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요한 계시록!!

[스크랩] 요한 계시록 (1장-12장)

하나님아들 2014. 7. 17. 17:36

 

I. 계시록의 개요

 

계시록은 22장 404구절(영어로 12,000단어)로 되었으며 A.D.90-96년 도미티안황제의 통치 기간에 팟모섬에 유배당한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되어 소아시아의 일곱교회에 보내 진 편지입니다.

기록 년대에 대하여 네로 황제 때인 A.D.70년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이 자신의 정체를 숨겨 보려는 의도적인 전략입니다. 만약 요한 계시록이 A.D.70년 이전에 기록되었다면 A.D.70년 예루살렘 파괴를 계시록에 적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되면 계시록 17장과 18장의 로마에 대한 묘사는 “로마 카톨릭교회”가 아닌 “로마제국”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이 A.D.70년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탄의 하수인인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정체를 숨기려는 불순한 음모에 불과합니다.

천년왕국(Millennium Kingdom)에 대한 입장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전천년주의자 :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 전에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2) 후천년주의자 :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 뒤에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3) 무천년주의자 :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년동안 지상을 통치하시기 위해 다시 오시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무천년”이나 “후천년”의 관점은 성경과는 전혀 다른 입장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천년동안 통치하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계11:15, 20:6)

 

여러분이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성경의 모든 구절은 세 가지의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1) 역사적인 적용 : 성경의 사건이 역사의 어느 때, 어디에서, 어떻게 일이 전개되었는지를 의미합니다.

2) 교리적인 적용 : 성경의 모든 구절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이유로, 특정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3) 영적인 적용 : 모든 성경이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구절은 사람을 바르게 하거나 가르치기 위한 적용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율법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율법은 출애굽이후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지기 전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모세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율법을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아담과 노아에게 율법을 교리적으로 적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교회시대 사람들에게는 어떻습니까? 교회 시대의 사람들에게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신 승천하신 뒤 오순절 성령 강림후에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 시대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선포되었으며 이 시대 사람들은 그 복음을 믿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율법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과 그리스도인은 어떤 관계일까요?

모세 이전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아닌 양심이 있었으며 율법은 출애굽이후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어졌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교리적으로 지켰습니다. 현재 교회시대 성도들에게는 은혜의 복음이 주어졌고 이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어진 교리였기 때문에 폐기하여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이 시대에 교리로 적용할 수 없지만 우리들은 율법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언행을 통해 책망 받으며 의로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잘못된 길에서 바로잡도록 하는 영적인 적용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 목적은 기본적으로 교리입니다. 모든 성경은 영적인 적용으로서 책망하고 바로 잡고 의로 교육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고 철저히 준비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딤후3:16-17) 그러나 모든 성경이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교리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II. 계시록의 시대 구분.

요한 계시록은 스스로 세 부분으로 시대를 구분합니다.

1) 교회 시대 :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성도들의 휴거까지

2) 환란 : 성도들의 휴거로부터 재림까지

3) 천년 왕국 : 재림으로부터 계시록 20장의 흰 왕좌 심판까지

성경은 항상 스스로 해석하며 성경이 스스로 명확히 나누는데 계시록은 스스로 하늘이 두 번 열리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1) 계시록 4:1-2 : 하늘이 열리고 어떤 사람이 올라갑니다.

2) 계시록 19: 11 : 하늘이 열리고 어떤 분이 내려옵니다.

이 것은 계시록을 스스로 세 부분으로 선명하게 나눕니다.

또한 사도 요한은 계시록 1:19절에서 이 책을 세 부분으로 쓰도록 지시 받았습니다.

(1)네가 본 것들과

(2)지금 있는 것들과

(3)이후에 있을 것들을 기록할지니 (계 1:19)

계시록은 과거, 현재, 미래를 나누어 기록되었습니다. 만일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현재가 이 시대를 말하는 것이라면 계시록의 1,2,3장은 교회시대 이전의 어떤 기간을 말하는 것이며 계시록 4-19장은 교회시대인 지금이며 계시록 20,21,22장은 교회시대 이후 미래의 어떤 기간을 뜻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계시록 1,2,3장에 나타나다가 계시록 4장부터 19장까지는 언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17장과 18장에서는 심판받는 창녀 교회가 언급됩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을 기록할 때 A.D.90년경 팟모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의해 미래의 어떤 시대(주의 날 ; 계1:10)로 옮겨졌습니다. 요한이 “지금”이라고 하는 것은 A.D.90년이 아닌 2000년 후의 미래인 “의 날”입니다.(계1:10)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때 성령께서 요한을 “의 날” 곧 재림의 때로 데려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지나간 교회시대를 보았고, 지금 일어나는 환란을, 그리고 미래의 천년기간을 바라보며 계시록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세 개의 논리적인 구분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1) 첫 부분(과거 : 교회시대) : 1, 2, 3장

2) 둘째 부분(현재 : 환란) : 4장 - 19장

3) 셋째 부분(미래 : 천년왕국과 영원) : 20. 21, 22장

이 것은 논리적인 구분일 뿐 아니라 성경적으로 성령께서 이렇게 구분하셨기 때문에 (딤후2:15) 다른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III. 환란 기간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큰 환란의 기간을 7년이라고 합니다. 휴거 후 이 땅에 거짓 평화 기간이 3년 반 동안 있다가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을 깨뜨리고 후 3년반 동안 큰 환란이 이 땅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7년 큰 환란”이라고 말하는 곳은 없습니다. 다만 갈보리 십자가 사건이 다니엘 69째주의 “끝”이라고 보기 때문에 남은 한 주, 즉 7년 기간의 큰 환란이 남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큰 환란의 기간이 7년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단 9:25-27) 그러므로 너는 알고 깨달을지니라.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축하라는 명령이 나가는 때로부터 통치자 메시아에 이르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있을 것이요, 이 곤란한 때에 거리와 성벽이 다시 건축될 것이며

육십이 이레 후에 메시아가 끊어질 것이나(And after threescore and two weeks shall Messiah be cut off) 자기를 위한 것은 아니니라. 장차 올 통치자의 백성이 그 도시와 그 성소를 파괴하려니와 그 끝에는 홍수가 있을 것이며 또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황폐하게 하는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많은 사람과 한 이레 동안 언약을 확정하겠고 그 이레의 한중간에 희생물과 봉헌물을 그치게 할 것이며 또 가증한 것들로 뒤덮기 위하여 그것을 황폐하게 하되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리할 것이며 작정된 것이 그 황폐한 곳에 쏟아지리라, 하니라.

 

갈보리 십자가 사건이 다니엘69주의 “끝이 아니다”라고 보는 이유는 다니엘 9:26에서 “육십이 이레 후에 메시야가 끊어질 것이나”(And after threescore and two weeks shall Messiah be cut off)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후에”(after)라는 단어는 “”(end)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육십이 이레 후에”라는 말은 “육십이 이레는 지났고 그 후 언제”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갈보리 십자가 사건이 “69주의 끝”이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육십이 이레 후에”라는 말은 69주는 이미 지났고 70째주가 진행된 후 -몇 년인지는 모르지만- 갈보리 십자가 사건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보충해주는 말은 다니엘 9:27에서 적그리스도가 “한 이레 동안 언약을 확정하겠고 그 이레의 한중간에 희생물과 봉헌물을 그치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는 더 이상 ”희생물과 봉헌물“은 아무런 효력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유대인의 왕을 거절하고 십자가에 처형한 갈보리 사건이 적그리스도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기도 하기 때문에 갈보리 십자가사건으로 희생제와 예물이 그치게 된 것을 적그리스도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이 한 이레의 중간인 수요일이라는 사실도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 70번째주의 전 3년 반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기간에 이미 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휴거 후 바로 이 땅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며 전무후무한 큰 환란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것을 확증할 수 있는 말씀은 매우 적습니다. 일반적으로 큰 환란은 7년이며 전 3년 반은 거짓 평화 기간이고 후 3년반은 큰 환란이라고 합니다. 전 3년 반이 거짓 평화기간이라면 예수님의 초림 3년반과 일치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큰 환란 기간이 7년이든, 3년 반이든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관련은 없습니다. 큰 환란이 시작되기 전에 휴거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 환란의 기간은 두 견해를 참고하여 독자들 스스로 성경을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계시록은 어렵거나 난해한 책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믿기 어렵기 때문인데 믿을 준비가 되었다면 열린 문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계시록 1 장

 

계시록 1, 2, 3장은 세 가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1) 역사적으로 계시록 1, 2, 3장은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된 A.D.90년경 소아시아의 지역교회들을 대상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2) 영적으로는 각 지역 교회에 적용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에 이르는 교회시대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3) 교리적으로는 교회시대가 아닌 환란 때에 적용됩니다.

 

(이책에서는 2번의 견해, 영적으로 교회사로 적용하여 해석한다)

 

계 1:1-2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분께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나야 할 것들을 자신의 종들에게 보이신 것이요, 그분께서는 자신의 천사를 보내어 자신의 종 요한에게 이것을 표적으로 보여 주셨으니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와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증언하였느니라.

 

이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계시를 자신의 천사를 보내어 요한에게 주어졌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기록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대언의 영”으로 정의되어 있는데(계19:10) 이 것은 미래를 말하는 능력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바로 이 예언의 요소로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사41:23-26) 성경은 단 하나의 오류도 없이 미래의 모든 일을 정확하게 예언하여 기록해 놓은 유일한 책입니다. 성경의 예언은 800가지가 있습니다. 이미 300가지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어야만 하는 당위성이 있습니다. 나머지 500가지의 예언도 수년 안에 대부분이 성취될 것입니다. 이 대언의 영이 있는 사람은 미래를 알기 때문에 죽은 뒤에 어디로 가는지도 알고 예언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때문에 밧모섬에 있었습니다.

 

계 1:3 이 대언의 말씀들을 읽는 자와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

“대언의 말씀”은 계시록을 말하거나 성경 전체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 - 계시록에 기록한 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끝이 가까이 온 것입니다. 1절에서 “속히 일어나야 할 것들”이라고 합니다.

 

계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왕좌 앞에 계신 일곱 영과

일곱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성경에서 많이 사용되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특히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서는 일곱 교회, 일곱 등잔대, 일곱 별, 일곱 천사, 일곱 영, 일곱 봉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인물이 나오며 계시록의 마지막 장에서는 “이 책”이라는 표현이 일곱 번 나옵니다. 일곱은 마지막과 관련이 있으며 맹세와도 관련이 있는데 히브리어로 일곱은 ‘맹세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 하시는 방식도 “일곱”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아노의 음도 일곱 개, 색깔도 일곱 가지의 색이 있습니다. 삼원색(빨강, 파랑, 노랑)과 중간색(주황, 초록, 자주색), 그리고 검은 색입니다. 흰색은 색이 없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에 색깔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몸의 세포의 수명은 7년입니다.

여러분의 맥박은 칠일마다 느슨해집니다.

사람의 몸은 줄기이고 줄기에서 나온 일곱 개의 지체(팔, 다리, 머리, 눈, 코, 귀, 입)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열까지 세고 다시 하나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곱까지 세시고 다시 하나로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는 쉬셨습니다.(창2:2) 사람들도 6일을 일하고 7일째는 쉽니다.(출20:9-10) 6주가 지나고 7주 끝에는 오순절을 지킵니다.(레23:15-16) 일곱 번째 달은 3번의 중요한 명절을 지켜야 합니다.(레23:15-26) 6년 동안 농사를 짓고 7년째에는 땅의 안식년입니다.(레25:4) 7년씩 7번을 지나면 희년(喜年)이 선포됩니다.(레25:8-10) 땅도 창조 후 6000년 후 7000년에는 천년의 안식기간이 될 것입니다.(벧후3:8)

 

계시록은 바로 모든 것의 종말을 보여주는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오실 주 곧 전능자(1:8) - 과거에 예수님은 선지자로 계셨으며 현재는 제사장으로 하늘에 계십니다.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는 왕으로 오실 것이며 우리를 왕들로 삼으실 것입니다.

지금도 계시고(히9:24) : 지금은 제사장으로 하늘에 계십니다.

(히3:1, 4:14, 5:6,9. 6:20, 7:24, 8:1 참고)

전에도 계셨으며(히9:26) : 전에는 대언자로 이 땅에 계셨습니다.

(마21:11) 이분은 갈릴리 나사렛의 대언자 예수님이라,

(눅24:19 요6:14,7:40 행3:22-23 신18:15 참고)

앞으로 오실 분(히9:28) : 앞으로 만왕의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계17:14, 19:16 참고)

일곱 영은 이사야 11:2에 정의되어 있습니다.

 

계 1:5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자들 중에서 처음 나신 분이시며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씻으시고

신실한 증인 : 시89:37

죽은 자들 중에서 처음 나신 분이시며 - “죽은 자들 중에서 다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 중에서 처음 나신 분”입니다. “죽은 자들 중에서 다시 났다는 것은 사람이 부활 할 때 다시 난다는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중에서 살아나신 것은 ”두 번째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 중에서 살아나 다시 죽지 않는 첫 번째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 아들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지만 다시 죽었습니다.(눅7:11-15) 나사로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지만 다시 죽었습니다.(요11:43-44) 요나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지만 다시 죽었습니다.(욘2장) 모세는 신34장에서 다시 살아났지만 환란 때에 다시 죽을 것입니다.(계11장)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중에서 살아나 다시 죽지 않을 첫 번째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은 죽더라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결코 다시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요11:25)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 문자 그대로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아직 통치하시지 않으십니다. 이제 곧 우리와 함께 통치하시고자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계 5:10)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씻으시고 - 죄를 씻기시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들에서 씻길 수 있습니다. 침례, 선행, 성사들은 결코 죄들을 씻길 수 없는데 한 가지 주목 할 것은 이 구절에서는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로부터 씻으시고”입니다. 그러나 계7:14에서는 “자기 예복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계1:5에서 교회시대의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지만 계7:14에서는 환란 성도들에게 말씀하신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교회시대의 성도들은 자신의 행위로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씻으시고”입니다. 그러나 환란 때 성도들은 “끝까지” 견디는 자신의 행위로 “자기 예복을 씻어 희게 하여”야 하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계 1:6 하나님 곧 자신의 아버지를 위하여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분께 영광과 통치가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는 여러분을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나 다가올 시대에는 왕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왕으로 통치하는 시대에는 이 땅에서 문자적이고 눈에 보이는 나라들을 실제적으로 통치할 것입니다.

 

(계5:9-10)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께서 그 책을 취하시고 그 책의 봉인들을 열기에 합당하시오니 이는 주께서 죽임을 당하사 주의 피로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우리를 대속(代贖)하여 하나님께 드리시고 또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음이니 우리가 땅에서 통치하리로다, 하더라.

 

계 1:7 볼지어다, 그분께서 구름들과 함께 오시나니 모든 눈이 그분을 보겠고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분으로 인하여 통곡하리니 참으로 그러하리로다. 아멘.

이 구절은 휴거가 아니라 재림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몸인 교회를 데려 가시기 위해 다시 오실 때는 모든 눈이 그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밤에 도둑같이” 오셔서 그 분의 귀한 보석이며 한 몸인 교회를 은밀하게 데려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것을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신비”라고 말합니다.(고전15:51-52) 이 것은 눈에 보이는 출현이 아니라 “눈 깜짝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5:52은 계시록 1:7과 다른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2에서는 “눈 깜짝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말하고 계시록 1:7에서는 “모든 눈이 보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건은 분명히 다른 사건입니다. 앞의 도표에서 보듯이 고린도전서 15:52의 사건은 휴거를 말하지만 계시록 1:7의 사건은 “우리와 함께” 오는 지상 재림을 말하는 것입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나는 휴거는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지만 눈에 보이는 지상 재림은 휴거후에 혼인식을 마친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와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주님과 “함께” 오는 것입니다.

이 것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두 가지의 다른 나타나심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 오셨을 때 예수님은 밤중에, 눈에 띄지 않게 말구유에서 소수의 목자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은밀한 출현을 하신지 삼십 년 후 침례인 요한의 사역 때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재림하실 때에도 예수님은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데려 가시기 위해 은밀히 공중에 나타나시지만(휴거: 공중 재림) 휴거 후 수년만에 이 땅위에 그분의 원수들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초림 때 로마가 권력을 잡고 있었듯이 재림 때에도 로마가 권력을 잡고 있을 것입니다.

초림 때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에 있었듯이 재림 때에도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에 있을 것입니다.

초림 때 400년간의 침묵기간이 있었듯이 재림 때에도 400년간의 침묵기간이 있을 것입니다.

(구약 때 말라기서를 끝으로 초림까지 400년간 아무 것도 계시하지 않으셨듯이 1611년 KJV를 끝으로 재림 때까지는 다른 것으로 계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되풀이하시지만 타락한 사람들은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계 1: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오실 주 곧 전능자께서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마침이라, 하시더라.

알파는 헬라어의 첫 번째 철자이며 오메가는 마지막 철자입니다. 즉 예수님이 성경의 모든 철자이며 성경의 시작이며 끝이십니다.

지금도 계시고(그 분은 지금 제사장이시다) 전에도 계셨으며(그 분은 선지자이셨다.) 앞으로 오실(그 분은 왕으로 오실 것이다.)

전능자 -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선포하신 법인 성경을 결코 위반하시지 않으십니다.

 

계 1:9 나 요한은 또한 너희 형제요, 환난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과 인내에 동참하는 자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노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고 미래를 말했기 때문에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미래를 말한다면 고난과 박해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딤후3:12)

요한은 환란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과 인내에 동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성령안에서 환란에 동참합니다.

 

계 1:10 내가 주의 날에 령 안에 있을 때에 내 뒤에서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의 날 - 의 날은 일반적으로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이 말하듯이 주일날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13:9-10) 보라, 주의 날 곧 진노와 맹렬한 분노로 인한 잔혹한 날이 이르러 그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분께서 그 땅에서 죄인들을 멸하시리니 이는 하늘의 별들과 하늘의 별무리들이 빛을 내지 아니하고 해가 자기 길로 나아가도 어둡게 되며 달이 자기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임이로다.

(욜1:15, 2:1,11,31) 슬프다 그 날이여! 이는 주의 날이 가깝기 때문이라. 그 날이 전능자에게서 나온 멸망같이 이르리로다.

(벧후3:10) 그러나 주의 날이 밤의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큰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원소(元素)들이 뜨거운 열에 녹으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도 불태워지리라.

(렘30:7) 아아, 슬프도다! 이는 그 날이 너무 커서 그와 비길 날이 없기 때문이니 그 날은 곧 야곱의 고난의 때로다. 그러나 그가 그 고난에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의 날”은 어떤 훌륭한 사람이 무엇이라고 말할지라도 주일날(일요일)이 아닙니다. 바로 “의 날”은 야곱의 고난의 때인 큰 환란 때입니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휴거후부터 의 날은 시작되는데 하늘과 땅이 불 타버리는 흰 왕좌 심판까지를 말합니다.

내가 주의 날에 령 안에 있을 때에 -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 있고 성령은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은 특별한 때, 특별한 변형이 수반된 것이며 누군가의 기적적인 이동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계시록 4:2의 표현도 “내가 즉시로 영(靈) 안에 있었더니”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요한은 하나님의 왕좌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 안에 있게 되었다”는 말은 “몸 안에 있다”는 말과는 반대로 “몸 안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몸 안에 있는 대신 “영 안에” 있었습니다. 교회 시대의 여러분은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몸 안에” 있기 때문에 이 표현은 교회시대에 적용 할 수 없습니다.(고후5:1-10) 그러나 성령은 여러분 안에 있고 여러분은 성령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특별한 날에만 “성령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의 날에 령 안에” 있었다고 말할 때 요한은 A.D.90년경 밧모섬에서 들어 올려져서 “의 날”인 재림 때로 기적적이고 영적인 이동을 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 1:11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곧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라, 하시더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1:8을 보십시오.

8절에서 말씀하신 일곱 지역 교회의 이름을 말씀하십니다. 이 일곱 교회는 지금의 터어키인 소아시아지역에 있습니다. 이 일곱 교회는 각각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데 각 이름마다 교회사의 일정한 기간을 나타냅니다.

1) 에베소 : “온전히 목적 된” (A.D.30-90년)

2) 서머나 : “몰약” (A.D.90-325년)

3) 버가모 : “숱한 결혼” (A.D.325-500년)

4) 두아디라 : “고통의 향기” (A.D.500-1,000년)

5) 사데 : “붉은 자들” (A.D.1,000-1,500년)

6) 필라델피아 : “형제의 사랑” (A.D.1,500-1,900년)

7) 라오디게아 : “시민의 권리” (A.D.1,900- ? )

이 땅의 마지막 교회는 라오디게아인데 이것은 “시민권” “사람들의 권리” “사람들을 위한 정의”라는 뜻입니다. 이 교회는 일곱 교회의 마지막 교회이며 이름도 특별히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라고 불립니다.(계3:14) 이 마지막 교회에서는 하나님은 아무 권리가 없고 “사람들의 권리”만 있는 교회입니다.

 

계 1:12 이에 내가 돌아서서 나와 말씀하신 그 음성을 알아보려 하니라. 돌아설 때에 내가 일곱 금 등잔대를 보았더니

일곱 금 등잔대는 1:20절에 일곱 교회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계 1:13-15 이 일곱 등잔대의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으신 이가 발까지 내려온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계시는데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양털같이 희고 눈같이 희며 그분의 두 눈은 불꽃 같고 그분의 두 발은 용광로에서 달구어낸 정제(精製)된 놋 같으며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사람의 아들 같으신 이 - 복음서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마 8:20 12:8 40 26:2 막8:31 눅 17:22-26 요 1:51, 12:23) 여기 묘사 된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으로 오셨을 때의 모습이 아닙니다. 유대인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솔로몬의 노래 5:10-15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초림의 예수님의 모습은 비둘기 같은 눈에 까마귀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 검은 수염을 지닌 붉은 황갈색 피부의 유대인이며 동양인인 아시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계1:14에 묘사 된 예수님의 모습은 더 이상 유대인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양털처럼 하얗습니다. 그 분의 눈도 더 이상 비둘기의 눈과 같지 않고 불꽃같습니다. 이 모습은 바로 여러분이 심판 때 뵙게 될 영광 받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부활하셔서 영광 받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의 불꽃같은 예수님의 눈은 여러분의 혼을 꿰뚫어 보실 것입니다. 그분의 음성은 큰 폭포나 천둥소리 같습니다.

 

계 1:16 그분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이 있으며 그분의 입에서는 양날 달린 날카로운 칼이 나오고 그분의 용모(容貌)는 해가 세차게 빛나는 것 같더라.

일곱 별이 있으며 - 20절에서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별은 항상 혹성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계9:1에서 “별 하나가 하늘로부터 땅으로 떨어진다”고 하고 계12:4에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내던지더라”고 말하는데 땅이 불타지 않습니다. 이 별은 혹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창세시 1:16에서처럼 “또 별들도 만드시고”처럼 혹성인 별들의 의미로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천사들을 말할 때에도 별들(계1:20)이라는 말을 사용하십니다. 사람들이 영화계의 “스타들”을 말하듯이 하나님께서 별을 천사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별”은 혹성이 아닌 “천사”로 분명히 정의됩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양날 달린 날카로운 칼이 나오고 - 히4:12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 칼이 실제적인 칼이 아니라고 반박한다면 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에베소서 6:17을 보십시오. 여러분도 바로 이 검으로 사탄을 물리 칠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바로 이 검으로 사탄의 머리를 박살 낼 것입니다.

(욥40:19) 그는 하나님의 길들 중에서 으뜸이니 그를 만든 이가 자신의 칼을 그에게 가까이 댈 수 있느니라.

(시74:13-14)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들 가운데 있는 용들의 머리들을 깨드리셨으며 리워야단의 머리들을 산산조각 내시고 그를 광야에 거하는 백성에게 먹을 것으로 주셨으며

(롬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밑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사탄은 아직도 건재하며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고 있습니다.(벧전5:8) 사탄의 머리는 아직 부서지지 않았으며 미래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사탄의 머리는 박살 날 것입니다.(롬16:20)

 

그분의 용모(容貌)는 해가 세차게 빛나는 것 같더라.(as the sun shineth in HIS strength.) - 예수님의 용모는 어떤 빛보다도 눈부신 빛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태양이 남성(HIS)인 것을 주의해 보십시오. 이것은 구약의 마지막 장에서 재림을 묘사한 구절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말라기4:2과 비교해 보십시오.

“의(義)의 해가 떠올라 자기 날개들에서 병 고치는 능력을 내리니”(말4:2) (the Sun of righteousness arise with healing in HIS wings) 이 것은 매일 아침 뜨고 매일 저녁 지는 태양이 예수 그리스도의 유형임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 안에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세상의 빛은 태양에서 오는데 태양이 비취는 곳에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인 태양은 알파, 베타, 감마선인 세 종류의 광선이 있습니다. 이 광선들은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으로 불리는데 적외선은 여러분이 느낄 수는 있지만 볼 수 없기에 아버지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가시광선은 볼 수 있지만 느낄 수 없는 아들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자외선은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는 성령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태양은 확실하게 하나님의 유형입니다. 이 사실은 로마서 1:20을 조명해 주는데 매일 아침 떠오르고 매일 저녁 지는 태양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주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복음을 듣지 못했다고 핑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핏빛으로 붉어지는 태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해 피 흘리시고 죽으셨음을 알려주며 지평선 아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태양은 삼일 밤 삼일 낮을 땅에 묻히셨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은 주님의 부활을 알려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려줍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피에 적신 옷을 입고 오신다고 합니다.(사 63:1-4) 태양은 하나님께서 삼위 일체이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원주민이든 아마존 밀림의 부족이든 귀머거리, 장님, 벙어리이든지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을 안다면 그는 복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 것이 시편 19:1-5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계 1:17-18 내가 그분을 볼 때에 그분의 발 앞에 쓰러져 죽은 자같이 되니 그분께서 오른손을 내 위에 얹으시며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나는 살아 있는 자라. 전에 죽었으나, 볼지어다, 내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한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를 가지고 있노라.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이고 예수님을 위해 박해받고 밧모섬에 유배당하기까지 한 사도 요한이었지만 영광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자 죽은 것처럼 엎드려졌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당당하게 그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나는 살아있는 자라(예수님은 졔사장으로 살아계십니다.) 전에 죽었으나(예수님은 선지자로서 죽으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예수님은 왕으로서 영원히 살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를 가지고 있노라 - 여러분은 그 분과 한 몸이며(고전12:13,27) 영으로는 한 영이며(고전6:17) 하늘에 함께(엡2:6) 있습니다. 나의 구세주께서는 사망과 지옥의 열쇠들을 가지셨기에 만일 내가 죽어서 지옥에 갈지라도 -절대로 그럴리는 없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나의 구세주께서 열쇠를 가지고 계시며 예수님이 바로 문이시며, 나는 그 분과 한 몸이고 그 분은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계 1:19 네가 본 것들과 지금 있는 것들과 이후에 있을 것들을 기록할지니

네가 본 것들 : 과거 (계 1,2,3장 ; 교회시대)

지금 있는 것들 : 현재 (계 4-19장 ; 대 환란)

이후에 있을 것들 : 미래 (계 20,21,22장 ; 천년왕국과 영원)

 

계 1:20 곧 네가 본바 내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과 일곱 금 등잔대의 신비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요, 네가 보는 일곱 금 등잔대는 일곱 교회니라.

네가 본바- 교회 시대가 과거임을 말하고 있다.

일곱 별과 일곱 금 등잔대의 신비라 - 이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계시된 신비이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요, 네가 보는 일곱 금 등잔대는 일곱 교회니라 -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입니다. 일곱 금 등잔대는 일곱 교회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의 해석이 필요 없는 무오한 성경이 내린 정의입니다. 각 교회는 불이 켜진 등잔대로 상징되어 하늘에 있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은 역사상 일곱 지역교회로 묘사된 교회시대에 관해 요한에게 주어 진 것들을 볼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 환상은 환란 때 일곱 교회를 묘사한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사도들의 시대부터 휴거까지의 교회사를 보여줍니다. 계시록2장과 3장의 일곱 교회는 처음 온전하게 예수님의 사역을 시작하였다가 차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잃어갔던 초대교회부터 차지도 덥지도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문밖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가시려고 하시지만 모셔들이지 않는 마지막 교회까지 교회시대의 역사 전체를 두 장에서 보여 줍니다.

 

계시록 2 장

 

2장과 3장의 내용은 교리적으로 환란 때의 지역교회에 해당됩니다.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교회시대 전체를 묘사합니다. 일곱 교회의 이름과 의미와 기간은 1:11절을 보십시오.

 

계 2:1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있는 이 곧 일곱 금 등잔대의 한가운데를 거니는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 일곱 교회 천사에게 향하는 것을 보십시오.

스코필드 주석에서 천사는 “전달자(messenger)"로 정의하면서 각 교회의 “천사”는 지역교회의 목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수입니다. 그 이유는 계시록 3:16에서 하나님께서 천사를 “토하여 내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구원받은 목회자는 예수님의 위장에 있지 않으며 목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 때문에 토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헬라어로는 “전달자”라는 뜻이 있으나 천사는 전달자 이상입니다. 어떤 천사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전달자의 역할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적은 경우일 뿐입니다. 천사를 “전달자”로만 적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4:10의 천사는 전달자가 아니라 “돕는 자”입니다. 계시록 12:7의 천사들은 “전쟁하는 군사들”입니다. 마태복음 24:31의 천사들은 “증인들”입니다. 열왕기하 19:35과 사무엘하 24:15-17에서는 한 천사가 아무런 메시지도 전하지 않은 채 185,000명을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천사를 기본적인 기능들로 축소시킨다고 할지라도 성경에 나오는 모든 천사는 “출현 또는 현현(appearance)”입니다. 주의 천사는 “주의 출현,즉 주의 나타나심”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하나님의 출현”입니다. 빛의 천사는 “빛의 출현”입니다. 마태복음 18:10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마18:10) 삼가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하늘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뵙고 있는 그들의 천사는 전달자가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출현입니다. 이 구절에서 “어린아이들을 지키는 천사가 이 땅에서 그들을 보살핀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그들의 천사가 하늘에 있어서 항상 하나님께서 그들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땅의 모든 것들은 하늘에 그것들의 대표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천사들이란 기본적으로 “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계시록 2:1은 이 교회의 출현을 말하며 하늘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이 땅의 모든 지역 교회를 대표하는 영적 상황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에베소는 “온전히 목적 된”이라는 뜻이며 A.D.30-90년의 기간입니다.

 

계 2:2-3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사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스스로 사도라 말하나 사도가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하는 자들임을 알아낸 것과 또 네가 참고 인내하며 내 이름을 위하여 수고하고 낙심하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이 초기 교회는 일하며 수고하며 맡겨진 일에 땀흘리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태도”로 칭찬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아무 것이나 듣는 대로 믿지 않았으며 성경으로 확인해 보았고 “모든 것을 시험해 보라”는 살전5:21과 요일4:1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였습니다.

스스로 사도라 말하나 사도가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 초기 교회의 특징 중에 두드러진 것이 자칭 사도라는 주장을 보게 됩니다. 자기들은 시몬 베드로로부터 “사도직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요즘도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이 아니며 거짓말쟁이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도라거나 사도직을 계승하였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당장 그 사람의 거짓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사도의 표적과 기사”를 행하였습니다.(고후12:12,막16:15-18) 만일 그 사람이 사도들에게 주어진 표적과 기사를 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말쟁이가 분명합니다. 또 사도들은 주님을 눈으로 본 사람들이며 마지막 사도가 죽은 후 사도직은 어느 누구에게도 계승된 적이 없습니다.

 

계 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게 조금 책망할 것이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음이라.

이 교회는 강한 정통성을 가지고 일하고 수고하고 인내하는 교회였으며 성별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차츰 의식적이며 형식적으로 되어가고 첫 사랑이 떠나기 시작하는 교회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처음 사랑을 유지하는 것은 어떤 그리스도인에게나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계 2:5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기억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하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네게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 구절은 교회의 천사 즉 모임으로서 교회에게 말하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 개인이 은혜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계 2:6 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곧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그것을 미워하노라.

이 교회는 첫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회개할 필요가 있었으나 매우 좋은 점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니골라당은 계2:15에도 나타납니다.)

니골라당(Nicolaitanes)"란 말은 헬라어로서 음역된 낱말입니다.

Nicolaitanes에서 ”니카오“(Nikao)는 ”지배한다“는 뜻이이며, ”라오스“(Laos=Lait평신도)는 평범한 보통사람들을 말합니다.

니골라당의 교리는 보통사람들을 어떻게 지배할까 하는 교리입니다! 니골라당의 교리는 목회자가 특별한 지위인 제사장 신분이 되어 평범한 보통 그리스도인들을 지배하도록 만들어진 교리입니다! 니골라당의 교리는 영적으로 다스린다는 뜻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성직자”라는 말도 없으며 “평신도”라는 말도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으며(고전12:1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도 없습니다.(갈3:28) 목사나 사제만 특별하게 기름부음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모든 성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왕가의 제사장”입니다.(벧전2:9)

 

(고후1:21) 이제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세우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요일2:20) 그러나 너희는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함 받은 세대(世代)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이것은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께 대한 찬양을 너희가 보여 주게 하려 하심이라.

 

니골라당의 교리는 일단의 그리스도인들 계층이 다른 그리스도인들 계층을 지배하려는 교리로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교리입니다.

 

계 2:7 귀 있는 자는 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 한가운데 있는 생명 나무에서 나는 것을 주어 먹게 하리라.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나무를 주어서 먹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미 영생을 소유한 “이긴 자”(요일4:4,5:4)이기 때문에 이 구절은 교리적으로 환란 때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생명나무”라는 낱말이 발견되는 곳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행위”로 “영생”을 얻게 되는데 “은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계22:14을 보시면 생명나무에 참여하기 위해 “명령들을 행해야” 함을 듣습니다. 계2장, 21장, 22장의 “생명나무”는 사람들이 생명나무에 가서 먹음으로서 생명을 얻게되는 나무입니다. “명령을 행함으로” 그 나무에 갈 “자격”을 얻게 되고 “먹어야”하는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계2:7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교리로 적용될 수 없습니다.

에베소 기간에는 11사도들과 맛디아, 바울, 바나바, 안드로니코, 유니아, 아폴로, 실루아노, 디모데를 볼 수 있습니다.

 

계 2:8 서머나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처음이요 마지막인 이 곧 전에 죽었다가 지금 살아 있는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서머나” 몰약을 뜻한다. 몰약은 쓴맛이며 죽음을 나타냅니다. 이 교회는 A.D.90년부터 325년까지의 교회로 로마제국으로부터 공식적인 10번의 박해를 당합니다. 이 기간에 로마 제국은 지상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말살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나날이 증가해 갑니다. 이것을 저지하기 위해 사탄은 A.D.313년 콘스탄틴이 통치하게 될 때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가 아닌 부유한 세상과 손잡게 하므로서 복음 전파를 효과적으로 저지합니다.

 

계 2:9 내가 네 행위와 환난과 궁핍을 알며 (그러나 네가 부유하도다) 또 스스로 유대인이라 하나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인 자들의 신성 모독을 아노라.

내가 네 행위와 환난과 궁핍을 알며 (그러나 네가 부유하도다) - 이 교회는 가난한 가운데서 순교하며 일하는 교회였습니다. 원형경기장에 사자들의 먹이가 되고 인간 촛불로 태워지고 방울뱀이든 자루에 넣어져서 강물에 던져지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부요하다고 하십니다!

가난하다고 말하는 것과 가난한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계3:17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자기는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가 가난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유대인이라 하나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인 자들의 신성 모독을 아노라. - 처음 교회에서는 어떤 자들이 “사도직 계승”을 주장하여 지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니골라당의 교리는 또 다른 주장을 하는데 그 것은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유대인이기 때문에 육신적으로도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무천년과 후천년 신학이 시작되는데 이 교리는 하나님은 유대인과 영원히 관계를 끊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을 대신하고 교회는 이스라엘을 대신하며,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와 천국(kingdom of heaven)은 같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모든 약속은 영적이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완전히 손을 끊으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박해해도 죄가 되지 않으며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인 로마 카톨릭은 유대인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들이 예루살렘을 빼앗으려고 십자군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결코 기독교 성도들의 성지를 수호하려는 전쟁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그리스도의 하수인 로마 카톨릭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려던 사악한 전쟁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유대인들을 대신한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은 신성을 모독(Blasphemy)하는 사탄의 무리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유대인들과 단절하지 않으셨으며(롬11:25-26) 재림하시면 유대인들을 민족들의 머리로 세우실 것입니다.

 

계 2:10 너는 앞으로 당할 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너희 중에서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넣어 너희를 시험하리니 너희가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리라.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왕관을 네게 주리라.

너희가 열흘 동안 환란을 당하리라 - A.D.90-325년 사이의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10번의 대 박해일 수 있습니다.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왕관을 네게 주리라. - 죽기까지 신실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왕관”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주어지는 보상이지 구원이 아닙니다.

 

계 2:11 귀 있는 자는 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입지 아니하리라.

계시록 2:7과 동일하게 이기지 못한다면 둘째 사망의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경고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긴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일4:4)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그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라.

(요일5:4) 이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

서머나 교회의 기간은 교회사에서 가장 위험한 기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수십 개의 이단들의 태동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하는 철학자와 학자들이 이 기간동안 로마 제국에 의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엄청난 그리스도인들의 순교의 행렬이 이어지고, 곧 오실 것으로 믿었던 주님은 오시지 않고 박해는 더욱 심해지고 교회는 순교 당하기에 지쳐서 오히려 로마 카톨릭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권위 있다고 생각하는 교부들의 등장은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교부들은 교회를 로마제국처럼 강력하게 만들려고 세상 학문과 철학을 도입하였습니다.

이 교회기간에 유대주의자와 영지주의자들이 나타나고 클레멘트서신서, 바나바서신, 허마의 목자등이 성경에 포함되기 시작합니다. 이레네우스, 클레멘트, 오리겐, 유세비우스등이 교회를 배교로 이끌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학파”를 형성해 성경을 개정하고 변질시키기 시작합니다. 오리겐은 자칭 그리스도인이었고 성경을 난도질하고 개정한 장본인이며 유세비우스는 오리겐의 제자로서 콘스탄틴황제와 내통하여 교회를 황제의 수중에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 교회가 “로마 카톨릭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뿌리는 바빌론 종교인데 창세기 10장의 강력한 사냥꾼 니므롯이 세운 바벨탑으로 시작된 종교입니다. 이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전혀 기독교적이거나 성경적이지 않으며 모습이나 형태도 참 교회와는 거리가 먼 바빌론 종교입니다.

서머나는 쓴 몰약으로 상징되는 교회기간인데 참 그리스도인들이 죽임 당하고 고문당하고 살해되는 기간입니다.

 

계 2:12 버가모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양날 달린 날카로운 칼을 가진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이 버가모 교회의 기간은 A.D.325년에서 500년까지의 기간입니다. 이 버가모 기간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등장으로 특징 지어지며 바로 암흑시대가 이어집니다.

버가모는 “숱한 결혼”을 뜻합니다. 이 교회는 세상에 연합하는 것이 특징이며 세상과 결혼한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A.D.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오리겐이 변개시킨 성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받아 들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에게 “이혼증서”를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31에서 음행한 아내를 버리려면 “이혼증서”를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5:31에 “이혼증서”라고 사용된 그리스어는 “Biblion Apostasion”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변개된 성경”이라는 의미입니다.

 

계 2:13 내가 네 행위를 알고 또 네가 어디에 거하는지를 아노니 곧 사탄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붙잡고 안디바가 나의 신실한 순교자가 되어 너희 가운데서 곧 사탄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하던 그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부인하지 아니하였도다.

이 교회는 사탄의 자리가 있는 곳, 즉 사탄이 거하는 곳에 있습니다. 흥미있는 것은 바빌론 신비 종교인데 이 종교는 니므롯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종교와 국가가 혼합된 체제였습니다.(알렉산더 히슬롭의 두개의 바빌론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사탄 종교는 고해성사를 하고 여신을 숭배하며 페테르(peter)라는 제사장이 비밀교리를 가르친다. (베드로(peter)와 같은 발음이다!) 이 니므롯의 종교는 사탄의 비밀종교인데 B.C.133년에 바빌론에서 버가모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 사탄의 자리는 다시 A.D.313년 로마교회로 이동하였습니다.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기독교를 세상과 하나로 통합하였을 때 이 로마 종교는 사탄의 자리가 있는 신비의 바빌론 체제<<정치와 종교를 통합한 형태>>를 취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비의 바빌론 종교인 로마 카톨릭 교회의 통치를 받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의 탈을 쓴 로마 교회의 통치하에서 로마제국의 통치 때보다 더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순교가 시작됩니다.

 

계 2:14-16 그러나 네게 몇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이는 거기에 발람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네게 있기 때문이로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하고 또 음행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있으니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네게 가서 내 입의 칼로 그들과 싸우리라.

이 교회는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지킵니다.

발람의 교리 - “발람의 교리”(민22-25장을 읽어 보십시오.)는 발람 스스로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람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자손을 죽이시도록 하는 방법을 발락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것은 모압인들을 유대인과 혼인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고 음행이 포함된 경배의식을 가르쳤는데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일어나 이스라엘 자손 스스로 24,000명을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발람의 교리”입니다.

니골라당의 교리- 계시록 2:6을 보십시오.

버가모 교회는 세상과 결혼하였으며 음행과 우상숭배가 경배의 일부로 행해지며 성직자가 평신도를 지배하는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회개하여야 하였으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계 2:17 귀 있는 자는 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감추어 둔 만나를 주어 먹게 하고 또 흰 돌을 주리니 이 돌에는 새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이 돌을 받는 자 외에는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느니라.

이 구절은 어렵습니다. 영적으로 본다면 사람이 죄를 고백하고 구원받았을 때 그는 “죄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관습에 의하면 무죄로 판명되면 검은 돌 대신 흰 돌을 받는 관습이 있습니다. 돌은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안에서 새 이름을 가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적용일 뿐입니다. 새로운 이름이 무엇인지는 받는 사람 외에는 모릅니다.

버가모 교회는 카톨릭 교회의 등장으로 특징 지워집니다. 콘스탄틴은 바실리카 회당들을 “교회”로 바꾸고 금, 은, 보석으로 치장하여 주었고 주교들은 높임을 받게 하였고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을 사자들에게 던지지도 않았으며 교회와 국가가 연합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함께 자유와 권리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어거스틴, 제롬, 클레멘트등 당시의 세속적인 교부들(마23:9을 보라)은 박해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천년통치가 시작되어 이 땅에 “천국이 임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후천년주의의 시작입니다. 현재도 로마 카톨릭의 후천년주의를 믿는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로마 카톨릭과 합하는 것이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종교 통합운동인 에큐메니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A.D.325년 세상과 결혼한 이 교회는 거의 천년동안 성경을 잃어버리고 암흑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 기간에 진리를 전파한 안티옥의 요한(A.D.441)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콜롬바, 알반, 꾸뜨벨, 피난이 있었고 프랑스에는 라벤나의 피터, 엘지우스. 노르웨이와 스웨덴에는 안스가르, 림버트, 닛따르, 윌리브로, 엑버트,하르팍등이 KJV의 원문인 수용원문(Textus Receptus)으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외에도 카톨릭 교회에 저항한 많은 초기의 선교사들이 있었으며 로마교회는 이들을 온갖 방법으로 고문하고 죽이고 박해하였습니다.

계 2:18 두아디라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정제(精製)된 놋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것들을 말하노라.

두아디라는 “고통의 향기”라는 뜻입니다. 이 교회 기간은 A.D.500년부터 1000년까지로 가장 어두운 암흑시대의 깊숙한 곳으로 인도합니다. 이 교회 기간에 A.D.300년 이전의 로마 제국의 박해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극렬한 박해를 당합니다.(“죤 폭스의 순교사화”를 읽어 보십시오.) 이 기간에 교황들은 유럽을 지배하기 위해 왕들을 통제하고 왕들과 싸웠으며 왕들은 교황들에게서 정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교황들은 왕들을 “교회의 머리”로 앉히고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이 기간에 마리아가 신격화되고 머리에 물을 적시는 세례가 구원의 절대 진리로 가르쳐집니다.

계 2:19 내가 네 행위와 사랑과 섬김과 믿음과 네 인내와 네 행위를 아노니 나중 것이 처음 것보다 많도다.

두아디라 교회는 첫 사랑과 처음 행위를 모두 버렸습니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도, 그리스도의 행하라는 말씀에서도 떠났습니다.

 

계 2: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게 몇 가지 책망할 것이 있으니 이는 네가 이세벨이라는 그 여자를 용납하기 때문이라. 그녀가 자기를 가리켜 여대언자라 하며 내 종들을 가르치고 꾀어 음행하게 하고 또 우상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하는도다.

이 교회가 처음 행위를 버린 원인을 보여줍니다.

이세벨이 누구인지는 성경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안다. 바로 열왕기상 16-18장에 나오는 아합과 결혼한 시돈왕 엣바알의 딸입니다. 이세벨은 바알과 “하늘의 여왕”을 숭배한 자칭 대언자였고 종교지도자였습니다.(왕상16:29-32) 시돈사람들이 섬긴 이 바알종교는 바벨론 종교인데 구약을 통해 알아보면 놀라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창세기 49:17에서 “단 지파”는 “뱀”으로 불립니다. 신명기 33:22에서 “단”은 “사자의 새끼”라고 불린다. “단 지파”는 “뱀과 사자”같다고 합니다. 사탄은 창세기 3장에서는 “뱀”이며 베드로전서 5:8에서는 “울부짖는 사자”로 묘사됩니다. 이 단 지파는 사사기 18장에서 에브라임 지파의 미가가 저주받은 은으로 만든 새긴 형상과 부어만든 형상을 가진 미가의 우상종교를 탈취합니다.(사사기 17장 참고)

(삿18:18-20) 그 다섯 사람이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새긴 형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형상을 가져오매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하거늘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에게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낫겠느냐, 혹은 이스라엘의 한 가족 곧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낫겠느냐? 하니 그 제사장이 마음 속으로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형상을 취하고 그 백성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니라.

단 지파는 한 젊은이를 자기 지파의 제사장으로 세우고 이 제사장을 아버지(father)라고 부릅니다. 이 아버지는 우상들을 예배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 단 지파는 시돈과 두로에 정착하여 거의 천년동안 우상과 형상을 가지고 경배하는 종교를 섬깁니다.(판18:28,30,31을 보십시오) 우상숭배민족인 페니키아인들이 거주하는 시돈은 창세기 10:19에는 저주받은 함(가나안인)족이 이 지역에 정착하였습니다. 바로 이 시돈 땅에서 경배하는 종교가 바알 종교이며 페니키아의 신입니다. 이세벨은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왕 엣바알의 딸입니다. 이세벨은 바알과 “하늘의 여왕”을 숭배한 자칭 대언자였고 종교지도자였습니다.(왕상16:29-32) 이 바알과 하늘 여왕을 숭배하는 이세벨의 종교가 두아디라 교회안에 그대로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이 바알 종교를 좀더 말하면 이 종교는 태양신을 그의 날인 “일요일(Sunday)"에 숭배했습니다. 아침부터 정오까지 숭배하고 태양의 불을 숭배하였으며 검은 제의의 긴 옷을 입으며 긴 제의의 보조인을 두었습니다. 이 종교의 지도자들은 고행을 하고 몸을 절단하며 고해성사를 하는데 ”아버지(father)“라 불립니다. 이 바알 종교는 바알과 태양신의 생일을 숭배하려고 숲에서 나무를 가져다가 치장하고 장식하기도 합니다.(렘10:1-5) 이들은 ”하늘의 여왕“이라 부르는 여신에게 분향하고 제물을 바치기도 합니다.

카톨릭에서도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이라고 부릅니다! 카톨릭의 신부(神父)는 ”성직자“라고 불리며, ”아버지“라고 불립니다.(godfather) 교황은 Pope(아버지), Godfather(하나님아버지), Holy Father(거룩한 아버지)로 불립니다.

(마23:9) 땅에 있는 자를 너희 아버지라 일컫지 말라. 이는 너희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라.

그녀가 자기를 가리켜 여대언자라 하며 내 종들을 가르치고 꾀어 음행하게 하고 또 우상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하는도다. - 이 여인은 발라암의 교리를 가르칩니다. 14절과 20절을 비교해 보면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음행하는 여인의 정체는 계시록 17장에 자세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계시록 13:18절 설명 참고)

 

계 2:21-22 내가 그녀에게 그녀의 음행을 회개할 여지를 주었으나 그녀가 회개하지 아니하였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녀를 침상에 던질 것이요, 그녀와 함께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 행실을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속에 던져 넣을 것이며

회개할 기회는 A.D.325-500년이었습니다.

이 여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은 나와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경고하십니다.(계18:1-8, 고후6:14-18)

계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녀의 자녀들을 죽이리니 그리하면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속 중심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또 내가 너희 행위에 따라 너희 각 사람에게 주리라.

이 구절을 A.D.500년-1,000년까지의 교회사에 적용한다면 “사망”은 유럽의 대재앙이었던 “흑사병”인 것 같습니다.

 

계 2:24 그러나 내가 너희와 두아디라에 남아 있는 자들 곧 이 교리를 가지지 아니하고 그들이 말하는 대로 사탄의 깊은 것들을 알지 아니한 모든 자들에게 말하노니 내가 어떤 다른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리라.

많은 사람들이 카톨릭 교회가 바알 종교의 재현인 것을 모릅니다. 이유는 성경을 공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경을 공부하라(딤후2:15)고 하셨으나 이 명령을 무시한 것은 “무죄”가 아닌 유죄입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는 “무죄”가 아닙니다!

계 2:25-29 다만 너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붙잡으라. 이기고 나의 행위를 끝까지 지키는 자에게는 내가 민족들을 다스릴 권능을 주리니 그가 철장(鐵杖)으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요, 토기장이의 그릇같이 부수어 산산조각 내리라. 이것은 곧 내가 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과 같으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철장(鐵杖) - 계시록 12:5, 19:15을 보십시오.

이 기간은 교회사에서 가장 어두운 기간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간에 거의 모든 사람이 성경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서 성경을 전문적으로 해석하고 풀어주는 “카톨릭”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에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를 사용하는 카톨릭은 구령하지 않았으며 어떤 영적인 성장도 이루지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두움 가운데서도 헬라어 수용원문(T.R.)이나 구 라틴성경을 사용하는 진정한 설교자들과 위대한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카타리스트, 도미니끄, 프란시스칸, 네스토리안이라 불렸으며, 교황과 그의 교회로부터 무자비하게 박해를 당하였습니다. 어둠을 밝힌 설교자들은 시엔나의 버나디노, 로잔느의 헨리, 탕케름, 로이따르, 브레스키아의 로베르뜨, 쎄그니의 브루노, 삭소니의 루돌프, 빈센트 페레, 루마니아의 베톨드, 플로리스의 죠아킨, 빌라노바의 아놀드가 어둠을 밝히는 불빛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계시록 3 장

 

이제 교회사 가운데 1000년을 지나 사데 교회시대에 이르렀다. “사데”란 “붉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기간(A.D.1000-1500년)의 성도들이 “붉은 자들”이라고 불린 이유는 이 시대가 가장 많은 순교자의 붉은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에 스페인의 종교재판소가 등장하고 교황이 비무장의 기독교인들을 살해한 무장 카톨릭 신자들에게 훈장을 수여한 위그노의 대학살과 바돌로매의 대학살이 자행됩니다. 이런 사건들은 카톨릭이 정치적 권력을 잡으면 다시 재현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외에도 교황의 예루살렘 정복의 야욕을 드러낸 십자군 원정과 살라딘과 징기스칸의 침략이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간의 100년 전쟁이 있었습니다.(A.D.1337-1450)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십자군 원정으로 아시아 문화와 문명이 힌두, 모슬렘 철학과 함께 유럽으로 밀려듭니다. 그렇지만 밤이 가장 어두운 가운데서도 KJV의 원문인 헬라어 수용원문들이 증가하고 항가리, 보헤미아, 불가리아를 거쳐 마틴 루터의 독일까지 전달됩니다. 이 사데 기간에 교회사에서 위대한 세 사람이 있는데 위클맆(Wycliffe), 죤 후스(John Huss), 사보나롤라(Savonarola)입니다.

 

계 3:1 사데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살아 있다고 말하지만 죽어 있고 성장하지도 않습니다. 이 교회는 “믿음의 정통”과 “사도신경”과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는 명분은 내세우지만 죽어버린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죽어버린 이 시대에 재침례 교도들, 카타리스트, 위그노, 왈덴시안, 알비겐시안은 살아남은 소수의 생명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계 3:2-3 너는 깨어서 아직 남아 있으나 죽으려 하는 것들을 강건하게 할지니 이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완전함을 찾지 못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하고 굳게 붙잡아 회개하라. 그런즉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네게 이르리니 어느 시각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환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인 계시록 16:15과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의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라는 표현과도 일치합니다.

 

계 3:4 사데에도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이름이 네게 있어 그들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걸으리니 이는 그들이 합당한 자들이기 때문이라.

흰 옷 - 흰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입니다.(계3:18, 16:15, 19:8을 읽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후에 행한 선한 행실로 이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설 것입니다.(고후5:1-10) 암흑시대의 깊은 곳에서도 진리를 전파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재침례교도들, 카타리스트, 위그노, 왈덴시안, 알비겐시안, 롤라즈, 폴리시안등으로 불리며 카톨릭에 의해 이단들로 낙인찍혀 극심한 박해를 받습니다.

 

계 3:5 이기는 자 곧 그는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의 이름을 생명 책에서 지워 버리지 아니하고 그의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구원을 상실 할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구절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이기지 못한다면 이름을 지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자세히 읽어보면 지우겠다는 협박이 아니라 지우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누가 이 구절로 협박을 하거든 그리스도인은 이미 이겼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요일4:4, 5:4) 이 구절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협박이 아니라 생명의 책에서 결코 지우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계 3:6 귀 있는 자는 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 기간은 두아티라 교회 시대와 함께 로마 카톨릭이 권력을 잡은 피의 박해 기간인데 이 두 기간을 역사가들은 중세 암흑기간이라고 부릅니다. 카톨릭이 참 교회였다면 “암흑기간”이 아니라 “빛의 기간”이라고 불리었을 것입니다. 이 시대의 위대한 인물들은 왈덴시안의 피터 왈도, 밀리츠, 콘라드, 죤 타울러, 자노의 맛디아, 틴데일, 위클맆, 죤 후스, 사보나롤라, 죤 콜렛, 윌리암 루브맄, 페루지아의 앤드류, 빈센트 페레, 죠지 칸디다스등이 독일, 프랑스, 스위스, 스페인, 영국에서 설교하며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퍼가모 교회시대에 누룩을 숨겨 넣고 사탄의 자리에 앉아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지키며 이세벨의 바알 종교를 용납하고 음행하며 순교자들의 피에 취하여 천년동안의 암흑시대를 주도한 이 이단의 정체를 아직도 모르는 분이 계실까요? 자! 성경이 스스로 밝히는 이 이단의 정체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계 17:1-2)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의 하나가 와서 내게 이야기하며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들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내가 네게 보여 주리라. 땅의 왕들이 그녀와 음행하였고 땅의 거주하는 자들도 그녀의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게 되었도다, 하고

계 2: 20과 얼마나 유사한지 비교해 보십시오. 이세벨은 여대언자로 교회에 거짓 교리를 가르쳤습니다.(계2:20) 계 17장의 여인이 이사벨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큰 도시입니다.

(계 17:18)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 위에 군림하는 저 큰 도시니라, 하더라.

성경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읽은 대로 믿지 않고 그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본 그 여자는---큰 도시이라.」

이 여자가 누구인지는 짐작할 필요도 없고 “해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큰 도시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계 17:9) 지혜 있는 생각이 여기에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그 여자가 앉아 있는 일곱 산이라.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일곱 산”위에 세워진 큰 도성를 아십니까?

(계 17: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순교자들의 피에 취하였으므로 내가 이 여자를 보고 매우 놀라며 이상히 여기니

“큰 도시”로 “땅의 왕들”을 다스리며 “일곱 산” 위에 세워졌고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순교자들의 피”를 흘린 그런 도성을 아십니까?

(계 17:4) 그 여자는 자주색 옷과 주홍색 옷을 차려 입고 금과 보석들과 진주들로 꾸미고 그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것들과 그녀의 음행으로 인한 더러운 것이 가득하더라.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고 “일곱 산”위에 세워졌으며 그 색깔은 “자주색과 주홍색”이고 상징은 “금잔”이며 예수님의 순교자들의 피“를 흘리는 ”큰 도시“에 대하여 아십니까?

이 지구상에 일곱 산 위에 세워진 유일한 큰 도시가 있습니다. 로마의 시인 버질, 프로페티우스, 호라티우스, 마샬등 고대와 중세와 현대의 모든 시인들은 일곱 산 위에 세워진 로마를 노래하며 이 큰 도시가 온 세상을 통치한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이 일곱 산은 아벨지네, 고에리안, 에스큐리에, 쟈니큐란, 바라테노, 크일리나, 베니아루로 명명되어 있습니다.

아직도 “자주색 옷과 주홍색 옷”을 입고 “금 잔”을 가지고 “땅의 왕들”을 다스리며 “예수님의 순교자들의 피”를 흘리며 “일곱 산”위에 세워진 “큰 도시”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여자인 큰 도시의 정체에 대해서는 어느 사람도 해석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성령께서 성경에 기록하셨고 공개하셨고 그 여자의 이름을 밝히셨고 확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여자인 도성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훗날 심판 때 무엇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너의 죄가 너를 찾아내리니」 무지는 무죄가 아닙니다.

계 3:7 필라델피아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며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필라델피아”는 “형제의 사랑”을 뜻하는 두 그리스어 낱말에서 유래하며 일곱 교회 중 유일하게 회개하라는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 교회기간은 A.D.1500-1900년까지의 기간입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도 활발하고 강력하게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며 산업혁명과 농업혁명, 과학등 주요한 진보적인 발전을 가져옵니다. 중세 암흑시대의 어두움은 걷히고 복음은 땅 끝까지 전파되고 사회적으로도 산업이 발달하자 A.D.325년에 유세비우스와 콘스탄틴이 꾸며 낸 후천년주의가 다시 나타나고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합니다. 이 시대에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진 것은 “열린 문”과 “열린 성경”의 교회 시대였기 때문에 모든 것이 향상된 것입니다.

 

계 3:8 내가 네 행위를 아노라.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아무도 닫지 못하리라. 이는 네가 적은 힘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부인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이 교회만이 “열린 문”을 가진 교회이며 책망 받지 않은 교회입니다.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교회는 닫힌 문을 가진 교회이며 책망뿐인 교회입니다.)

나의 말을 지켰고 - 이 말은 일곱 교회중 유일하게 필라델피아 교회에만 언급되었습니다. 이 시대에 A.D.1611년에 성경의 절대 기준인 “킹제임스성경(King James Version)"이 출판됩니다. 그리고 이 성경으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됩니다.

 

계 3:9 보라, 사탄의 회당에 속한 자들 곧 스스로 유대인이라 하나 유대인이 아니고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 있으니, 보라, 내가 그들로 하여금 와서 네 발 앞에 경배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한 줄을 알게 하리라.

A.D.90-325년 서머나교회 기간에 자칭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무리를 보았습니다.(계2:9) 하나님께서 실제의 유대인들과 완전히 단절하였다고 주장하며 자기들이 이스라엘의 참 계승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기간에 다시 나타납니다. 이들은 로마인들이면서 유대인이라고 주장합니다. A.D.1500-1900년 기간에 로마 카톨릭은 거의 끝장 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은 하나님 말씀 개정위원회라는 조직 속으로 침투하여 수용원문(T.R.)을 제거하고 웨스트 코트와 홀트의 로마 카톨릭원문으로 대체하는 일을 진행합니다. 다시 말해서 1884년 이후에 나온 모든 성경은 모두 카톨릭 성경입니다!

 

계 3:10-11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은즉 나도 너를 지켜 시험의 시간을 면하게 하리니 이것은 곧 앞으로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시간이라. 볼지어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붙잡아 아무도 네 왕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본문은 왕관과 상은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요이8)

 

계 3:12-13 이기는 자는 내가 내 하나님의 전에서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다시는 나가지 아니하리라. 또 내가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할 것이며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필라델피아 교회 기간은 가장 흥미있는 기간입니다. 열린 문을 가진 기간이고 모든 위대한 구령자들, 모든 위대한 복음전도자들, 모든 위대한 선교사들로 빛났던 시대입니다. 이 기간에 모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킹제임스성경(KJV)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고 사용하였습니다. 이 기간은 1500년에 시작되는데 1492년에 크리스토퍼 콜롬부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합니다. 이 시대에 위대한 탐험가들, 위대한 화가들, 위대한 음악가들이 탄생합니다. 미술과 음악, 산업과 과학, 탐험과 여행에서 엄청 난 변화들이 일어납니다. 킹제임스성경(KJV)과 루터 성경이 전 세계에 있었기 때문에 4백년동안 이 세상에는 축복이 쏟아 질 수 있었습니다.

이 기간에 독일에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었고 울리치 쯔빙글리는 스위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했으며 존 칼빈이 그의 개혁을 이어 받았습니다. 영국에서도 존 낙스가 일어났고, 파렐, 버나디노, 메노 시몬즈가 있었습니다. 스토치, 스투브너, 문쩨는 위대한 독일 설교자들이었습니다. 독일인 피터 볼러는 요한 웨슬레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레와 죠지 휫필드의 설교는 사회적 격변기에 휘 말린 영국을 진정시켰습니다. 미국에서는 조나단 에드워드, 토마스 웹, 윌리암 스트로브릿지, 다아비, 필립 엠브리는 위대한 감리교 설교자들이었습니다.

이 기간에 윌리엄 캐리가 인도로,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인디안들에게, 아도니람 저드슨이 버마로,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으로 향했으며 스터드, 리빙스턴, 고든등 위대한 선교사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위대한 설교자들도 가장 많았습니다. 탈마지, 백스터, 페이슨, 제이콥, 피터 카트라잇, 제임스 멕그리디, 로렌조 다우, 쉘던 잭슨, 빌리 브레이가 있었으며, 찰스 피니와 찰스 스펄젼, 드와이트 무디의 부흥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죠지 뮬러는 기도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 진 인물이며 킹제임스성경(KJV)을 무릎을 꿇고 100번 읽은 위대한 기도의 사람입니다.

필라델피아교회만이 유일하게 회개하라는 말을 듣지 않았으며 적은 능력을 가지고 나의 말을 지켰다고 칭찬 받는 교회입니다. 필라델피아 교회기간에 성경의 절대 기준인 KJV AV1611이 주어졌습니다. 이 시대가 끝나가면서 로마 카톨릭원문으로 대체 된 성경이 라오디게아 시대가 시작되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급속도로 세속화되어 갑니다. 에베소와 서머나 교회는 “열정이 있었고” 버가모와 두아디라 교회는 “파멸되었으나” 사데와 필라델피아 교회는 다시 “열정이 있었고”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다시 “파멸됩니다.” 역사는 항상 되풀이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 합니다.

계 3:14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요,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요,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인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이제 휴거전의 마지막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왔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사람들의 권리, 또는 정의”를 뜻합니다. 이 시대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권리에 대적하는 사람들의 권리로 특징 지워집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권리란 전혀 없는 마지막 교회시대입니다.

 

계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 하나님은 극단주의자이시며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입니다.

 

계 3:16-17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므로 내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리라. 네가 이르기를, 나는 부자라.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가련한 것과 비참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물질적인 부로 상징되는 부요한 교회입니다.

 

계 3:18 내가 네게 권고하노니 내게서 불로 단련한 금을 사서 부유한 자가 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나지 아니하게 하며 네 눈에 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

불로 단련한 금 - 믿음의 시련(벧전1:7)

흰옷을 사서 입어 -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계16:15,고후5:3)

네 눈에 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 - 소경 (요9:8)

 

계 3:19 -20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런즉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晩餐)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문밖에 세워 두고 문을 닫아 버린 교회입니다.

 

계 3:21-22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내 왕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왕좌에 앉아 있는 것 같게 하리라. 귀 있는 자는 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본문은 일곱 교회에 주는 메세지의 결론입니다.

이 마지막 교회의 사람들은 차지도 덥지도 않습니다. 물질적 부를 자랑하는 이 교회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엾고 불쌍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뜯어고치기 시작한 A.D1901년 ASV의 출판과 더불어 시작되며 A.D.325년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카톨릭 교회가 승인하고 사용한 배교한 성경들이 등장하여 다시 다투어 출간되면서 엄청 난 배교가 일어나는 시대입니다. W.C.C. N.C.C,등 로마 카톨릭과의 연합을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교회성장과 은사주의가 팽배합니다. 성경의 권위는 목사들과 학자들의 권위에 눌려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배교가 일어나는 시대에도 여전히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밥 죤스, 프랭크 노리스, 닥터 디한, 데오도르 엡, 죤 라이스, 스코필드, 클레런스 라킨, 사우어, 벌링거와 다른 많은 믿음의 수호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과 히틀러, 무솔리니의 대학살이 있었습니다. A.D.1948년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으로 주님의 재림 준비를 마친 마지막교회 시대입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에 신실한 사람으로 발견되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계시록 4 장

계 4:1 이 일 후에 내가 바라보니, 보라, 하늘에 문이 열려 있더라. 전에 내가 들은 첫번째 음성 곧 나팔 소리와 같이 내게 이야기하던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반드시 일어날 것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더라.

하늘에서 한 문이 열립니다. 계시록에서 문이 두 번 열리는데 이곳 계시록 4:1과 계시록 19:11입니다. 계시록 4:1에서는 누군가 올라갈 때이고, 계시록 19:11에서는 누군가 내려 올 때입니다. 문이 열릴 때 음성과 나팔소리가 나는데 이 것은 주님께서 누군가를 부르시는 것이다.(살전 4:15-18, 고전15:51-52과 비교해 보라.)

이리로 올라오라 - 이 표현은 성경에 세 번 나오는데 구약에서 한 번, 그리고 교회시대 끝에 한 번, 그리고 환란 끝인 계시록 11:12에서 한번 나옵니다.(잠25:7, 계4:1, 계11:12)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휴거는 한 번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한번의 휴거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 번의 휴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추수는 세 번의 추수하는 시기가 있는데 첫 곡식단을 드리는 무교절과 본격적인 추수 때인 칠칠절, 그리고 마지막인 장막절입니다.

(고전15:22-24) 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라. 그러나 각 사람이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1)“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그 다음에는 (2)“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요,” 그 뒤에 (3) “끝”(끝이라는 단어는 항상 환란과 관련이 있습니다.)이 오리니 곧 그분께서 모든 치리와 모든 권세와 권능을 폐하시고 왕국을 하나님 곧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때라.

(신 16:16) 네 모든 남자는 한 해에 세 번 곧 무교절(첫 열매)과 칠칠절(추수)과 장막절(이삭줍기)에 주 네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분 앞에 보이되 주 앞에 빈손으로 보이지 말고

 

1) 첫 열매는 유월절후인 무교절인데 그리스도의 부활 때입니다. 이 때에 낙원에 있던 구약 성도들이 부활하여 하늘로 간 휴거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혼자 부활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첫 열매(들)”이라고 합니다.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마 27:50-53) 예수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니라. 이에, 보라, 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들이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니 잠든 많은 성도(聖徒)들의 몸이 그분께서 부활하신 뒤에 일어나 무덤 밖으로 나와서 거룩한 도시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엡 4:8-10)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다, 하였도다. (이제 그분께서 올라가셨다 하셨은즉 또한 먼저 땅의 더 낮은 부분으로 내려가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려가신 그분께서 또한 모든 하늘들보다 훨씬 위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시니 이것은 친히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2) 추수는 오순절인데 교회시대의 끝에 있을 신약 성도들의 휴거입니다.(계4:1) 이 휴거는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납니다.

(고전15:50-53)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알게 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이는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도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요, 또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라.

(살전4:13-17) 그러나 형제들아,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 같이 슬퍼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이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일어나셨음을 믿을진대 그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임이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결코 잠자는 자들보다 앞서지 못하리라. 이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임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도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게 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3) 이삭줍기는 장막절인데 환란기간의 끝(재림)에 있을 환란 성도들의 휴거입니다.

(마24:31)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자기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의 네 바람으로부터 함께 모으리라.

(계11:12) 이 두 대언자가 하늘로부터 자기들에게 큰 음성이 나서, 이리로 올라오라,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구름 속에서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이 그들을 바라보더라.

이 세 번의 휴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란 후 재림은 성도들과 “함께” 이 땅에 오는 것입니다.

 

계 4:2 이에 내가 즉시로 영(靈) 안에 있었더니, 보라, 하늘에 왕좌가 놓여 있고 그 왕좌에 한 분이 앉아 계시더니

내가 즉시로 영(靈) 안에 있었더니 - 계시록 1:10에서도 “성령 안에”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그리스도안에 있고 성령 안에 있는 것을 말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차원의 기적적인 변형을 의미하는 “성령 안에”입니다. 계시록 4:1-2과 고린도전서 15:49-52을 비교해 보십시오.

여기서 요한은 즉시 “영 안에 있게” 되었는데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 셋째 하늘에 있게 된 것입니다.

요한은 교회의 예표로서 교회의 휴거에 대한 완벽한 모형입니다.

아담은 그의 아내인 이브를 얻기 위해 깊은 잠(요11:11,고전11:30,15:6을 보라.)을 자야 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갈비뼈에서 그의 아내를 얻었습니다. 아담은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을 알고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이브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신부인 교회를 얻기 위해 죄인들을 대신하여 자원하여 죽었으며 옆구리를 창으로 찔려야 했습니다. 교회의 예표로서의 요한은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있던 사랑 받는 자이며 사랑받는 유일한 제자였습니다.(요13:23, 19:26, 21:20) 마지막 만찬 때 “진실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하리라”고 예수께서 말씀 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은 “주여, 나니이까?”(마26:22, 막14:19)라고 대답했으나 요한은 “주여 누구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있던 자이며, 사랑 받는 자이며, 예수님을 결코 배반하지 않을 자로서 요한은 완벽한 교회의 모형입니다. “요한”의 이름은 “주의 사랑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늘에 왕좌가 놓여 있고 그 왕좌에 한 분이 앉아 계시더니 - 문자 그대로 하늘에 있는 한 왕좌인데 하나님께서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소 부재하신 분이시지만 실제적인 한 왕좌도 갖고 계시며 앉아 계십니다. 루시퍼가 탈취하려고 하였던 이 하나님의 왕좌는 실제적인 장소에 있는 실제적인 왕좌입니다. 그 곳은 북쪽이며 궁창 위의 물을 통과한 셋째 하늘에 있는데 시온산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사14:12-14, 시48:2, 75:6-7)

계 4:3-4 앉으신 분의 모습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왕좌 둘레에 무지개가 있어 보기에 에메랄드 같더라. 또 왕좌 둘레에 스물네 자리가 있고 내가 보니 그 자리들 위에 스물 네 장로가 흰 옷을 입고 머리에는 금 왕관을 쓰고 앉아 있더라.

요한은 “우주의 실제 장소”인 셋째하늘로 “들림 받아” 올라가 주님의 왕좌를 봅니다. 주님의 왕좌의 모습은 여러분이 읽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스물 네 장로가 흰 옷을 입고 - 스물 넷은 유대인의 숫자(12)의 배수인데 이것은 구원받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말하거나, 교회시대를 시작한 열두 사도와 그후에 구원받은 사람들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 “12지파의 대표들과 12사도들”이라고 말하지만 확인은 되지 않습니다.

스물 네 장로들에 관한 도움이 될 만한 구절들은 시107:32, 대상24:1, 벧전5:1, 출3:18, 히11:2입니다. 그러나 스물 네 장로가 누구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계 4:5 그 왕좌로부터 번개들과 천둥들과 음성들이 나오고 왕좌 앞에는 일곱 등불이 타고 있으니 이것들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일곱 영 - 계시록 1:4과 이사야서 11:2을 보십시오.

 

계 4:6 왕좌 앞에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왕좌 한가운데와 왕좌 둘레에 네 짐승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수정 같은 유리 바다 - 욥기 37:18, 26:10. 38:30, 시편 148:1-4,7을 보십시오. 왕좌 앞의 이 바다는 우주 북쪽의 실제적인 바다인데 이 바다는 표면이 절대 0도로 얼어 있습니다. 《절대 0도란 온도가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 온도를 말하는데 영하 27315도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모든 분자의 활동이 정지되며 시간의 흐름도 정지됩니다. 바로 영원한 세계입니다!》

네 짐승 - 이 네 짐승들은 에스겔 1장과 10장에 “그룹들”로 불리는데 이들은 창세기 3:24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그룹들은 처음에는 다섯이었습니다. 에스겔서 1장,10장, 계시록 4장 모두 네 그룹이 등장하지만 에스겔서 28:14을 보면 원래는 그룹이 다섯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계시록 4장에는 한 그룹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빠진 짐승은 왕좌 위에 “덮는 그룹”입니다! 이 타락한 그룹은 하나님의 왕좌 위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 10:14(사람, 사자, “그룹”, 독수리)과 에스겔서 1:10(사람, 사자, “황소” 독수리)을 비교해 보면 이 그룹의 본질적 모습을 알 수 있는데 “황소”와 같은 얼굴입니다. 왜 사람들이 황소를 숭배하는지 짐작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그룹의 현재 모습은 붉은 용입니다(계12:3-10)

 

계 4:7-8 첫째 짐승은 사자 같고 둘째 짐승은 송아지 같으며 셋째 짐승은 사람 같은 얼굴을 가졌고 넷째 짐승은 날아다니는 독수리 같더라. 네 짐승이 저마다 자기 둘레에 여섯 날개를 가졌고 안쪽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전능자여,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이시라, 하고

이 네 짐승들은 네 개의 다른 얼굴이 있으며 각각 여섯 개의 날개를 가졌고 보좌 주위에 정지해 있습니다.

계시록 4장과 에스겔서 1장을 비교해 보면 조금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시록 4장은 왕좌 주위에 정지해 있는 모습이지만 에스겔서 1장은 그룹들이 “바퀴들”을 가지고 날아 이동하면서 왕좌를 수행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다(성부), 거룩하다(성자), 거룩하다(성령), (아버지) 하나님(성자) 전능자(성령)여! 전에도 계셨고(선지자로), 지금도 계시고(대제사장으로), 앞으로 오실 (왕으로)시라

 

계 4:9-11 그 짐승들이 왕좌에 앉으신 분 곧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릴 때에 스물네 장로가 왕좌에 앉으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께 경배하고 자기들의 왕관을 왕좌 앞에 던지며 이르되, 오 주여, 주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이는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이요, 또 모든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음이니이다, 하더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네 짐승들과 스물 네 장로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장면을 봅니다. 이것은 요한이 셋째 하늘에 들림 받아서 본 장면이며 교회가 휴거되면 보게 될 것들의 모형입니다.

 

계시록 5 장

 

계 5:1-4 또 내가 보매 왕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과 뒷면에 글이 적혀 있고 일곱 봉인(封印)으로 봉인되어 있더라. 또 내가 보매 힘센 천사가 큰 음성으로 공포(公布)하기를, 누가 이 책을 펴며 이 책의 봉인들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되 하늘에나 땅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책을 펴거나 들여다볼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 그 책을 펴거나 읽거나 들여다보기에 합당한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므로 내가 많이 울었더니

 

요한은 “왕좌에 앉으신 사람”같은 형상을 봅니다. 그 분의 오른손에는 안팎으로 기록되고 일곱 인으로 봉해 진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이 성경 전체인지, 다니엘서인지, 계시록인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안과 뒷면에 글이 적혀있는” 이 책은 계시록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계시록은 22장으로 되어 있으며 매 3장마다 봉인이 있는 것으로 친다면 일곱 봉인이 있는 셈입니다. 거룩한 성경(Holy Bible - KJV를 말합니다.)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1611년판 KJV 첫 페이지에 보면 일곱 봉인이 있는 조그만 그림이 있습니다. 또한 모든 KJV 뒷 표지 겉면에도 일곱 개의 표시가 있습니다. 이 책이 계시록이든, 성경이든지 간에 아무도 이 책을 열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하늘에나(어떤 천사나 어떤 성도나) 땅에나(어떤 목사나 신학자나 교황이나 신부도) 땅 아래에(어떤 마귀나 더러운 영이나 구원받지 못한 혼이나) 그 책을 펴거나 들여다볼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 외에는 아무도 성경을 열어 깨닫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위의 구절은 단순히 책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도록 여는 것을 말하는데 말씀을 “연다”는 의미로 성경의 여러 곳에서 쓰입니다.

(눅 24:45) 이에 그들의 지각(知覺)을 여사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시며

(행 16:14) 주께서 그녀의 마음을 여시므로 그녀가 바울이 말하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니라.

 

계 5:5 장로들 중에 한 사람이 내게 이르되, 울지 말라. 보라, 유다 지파의 사자(獅子) 곧 다윗의 뿌리가 이기셨으니 그 책을 펴며 그 책의 일곱 봉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유다 지파의 사자 곧 다윗의 뿌리 - 히브리서 7:14과 마테복음 1:1을 보십시오.

이기셨으니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으며 갈보리에서 세상 죄를 이기셨습니다.

 

계 5:6 내가 또 보니, 보라, 왕좌와 네 짐승의 한가운데와 장로들의 한가운데에 어린양께서 서 계시는데 전에 죽임을 당하신 것 같더라. 그분께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어린양께서 서 계시는데 전에 죽임을 당하신 것 같더라 - 이것은 제물로 드려진 목이 따진 채 피를 흘리는 어린양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문자적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상처들을 묘사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피의 구속의 상처들을 영원에서도 가지고 계실 것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왕좌를 지날 때마다 우리의 죄들과 구속의 흔적을 지니신 그 분을 계속 뵙게 될 것입니다. 물론 비유적인 것과 문자적인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리스도가 실제 양으로서 일어나 왕좌로 걸어가서 그 책을 취하시는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이 풀을 뜯어먹는 네 발 달린 짐승이 아니지만 예수님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나 뱀, 용, 그룹으로 나타납니다.

 

계 5:7-9 어린양께서 나아오사 왕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서 그 책을 취하시니라. 그가 그 책을 취하니 네 짐승과 스물 네 장로가 각자 하프와, 향으로 가득한 금호리병들을 가지고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렸으니, 그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 그들이 새 노래를 부르며 말하기를 "주께서 그 책을 취하시며 그 봉인들을 열기에 합당하시니이다. 이는 죽임 당하셨던 주께서 하나님께로 각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우리를 주의 피로 구속하여

하늘에 올라가면 성도들은 “우리를 주의 피로 구속하여” 주심을 노래합니다. 무엇으로 나의 죄를 씻을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나를 온전케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피 밖에는 아무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리아도, 성인도, 회개도, 고백도, 침례도, 계명을 지켜도, 끝까지 견디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엡2:8-9, 갈 2:16)

 

계 5:10 또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음이니 우리가 땅에서 통치하리로다, 하더라.

우리가 땅에서 통치하리로다 - 미래의 재림 후 우리가 “하늘에서”가 아닌 “땅에서” 통치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영적인 통치가 아니라 땅에서의 통치입니다! 배교한 성경들(ASV, 확대 역본)이 통치를 한다고 시제를 바꿔서 현재 우리가 영적으로 통치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영적인 통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땅에서”의 통치를 말하고 있습니다.(계1:6, 11:15을 보십시오.)

 

계 5:11-14 내가 또 보고 들으매 왕좌와 짐승들과 장로들을 둘러싼 많은 천사들의 음성이 있으니 그들의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그들이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께서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시도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바다에 있는 것들과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이르되, 왕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토록 있으리로다, 하니 네 짐승이 이르되, 아멘, 하고 스물네 장로가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그분께 경배하더라.

 

하늘과 땅과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각 피조물과 그 안에 있는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계시록 6 장

 

 

계시록 4-5장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계시록 4장에서 교회는 휴거되어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을 취하십니다. 에수님에 의해 봉인들이 떼어지면서 환란들이 땅위에서 일어납니다. 계시록 6-19장의 일들은 다니엘의 70째주로(단9:24-27), 고난의 때로(단12:1), 야곱의 고난의 때로(렘30:7) 불리는 기간으로 이스라엘민족은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하고 거의 소수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이 전무후무한 환란은 교회가 휴거된 후에 이 땅에 닥칠 것인데 계시록 6장부터 19장까지 4번에 걸쳐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역시 4번 쓰여졌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역시 4번에 걸쳐 기록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들림 받아 사라지고 난 후에 이 땅에서 큰 환란이 시작됩니다.

계 6:1 내가 보매 어린양께서 그 봉인들 가운데 하나를 여시는데 그때에 내가 들으니 네 짐승 중의 하나가 천둥소리 같은 소리로 이르되, 와 보라, 하기에

네 짐승가운데 하나인 첫째 짐승은 사자(계4:7)인데 사자가 “와 보라”고 말합니다.

계 6:2 내가 보니, 보라, 흰 말이라. 그 위에 탄 자가 활을 가졌고 왕관을 받으매 그가 나아가서 정복하고 또 정복하려 하더라.

성경에서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고있는 “흰말 탄 자”가 등장합니다. 이 “흰말 탄 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주님의 재림이 언제인지 결정이 납니다. “흰말 탄 자”가 “누구인지 뭐가 중요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 인물의 정체를 바로 알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의 모든 신학교에서 가르치듯이 계시록 6:2의 “흰말 탄 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면 예수님은 지금 왕이며 그 분이 지금 정복해 나가실 때 점차 “그의 왕국”은 확장되어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리겐, 유세비우스, 어거스틴이 A.D.200-500년 사이에 가르친 “후천년설”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땅을 정복하는 왕이라면 그와 함께 하는 교회는 점진적으로 이 땅을 정복하며, 이 세상은 점점 더 좋아져 가서 평화로운 낙원을 이룬다는 로마 카톨릭의 공식 가르침이 옳은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교회가 더 많은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바티칸의 공식 입장이며 개신 교회의 진화론이기도 합니다. 만일 계시록 6:2의 “흰말 탄 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모든 신학교의 98%는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에 대하여 “속고 있는 것이며 거짓말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성경 주석가들이 이 “흰말 탄 자”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입증하기 위해 계시록 19:11-16을 사용합니다. 계시록 19장의 “흰말 탄 자”는 의심의 여지없이 왕들의 왕, 주들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은 계기록 6장의 인물도 흰말을 타고 있기 때문에 같은 인물을 묘사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신 “그리스도”이신 것처럼 사탄도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이지만 “온 세상을 속이는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계시록 6장과 계시록 19장의 “흰말 탄 자”가 동일한 인물인지 확인해 보십시오.

1) 계시록 19:11에서는 흰말이 하늘에서 내려오지만

계시록 6장에서는 출처를 알지 못합니다.

2) 계시록 19:12에서는 흰말 탄 자가 많은 왕관을 썼으나

계시록 6장의 인물은 한 왕관을 쓰고 있습니다.

3) 계시록 19:15에서는 흰말 탄 자가 예리한 칼을 가졌으나

계시록 6장의 인물은 활을 가졌습니다.

4) 계시록 19:14에서는 하나님의 군대들이 흰말 탄 자의 뒤를 따릅니다.

계시록 6장의 인물의 뒤에는 사망과 지옥과 기근이 따릅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나 닮아서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로 생각하도록 속이는 유일한 인물이 있습니다. 이 인물은 바로 기름부음을 받은(그리스도) 덮는 그룹인 사탄입니다. 사탄은 두개의 뿔이 있고 검고 흉칙한 모습의 꼬리를 가진 모습이 아닙니다. 사탄은 나타날 때 “빛의 천사”로 가장합니다.(고후11:14) 사탄은 성경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강력한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인물은 하나님의 왕좌 위에서 하나님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인물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거의 그대로 모방합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예수님과 이 인물이 나란히 서 있다면 누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1) 예수님에게는 신부인 도시(city)가 있습니다.(계21:9)

사탄에게도 신부인 도시(city)가 있습니다.(계17:18)

2)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요8:12, 9:5)

사탄은 “빛의 천사”라고 불립니다.(고후11:14)

3) 예수님은 “왕들의 왕”이라고 합니다.(계19:16)

사탄은 “모든 교만한 자들의 왕”이라 합니다.(욥41:34)

4) 예수님은 “평화의 통치자”라고 합니다.(사9:6)

사탄은 “이 세상의 통치자”라고 합니다.(요14:30)

5) 예수님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God)”이라고 합니다.(요20:28)

사탄은 “이세상의 신(god)"이라고 합니다.(고후4:4)

6) 예수님은 사탄에게 시험받을 때 “기록되기를”이라 말씀하셨습니다.(마4장,눅4장)

사탄은 예수님에게 성경을 인용하여 “기록되기를” 하고 인용합니다(눅4:11-12)

7) 예수님은 “유다지파의 사자”라고 합니다.(계5:5)

사탄은 “울부짖는 사자”라고 합니다.(벧전5:8)

계시록 6:2의 인물은 확실하게 사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4절에서 전쟁이, 5-6절에서는 기근이, 8절에서는 사망과 지옥이 그를 따르며 9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며, 17절에서는 그의 사역이 하나님의 진노의 날과 더불어 끝이 납니다. 사탄은 “온 세상을 속이는 자”(계12:9)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계시록 6:2의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친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탄에게 속은 것입니다.

 

계 6:3 그분께서 둘째 봉인을 여신 뒤에 내가 들으니 둘째 짐승이 이르되, 와 보라, 하매

둘째 짐승은 송아지인데 “와 보라”고 말합니다.

 

계 6:4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위에 탄 자가 땅에서 화평을 제거하는 권능을 받았으니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죽이게 하려 함이라. 또 그가 큰 칼을 받았더라.

이 “흰말 탄 자”의 뒤에는 피 흘리는 전쟁이 따릅니다.

 

계 6:5 그분께서 셋째 봉인을 여신 뒤에 내가 들으니 셋째 짐승이 이르되, 와 보라, 하기에 내가 보니, 보라, 검은 말이라. 그 위에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셋째 짐승은 사람입니다. 여기서 각각 다른 색깔의 말들이 나오는데 흰색은 보통 순결, 결백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시록 6:2의 흰말 탄 자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사탄이 온 세상을 속이고(계12:9) “빛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고후11:13-14)은 쉬운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붉은 색은 항상 피를 상징합니다. 붉은 말과 함께 전쟁이 따르고 그 뒤를 검은 말이 기근과 함께 따라옵니다. 검은 말 위에 탄 자가 저울을 가지고 있는데 저울은 양식의 무게를 재기 위한 것입니다.

 

계 6:6 또 내가 들으니 네 짐승의 한가운데서 한 음성이 이르되, 일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일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너는 주의하여 기름과 포도즙은 해치지 말라, 하더라.

일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일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한 되가 한 데나리온이요, - 이 부분은 애매해서 아무도 확실한 주석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호머의 오딧세이에 보면 일 데나리온은 로마병정의 하루 급료라고 합니다.(헤로도투스의 “역사”8장 637쪽) 그러므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환란 때의 사람들은 심각한 식량난을 겪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름과 포도즙은 해치지 말라”는 것은 기름과 포도즙은 비싼 것이기 때문에 부자들은 봐 주고 가난한 사람들은 학대받는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욥24:11, 대하2:15, 호12:1 참고) 분명한 것은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고 전쟁이 일어 난 뒤에는 분명히 심각한 기근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겔4:11,16 참고)

계 6:7 그분께서 넷째 봉인을 여신 뒤에 내가 들으니 넷째 짐승의 음성이 이르되, 와 보라, 하기에

넷째 짐승은 독수리입니다.(계 4:7)

 

계 6:8 내가 바라보니, 보라, 창백한 말이라. 그 위에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지옥이 그와 함께 따라다니더라. 그들이 땅의 사분의 일을 다스릴 권능을 받아 칼과 기근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 죽이더라.

이 창백한 말을 탄 자의 이름이 “사망”(Death)이라는 대문자(“D")로 의인화 된 것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망의 권세(the power of death)를 사탄에게 주시는 것을(히2:14) 볼 수 있습니다. 실제 집행은 사탄의 천사들 중 하나가 수행하는데 그의 이름은 계시록 9:11절에서 히브리어로 아바돈, 헬라어로는 아폴루온이며 이 단어는 ”파멸, 멸망, 파괴자“를 뜻합니다. 요한복음 17:12에서 멸망의 아들(the son of perdition)과 데살로니가후서 2:3의 멸망의 아들(the son of perdition)에 쓰인 낱말과 같습니다. 사망이 인격화된 이 인물은 죽이는 것이 임무인 천사로서 낫을 들고 창백한 말을 탄 늙은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지옥“(Hell)이 대문자로 의인화된 것으로 미루어 큰 환란 때 지옥에 있는 자들이 이 땅위에 나오는 것 같습니다. 충분한 가능성은 있으나 이것을 뒷받침할 성경구절은 충분치 못합니다. 계시록 9:1-13을 보면 바닥 없는 구덩이에서 살던 자들이 밖으로 나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에서 올라오는 모습은 인간이 반인반수의 몸으로 동물의 부패한 모습들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혼이 지옥에 내려가면 그 혼의 모습이 점차 부패하고 파괴되어 마침내 동물의 형태로 되어버리는 듯합니다.

반은 동물이고 반은 짐승인 모습에 관해서는 이사야서 34:8-17에서 동물들의 떼가 지옥에 사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기도 합니다. 분명하게 이사야서 34:9-10은 불못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아버지를 닮고 재림 때에 그의 구세주와 같은 영광스러운 몸을 입는다면(요일3:1-6)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몸을 입을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아버지는 붉은 용이고 뱀이며 붉은 벌레(구더기)입니다,(요3:14, 계12:9, 막9:44.46)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최후 상태가 다윈의 진화론을 역행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아메바, 플라나리아를 거쳐 물고기와 뱀의 형태를 거쳐 포유류와 척추동물로 진화했다는 다윈의 생각 대신 인간이 퇴화하여 더 열등한 형태인 벌레로 돌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였으나 인간의 궁극적인 최후의 상태는 가장 낮은 곳 불못에 있는 붉은 벌레로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시22:6, 사66:24, 막9:44,46,48 참고)

이사야서 28:15에서 유대인들은 마지막 때에 ”사망과 지옥“과 계약을 맺는데 이 언약은 적그리스도에 의해 환란 중간에 깨어집니다.

계시록 6:8에서 사망과 지옥이 환란 때 풀려나는 것을 봅니다.

 

계 6:9-11 그분께서 다섯째 봉인을 여신 뒤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붙잡은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의 혼(魂)들이 제단 아래에서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오 거룩하고 진실하신 주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에 대한 원수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그들에게 각각 흰 예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더 안식하되 그들의 동료 종들과 형제들도 그들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제단 아래에서 (under the alter) - 이 구절은 문자 그대로 성전의 제단을 말합니다. 문자적인 구절을 영적으로, 비유적으로 해석할 수 없기 대문입니다. 계시록 11:1-2을 보면 분명히 큰 환란 때 이 땅에 성전이 세워 질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자들의 혼(魂)들 - 요한은 제단 아래에서(under the alter)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에 죽임 당한 “혼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혼들”은 목소리와 기억이 있습니다. 흰 예복을 입을 수 있는 몸도 있습니다. 이 “혼”에 관하여서 누가복음 16장에서 밝히 알려 줍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사건은 비유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와 어떤 부자의 현실을 그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혼적인 몸(soulish body)은 보이지 않는 몸입니다. 그러나 혼(soul)은 팔, 다리, 눈, 코, 귀, 입, 혀가 있으며 느끼고 말하고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지옥에 부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의 “몸”(body)은 무덤에 묻혀 있습니다. 지옥에 있는 것은 부자의 몸이 아닙니다. 지옥에 있는 것은 분명히 물질적인 몸(flesh body)은 아니지만 몸의 형태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몸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몸(body)은 무덤에 있고 보이지 않는 “혼”(soul)이 지옥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몸(body)에서 혼(soul)이 떠나 지옥이나 낙원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창35:18, 딤후4:6, 빌1:23)

사람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영(spirit)과 혼(soul)과 몸(body)으로 되어 있습니다.(살전5:23).

(창 1:27)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는 과정을 읽어보십시오.

(창 2:7)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몸) 생명의 숨을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영) 사람이 살아 있는 혼(魂)이 되니라(혼).

사람의 몸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인 흙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몸 속에는 몸을 닮은 혼의 몸(soulish body)이 있는데 이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혼의 몸은 “사람의 영”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성령께서 숨을 불어넣기까지는 생명이 없습니다.

사람의 몸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사람의 혼은 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몸과 혼은 숨(ghost)인 영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를 연결하고 채우는 성령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은 삼위 일체이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 모습을 따라 지음을 받은 사람도 영(spirit)과 혼(soul)과 몸(body)으로 되어 있는 삼위일체입니다.(살전5:23).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범죄 하였을 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후 아담의 후손인 사람들의 영은 아담의 죽은 형상을 따라 “범법과 죄들”로 영이 죽어 있는 상태로 태어납니다.(창5:3을 보라.) 이것을 말해주고 있는 구절은 여러 곳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구원받기 전에는 몸과 혼은 살아있으나 영은 죽어 있었습니다.(엡2:1,5. 골2:13. 마8:22. 눅9:60) 그러므로 죽은 영은 믿음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하며(요3:6) 믿음으로 혼은 지옥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합니다.(벧1:9, 히10:39, 약1:2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고 장사되셨으며 부활하신 것이 여러분의 죄들로 인한 것이었다고 믿었다면 그 순간 여러분의 영은 거듭났으며 여러분의 혼은 지옥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몸은 아직 변화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들의 몸(로마서7장, 골2:11)이 구속될 때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공중에 오실 때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런 몸처럼 변화될 것입니다.(빌3:20-21, 요일3:2, 고전 15:51-52, 살전4:16-17 참고.)

 

계 6:12-13 그분께서 여섯째 봉인을 여신 뒤에 내가 보니, 보라, 큰 지진이 나며 해가 머리털로 짠 상복(喪服)같이 검게 되고 달은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강풍에 흔들려 설익은 무화과가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고

이 일들은 해, 달, 별들의 현상과 관련하여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고하신 것과 일치합니다.(마24:29, 눅21:25, 막13:24-26, 행2:17-20 참고.) 후천년주의자들과 무천년주의자들은 복음서의 재림에 관한 이 구절들(마24:29, 막13:24-26)이 초림때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로 행2장에서 베드로가 요엘2:28-32을 인용한 것을 예언의 성취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요엘서를 인용한 것은 주님이 곧 돌아오실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당시에 곧 재림하려고 하셨으나 이스라엘사람들의 거부로 사도행전 7장 이후에는 재림을 연기하셨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2:17-21에서 약속된 하늘의 현상들은 초림 때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16-21은 아직 이뤄지지 않은 재림의 약속이지 성취가 아닙니다. 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입니다.

하늘의 별들 - 이 별들은 분명히 혹성이 아닌 천사들입니다.(계1:16, 20. 2:1. 12:4 참고)

 

계 6:14-17 하늘은 두루마리가 함께 말리는 것같이 말려 떠나가며 모든 산과 섬들도 제자리에서 옮겨지매 땅의 왕들과 큰 자들과 부자들과 총대장들과 용사들과 모든 남자 노예들과 모든 자유로운 남자들이 동굴과 산들의 바위들 속에 숨고 산들과 바위들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왕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숨기라. 그분의 진노하시는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진노하시는 큰 날 - 계시록 6장의 상황은 주의 진노의 날이며 이것은 분명히 초림 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며 구원을 제시하셨던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은 재림 때 진노 중에 왕좌에 계신 어린양입니다.

계시록 6장은 환란 기간의 전체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계시록은 환란을 명백하게 네 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을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으로 네 번 설명한 것과 똑같이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네 번 설명하고 있습니다. 환란의 첫 번째 설명은 5-6장인데 봉인들이 떼어집니다.(7장은 삽입장입니다.) 두 번째 설명은 8장-11장15절까지인데 나팔들입니다.(10장도 삽입장입니다.) 세 번째 설명은 12-14장인데 적그리스도의 활동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 설명은 15-19장인데 대접들과 큰 바빌론의 멸망을 보여 줍니다. 성령께서는 네 번에 걸쳐 환란의 각기 다른 점을 보여 주십니다.

계시록 7 장

 

계시록 7장을 삽입장으로 보는 이유는 이 장에서는 이때까지 나타나던 봉인들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곱 번째 봉인은 계시록 8:1절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계시록 6:12-17에서 환란이 끝나고 “그분의 진노의 날”인 재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계시록 7장에 기록된 일들은 여섯 봉인이 열리는 동안에 일어나는 어떤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계 7:1 이것들 후에 내가 보니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사방의/ 네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어떤 나무에도 불지 못하게 하더라.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 사람들은 성경이 “땅의 네 모퉁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성경이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요한이 지구가 네모나고 평평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땅의 네 모퉁이라고 기록하였다고 빈정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쉽고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일상언어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특정한 계층이 사용하는 특별한 말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심판 때에 아무도 변명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 40:22에서 지구는 공처럼 둥글며 허공에 떠 있다고 기록하셨으며 누가복음 17:31-34에서는 지구에 동시에 낮과 밤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현대 과학보다 훨씬 앞서 있습니다! 땅의 네 모퉁이는 동, 서, 남, 북을 말하는 쉬운 말입니다.

 

계 7:2-3 또 내가 보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印)을 가진 다른 천사가 동쪽으로부터 올라와 땅과 바다를 해할 권능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음성으로 외치며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 안에 인을 칠 때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인장으로 표시를 받기까지는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이 손상되지 않습니다. 계시록 6:12-15에서 땅과 바다가 손상되기 때문에 계시록 7장은 봉인들이 다 열리기 전의 어떤 일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종들 - 이 표현은 항상 이스라엘에게 쓰이는 표현입니다. (사49:6, 65:8, 13-14 참고)

 

계 7:4 또 내가 인 맞은 자의 수에 대하여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인 맞은 자가 십사만 사천이더라.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인 맞은 자가 십사만 사천 - 이 구절의 십사만 사천 명은 제칠일 예수 재림교, 여호와의 증인들이 모두 자신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이 구절을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를 말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인 맞은 자가 십사만 사천 명”은 ‘제칠일 예수 재림교’, ‘여호와의 증인들’, ‘교회’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인 맞은 자가 십사만 사천 명”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인 맞은 자가 십사만 사천 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해석할 필요도, 이해할 필요도 없으며 다만 읽은 대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계 7:5-8 유다 지파에서 인 맞은 자가 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에서 인 맞은 자가 만 이천이요, 갓 지파에서 인 맞은 자가 만 이천이요, 아셀 지파에서 인 맞은 자가 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에서 인 맞은 자가 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에서 인 맞은 자가 만 이천이요, 시므온 지파에서 인 맞은 자가 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에서 인 맞은 자가 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에서 인 맞은 자가 만 이천이요, 스불론 지파에서 인 맞은 자가 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에서 인 맞은 자가 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에서 인 맞은 자가 만 이천이라.

각 지파에서 만 이천명씩인데 유다, 르우벤, 갓, 아셀, 납달리, 므낫세, 시므온, “레위” 잇사갈, 스블론, “요셉” 베냐민자파인데 실제의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본래의 열두 지파에서 두 지파가 대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12지파에 속하였는데 에브라임 지파 대신에 “요셉 지파”가 들어가 있고 에브라임 지파는 빠져 있습니다. “레위 지파”는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13번째 지파였는데 단 지파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두 지파 곧 “에브라임 지파와 단 지파”가 빠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에브라임 지파와 단 지파가 요셉 지파와 레위 지파로 대체되었는가?

먼저 에프라임 지파는 호세아서를 연구하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호세아서 4:17에서 “에브라임은 우상들과 연합하였으니 그를 내버려 둘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속해서 다음 구절들을 읽어 보십시오. (호6:10, 7:8,11. 8:11, 9:8,13,16-17. 12:1, 14. 13:1 ,12.)

단 지파는 아모스서 8:14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의 죄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오 단아, 네 신이 살아 있다, 하거나, 브엘세바의 풍습이 살아 있다, 하는 자들 곧 그들마저 쓰러져서 결코 일어나지 못하리라.”

다음 구절들도 계속 읽어보십시오.(신명기 29:20, 레위기 24:11)

단 지파에 관한 하나님의 예언들을 살펴보면 단 지파는 확실히 나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단의 출생은 창 30:6에 있는데 라헬의 첫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라헬의 몸종을 통해 태어났습니다. 라헬은 레아를 질투하였다가 아들을 얻자 자랑하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를 판단하시고”(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또 내 목소리를 들으사”(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내게 아들을 주셨다.”(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단은 여자의 씨가 아닙니다.) 라헬은 이브가 저지른 실수를 반복합니다. 이브는 카인을 얻었을 때 “내가 주께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라고 하였으나 카인은 잘못된 아들이었습니다. 라헬도 남자를 육신적으로 얻었지만 이 남자는 잘못된 아들이었습니다. 이브의 첫 아들은 “카인”으로 “철로 된 창”을 의미하며 라헬의 첫 아들은 “단”이며 이 이름은 “”심판“을 의미합니다.(창30:6)

(창 49:16-17의 단에 대한 첫 번째 예언을 읽어보십시오.)

성경에 언급 된 첫 번째 저주의 실제 사건이 레위기 24:10-11에 나오는데 저주받은 함족인 이집트인과 결혼한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인 셀로밋이 낳은 아들이 주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합니다!(계13장에서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사사기 17장과 18장을 살펴보면 에브라임 지파와 단 지파 모두 관련된 사건이 등장합니다.

(삿17:1) 에브라임 산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에브라임 지파의 미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로부터 저주받은 은 일천일백 세겔에서 이백 세겔을 취하여 새긴 형상과 부어 만든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미가는 자신의 신당에 자기 멋대로 한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어 자기 아들중 하나를 세워 제사장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 후 떠돌이 레위인 젊은이가 찾아오자 미가는 그 레위인을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도록 합니다.

(삿 17:7-8) 유다 가족에 속한 베들레헴유다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 사람이며 거기서 머무는 자더라. 이 사람이 거할 곳을 찾으려고 그 도시 베들레헴유다를 떠나 이동하다가 에브라임 산으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삿 17:10)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거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십 세겔과 의복 한 벌과 양식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 사람이 거기로 들어갔더라.

미가는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주님이 초림하시기 1200년전에 로마 카톨릭과 똑 같은 체제가 나타납니다. 우상과 형상을 예배의 도구로 사용하며 멋대로 만든 에봇과 드라빔(제의)를 입고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제사장을 세우고 성결케 한 제사장을 “아버지”(神父,holy father)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땅에 있는 자를 너희 아버지라 일컫지 말라. 이는 너희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라.”(마23:9)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미가의 종교가 어떻게 단 지파의 종교가 되었는지는 사사기 18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단 지파는 아직 그들의 유업을 차지하지 못하였는데 단 지파 사람들이 유업을 차지하기 위해 다니던 중에 미가의 집에 이르러 유숙하게 됩니다.(삿18:1-2) 그후 육백명의 군대와 함께 미가의 집에 이르러 우상과 새긴 형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형상을 탈취하여 단 지파의 종교가 됩니다.(삿18:16-20)

(삿18:20)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에게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낫겠느냐, 혹은 이스라엘의 한 가족 곧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낫겠느냐? 하니 그 제사장이 마음 속으로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형상을 취하고 그 백성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니라.

이 제사장은 단 지파를 따라가는데 단 지파는 이 때부터(B.C.1300년) 이스라엘의 열지파가 포로로 잡혀 갈 때까지(B.C.800년) 400년 이상 완전히 배교하여 시돈의 이세벨의 바알 숭배 집단과 연합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유명한 “미가의 종교”가 단 지파에게서 확립됩니다. 이 미가의 종교는 우상과 형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빼앗아버리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우상종교입니다.

(삿18:24) 미가가 이르되,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너희가 취하여 갔으니 내게 더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러나 내가 믿는 종교는 성경과 찬송가를 빼앗아 불태우고 교회를 불태울지라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믿는 종교는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과 노래가 간직되어 있으며 길가에서, 산 속에서, 토굴에서라도 경배를 드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가의 종교”는 모든 우상과 양초, 성체, 묵주, 성화, 미사전서, 신부, 추기경, 교황이 없어지면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단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가 왜 빠졌는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아직도 바알의 종교인 “미가의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있다면 속히 나오라고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계18:4, 고후6:14-18)

(계18: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또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그녀에게서 나와 그녀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다시 말하지만 위에 열거한 12지파는 문자적인 이스라엘의 12지파의 144,000명입니다. 다만 요셉 지파가 에프라임 지파를, 레위 지파가 단 지파를 대신하고 있을 뿐입니다.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보라, 모든 민족과 족속과 백성과 언어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예복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왕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요한이 본 첫 번째 무리는 144,000명의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과 족속과 백성과 언어에서 온 큰 무리들”인데 곧 이방인들입니다. 이 “흰 예복을 입은” 자들은 계기록 3:4과 3:18에 나타나는 이들로 계시록 6:11에 언급된 이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죽임 당한 자들”인 순교자들인데 이들에게 흰 예복이 주어집니다. 계시록 19:8에서 이 고운 아마포가 “성도들의 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흰 예복은 구원받은 후의 행위와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값없이 주어지나 “성도들의 의”는 성도의 행위로 인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죽임 당한 자들”은 “목 베임을 당한” 순교자들입니다. (계20:4 참고)

계 7:10-12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구원이 왕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들이 왕좌와 장로들과 네 짐승 주위에 섰다가 왕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무궁토록 있으리로다. 아멘, 하더라.

이 순교자들이 있는 곳은 스물 네 장로들과 네 짐승과 왕좌가 있는 셋째 하늘입니다.

계 7:13-14 장로들 중에서 한 사람이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흰 예복을 차려 입은 이 사람들은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하매 내가 그에게 이르되, 장로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내게 이르되, 이 사람들은 큰 환난으로부터 나온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로 자기 예복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큰 환란으로부터 나온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것은 큰 환란이라는 특정한 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 예복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큰 환란 때 구원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어린양의 피로 “예복을 씻어”(능동태) 희게 합니다. 그러나 교회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죄들에서 우리를 어린양의 피로 “씻으셔서”(피동태) 희게 됩니다.(계1:5과 비교.) 여러분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믿어야 합니다. 한 곳에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씻으시고」라고 하셨고 다른 곳에서는 「어린양의 피로 자기 예복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한다면 이 것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환란 때의 구원은 교회시대의 구원받는 방법과 다르게 자신의 행위가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태복음 24:13, 마가복음 13:13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하는 구절을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구원방법으로 가르칩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인 마태복음 24:14을 보십시오.

(마 24:14) 이 왕국의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구절에서의 “끝”은 개인의 삶의 끝이 아닙니다.

(마 24:21) 이는 그때에 큰 환난이 있을 것임이니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때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

(마 24:29) 그 날들의 환난 뒤에 곧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그 빛을 내지 아니하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들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이 “끝”은 특정한 기간의 끝, 곧 큰 환란의 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환란기간에는 “은혜의 복음”이 아닌 “왕국복음”이 전파됩니다.

복음이라고 다 같은 복음이 아닌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갈1:8-9 참고) 이 왕국복음은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히심과 부활을 전하는 은혜의 복음과는 다릅니다. 이 왕국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임하시며 다윗의 왕좌에 앉아 다스리는 왕국이 가까우니 회개하라는 메세지입니다. 큰 환란 중에 다시 전파될 이 복음은 표적을 동반하며 유대인들을 통해 다시 전파될 복음인데 구원받기 위해서 끝까지 견뎌야하는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큰 환난으로부터 나온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로 자기 예복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계 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왕좌 앞에 있고 또 그분의 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리라. 또한 왕좌에 앉으신 분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리니

여기에 이 무리가 교회시대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나옵니다. 이 성도들은 하나님을 “그분의 전에서 밤낮으로” 섬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성령의 전이며 하늘에 올라가면 “새 예루살렘”으로 불리는데 이 새 예루살렘성에는 “성전이 없다”고 하기 때문입니다.(계21:22 참고)

 

계 7:16 그들이 다시는 굶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어떤 뜨거운 기운도 그들 위에 내리쬐지 아니하리니

천년기간의 이스라엘에게 향한 것입니다.(사25:10, 49:10 참고)

 

계 7:17 이는 왕좌 한가운데 계시는 어린양께서 그들을 먹이시며 생명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임이라, 하더라.

모든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라는 노래가 있으나 저 하늘에서 최소한 두 번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첫 째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이고 두 번째는 큰 백보좌 심판석에서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에는 눈물이 없는데 영원은 계시록 21장에서야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 때문에 우셨고 예루살렘을 향해 우셨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늘에서 두 가지 이유로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첫째는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울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구원받았어야 할 사람들이 여러분이 복음을 증거하지 않음으로 영원한 불못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때 큰 백보좌 심판석에서 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우리가 사서 얻었어야 할 기회들을 놓치고 낭비하여 보상이 상실되고 왕관을 받지 못하게 될 때 후회하며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가족과 친척과 이웃과 친구들이 불못에 던져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통곡하며 비통한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 진 기회들을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였고 증거하였고 기회가 허락하는 대로 전도지나 책자를 신실하게 전달해 주었다면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저 하늘에서 비통한 눈물을 흘릴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계시록 8 장

 

계 8:1 그분께서 일곱째 봉인을 여실 때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라.

이제 두 번째로 계시록 8-11장에서 환란이 “나팔들”로 묘사됩니다.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라. - 어떤 사람들은 이 하늘의 정적은 땅을 정복하려는 하늘의 군대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모시고 내려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상응하는 구절이 아직 발견되지 않으므로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계 8:2-3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더니 그들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또 다른 천사가 금 향로를 가지고 와서 제단 앞에 서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것은 그로 하여금 그 향을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왕좌 앞에 있는 금 제단 위에 드리게 하려 함이더라.

이 것은 계시록 7:15-17에서 볼 수 있는 하늘의 성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금 향로와 금 제단이 등장합니다. 이 금 제단은 향을 피우는 제단으로 “금 향로와 전체를 금으로 싼” 제단입니다.(히9:4) 이 금 제단은 제물을 드리는 놋 제단과는 다른 제단입니다.

계 8:4-5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피어난 향의 연기가 천사의 손에서 나와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더라. 천사가 향로를 취하여 제단의 불로 가득 채워 땅에 내던지니 음성들과 천둥들과 번개들과 지진이 나더라.

성도들의 기도가 향과 같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을 봅니다.(시141:2, 눅1:10) 이 기도는 계시록 6:9-10에서 예수님의 증거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해 순교한 자들의 “혼”이 복수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 대한 복수가 계시록 8:5절에서 응답됩니다.

 

계 8:6-7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불려고 준비하더라.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 위로 쏟아지니 나무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푸른 풀이 다 타 버리니라.

첫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나무와 푸른 풀들이 타 버립니다. 사람들은 나무의 삼분의 일과 모든 풀이 타 버린다는 것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일은 핵폭발이나 핵융합으로 얼마든지 쉽게 일어 날 수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백년 전만 해도 목사들이 세상의 종말이 오고 있다고 말하면 과학자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과학자들이 세상에 종말이 오고 있다고 말하는데 목사들이 비웃고 있습니다.”

 

계 8:8-9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니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또 바다에서 생명을 가진 피조물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부서지더라.

어떤 사람들은 여기의 “바다”를 계시록 17:15을 들어 백성들과 무리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계시록 17:5은 ”물“을 말하는 것이지 ”바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은 물이고 바다는 바다입니다. 성경에서 ”바다“를 언급할 때 ”깊음(유리바다)“이 아니라면 계시록에서는 계시록 21:1을 제외하고는 지중해를 말합니다.(계21:1은 계4장의 유리 바다입니다.) 계시록 13:1에서 다시 언급되는 바다는 지중해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바다는 지중해인 것 같으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피조물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파괴된다는 것입니다.

 

계 8:10-11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등불처럼 타는 큰 별이 하늘로부터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물들의 근원 위에 떨어지니 이 별의 이름은 쑥이라 하더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되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 물들로 인하여 죽더라.

이 구절의 관련 구절들은 예레미야서 9:15과 51:25입니다. 물이 쓰게 되어 사람들은 그물을 마시면 죽게 되는데 이 기간에 “이기는 자들”은 마가복음 16:17-18의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약속들을 받기 때문에 이 물을 마셔도 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환란 때의 성도들은 “쑥”이 되는 물에서 보호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죽습니다.

 

계 8:12-13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해의 삼분의 일과 달의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입어 그것들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고 낮이 삼분의 일 동안 빛을 내지 아니하며 밤도 그러하더라. 또 내가 보고 들으니 하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한 천사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이제 세 천사가 불게 될 또 다른 나팔 소리들로 인함이라! 하더라.

여기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계시록 6:12에서 일어나는 하늘의 현상들과 얼마나 유사한지 보라.

계시록 9 장

 

계 9: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별 하나가 하늘로부터 땅으로 떨어지는데 그가 바닥 없는 구덩이의 열쇠를 받았더라.

“별”이 땅에 떨어지는데 지구가 불타거나 파괴되지 않습니다. 이 “별”은 “그가”로 말해지는 인격인 점을 주목하여야 합니다.(계1:20에서 “별”이 “천사”라고 말합니다.)

바닥 없는 구덩이의 열쇠 - 어떤 사람들은 이 것은 동화나 전설에나 나오는 허구라고 일축합니다. 그러나 바닥 없는 구덩이(the bottomless pit)는 매우 간단한 구조입니다. 이사야서 14:15을 보면 사탄이 옆면뿐인 구덩이(the sides of the pit)로 내려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닥 없는 구덩이, 즉 옆면으로 된 구덩이는 문자 그대로 가운데가 빈 도우넛과 같은 모양의 구덩이를 말합니다. 성경은 지구 중심부에 바닥은 없고 옆면들로 된 구덩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바닥 없는 구덩이가 지구의 자전과 함께 쉬지 않고 회전하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구덩이에 있는 자들은 지구가 자전 할 때 끊임없이 도는 것입니다. 지구의 중심을 나타내는 지질도를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계시록 6장에서 언급된 것처럼 마귀의 세력들이 이 “바닥 없는” 구덩이에서 나오는데 문자 그대로 바닥은 없고 “옆면”뿐인 곳입니다.

 

계 9:2-3 그가 바닥 없는 구덩이를 여니 그 구덩이에서 큰 용광로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대기(大氣)가 그 구덩이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또 메뚜기들이 연기 속에서 나와 땅 위로 올라오매 그것들이 땅에 있는 전갈들의 권능과 같은 권능을 받았더라.

이 메뚜기들은 초자연적인 “메뚜기들”입니다. 이 메뚜기들은 연기에 질식하지 않으며 보통 메뚜기들은 왕이 없으나(잠30:27) 이 메뚜기들에게는 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메뚜기들은 흉포한 반인 반수의 괴물들인데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로가 지옥에서 나오듯이, 또는 징기스칸이 땅속에서 올라온다는 몽고 군대의 설화와 유대 전통의 신화가 담긴 조하르(Zohar)에 “구세주”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며 지하 낙원에 있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모든 신화와 설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방하거나 모방하려는 시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빌론 탈무드의 바빌론 산헤드린 98A난에는 “구세주가 로마의 문들에 나타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이 미래에 로마 교황을 구세주로 인정 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으로 오신 자신들의 왕을 거부하고 로마 황제 카이사르를 왕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초림의 사건들은 재림 때에 반복되어 질 것입니다.)

"카이사르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19:15)

이 흉포한 반인 반수의 괴물들은 현재 만화책이나 영화에서 흔하게 볼 수 있으며 머지 않아 큰 환란 때에는 이 세상에 그 실체를 들어 낼 것입니다.

 

계 9:4 또 그것들에게 명령이 떨어져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나무는 하나도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 안에 하나님의 인(印)이 없는 사람들만 해하라 하더라.

이 일들은 계시록 7:3-4 이후에 일어납니다. 이것은 계시록 8:7,12과 9:4이전에 계시록 7:3-4의 일이 남을 뜻하며 계시록 7장이 삽입장인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계 9:5 또 그들을 죽이지는 말고 다섯 달 동안 고통만 받게 하라는 /명령을/ 그것들에게 주시니 그것들이 주는 고통은 마치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주는 고통과 같더라.

여기서 다섯째 천사가 바닥 없는 구덩이를 열고 5절에서 고통이 다섯 달 동안 계속 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흥미로운 주제인 “다섯”이라는 숫자를 제시합니다. 성경의 숫자를 연구해 보면 “다섯”이라는 숫자는 항상 “죽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중에 “다섯”이라는 숫자는 “은혜”를 말하는 것이라고 알고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옆구리의 다섯 곳을 찔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숫자 5가 은혜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섯 곳의 상처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은혜가 임하게 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죽음이 단 한번 은혜의 수단으로 성경에 나타났다고 해서 그 숫자의 의미를 은혜의 수로 고정시킬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숫자 5를 연구해 보면 다섯은 항상 “죽음”으로 집약됩니다.

숫자 5에 관련된 구절들을 확인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계시록 4장에서 본래 그룹이 다섯이었음을 보았습니다. 왕좌 주위에 네 그룹이 있고 “왕좌 위에” “기름부음 받은 덮는” 다섯번째 그룹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 다섯번째 그룹이 두 뿔 달린 황소의 얼굴로 “루시퍼” 또는 “사탄”인 “빛의 천사”임을 수십 개의 구절들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이 덮는 그룹은 다섯번째 그룹이었기에 히브리서 2:14에서 보면 『자녀들은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에 참여하셨으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라고 기록하셨습니다. 이 다섯번째 그룹이고 마귀(Devil)인 사탄(Satan)은 다섯개의 철자를 가지며 죽음(Death)의 권능을 갖습니다.

(창 5:5) 아담의 전 생애는 구백삼십 년이었으며 그가 죽으니라.

우연의 일치로 이 땅에서 자연적으로 죽은 첫 번째 사람은 5장 5절에 언급됩니다. 사도행전5:5에서 어떤 사람이 쓰러져 죽는 것을 봅니다. 베냐민이 태어날 때 그의 어머니가 죽습니다.(창35:18) 그런데 베냐민과 다섯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창 43:34) 요셉이 자기 앞에서 음식을 취해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창 45:22) 또 그들에게 다 각각 옷 한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 개와 옷 다섯 벌을 주고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무엘하에서는 죽음과 관련되어 모두 다섯번째 갈비뼈를 찔려 죽습니다.

(삼하 2:23) 그가 치우치기를 거절하매 이에 아브넬이 창 뒤끝으로 그의 다섯번째 갈빗대 밑을 찌르니 창이 그의 등뒤로 나가므로 아사헬이 거기에 쓰러져 그 자리에서 죽으매 그가 쓰러져 죽은 곳에 이른 자들이 다 머물러 섰더라.

(삼하 4:6)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 그의 다섯번째 갈빗대 밑을 찌르고 도망하였더니

(삼하 20: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므로 요압이 칼로 그의 다섯번째 갈빗대를 찌르매 그 창자가 땅에 흘러 나와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구약에서 수많은 제물을 드리는 번제단이 가로 오 큐빗, 세로 오 큐빗인 것은 우연일까요?

우리는 창세기 2:21에서 아담을 깊은 잠(요11:11, 고전11:30, 15:6,18,20)에 빠지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그의 옆구리에서 한 갈비뼈를 취해(성경에서 언급된 유일한 갈비뼈는 다섯번째 갈비뼈입니다!) 여자를 만드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형인 아담은 그의 신부를 얻기 위해 죽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그리스도의 신부(bride:다섯 철자)이듯이 아담의 아내는 아담의 몸에서 나왔으며 이브가 나온 갈비뼈는 다섯번째 갈비뼈입니다!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주신 것같이 하라.

남편들의 아내는 남편의 다섯번째 갈비뼈입니다. 남편들은 자신의 갈비뼈인 아내를 죽도록 사랑해야 합니다. 아담은 아내를 얻기 위해 죽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신부를 얻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확실히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경우인데 여기에도 “죽음”은 여전히 포함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다섯군데(오른손, 왼손, 오른발, 왼발, 다섯번째 갈비뼈인 심장)를 찔려 죽음(Death)을 당하셨습니다.

(참고) 공중전의 추락 신호는 “메이 데이(May Day;5월)입니다.

선박 조난(배가 침몰 될 때) 신호는 다섯입니다.

사람이 배 밖으로 떨어지면 호각을 다섯번 불어야 합니다.

국제 조난 주파수는 500싸이클입니다.

계 9:6-8 그 날들에는 사람들이 죽음을 구하여도 찾지 못하겠고 죽기를 바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그 메뚜기들의 모양은 전투를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것들의 머리에는 금과 같은 왕관이 있으며 그것들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그것들에게 있으며 그것들의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고

이들은 반인 반수의 괴물입니다.

 

계 9:9-10 또 철 흉갑(胸鉀) 같은 흉갑이 그것들에게 있으며 그것들의 날개 소리는 전투하려고 달려가는 많은 말들의 병거 소리 같고 또 전갈과 같은 꼬리가 그것들에게 있으며 그 꼬리에 쏘는 침이 있으니 그것들의 권능은 사람들을 다섯 달 동안 해하는 것이더라.

이 것들은 초자연적인 짐승들입니다. 요한이 이런 일들을 보는 것은 초림 때가 아닌 2000년후의 세계로 이동해 있음을 기억하고 또 이것들이 초자연적인 짐승이 아니라면 로켓이나 기관총을 장착한 비행기들을 묘사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 때문에 문자적인 흉포한 초자연적인 짐승들인 것 같습니다.

 

계 9:11 그것들에게 다스리는 왕이 있으니 곧 바닥 없는 구덩이의 천사라. 그의 이름은 히브리 말로는 아바돈이나 그리스 말로는 아폴리온이라 하더라.

이 왕이 언제 올라왔는지는 말하지 않고 다만 ‘왕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왕은 바닥 없는 구덩이의 천사인 계시록 9:1의 “별”일 것입니다. 이 천사는 계시록 6:8에서 살펴보았던 인물입니다. 이 사망의 천사는 “파괴자”이며 그의 이름은 데살로니가후서 2:3, 요한복음 17:12, 계시록 17:8에서 모두 “멸망(perdition)"이라고 불립니다.

계 9:12-16 한 가지 화는 지나갔으되, 보라, 이후에 두 가지 화가 더 임하리로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에 있는 금 제단의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나팔을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프라테스에 묶어 둔 네 천사를 풀어 주라, 하매 네 천사가 풀려나니 이들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 어느 시에 사람들의 삼분의 일을 죽이려고 예비된 자들이더라. 그 기병대의 수는 이억(二億)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계시록 6:8에서 땅의 사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고 남아있는 사분의 삼중에서 삼분의 일이 계시록 9:15-18에서 죽는 것을 봅니다. 사탄의 기병대인 이 군대는 동쪽에서 오는데 아마 인도, 혹은 중국이나 몽고에서 올 것입니다. 이 기병대의 숫자는 이억입니다!

 

계 9:17 내가 이같이 환상 중에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그들에게 불과 청옥과 유황으로 된 흉갑이 있고 또 그 말들의 머리는 사자의 머리 같으며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이 기병대는 초인간적인 메뚜기 같은 괴물인데 이들이 탄 말도 평범한 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타고 올라간 불말을 만드셨으며(왕하2:11) 외뿔의 유니콘(민23:22,신33:17,사34:7)도 만드셨으며 땅에 내려오실 때 사용하실 흰말도 만드셨습니다. 여기의 초자연적인 말들은 불과 연기와 유황을 내뿜으며 땅에서 날 뜁니다. 이런 군대를 땅위에서 모은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들은 지옥에서 올라오는 어떤 부류인데 신화의 “켄타우르스”같은 반인 반마입니다.

이사야서 5:26과 시편 57:4과 비교해 보십시오.

계 9:18-19 이 세 가지 곧 그 말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이는 그 말들의 권능이 그 입과 꼬리에 있기 때문이며 또 그 말들의 꼬리가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들이 있어 그것들로 해하기 때문이더라.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이 초자연적인 기병대는 지구에 남아있는 인구의 사분의 삼중 삼분의 일을 죽입니다. 환란 때 최소한 세계 인구의 절반이 죽습니다. 이사야서 24:6을 읽어보십시오.

계 9:20-21 이 재앙들로 인하여 죽지 아니하고 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손의 행위들을 회개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마귀들과 또 금과 은과 놋과 돌과 나무로 만든 우상들 곧 보거나 듣거나 걷거나 하지 못하는 우상들에게 경배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또한 자기들이 행한 살인과 마술과 음행과 도둑질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9장의 교훈은 사람들의 의지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큰 환란이 닥치고 인류의 절반이 죽임을 당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대 재앙들을 “우연한 사고”나 기상이변“, 또는 ”대수롭지 않은 불운“이었다고 말하며 회개하지 않습니다.

계시록 10 장

 

계시록 7장이 삽입 장이었음을 기억한다면 또 하나의 삽입 장을 보게 됩니다. 계시록 8장에서 네 번의 나팔을 불었고 9장에서 두 번의 나팔이 불렸고 그 다음에 쉼이 있습니다. 이것은 계시록 6장에서 경우와 똑같이 여섯 번째 봉인이 열린 후 쉼이 있습니다. 계시록 7장이 비록 봉인들이 열리는 기간에 주어지지만 어떤 봉인도 언급되지 않았으며 계시록 10장도 나팔이 불리는 기간에 해당하지만 어떤 나팔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10장은 계시록 7장처럼 환란 중에 일어나는 특정한 사건을 설명하기 의해 삽입된 것입니다.

 

계 10:1 또 내가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으로 옷 입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그 머리에는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으며 그 발은 불기둥 같더니

“구름”은 보통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나타납니다.(계1:7, 행1:9) 힘센 천사는 의심할 것 없이 계시록 1:14-15에서 나타난 천사입니다. 바로 주의 천사인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계 10:2-3 그가 펴 놓은 작은 책을 손에 들고 오른발로는 바다를 밟고 왼발로는 땅을 밟고 사자가 부르짖는 것같이 큰 음성으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천둥이 음성을 내어 말하더라.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록 5:5에서 “유다 지파의 사자”라고 불리는데 이 것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입니다. 이것은 환란 중 어느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실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개종하듯이 이스라엘 민족이 “어느 날 거듭나서“ ”해산의 고통에 있는 여인“이 ”사내 아이“를 낳듯이 이스라엘 민족이 회심할 것을 명백히 가르치는 것입니다.(사66:7-8, 미5:3)

바울은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이 아닌 특별한 사도입니다. 사도행전 9:6에서 우리는 바울의 개종을 보는데 바울은 “때가 지나서” 구원받은 유대인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모형도 아닙니다. 바울은 환란 중에 구원받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요나는 이방인들을 향한 특별 사역을 하는데 이 두 사람은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을 구령하도록 임명될 환란 때 구원받는 유대인 남은 자들(144,000명)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요셉은 152절에 걸쳐 그리스도의 유형으로 나타나는데 요셉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의 형제들에게 나타내실 때처럼 자신을 그의 형들에게 나타냅니다. 그러나 요셉은 거부되어 팔려갑니다. 그 후 기근이 닥쳤을 때에야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영접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도 처음 초림 때에는 이스라엘에게 거부되었지만 두 번째인 재림 때에는 영접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예수님을 보고 개종한 것과 똑같이, 요셉의 형제들이 기근 때에 요셉에게 절한 것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환란 때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면(겔43:2, 시50:2)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보고 영접하고 회심할 것입니다.

계 10:4 일곱 천둥이 음성을 내어 말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나서 내게 이르기를, 일곱 천둥이 말한 것들을 봉인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정말 까다로운 구절이 있다면 바로 이 구절인데 “일곱 천둥”은 아무도 기록하지 않은 어떤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자기가 거짓말을 가르치고 싶을 때 이런 애매한 구절로 시작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사탄은 여러분에게 요한복음 3:16, 1:12, 3:36, 로마서 10:9-10, 계시혹 3:20, 요한일서 5:10-12을 가지고 속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여러분에게 적용되지 않는 성경 구절을 동원하고 의심스럽거나 복잡하거나 까다로운 구절들을 항상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탄도 성경을 사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낸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일곱 천둥이 말한 것들은 봉인하고 기록하지 않았기에 아무도 모릅니다.

이 구절의 도움이 될 수 있는 구절은 시편 29편입니다.

 

계 10:5 내가 본 그 천사가 바다와 땅 위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고

바다와 땅 - 몇 개의 바다와 대양이 있는데 계시록 4장의 유리바다와 계시록 21장의 바다(이 두 바다는 같다.)를 제외하고 언급되는 바다는 지중해입니다. 이 모습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발은 팔레스타인 땅에 다른 발은 지중해에 두시는 것 같습니다.

 

계 10:6-7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 곧 하늘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신 분을 두고 맹세하되 더 이상 시간이 있지 아니하려니와 일곱째 천사가 음성을 내는 날들 곧 그 천사가 나팔을 불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 대언자들에게 밝히 드러내신 것같이 하나님의 신비가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천사가 한 발은 땅에, 한 발은 바다에 두고서 일곱째 천사가 소리를 낼 때 “하나님의 신비가 이루어지리라”고 선포합니다.

일곱째 천사는 계시록 11:15에서 나팔을 붑니다.

(계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있어 이르되,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었으니 그분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로다, 하니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문자적이고 물질적이고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세상 나라들을 인수하시기 위해 문자 그대로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게 이 땅에 오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일은 분명히 초림 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B.C.4000년 이후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왕국들”을 인수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 세상 왕국들은 현재도 사탄에게 속해 있습니다.(눅4:6, 고후4:4, 요12:31) 계시록 11:15까지 사탄의 지배는 계속 될 것입니다.

이 구절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의 왕들을 통치하기 위해 문자적이고 물리적이며 눈에 보이게 오실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결코 과거에 일어나지 않았으며 분명히 미래에 일어날 것입니다.

 

계 10:8 내가 하늘로부터 들은 그 음성이 또 다시 내게 말하여 이르되, 가서 바다와 땅 위에 서 있는 천사의 손 안에 펴 놓은 작은 책을 취하라, 하거늘

이 음성은 천사 위의 하늘에서 나는 음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침례 받으실 때에도 하늘에서 한 음성이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마3:17)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삼위 일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계 10:9 내가 그 천사에게 나아가 이르되, 그 작은 책을 내게 주소서, 한즉 그가 내게 이르되, 이것을 가져다가 먹으라. 이것이 네 배는 쓰게 할 것이나 네 입에서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이 작은 책은 어떤 책인지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계시록 5:1-5에서도 한 권의 책이 나오는데 정확하게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이 작은 책이 무슨 책인지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겔2:9, 3:3)

 

계 10:10-11 내가 그 천사의 손에서 그 작은 책을 가져다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는 꿀같이 달았으나 먹은 뒤에 즉시로 내 배가 쓰게 되었더라.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반드시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왕들 앞에서 다시 대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이 작은 책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의 말씀들이 내 입맛에 어찌 그리 단지요! 참으로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119:103)라고 하며 아모스는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은즉 누가 대언하지 아니하겠느냐?(암3:8)“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이 책을 먹었을 때 “꿀처럼 달았으나” 먹은 뒤에 “내 배가 쓰게 되었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고전3:2에서는 젖(milk), 눅4:4과 요6:35에서는 빵(bread), 히5:14에서는 단단한 음식(strong meat), 시119편에서는 꿀, 잠언에서는 “사과들”로 불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맛이 좋은 음식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달을 때는 달콤하고 기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말씀을 소화하고 실천하려 할 때는 박해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쓸”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대로 믿고 행동하면 사회로부터 배척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과 손잡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자” “교회의 분열을 일으키는 자”라고 배척 당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이상하고 독특하며 눈에 거슬리는 존재로 비쳐 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가족들도 “사랑이 없고” “비협조적”이며 “극단주의자”로 배척하며 반대하게 될 것입니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항상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골고다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식뿐인 “종교”는 오늘 날 세상에서 돈과 섹스 다음으로 위대하며 인기 있고 멋진 것입니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항상 관대하였고 권장되었고 인기가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결코 환영받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요한처럼 이 책을 먹는다면 입에는 달콤하지만(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이다!) 소화 될 때는 쓸 것입니다.

계시록 11 장

 

계시록 11장은 계시록의 중간 부분이며 계시록에서 가장 중요한 장입니다. 계시록 11장은 계시록의 열쇠인데 계시록은 구약의 열쇠이며 구약은 신약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계시록 11장은 성경 전체의 열쇠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닌 중요한 장입니다. 계시록 11장을 이해하는 열쇠는 여러분이 읽는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계 11:1 또 그 천사가 내게 막대기 같은 갈대를 주고 서서 이르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이 “막대기 같은 갈대”는 측량하는 막대입니다. 또 측량해야 할 “하나님의 전과 제단”은 계시록 8:3-5의 하늘의 성전이 아닙니다. 이 하나님의 전은 땅에 있는 전입니다.

 

계 11:2 전 밖에 있는 뜰은 내버려 두고 측량하지 말라. 이는 주께서 이것을 이방인들에게 주셨음인즉 그들이 이 거룩한 도시를 마흔두 달 동안 발로 짓밟으리라.

이방인들에게 주어지고 이방인들이 42달 동안 짓밟을 이 실제적인 전은 이 땅에 있는 전이고 이 땅에 있는 제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전이 세워질 것이며 전 경배가 미래에 다시 재개될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이미 이스라엘의 성전 건축준비위원회가 성전 건축과 성전 경배를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입니다. 다만 성전터라고 추정되는 곳에 회교 사원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성전 건축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전 제사를 위한 제단, 물대야, 빵상, 촛대, 향제단, 향로, 기타 모든 집기들을 모두 제작하였으며 성전을 지을 모든 자재도 모두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레위인들을 선발하여 제사장 교육을 마쳤으며, 제사장들을 정결하게 하는 제물로 드릴 붉은 암송아지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땅위에 성전이 세워지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 땅위에 언제라도 세워 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현재 신문과 매스컴에 보도된 사실들입니다.

이방인들이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을 이 전은 A.D.70년에 파괴된 헤롯 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A.D.70년 파괴된 헤롯 전은 뜰이 넷인데 여기 세워질 전은 뜰이 하나이며 A.D.70년 헤롯 전은 마흔 두 달 동안 짓밟히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계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능을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대언하리라.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능을 주리니 - 이렇게 말하는 분은 계시록 10:1,9,11의 천사인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에서 마흔 두 달은 일천이백육십 일인데 삼년 반입니다. 성경의 한 달은 삼십 일이며 일년은 삼백육십일입니다.

 

계 11:4 그들은 땅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나무요, 두 등잔대니

두 증인(두 올리브나무)에 대하여는 많은 사사로운 추측들이 난무합니다. 로마 카톨릭은 첫째 증인은 성경이고 둘째 증인은 외경이라고 주장합니다. 몰몬교는 첫째는 성경이고 두번째는 “몰몬경”이라고 주장합니다. 유대인들은 첫째 증인이 구약성경이고 둘째 증인은 “탈무드”라고 주장합니다. 안식교인들은 성경이 첫째 증인이고 “성경의 열쇠”가 둘째 증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두 증인”은 “두 증인”이지 책들이나 열쇠가 결코 아닙니다.

스가랴서 4:11-14를 읽어보십시오.

그때에 내가 응답하여 그에게 이르되, 그 등잔대의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저 두 올리브나무는 무엇이니이까? 하고 또 내가 다시 응답하여 그에게 이르되, 두 금관을 통해 스스로 금 기름을 비우는 두 올리브나무 가지는 무엇이니이까? 하니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그것들이 무엇인지 네가 알지 못하느냐? 하매 내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이들은 두 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로 온 땅의 곁에 서 있는 자들이니라, 하더라.

두 증인은 “두 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이며(현재시제) “온 땅의 곁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현재 시제) 두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487년 전에 이 땅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스카랴서는 B.C.534-487에 쓰여졌음)

 

계 11:5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들의 원수들을 삼킬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이런 식으로 죽임을 당하리라.

“외경” “몰몬경” “탈무드“을 해치려고 하면 여러분을 삼킬 불이 나올까요?

이 두 의 기름부음 받은 두 증인은 모두 그들의 적들을 불로 소멸합니다.

(민 16:34 -35) 그들 주위에 있던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음이라. 께로부터 불이 나와 향을 드리는 이백오십 명을 소멸시켰더라.

이것은 모세가 코라, 다단, 아비람 자손들을 불로 소멸시키는 장면입니다.

(왕하 1:10) 엘리야가 오십인대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네 부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곧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살랐더라.

이것은 엘리야가 그를 잡으러 온 군사들을 불로 소멸시키는 장면입니다.

 

계 11:6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자기들이 대언하는 날들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들을 피로 변하게 하며 언제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모든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그들 중 첫째 증인은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자기들이 대언하는 날들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게” 합니다. (예언하는 날들은 11:3절에 의하면 42달입니다. 즉 삼년 반입니다.)

(왕상 17:1) 길르앗 거주민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내가 서서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있지 아니하면 이 몇 년 동안 이슬이나 비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약 5:17) 엘리야는 우리와 같이 동일한 성정(性情)의 지배를 받은 사람이로되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였고

둘째 증인은 “물들을 피로 변하게 하며 언제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보든 재앙으로 땅을 칠 수 있습니다.” (출4장, 7장을 읽어보십시오.)

이 사람은 의심의 여지없이 모세입니다.

이 두 증인은 책이 아니며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모두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온 땅의 주 곁에 서 있었습니다.(출33:11-23, 왕상19:9-13) 모세와 엘리야는 그의 적들을 불로 소멸하였습니다. 모세는 재앙으로 땅을 치고 엘리야는 삼년 반 동안 비를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시내산에서 사십 주야를 있었습니다.(출24:18, 왕상19:8) 모세와 엘리야는 그들의 사역을 계승한 사역자들(여호수아와 엘리사)이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둘 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나타났습니다.(마17장) 어떤 사람들은 이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야와 에녹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녹은 위의 조건들에 관련이 없습니다.

두 증인이 엘리야와 에녹이라는 주장하는 이유로 엘리야와 에녹은 둘다 죽지 않고 들림 받았지만 모세는 들림 받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모세는 두 증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실수입니다.

(신 34:5-6) 이와 같이 의 종 모세가 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으니라. 그분께서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그를 묻으셨으나 이 날까지 그의 돌무덤을 아는 자가 없더라.

모세를 장사지냈지만 사람들은 에녹의 흔적을 찾지 못했던 것처럼 모세의 묻힌 곳을 결코 찾지 못했는데 모세는 무덤에 머물러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 9) 그러나 천사장 미가엘도 모세의 몸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며 논쟁할 때에 감히 그에게 욕설로 비난을 하지 아니하고 다만 이르되, 께서 너를 꾸짖으시기 원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모세의 몸”(혼이나 영이 아닙니다!)이 미가엘과 마귀의 논쟁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무덤에 머물지 않고 죽음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마태복음 17장에서 변화된 예수님과 엘리야와 함께 영광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는 침례인 요한의 모습으로 이미 왔기 때문에 두 번째 증인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성경을 기록된 말씀 그대로 믿는다면 이것 역시 해결됩니다.

(마 17:9-11)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어날 때까지는 그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여쭈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은 반드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참으로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리라.

회복하리라”는 말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 단어는 항상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말입니다.(행3:20-21)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엘리야가 오리라는 것입니다.

(마 17:12-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다 그에게 행하였도다. 사람의 아들도 그와 같이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리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그분께서 자기들에게 침례자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위의 구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침례인 요한은 엘리야였다고 생각하므로 구약의 예언은 초림에서 모두 성취되었다고 간주하는데 이것은 부주의한 해석입니다. 이 구절을 자세히 보면 성취가 아니라 예언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리라. 그러나 “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분명한 반박을 보여주는 접속사입니다!

분명히 침례인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눅1:17) 왔으나 요한 자신은 유대인들이 요한에게 ”네가 엘리야냐?“고 묻자 ”나는 아니라“고(요 1:21)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주의 깊게 성경 구절들을 비교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는다면 전혀 모순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침례인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왔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행2-7장) 그리스도께서는 즉시 돌아오셨을 것이며 침례인 요한은 엘리야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행전 7장에서 돌아 오셨다면 구약의 모든 예언은 성취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은 재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사도행전 7장에서 돌아오실 것을 예견하시고 사도들에게 『그러나 이 도시에서 핍박하면 다른 도시로 도망하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이스라엘의 도시들을 다 다니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마10:23)』고 사도들의 사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이스라엘의 도시들을 다 다녔으나 사람의 아들은 오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부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재림을 연기하셨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도록(교회시대가 시작되도록 = 교회시대는 구약 선지자들에게는 숨겨져 있었습니다.)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기 때문에 엘리야의 재림도 훗날로 연기된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문자적으로 다루는 구절들은 500구절이상입니다. 만약 이 구절들을 초림에 적용하려면 억지로 영적인 해석을 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합니다. 초림과 재림 사이에 유일하게 빠진 것은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간 간격입니다. 이 시간 간격이 구약에서 가려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대언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있게 될 영광“(벧전1:9-12)사이의 시간 간격을 결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초림과 재림 사이에 주어진 시간 간격이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초림 때 재림을 기다렸으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초림 때에 문자적이고 물질적이며 눈에 보이는 이 땅의 왕국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셨으며 사도행전 7장까지 이스라엘에게 그 분이 주와 그리스도로서 선포되고 맞아들이도록 권장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스데반이 성령님에 의해 촉구하는 말에 귀를 막고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돌에 맞을 때 스데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오른 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는데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내려오실 수 있는 상황임을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 7장 이후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앉아 계신 모습으로 언급됩니다.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으셨으며 이 시간 간격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유대인들에게 주어 진 물리적이고 문자적이며 눈에 보이는 약속들(500개의 구절들)이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교회 시대후)에 일어 날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열쇠는 바로 11장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두 증인인 것을 확인하였다면 계시록은 열린 것입니다.

다시 확인해 보십시오.

모세와 엘리야만 시내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이 산에 계셨습니다.(마 4장, 눅 4장) 모세와 엘리야가 40주야를 머물던 그 산에서 예수님께서도 40주야를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계셨습니다. 모세는 요단 동쪽 피스가 산에서 죽었고 엘리야는 바로 모세가 죽은 그 산에서 들림 받았습니다. 모세가 그의 사역을 여호수아에게 위임을 하였으며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그의 사역을 위임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바울에게 예수님의 사역을 위임하셨습니다.(롬15:16) 모세의 사역자인 여호수아가 그의 사역에서 표적과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엘리야의 사역자인 엘리사가 엘리야가 행한 것과 같은 표적과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이방인을 향한 예수님의 사역자인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로서 표적과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증거들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롬15:16,18,19 참고.)

모세와 엘리야는 큰 환란 때 이 땅에 돌아 올 것이라는 사실은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헛된 말로 들릴 것입니다.

 

계 11:7 그들이 자기들의 증거를 마칠 때에 바닥 없는 구덩이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을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죽일 터인즉

7절에서 짐승이라는 인물이 나타납니다. 이 짐승은 바닥 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옵니다. 이 짐승에 대하여 “부활한 로마제국”이라고 하는 많은 경건하고 훌륭한 기독교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짐승”은 “부활한 로마제국”이 전혀 아닙니다. 여러분이 짐승의 통치가 열 명의 왕들과 함께 통치하는 것을 말할 때 짐승을 부활한 로마제국이라고 말 할 수 있지만 이 짐승 자신을 말할 때에는 바닥 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사람입니다.(로마제국이 바닥이 없는 구렁에서 올라올 수 있을까요?)

(계 13:18) 지혜가 여기에 있으니 지각(知覺)이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the number of the beast)를 세어 볼지니라. 그 까닭은 그것이 어떤 사람의 수(the number of a man)이기 때문이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그 짐승”의 수는 “어떤 사람”의 수인 것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짐승”은 “사람”입니다! 이 “짐승”은 다니엘 7장에서도 “사람”인 것이 확인됩니다.

(단 7:17) 그 네 큰 짐승은 네 왕이니 곧 땅에서 일어날 자들이라.

짐승은 사람이고 왕이며 바닥 없는 구렁에서 올라옵니다!

 

(계 9:11) 그것들에게 다스리는 왕이 있으니 곧 바닥 없는 구덩이의 천사라. 그의 이름은 히브리 말로는 아바돈이나 그리스 말로는 아폴리온이라 하더라.

이 왕은 천사이며 히브리어와 헬라어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짐승은 전에 이 땅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계 17:8) 네가 본 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요한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지금은 없으나(지금은 바닥 없는 구덩이에 있습니다) 앞으로 바닥 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이 짐승을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그대로 요약해 보십시다.

1. 이 짐승은 사람입니다.

2. 이 짐승은 바닥 없는 구덩이의 천사입니다.

3. 이 짐승은 바닥 없는 구덩이의 왕입니다.

4. 이 짐승은 히브리어(아바돈)와 그리스어(아폴리온)로 된 두개의 이름이 있습니다.

5. 이 짐승은 파괴하는 천사이며 사망과 지옥이 의인화 된 인물입니다.

6. 이 짐승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요한의 시대에 살았었고 지금은 바닥 없는 구덩이에 있으며 큰 환란 때 바닥 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올 것입니다!

이 “짐승”에 대하여 이것보다 더 확실하게 밝힐 수 있을까요? 이 “짐승”은 “부활한 로마 제국”이라는 가르침은 사사로운 해석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계시록 13장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전에 있었던 “짐승인 사람”에 대해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 밝혀 보십시다.

(요 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세상에 있을 때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켰나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내가 지켰고 “멸망의 아들” 외에는 그 중의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성경 기록을 성취하려 함이니이다..

이 구절에서 “멸망의 아들”은 분명히 가룟 유다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 것이 예언된(슥11:12-13) 바로 다음에 언급된 사람이 적그리스도인 것을 유의해 본적이 있으십니까?

(슥 11:15-17) 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한 어리석은 목자의 기구들을 네게로 취할지니라. 이는,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켜 세울 것임이니 그가 끊어진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어린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고 잠잠히 서 있는 자를 먹이지 아니하며 오히려 기름진 것들의 고기를 먹고 또 그 발굽들을 갈기갈기 찢으리라. 화 있을진저, 그 양떼를 버리는 “우상 목자”여! 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임하리니 그의 팔이 완전히 마르고 그의 오른쪽 눈이 완전히 어둡게 되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가룟 유다의 배반에 뒤이어 “우상목자(the idol shepherd)"인 적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보는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에 의해서 ”멸망의 아들(요17:12)“이라고 불립니다.

(살후 2:3)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背敎)하는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할 것임이라.

위의 구절에서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은 이 땅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인 사악한 자(살후2:8)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12에서 “멸망의 아들”은 “가룟 유다”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두 구절을 비교해 보면 마지막 “짐승”으로 나타날 적그리스도인 “멸망의 아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모른다면 소경이거나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마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6:70-7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선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마귀니라, 하시니라. 이것은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니 이는 그가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님을 배반하여 넘겨줄 자이기 때문이더라.

이 말씀은 너희 중에 하나에게 마귀가 들어가 있다가 아닙니다. 마귀가 변신해 있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너희 가운데 하나는 마귀니라”라는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그대로 믿음으로서 밝혀 진 것입니다. 무오한 성경을 통해 성령님께서 조명하여 주시는 그대로 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각자가 심판석에서 해명해야 할 일입니다. 성경 말씀에 한 점, 한 획, 한 단어만 빼거나 더 한다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석하여 믿을 수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더 하거나 빼거나 바꾸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지 깨달았다면 기록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것입니다.(계22:18-19)

이 마귀인 가룟 유다는 죽어서 지옥이 아닌 “자기 자신의 처소(his own place)"로 갔는데 가룟 유다는 그곳의 왕입니다.

(행 1:24-25) 그들이 기도하며 이르되,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구를 택하셨는지 보여 주사 그로 하여금 이 사역과 사도직을 맡게 하옵소서. 유다는 자기 자신의 처소로 가고자 하여 범죄함으로 그 직분에서 떨어져 나갔나이다, 하고

이 것은 제자들이 주님께 가룟 유다를 대신 할 사람을 ‘보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가룟 유다는 마귀였으며 사람처럼 걸어다녔고 말했으며 음식을 먹었고 죽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가룟 유다는 육신의 아버지가 있었으나 가인처럼 “사악한 자(wicked one)에게서 나왔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8에서도 적그리스도를 사악한 자(Wicked)라고 부르는데 이 인물은 사탄의 역사에 따라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는 적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처소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마귀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모방하여 온 세상을 속이는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증거들을 종합해 보십시다.

1. 이 땅에 “짐승”이라고 불리는 “한 사람”이 올 것입니다.

2. 이 짐승은 “남자”입니다.

3. 이 사람은 전에 요한의 시대에 이 땅에 살았었고 지금은 바닥 없는 구덩이에 있는데 이 사람은 사탄에 의해 잉태되어 육신이 된 마귀였습니다. 이 사람은 죽어서 “자기 자신의 처소로” 갔습니다.

4. 이 사람은 “멸망의 아들”로서 적그리스도와 동일시 됩니다.

5. 이 사람은 죽어서 “자기 자신의 처소로” 갔는데 그 곳은 지옥이 아니라 “바닥 없는 구덩이”입니다.

6. 이 사람은 지금 바닥 없는 구덩이에 있는데 그 곳의 천사이며 왕입니다.

7. 이 사람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아바돈이며 헬라어로 아폴루온인데 그 의미는 “파괴자” “멸망”입니다.

8. 이 사람은 “자기 때에” 바닥 없는 구덩이에서 나와 사탄이 직접 그 사람으로 육화할 것입니다.

9. 이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지성소에 앉아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며 인간 제물을 요구 할 것입니다.(계6장)

10. 이 사람(짐승)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증인이 될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 앞에서 증거했던 것처럼, 엘리야와 엘리사가 아합에게 증거했던 그대로 두 증인이 나타나서 이 “짐승”에게 증거할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성경의 열쇠가 계시록이며 계시록의 열쇠가 계시록 11장이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하여 성령님께서 조명하여 주신 위의 사실들을 믿을 수 있다면 성경의 대부분은 열린 것입니다.

계 11:8-9 그들의 시체가 그 큰 도시의 거리에 놓이리니 그 도시는 영적으로 소돔과 이집트라고 하며 또한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들과 언어들과 민족들에서 나온 자들이 그들의 시체를 사흘 반 동안 구경하며 그들의 시체를 무덤에 두지 못하게 하리로다.

그들의 시체가(their dead bodies) - 두 증인들의 죽음을 표현하는데 죽음(dead)이라는 표현으로도 두 증인의 죽음을 표현할 수 있는데도 “그들의 죽은 몸들(their dead bodies)"이라고 특별하게 표현한 이유는 몸이 목과 분리되어진 것을 나타내기 위한 신중한 표현입니다. 계시록 6장에서 환란 때 죽임 당한 자들의 죽음은 계시록 20:4에서 목 베임 당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증인의 시체는 몸과 목이 분리 된 목베임 당한 죽음인 것을 특별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엘리야와 모세는 이 땅에 돌아와서 목베임을 당해 죽을 것입니다! 이것은 죽지 않고 들림 받았던 엘리야가 죽을 것임을 말하며 비스가산에서 죽었던 모세가 또 다시 죽을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한 구절을 모순처럼 보이게 합니다.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들이 두 증인이 엘리야와 에녹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이 구절을 교리로 붙들고 에녹과 엘리야는 결코 죽지 않았기 때문에 환란 때 돌아와서 죽음으로서 히브리서 9:27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27은 한번의 죽음을 말하는 절대 확실한 교리가 아닙니다. 성경은 계시록 20장에서 “두 번째 죽음(second death)"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두 번 죽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사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지만 다시 늙어 죽었습니다.(요11:39-44) 이외에도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7:11-15) 야이로의 딸(마9장, 막5장, 눅8장) 도르가(행9장) 수넴성 여인의 아들(왕하4장)등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나 두 번째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한번 죽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9:27은 사람들에게 한번의 일반적인 죽음이 있다는 것을 비교하기 위한 것입니다.

(히 9:27-28)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as),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so)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헌물로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 문제와 상관없이 두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

이 구절은 “한 번 죽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으며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인류)에게 정하신 것처럼(as)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한번의 죽음이 있는 것을 비교한 것이지 절대 교리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많은 사람이 두 번 죽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모세도 이 사람들처럼 두 번 죽을 것입니다. 에녹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유형입니다.(전혀 죽음을 맛보지 않는 이 사람들이 고전15:55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도시는 영적으로 소돔과 이집트라고 하며 - 환란 때 예루살렘은 더 이상 거룩한 도시가 아니라 음란하기는 소돔과 같고 세상의 유형인 이집트 같다고 합니다.(렘23:14, 겔16:46 참고) 그러나 이 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다시 “거룩한 도시”가 될 것입니다.

사흘 반 - 계시록 11:2, 3, 9, 11을 읽어보십시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카톨릭의 전통을 따라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니엘 9장에서도 적그리스도가 그 주의 중간(three and a half)에 약속을 깨뜨리는 것을 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의 중심에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계셔야 했습니다.(마12: 40) 예수님께서는 그 주의 중간에 죽으셨는데 그 때는 수요일 정오입니다.

마가복음 11장부터 16장까지 살펴보면 종려주일 아침(첫째 날 즉 일요일)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셔서 수요일 오전 9시에 못 박히실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저녁이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 후 다음 날(화요일) 이틀 후면 유월절(막14:1)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다음 날인 목요일이 일반적인 안식일이 아닌 절기 안식일인 유월절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흘 낮과 사흘 밤이 지난 후인 일반적인 안식일인 토요일이 지난 후 일요일에 부활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예수님께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의 중심 속에 있었다고 기록하였다면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계신 것입니다. 그것을 변경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흘 반 후에 못 박혀 죽으셨고 두 증인도 사흘 반을 죽는데 두 증인도 땅에 “사흘 반”을 죽은 채로 누워 있을 것입니다.

 

계 11:10 이 두 대언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고통을 주었으므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그들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내리라 - 이때가 크리스마스를 말하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 할 수 없으나 충분히 가능성은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지중에 성경의 표현을 빌려옵니다. 세계적으로 기뻐하며 선물을 보내는 때는 유일하게 크리스마스 때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12월 25일은 결코 아닙니다. 12월25일은 바알의 생일이며 이집트의 이시스여신의 아들 생일입니다. 12월 25일은 태양신과 아스타롯, 달의 여신인 “하늘의 여왕”의 숭배의 날로 오래 전부터 지켜 온 날입니다.(자세한 것은 “두 개의 바빌론”을 읽어보십시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 중 누구도, 초기 기독교의 폴리캅이나 이그나티우스의 사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을 지켰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생일”을 지키는 것은 바알 숭배자들의 관습 중에 하나입니다. 생일을 기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어느 곳에서도 단 한번도 어떤 사람의 생일을 기념한 적은 전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부정하게” 태어나며 죄로 죽은 아담에게서 태어나는 것을 기뻐하고 기념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에 의해 영이 거듭난 날은 기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기를 원하셨다면 성경에 명확히 밝히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일을 밝히시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신 여러분의 구세주로서 기억하고 증인이 되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을 추정한다면 장막절(Tabernacles)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육신을 장막(tabernacles)이라고 하며(고후5:1-4)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tabernacled) "우리 가운데 거하셨으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양들이 들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월 25일 탄생하셨다는 최초의 언급은 3세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의 “조직”(stromata)에서 나타납니다.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의 학파를 오리겐과 유세비우스에게 인계하여 준 사람입니다. 바로 이 오리겐과 유세비우스에 의해 이혼증서(Biblion Apostasion)인 “바티칸 사본”이 완성되었으며 이 사본에서 ASV와 RSV등이 만들어졌습니다.(개역 성경도 이 사본에서 나왔습니다.)

 

계 11:11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의 영께서 그들 속에 들어가시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에게 큰 두려움이 임하더라.

생명의 영(Spirit of life) - 계시록 4:5에서는 하나님의 일곱 영, 계시록 3:13에서는 영(Spirit)으로 언급됩니다. 성령에 대한 이러한 호칭의 변화는 이 기간이 교회시대의 기간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는 “영(Spirit)"이나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으로 불리지만 신약에서는 “성령(Holy Spirit)" 또는 성령님(Holy GHost)으로 불려졌기 때문입니다. 환란기간에는 다시 구약의 율법이 다시 지켜지기 때문에 “영(Spirit)"이나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으로 다시 불려집니다.

11절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의 영”이 두 증인에게 들어갈 때 두 증인의 목이 잘린 시체가 일어서고 그들의 머리가 불쑥 나타나 몸에 붙는 것은 무섭기도 하고 만화 같은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런 장면을 ”구경하는 자들에게 큰 두려움이 임하는”것은 당연합니다.

 

계 11:12 이 두 대언자가 하늘로부터 자기들에게 큰 음성이 나서, 이리로 올라오라,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구름 속에서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이 그들을 바라보더라.

이 구름은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의 승천하실 때, 마태복음 17장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나타날 때, 그리스도의 재림 때, 계시록 14:15-16에서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름”을 휴거 당하는 “사람들의 떼”로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휴거”를 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휴거”는 죽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는 휴거가 아니며 살아있는 성도들이 “눈 깜짝하는 순간에” 들림 받아서 아무도 볼 수 없는 휴거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9-11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눈에 보이게 하늘로 들림 받아 올라가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휴거”입니다. 이 휴거는 신약 성도들의 휴거가 아닙니다. 이 휴거는 환란 성도들의 휴거입니다. 이 구절의 문맥이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었으니 그분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실 때”인 계시록 11:15의 “이리로 올라 오라”의 문맥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 휴거는 “이 세상 왕국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는 때”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는 때는 일곱째 천사가 소리를 낼 때인데 이 때는 환란의 끝입니다. 초림 때에는 어떤 왕국도 우리 와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환란 후 휴거는 그 성격과 목적이 “이스라엘”이 대상이지 교회의 휴거가 아닙니다. 이 휴거는 마태복음 24:31에서도 언급되는데 이 휴거는 분명히 환란 후에 일어납니다. 마태복음 24장,25장은 큰 환란 때의 문맥인데 많은 교회들이 교회시대에 적용시켜서 개인의 구원과 연결하여 가르치는 실수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마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성결교나 감리교에서 가르치듯이 사람의 삶의 끝이 아닙니다. 사사로운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삶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로 읽습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개인의 삶의 끝”이 아니라 “어떤 시대의 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대는 마태복음 24:21, 29에서 “그 때에 큰 환란이 있으리니” “그 날들의 환란 뒤에”라고 설명하며 그 시대가 어느 때인지를 확실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기간은 환란이라고 불리는데 이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아니라 왕국 복음(gospel of the kingdom)이 전해집니다.(마24:14) 그리고 환란 때에는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받습니다.(마24:13) 이 왕국복음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마2:2, 27:11,37)으로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하신 복음인데 이 복음에는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와 이적이 포함되며(마4:23. 9:35) 대상은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수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방인들의 길로도 들어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어떤 도시로도 들어가지 말며 오직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 가면서 선포하여 이르되,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라.”(마10:5-7)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 번의 휴거는 계시록 4:1을 참고하십시오.

 

계 11:13 바로 그 시각에 큰 지진이 나서 그 도시의 십분의 일이 무너지더니 지진으로 죽은 사람이 칠천이더라. 그 남은 자들이 놀라며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

환란 끝에 가서 구원받는 사람들도 있지만 땅에 남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휴거 되지 못했지만 의롭게 된 사람들인데 마태복음 25:1-10에서 완벽한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꺼진 등불을 위해 기름을 사라고 듣는 사람들과 구원을 얻기 위해 일하는 종들과 일하지 않아서 지옥에 가는 자들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선을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환란 때의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천년왕국에서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이 “행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믿고 방주를 만들어서 구원받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율법과 상관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세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교회시대에는 행위와 무관하게 나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큰 환란 때에는 믿고 행위로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받습니다. 천년왕국 때에는 믿음이 없이 행위로 산상 설교를 지켜야 구원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공부”하지 않는다면(딤후 2:15) 재림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재림을 제대로 알게 되었을 때에 마태복음 24장,25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는 신약에서 매우 어려운 책들입니다. 이 책들의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의 내용으로만 믿고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의 왕의 복음으로부터 신약으로의 전환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문자적인 왕국으로부터 거듭난 성도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왕국”까지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신약 교회시대에서 환란으로 들어가는데 이 환란에서 하나님은 “영적인 유대인들”이 아닌 “히브리인들”, 실제적인 유대인들과 교제를 새롭게 하십니다.

 

계 11:14-15 둘째 화는 지나갔으니,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임하는도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있어 이르되,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주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었으니 그분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로다, 하니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나라들을 영적으로 영원히 통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왕국들이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된 적은 없습니다. 이러한 일은 초림 때에 일어 난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신학교에서는 이 세상의 왕국들(한국, 일본, 중국,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소련, 브라질, 멕시코 등등)이 AD33년부터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왕국들이었으며 지금도 한국, 일본, 중국,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소련, 브라질, 멕시코를 통치하고 있으며 또 영원히 통치 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세상의 왕국들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따라 주어진 것은 사실입니다.(롬13:1) 땅과 사람과 짐승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보이는 자에게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이십니다.

(렘 27:4-6) 그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의 주군(主君)들에게 말하게 하기를, 만군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너희 주군들에게 이같이 말할지니라. 나는 나의 큰 권능과 나의 펼친 팔로 땅과 지면에 있는 사람과 짐승을 만들고 나 보기에 합당한 자에게 그것을 주었노라. 이제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내어 주었고 또 들의 짐승들도 그에게 주어 그를 섬기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유대인을 죽이고 미워하고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성경을 거부하는 느부갓네살도 하나님께서 “내 종”이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귀적인 인물들에게도 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권세를 위임하시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뜻 안에서 세상을 지배하는데 느부갓네살, 네로, 히틀러, 교황 바울, 메리 여왕 같은 사람들에게 그의 권세를 넘겨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귀를 “이 세상 통치자”(요12:31)와 “이 세상 신”(고후4:4)이라고 부르며 이 세상 왕국들은 마귀에게 넘겨져(눅4:5-6)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 마귀와 그의 수하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에서 명예와 권세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마귀에게 복종하여 사는 것입니다.

(눅 4:5) 또 마귀가 그분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순식간에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보여 주며

위의 구절에서 마귀는 어떤 형태로든지 “하나님의 왕국”이나 “천국”을 보여 준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문자적이고 물질적이며 정치적인 눈에 보이는 왕국들을 말한 것입니다.

(눅 4:6) 그분께 이르되, 이 모든 권능과 이 왕국들의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그 까닭은 그것이 내게 넘겨졌으므로 누구든지 내가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줄 것이기 때문이니

마귀에게 “넘겨 진 것”은 “하나님의 왕국”이 아닙니다. “천국”도 아닙니다. 마귀에게 넘겨 진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왕국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왕국들”은 결코 예수님께 속하지 않았으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마귀를 멸하시고 이 세상 왕국들은 인수하시기 전까지는 마귀에게 넘겨진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어서 그 분이 ”영원 무궁토록 통치하실 것“입니다. 이 통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통치가 아닌 실제적이고 정치적인 눈에 보이는 통치입니다.

 

계 11:16-17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리에 앉아 있던 스물네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이르되, 오 주 하나님 전능자여,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오실 주께 우리가 감사를 드림은 주께서 친히 주의 큰 권능을 취하시고 통치하셨음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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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절에서 환란은 끝나고 15절에서 천년왕국 기간으로 이동되었습니다. 그리고 16-17절에서 천년기간의 통치가 언급되고 18절에서 흰 보좌 심판이 언급됩니다.

주의 큰 권능을 취하시고 통치하셨음이니이다 - “스물 네 장로”가 말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천년통치를 뒤돌아보고 있습니다.(시제를 유의하십시오.) 11:15절에서 천년 통치를 시작하시고 11:17절에서는 천년 왕국의 통치는 과거로 언급이 됩니다.

계 11:18 민족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이르고 죽은 자들의 때가 이르렀으니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요, 또 주께서 주의 종 대언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보상을 주려 하심이요, 또 땅을 멸하는 자들을 멸하려 하심이니이다, 하더라.

민족들이 분노하매 - 이 구절은 계시록 20:8-9에서의 반역인데 천년 왕국후에 이 마지막 전쟁은 천년 동안 갇혀 있던 사탄이 감옥에서 잠깐 풀려났을 때 있는 민족들의 반역입니다.

주의 진노가 이르고 - 이 구절은 계시록 20:9인데 하나님께로부터 불이 내려와 모든 것을 순식간에 삼켜 버립니다.

죽은 자들의 때가 이르렀으니 - 이 구절은 계시록 20:11-12인데 흰 왕좌 심판석입니다. 이 흰 왕좌 심판석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아닙니다.(롬14:10. 고후5:10) 그리스도의 심판석은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심판이지만 흰 왕좌 심판석에서는 구원받지 못한 창세 이후의 모든 사람들이 심판 받으며 “주의 종 대언자들과 성도들이 보상”을 받는 심판입니다.

주께서 주의 종 대언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보상을 주려 하심이요, 또 땅을 멸하는 자들을 멸하려 하심이니이다, 하더라. -

이 보상들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지 “주의 이름을 믿는 것“도 ”거듭나는 것“도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것이 환란 복음입니다.

(계 14:6-7) 또 내가 보니 다른 천사가 하늘 한가운데로 날아가는데 그가 땅에 거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족속과 언어와 백성에게 선포할 영존(永存)하는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들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라, 하더라.

환란 성도들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환란 때 구원받는 사람들은 흰 보좌 심판석에서 심판 받는데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기 때문에 보상받고 또 환란 성도들의 죽음은 구원의 일부입니다. 환란 성도들은 “어린 양의 피로 그들의 옷을 씻었습니다.” 환란 성도들은 “주의 이름을 두려워” 하였으며 “끝까지 견디었기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은 환란 성도들의 구원이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요소가 포함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란 시대의 성도들은 행위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시대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행위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갈2;16, 엡2:8-9)

 

계 11: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전이 열리니 그분의 전 안에 그분의 상속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들과 음성들과 천둥들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다시 환란의 상황으로 되돌아갑니다. 이 일들은 계시록 6:12-14과 계시록 16:21에서 환란의 끝을 묘사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계시록 12 장

 

여러분은 계시록이 환란을 네 번 설명하고 있으며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적을 알고 계십니다. 이 세 구분에서 교회시대가 1-3장에, 환란이 4-19장에. 20-22장에서 천년기간과 새 하늘, 새 땅이 묘사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구분이 하늘이 두 번 열리는 사실로 구분되는데 계시록 4장에서는 어떤 사람이 올라가고 계시록 19장에서는 어떤 분이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계시록을 기록할 때 세 가지 시제로 기록하라고 들었는데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이후에 있을 일”입니다.(계1:19) 요한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유형인데 환란 전에 들림 받은 후에 곧 이어 이 땅에 환란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환란은 “다니엘의 70째 주” 또는 “야곱의 고난의 때”로 불립니다. 계시록은 이 때에 일어나는 일들을 네 번 연속해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록한 사 복음서가 있듯이 환란도 네 번을 각각 다른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봉인들”로 6장에서, 두 번째는 “나팔들”로 11장에서, 세 번째는 “적그리스도의 활동과 사역”으로 14장에서, 마지막은 “대접들”로 19장에서 끝이 납니다.

계시록 12장에서 다시 환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삼년 반의 기간이 이 장에서 다시 주어집니다. 계시록 12:6절과 12:14절에서 이 여자가 계시록 11:3절처럼 “일천이백육십일”,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즉 삼년 반 동안 부양되는 것을 봅니다. 계시록 11장부터 14장은 삼년 반의 개관인데 11장은 두 증인의 사역을 중요하게 다루며 12장은 환란 때 이스라엘의 상황을 다룹니다. 그리고 13장은 환란 때 이 땅에 돌아오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다루는데 이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로마 카톨릭에 의해 선전되고 알려진 ”그리스도“입니다. 이 ”그리스도“는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친숙한 모습인 붉은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지고 산상 수훈을 제시하며 나타나는 신비적이고 전설적인 ”그리스도“입니다.

계 12:1 하늘에 큰 이적(異蹟)이 나타나니 한 여자가 해로 옷 입고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 위에는 열두 별의 왕관이 있더라.

여기에 로마 카톨릭이 “하늘의 여왕”인 마리아라고 가르치는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여러분은 “동정녀 마리아”가 해와 머리에 별들이 있고 달을 밟고 서 있는 그림을 보았을 것입니다. 1920년 교황 피우스에 따르면 마리아가 지금 하늘에 있는데 그 근거는 바로 계시록 12:1입니다. 이런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은 “권위있고 절대 확실한 가르침”으로 믿지 않는다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이 여자가 “마리아”인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계 12:2-6 이 여자(마리아)가 아이(예수님)를 배어 해산의 고통을 겪는 중에 울부짖으며 출산하려고 진통을 겪더라.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나타나니, 보라, 큰 붉은 용이 있는데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머리들 위에 일곱 왕관이 있더니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내던지더라. 용이 막 해산하려고 하는 그 여자(마리아) 앞에 서서 여자의 아이(예수님)가 태어나면 곧 삼키고자 하더라. 여자(마리아)가 사내아이(예수님)를 낳으니 이 아이는 장차 철장(鐵杖)으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자라. 그녀(마리아)의 아이(예수님)가 채여 올라가 하나님께 이르고 그분의 왕좌에 이르더라. 그 여자(마리아)가 광야로 도피하매 거기에 하나님께서 그녀(마리아)를 위하여 예비하신 한 처소가 있으니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녀(마리아)를 먹여 살리게 하고자 하심이라.

계 12:13-17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사내아이를 낳은 그 여자(마리아)를 핍박하더라. 그 여자(마리아)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았으니 이것은 그녀(마리아)로 하여금 광야 곧 자기 처소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얼굴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게 하려 함이라. 뱀이 자기 입에서 여자(마리아)의 뒤에 물을 홍수같이 내뿜어 여자(마리아)를 홍수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마리아)를 도와 자기 입을 벌려 용이 그 입에서 내뿜은 홍수를 삼키니 용이 여자(마리아)에게 진노하여 그 여자(마리아)의 씨 중에 남은 자들 곧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전쟁을 하려고 나아가니라.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낳습니다.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것”은 2절에서는 해당됩니다. 그러나 3, 4, 6, 14, 17절에서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신학교에서는 이 여자를 “교회”라고 가르칩니다.

이것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계 12:2-6 이 여자(교회)가 아이(예수님)를 배어 해산의 고통을 겪는 중에 울부짖으며 출산하려고 진통을 겪더라.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나타나니, 보라, 큰 붉은 용이 있는데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머리들 위에 일곱 왕관이 있더니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내던지더라. 용이 막 해산하려고 하는 그 여자(교회) 앞에 서서 여자의 아이(예수님)가 태어나면 곧 삼키고자 하더라. 여자(교회)가 사내아이(예수님)를 낳으니 이 아이는 장차 철장(鐵杖)으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자라. 그녀(교회)의 아이(예수님)가 채여 올라가 하나님께 이르고 그분의 왕좌에 이르더라. 그 여자(교회)가 광야로 도피하매 거기에 하나님께서 그녀(교회)를 위하여 예비하신 한 처소가 있으니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녀(교회)를 먹여 살리게 하고자 하심이라.

계 12:13-17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사내아이를 낳은 그 여자(교회)를 핍박하더라. 그 여자(교회)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았으니 이것은 그녀(교회)로 하여금 광야 곧 자기 처소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얼굴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게 하려 함이라. 뱀이 자기 입에서 여자(교회)의 뒤에 물을 홍수같이 내뿜어 여자(교회)를 홍수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교회)를 도와 자기 입을 벌려 용이 그 입에서 내뿜은 홍수를 삼키니 용이 여자(교회)에게 진노하여 그 여자(교회)의 씨 중에 남은 자들 곧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전쟁을 하려고 나아가니라.

이 여자가 교회라면 구약의 율법으로 주어진 십계명을 지키는 교회가 있을까요? 계시록 12:17을 보면 이 여자의 씨들은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킵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롬6:14) 교회는 십계명 대신 새로운 명령들을 받았습니다.(요14:21, 15:10-18) 교회가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명령들이지 “하나님의 명령들”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켜서” 영생을 얻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시록 12:17에서 이 여자의 씨 중에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갖습니다. 이것은 확실하게 교회 시대의 구원받는 방법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 여자가 누구이든지 이 여자의 씨들은 믿음과 행위가 필요한 것을 다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계14:12 참고) 이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쓴 야고보서 2:24에서 읽듯이 ”믿음과 행위“입니다.

“이 여자”는 “마리아”도 아니고 “교회”도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 스스로 하는 분석이며 성경 스스로의 판단입니다. “그 여자”가 누구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낳아야 하고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로 도망가야 하며 거기에서 삼년 반 동안 부양 받아야 합니다.

이 여자에 대한 해석은 성경 스스로가 단 하나의 실수도 없이 밝혀 줍니다.

(창 37:9) 요셉이 또 다른 꿈을 꾸고 그 꿈을 자기 형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보소서,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경의를 표하더이다, 하니라.

요셉은 꿈을 꾸고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꿈을 말합니다. (계12:1과 창37:9의 유일한 차이는 별들의 수입니다. 계12:1은 열두 별인데 창37:9은 열한 별입니다.)

(창 37:10) 그가 그 꿈을 자기 아버지와 형들에게 고하매 그의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이 꿈이 도대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하니라.

이 구절에서 “해”는 그의 아버지 야곱(이스라엘)을 상징으로 말하며 “달”은 요셉의 어머니 라헬을 상징으로 말하며, “별들”은 요셉의 형제들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스스로 해와 달과 별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놀랍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계시록 12:1에서 “해와 달과 열두 별”로 옷입은 여자가 누구인지 이미 아셨을 것입니다. 그 “여자”는 재론의 여지가 없이 “이스라엘”입니다. 성경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글을 읽고 읽은 그대로 믿기만 한다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다만 마음이 닫혀 있고 읽기 쉬운 글도 믿지 않는다면 스스로 판 구덩이와 올무에 걸리게 될 뿐입니다.

이 여자가 어떻게 광야로 가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호 2:14-15)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녀를 끌어당겨 광야로 데리고 가서 그녀에게 위로하는 말로 이르고 그때에야 비로소 그녀의 포도원을 그녀에게 주며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주리니 그녀가 거기서 노래하기를 어렸을 때와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던 날에 하던 것 같이 하리라.

이 문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것인데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던 날에 하던 것같이 이 여자를 광야로 데려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광야로 데려간다는 말을 계시록 12:6,14에서 반복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의 모습을 성령께서 어떤 모습으로 설명하시는지 보십시오.

(신 32:11) 독수리가 자기 둥지를 휘저으며 자기 새끼 위에 너풀거리고 자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으며 자기 날개 위에 그들을 업는 것같이

계시록 12장의 여자는 성경 스스로 “이스라엘”인 것을 밝혀주었는데 “이스라엘”은 “여자”라고 불리며 “여자”는 “이스라엘”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교회는 항상 “신부”나 “아내”나 “처녀”로 언급되지 “여자”로는 언급되지 않습니다.(고후11:2, 계21:9 참고)

 

계 12: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의 고통을 겪는 중에 울부짖으며 출산하려고 진통을 겪더라.

이 여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낳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의 유다 지파에서 나셨습니다.(히7:14) 그리고 예수님은 “여자의 씨(seed of woman)", "아브라함의 씨(seed of Abraham)", "다윗의 씨(seed of David)"로 불립니다. 마리아를 통한 예수님의 인간적 혈통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씨인데 그래서 이스라엘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낳는 것“입니다.

 

계 12: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나타나니, 보라, 큰 붉은 용이 있는데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머리들 위에 일곱 왕관이 있더니

붉은 색은 항상 피를 상징하는데 여기에서 붉은 용이 나옵니다. 이 용은 계시록 12:9에서 그 정체가 확인되는데 『저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상을 속이는 자라』고 합니다.

붉은 용은 사탄이며 마귀이며 “용”이라고 불리는데 사람들은 용은 실제 있는 동물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그리스와 중국의 신화에 “용들”을 등장시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용은 신화에나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믿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계시록에 나오는 용도 상상의 동물이므로 계시록은 비유적이고 묵시적이고 애매한 것이라고 믿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용은 마귀이며 사탄이며 옛 뱀이며 온 세상을 속이는 자입니다(계12:9). 여러분이 성경에서 “용(dragon)”이라고 읽을 때 그것은 실제로 “용(dragon)”을 뜻하는 것입니다.

“용(dragon)”의 정체를 상세히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루시퍼는 “기름부음 받은 덮는 그룹”이었지만 타락해서 “붉은 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붉은 용인 루시퍼가 나타날 때는 빛의 천사(고후11:11-14)로 가장한 33세의 남성으로 나타납니다. 사탄은 타락한 천사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사탄은 결코 천사가 아니며 그룹입니다. 사탄이 나타날 때 빛의 천사로 가장하여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사탄은 그룹이어서 날개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어떤 천사도 날개가 없으며 날개는 천사와 관계가 없습니다. (천사에 관하여는 계시록 12:4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습니다.) 루시퍼인 사탄의 현재 모습은 날개 달린 그룹이 아니라 “붉은 용”입니다. 사탄이 “빛의 천사”로 나타날 수 있지만 이 것은 속임수이며 거짓 출현입니다. 현재 타락한 사탄의 모습은 “붉은 용”인데 “리워야단”이라고 불립니다. 리워야단의 히브리어는 “꼬여 있는” 또는 “감겨 있는”의 뜻인데 그래서 리워야단은 일곱 머리 달린 꼬이고 감겨 있는 바다 괴물입니다.

이 단어의 영어 낱말은 용(DRAGON)입니다!

이 “붉은 용”의 모습은 욥기 41장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욥 41:1) 네가 낚시바늘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늘어뜨린 줄로 그의 혀를 끌어낼 수 있겠느냐?

“리워야단”이라는 말은 국제 표준성경백과사전(I.S.B.E.)에 “리워야단”을 “하마”나 “악어”로 규정하였는데(3권,1869p) 고명하신 학자들은 쉬운 성경도 읽지 못하는 무능력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 학자들이 “하마”나 “악어”로 규정한 이유는 시편 74:14에서 『리워야단의 머리들(heads)을 산산조각 내시고』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학자들은 “리워야단”이 하나 이상의 머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지나친 것입니다. “하마”나 “악어”는 머리가 하나이지만 여러분은 계시록 12:3에서 “붉은 용”이 일곱 머리임을 읽었을 것입니다.

또한 리워야단을 바다괴물로 생각하는 이유는 갈고리가 언급되기 때문인데, 고기를 낚을 때 갈고리를 내려놓듯이 이 리워야단도 큰 고기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사 27:1) 그 날에 께서 자신의 매섭고 크고 강한 칼로 꿰뚫는 뱀 리워야단 곧 구부러진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계12장처럼)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계12장처럼)

“리워야단”은 “구부러진 뱀”이며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는 붉은 용”입니다. 이 “리워야단”은 바다에 있는데 이 바다는 땅에 있는 바다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지중해 바다, 갈릴리와 사해 바다가 아니면 계시록 4장의 유리바다를 말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바다는 리워야단이 있는 바다에 비교하면 물 한 방울에도 비교되지 않습니다.(천문학자들이 북쪽 하늘에서 2억광년의 크기의 물층을 발견하였는데 그곳의 틈에서 나오는 빛이 얼마나 밝은지 태양 빛은 그 빛에 비하면 커튼에 묻은 파리똥 정도라고 합니다.) 욥기 41:31에서는 이 바다를 “깊음”이라고 부르며 창세기 1:2, 7:11, 8:2, 욥기 28:14,38:16, 시편 33:7, 42:7. 69:15, 77:16, 107:26, 135:6, 이사야서 51:10, 63:13 에스겔서 26:19, 요나서 2:3,5.에서도 언급되는 창세기 1:7의 “창공 위의 물”입니다. 이 “창공 위의 물”인 이 깊음의 표면은 절대 0도(영하28315도)로 얼어 있어 분자 활동이 정지되고 시간이 멈춘 곳입니다. 이 바다 위에 하나님의 왕좌가 있는데 요한은 이것을 유리바다(계4:6)혹은 불로 뒤섞인 유리바다(계15:2)라고 묘사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왕좌가 있는 곳에 올라가 그 곳의 모습을 묘사하였기 때문에 어느 시대의 과학 정보보다 더 확실한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왕좌는 물들을 경계로 두르셨는데 그 곳은 낮과 밤이 끝나는 곳(욥26:10)이라고 합니다.(시간이 멈춘 영원세계입니다!) 이 깊음의 표면은 절대 0도로 얼어 있어 분자 활동이 정지되고 시간이 멈춘 곳입니다.(욥38:30) 표면이 얼어있는 이 바다를 유리 같은 하늘이라고도 말합니다.(욥37:18) 이 바다 속을 붉은 용인 리워야단이 헤엄쳐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욥 41:31-32) 그 깊음을 솥이 끓는 것같이 끓게 하며 바다를 향유 단지같이 만드는도다. 그가 자기 뒤에 길을 만들어 빛나게 하니 사람이 생각하기에 깊음이 백발 같다 하리라.

이 리워야단은 깊음을 끓어 넘치는 솥처럼 만들면서 헤엄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백발같다(hoary)《은하수(milky way)》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리워야단의 크기는 최소한 태양계보다 몇 배는 클 것입니다.

(욥 41:9-10) 보라, 그에 대한 소망은 헛되나니 사람이 그를 보기만 해도 낙심하지 아니하겠느냐? 아무도 감히 그를 흥분시킬 만큼 사납지 아니하거든 과연 누가 능히 내 앞에 설 수 있겠느냐?

리워야단은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사람이 그를 본다면 기가 질려 버릴 것이고 여러분이 사탄 앞에 설 수 없다면 분명히 하나님 앞에도 “서지” 못할 것입니다.

(욥 41:19 -21) 그의 입에서는 타는 등불들이 나오고 불꽃들이 튀어나오며 그의 코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끓는 솥이나 가마솥에서 나오는 것 같도다. 그의 호흡은 숯불을 지피고 그의 입에서는 불꽃이 나오며

여기 담배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는 것에 대해서는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입으로 불을 피우고 코로 연기를 뿜는 것은 사탄인 붉은 용의 현재 모습입니다. 욥기 41장의 문맥은 사탄의 현재 모습입니다. 숨을 들이쉬어서 불을 피우고 코와 입으로 연기를 뿜어내는 모습은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과 똑 같습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을 닮을 것이고 마귀의 아들은 그의 아비를 닮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귀를 닮는 것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욥 41:33) 땅 위에는 그처럼 생긴 것이 없나니 그는 두려움 없는 존재로 만들어졌느니라.

리워야단이 하마나 악어가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땅 위에는 그처럼 생긴 것이 없나니

그리고 하마나 악어는 사람을 보고 두려워 피합니다. 그러나 이 인물은 두려움을 모릅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인데 이 인물은 두려움을 모르는데 “땅위에는 그처럼 생긴 것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이 리워야단은 두려움 없는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례하게 하나님의 왕좌 앞에 나아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리이까?”(욥1:9)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두려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욥 41:34) 그는 모든 높은 것을 바라보는 자요, 모든 교만한 자녀들을 다스리는 왕이니라.

리워야단이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의 왕좌입니다. 리워야단은 모든 교만한 자녀들의 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대로 믿지 못하고 자신이 하나님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교만한 자녀들은 결코 기록 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리워야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대적하는 교만한 자들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현재 모습은 창공 위에 있는 바다인 깊음을 헤치며 다니고 있는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는 붉은 용입니다!

사탄은 일곱 개의 왕이나 왕관들로 계획된 왕국 체제로 이 땅을 지배합니다. 붉은 용은 뿔이 열 개지만 왕관은 일곱인데 각 머리에 하나씩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위대한 진리를 가져오는데 성경은 자체적으로 일곱 머리와 일곱 왕의 모습으로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나타나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두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일곱 머리는 일곱 로마 황제가 아닙니다. 이 일곱 왕과 열 개의 뿔은 성경에 선명하게 이름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사용한 첫 번째 머리는 창세기 10장에서 나타납니다.

(창 10:9) 그가 앞에 강력한 사냥꾼이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아무개는 앞에서 니므롯같이 강력한 사냥꾼이로다, 하였더라.

니므롯은 아담의13대 자손으로 구스의 아들인데(6절) 구스는 아프리카 흑인으로 에디오피아인입니다. 니므롯의 히브리어의 의미는 “얼룩진”, “점이 박힌”이며 시리아어로는 “점박힌 피부를 갖다”입니다. 니므롯은 앗시리아인으로도 불립니다.(사23:13)

(창 10:10) 그의 왕국은 시날 땅에 있는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네에서 시작되었으며

10은 이방인의 숫자인데 이방인은 아담의 10대 후손인 노아에게서 유래합니다. 최초의 이방왕국이 창세기 10:10에서 시작됩니다.

출애굽기 10장에서 모세가 이방인 파라오 다루기를 끝냅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이 열립니다. 로마서 10장에서 이방인들에게 선교하도록 초청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이방인 문둥병자가 치료받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이 우리(유대인)에 속하지 아니한 다른 양인 이방인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7진법을 사용하시지만 이방인들은 10진법을 사용합니다. 마지막 이방왕국은 10명의 왕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탄의 첫 번째 머리는 바벨론 왕 니므롯인데(B.C.2400년경) 이 자는 적그리스도의 첫 번째 유형입니다. 니므롯은 혼혈이었고 함족이며 흑인이었는데 니므롯으로 인하여 바벨의 혼란이 시작됩니다. 니므롯이 처음 세운 도시가 시날 땅의 “바벨”입니다.

두 번째 머리는 이집트 왕 파라오(B.C.800년까지)인데 두 번째로 세상을 지배합니다. 이집트는 세상의 유형이고 파라오는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의 이름인 “용”으로 불립니다.(겔29:3)

(출 5:2) 파라오가 이르되, 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음성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가게 하겠느냐? 나는 를 알지 못하며 이스라엘도 가게 하지 아니하리라, 하매

(겔 29:3)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이집트 왕 파라오야,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네 강들 한 가운데 누워 있는 큰 용이라.

“리워야단”의 세 번째 머리는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B.C.606년까지)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앗시리아인”이라 불리는데 적그리스도의 유형인 앗시리아 왕 산헤립이 적그리스도가 환란 때 유대인들을 전멸시키려는 것처럼 예루살렘을 침공하러 오는 것을 봅니다.(왕하18-19장, 역대하32장)

네 번째 머리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B.C.536년까지)인데 다니엘서 3장에서 나타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앗시리아 왕 산헤립은 이집트 왕 파라오와 마찬가지로 “용들”로 불리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렘51:34, 37. 50:17-18)

다섯 번째 머리는 페르시아 왕 다리오(B.C.330년까지)입니다. 바벨론을 따라 나오는 왕국은 메데와 페르시아인데(단5:28-31) 메디아인 다리오가 왕국을 취합니다. 다리오는 이스라엘의 친구인데 이것은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친구가 될 것이지만 후에 계약을 파기하고 돌변할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머리는 그리스 왕 알렉산더(B.C.100년까지)입니다. 다니엘은 그리스가 알렉산더대왕 아래서 권력을 잡기 수백년 전에 다음 왕국이 그리스일 것을 다니엘 10:20, 11:2, 8:20-21에서 예언했습니다. 알렉산더의 이름이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여섯 번째 머리는 알렉산더 대왕이 분명합니다. 다니엘서에서 “거친 숫염소”라고 불리는데 그리스 왕이라고 불리며 신비의 인물입니다.(단8:21)

마지막 일곱 번째 머리는 자연히 그리스왕 알렉산더를 쳐부수고 세상을 지배하여 주님의 초림을 예비하는 왕국인 로마 제국의 카이사 아우구스토(A.D.346년까지)입니다.(눅2:1) 이 왕국은 “신성(거룩한) 로마제국”이라 불립니다. 사탄의 일곱 번째 머리인 로마 제국은 이 세상 왕국들을 지배하려는 정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A.D.346년 신비의 종교형태로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종교체제인 로마 카톨릭 교회가 또한 정치적인 바티칸 국가인 이유입니다. 이 카톨릭교회는 “신성(거룩한)로마 제국”처럼 자신들의 교회를 “거룩한 카톨릭”(Holy Catholic)이라고 부릅니다.

〈Cat 의 기본 어근의 뜻은 “mother"입니다. 성경에서 Cat(고양이)라는 단어는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Cat - Holy, Cat -holic, Holy - Cat. Holy Mother〉

더 이상의 머리는 없는데 예수님께서 사도행전 7장에서 재림하셨다면 구약의 모든 예언은 성취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거부로 재림은 연기되었고 천국은 신비의 형태로 감추어졌으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이 열리고 교회 시대가 열리고 신약 성경이 기록되었습니다. 교회는 구약의 대언자들에게는 전혀 계시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에베소서 3장에서 바울에게 처음으로 계시된 것입니다. 교회가 들림 받으면 곧 주님의 재림은 다시 준비될 것인데 재림 때에는 초림 때처럼 로마가 권력을 잡고 온 세상을 다스릴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서 27:1, 계시록 12장, 욥기 41장, 시편 74편은 모두 강력한 영적인 존재를 다루고 있는데 이 존재는 과학자들이 전혀 밝힐 수도 없고 믿을 수 없는 영적인 세계에서 활동하는 실제적인 존재입니다. 과학자들은 원자의 구조는 중성자와 전자, 양자로 되어 있다고 하며 또 이것들은 더 작은 입자인 쿼크라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쿼크의 활동을 넘어서면 과학이 전혀 알지 못하는 영적 세계의 작용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작용에 대하여 절대 확실한 권위있는 말씀이며 유일한 최고의 과학 교과서입니다.

붉은 용은 영적인 존재이지만 붉은 용의 지리적 위치는 깊음을 헤엄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땅에서는 종교적인 황동을 하면서 물의 위 아래, 즉 하늘(창공)을 헤집고 다니고 있기도 합니다.

 

출처 : 나눔의 블로그
글쓴이 : 나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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