에 하나님과의 실존적인 만남을 통해서 성경언어가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하는 방법으로 의미를 추구해왔습니다.
두번째 입장은 현대의 역사 비평적 방법에서 취한 입장인데, 그들에 따르면 성경은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한계와 제한 속에 있던 것이므로 다른 고대의 책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성경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성경 속에는 초자연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성경 언어에 대해 어떤 입장을 표명할까요? 신명기 5:22~33에 언급된 예가 성경 언어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고 생각됩니다. 모세 당시 처음 율법을 받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죽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들을 수 있는 말로써 구름 속에서 말씀하시고, 그것을 친히 두 돌판에 기록하여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죽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분의“ 말씀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하나님의 말씀(신적인 언어)이 인간적인 언어로 변환되는 순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적인 언어와 인간적인 언어의 갈등이나 모순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둘은 조화를 이루며 등장합니다.
신적인 언어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있었고(요 1:1), 삼위 하나님은 그 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써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심오한 말씀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에 대한 몇 가지 양상들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의롭고 참되신 분이시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그러합니다(위의 첫번째 입장). 요한복음 17:17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시편 119:43(“진리의 말씀“)과 시편 119:18(“주의 법의 기이한 것“) 그리고 시편 119:62(“주의 의로운 규례“)도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를 규명해주는 구절들입니다. 인간 언어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이 거룩하고 기이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당대의 언어)로 표현하셨고 우리에게 전해주셨습니다. 다이스만(A. Deissman)이란 학자는 성경을 기록하는 데 사용된 언어들(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은 당대 사람들이 특정 시대에 사용하던 “일상 언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A. Deissman, A Light from the East). 그러므로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위의 두번째 입장).
이러한 성경 언어의 특징은 이슬람교의 몰몬경이 신의 글로 기록되어 번역이 불가능하고(금지되어 있고) 역사적인 상황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성경은 구체적인 역사적인 상황 하에서 그 시대 통용되던 언어로써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어가 다양하고 문체와 종류가 다양하지만 그 말씀은 번역하여 성경을 읽는 다음 세대의 독자들이 자국어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자국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제1장 8항은 성경 원어를 자국어로 번역 가능하다는 것을 천명했습니다. 말하자면 성스러운(?) 성경 언어를 인간 언어로 변환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인 셈입니다.
성경은 바로 신비하지만 이런 과정 속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은 일차적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시(詩)였습니다(인간 언어). 그런데 그 시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신적인 언어). 우리는 통상적인 방법을 정당하게 사용하면(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1장 7항), 시편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인간 언어). 율법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율법을 통하여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맨 처음 율법의 내용이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때, 사람들은 모세가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자기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무엇을 약속하는지를 정확하게 깨닫고, 그 말씀에 “우리가 준행하리라“(출 24:3)라는 말로 똑똑히 반응했습니다. 사람들은 사도의 말을 받을 때에도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살전 2:13).
성경은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언어 사용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준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통상적인 방법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앞에서 논의했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단어의 의미는 단어와 관련이 있는 넓은 의미의 배경(논리적 배경과 역사적 배경)에 의해 결정되고, 해석자는 그 사실에 좀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팁으로, 모 일간지에 실렸던 “청혼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말들“을 소개하겠습니다.
*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되도록 사랑하렵니다(한국). 위의 문장들은 거기에 사용된 단어는 모두 다르지만, 한결 같이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단어나, 문장을 읽었을 때 머리 속에 무엇이 떠오르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읽은 단어와 문장을 다른 말로 표현할 정도만 되더라도 여러분은 단어 이해에 한 걸음 다가가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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